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아트 슈피겔만의 <쥐>
아트 슈피겔만의 <쥐> ⓒ 아름드리
그 명성은 익히 알고 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콘텐츠가 있다. 그 콘텐츠를 접하고 난 후 받게 될 거대한 무엇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주로 주제나 소재가 너무 방대하거나 나의 관심 밖 또는 나의 지식 너머를 다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책을 사놓거나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놓고 차마 보지 못하고 고이 모셔두기만 한 것들이 30%에 육박한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아름드리)도 그 중에 하나였다. 우리나라에는 1994년에 출간되었으니, 올해로 20년째이다.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라는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다는 정보 하나만을 접한 채, 최고의 그래픽 노블이라고 남들에게 추천만 해줬을 뿐 직접본 적이 없었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념비적 작품
사실 이 만화를 보기 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1993년 작)를 본 뒤 여기저기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영상물과 책을 찾아보곤 했다. 그래서 더 이상 홀로코스트에 대한 건 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도 했다.
최근 들어 그래픽 노블에 부쩍 관심이 생겨 책들을 검색하다 보니 어김없이 <쥐>가 나오곤 했다. 애써 지나치려 했는데, 한 번 볼 용기가 생겼다. 과연 이 만화는 다를까? 1992년 만화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는 점, 홀로코스트에 관한 기념비적 작품이라는 평.
기존의 홀로코스트 관련 콘텐츠는 눈물로 시작해서 눈물로 끝날 수밖에 없었는데, 하물며 이 작품도 역시 당사자가 직접 겪은 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만화가 아니던가? 증명된 콘텐츠에 대한 기대 반, 그만큼 분량의 불안 반으로 읽기 시작하였다.
저자의 부모 세대가 겪었던 실제 이야기
두 번째 페이지부터 참으로 끔찍한 대사가 나온다. 그러며 아버지가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들 아트 슈피겔만에게 해주는 13년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본문 속에서)
이 만화는 저자와 그의 아버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드린다. 실제와 마찬가지로 아트 슈피겔만은 극 중에서 만화가이고 예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홀로코스트에 대한 만화를 그리고 위해 아버지에게 수시로 인터뷰를 요청한다. 이에 블라덱 슈피겔만은 돈이 되는 만화를 그리지 왜 이런 만화를 그리려 하냐고, 또 홀로코스트에 대한 만화를 그리려면 그때 당시의 상황만 물어볼 것이지 왜 관련도 없는 전쟁 전 이야기까지 물어보느냐고 말한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렇게 답한다.
“이건 히틀러나, 대학살과는 관계도 없어요!... 이건 대단한 소재예요. 이게 다 이야기를 더 사실적으로 더 인간적으로 만들거든요. 전 아버지 얘길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어요,”(본문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만화로 옮기는 극리얼리즘을 표방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앞뒤 사정 또한 빼놓지 않음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바(홀로코스트)를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만화가 진정 전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 만화가 진정 전하고자 하는 바
<쥐>에는 아버지의 회상 스토리 말고 한 가지 스토리가 더 존재한다. 그건 바로 현재 이야기로, 주로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 또는 그 전후에 일어나는 일들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들인데, 블라덱 슈피겔만은 아내를 잃고 새로운 아내를 얻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사이가 좋지 못하다. 아트 슈피겔만 또한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에게는 유대인 특유의 생존 방식이 뼛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눈치가 빠르고, 극도로 예민하고,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하고, 그래서 너무나도 구두쇠인 점 등. 쉽게 말해 억척스러운 것이다.
또한 아버지는 모순적이게도 흑인에 대한 선입관이 깊이 박혀 있다. 자신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으면서도 흑인은 모두 범죄자라는 생각이 아로새겨져 있는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이 장면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어찌 이처럼 인간적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끔 한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런 그를 포용할 수 없지만, 그의 회상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티격태격하면서도 인터뷰를 따오곤 하는 것이다. 저자는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일 또한 마치 제3자 인양 너무나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심지어 아버지가 죽은 아내의 모든 기록을 불태워 없애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에게 “당신은 살인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며 심한 말을 하는 것도 그대로 그릴 정도이다.
한(限)이 없는 객관적 리얼리즘
이 만화의 객관성과 리얼리즘은 아버지의 회상에서 정점에 달한다. 지옥문을 해치고 살아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아버지가 회상하는 장면은 너무나 비참하고 참혹하지만, 정작 당사자에게서 그에 대한 한(限)을 찾아볼 수가 없다.
듣는 사람이, 보는 사람이 눈물이 맺힐 정도로 지옥 같은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당사자는, 정작 아무 감정 없이 일상으로 되돌아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억울하지도 않을까?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을지라도 그 한을 씻어낼 길이 없어 보이는 데 말이다.
극도의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이 만화의 특성을 지키려고 일부러 그렇게 고쳤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리얼리즘이 파괴되기 때문에. 그렇다면, 아버지의 객관적인 회상이 이 만화의 원동력이 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 객관성 있는 시선에 힘입어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래서인가? 저자는 이 만화 1권을 그리는데 자그마치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만화’라는 본분을 잊지 않고 오히려 더 천착한 것이다. 스토리가 너무 뻔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모든 사람들을 동물로 표현해 내는 등의 표현기법(이 또한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에 관한 고민을 깊이 했을 수도 있겠다.
이 만화가 단지 홀로코스트만을 다루고 있었다면 여타 다른 콘텐츠와 하등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이 만화는 ‘인간’을 다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옥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의 인간을 보여줌(오히려 이성적인 행동과 사고를 하려고 노력한다)과 동시에, 일상에서 살아가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오히려 이성보다 본능에 충실한 행동과 사고를 내비치곤 한다)을 보여준다.
이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그것도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성의가 없다거나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논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철저한 객관성과 리얼리즘은 마치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의 발견을 보는 것 같다. 이 만화는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진정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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