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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거짓'에 해당되는 글 7건

제목 날짜
  • 도망치고 싶은 진실과 선의에 가 닿은 거짓, 그 사이에서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2019.11.15
  • '쇼'로 양산된 싸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피해자... <안개 속 소녀> 2018.12.05
  •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 <제0호> 2018.11.12
  •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리플리> 2016.08.19
  •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건 '거짓' <이반 일리치의 죽음> 2016.05.02
  • <더 헌트> 집단은 진실, 개인은 거짓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11) 2015.03.16
  • <호밀밭의 파수꾼> 위선과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픈 소년의 방황(6) 2014.11.06

도망치고 싶은 진실과 선의에 가 닿은 거짓, 그 사이에서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넷플릭스 오리지널 2019. 11. 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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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포스터. ⓒ넷플릭스



알렉스 18세, 사고로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는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완전한 백지 상태. 그가 기억하는 건 오직 하나, 쌍둥이 형제 마커스이다. 마커스는 알렉스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알려주고 가르친다. 특히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재건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평범한 부모님의 중산층 가정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돌아가신다. 알렉스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상하면서도 충격적인 사진을 발견한다. 알렉스와 마커스의 어린 시절 해변에서 나체로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머리 부분이 잘려나가고 없었다. 알렉스는 낌새를 느끼고 마커스에게 물었고, 마커스는 진실의 끄트머리를 건넨다. "우리가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 성 학대를 받았어." 


믿기 힘든 충격적 진실에 한 발 다가간 알렉스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마커스에게 형용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낀다. 그가 자신의 기억과 삶을 조작한 것이다. 하지만 마커스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알렉스에게 새로운 삶,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어 그가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선의의 거짓말과 끔찍한 진실 중 무엇이 옳은 것일까? 어떤 걸 선택할 것인가? 


천당과 지옥, 행복과 불행을 오가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는 넷플릭스에서 선보인 오리지널 다큐멘터리로, <이단아(Black Sheep)>로 올 2019년 아카데미 단편다큐멘터리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에드 퍼킨스 감독의 작품이다. 영국인이라는 점과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는 걸 빼면 그에 대해 아는 건 전무하다시피 한데, 이 작품만 보아도 그의 출중한 실력은 간파할 수 있겠다. 작품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한다. 


기억을 잃은 알렉스와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은 마커스, 이 쌍둥이의 이야기가 작품의 전체를 차지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흥미진진하기까지 하다. 기억, 거짓, 진실의 키워드가 건드리고 자극하는 인간의 말초적 본성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작품에는 확고한 높낮이가 존재한다. 천당과 지옥, 행복과 불행을 오간다. 만들어진 천당과 행복, 지울 수 없는 지옥과 불행.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명백하다. 그들이 해야 할 일도 명백하다. 진실을 목도하고 신뢰를 회복해 진짜 나를 찾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어렵다.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누구라도 충격적이고 어둡고 파멸적인 진실을 들여다보는 건 못할 짓이다. 설령 그게 반드시 행해져야만 하는 일일지라도. 목도하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실의 목도를 위한 힘든 결정


작품은 그들의 힘든 결정과 진실의 목도를 함께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서 성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궁극적으로 나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의 진실, 평범하고도 행복하게 조작된 알렉스가 진짜 자신을 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결정. 그리고 알렉스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 자신을 위해 진실을 조작했던 마커스가 있다. 그는 진실로부터 도망쳐 잊고 싶었다. 


새삼 '기억'이라는 것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삶을 구성하는 절대적 요인인 기억, 기억의 층이 켜켜이 쌓여 삶을 이루고 나를 이룬다. 하여 내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건 오직 기억에 의해서만이다. 작품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Tell me who am I)>라는 제목으로, 소아 성애자 어머니의 성 학대라는 추악하고 끔찍한 사실보다 그 사실을 숨기고 행복한 기억으로 조작한 마커스와 당한 알렉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다. 


문제는, 보는 내내 나조차도 알렉스보다 마커스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억을 완전히 잃은 이에게 과거의 충격적 진실을 전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새로운 삶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는 마커스의 말이 절절하면서도 생생하다. 물론, 올바르지 않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안다.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하고 삶을 탈바꿈시키는 건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잘못이기에. 


진실과 거짓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가 선택한 건 '진실'이다.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이 흐를 텐데. 형용할 수 없는 지옥의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알렉스, 모두를 위해 심지어 어머니를 위해서도 진실을 무덤까지 지니고 가는 게 맞겠지만 진실을 말하는 게 올바른 거라고 깨달은 마커스. '거짓'보다 진실인 것인가. 그 선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작품에서 진실은 다른 그 어디도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한다. 알렉스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바로 그 진실인 것이다. 알렉스의 단짝이자 파트너이자 반쪽인 쌍둥이 형제 마커스가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많은 시간이 흘러서라도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작품은 잃어버린 기억, 쌍둥이의 거짓, 충격적 진실이라는 퍼즐을 갖고 세 파트(알렉스, 마커스, 알렉스 & 마커스)로 나뉘어 진행된다. 


안타깝지만 흐뭇해졌다가 눈쌀이 찌뿌려지곤 등골이 오싹해진다. 결국엔 눈시울이 붉거지며 깊은 한숨을 내려놓는다. 그러며 하염없이 그들을 위로하고 응원한다. 마치 나를 위로하고 내 가족을 응원하는 것처럼. 이 길지 않은 다큐멘터리는 거대하고도 묵직한 무엇을 던지고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는 나름대로의 확고한 결정을 내린다. 비록 보는 사람도 너무나도 아프고 아리지만 함께 진실을 목도해야 한다. 알렉스와 마커스도 그것을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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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결정, 기억,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오, 넷플릭스 오리지널, 진실, 천당과 지옥, 행복과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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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로 양산된 싸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피해자... <안개 속 소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2. 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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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안개 속 소녀>


영화 <안개 속 소녀> 포스터. ⓒ미디어 마그나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 분)은 사고를 일으킨 채 하얀 셔츠에 피를 묻히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경찰은 정신 감정을 위해 정신과 의사 플로렌스(장 르노 분)을 부른다. 보겔은 플로렌스에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의 전말을 들려준다. 


외딴 산골 마을, 성탄절을 이틀 앞둔 새벽 한 소녀가 사라진다. 박수만 몇 번 쳐도 주민들이 나와서 쳐다볼 정도로 조용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정도로 밀접한 동네이기에 그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도시에서 수사를 하러온 형사 보겔은 이 사건이 그냥 묻혀버릴 게 뻔하다는 걸 알아채고는 소녀의 부모와 동네 경찰을 설득해 '쇼'를 시작한다. 그는 언론이 벌 떼 같이 몰려오게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아는데, 얼마전 테러 사건에서 잘못 이용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만큼 신중하지만 간절하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 소녀를 향한 관심은 보겔의 쇼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하찮은 의심만으로 악마이자 괴물로 전국민에게 찍히게 되는 용의자 교수 마티니(아레시오 보니 분)를 향한 관심으로 어느덧 바뀐다. 


기대 반 걱정 반, 고품격 스릴러 


기대 반 걱정 반,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영화 <안개 속 소녀>는 범죄학과 행동과학 전문가 출신으로 스릴러 소설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 작가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했다가 소설로 내놓았고 다시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각본에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연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부응하는 면이 반이고 걱정을 떨치지 못한 면이 반이었다. 영화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적자임을 천명하다시피 한 원작 작가이자 감독이기도 한 도나토 카리시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는 에코가 다양한 언어와 학문으로 평생을 천착했던 질문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를 그만의 범류인 범죄학과 심리학적으로 치열하게 접근한다. 


한편 영화는 고품격 범죄 스릴러를 표방하며 안개 낀 산골 마을이라는 음울한 분위기와 잡으려는 자, 잡히지 않으려는 자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내보이려 한다. 더불어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복선과 그에 따른 반전 또한 내보이려 한다. 혹자는 문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지만, 종종 과해서 지루하고 비(非)영화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재밌다'


이 영화를 재밌게 보려면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안개 속 소녀>를 그나마 '재미있게' 보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 내적이 아닌 영화 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굉장히 훌륭한 사례로, 수단으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보겔이 자신의 영위를 위해 수단으로 이용하는 언론, 언론은 핫한 시청률을 위해 대중영합적인 소재를 부풀려 내보인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일 테지만,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용의자 또는 범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의자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며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작은' 사건에 머물고 말 것이다. 


모두(경찰, 언론,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큰' 사건이 되어야 하기에, 용의자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용의자의 '악마화' 또는 '괴물화'가 시작된다. 감정을 자극하는 피해자의 사례를 내보이는 이유도 그 작업의 일환이다. 


결국 피해자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안개 속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주체가 되기는커녕 객체가 되지도 못한 채 설 자리도 없어진다. 그 사이 모두의 시선은 경찰과 용의자 간의 싸움으로, 용의자의 신상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 후,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채 끝난다. 이쯤 되면, 용의자는 용의자일 뿐 경찰과 언론이 진짜 범인이자 가해자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많은 걸 담아낸 영화


많은 걸 담아내려 했지만, 그게 독이 되었을지 득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위의 일례가 사건에서 관심이 쏠리지 않는 주요 주체의 치명적이고 슬픈 말로라면, 이제 말하고자 하는 건 사건에서 관심이 과도 하게 쏠리는 주요 주체의 논란적인 말로이다. 아직 범인으로 확정되기 이전의 용의자를 향한 과도한 관심, 그로 인해 순식간에 괴물이자 악마가 되어버리는 모습 말이다. 


우린 이런 경우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종종 보아왔다. '알 권리'를 제1의 원칙이자 가장 중요한 신념으로 내세우면서 아무런 꺼리낌 없이 마녀사냥을 시전한다. 영화 <더 헌트>를 보면 더 없이 심도 깊게 또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다 얇고 넓게 비춘다. 


사라진 피해자,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용의자, 사건을 주도하면서 영합하고 대결하는 경찰과 언론, 그리고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안개 속 소녀>는 참으로 많은 걸 내보인다. 


보다 훨씬 디테일하고 유려할 소설에서 메시지와 캐릭터를 최대한 살려 영화에 내보이려 한 것 같은데, 할리우드 문법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영화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너무 늘어진다는 느낌이 종종 한없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행간과 자간의 늘어짐이라는 보기 불편한 느낌과 일종의 '여백의 미'라고 볼 수 있을 여유로운 느낌의 경계에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 번 보면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 보면 적어도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순 있다. 온전히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적어도 영화를 두 번 이상 보고 소설까지 섭렵해야 하겠다. 더할 나위 없는 고품격 스릴러를 한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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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경찰, 괴물, 대중, 스릴러, 악마, 안개 속 소녀, 언론, 용의자,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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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 <제0호>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8. 11. 1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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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 <제0호> 표지 ⓒ열린책들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그러니까 15년 전에 그의 데뷔작이기도 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열렬히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도 주로 등하교(출퇴근)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책을 읽었더랬는데, 그 유명한 <장미의 이름> 서문을 읽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이후 본격적인 사건에 돌입했을 때는 그 어렵고 어려운 지식의 향연 속에서도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지만, 에코의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되는 서문은 충격적이었다.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이 서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점이다. 지금에야 이 서문이 가짜를 진짜처럼 쓴 '너스레' 떠는 기법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그의 소설에는 수많은 진짜 같은 가짜들이 있다. 중세를 기반으로 근현대까지 총망라 하는 각종 음모론이 넘쳐 난다. '소설'인 걸 알지만, '가짜'인 걸 알지만, '창조'인 걸 알지만, 그걸 머리로만 인지하게 될 뿐이다. 믿을 수 없게 장대하고 매혹적이지만 믿을 수 없는, 그렇지만 믿게 되는 이야기 끝에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바우돌리노>(열린책들)는 그 절정이다. 에코는 사실 아닌 것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1980년에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으로 데뷔해서 2015년 <제0호>(열린책들)를 마지막으로 내놓은 움베르토 에코, <제0호>는 그의 소설 중 가장 가볍다고 할 만하지만 평생을 두고 공부하고 고민했던 질문을 압축적으로 던진다.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


뉴스를 '창조'하는 언론의 작태


1992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신생 신문사. 실패한 글쟁이이자 대필 전문가 콜론나가 시메이 주필의 초청에 합류한다. 그는 겉으로는 시메이 다음 가는 데스크이지만, 실상 시메이의 이름으로 출간될 책의 대필 작가이다.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 <도마니>의 창간 준비 1년의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마니>에 콜론나와 함께 합류한 기자들은 6명이다. 이런저런 언론사에서 이런저런 일을 도맡아 해왔던 이들로 창간 준비를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사업에 출자하는 발행인은 비메르카테라는 기업인이다. 호텔, 요양원, TV채널, 간행물 등을 소유했다. 그는 <도마니>를 통해 큰 신문을 이끄는 엘리트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결국 그들의 성역에 들어가고자 한다. 


시메이와 콜론나를 중심으로 <도마니> 창간 예비 판 '제0호'를 만들 준비에 들어간다. 편집 회의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들은 가관이다. 저널리즘의 본보기라고 하지만, 실상은 썩은 생선 냄새 나는 뉴스 짜깁기일 뿐이다. 황색언론의 표본,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는 선정적 기사들의 촘촘하고도 지능적인 나열. 


시메이의 자칭 '멋진' 표현이 한마디로 규정한다. '우리는 뉴스를 만들어야 하고, 행간에서 뉴스가 튀어나오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뉴스가 나오는 게 아닌, 거기에 허구와 거짓을 곁들여 뉴스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기억해야 할 건 거의 없다


<제0호>는 움베르토 에코 소설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감을 자랑(?)한다. 본인이 밝힌대로 그의 이전 소설들이 교향곡이라면 이 마지막 소설은 재즈에 가까운 것이다. 소설을 읽는 게 아닌 소설이 읽히는 거라고 할까. 또한 그의 이전 소설들이 가히 찬란하게 어려운 문체를 내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이 소설은 건조한 현대 저널리스트의 그것을 내보인다.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진짜 이유는 소설의 주제, 그리고 에코가 평생 천착한 주제와 맞닿아 있다. '제0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창조해낸 뉴스들에 많은 공력을 쏟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내용을 기억할 필요도 없고 어떤 것들은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소설에서 기억해야 할 건 거의 없다. 


이 소설은 그런 면에서 기억하지 말아야 할 만큼 딱 기억해야 한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거짓을 만들어낸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못 본 체하고 지나가며 자세히는커녕 겉핥기 식으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터무니 없는 음모론이라고 치부하면 끝나는 것이다. 에코는 천하무적 혈혈단신으로 그 음모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본인 그 누구보다 수많은 음모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히 꿰고는, 다각도로 직접 음모론를 가지치고 또 직접 가지를 잘라낸다. 그 과정을 여과없이 소설에 녹여내어 대중들로 하여금 속지 않게 하는 것이다. 에코는 평생 고민하고 천착하고 행동에 옮겨왔다. <제0호>는 가장 무게를 덜 잡으며 가장 지식을 덜 드러내면서도 그의 연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냈다. 


언론은, 의무를 다할 때만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언론은 그 강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았나. 그 힘을 좋은 쪽으로 써서 정의를 실현하는 데 큰 힘이 될 수 있고, 좋지 않은 쪽으로 써서 권력의 도구 또는 그 자체로 권력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완벽한 빛의 수호자, 완벽한 어둠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다. 


지난 2015년 개봉해 엄청난 호평 속 흥행을 선보였던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국일보 이강희 주필이 참으로 '주옥 같은' 대사를 읊었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뭐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쓰고 계십니까? 그들은 술자리, 인터넷에서 씹어댈 안줏거리가 필요한 겁니다.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싶은 이에게 고민거리를, 울고 싶은 이에게 울거리를, 욕하고 싶어하는 이에게 욕할 거리를 주면 됩니다."


<제0호>에서는 제0호 시메이 주필이 비슷한 대사를 읊는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들을 모아서, 전할 만한 사람에게 전해 주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어 보여서요." "뉴스들이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문이 뉴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뉴스거리가 없는 사건에서, 또는 사람들이 뉴스의 가치를 보지 못하는 사건에서 뉴스를 만들어 내게 될 것입니다."


언론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다만,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고 진실을 알릴 의무를 다할 때만이다. 권력의 압력으로부터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때만이다. 언론이 그 자체로 권력이 될 때나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을 때도 언론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언론밖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기에 반드시 스스로 내외부의 자정 작용으로 바꿔야만 한다.


제0호 - 10점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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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리플리>

오래된 리뷰 2016. 8.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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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멧 데이먼의 <리플리>


우연히 상류층의 일원으로 보여진 '톰' 그는 특출난 재능으로 빠르게 상류층의 일원이 된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거짓된 삶이었으니... 그는 어떻게 될까? ⓒ미라맥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파티석상. 연주가 끝나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부호 그린리프 부부가 다가와 톰 리플리에게 칭찬을 건넨다. 그러곤 그가 프리스턴 재킷을 입은 걸 보고 자신의 아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톰은 '디키, 잘 있죠?'하며 아는 척 하고 그린리프 부부의 환심을 산다. 


톰은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프리스턴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그는 피아노 선율사이자 호텔 보이일 뿐이다. 다만, 그때는 친구를 대신해 돈을 받고 프리스턴 대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인 척했던 것이다. 그린리프는 톰에게 1000달러를 보장하며 이탈리아로 가서 디키를 설득해 들어오게끔 한다. 톰은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혀 모르는 재즈를 공부하고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재능'의 거짓된 삶


톰이 동경해 마지 않는 상류층의 삶 그자체인 디키. 톰은 차원이 다른 그의 사고와 행동과 여유와 씀씀이를 따라할 수 있을까? ⓒ미라맥스



영화 <리플리>는 이런저런 부차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톰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단 몇 장면으로 보여주고는 곧바로 새로운 거짓된 삶이 나오는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건 톰의 거짓된 삶에 있다. 비천한 삶이 상류층의 삶으로 둔갑하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졌다. 숨어서 동경해왔던, 언제든 준비가 된, 그러나 거짓되었다는, 그래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면 일련의 일을 벌이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 톰은 상류층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뭐든 금방 따라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은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었다. 출신 성분이라고 해야 할까. 머나먼 윗세대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가문의 성분 말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가문, 학력, 돈, 명예, 지위 등. 디키는 선박 부호를 아버지로 두었고 돈은 엄청나게 많으며 프리스턴 대학교 출신이었다. 여기에 상류층다운 여유와 씀씀이,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소유하고 있다. 톰이 이런 것들까지 따라할 수 있을까?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짓을 하고 끔찍한 현실을 버티는 톰.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미라맥스



톰(멧 데이먼 분)은 디키(주드 로 분), 디키의 연인 마지(기네스 팰트로 분)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디키와 마지가 톰을 잘 대해주고 톰은 그들을 동경하며 잘 따랐다. 무엇보다 톰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상류층의 삶을 맛보는 나날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치 자신이 진짜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어느 날 상류층 친구 프레디가 찾아온다. 그는 디키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빌붙어 사는 게 좋냐고 톰을 놀려댄다. 톰은 적의에 불탔지만 이내 좌절하고 프레디는 그런 톰을 계속 놀려대고 디키는 톰을 조금 멀리하고 마지는 그런 톰을 위로한다. 그린리프 씨와의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디키와 톰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디키는 톰에게 강력하게 전달한다. 따분하고 싫증났다고, 가난뱅이 빈대에 찰거머리라고, 계집애 같다고. 다툼 끝에 톰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모든 게 시작되었을 때처럼 우연치 않게 디키로 오해받은 톰은 아예 디키 행세를 한다. 그렇게 그는 디키가 되어 '진짜' 상류층이 된다. 영화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몇 장면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톰이 누군가에겐 톰이고 누군가에겐 디키이기 때문인데, 그 누군가들이 전부 상류층으로 서로 잘 알고 있다. 톰이 원하는 건 뭘까. 


톰은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 왔고 멋진 거짓을 현실로 옮겼으며 끔찍하지만 멋진 현실을 버텨 왔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를 생각나게 하는 이 생각은, 그러나 결국 진짜 상류층, 그가 바라는 멋진 삶을 주진 못한 것 같다.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흔히 있는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인정하는, 참으로 슬픈 풍토다. 영화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이 통한다고. 이같은 풍토를 바꿀 순 없을까? ⓒ미라맥스



"과거를 창고에 꼭꼭 숨겨 두고 자물쇠를 채우고픈... 그 안은 어둡고 더러워. 그 추잡함을 들키면..." 


누구나 거짓된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많은 거짓과 비밀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싶지만, 그 더럽고 추잡한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다. 톰 리플리, 그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미친놈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깝지 않을까. 


때는 1950년대 미국, 위기와 전쟁을 지나 자본주의 최대 호황의 시대를 맞이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상류층의 삶의 양식이 정착되었다. 비천한 이가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기 쉽지 않을 거다. 누가 그에게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상류층이라면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나온 '리플리 증후군'은 톰이 잘 보여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데, 참으로 애잔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만약 현실이 비참하지 않다면?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와 차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데, 그런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영화에서처럼 상류층만 상류층을 인정하는 풍토가 없다면? 리플리 증후군 따위는 없을 거다. 


자만심으로 풍만한 상류층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하류층의 더럽고 슬픈 합작품. 누구나 그것에 노출되어 있고 빠지기 쉽다는 게 안타깝고 두려울 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고 아마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다. 내가 의도했거나, 나도 모르게. 


사회를 바꿔가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중심을 확고히 세우고 '나'를 사랑하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자칫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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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고통과 두려움, 죽음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건 '거짓' <이반 일리치의 죽음>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6. 5. 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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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 표지 ⓒ창비


죽음은커녕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할 나이에 죽음을 걱정했던 것 같다. 자그마치 초등학교 5학년 12살 때였다. 아마 어느 정도의 삶을, 되풀이 되는 삶의 연속을 경험해본 나이였을 테니까, 이 삶의 끝을 상상해봤을 것이다. 한 때 매일 밤 눈만 감으면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머리에 든 게 많지 않고 생각도 짧으니 죽음에 대한 한 면만, 그리고 한 가지만 물고 늘어졌다. 죽음은 두렵고 무섭고 나쁘고 아프고 피하고 싶은 것, 부정(不淨) 그 자체였다. 그 끝이 어떻게 될까,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니 미처버릴 것만 같았다. 도무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데 자꾸 생각하게 되니 마냥 무서웠다. 그렇게 겁쟁이가 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쓸 데 없는' 생각들이 나에게 가져다준 건 아무것도 없다시피 하다. 제대로 형성된 게 없는 그 시기에 그런 생각을 아무 이유 없이 했다니, 그때 즈음 겪은 외할머니와 증조할머니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하였을까? 이후 무수히 많은 콘텐츠를 통해서, 실제로도 죽음을 많이 접했다. 설마 오래 전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모두 끝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 짧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누군가의 죽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레프 톨스토이는 41세 때 <전쟁과 평화>로 대성공을 이루고 난 후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며 지냈다고 한다.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 전후였다는 것도 이에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나이 58세 때 죽음을 형상화한 대표적 작품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탄생했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그의 죽음은 지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동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들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리 이동과 보직 변경 등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나 그러듯이 그들도 죽은 게 자신이 아니라 바로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 (본문 10p 중에서)


그야말로 영원히 곁을 떠난 이에 대해 어떠한 안타까움이나 그리움도 묻어나지 않는 굉장히 현실적인 생각이다. 누군들 다를까? '으레'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가히 그 통찰에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 끔찍하기 그지없다.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반 일리치의 간단한 이력과 성격, 살아온 날들을 되짚는다. 그의 삶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극도로 끔찍했다. 그는 가벼운 재밋거리를 즐기는 성품이었음에도, 자신의 일을 할 때만큼은 극도로 조심스러웠고 관료적이었으며 심지어 냉혹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삶이란 반드시 쉽고, 기분 좋고, 고상하게 흘러가야만 한다.'는 자신의 소신대로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갔다. 


끔찍한 두려움과 고통, 그보다 더 힘든 건 '거짓'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제정 러시아 시대는 관료가 그야말로 최고의 위치와 지위를 점했다. 이반 일리치의 아버지인 삼등문관 일리야 예피모비치 골로빈이 별 쓸모없이 세워진 관청들을 이곳저것 옮겨 다니며 하는 일 없이 한 자리 차지해 평생을 편안하게 보냈다는 게 당시 관료의 전형적인 예다. 이반 일리치는 그런 인물로 나오진 않지만, 어떻게든 높은 자리로 올라가 많은 봉급과 함께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행세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고 있는 공무원 열풍과 다를 바 없다. 


그는 어느 때 큰 위기를 겪은 후 회생해 좋은 곳으로 발령나 이사를 간다. 가족들보다 먼저 도착해 집을 꾸미는 와중에 옆구리를 다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이 짧은 소설에서 그의 죽음 과정이 차지하는 바가 상당한데, 그 피말리는 묘사가 주는 기괴함은 말할 것 없이 엄청나다. 죽음에 대한 태초적인 두려움, 생전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함께 오만 가지 생각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감정이입해 보게 되어 비슷한 고통이 엄습하는 것 같다. 


그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바로 '거짓'이었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다. 그건 일리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이유이겠지만, 사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수작에 다름아니었다. 그렇지만 정작 그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는 '고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고상한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하인 게라심만은 그에게 서슴없이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그를 가엾게 여겼다. 일리치는 게라심과 함께 있을 때만 마음이 편안했다. 그건 거짓과 함께 그를 견디기 힘들 게 한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했지만 진정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 말도 거짓이었고 마음도 거짓이었다. 고통과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것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반 일리치는 특별한 인물인가? 소설에나 나옴직한,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형의 캐릭터이자 삶을 살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다. 지위와 재력의 높낮이는 있겠지만,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다치게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묘사를 보고 있노라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의 고통과 죽음 이후에 벌어질 사람들의 가식이 두렵게 다가온다. 그 무엇보다 일리치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이 나에게도 올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삶에게, 다름 아닌 나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죽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그리는 건 역설적으로 그만큼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의 거짓과 가식은 결국 삶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삶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이지 죽음이 있고 삶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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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헌트> 집단은 진실, 개인은 거짓이 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오래된 리뷰 2015. 3. 1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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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더 헌트>



영화 <더 헌트> ⓒ노르디스크 필름



덴마크의 한적한 마을, 루카스는 그곳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도시에서 결혼해 일하고 있던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고향 땅에는 친한 친구들도 있어서 마음을 다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들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의 부담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마음 속에 부담으로 남아 있는 건 아들 마커스다. 이혼한 아내가 쉽게 아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아들이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데도 말이다. 


그런 그에겐 가족 같이 친한 친구 테오가 있다. 테오에겐 딸 클라라가 있는데, 루카스가 유치원에서 보살핀다. 클라라는 걸핏하면 싸우는 테오 부부보다 자상하고 친절한 루카스가 더 좋다. 나이를 떠나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있으니 마음이 통했나 보다. 몇 번 같이 유치원에 오가다 보니 클라라에게 어떤 마음이 생겼나 보다. 클라라는 루카스에게 안기고 뽀뽀하고 선물까지 준다. 그런데 루카스는 그 선물을 다른 아이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클라라에겐 일생 최초의 고백이었고 최초의 거절이었다. 큰 상처를 받는다. 


말 한 마디 때문에 꼬이는 인생


영화 <더 헌트>의 극 초반 내용이다. 굳이 말하자면 1/10 지점까지 인데, 여기서 영화는 급격하게 선회한다. 큰 상처를 받은 클라라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한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언젠가 오빠가 지나가다 보여준 남자의 성기를 기억해낸 클라라는 확실하지 않은 투로 원장에게 루카스의 성기를 봤다고 말한다. 그러며 루카스에게 준 선물을 루카스가 준 선물이라 거짓말한다. 


이 한 마디 때문에 루카스의 인생이, 그리고 마을 전체가 꼬이기 시작한다. 하룻밤 사이, 루카스에겐 나디아라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고, 마커스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클라라에게도 큰 상처를 준 것이다. 그 한 마디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원장은 이를 루카스에게 알리고 전문가를 불러 클라라와 대질 시킨다.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혼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원장이 믿지도 않을 것이기에, 어찌 되었든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폭행 했다는 건 기정사실화 된 거였다.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루카스와 클라라 사건에 휘말린다. 루카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는 이렇듯 루카스에게 진실이 있고 클라라에게 거짓이 있다는 걸 천명한 채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진실이 어떻게 묻히고 거짓이 어떻게 진실로 둔갑하는 지의 과정, 그리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이후 피해자의 삶, 이를 타개하려는 피해자의 행동 등이 포인트가 될 것이다. 


진실만큼 약하고 허무맹랑한 게 없다


유치원 원장은 거짓이 진실이 되는 과정에게 제일 가는 공로를 보인, 연결 고리의 핵심이다. 그녀는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본 것을 그대로 말한다' 등의 명제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유치원생들 모두를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루카스가 클라라 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루카스는 하루 아침에 유치원생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인간 쓰레기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루카스가 할 일은 해명 밖에 없다. 마을 전체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진실은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는 한 마디에 무너져 버렸다. 진실은 위대하다고 하는데, 진실만큼 약한 게 없다. 누구든 진실을 입에 달고 살아가지만, 진실만큼 허무맹랑한 게 없다. 루카스를 몰아 붙이는 마을 전체가 거짓으로 점철된 진실을 말하지만, 사실 거짓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가 한적하고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로 서로 모르는 게 없이 모두 아주 각별한 사이인 만큼,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곳을 노리는 집중 또한 엄청난 것이다. 곧 '집단 폭력'이다. 진상은 알지 못한 채 들려온 말 한 마디에 마을 모든 사람들은 루카스에게 전에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집단은 진실이고 개인은 거짓이 되는 마녀 사냥


여기서 생각나는 게 '마녀 사냥'이다. 과거 백년 전쟁 때 이단으로 몰리고 남장을 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잔 다르크가 대표적이다. 한번 밑 보여 부정적인 말이 퍼지면 곧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고 만다. 마녀사냥의 양상은 참으로 다양한데, 전체주의의 산물이자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 그리고 정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 집단의 개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 행위 등이다. 그야말로 개인은 절대로 집단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집단은 진실이고, 개인은 거짓이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집단의 광기는 루카스 개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루카스의 제일 친한 친구인 테오보다도, 다른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니 말이다. 오히려 테오가 말리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 폭력은 테오의 아들 마커스에게도 심지어 반려견에게도 미친다. 과연 진실의 개인은 거짓의 집단에게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진실의 개인일 때도, 거짓의 집단에 속해 있을 때도 많을 것이다. 작게는 가정, 학교, 직장 나아가 인터넷 상, 국가, 세계까지. 이 작은 나라에서는 몇 개의 주요 언론이 거짓된 같은 기사를 쓰면 국민 모두가 믿곤 한다. 그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곧 '빨갱이'의 낙인이 찍힌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집단은 개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들이 내세우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속죄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게는 해준다는 것이다. 그럴 때 개인은 대부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휩쓸리고 만다. 자신의 생각이 진실에서 거짓된 진실로 바뀌고, 자신의 입에서 거짓을 진실인 양 말하게 된다. 그리고 곧 집단으로 편입된다. 


거짓된 집단에 대항하는 개인의 방법?


세월호,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땅콩회항 사건 등에서 개인의 진실은 쉽게 묻히고 만다. 자본 집단, 권력 집단, 국가 집단의 거짓과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의 진실을 압도해 버린다. 그리고 한번 묻힌 진실은 다시 진실의 권위를 찾기 힘들다. 집단의 진실 아닌 진실을 상쇄할 그 무엇을 찾기란 힘들다. 


그래도 루카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이 없는 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신이 알고 아들이 알고 가족이 알기에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그의 방법은 집단 대 개인이 아니다. 사건의 당사자와 개인 대 개인으로 진실을 어필한다. 제일 현명한 방법이자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나마 이런 방법이 통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그런 조직에 몸담고 있는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진실과 거짓을 올바르게 판명할, 거짓된 집단에서 과감히 몸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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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개인, 거짓, 더 헌트, 마녀사냥, 진실, 집단, 집단 폭력
  • BlogIcon 空空(공공)
    2015.03.16 10:50 신고

    저런 경우 보통은 참 무력감을 느끼고 포기를 하게 됩니다
    경험상 아이도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도 생각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ㅡ.ㅡ;;

    • BlogIcon singenv
      2015.03.22 16:45 신고

      무력감에 더해 공포심이 대단할 것 같아요.
      정말 버티기 힘들 거예요.

  • BlogIcon 봉리브르
    2015.03.16 11:25 신고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여기서도 통용될 것 같습니다.
    분명히 같은 말인데도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어마어마하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앞뒤 자르고 어떤 한마디만 툭 던져놓으면
    저마다 자기 위주로,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덤벼들기도 하구요..

    • BlogIcon singenv
      2015.03.22 16:46 신고

      그 말을 한 이가 아이라는 설정이 탁월했던 것 같아요.

  • BlogIcon 마일도
    2015.03.16 20:31 신고

    감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니 저런 사단이 벌어진거죠.
    저 영화본지는 꽤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영화를 보며 느꼈던 답답함을 지울수가 없네요.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감정적으로만 일처리를 했던 유치원교사나 형사들..진짜 보는 내내 답답하고 짜증만났던 영화입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3.22 16:47 신고

      저도 답답하고 짜증이 말도 못했어요 ㅋㅋ

  • BlogIcon 늙은도령
    2015.03.18 01:06 신고

    진실은 찾아서 공개하는 것이 더욱 힘듭니다.
    현실은 진실이 먹히기 힘든 곳인 것도 한몫하지요.
    조중동 같은 신문이 종편까지 하고 있으면 더더욱 힘들구요.

    • BlogIcon singenv
      2015.03.22 16:48 신고

      말씀주시기 그때가 생각나는군요.
      조중동매가 종편을 시작했던 그때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논리에 놀아나고 있겠죠.

  • SIa
    2015.03.27 20:11

    빨갱이로 낙인 찍힐때도 있지만 그 반대 수고 꼴통이라는 낙인이 찍힐때도 있죠

  • ddd
    2015.03.28 00:38

    현대사회를 잘 드러내는것같네요. SNS니 블로그니 천벌받을 자식들이 출처도없는 개구라를 정보랍시고 퍼나르기시작하면, 또 머리빈사람들은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일단 또 공유걸죠. 이 악순환속에서 "출처"라는 확고한 증거가 존재하지않는 거짓조차도, 다수에 의해서 진실이되버리는 개신병같은 상황이 일상다반사가 되는 사회입니다. 거짓말만큼 악날한 것은 자신이 믿는것이 무조건적으로 진실일꺼라고 생각하는 1차원적 대중입니다.

  • 가을바람
    2015.03.28 02:12

    필자는 세월호,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땅콩회항 사건 등을 끌고왔지만 광우병파동, 천안함사건 등을 보면 빨갱이라는 낙인보단 '수구꼴통'이라는 낙인 더 커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듯 합니다.
    필자가 '어거지'로 끌고온 '세월호,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땅콩회항 사건 '을 위의 영화에다가 '끼워맞추려는' 것도 그렇고.. 위 3가지 예는 '숨겨진 소수파의 진실'이라고 우기기엔 많이 약한... 좀 더 강한놈을 끌어다가 붙였으면 공감을 얻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세상을 좋은편과 나쁜편으로 밖에 갈라보지 못하는 흑백논리에 꽉 들어박힌... '10대의 홍위병'을 보는 듯한...
    왜. 홍위병이라니 또 빨갱이라 되 받아치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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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위선과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픈 소년의 방황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4. 11. 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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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 ⓒ 문예출판사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기 전 애매모호한 시간을 보냈을 무렵, 학교 도서관을 배회했다.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명저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 꼭 그렇진 않았다. 그냥 원래 도서관을 좋아했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한량같이 도서관을 휘젓고 있는데, 정말 우연하게 성장 소설 한 편을 발견했다. 제목은 <호밀밭의 파수꾼>. 무슨 이유였는지 지금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그 소설을 훔쳐왔다. 즉, 도서관 대출을 하지 않고 대출 코드 스티커를 떼어버린 채 그냥 가져와 버린 것이다. 이유없는 반항이었을까, 소설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때문이었을까. 홀든 콜필드처럼 모든 걸 증오하고 있어서 였을까.


"그래. 난 학교를 증오해. 정말 증오하고 있어. 그것뿐이 아냐. 모든 게 다 그래. 뉴욕에 사는 것도 싫어. 택시, 매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려달라고 항상 고함치는 운전사들에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부르는 엉터리에게 소개되어야 하고, 밖에 잠깐 나가려 해도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하고, 항상 부룩스에 가서 바지를 맞추어 입는 자실들, 항상....."(호밀밭의 파수꾼, 195쪽, 문예출판사 판)


어찌 되었든 이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 인생 최고의 소설로 자리매김 중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6세 소년인 홀든 콜필드가 네 과목에서 낙제하여 4번째 퇴학을 당한 후 겪는 2박 3일 동안의 일을 1인칭으로 풀어간 소설이다. 부유한 중산층의 자제인 소년은 왜 이리 세상에 불만이 많은 것일까.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모습일 뿐일까? 위에서 언급한 주인공의 말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속물적이고 허위에 가득 찬, 자신이 속한 중산층의 삶을 증오하고 있다.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고 말을 갖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생각은, 현대 사회가 가지는 비인간적인 면에 점점 지쳐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이 소설은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헤세의 <데미안>과는 확연히 다른 류의 성장소설이다. 그건 젊은이들만이 가지는 방황과 일탈, 호밀밭에 머물며 꼬마 아이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을 절묘히 파악한 덕분이겠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호밀밭의 파수꾼, 256~257쪽, 문예출판사 판)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콜필드는 결국 집에 돌아갔고,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서부로 도피하고 싶다던 콜필드의 꿈은 미성숙한 인간이었던 청춘의 꿈으로 남게 된 것일까.


꿈을 꾸고 좌절하고 성장하고 포용하고 인정하고 성숙하는 인간. 콜필드가 가장 믿고 존경했던 선생님인 엔톨리니 선생님이 한 말을 통해 콜필드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통과의례를 지난 것이었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 277쪽, 문예출판사 판)


1952년에 소설이 출간되자 미국 사회는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다. 한 소년의 성장소설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말 하나하나가 당시 미국 중산층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고 사용하는 언어들도 직설적일 뿐만아니라 비속어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 변호사, 목사를 비난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논쟁이 계속될수록 판매는 급증하고, 윌리엄 포크너는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는 격찬을 보낸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1500만부 이상이 팔렸고, 세계 굴지의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소설'과 미국 여대생들이 뽑은 '금세기 100대 소설'에도 뽑혔다. 한편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2010년 타계했다. 이 소설이 세대를 거듭해 계속 읽히고 현대성을 갖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허위에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매년마다 한 번씩 읽는다. 혹자는 단순한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들어 '피터팬 증후군'이라도 걸렸는지 알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합당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중학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을 읽으며 일종의 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을 처음 접했을 당시의 나와 대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세대 간의 불통(不通)은 존재 자체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서로를 알고 싶어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한 사람을 소개한다. '존 레논'을 암살한 자 '마크 채프먼'. 그는 존 레논을 암살한 혐의로 체포될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크 채프먼이 정신이상자였다는 설이다. 마크 채프먼은 자신을 존 레논이라 생각하고 앞에 있는 존 레논이 가짜, 허위라고 생각해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자신을 홀든 콜필드에게 집착했던 그는, 허위와 기만을 극도로 증오했던 홀든 콜필드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부작용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81년 존 레논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지금도 교도소에 복무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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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거짓, 데미안, 데이비드 코퍼필드, 도서관, 마크 채프먼, 성장소설, 소설, 위선, 존 레논, 퇴학, 학교,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
  • BlogIcon 여강여호
    2014.11.06 09:25 신고

    역시 진정한 독서가이십니다.
    좋아하는 책을 매년 한번씩 읽을 수 있는 열정.
    저는 그동안 너무 가벼운 독서를 했나 봅니다.

    • BlogIcon singenv
      2014.11.09 19:22 신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정한 독서가라기보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BlogIcon !sak@
    2014.11.06 23:49 신고

    저도 10녀전 군대가기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군대가기전 사춘기 시절보다 더 자아방황하던 시기였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 성장소설에 관심이 많아져서 다른 책들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다시 한번 읽어야겠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4.11.09 19:23 신고

      언제 읽어도 재밌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소설입니다.
      또 그때 그때 다른 느낌을 주는 참으로 신기한 소설이구요.

  • BlogIcon 모자장인
    2014.11.17 17:30 신고

    고등학생 때 받은 느낌과 대학생 때, 졸업하고 나서 느낌이 항상 다른 이상하면서도 뭉클한 소설인 거 같아요. 다른사람의 리뷰를 보니 또 새롭네요.

    • BlogIcon singenv
      2014.11.19 22:38 신고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니~
      왠지 동지(?)를 만난듯한 느낌입니다!
      평생 곁에 두고 읽을 만한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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