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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머리 나쁜 금발'의 고군분투 편견 극복기 <금발이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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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금발이 너무해>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서 잽을 날리는 영화 <금발이 너무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할리우드가 영화 하나는 정말 '잘' 만든다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다. 작정하고 세상이 놀랄 블록버스터를 내놓을 때도, 제대로 된 진지하고 의미있고 비판적인 작가주의 영화를 내놓을 때도 아니다. 물론 돈 벌고자 만든 그렇고 그런 상업 영화도 아니다. 다름 아닌 여러 가지로 여러 면에 적당히 잽을 날리는 영화를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15년도 더 된, 자그마치 2001년에 나온 영화 <금발이 너무해>는 내게 그런 영화 중 하나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은커녕,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나쁘진 않은 상업 영화 중 하나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 이상의 것을 주지도 않았고 그 이상의 명작으로 남아 있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여러 모로 '잘'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나아가 이 영화가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얻어가고 의미 있게 끄집어낼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영화는 때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내놓거나, 그 자신의 포지션보다 더 많은 포텐셜을 터트려 더 많은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법 아닌가. 가령,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분한 최악의 리메이크 중 하나로 뽑히는 <스텝포드 와이프>도 나에겐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해주었다. <금발이 너무해>라면?


잘 만든 영화 <금발이 너무해>가 줄 것들은?


<금발이 너무해>는 '잘' 만든 영화이다. 마냥 재밌게 볼 수도, 문제의식의 시선으로 볼 수도, 다분히 할리우드식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 볼 수도 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금발이 너무해>로 괜찮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데뷔한 후 연달아 흥행면에서는 당시 톱랭커에 들게 된 로버트 루케틱 감독. <21>로 정점을 찍고, 2010년대 들어서는 되도 않는 우려먹기로 폭망의 길을 걷게 된다. 여하튼 그런 그가 데뷔작을 함께 할 주연으로 점찍은 이는 리즈 위더스푼. 작은 키에 올망졸망 귀여운 얼굴, 스탠퍼드대학 출신(중퇴라고는 해도)에 이전까진 주로 정적인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이 영화가 마냥 귀엽고 재밌고 즐거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된 편견과 고정관념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인공에게 그것을 타파하려는 타파해야 하는 임무 아닌 임무가 주어져 있으니, 리즈 위더스푼만 한 배우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인데, 이후 종종 <금발이 너무해>의 느낌을 울궈먹고자 하는 게 보여 안타까울 때가 있긴 하다. 그것도 그녀의 생김새에 따른 편견이 작용한 결과가 아닐까?


리즈 위더스푼이 분한 엘 우즈는 청초한 금발, 귀엽고 예쁜 얼굴, 군살 없는 몸매, 핑크핑크하고 화려한 옷가지, 장학생이자 캠퍼스 모델, 부잣집 딸로 세상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스펙의 소유자이다. 하버드 법대생 남자친구까지 있다. 문제의 시작은 다름 아닌 그 남자친구 워너. 워너가 청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특별한 저녁 자리에서, 워너는 엘에게 이별통보를 한다. 자신의 집안이 5대 째 상원 의원을 배출한 명문가이기 때문에 명문가 딸이랑 결혼해야 한다는 등 별별 이유를 다 대지만, 중요한 건 엘이 'Legally Blonde', 즉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이유였다. 


엘은 곧바로 하버드 법대를 준비하고 좋은 성적으로 붙어버린다. 하지만 그곳은 화려한 겉모습을 자랑하는 그녀가 있을 곳 같지 않다. 이에 엘은 화려함을 벗어 버리고 다시금 열심히 공부한다. 비로소 하버드 법대생이 된 것 같은 엘, 급기야 극소수의 엘리트만 붙는다는 인턴에도 붙어 승승장구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수많은 난관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에 존재하는 난관들은 그동안 그녀를 옭아맨 편견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과연 그녀는 극복할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극복할까?


'머리 나쁜 금발머리'가 부딪히고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들


화려한 금발머리는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 이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이자, 주인공 엘 우즈가 극복해야 할 편견과 고정관념의 화신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의 재미 포인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진지해야 할 또는 진지하게 비칠 엘의 난관 극복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가 계속해서 부딪히게 되는 난관들은 수없이 많고 엄청 깊은 편견과 고정관념들이다. 애써 코믹하게 그려내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기에 더욱 주의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편으론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감이 있어 조금만 살펴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단연코 그녀를 가장 충격에 빠지게 한 한 마디이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편견의 상징과도 같은 말은 워너가 그녀에게 건넨 '머리 나쁜 금발머리'이다. 금발머리 여성이 머리가 나쁘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래되었고 엄청나게 고착화 되었을 거다다. 그건 일종의 형상화인데, 유추되고 유추된 것들의 총합이다. 굉장히 무서운 편견이다. 경우에 따라선 가장 많이 선행되고 있지만 가장 피해야 할 악질적 차별인 '인종차별'과 '남녀차별' 등과도 동급이라 할 만하다. '우생학'과도 연결시켜볼 수 있다. 


금발머리는 일단 그 자체로 화려하다. 화려한 금발머리 여성 중 당연히 몇몇은 화려한 겉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당연히 몇몇은 실제로 머리가 나쁠 것이다. 이런 화려한 것들의 당연한 총합은 굉장히 눈에 잘 띄고 자연스레 하나의 형상화로 뇌리에 박혀 잘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머리 나쁜 금발머리의 형상이 굳어진다. 이런 식이라면 만들기 나름이지만, 이 총합이 주는 시각적 충격이 워낙 크기에 알려지기는 쉽고 기억되기 쉽지만 잊히기는 쉽지 않고 바로잡기도 쉽지 않다. 


엘이 이후에 계속 넘어야 하고 넘게 되는 난관들은 모두 이 대표적인 편견에서 파생된 변종들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녀가 금발이 아니었더라도 겉모습이 화려하지 않았더라도 얼굴과 몸매가 예쁘지 않았더라도, 셋 중 하나만으로도 편견은 계속 그녀를 향했을 것이다. 편견들의 총합이 큰 형상을 이룬 이상, 각각의 편견들도 각자 충실히 기능한다. 모두 다 하나씩 깨부술 수밖에 없다. 


자신을 버리지 말고 나아가자


결국 극복에 성공한 엘 우즈. 그녀는 말한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엘을 가로막는 편견은 사실 굉장히 이성적이다. 감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머릿속에 박혀 있는 당연한 사실 또는 진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성적 사고의 산실과도 같은 하버드 법대에서조차 그녀를 그렇게 대한다는 건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는 걸 뜻한다. 이성에서 길을 찾을 수 없고 외부에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그녀가 택한 건 이성이 아닌 감성 즉 열정이고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자신이다. 


수많은 난관을 뚫고 당당히 졸업하게 되는 엘은 졸업연설로 명대사를 시전한다. '하버드에서의 첫 강의 때 존경하는 교수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셨죠. "법은 열정을 배제한 이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죄송하지만 하버드에서의 3년을 되돌아보니 열정이란 법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더군요.'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리버티 대학교 졸업연설에서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확신에 찬 용기와 열정, 강한 자신감이 있어야 세상에 나갈 수 있어요. 첫인상은 틀릴 수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엘은 그럼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들의 머릿속 깊이 박힌 편견의 형상, 그 표준과도 같은 엘은 그 모습이 그대로 세상을 향했다.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것인지는 굳이 영화를 보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한편 이 영화는 자기확신과 그에 이르는 열정, 그에 따른 용기라는 자기계발의 주요 요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탓하지 말고 우선 자기부터 계발하라는 말이다. 


조금 꺼림칙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닌 것이, 혼자만 바뀐다고 될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나부터 먼저 바뀌고 또는 올바른 길을 가면 그 영향이 두루두루 퍼진다고 말하고 있기에,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싶다. '연대'는 애초에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 주고받으면서 잇는 것도 가능하지만, 깨달은 누군가가 툭 튀어나와 찾아다니고 설득하며 잇는 것도 가능하다. 엘은 잘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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