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어느 날 갑자기, 살아남아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살아남아 버렸다> 표지 ⓒ 궁리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 지역을 진도 9.0의 지진이 강타한다. 여러모로 현실 속 또 다른 지옥에서 헤메던 나는 그 현장에 많은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곳은 지옥 그 자체였다. 또 다른 지옥의 현장이 여기 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어디서 갑자기 날아온 정체 모를 비행기로 미국의 상징은 두 동강이 나 주저앉는다.
그런데 그곳에 내가 살아남아버렸다면? 나는 이 파국의 위기 앞에서 훌륭하게 생존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이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흥미로라도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게끔 하는 책이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살아남아 버렸다>(궁리). 책의 제목에서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종말과도 같은 파국의 상황에서'.
저자는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이라는 주제에 대해 10여년 동안을 탐구해 온다. '파국의 세기말'을 테마로 한 일본 만화, 쏟아져 나오는 좀비 영화의 갑작스런 번식의 이유, 21세기의 개막과 함께 전 세계를 휩쓴 리얼리티 TV쇼,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는 은둔형 외툴이. 그의 직업의 근간인 만화, 영화, TV, 책에서 지극히 극단적이고 다채로운 서바이벌 상황을 만나, 책에서 소상히 풀어낸다. 그 시작은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한다.
'당신의 밑바닥은 어디죠?'
파국을 상상함으로써 가장 기초적인 삶을 확인한다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파국의 시나리오, 즉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을 가정해보며 시작된다. 전쟁, 테러, 대형 붕괴 사고, 천재지변, 전염병과 좀비, 경제적 파국, 조난과 표류, 리얼리티 서바이벌쇼, 골방의 표류자까지. 그러며 파국의 시나리오 구성을 돕기 위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만화, 영화, 소설을 차용한다. 거기엔 <나는 전설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전염병과 좀비), <로빈슨 크루소> <캐스트 어웨이> <로스트>(조난과 표류), <빅 브라더> <서바이버>(리얼리티 서바이벌 쇼) 등이 있다.
그러며 저자는 우리가 판단해야 할 일을 찾아간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엇이 위협하고 있는지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이고,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확보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이 있을까? 평소에 생각해 놓지 않는다면 파국의 순간에 우리는 손놓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직장인은 직장에, 학생은 학교에, 군인은 군부대에 있겠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사항 밖에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무엇을 확보해야 하는지. 물, 식량, 불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어 옷과 집이 마련된다면, 의료와 통신 그리고 이동수단을 강구해야만 할 것이다.
파국이 시작될 때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무엇일 것이다. 무형의 재산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건 '지식'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유형의 재산은 누가 뺏어갈 염려가 있고 있다가 없어지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지지만, 무형의 재산은 누가 뺏어갈 염려가 없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파국의 상황에서 맞이하는 도덕과 권력의 그라운드 제로
파국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생존자들로 하여금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좀비 영화에서 보여지는 무너진 울타리와 그 사이로 몰려드는 좀비들이 상징하는 것일 텐데, 치안이 무너진 곳에서 나오는 갖가지 흉악 범죄(자)들이다. 모든 문명의 장치들이 무너지면서 보편적인 도덕, 도덕을 강제로 지키게 하는 법률, 법률을 행하는 장치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휴지조각처럼 해체된다. 하지만 저자는 그 상태를 무도덕 상태로 보지 않는다. 인간은 새로운 형태의 도덕 상태를 형성한다.
저자는 소설 <파리대왕> <15소년 표류기>, 미국드라마 <로스트>, 영화 <28일 후> 그리고 TV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 <서바이버> 등을 예로 들어 도덕과 권력의 그라운드 제로 즉, 모든 것이 초기화 된 상황에서의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10장으로 된 책에서 5, 6, 7장에 해당하는데, 내용적으로 핵심이자 개인적으로 제일 흥미로운 부분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일 때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건 사실이지만, 두 사람이 넘어가는 순간부터 의견대립이 발생하고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서나 영화 <캐스트 어웨이> 등에서 처럼, 혼자서 서바이벌 게임을 헤쳐나가지 않는 이상 말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탈출과 정착 중 어느 쪽이 옳은가가 아니다. 팀 내에서 중대한 의견 차이가 생겨났을 때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하는가의 문제다."(190쪽)
공동의 적을 향해 힘을 합치기도 하고, 모두의 생존을 위해 식량을 공유하기도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민주적인 절차를 이용하는 것과 힘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이다. 비록 실제는 아니지만 <서바이버>처럼 투표로 탈락자를 가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생각해봐야 하는 건 결코 파국의 시나리오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디딛고 있는 이 현실 세계도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던져진 나는?
파국의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의 파국은 매일매일 옥죄어 오고 있다. 저자에게 진정한 공포를 선사하는 것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만든 시스템 즉, 신자유주의 생존 경쟁 시스템이라고 한다.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지진도 쓰나미도 지구 온난화도 아니다. 진정한 공포는 사람이다. 퀭한 눈빛의 좀비들을 끝없이 양산해내는 이 바보 같은 시스템이다. 수천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마이너스로 깐 채 졸업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스펙 쌓기에 매달리지만 변변한 일자리 하나를 구하지 못해 절망에 빠진 세대가 있다.(중략)
그들의 일부는 대학가 고시원에서 기거하며 미래의 대박을 꿈꾸고 멘토들을 찾아다니며, 또 이리부는 부모의 품에 안긴 채 취직 시험까지 코치를 받는 패러사이트 싱글의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골방에 기어들어가 문을 꼭꼭 닫은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중략)
그들 속에 누적된 불만이 어느 날 폭발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기도 한다. 저들이 맹목적인 생존 본능으로 파괴와 약탈을 일삼는 존재가 된다면, 나는 어떻게 맞서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묵시록이라고 생각한다."(362쪽)
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굳이 파국의 시나리오를 상정할 것도 없이, 현실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던져진 우리는 이미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하고 있다. 노예 아닌 노예가 되어, 좀비 아닌 좀비가 되어 자의식 없이 꾸역꾸역 일만 하다가 버려지기 일쑤이다.
'골방의 표류자'인 은둔형 외톨이는 이런 시대에서 살아나기에 적합한 새로운 인류일 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들의 골방이 지옥일수도 천국일 수도 있는 것처럼, 수많은 텍스트를 통해 그려지는 '무인도'에서는 지옥 또는 유토피아가 펼쳐진다. 당신들의 선택, 우리들의 선택은 어떠한가?
저자는 좁은 집구석에서 모든 걸 떨쳐버리고 옥상 위로 뛰어 올라가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위할 것은 서로 밀쳐서 떨어뜨리지 말 것. 그렇게 계속 떨어뜨리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이다. 진정한 해답은 내가 속한 이 집단이 함께 생존할 가능성을 찾는 것.
지금까지의 정형화된 메뉴얼은 집어 던져라. 생존을 위해서는 내 스스로, 우리 스스로 판단해 걷고 뛰고 답을 찾아야 된다. 파국을 조금이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파국의 밑바닥에서 기어올라와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삶을 역설로 체험하는 것이다. 서바이벌의 밑바닥에 뛰어내려 그 지옥을 만져보는 일은 곧 우리의 일상을 거울을 통해 비춰보는 것이다."(366쪽)
"오마이뉴스" 2013.1.8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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