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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절대권력의 그늘에서 하루를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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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봐도 재밌고 또 봐도 감동적인 콘텐츠들이 있다. 드라마, 영화, 책, 만화, 음악 등. 퇴색되지 않는 재미와 감동은 물론이고, 볼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건 아마도 볼 때마다 환경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이리라. 필자가 살아가면서 보고 또보고 계속봤던,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콘텐츠들을 나름 엄선해 간단히 리뷰해본다. 이 시리즈는 계속될 예정이다.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 소설②[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인류 역사상 독재자는 무수히 존재했다. 독재의 그늘만 있다면 아예 탄생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다는 건 분명 독재의 빛도 존재한다는 것일 게다. 독재의 빛? 독재의 햇빛을 통해 광합성을 했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일일이 기록할 가치는 없는 듯. 독재의 그늘? 대한민국으로 국한해보자. 현대사의 수많은 지식인, 정치인, 노동자, 학생, 일반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 있지 않은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민음사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12.11.~ 2008.8.3. 러시아)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독재의 그늘에서 죄없이 고통을 당한 힘없는 사람들 말이다. 그는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시골의 교사로 재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병사로 소집되어 전쟁에 참가했지만, 종전 이후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장장 8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런 그의 이력은 고스란히 문학으로 승화되어 일련의 작품들로 발표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암병동>, <수용소 열도>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197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 당시 소련에서는 이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의 문학작품들이 반체제적이고 반소적인 목적으로 쓰여졌다는 이유에서 였다. 결국 국외에서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8년에야 러시아로 돌아가 활동할 수 있었다. 

솔제니친은 예술에 대해, 특히 문학에 대해 '어떻게'가 아닌 '무엇을'을 강조한다. 

"진짜 천재는 자고로 압제자의 구미에 맞추느라 왜곡해서 해석을 하는 일은 없어요!"
"예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101~102쪽)

예술 자체의 형식에 갇혀 순수예술이라는 허상 속에서 현실을 무시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며, 진짜 예술이란 무엇을 그리고 표현할지를 고민하며 치열하게 끊임없이 대항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이런 치열함 속에서 탄생한 작품으로, 작품 주인공인 이반 데니소비치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범죄 행위를 한 적이 없고, 특별한 정치적 소임을 한 적도 없으며, 어느 한 쪽의 사상을 가져본 적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 그가 바로 이반 데니소비치이자 솔제니친인 것이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훑고간 수많은 사람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들의 비극은 어디서 잉태한 것일까. 사실 이 소설 내용은 극히 단순하다. 제목 그대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그 하루는,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똑같이 돌아가는 그 하루는, 절대권력의 그늘에서 보내는 그 하루는, 평범한 듯 특별한 의미는 갖는다. 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며, 오히려 지배권력의 속살을 극명하게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무심한 듯 섬세하고 예리하게 지배권력의 죄상을 폭로하고 있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보자. 

작업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작업량 조정이다. 능력이 있는 우리 반장은 작업량을 조정하는 데 굉장히 신경을 쓴다. (중략) 작업량이 낮은 일을 더 높이기 위해 교섭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반장의 지혜에 달려 있다. 작업 조정원들에게도 늘 뭔가 갖다바쳐야 한다. 그들이라고 맹물만 먹고 살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면, 이렇게 이루어진 계획량 초과에 따른 이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것은 수용소를 위한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건설 공사에서 수많은 이익금을 얻게 되고, 그것으로 장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다. 규율감독관 볼코보이의 채찍 수당도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죄수들은 저녁 식사 때 이백 그램짜리 빵을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백 그램의 빵이 수용소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74~75쪽)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건 무엇일까? 돈? 욕망? 아니다. 소설 속 수용소가 다를 바가 없다. 이백 그램의 빵에 불과한 것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백 그램의 빵의 권한을 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하는 것이고. 

이반 데니소비치는 평범하고 힘 없는 서민이었다. 그래서 끌려 들어온 것일 수도. 수용소에서 같이 생활하는 많은 등장인물들도 평범해 보인다. 어떤 정치적 사상을 갖고 있지 않다. 정치적 희생물일 뿐이다. 반장인 추린, 전직 영화감독 체자리, 비굴한 인물의 전형인 페추코프, 심지어는 수용소 간부까지도 말이다. 

저녁이 되어, 이때쯤 여기서 인원 점검을 받을 때, 그 다음 수용소 문을 통과하여 박사 안으로 돌아올 때, 죄수들에게는 이때가 하루 중에서 가장 춥고 배고플 때이다. 지금 같은 때는 맹물 양배춧국이라 해도 뜨뜻한 국 한 그릇이 가뭄에 단비같이 간절한 것이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단숨에 들이켜게 된다. 이 한 그릇의 양배춧국이 지금의 그들에겐 자유보다, 지금까지의 전생애보다 아니, 앞으로의 모든 삶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157쪽)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은 멋진 일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안주'하는 행위가 되었을 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솔제니친이 이런 소설을 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이렇게 단순하고 비정치적이고 힘없는 일반적인 인물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지배권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권력의 그늘에서 비참하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수용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자체로도 수용소 밖의 여러 인간 유형을 보여준다. 나아가 인류 역사 모든 지배 권력의 모습을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 있다. 

수용소에서의 하루는 고되다. 수용소 밖에서의 하루도 고되고. 사는 게 고되다. 

이반 데니소비치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정을 잘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을 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208쪽)

절대권력의 그늘에서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버틴다는 마음으로 작은 것에 만족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인가? 이게 다 운명이다 하고? 약자들을 대변해 진실을 밝히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살아갔던 솔제니친의 일침이 들리지 않는가. 
이 길지않은 중편 소설은 현대판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고전이라고 해서 모두 재미있거나 또 읽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에 던지는 묵직한 주제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교훈을 줌과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을 위트있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그려내고 있는 소설은 많지 않다. 재미와 감동의 파노라마를 선사하는 이 소설. 아마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의 수용소에서의 하루를 같이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아쉬움이 들지 모른다. 비록 수용소라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곳에서의 삶을 그리고 있음에도 그의 또 다른 하루를 따라가보고 싶을지 모르니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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