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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복싱으로 말하는 아픈 시대의 가족과 희망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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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파이터>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2010년대 전성시대 시작을 알리는 작품 <파이터>. ⓒ시너지



21세기 최고의 복싱 경기로 회자되는 미키 워드와 아투로 게티의 WBU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 3연전. 긴장감을 유발하거나 청량감을 주는 대신, 처절함을 동반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 경기를 보면 스포츠에선 패자는 없고 승자만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를 승자로 인정한다. 


영화 <파이터>는 다름 아닌 미키 워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아투로 게티와의 챔피언전을 다루진 않았고, 그 이전까지의 인생역전을 다뤘다. 링에는 혼자 올라가지만 링에 올라가기까지는 절대 혼자일 수 없는 법, 영화는 미키 워드와 그의 가족들을 함께 그렸다. 미키 워드의 복싱 인생에서 형 디키와 엄마 앨리스를 비롯해 가족들이 많은 역할을 했다. 


감독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90년대 중반 <스팽킹 더 멍키>로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데이비드 O. 러셀은 1999년 <쓰리 킹즈>로 메이저 무대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이후 오랫동안 부침을 겼었다. 그러다가 2010년 <파이터>로 단숨에 아카데미가 사랑하는 감독이 되었고, 이후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아메리칸 허슬>까지 성공시키며 대세 감독으로 우뚝 섰다. <엑시덴탈 러브>와 <조이>로 연착륙 했다. 


그의 영화들은 상당히 스타일리쉬한데, 영리한 편집과 파격적인 변신을 앞세운 캐릭터 그리고 영화 전체를 앞서서 끄는 듯한 음악이 키포인트다. 자칫 정신 없이 산만 할 수 있을 텐데(누군가에겐 단연코 그렇게 느낄 수 있겠다), 이를 다잡는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다. <파이터>는 이런 요소들이 완벽하다 할 만큼 적재적소에 들어차 있다. 


'복싱', 그리고 '가족'과 '아픈 사람들'


영화의 주된 소재는 복싱,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건 가족과 아픈 사람들, 그리고 희망. ⓒ시너지



미키 워드(마크 윌버그 분)는 서른 살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백업 선수로 전전하고 있다. 돈을 받고 챔피언의 승률을 높여주는 역할. 그 돈 덕분에 일가족이 먹고 산다. 미키에게 권투의 모든 것을 알려준 전 챔피언인 형 디키 워드(크리스찬 베일 분). 하지만 그는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마약에 쩔어 살아 가는 루저다. 심지어 미국 메이저 방송사 HBO에서 그의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그가 생각하고 있는 그의 부활이 아니라 그의 마약 생활을 통해 교훈을 전하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미키의 트레이너다. 한편 그들의 엄마 앨리스 워드는 미키의 매니저다. 


승리의 기회가 찾아 온다. 이번만큼은 백업이 아니라 자신의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상대방이 아프다는 이유로 경기 직전 바뀌는데, 체급 자체가 너무 차이난다. 훨씬 더 높은 체급이었던 거다. 미키는 말도 안 되는 이 경기를 피하려 하지만, 형과 엄마가 미키를 밀어 넣는다. 돈 때문이었다. 돈은 벌어왔지만 또다시 처참하게 진 것이다. 선수로서의 회의, 가족들에 대한 실망으로 방황할 때 살린을 만난다. 그러곤 다시 재기를 꿈꾼다. 가족들과는 좀 거리를 둔 채.


그렇지만 다시 위기에 빠진다. 미키가 자신과 함께 하려면 생활비를 대 주어야 한다는 말에 형 디키가 어이 없는 범죄 행각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미키는 경찰에 잡혀 가려는 디키를 보호하려다 경찰에 의해 오른손을 심하게 다친다. 감옥에 가는 디키, 풀려난 미키. 하지만 미키는 더 이상 권투를 할 수 없는 몸이 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미키의 진가를 알아본 에이전시가 제의를 해오는데, 조건이 있었다. 가족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 미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는 미키라는 권투선수의 인생역전을 기본 뼈대로 '가족'과 '아픈 사람들'을 주요 요소로 투입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디키 또한 미키 못지 않은 주요 뼈대다. 즉, <파이터>는 미키와 디키 둘 모두를 따로 또 같이 잘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 전부인 미키 워드. 하지만 그건 그의 선택이 아니다. 그의 선택이 가족일 때 비로소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시너지



우린 이 영화에서 '권투'를 잘 느끼기 힘들다. 하다 못해 '권투 선수'를 잘 느끼기도 힘들다. 미키 워드의 권투 또는 권투 선수 미키 워드를 잘 보여주려면, 영화에서 보여준 권투 인생 이후를 보여줬어야 했다. 아투로 게티와의 3연전을 하이라이트 삼아 그때까지의 우여곡절을 보여주는 게 맞는 것이다. 대신 <파이터>는 그 외부의 것들을 말하고자 했다. 사실 삶에서는 그것들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신데렐라 맨>이 생각나게 하는데, '영화'로서의 전체적 만듦새는 <파이터>가 더 뛰어난 것 같다. 미키가 미키일 수 있었던 건, 즉 그의 존재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권투는, 그 자신도 말하듯이 100% 형 디키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매니저 역할을 하는 엄마를 비롯한 많은 수의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해당되지 않겠냐만, 그에겐 그의 가족들이 전부다. 그의 권투는 오로지 가족들에 의한 것이니까. 사실 그는 온전한 어른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른이다. 어른이어야 하는 나이이고 몸이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것들은 연인 살린을 만나면서 뚜렷해진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자신과도 같은 가족들과 떨어져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아니, 가족들과 떨어져야만 가족들과 더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족들은 그가 '선택'하지 않았고 살린은 그가 '선택'했다는 것. 


가족이란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가족이면 모든 걸 다 용서하고 받아줘야 하는가. 가족이 원하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가. 가족 간에는 모든 게 당연한 것인가. 모든 걸 다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내가 나일 수 있게 한 가족을 저버리는 새로운 방황의 시작일 수 있다. 즉, 함께 가되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변화'가 필요한 바, 영화는 후반부 디키의 변화에 주목한다.  


아픈 이들이 이야기하는 희망


하나 같이 아픈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이 사는 동네도 아프다. 그런 그들이 희망을 이야기하려 한다. 자신을 인정하고 변화하고자 한다. ⓒ시너지



미키는 아프다. 권투 선수로서 미래가 없다. 형처럼 한때나마 잘 나갔던 적도 없다. 결국 손을 크게 다쳐 더 이상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디키는 어떤가. 한때 챔피언으로 지역 명사가 되어 더할 나위 없는 삶을 누렸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 마약에 찌든 폐인의 삶을 살아간다. 그보다 아픈 사람을 찾기 힘들다. 미키의 연인 살린도 아프다. 꽤 잘나가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지금은 동네 술집에서 일하고 있다. 이젠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미키와 디키 가족은 어떤가? 엄마 앨리스는 이혼한 후 재혼해 살고 있다. 그런데 다 큰 자식들 모두와 함께다. 미키, 디키를 비롯한 자식들은 거의 10명에 육박한다. 또 재혼한 남편도 있다. 그와 자식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앨리스에게 꼼짝도 못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고충도 많다. 이 다 컸지만 능력 없는 자식들을 다 챙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미키에게 매달린다. 돈, 돈, 돈!


심지어 이들이 사는 동네도 아프다. 한때 챔피언이었다가 폐인이 된 디키와 결을 같이한다. 디키가 챔피언이었을 땐 이 동네도 잘 나갔는데, 그가 폐인으로의 삶을 걸어갈 때 이 동네도 함께 침체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는 국가적 침체의 희생양이 된 것이리라. 동네가 아픈데 가족들이 아프지 않을 수 없고, 가족들이 아픈데 동네가 아프지 않을 수 없다. 


아픈 사람들끼리 모여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하는가를 보여준다 하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들이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그러곤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이 아프지 않다고 생각했을 땐 상대방의 아픔을 조롱하고 하대 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 중심엔 디키가 있다. 그렇지만 디키의 변화는 미키와 살린의 선택과 결심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맞물려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우린 아픈 시대를 살아간다. 자신이 아픈지 모르고 누군가가 아픈지 관심도 없는 시대를 살아간다. 아는 게 오히려 병일 때도 있겠지만, 이럴 땐 아는 게 힘일 수 있겠다. 아픈 걸 치료하려는 게 아니다.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며, 아프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에는 그런 시대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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