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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도서

이 시대에 울림을 주는, 성 문제와 갑을 문제 지침서 <예민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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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민해도 괜찮아>

<예민해도 괜찮아> 표지 ⓒ북스코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로 삼성을 상대로 싸워 이긴 후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로 돌아온 이은의 변호사가 쓴 책 <예민해도 괜찮다>(북스코프), 삼성과 로스쿨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와 변호사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경험한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냈구나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 짐작이 맞긴 맞되,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 단순히 여성의 성희롱과 성폭행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그 전에는 37살 늦은 나이에 전남대학교 로스쿨에 들어갔다. 이전에는 몇 안 되는 대졸 여사원으로 대기업 삼성에 들어가 제법 잘나가는 해외영업 사원으로 일했다. 그녀의 경력을 보면 일명 '엄친딸'이라고 할 만하다. 능력 있고 운도 좋고 자신감과 자존감까지 갖춘 완벽한 여자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그녀가 어째서 이런 책을 썼을까?

그녀의 경력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녀는 '피해자 편에 서서' 변호사 일을 하고 있고, 늦은 나이에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채 로스쿨에 들어가 많은 '서러움과 차별'을 받았으며, 12년 넘게 일한 대기업 삼성에서는 '4년 넘게 회사와 전쟁을 했기 때문에' 그 생활이 평탄하지 않았고 나아가 불행하기까지 했다. 이를 관통하는 게 여성으로서 받게 되는 성차별과 성피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것들이 단순히 성 문제가 아니라  갑을 관계, 즉 권력 관계의 문제라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 문제가 아니다. 인간 대 인간의 문제이고 가해자든 피해자든 주변인이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목 '예민해도 괜찮아'에서 예민해야 할 주체는 오로지 여성 만이 아니고, 대상은 오로지 남성이 아니다. 여성이 그 주체가 되기 쉬우며 대상이 남성이 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주체는 인간이며, 대상은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상한 체험을 바탕으로 성 문제를 다루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는 건, 천착할 수밖에 없는 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남성의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 등의 성 문제이다. 저자는 자신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자신을 찾아온 수많은 성범죄 피해자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에서 핵심을 뽑아 정보를 전하고 교훈을 전하고 담론도 생성한다. 

성범죄 사건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주변인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우리 대부분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주변인이 될 확률이 높은데, 성범죄 사건에서 '처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실상 주변인들의 시선과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가해자의 시선에 동일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주변인이 존중과 배려, 그리고 피해자의 시선에 동일시하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폭력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흥미롭다. 아니, 엄밀히 새로운 해석은 아니다. '재인지'라고 하는 게 맞겠다. 저자는 데이트폭력을 '폭력'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는 그저 폭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데이트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데이트+폭력'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폭력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인지해야 발생 초기에 관계를 차단하거나 신고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폭력 앞에 사랑 없고, 폭력 뒤에도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피해자들의 용기

저자는 '여자들이 살기 편해진 세상'이라며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처럼 되어 버린 세상이라, 오히려 더 무섭다고 한다. 바로 잘 보이지 않는 차별 때문이다. 여전히 기업에서 채용한 인재의 남녀의 성비는 평등과는 거리가 멀고, 상위 직급으로 갈수록 여성이 희소 해지는 게 사실이다. 젊음이 소진된 여성 인력은 교체해야 하는 대상인 양 생각하기 일쑤다. 

"여성들에게 유리해진 부분은 여성이란 존재에 대한 우리 사회의 존중 의식이 높아져서가 아니다. 우선은 IMF 이후 가족의 부양의무를 가장에게만 떠안기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 인력을 필요로 하는 수요 역시 늘어나면서 맞벌이를 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입맛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136쪽)

한편 저자는 피해자들이야말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00% 동의하기 힘들다. 용기를 내라고 강요할 수 만은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용기를 내어 세상이 바뀌는 큰 결과를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힘들었을 게 아닌가. 이런 사건의 경우, 각자의 판단에 맞기는 게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 오히려 당사자들이 아닌 주변인들이 조심스럽게 나마 나서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 만의 연대가 아닌 피해자와 주변인의 연대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다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힘희롱'이다. 이 힘희롱 안에 성 문제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즉, 보다 근원적인 문제인 것이다. 이 프레임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시선으로 바라 보아야만 근본적으로 다가갈 수 있고,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성 문제를 성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보고 접근한다면 대다수를 차지하는 주변인들에게 큰 울림과 변화를 줄 수 없다. 

이 책은 어떻게 보든 상당히 여성 중심적이다. 그래서 필자 같은 남성이 보기엔 조금 거북할 수 있다. 아무리 남녀 문제나 남녀 간의 성 문제가 아니라 소수자 문제이자 권력 관계 문제라고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여자들끼리 손잡고 여성 피해자들이 뭉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남자와 여자의 완전한 평등을 지향하고, 평등을 전제로 사고를 펼치는 것. 그러기 위해선 남자 뿐만 아니라 여자의 생각과 행동도 변해야 한다는 것. 똑 소리 나는 현실 판단과 과감한 비판, 믿음직하고 의지가 되는 이론의 정립과 방향 제시. 저자의 존경할 만한 생각의 지도는 이 시대에 충분한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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