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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가 죽인 아이, 그 책임에서 많은 이가 자유로울 수 없다 <게이브리얼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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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게이브리얼의 죽음: 누구의 책임인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게이브리얼의 죽음: 누구의 책임인가?> 포스터. ⓒ넷플릭스



2013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팜데일, 911로 8살 아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제보가 들어온다. 긴급출동하여 아이를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오래지 않아 사망하고 만다. 당시 응급실에서 근무했던 간호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회상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처가 아이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대의 흔적이 분명했다. 8살 남자 아이, 게이브리얼 페르난데스의 마지막이었다. 


게이브리얼 학대, 고문, 살인 혐의로 다름 아닌 친엄마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체포된다.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사건이지만, 미국에서도 범죄율이 높은 편이거니와 악질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로스엔젤레스이기에 크게 다뤄질 소지가 없다시피 했다. 미디어에서 관심을 보여야만 세상에 알려질 텐데, 겉으로 봐선 게이브리얼의 죽음도 악마 부모의 미치광이 짓으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이 사건에 아동 보호 시스템의 헛점 또는 부재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게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양상을 띤다. 사건을 맡은 검사는 게이브리얼의 엄마와 남자친구를 1급 살인죄로 기소하는 동시에 이 사건에 관련된 사회복지사 4명도 기소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시리즈 <게이브리얼의 죽음: 누구의 책임인가?>(이하, '게이브리얼의 죽음')는 그 전말을 전한다. 시종일관 충격과 공포, 안타까움과 분노, 슬픔과 혐오 등의 격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개인과 사회의 가혹한 민낯이다. 


8살 남자 아이 게이브리얼이 당한, 믿을 수 없는 학대


작품은, 우선 게이브리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엄마와 남자친구를 전면에 내세워 게이브리얼이 얼마나 믿을 수 없이 가혹한 환경에 처했었나를 조명한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키워졌는데, 다행이도 좋은 보살핌을 받아 착하고 활달하며 곧은 아이로 자라났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엄마를 향한 사랑을 단념하지 않았다고... 엄마의 품으로 돌아온 게이브리얼은 8개월간 학대와 고문을 당하다 숨지고 말았던 것이다.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 없을 만큼 가혹한 짓거리를 당했는데, 다른 두 남매와 함께 살았음에도 그에게만 가한 고문은 가령 머리를 밀어 버리고는 담뱃불로 지지고 달군 숟가락으로 지져 상처를 내는 건 물론 BB탄 총을 쏘았다. 손발을 묶고 입을 틀어막아서는 좁은 찬장에 가둬 그 안에서 볼 일을 보게 했다. 굼기는 건 당연지사, 밥 대신 고양이 모래를 먹였다. 죽기 직전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는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고 한다. 


집 군데군데 셀 수 없이 많은 흔적, 즉 게이브리얼의 혈흔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그가 죽었어야 했는지 그것도 상상하기 힘든 고문을 받고서 아픔과 슬픔 속에서 죽었어야 했는지 분노가 들끓는다. 사형까지 선고가 가능한 1급 살인죄는 당연해 보인다. 이 작품의 논조와 시선이 좋았던 건, 시종일관 피해자 게이브리얼을 언급하고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그가 당했던 악마적인 고통의 흔적을 되짚으며 악마 같은 살인자의 행각을 조명하는 데만 그치지 않았다. 


게이브리얼의 죽음의 또 다른 책임자들


담당 검사와 담당 기자, 그리고 다큐멘터리 <게이브리얼의 죽음>은 게이브리얼의 죽음을 애도하고 살인자를 향한 공분을 법으로 심판하며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이런 일이 생기게 하지 않기 위한 움직임을 갖는다. 게이브리얼의 죽음의 또 다른 책임자를 소환한 것이다. 게이브리얼을 살릴 수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한 이들, 사회복지사와 보안관들이다. 


게이브리얼의 학대에 관련해, 학교 담임은 물론 로스엔젤레스 사회복지부 팜데일 지부의 경비원도 신고했다. '시스템'대로 사회복지사가 배정되었고, 게이브리얼 네로 전화도 하고 방문도 하여 확인했다. 보안관도 몇 차례나 방문했다. 하지만, 바뀐 건 없었다. 학교 교장은 담임에게 더 이상 관여하지 말라고 명했고 게이브리얼은 보복 차원에서 더 자주 더 가혹한 학대와 고문을 받았다. 


그들은 변명한다. "아이 엄마에게 충분히 확인을 받았다" "초과 수당을 못 주니 야근을 하지 말라고 감독관이 그랬어요" "사회복지사의 업무량이 너무 과도하여 일일이 다 챙길 수가 없다" "가정을 파탄내는 것보다 가정을 존속시키는 게 방침이다" 등 가지각색이다. 역시,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변명들이다. 그저 일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일은 사람의 목숨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게이브리얼을 살릴 수 없었다며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꼬리 자르기'밖에 안 될 것이다. 물론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제재 혹은 처벌을 해야 하겠지만, 궁극적인 방법이 되지 않을 테다. 하여 작품은 아동 보호 시스템의 민낯을 드러내고자 나아간다.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까지는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아동 보호 시스템의 잘못된 운영, 그 민낯


제목 '게이브리얼의 죽음'에 뒤따르는 '누구의 책임인가?'야말로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에 맞닿아 있다. 그의 죽음에 직접적이고도 확고한 책임엔 엄마와 남자친구가 있을 테고, 그를 살릴 수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한 책임엔 사회복지사와 보안관이 있을 테다. 그리고, 궁극적인 책임엔 아동 보호 기관 당국이 있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의 부재'가 아닌 '시스템의 잘못된 운영'이 문제라고 하겠다. 로스엔젤레스 카운티의 많은 기관 중 아동 보호 기관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 만큼, 시스템이 없을 순 없다. 문제는, 시스템을 지탱하고 운영하고 작동시키는 이들의 '가치관의 부재'이다. 그 가치관엔 '아동' 대신 '경제주의'와 '관료주의'가 들어앉아 있다. 단적으로, 그들이 어떤 조직으로 구성되어 어떻게 돈을 쓰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극히 폐쇄적이다. 또한, 그들은 공공서비스를 사설업체에 위탁하여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지극히 책임전가식이다. 


작품의 종반부, 게이브리얼의 죽음과 거의 똑같은 식의 사건이 몇 년 후 근처에서 일어났다. 이를 대한 모든 이가 충격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아울러 함께 다가오는 감정은, 황당함과 어이없음이 아니었을까. 몇 년에 걸쳐 전국민의 관심과 지탄을 받으며 진행되었던 사건의 결과, 달라진 게 없으니 말이다. 말이 아닌 행동, 언젠가가 아닌 지금 당장 획기적인 변화와 세상을 바꿀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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