책으로 책하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분열'에 해당되는 글 3건

제목 날짜
  • '병맛' 주인공의 성장, 대립, 분열, 연대, 모험 이야기 <워리어 넌> 2020.08.17
  • 진짜로 보여주려는 것은 슈퍼 히어로 개개인의 찌질한 이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2016.05.20
  •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간단히 톺아보기 2015.10.25

'병맛' 주인공의 성장, 대립, 분열, 연대, 모험 이야기 <워리어 넌>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8. 17. 15:20
728x90



[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 포스터. ⓒ넷플릭스



7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아남아 사지마비 상태로 보육원에서 자란 에이바 실바, 20살 되던 해 어느 날 불분명한 이유로 죽고어 수녀원으로 옮겨진다. 그날, 수녀원에 용병 집단이 쳐들어와 수녀 전사(워리어 넌) 리더 섀넌이 죽고 만다. 그들이 찾던 건 섀넌의 등에 박힌 헤일로, 신비한 힘의 원천으로 수녀 전사들의 비밀 집단 '십자검 결사단'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보물이다. 섀넌이 죽는 현장까지 적이 쳐들어오자, 전투 수녀들은 대항하고 수녀 한 명이 급히 헤일로를 숨기기 위해 죽은 에이바를 이용한다. 


헤일로의 힘으로 되살아난 에이바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수녀원을 탈출한다. 수녀원은 발칵 뒤집히고 어쨌든 헤일로를 뒤찾고자 에이바를 쫓는다. 한편, 아크 테크라는 기업의 수장이자 천재 과학자 질리언 샐비어스는 바티칸 기록보관원 출신 크리스천의 조언을 받아 양자 역학으로 영적 세계로 가는 다리를 만들고자 한다. 실상은 아픈 아들을 아프지 않은 세계로 보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교황청과 전쟁을 선포하며, 헤일로와 함께하게 된 에이바와 이어진다. 


에이바는 사지가 멀쩡하게 다시 태어난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고, 에이바를 쫓는 수녀원 내부는 세력 다툼으로 파가 갈라진다. 뒤가 구린 추기경의 명을 듣고 에이바를 죽여서 헤일로를 가져와 전통 있는 헤일로 운반자로 하여금 맡게 하자는 파가 있었고, 수녀원을 담당하는 신부와 함께 몇몇 수녀 전사들은 에이바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게 우선이고 헤일로 운반자의 운명을 받아들인다면 그녀를 수련시키면 된다는 파가 있었다. 각자의 복잡다단한 입장들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이야기의 행방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죽음에서 깨어나 힘과 책임을 짊어지게 된 여성의 성장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이하, '워리어 넌')는 죽음에서 깨어나 막강한 힘과 책임을 짊어지게 된 어린 여성의 성장을 다룬다. 아울러,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 다뤄지며 교황청 내 세력 다툼에 휘둘리는 십자검 결사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흥미가 동할 설정임에 분명한대, 상당히 상이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짜맞출지 기대도 되지만 조마조마함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이런 설정에서 어린 여성의 성장은 대체로 그녀가 속한 조직과 조직이 속한 선의 세계가 승리하는 과정에 일조하는 것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내적 성장이라기 보다 외적 성장이랄까. 특히, 그동안엔 여성으로서 외적 성장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선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결국 외적 성장도 뒤따르겠지만, 정녕 지루하다고 느낄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고 내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에이바는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워리어 넌의 비밀 집단 십자검 결사단 리더로서 헤일로의 운반자 칭호와 의무를 받아들이는 데 관심이 없다. 그녀는, 살아생전 사지마비로 힘겨운 삶을 살았고 다시 태어나 훨훨 날아다닐 정도로 자유롭고 기분이 좋을 뿐이다. 만끽하는 게 우선이다. 이후, 수녀원과 아크 테크의 회유 및 협박 및 위협 등을 통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알고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충분하고도 넘칠 만한 고민과 한쪽으로서는 배신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하고는 돌고 돌아 길을 정한다. 이제까지의 성장 스토리와는 결이 다른 진짜 현실적인 성장 스토리, 괜찮다 싶었다. 


욕망이 대립이 선사하는 선 같은 악, 악 같은 선


종교와 과학의 대립과 교황청 내 세력 다툼을 다루기에 앞서, 작품 속 헤일로의 역사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1000여 년 전 용맹한 여전사이자 최초의 전투 수녀로 신의 믿음으로 끝없는 전투에서 큰 공을 이루며 싸우던 와중 죽음을 맞이한 아레알라, 천사 아드리엘이 강림해 천사의 링 헤일로로 그녀를 부활시킨다. 반면, 아드리엘은 영원한 삶을 포기했다. 이후, 전투 수녀 비밀 집단 십자검 결사단이 꾸려져 헤일로를 지켜 후세로 전하기 위한 처절한 활동이 계속되는 것이다. 


천사의 링 헤일로를 몸 안에 심고 특별한 힘과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살아가는 운명의 십자검 결사단 리더이자 헤일로 운반자, 문제는 많은 이가 헤일로를 원한다는 점이다. 짧은 시간밖에 현존하지 못하지만 너무나도 막강한 힘으로 십자검 결사단을 위협하는 악마 타라스크, 종교에의 믿음으로 약속받은 세계로 가는 다리를 막강한 에너지와 함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아크 테크, 십자검 결사단의 보수적 전통을 지키고자 하지만 동시에 그 조직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은 권력을 이용해 개인적 영달을 추구하는 추기경. 


와중에, 진짜 악마가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선과 악이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악마 타라스크에겐 추악한 욕망이 보이지 않는 반면, 아크 테크 수장에겐 아픈 아들을 아프지 않은 세계로 데려가고자 하는 추악하다고 할 수 없는 욕망이 있다. 그런가 하면, 확신할 순 없지만 추기경은 세속적 권력과 개인적 영달으로 뒤가 구린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선 같은 악, 악 같은 선. 


주인공의 성장과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분열과 연대


자못 유치해 보이지만 자못 진지한 분위기의 작품을 확실히 풀어주는 이가 주인공 에이바이다. 그녀는 '병맛'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생각지도 못할 타이밍에 던져,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 짓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요즘 드라마구나' 하는 생각이 따라오게 만드는데, 눈쌀을 찌뿌리게 하지 않고 외려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에이바로 분한 알바 밥티스타의 매력이 큰 몫을 차지하지 않나 싶다. 그녀를 보다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을 지우기 힘든데, 10여 년 전 앳된 제니퍼 로렌스가 겹쳐진다. 앞날이 기대되는 배우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마라 시리즈 표준인 10화에 다다르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작품임에도 확실한 전개와 마무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스토리가 앞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시원시원하게 진행되지 않고, 에이바라는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체적 설정의 형성 과정과 설명에 상당 부분 투자했기 때문이다. 즉, 시리즈를 절대 시즌 1으로만 끝내지 않을 거라는 담대한 포부를 밝힌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주 괜찮게 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어린 여성의 성장 스토리가 중심이 되는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저주받은 소녀>가 공개되었는데 이 작품이 주인공의 굴곡지지만 직선적인 여정을 중심에 두고 외롭지만 강인한 성장을 다루는 반면, <워리어 넌>은 주인공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성장의 여정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워리어 넌'으로 불리는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분열과 연대를 아우르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이 시대에 어울리는 적확한 스토리와 메시지 그리고 충분하고도 넘칠 다양한 재미를 선사하기에 볼 만하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과학, 교황청, 병맛, 분열, 선악, 성장, 십자검 결사단, 여성, 연대, 워리어 넌: 신의 뜻대로, 종교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진짜로 보여주려는 것은 슈퍼 히어로 개개인의 찌질한 이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6. 5. 20. 08:00
728x90



[리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포스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기대를 많이 했다. '마블 역사상 최고의 영화'라는 수식어가 개봉 전부터 난무했다. 얼마전 개봉한 DC '배트맨과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저조한 평가와 흥행을 완벽히 대체해줄 초대형 블록버스터 오락물임이 분명했다. 또한 '어벤저스 팀'에서 토르와 헐크가 빠진 대신 스파이던맨과 앤트맨이 합류해 전혀 새로운 조합이 탄생할 것을 기대했다. 


결정적으로 '내부 분열'이라는 소재도 흥미로웠다. 아이언맨으로 대표되는 '정부군'과 캡틴 아메리카로 대표되는 '반정부군'의 대립이 당연히 아이러니하게 다가와 전에 없는 궁금증을 유발했다. DC의 <다크나이트>나 마블의 <엑스맨>처럼 선악 구도를 탈피한 빅히어로들의 진지한 고민과 방향을 논할 거라 생각했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액션은 물론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이하 "시빌 워")는 그 의도는 좋았지만 마지막으로 치달수록 그 훌륭함이 사라졌고 반면 액션과 긴박함은 좋았다. 다만 보는 관점에 따라 '마블 역사상 최고의 영화'라 칭할 수 있겠다. 그러기 위해선 한층 더 깊이 들어가 감독의 의도를 봐야 한다. 


슈퍼 히어로 어벤저스팀의 내부 분열


<시빌 워>는 어벤저스 팀을 대표하는 두 축인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고뇌에서 시작한다. 먼저 캡틴 아메리카는 어김 없이 동료들과 함께 악을 처단하기 위해 출동해 동네방네 휘저으며 상대하고 있었다. 그건 일상다반사라 그렇다 쳤지만, 우두머리 격을 처리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를 입히게 된다. '뜻하지 않은 실수'였다. 캡틴 아메리카와 동료들은 이 문제로 괴로워한다. 


한편 아이언맨은 사업 설명회를 마치고 나왔을 때 누군가와 마주친다. 그녀는 아이언맨이 악을 처단하기 위한 성전에 참여했을 당시 그 여파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당한 아이의 엄아였다. 아이언맨은 전에 없는 고민에 휩싸인다. 


그런 그들 앞에 국무장관이 찾아와 난데 없는 '슈퍼 히어로 등록제'를 들이민다. 어벤저스의 악 처단 성전이 너무 무분별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그들의 행동이 가져온 선의의 피해자들이 너무 많이 속출한다는 이유였다. 일면 합당한 이유가 있는 셈인데, 이로 인해 어벤저스는 반대하는 캡틴 아메리카 팀과 찬성하는 아이언맨 팀으로 분열한다. 결국 법에 저촉되는 캡틴 아메리카 팀을 아이언맨 팀이 쫓는 모습이 된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한 장면. 난데 없는 '슈퍼 히어로 등록제' 출현에 분열하는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시빌 워>는 어벤저스 팀이 반드시 부딪힐 문제를, 풀어야 할 숙제를, 비록 힘들지만 짚고 넘어가는 모습을 취한다. <엑스맨>이나 <다크나이트>처럼 자신들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보다 철학적이고 고차원적인 모습 말이다. 문제는 그 모습이 분열 과정에서만 조금 격렬하게 보여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복수와 개인적인 우정으로 치환된다. 분명 소중한 것이긴 하겠지만, 우주까지 뒤흔들 만한 어벤저스의 존재를 뒤흔들 만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액션은 <캡틴 아메리카> 특유의 투박하고 박진감 넘치고 오밀조밀하기까지 한 면을 잘 살렸다. 거기에 '선의의 피해자들 속출'을 의식한 듯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한 초대형 전투가 없어 장점이 극대화 되었다. 토르와 헐크가 빠지고 스파이더맨과 앤트맨를 합류시킨 건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 없었지만 적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들은 <시빌 워> 액션의 화룡정점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캐릭터 간의 갈등과 고뇌가 깊어야 했다. 캡틴 아메리카 팀이 도망을 다니면서까지 모두를 위한 일을 하려 하는데, 그게 어느 순간 친구 버키를 위한 것이 되면 안 되었다. 버키가 아버지를 죽였다고 확신하는 블랙 펜서의 순수한 개인적 복수심이 아이언맨 팀의 '슈퍼 히어로 등록제' 찬성의 논리와 함께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서 영화 중반에는 버키가 사건의 중심이 되버린 듯한 인상이었다. 영화의 논점을 흐리면서 산으로 가기 쉬운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한 장면. 캐릭터 간의 갈등과 고뇌가 더 깊어야 했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진짜로 보여주려는 것은 슈퍼 히어로 개개인의 찌질한 이면?


그런데 영화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영화가 조금은 달리 보인다. 어벤저스 팀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출발했지만, 결국은 히어로 각각의 존재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팀을 논할 수 없지 않을까. 


결국 그들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없을 출중한 능력을 지녔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의적으로 목숨 바쳐 세계를 구하지만, 그들도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인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려는 것이 '슈퍼 히어로 등록제'를 둘러싼 팀의 분열과 대립이 아닌 슈퍼 히어로 개개인의 찌질한(?) 이면이었다면, 영화는 충분히 찬사를 받을 만한 지점에 도달한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도 그 둘을 이어주는 끈이 빈약한 건 사실이다. 그 끈은 다름 아닌 버키인데, 쉴드의 숙적 히드라가 만든 비운의 존재이자 캡틴 아메리카의 친구이다. 그가 누명을 쓴 가운데, 캡틴 아메리카 팀은 그의 뒤에 더 큰 무엇이 있다는 걸 알고 그와 함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아이언맨 팀이 쫓고. 그 와중에 버키를 둘러싼 개인적 원한과 우정이 대결한다. 


이 영화에 용두사미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 같고, 앞과 뒤는 좋은데 가운데가 부실해 보인다. 그 때문에 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앞에 비해 가려진 것이리라. 그것이 앞에 비해 덜 철학적이고 덜 히어로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시빌 워>는 조금 독특한 시선으로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마블 사상 최고의 작품'이란 수식어가 완벽히 와 닿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이다. 어벤저스 팀에 대한 진정한 고민은, 즉 이 영화에서 진짜로 말하고자 했던 바가 아니었던 바로 그 문제는 다음 편에 나올 거라 예상해본다. 그런 면에서 <시빌 워>는 전초전이었다. 그때 비로소 어벤저스 팀의 운명이 판가름날 것이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한 장면. 어벤저스 팀에 대한 진정한 고민은, 다음 편에 나올 것 같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갈등, 마블, 복수, 분열, 슈퍼 히어로 등록제, 시빌 워, 아이언맨, 액션, 캡틴 아메리카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간단히 톺아보기

생각하다 2015. 10. 25. 15:03
728x90



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너무나 적었건만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줄기 햇살, 가까운 들판, 한줌의 평온과 한 쪽의 빵,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동냥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 주머니 단추를 풀기 귀찮아서 그러듯이. 결국 내가 원한 것들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적막한 내 방에서 홀로 서글픈 심정으로 글을 쓴다. 그리고 정말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의 목소리가 혹시라도 수많은 목소리들의 본질, 수많은 삶들이 열망하는 자기표현, 그리고 일상에 매인 운명, 부질없는 꿈과 가능성 없는 희망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영혼들의 인내심을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사실을 의식하는 순간 나의 심장은 힘차게 고동친다. 삶이 고양될 때면 더욱더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종교적인 힘, 일종의 기도, 절규가 느껴진다. 그러나 자각은 나를 제자리로 되돌리곤 한다...... 도라도레스 거리의 건물 사층 방에 있는 나를 졸린 상태에서 본다. 무언가를 반쯤 써내려간 종이 위로 아름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삶과, 닳아빠진 압지 너머 손을 뻗어 재떨이에 비벼 끄려던 싸구려 담배가 보인다. 여기 이 사층 방에 있는 내가 삶에 대해 묻고, 영혼이 느끼는 바를 말하고, 천재나 유명 작가라도 되는 듯이 글을 쓰고 있다니! 여기, 내가, 이렇게!......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문학동네 펴냄)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텍스트 6의 전문입니다. 한없이 우울하죠. 그리고 불안하기 그지 없습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작가의 작품인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접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100년의 시간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같은 시대,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네요. 


첫 문장부터 가슴을 후벼 팝니다. 그리고 극히 공감이 가고요. 내가 원했던 건 정말 작은 건데 그것마저도 얻을 수 없다니요. 우울하지만 역사에 남을 대문호도 이런 심정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하는 군요. 물론 그가 느낀 바와 우리가 느낀 바는 차원이 다른 것일 수 있겠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질감을 느끼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아랫 부분에서는 불안과 함께 분열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서글프다가, 생의 강력한 힘을 느끼다가도, 다시 울적해지며 자격지심이 듬뿍 담긴 생각을 합니다. 그러며 마지막에는 '나'에 대한 자각을 보이기도 하죠. 이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두루 보이는 모습과 일치해요. 앞엣것보다 조금은 더 고차원적일 수 있을 겁니다. 존재에 대한 것이니까요. 


천천히... 천천히... 읽어보고 싶은 책입니다. 그의 생각에서, 그의 삶에서, 이 책에서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건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께도 해당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공감, 나, 분열, 불안, 불안의 책, 우울, 존재, 페르난두 페소아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블로그 이미지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by singenv

공지사항

  • 댓글에 대한 공지
  • [책으로 책하다 도서 목록]
  • <오마이뉴스> 서평/리뷰 송고 방침
  • 모든 이미지는 인용 목적으로 사용⋯

    최근...

  • 포스트
  • 댓글
  • 트랙백
  • '삶'이라는 거대한 벽, 풀리지 않⋯
  •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살린 그,⋯
  • 홀로 이편에서 슬픔의 나락과 절망⋯
  •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두 거대 인맥⋯
  • 역사에 길이 남을 연쇄 살인마 '요⋯
  • 더 보기
  • 감사합니다~ 시즌3를 기대하고 있⋯
    singenv ㆍ 2020
  • 재미있게 읽었어요 지금 시즌2 보⋯
    개구리 ㆍ 2020
  • 감사합니다! 맞구독합니다~
    singenv ㆍ 2020
  • 구독과 하트 누르고 갑니다 맞구독⋯
    아마추어 리뷰어 ㆍ 2020
  •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래 전 서평⋯
    singenv ㆍ 2020

태그

  • 아포리즘
  • 캐릭터
  • 성장
  • 삶
  • 제2차 세계대전
  • 인간
  • 청춘
  • 일본
  • 넷플릭스
  • 욕망
  • 현실
  • 재미
  • 소설
  • 중국
  • 죽음
  • 피해자
  • 희망
  • 연기
  • 만화
  • 미국
  • 여성
  • 관계
  • 전쟁
  • 영화
  • 천재
  • 사랑
  • 책으로 책하다
  • 역사
  • 책
  • 가족

글 보관함


  • 2021/01
    (9)

  • 2020/12
    (13)

  • 2020/11
    (11)
«   2021/01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링크

카테고리

다양한 시선 (1412)N
신작 열전 (603)N
신작 도서 (303)
신작 영화 (300) N
넷플릭스 오리지널 (132)N
모모 큐레이터'S PICK (36)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오래된 리뷰 (202)
생각하다 (231)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그대 그리고 나 (17)
서양 음악 사조 (8)
인권 선언 문서 (4)
조선경국전 (5)
중국 영화사 개괄 (5)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카프카의 편지 (6)
팡세 다시읽기 (14)
명상록 다시읽기 (12)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감독과 배우 콤비 (10)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궁극의 리스트 (8)
제9의 예술, 만화 (14)
독립영화의 힘 (4)
생생 스포츠 (10)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첫 문장-아포리즘 (8)

카운터

Total
2,071,727
Today
71
Yesterday
164
방명록 : 관리자 : 글쓰기
singenv's Blog is powered by daumkakao
Skin info material T Mark3 by 뭐하라
favicon

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 태그
  • 링크 추가
  • 방명록

관리자 메뉴

  • 관리자 모드
  • 글쓰기
  • 다양한 시선 (1412) N
    • 신작 열전 (603) N
      • 신작 도서 (303)
      • 신작 영화 (300) N
    • 넷플릭스 오리지널 (132) N
    • 모모 큐레이터'S PICK (36)
    •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 오래된 리뷰 (202)
    • 생각하다 (231)
      •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 그대 그리고 나 (17)
      • 서양 음악 사조 (8)
      • 인권 선언 문서 (4)
      • 조선경국전 (5)
      • 중국 영화사 개괄 (5)
      •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 카프카의 편지 (6)
      • 팡세 다시읽기 (14)
      • 명상록 다시읽기 (12)
    •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 감독과 배우 콤비 (10)
      •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 궁극의 리스트 (8)
    • 제9의 예술, 만화 (14)
    • 독립영화의 힘 (4)
    • 생생 스포츠 (10)
    •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 첫 문장-아포리즘 (8)

카테고리

PC화면 보기 티스토리 Daum

티스토리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