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열전] 하정우
개인적으로 '하정우'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된 작품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청어람
2005년, 일병 정기휴가 때였다. TV를 틀어 우연히 보게 된 게 하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 현역 군인이 제대로 된 한국 군대 영화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못해 빨려들어 갈 것 같았다. 저 상병과 병장은 미래의 내 모습일 것 같고, 저 일병은 현재 내 모습인 것 같고, 저 이등병은 얼마 전 내 모습인 것 같고...
그때 배우 하정우를 처음으로 보았다. 하정우가 분한 유태정 병장의 군대 생활과 제대 이후를 교차 편집해 보여주며, 그의 중학교 적 친구 이승영이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과 맛물려 누가 진짜 '용서받지 못한 자'인가를 신랄하고 가슴 아프게 전한다. 하정우의 실생활적 면모에 기반한 연극적·영화적 연기를 두루 감상할 수 있는데, 윤종빈 감독이 중요한 역으로 나와 함께 전설적 캐미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작품이 하정우의 스크린 데뷔작은 아니다. 그는 2002년에 드라마와 영화로 데뷔해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도 역시 드라마와 영화를 오갔다.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자>가 개봉하기 전에 이미 <잠복근무>라는 당시 메이저급 영화에 조연으로 얼굴을 알리기도 했고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나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얼굴과 이름을 알리기 위한 방편처럼 느껴진다.
열일 하정우
'열일' 하정우의 한창 때 작품이자, '대세' 하정우로의 다리가 되어준 작품 <추격자>의 한 장면. ⓒ쇼박스
그는 1998년부터 데뷔를 하고 나서인 2003년까지 거의 매년 한두 작품씩 연극무대에 섰는데, 그 나이 때 배우들이 많이들 듣는 '발연기' 논란 한 번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김용건'이라는 전국민이 누구나 알 만한 배우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완전히 버리고 오로지 자기만의 클래스를 만들고자 한, 멀고 험하지만 알차고 지능적인 경력생활이다.
하정우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윤종빈이다. 이들은 자그마치 4편을 함께 하는데, 하정우는 단연코 어느 한 감독과 그만큼의 영화를 함께 하지 않았다. '페르소나'라고 할까. 이들은 다름 아닌 대학 선후배 관계다. 둘 다 중앙대학교 출신으로 하정우는 1978년생 연극학과, 윤종빈은 1979년생 영화학과. <용서받지 못한 자>는 윤종빈 감독의 졸업작품인데, 하정우를 비롯 학교 선후배를 총동원해서 찍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 이들은 훗날 일명 '윤종빈 사단'이 되어 많은 영화를 함께 했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하정우는 말그대로 '열일' 한다. 하정우 하면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먹방과 열일인데, 열일 수식어는 아마 이때부터 그 싹이 보이지 않았나 싶다. 2년 동안 그는 자그마치 단역, 조주연 가릴 것 없이 6개 영화에 출연한다. 대부분 비대중적이지만, 모든 면에서 그의 연기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영화들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2008년이다. '대세' 하정우의 시작이다.
2005년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 2008년 <추격자>야말로 하정우의 이름값을 수직상승시킨 영화다. 희대의 사이코패스 지영민은 2000년대는 물론 한국영화사에 남을 만한 캐릭터로, 하정우는 '능청스럽게' 연기해버린다. <공공의 적>의 사이코패스 조규환이 준 충격을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10년이 지났어도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는 그 눈빛과 행동, 그의 나이 불과 31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해, 단역 한 편과 주연 세 편을 합쳐 네 편의 영화에 출현했다. 윤종빈 감독과 함께 한 <비스티 보이즈>처럼 조금 아까운 영화도 있고, <멋진 하루>처럼 멋진 영화도 있다.
대세 하정우
그야말로 '대세' 하정우의 한 가운데에서 흥행과 비평, 이슈 모두 훌륭했던 작품 <터널>의 한 장면. ⓒ쇼박스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하정우라는 배우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굳어진 시점이. 사이코패스조차 능청스럽게 연기해버리는, 그만의 특유한 연기 방식이 말이다. 그는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사람의 모습을 띤다. 거기에 어떤 '연기적' 요소를 찾기 힘들다. 여타 연기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톤 앤 매너가 그에겐 없다.
반면, 지극히 '연극적' 요소는 항상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내 주위에도 있는데, 연극적인 일반인 말이다. 하정우는 그 연극적 요소들을 깨알같이 잘게 부수어 연기 전반에 촘촘히 박는다. 부자연스러움은 옅어지고 신선함과 재미짐이 떠오르는 광경을 우린 목격할 수 있다.
2008년 이후, 아니 2005년 이후 2016년까지 2014년을 제외하고 하정우는 일 년에 두 편 이상 영화에 출현하지 않은 때가 없다. 그리고 최소 한 편 이상 흥행, 비평, 이슈 등으로 한 해 영화계를 흔들 만한 메이저급 영화에 출현한다. 나열해 보자면 2009년 <국가대표>, 2010년 <황해>, 2011년 <의뢰인>, 2012년 <범죄와의 전쟁>, 2013년 <베를린> <더 테러 라이브>, 2014년 <군도>, 2015년 <암살>, 2016년 <터널> <아가씨>... 누군가는 한 편 출현하기에도 힘들 영화들이다. 그리고 올해에는 엄청난 제작비와 함께 그 만듦새 때문에 엄청난 걱정거리(?)를 안기고 있는 <신과 함께>가 대기 중이다.
하정우 하면 다가오는 이미지가 '믿음'과 '탄탄' 등일 것이다. 탄탄한 연기에 기반한 믿음가는 영화 또는 캐릭터랄까. 그건 하정우라는 사람한테까지도 충분히 적용될 만하다. 그는 이에 부응하듯 배우라는 타이틀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방면으로 진출하고 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종합예술인 하정우
'아티스트' 하정우로서의 작품들이다. 하정우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인이 아닌가. ⓒ하정우
영화 감독 타이틀이 그중 하나일 것이다. 2013년 <롤러코스터>와 2015년 <허삼관>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까지 했다. <허삼관>에는 주연까지 도맡아 했다. 비록 두 작품 모두 흥행 면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고 비평 면에서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그 도전 자체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배우 열일로도 충분히 바쁠 텐데, 언제 글을 쓰고 연출까지 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는 엄연히 수많은 아트페어와 개인전까지 연 '아티스트'다.
하정우 열일의 절정기이자 대세 하정우의 시작점인 2008년, 그는 이미 아티스트로의 길을 암중모색했을 것이다. <국가대표>로 국가대표급 배우로 자리매김한 그때 2009년, 자원순환 정크아트 공모전에 작품을 기증한다. 그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는데, 캐릭터의 이미지와 심리를 연상시키는 그림들이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독백과 세상을 향한 방백을 그림으로 승화시키며, 인간, 배우, 남자로서 스크린에서 하지 못했던 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화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리라.
그야말로 하정우를 '종합예술인'이라고 칭해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배우라는 타이틀에 한정짓기에는 하정우라는 사람의 면면이 너무 방대하고 이채롭다. 연극, TV드라마,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감독. 그리고 에세이 작가, 그림 작가까지. 그 자체로 현대 '종합예술'의 결정판으로 여겨지는 영화의 한 가운데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그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하지만 같은 길을 가는 방면을 개척해 역시 중심으로 다가가고 있는 그.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싶지만, 그의 이름 석 자가 아로새긴 예정작들이 즐비하다. 우린 그저 즐거울 뿐이다. 열일하는 그가 부러우면서 믿음직하고, 한없이 대세인 그가 계속 대세였으면 좋겠으며, 종합예술의 경지에 오른 그가 더 멀리 오래 비상하기 위해 조금은 몸을 추스렸으면 한다. 오래된 팬으로서 갖는 아이러니이지만, 여하튼 그를 여기저기에서 꾸준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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