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소설 읽기] <무진기행>


<무진기행> 표지 ⓒ민음사


주인공 윤회중은 서울의 복잡한 일을 피해 고향 '무진'을 찾는다. 배경 좋고 돈 많은 부인과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 그 회사에서 전무 승진을 위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귀찮고 복잡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피해서였다. 속물 근성이 판을 치는 속세를 떠나 잠시 머리를 식히러 왔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무진은 윤회중이 나이가 든 뒤로 몇 차례 찾았던 곳이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나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다. 그렇지만 무진이라고 하면, 윤회중은 어둡던 청년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지만 말이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


누구나의 고향이 다 그럴까.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의 고향은 무진과 비슷하다. 30년 가까이 지낸 그곳은 높디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무진의 안개처럼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왠지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곤 했는데, 오히려 윤회중이 무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러운 옷차림과 누런 얼굴로 방에 처박혀 있곤 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고 내 동생 또한 그러했다. 


김승옥의 대표작이자 1960년대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여러 형태로 읽힌다. 무진을 다녀오는 여행 소설, 짧은 여행임에도 성장을 경험하는 성장 소설, 전근대와 근대가 각축을 벌이는 역사 소설로 말이다. 이들은 얽히고설켜 맞물려 있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윤회중은 끊임없이 서울과 무진의 대립되는 이미지를 상기한다. 서울의 도시, 햇빛, 현재, 근대가 무진의 시골, 안개, 과거, 전근대와 대립한다. 그 대립의 향연 안에서 그는 고민하고 갈등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결국 그는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속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깨닫은 것이다. 성장을 했다. 


주인공 윤회중의 과거, 현재, 그리고 지금


그가 무진에서 만나는 박, 조, 하인숙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그다. 중학교 후배이자 모교 국어교사로 있는 박은 과거의 그다. 순수하고 진지하지만 가난하고 비현실적이다. '무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창이자 세무서장으로 있는 조는 그의 현재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이다. '서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인숙은 조금 특별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대를 나와 박과 같은 중학교 교사로 있다. 성악을 공부해 졸업 연주회 때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흔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이다. 그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서울'과 '무진' 사이 어딘가겠다. 그가 처한 지금의 상황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한느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본문 46쪽 중에서)


도망치더라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이 소설은 방황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를 그렸다. 현실은 서울로 대변되는 것들이고 이상은 무진으로 대변되는 것들인데, 문제는 무진이 마냥 이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대두로 근대가 출현해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근대, 즉 속세를 버리는 이도 있다. 윤회중은 버리지는 못하고 가끔 도망만 치는 겁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도망치는 무진은 그에게 어두운 과거를 상기시키고 우울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도 적을 둘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반(反)근대를 내세운 것 같지 않다. 얼핏 봤을 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에서 방황하는 이를 그리며 오히려 근대 쪽으로 더 기울어졌으면 기울어졌지 반근대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윤회중은 하인숙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나 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그는 하인숙을 구출해줄 수도 구원해줄 수도 없다. 부끄러운 그곳으로 돌아가 혼란스럽지도 어둡지도 않은 일상을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도 돌아왔음직하다. 그러면서 또 그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반복과 후회와 성장. 이 루틴은 아마도 평생 계속되지 않을까. 그때마다 최소한 '부끄러움'은 느끼는, 그런 삶이길 바랄 뿐이다. 그것마저도 안 되면 내가 정말 싫어질 것 같다. 이 불안의 줄타기를 계속하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때그때 잘 이겨내는 수밖에. 


<무진기행>(민음사)의 여러 단편 중 '무진기행' 한 편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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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전당포를 찾아서>


<전당포를 찾아서> 표지 ⓒ아시아



짧은 단편소설에는 등장인물이 최소한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몇몇의 등장인물을 통해 짧고 굵게 그리고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서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가끔 장편소설에서 소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가 있는데, 굉장히 느리거나 반대로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곤 한다. 


그런데 소설가 김종광은 단편이고 장편이고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곤 한다. 특히 단편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고도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능력은 발군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그의 소설은 단연 재미있다. 재미를 추구하는데도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신기한 능력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짧디 짧은 단편 <전당포를 찾아서>는 그 대표 중 하나이다. 


1998년 당시의 한국사회 자화상


단행본으로 채 50쪽도 되지 않는 짧은 단편 안에 자그마치 16개의 챕터가 있고 챕터마다 한 명의 주인공이 있으니, 최소 16명의 등장인물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이가 박무현인데, 약관 20살의 한민대학교 2캠퍼스 1학년생이다. 


그는 이사장이 학교발전기금으로 적립된 수백억 원 중 수십억 원을 빼돌린 것에 대한 항의 집회를 위해 서울로 향하는 결사대에 합류한다. 다만, 그에겐 투쟁의 각오 같은 건 없고 소값이 개값 되는 시국에 이사장 놈이 있다는 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소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 청년의 시선이다. 


작가는 이야기를 매우 가볍게 이어나가는 듯하다. 시골 청년 박무현의 어리바리한 모습을 가벼운 터치로 보여주고 있는 게 그 단적인 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예리한 칼날이 번쩍인다. IMF 당시의 상황을 그리는 것은 물론, 데모와 시위가 더 이상 호응을 얻지 못하는 90년대 말의 대학가 자화상, 대학의 서울캠퍼스와 지방캠퍼스의 은근한 대립에서부터 서울과 지방의 대립까지, 은퇴 후 서울로 올라온 노인의 소회, 처량한 처지의 대학 시간 강사, 금모으기 풍경 등이 16개의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그렇게 하나의 에피소드에는 한 명의 주요 등장인물과 그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1998년 당시의 한국사회 자화상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인공 박무현의 행적을 꼼꼼히 살핀다. 다름 아닌 시골 청년 박무현이 서울에 무심코 올라와 겪게 되는 웃지 못할 헤프닝들 말이다. 그 헤프닝에서, 박무현의 모습에서, 우리를 볼 수 있다. 


사회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차근차근 흐른다


박무현은 '정신 못 차린 애들' 중 하나로 '요즘 세상에 설마' 하는 데모에 참석하고는 얻은 것 없이 전경에게 진압 당한다. 그러곤 한강을 건너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강제 하차 당한다. 본격적으로 서울 바닥을 헤매기 시작한다. 어딜 가든 불빛이 보이고 사람이 있고 편의시설이 있는 서울이, 조금만 나가도 아무것도 없는 시골보다 헤매기 더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다. 


헤매다가 차비도 다 소진해버린 박무현. 결국 그가 생각해 낸 건 '전당포'. 그곳에 가서 뭐라도 맡기면 돈을 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서울에서 전당포 찾기가 왜 그리 힘든지. 모든 게 다 있을 것 같은 서울인데, 왜 전당포는 보이지 않는 건지. 과연 박무현은 전당포를 찾아서 돈을 받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설령 전당포를 찾아 돈을 받는다고 해도 쉽게 집으로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이건 마치 1998년이 아니라 2016년을 보는 것 같다. 하등 다를 바가 없다. 90년대 이후 대학가는 여전하다. 아니, 퇴보했다고 하는 게 맞다. 이도 저도 아닌 취업양성소가 되었다. 그 시작이 IMF 당시였겠다. 서울(캠퍼스)과 지방(캠퍼스)의 대립도 여전하다. 참으로 쓸 데 없는 걸로 자신을 드러내는, 그야말로 무식한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대학 시간 강사의 처량한 처지와 은퇴 후 서울 숲에 갇힌 노인의 소회는 20년이 지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아래에 있다. 그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들이 지금에 비로소 꽃을 피운 것이리라.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무참히 짓밟히고, 사회는 차근차근 그런 식으로 흘러가서 지금에 이르렀다. 


솔직히 두렵다. 또다시 IMF, 그 이상의 위기가 도래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사이에 세계금융위기를 겪었는 데도 말이다. 그럴 때도 이렇게 날카롭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소설을 쓰고 읽을 수 있을까. 그나마 '전당포'라는 희망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 수나 있을까. 웃기지만 슬프고 재밌지만 씁쓸하다. 


아시아 출판사가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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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필론의 돼지>


<필론의 돼지> 표지 ⓒ아시아



"필론이 한번은 배를 타고 여행을 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큰 폭풍우를 만나자 사람들은 우왕좌왕 배 안은 곧 수라장이 됐다. 울부짖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뗏목을 엮는 사람… 필론은 현자인 자기가 거기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도무지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 선창에는 돼지 한 마리가 사람들의 소동에는 아랑곳없이 편안하게 잠자고 있었다. 결국 필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돼지의 흉내를 내는 것 뿐이었다." (본문 58~59쪽 중에서)


많은 사람의 정곡을 찌를 우화이다. 굳이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이다. 관성의 법칙도 있지 않은가? 세상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조급하게 나서서 뭐라도 해보려고 하니, 현자가 보기에는 딱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니 필론이 현자가 아닌 거다. 


필론과 돼지의 우화로 사회를 바라보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는 필론과 돼지의 우화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다. 이 소설도 그의 스타일에 맞게,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고 그곳에 여러 인간 군상을 배치시켰다. 곧 사회의 축소판이다. <필론의 돼지>의 특수한 상황은 이렇다. 1980년대 대학을 졸업한, 우쭐댈 만한 학력을 가진 주인공이 군대를 제대하고 군용열차에 올랐다. 그곳에서 멍청하기 짝이 없었던 훈련소 동기 '홍'을 만나고, 얼마쯤 지나 술 취한 '검은 각반 두른 현역' 즉, 특전사 현역이 난장을 피우며 돈을 빼앗는 장면을 목격한다. 백 명에 육박하는 육군 예비역들은 다섯에 불과한 특전사들에게 꼼짝도 못하거니와, 그 또한 아무것도 못하고 똑같이 돈을 빼앗길 뿐이다. 


그에게 특전사보다 앞 선 문제는 다름 아닌 홍이다. 본명이 홍덕동인 홍은 워낙 멍청했기에 '홍 똥덩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홍이 자꾸 자신과 맞먹으려 하는 게 아닌가. 그가 이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바를 홍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홍은 분노는 커녕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반면 그는 이 상황에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홍처럼 행동하고 만다. 


그런 경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나보다 못한 사람과 섞이기 싫어할 때가, 그런데 생각은 다를지 몰라도 그나 나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고 있는 걸 알게 될 때가, 그렇게 분노와 좌절과 자기혐오를 느낄 때가 말이다. 내가 그 반대로 못한 사람일 때는 움츠려들고 아무것도 못하곤 하는데, 하필 내가 잘난 사람인 것 같을 때는 그렇게 되곤 한다. <필론의 돼지>에서 그는 현자 필론이고, 홍은 돼지일 거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은 '말짱 황'이다. 


정작 중요한 건 '폭력'의 정당성 여부


술취한 특전사 현역 다섯 명이 육군 예비역 100여 명이 몸을 실고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하는 객실로 난입해,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며 돈을 갈취한다. 대부분의 예비역들은 3년 간 '당했던' 뼛속 깊은 무력감으로 순순히 돈을 준다. 종종 저항의 불꽃이 일지만 더 이상 번지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그 또한 분노로 치를 떨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중, 익명의 목소리가 들린다. 100명이 다섯 명을 이기지 못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한다. 다같이 달려들면 당연히 이길 거라고 말한다. 이 선동에 맞춰 수많은 발길질이 특전사 현역 다섯이 아닌 한 명씩으로 향한다. 아무리 단련된 그들이라고 당해낼 도리가 없다. 무참히 쓰러져 얼마 전까지 그들이 행했던 바를 그들이 당한다. 소수 권력의 무참한 말로다. 


이 지점이 논란 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 행동하지 않을 때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바는 '폭력'의 정당성 여부에 있다. 작가는 주인공의 생각을 빌어 폭력의 악순환을 비판하고자 한 것 같다. 


"만약 이들을 진실로 죽여야 할 대의가 있다면, 그에게도 동료 제대병들과 함께 살인죄를 나눌 양심과 용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눈먼 증오와 격양된 감정이 있을 뿐, 대의는 없었다."(본문 68쪽 중에서)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은 같지 않다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것일까. 주인공의 눈에는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이 같아 보이는가. 작가도 그렇다. 주인공이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그곳에 대의가 없다는 핑계를 댔다고 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곳에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인공에게서 그런 생각이 나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하나의 우화로 작동하는 것이겠지만, 폭력에 대한 생각은 우화로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일제 시대 친일 부역자들을 모조리 잡아 그에 맞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야, 하면서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많이 오버된 것 같지만, 충분히 같은 맥락이다. 


물론 크게 보면 특전사 현역이나 육군 예비역이나 국가와 시대가 낳은 피해자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이 일언반구 들지 않게 한다. 단지 폭력에 당한 만큼 폭력으로 갚는다는 것이 대의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을 뿐이다. 현상만 볼 뿐 본질은 보지 '않은' 것 같다. 본질을 보았으면, 한 발 더 나아가 폭력과 폭력이 만나게 된 그 상위층의 폭력에 대해 생각했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못지 않은 탁월한 알레고리 형식으로 1980년대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이 소설은, 그러나 이처럼 잘못된, 좋게 말해 논란 거리가 되는 바를 남겼다. 그럼에도 하나는 확실하다. '필론의 돼지'는 1980년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보든 '그들'은 분명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까지 '그들'일까. '우리'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럴 때도 여전히 혐오스러운 존재일까.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많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 혐오스러운 존재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다. 필론의 돼지가 스스로가 아닌 그들이 만들어낸 거라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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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


<회복하는 인간> 표지 ⓒ아시아



한 자매가 있다. 그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언니는 화려한 외모에, 건실하고 잘생긴 형부와 결혼해 누구라도 부러워할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반면 동생은 평범한 외모에, 고지식하고 고집이 세고, 신통찮은 전공을 택해 불안정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동생이 언니를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언니가 동생을 질투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매 사이는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지고 죽을 때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조만간 언니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동생은 그렇게 언니를 보내고 고통 속에 살아간다. 아니, 일부러 고통 속으로 걸어들어가 나오지 않으려 하는 것 같다. 마치 그것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자 방식이라는 듯이. 


'고통'과 '아픔'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소설가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은, 역시 고통과 아픔이 소설을 관통한다. 주인공인 동생은 아프고 고통스럽고 동생의 언니도 아팠고 고통스러웠으며 그들의 가족 또한 그랬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 앞에선,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없다


동생이 현재 아픈 이유는 화상에 의한 괴사 때문이다. 괴사로 구멍이 난 그곳은 복숭아뼈 아래쪽인데, 닷새 전 왼쪽 발목을 접지른 후 찾아간 한의원에서 처방해준 직접구 때문이었다. 살갗이 탈 때까지 불붙은 쑥덩이를 얹어 두는 뜸인 직접구로 동생의 아픔과 고통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실제적 아픔과 고통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언니라는 존재,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지만 언젠가부터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었던 존재, 동생에게만 불치병의 사실을 알리곤 동생과는 멀어진 채 고통과 아픔 속에서 속절없이 떠난 존재 때문이었다. 그 존재 때문에 동생은 아파도 아픈 게 아니었고, 고통도 고통이 아니었다. 그 모든 걸 '이따위'로 치부해야 했다. 


그런 때가 있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 앞에선, 그 어떤 아픔과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말이다. 그럴 때면 초월적 아픔과 고통이 아닌 '일반적' 아픔과 고통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곤 한다. 거기에서 위안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건 강해지는 것일까, 약해지는 것일까. 초월적 아픔과 고통에서 회복된다고 봐야 할까, 일반적 아픔과 고통이 가중된다고 봐야 할까. <회복하는 인간>은 그 무엇도 아니라고, 그러며 모두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건 아픔과 고통 그 자체로 수렴된다.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이다


소설은 아픔과 고통으로 시작해 또 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끝난다. 초월적 아픔과 고통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다른 아픔과 고통으로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며 조금씩 회복되어 가는 기미가 보인다. 아주 조금씩. 그러나 또 다른 아픔과 고통이 시작된다. 이제는 거기서 벗어나기가 싫어진다. 더 이상 생을 살아가기 싫다는 암시일까?


하지만 초월적 아픔과 고통에도 생을 마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런 암시로 보이진 않는다. 결국 계속 버티고 살아갈 거라 생각된다. 다만, 온갖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서. <회복하는 인간>은 그것만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회복은 원래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 것이 아니라, 현 상태를 유지하는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치유는 병을 낫게 하는 게 아니라, 병을 짊어진 채 버티며 살아가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한강 작가의 글쓰기와 일맥상통한다. 짧은 소설이기에 집대성했다고 보는 건 힘들지만, 한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하겠다. 이야기를 읽는 재미를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지루하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기까지 할 수 있겠지만, 보다 고민과 통찰을 원하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소설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소설에는, <회복하는 인간>에는 '인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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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아베의 가족>



<아베의 가족> 표지 ⓒ아시아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그 시든 나무들의 꿋꿋한 뿌리가 돼줄는지도 모를 우리의 형 아베의 행방을 찾는 일도 우선 그 무덤에서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다."


전상국의 소설 <아베의 가족>이 한국 분단 문학에서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60년이 넘도록 여전히 한반도에 깊이 아로새겨진 한국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분단의 비극을 능수능란하게 여과 없이 그리고 알아듣기 쉽게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만으로도 충분한데 이 총체적 비극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다. 거기서 이 소설은 분단 문학을 넘어 한국 문학에서도 특별하게 되었다. 


이 소설이 전하는 한국전쟁의 폭력성, 분단의 비극 그리고 비극 해결 모색을 들여다보자. 이를 들여다보는 건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데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와 한국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의 폭력성과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아베'가 꿋꿋한 뿌리가 돼줄 것이지만, 상흔은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풀어야 할 숙제가 된다.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


진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떻게든 적응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어머니는 본래 강한 사람이었는데 미국에 오니 시든 병아리 마냥 힘이 없고 우울하다. 그건 '아베'를 한국에 남겨왔기 때문이었다. 아베는 누구인가. 그는 한마디로 백치. 가난한 진호의 가족들은 그들의 가난을 아베 때문으로 돌렸다. 미국에 와서는 아무도 아베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아베 때문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진호는 어머니의 수기를 우연히 읽는다.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수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아베의 과거가 낱낱이 그려져 있었다. 진호는 급기야 아베를 찾으러 한국에 가기로 마음 먹는다. 도대체 수기에는 어떤 기막힌 과거가 그려져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한국전쟁으로 단숨에 깨진다. 아버지가 전쟁에 끌려간 것이다. 어머니는 동맹국 미국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그렇게 태어난 게 아베다. 아베는 제대로 태어나지 못했다. 그 아베를 잘 보살펴준 게 지금의 아버지다. 그것은 아버지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탈영을 하여 민가에 들어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죽였었다. 그 장면을 백치 아이가 고스란히 보고 있었는데, 아베가 그 백치 아이를 연상시켰고 아버지는 그 백치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아베에게 투영하여 속죄하려 한 것이었다. 


미국군이 어머니를 강간한 것과 아버지가 민가의 사람들을 죽인 것 모두 전쟁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잘못 태어난 아베는 비극을 상징할 것이다. 폭력을 당한 사람, 폭력을 행한 사람 모두 비극을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비극의 이면, 감춰진 비밀을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다. 결국 비극이 가져다주는 아픔을 끝까지 짊어지지 못한다. 그렇다고 멀리한다고 아프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폭력이 가져다준 비극이란 그런 것이다. 짊어지지도 짊어지지 않을 수도 없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딜레마 중 하나는 이렇다. 누구든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 어떻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단 말인가? 그렇지만 이 극도의 모순이 우리 사회에 지극히 존재한다.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탁월한, 그중에서도 사회의 진짜 모습을 그리는 데 천착하는 독립 영화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이 바로 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아베의 가족>이 보여주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바로 이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인은 피해자(미국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 어머니)이자 가해자(군대에서 탈영하여 민가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인 아버지)의 굴레에 말려들어 갔다. 문제는 결과와는 달리 원인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누구에 의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개인의 경우는 이렇겠고 국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36년의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를 한국인에 의해 끝내지 못했고(김구 선생은 타국에 의한 한국의 광복을 한탄했다.) 분단 또한 한국인만의 의지가 아니었다. 비극의 원인이 다른 누구에게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피해자이자 가해자의 굴레는 우리가 진 채 살아가고 있다. 


소설은 아베를 짊어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말하지 않은 채 살아갈 순 없다고 본 것이다. 비극의 원죄를 묻는 데 앞서 앉고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상처는 결국 곪아갈 것이고 그로 인해 몸은 시들어갈 뿐이다. 아베를 두고 온 어머니가 시들어가고 무기력해진 것처럼 말이다. 아프고 치욕적이지만 우리의 뿌리임이 분명한 아베다. 그 뿌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딜레마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출판사에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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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오후, 가로지르다>



<오후, 가로지르다> 표지 ⓒ아시아


"사람 키 높이의 간이 벽으로 막아서 칸막이 사무실을 만든 것을 큐비클이라고 하는데, 인텔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미국 첨단 기술 회사들은 큐비클에서 일한다." ('삼성과 인텔', RHK)


어느 책 덕분에 '큐비클'이라는 단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회사는 일을 하러만 다닌다는 투철한 신념과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오직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과학적인 고찰이, 회사에 큐비클을 들여놓게 했나 보다. 


옛날에는 이런 식이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열린 공간 안에서 다 같이 일을 하며, 상급자일수록 뒤에 배치되어 하급자를 감시할 수 있게 하였다. 상명하복 문화의 연장선상이라고 할까. 물론 큐비클 공간에서도 상급자는 뒤쪽에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또는 그만의 다른 공간이 있겠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 


우리네 직장살이가 꼭 이럴까


"사무실 입구에서 여자의 '큐비클'까지는 꼭 마흔두 걸음이었다."로 시작되는 하성란 소설가의 <오후, 가르지르다>는 회사의 공간 변화를 고스란히 겪어온 이름 없는 여자를 통해 현대 사회의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 자체로 우리네 모습이다. 


여자의 큐비클까지 걸어가다 보면 갖가지 큐비클들이 눈에 띈다. 전시회 포스터를 붙여 놓고, 티셔츠를 걸어두는가 하면, 그림 엽서를 붙여 놓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눈에도 낡고 색이 바랜 큐비클들이 나온다. 신세대와 구세대의 경계선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곤 얼마 가지 않아 여자의 큐비클이 나온다. 그렇다. 여자는 입사한 지 꽤 오래된 고참 사원이다. 그녀는 여전히 이런 공간에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보자. 회사의 큐비클 공간을 넓게 해 놓은 것 같다. 갖가지 아이템으로 자신을 내보이려 한다. 다른 게 있다면, '자신을 내보이려' 한다는 점이다. 큐비클이라는 공간 자체가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일 텐데 말이다. 진일보 했다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은 크게 봐서 큐비클 문화에 대한 반동일 것이다. 즉, 여전히 우리 사회는 큐비클 문화가 지배적이다. 우리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막상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진 못한다. 큐비클 안에서만 민낯을 드러낸 채 제한된 자유를 누리고, 밖으로 나올 때면 가면을 쓰고는 완전한 자유의 존재를 애써 부정한다. 


이렇게 보면 큐비클의 부정적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큐비클을 양계장에 비유하면서 결정적인 한방을 먹이는데, 일명 '큐브 농장'이다. 여자는 자신이 일하는 그곳을 큐브 농장이라고 표현한다. 닭은 양계장이라는 한정되고 비좁은 공간에서 인간의 목적에 의해 다양하게 사육된다. 알을 위해, 고기를 위해, 궁극적으로 돈을 위해. 하등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인간의 처지와. 


단절과 불통, 자족의 현대인


여자는 말한다. 가장 두려워 하는 건 '한순간에 모든 큐비클들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그러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자신만의 공간을 찾을 것이다. 그러곤 전보다 더욱더 견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것이고 절대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단절과 불통, 자족의 현대인이라면 말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뻔하다. 회사라면 돈을 더 벌기 위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한 방편이고,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존재는 단절과 불통, 자족을 오히려 부추긴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우리의 '대화'는 많아졌다. 문제는 실제가 아닌 가상에서의 대화라는 점이다. 


자신의 실체는 숨긴 채 다른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이런 면에서 1인 방송 등으로 자신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또 그걸 보고 열광하는 모습이 신선하다. 어떤 희망이랄까, 그런 게 보인다. 한편으론 서글프다.


소설은 끝까지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엄마도 돌아가셨고, 전남친도 세상을 떠나고 없는, 여자에게 남아 있던 유일한 관계는 과거 그녀에게 이유 없이 뺨을 때린 이름 모를 상사와 채팅으로 이야기하는 옆 큐티클의 최 뿐이다. 하지만 그 상사 또한 오래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소통을 원하고 관계를 소망하는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다. 죽음이 그녀를 가로질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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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깃발>



홍희담의 <깃발> ⓒ아시아


5월이 되면 설렌다. 근로자의날부터 시작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석가탄신일까지 유독 기념일이 많기도 하거니와, 1년 중 가장 결혼을 많이 한다는 달인 만큼 가장 완벽한 환경을 뽐내는 달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포근해지게 하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푸른 5월을 피로 물들인 사건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때는 1980년 5월, 장소는 광주다.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며 18년 간의 긴 군부독재가 끝나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물론 12.12 쿠데타로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모양새였지만, 전국에서 휘몰아치는 민주화 시위를 저지할 순 없어 보였다. 민주화는 대세였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아니 애초에 서울의 봄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신군부 세력은 12.12 쿠데타로 이미 계엄령을 선포하며 정국을 얼어붙게 하였다. 이에 1980년 5월 13일 전국 대학생 10만 여명이 서울역에 모여 계엄령 철폐를 주장했다. 5월 15일 절정에 이른 시위는 돌연 해산되고 만다.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일시에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실시한다.


비상계엄군은 학생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교를 휴교 시키는 등의 조치도 취해졌는데, 광주에 위치한 전남대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남대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에게 저지 당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 철폐'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시작으로 광주 시내로 진출한다. 역시 계엄군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부상을 당하고 연행을 당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피의 일요일' 


홍희담의 소설 <깃발>은 광주의 1980년 5월 18일 그때를 '피의 일요일'이라 명명한다. 공수특전단들은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둘렀다. 군중들은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려졌다. 일어서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대검을 쑤셨다. 길바닥에는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야학을 다니는 순분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며칠을 보낸다. 그 사이에도 광주의 중심대로에서는 계엄군과 '시민'들 간의 공방전은 계속되었고, 서로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된 지 4일 째는 5월 21일, 계엄군은 무차별 집단 발포를 실시한다. 생각지 못한 발포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시위의 불길이 사그라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강력한 무기 앞에 맨몸의 시위는 너무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시민군은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외려 그 무차별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근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대치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비롯한 광주 시내를 장악한다. 


계엄군은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시민군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진다. "무기를 반납하는 건 배신과 같은 거라는" 강경파, "무기는 또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다"라는 온건파. 대립의 결과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고 계엄군에 맞설 준비를 한다. 그들은 이 끝이 어떻게 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절대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이어나가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던 것일까?


하층민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이다


소설은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시선으로 그 열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사건의 일말만 그대로 보여주었다면 별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노동자와 지식인을 대표하는 이들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진 또 다른 대립을 보여주며, 5.18의 또 다른 면모를 환기 시킨다. 


이들의 대립은 앞서 말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인 전남대학교 출신 윤강일은 "어차피 지는 싸움이다. 훗날을 도모해야 해."라며 광주를 떠난다. 반면 손분, 형자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은 그 '어차피 지는 싸움'을 위해 끝까지 남아 싸운다. 그들은 다만 서로가 서로를 위할 뿐이었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쓰는지." (본문 중에서)


작가는 하층민들이야말로 역사를 쓰는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운동이 끝난 후에도 도망갔던 윤강일을 도와주는 순분 일행의 모습을 통해, 노동자들이야말로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야말로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단순 '고발 소설'을 넘어 '노동 소설'로 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다. 


사실 이 작품은 상당히 거친 면모가 있다. 문학적으로만 본다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하기가 애매하다. 르포르타주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비롯한 5.18 관련 문학을 문학적으로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 그 사건이 퇴색하면 자연스레 관련 문학도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사건이, 그 사람들이, 그 정신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 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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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어둠의 혼>



<어둠의 혼> 표지 ⓒ아시아



남북 분단은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이다. 해방의 기쁨을 제대로 맞이하기도 전에 찾아 왔기 때문에, 오히려 해방보다 더 크고 깊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단연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남한과 북한, 미국과 소련(중국), 우익과 좌익,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한반도에서 폭발했다. 


대폭발의 결과는 분단이었고 미국과 소련 정권은 분단된 남북을 손아귀에 쥐고 완전 고착화를 실행에 옮기려 했으며 남한과 북한 정권은 그 대치 상태를 이용해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러고는 문제의 핵심을 '분단'에서 다른 것으로 옮기려 했다. 이런 상황을 지식인, 소설가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느니, 곧 '분단 소설'의 탄생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굉장히 고루하고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 초점이 분단을 그리는 '소설'에 있든 소설에서의 '분단'에 있든 지금에 와서는 그러지 않다고 말 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발을 딛고 선 현실이 여전히 분단이기 때문에 그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남북 분단이 한국 근현대사를 규정하는 가장 큰 줄기인 만큼, 분단 소설 또한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큰 줄기라고 생각한다. 


10대 안팎에 겪은 이데올로기의 아픔


분단 소설은 분단과 전쟁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세대와 직접적이지만 간접적에 가깝게 체험한 세대, 그리고 간접적으로 체험한 세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김원일 소설가의 <어둠의 혼>은 두 번째에 해당한다. 즉, 소설가 본인이 분단을 직접 체험하긴 했지만 체험할 당시의 나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전쟁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할 10대 안팎의 나이 말이다. 


소설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949년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인 갑해의 시점으로 보자면, 좌익 운동에 가담했던 아버지가 체포되어 총살 당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기까지의 하루를 그렸다. 갑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는 게 슬플 뿐 당장 해결해야 할 지독한 배고픔에 괴롭다. 그는 아버지가 왜 좌익 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알지 못하고 궁금하지도 않다. 현실이 괴로울 뿐이다. 


분단 소설이라 하면 으레 분단을 직시하고 안타까워하며 그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할 것이다. 노동 소설이 노동자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는 것처럼, 농촌 소설이 무너져 가는 농촌과 화려해지기만 하는 도시를 대비해 어떤 메시지를 던져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이 소설 <어둠의 혼>은 아이의 시선을, 아이의 상황을 따라 '모르쇠'로 일관한다. 다만 현 시대에 대한 부당함을 드러낸다. 이는 이데올로기니 전쟁이니 하는 것들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까지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


그렇다면 아버지가 갑해에게 했던 말은 무엇인가? 빨갱이고 좌익이고 알지 못하지만 그 일을 한 아버지가 죽어야만 한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모두에게 행복과 평등을 가져다주는 길'은 무엇이냐 말이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세상이다. 작가가 본 해방 직후의 세상 또한 갑해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두려움. 


소설의 마지막, 갑해는 두려움과 함께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살아가는 데 용기를 가져야 하고 어떤 어려움과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는 내용의 깨달음. 이 급작스러운 희망에의 역설은 무엇인가. 이 희망이야말로 이 소설이 가지는 기막힌 문학적 균형이며, 이 소설만이 던질 수 있는 메시지이다. 


이는 '아이의 시선'이라는 한 뿌리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무의 상태이기에 쉽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러하기에 시대에 휩쓸리지 않고 또 자기 무력감이나 자신을 망치는 신념에 휘둘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며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반전에 가까운 배치이다. 절망에서 갑자기 쏟아 오른 희망에의 메시지. 하지만 무의 상태이기에 절망에서 희망을 쉽게 낚아 올릴 수 있다. 


아이의 시선은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의도이기도 했던 것 같다. 소설이 쓰인 1970년대는 서슬 퍼런 독재 시대였다. 직접적으로 분단을 이데올로기를 전쟁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러하기에 어른도 아닌 아이의 시선을 통해 우회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 탁월한 선택은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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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한창훈의 <오늘의 운세>



<오늘의 운세> 표지 ⓒ아시아



1987년 형식적으로 나마 민주화가 실현되면서 이후 소설은 중심을 잃은 듯 보였다. '우리'는 흩어지고 '나'만 남게 되었고 '대의'는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자본주의가 우리네 삶에 깊숙이 들어 왔고 이는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너도나도 대도시로 몰려갔고(이미 예전부터 몰려갔지만) 소설은 그들의 삶을 그리기 시작했다(전보다 더욱 공격적으로). 바야흐로 대도시의 자본주의 행태에 대한 탐구가 90년대 소설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도시와 자본주의를 그리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윤정모, 한창훈, 김석중, 전성태 등. 이들 은 그야말로 '희귀'한 소설가들이었다. 아무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소외된 이들을 그려냈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한창훈은 조금 다른 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농촌'에 천착하기 보다 '소외'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의 소설 세계는 농촌과 도시를 아우르고 있다. 


농촌과 도시의 과도기적인 모양새


<오늘의 운세>의 배경 또한 그런 면모를 보인다. 그는 이 소설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세천상회'라고 하는 '요즘 것에 밀려난 고랫것'을 묘사하는데, 그러면서 '그러나 그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세천상회에서 더 들어가면 나오는 공원 정문 앞의 신식 건물과 간이 분수대가 돈 쓰기 좋은 곳이라 젊은이들이 많이 찾지만, 유람객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노인네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옛적 점방 수준'의 세천상회가 딱 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 세천상회에서 시작되는 소설은 농촌과 도시의 과도기적인 모양새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 과도기를 배경으로 과도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일 공산이 크다. 90년대 당시 시대적으로 국가적으로 개인적으로 과도기였던 상황을 그리고자 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용표는 트럭을 몰며 계란을 파는 계란 장수다. 식장산이 보인다니 대전 근처 옥천군에서 장사를 하는 것 같다. 그는 여지 없이 세천상회를 들러 계란을 한 판 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구장집에 들른다. 그때 마침 구장댁 개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 모양인지 구장댁이 욕을 하며 도와주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가 또 와서 농을 쳤는데 용표가 웃어버렸다. 결국 용표는 계란은 팔지도 못하고 욕만 먹고 쫓겨 났다. 


아침에 길을 나서며 아로새겼던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눈조심, 입조심, 손조심. 왜 그런 다짐을 했냐 하면 여동생 용순 때문이었다. 어제 밤에 갑자기 용순이가 아들 아람이를 질질 끌면서 들이닥친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남편한테 얻어 맞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이혼할 거라 떠들어 대는데, 술 취한 매제까지 들이닥치지 않았겠는가. 일진이 좋지 않을 예감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자영업자의 삶


일진이 좋지 않을 예감은 구장댁한테 욕 먹은 일 말고도 3번이나 더 적중한다. 재수 없는 고객 때문에 하루 일당 벌이도 못했고, 술 처먹은 방위병 때문에 애꿎은 조수석만 토사물로 엉망진창이 된 것도 모자라, 버스를 추월하려 다가 경찰한테 딱지를 끊기기 까지 하다니... 딱히 용표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오늘의 운세는 정말 최악이었다. 


용표의 하루는 우리의 평범한 하루와 다를 바 없다. 특히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많은 자영업자들의 삶과 완전히 같아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자영업을 하게 되었든 자의로 자영업을 하게 되었든 말이다. 여러 일간지에서 연재하는 '오늘의 운세'를 진지하게 보는 사람은 없겠고 재미로 보겠지만, 용표에게 있어서 '오늘의 운세'는 삶에 직결되니 만큼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 


문제는 운이라는 게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용표의 하루처럼 불운이 계속되면, 아니 하나라도 찾아오면 그날의 벌이는 신통치 않아 지는 것이다. 그건 곧 생존으로 직결되는 거고. 이 현실을 타파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에서 용표는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을 벌인다. 속이 시원하게도 말이다. 


한창훈 소설가의 균형 감각


경찰한테 딱지를 끊길 위기에 처하자 용표는 모든 비굴을 다 끄집어 내어 딱지의 금액을 낮추려 한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오천 원까지 낮췄는데, 만 원을 받은 경찰이 줄행랑을 치는 게 아닌가? 이에 용표는 계란 트럭을 타고 경찰차를 쫓아간다. 그리고는 확성기로 외친다. 


"빽차(경찰차)는 우측으로, 빽차는 우측으로"


그러고는 외려 경찰에게 소리를 쳤다. 하루 종일 불운했던 용표는 불운의 끝에서 용기를 낸 것이리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의 뜻대로 말이다. 그랬더니 불운의 끝이 운으로 변했다. 경찰이 만 원을 던지고는 도망치듯이 가버린 것이었다. 이 웃픈(웃기고 슬픈) 상황이란.(영화배우 김윤식이 잘 소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짧은 단편 소설 한 편으로도 한창훈 소설가의 균형 감각을 엿볼 수 있다. 농촌과 도시, 불운과 행운, 유머러스와 서글픔, 기쁨과 슬픔 등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아우르면서 절묘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 적절한 균형 자체가 과도기적 상황에서 갈팡질팡 못하는 당대에게, 그리고 지금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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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젓가락여자>



<젓가락여자> 표지 ⓒ아시아



"예리한 바늘이 정곡을 찔러 육체에 음산하고 정교한 수를 놓으며 살 속에서 맴돌던 언어를 해방시킨다"


소설가 천운영이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바늘>로 당선되었을 당시의 심사평이다. 소설을 읽는 다양한 이유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최고의 가치로 치는 게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재미'와 '감동'이다. 이 둘만 있으면 그 소설은 나에게 최고의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이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재미'를 고르겠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갈수록 시선이 바뀌었는데, '감동'조차도 큰 틀에서 '재미'의 요소 중 하나로 편입되었다. 이 둘은 더 이상 동등한 입장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소설을 보고 흔히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읽자마자 그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다. 거기엔 스토리, 캐릭터, 사건, 형식, 문체, 분위기 등의 요소가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녀의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다


천운영 작가의 소설은 접한 적이 없었지만 그 명성과 함께 스타일은 익히 알고 있었다. 누구는 스타일리쉬하다고 하고, 누구는 그로테스트하다고 하며, 누구는 날카롭다고 했으며, 누구는 불편하다고 했다. 종합해서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그녀의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았다. 흔하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았으며 식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젓가락여자>. 제목부터 흥미가 돋지 않는가?


소설은 시종일관 화자의 원맨쇼로 진행된다. 혼자 말하고 혼자 답하는 식이다. 그래서 서술이 일체 없다. 그야말로 한 번 손에 쥐면 물 흐르듯 자연스레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형식도 이러한데, 내용은 더욱 나를 옥죈다. 다음 장을, 아니 끝 장을 보고 싶어 안달 나게 만든다.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소설이 나의 욕망을 부추긴 이유에서 일까?


화자는 조그마한 독서토론회 모임의 회장이다. 그녀는 회원들로부터 서진이라는 유명한 작가를 한 번 초청해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힘 좀 써볼 것을 부탁 받는다. 그녀가 다름 아닌 서진 작가의 학교 후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회원들에게 서진 작가와의 첫만남을 이야기해준다. 한 마디 붙인다. 서진 작가가 자신한테 빚진 게 좀 있다고. 


서진 작가의 본명은 양영은이었다. 영은과 그녀는 첫만남부터 뭔가 통하는 게 있어 사 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어울릴 수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정말 멋진 사람이었던 영은에게 인간적으로 반했던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영은에게는 남의 기운을 자기 쪽으로 끌어모으면서 단번에 잡아 채는 매력이랄지 마력이랄지 아무튼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영은의 별명은 '고물상'이었다. '고민고물상'. 고민을 가지고 가면 들어본 다음에 해결책을 주거나 방향을 제시해주거나 위안을 주었다. 근데 나중에 알고 보기 그 고물들이 소설의 소재가 된 것이 아닌가? 그 중에서도 그녀와 할머니 사이에서 있었던 '닭 모가지' 이야기를 고스란히 소설로 옮긴 게 아닌가? 그녀는 추억이 소설로 되살아났다고 좋아하면서도 그 경험을 소설로 옮기는 행위를 비꼰다. 


"제 추억을 소설로 쓴 게 미안해서 자꾸 그렇게 생각하시나 본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언니가 그 글을 베껴 쓴 것두 아니구. 나한테 들은 얘기 소설로 쓴 건데. 언니가 진정성 이런 거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까. (중략) 물론 언니가 그거 쓰겠다고 나한테 허락을 받은 건 아니지만. 내 추억을 누구도 쓰면 안 된다고 상표등록 해놓은 것도 아니고. 내가 소유권 주장하겠다고 나설 사람도 아니고." (본문 중에서)


소설을 관통하는 욕망의 충돌


소설의 서사는 별 게 없다. 독서토론회 회장이 학교 선배였던 유명한 작가를 초청해 강의를 듣고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부이다. 거기에 어떤 갈등이나 마찰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녀의 시각으로만 소설이 전개되기 때문에 잘 살피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는 갈등도 없는 것 같다. 다만 그녀의 말투가 지독하리 만치 비꼬아져 있고, 중간 중간 섬뜩한 말 한 마디들이 오고갈 뿐이다. 


그 한 마디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설을 관통하는 욕망의 충돌이 보인다. 독서토론회 회장인 그녀는 사실 익명의 파워 블로거(리뷰어)이기도 하다. 그것도 서진 작가의 안티 행위를 선도하는. 서진 작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그 행위들을 모두 다 캡처해 벼르다가 이 만남을 기해 따지려 한 것이다. 이는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다. 


먼저 어떤 짓을 한 건 서진 작가였다. 대학교를 다닐 당시, 그녀를 학생회도 아닌 운동권도 아닌 철학 공부회 비스무리한 비밀스러운 조직(학생 운동)에 집어 넣고 자신은 아예 졸업을 해 소설가가 되겠다고 전문대에 들어갔던 것이다. 5학년으로 남아서 총여학생회장으로 출마해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어 있던 것도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배신'이었다. 


그녀는 이 배신을 잊지 않고 유명 파워 블로거가 되어 서진 작가의 소설 리뷰를 쓴다. 아니 서진 작가의 소설 리뷰를 쓰며 유명해진다. '진정성' 있는 리뷰. 하지만 그 리뷰는 서진 작가에게 만은 '배신'이었다. 자신에게서 체득한 걸로 자신을 공격하는 짓이었던 것이다. 욕망의 충돌은 계속 이어진다. 


그녀는 서진 작가가 타인의 경험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걸 두고 계속해서 비꼬면서 말하고, 서진 작가는 그녀의 블로그 대문에 자신이 대학교 때 해준 이야기를 고스란히 올린 것을 두고 비난한다. 이 둘은 이미 폭발한 게 분명한데, 소설의 형식 상으로 보면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녀의 한 마디에서 유추할 수 있다. 


"언니한테서 깃발을 가져온 건 좀 미안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언니도 내 거 가져가셨잖아요. 

내 닭 모가지." (본문 중에서)


누구라도 한 번 생각해 봤을 것 같은


표절에 대한 욕망인가. 더 크게 보면 글쓰기에 대한 욕망인가. 나만 아는 비밀을 폭로하고 싶은 욕망인가. 이는 소설 쓰기 혹은 작가 되기의 욕망으로 까지 이어지는가. 그녀의 입장에서 더 자세히 보자.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대신 파워 블로거 되어, 다른 방면으로 나마 욕망을 분출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욕망. 


그렇다면 서진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행위는 어떤 욕망인가? 이건 소설가가 소설을 짓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도 평생에 걸쳐 해보지 못할 것이니 남의 이야기 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던 박경리 소설가가 될 수 없었던 서진 작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나? 즉, 남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훔치는 '꼼수'로 소설을 지으려는 질 나쁜 욕망의 분출이었나? 


소설을 읽으며 뜨끔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얘기 같고, 아는 사람의 얘기 같고, 누군가의 얘기 같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한 번은 적어도 한 번은 생각해 봤을 것 같다. 바늘로 천천히 그리고 깊숙이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이 소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게 만든다. 확실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보장한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시리즈와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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