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로우>


우리나라에 개봉될 게 요원한 프랑스산 호러공포영화 <로우>. 근래 본 공포영화 중 최고라 할 수 있으니, 안타깝다... ⓒ포커스 월드



완고한 채식주의자 부모님 밑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쥐스틴, 어쩐지 불안한 심리와 어딘지 불편한 몸의 상태가 엿보인다. 그들은 함께 쥐스틴이 입학할 생텍쥐베리 수의학교로 향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쥐스틴의 부모님이 다녔던 데는 물론 언니 알렉스도 다니고 있는 데다. 그녀에겐 광란에 찬 오리엔테이션과 혹독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동물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토끼 생간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쥐스틴은 채식주의자가 아닌가? 채식주의자일 언니 알렉스는?


칸, 토론토, 런던, 선댄스, 시체스 영화제 등 세계 유수 영화제를 섬렵하고 한국의 부천 영화제에 상륙해 호평을 받은 영화 <로우>의 시작이다. 프랑스 태생인 이 영화는 자그마치 '줄리아 듀코나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흔치 않은 프랑스 호러공포 영화로, 할리우드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목 그대로 '날 것'의 공포를 선사한다. 


최근 다시금 활발히 활동하는 프랑스 최고의 국민배우 '이자벨 위페르' 덕분에 생전 접하지 않았던 프랑스 영화를 몇 번 잇따라 보았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것들을 <로우>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떤 장르에서도 보는 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와 정반대랄까. 최대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하되, 대신 그 자체에 충분한 접함점이 있어 더 빨려들어 더 집중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성장, 그리고 억압에서 해방되어 얻은 자유


<로우>는 공포, 그중에서도 식인공포의 탈을 쓴 '성장' 영화다. ⓒ포커스 월드



신입생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이거니와 이행하지 않을 땐 전교적 왕따가 될 수 있기에 쥐스틴은 살아생전 처음으로 육식의 대상인 토끼 생간을 먹는다. 당연히 뒤탈이 날 수밖에. 그녀는 온몸에 심한 피부질환을 앓는다. 마치 육식을 시작한 이라면 반드시 치러야 할 신고식처럼. 이후 그녀는 육식에의 충동과 욕망에 휩싸인다. 


영화는 크게 쥐스틴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과 쥐스틴의 변화로 상징되는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는 도식의 측면으로 나눠 바라볼 수 있다. 부모님과 언니가 걸어간 길을 그녀 또한 걸어간다.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을 넘어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지극히 협소한 성장 개념이지만 최소한의 의미는 있다. 


쥐스틴은 채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유산으로, 채식이든 육식이든 잡식이든 자신의 본능을 겪을 시간이나 기회를 박탈당한 채,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육체가 도처에 깔린 수의학과에 와서 본능의 해방을 경험한다. 처음은 타인에 의한 강제였지만, 이후의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다. 


물론 그녀가 휩싸인 충동과 욕망이 오롯이 그녀의 선택이고 몫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경험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선택은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정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그녀는 이제 한 번이라도 육식을 경험한 후이니, 적어도 육식에의 충동과 욕망은 그녀의 선택이고 몫이라 하겠다. 그때 그녀는 자유를 얻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인육보다 무서운, 욕망의 덩어리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분출'이 단순 성장을 넘어 인간의 근원 탐구로 나아간다. 자못 심오하다. ⓒ포커스 월드



문제는, 채식주의자였던 그녀가 단순히 육식을 원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녀는 그 너머, '인육'을 향한 욕망에 휩싸인다. 거기엔 어떤 인자가 있을 터, 알고 보니 언니 알렉스도 인육을 먹었던 것이다. 가족력인가? 알 수 없다. 어쨋든 쥐스틴은 다시 자신을 억압하려 한다. 그건 되돌릴 수 없는 죄악이니 말이다. 물론 쉽지 않다. 반면 알렉스는 이미 주최할 수 없을 만큼 멀리 가버린 듯하다. 


쥐스틴이 인육에 눈을 뜨며 함께 나온 게 있다. 한 번도 남자 경험이 없는 그녀에게 찾아온 이성에의 눈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육식에의 욕망 이상의 것이 곧바로 찾아온 것처럼, 그녀에게 이성에의 눈 이상의 '섹슈얼리티'가 찾아온 것 같다. 그야말로 욕망 이상의 욕망으로, 채식이라는 극단에서 발화한 정반대의 극단이 아닌가 싶다.


욕망은 사람을 삼켜버리기 일쑤다. 우린 종종 욕망에 몸과 마음과 머리를 맡겨버리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DNA 깊숙이 박혀 있기에 하찮은 이성으로 중심을 잡긴 힘들지 않을까. 쥐스틴과 알렉스는 거기서 파생된 억압하는 이성과 표류하는 감성의 표본과 같다. 쥐스틴은 이성으로 그 엄청난 것들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정말 쉽지 않다. 반면 알렉스는 포기한듯 즐기는듯 자신의 모든 걸 욕망에 맡겨버렸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고 무서운 건, 그래서 인육을 먹는 장면 따위가 아니다. 쥐스틴과 알렉스가 욕망에 몸부림치는 장면들, 욕망에 이끌려가는 장면들, 욕망과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장면들이다. 특히 한없이 여리고 어리바리했던 쥐스틴의 표정에 짙은 갈망이 점차 묻어가 급기야 코피까지 흘리는 장면은 압권이다. 거기엔 인육과 섹스와 지배에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시나리오, 연기, 카메라 그리고 영화 외적인 것들


이 작은 영화는 기술적으로도 뒤지지 않는다.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다고 할까. ⓒ포커스 월드



쥐스틴과 알렉스는 정반대의 인물로 시작되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김없이 정반대의 습성이 가지는, 자신만의 표시를 가차없이 상대에 가한다. 한 핏줄로서 가지는 극도의 모순을 날 것으로 표현해낸 시나리오에 찬사를 보내며, 역시 날 것으로 연기해낸 배우들에게 기대에 찬 박수를 보낸다. 


쥐스틴의 오락가락하는 이성과 감성의 싸움 덕분에, 강렬한 순간과 정적인 순간이 교차된다. 그 순간들의 교차가 물 흘러가듯 보이는 건 다분히 카메라 덕분이겠다. 숏워킹과 롱테이크가 기술적으로 한 점 오차 없이 선보이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 적재적소라는 말은 이런 것을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공포가 단순히 감정적 최전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장르가 아님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공포를 느낄 때는 물론이고 그 전후로 우리가 느끼고 깨닫고 다시금 생각해봐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아무래도 문제는 공포가 아닌 공포 '영화'겠지. 영화 외적인 것들이 영화를 잠식하는 '구조'겠지. 그런 구조 안에서 '공포'의 본질을 떠들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마 <로우>는 우리나라에서 정식 극장 개봉하진 못할 것이다. 자극의 강도가 아닌 자극의 층위와 역할이 할리우드의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해준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알고 극장을 찾으며 관계자분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겠다. 20년 가까이 된 '식인 영화' <양들의 침묵>에 비추어 보아, 조금의 기대를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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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