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미저리>
영화 <미저리> ⓒ 콜롬비아 픽쳐스
아서 코난 도일은 1893년 <셜록 홈즈의 회상록> 최종장인 '마지막 사건'을 통해 셜록 홈즈를 폭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인다. 아서 코난 도일은 이로써 1887년 <주홍색 연구>부터 시작된 '셜록 홈즈' 시리즈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대중소설가에서 진정한 문학가로의 전환을 모색한다.
하지만 셜록 홈즈는 더 이상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팬들의 입장에서 셜록 홈즈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고, 그의 죽음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처럼 팬들의 반대가 계속되었고, 아서 코난 도일은 셜록 홈즈 캐릭터가 아닌 소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10 여 년 만에 셜록 홈즈를 살려냈다.
열렬한 미치광이 팬과의 극적 조우
여기서 눈길이 가는 건 셜록 홈즈의 죽음에 대한 팬들의 반응. 영화 <미저리>는 이런 팬의 반응이 극으로 달한 모습을 중심으로 극을 끌고 나간다. '미저리'라는 여주인공을 출현 시킨 미저리 시리즈로 엄청난 인기를 구사하는 작가 폴 쉘던(제임스 칸 분)은 미저리의 죽음으로 시리즈를 완결 짓고 순수문학가로의 전환을 모색하려 한다. 그러며 작품을 짓기 위해 산속 호텔로 향한다. 하지만 갑자기 몰아치는 눈보라로 인해 벼랑으로 곤두박질 치고 만다. 그런 그에게 도움의 손길이 다가온다.
죽을 고비를 넘긴 그를 도와준 건 그의 열렬한 팬을 자청하는 간호사 출신 애니 윌키스(케시 베이츠 분). 그녀는 산속 산장에서 폴을 열심히 간호한다. 그러면서 팬의 입장에서 숭배하는 작가의 미발간 작품을 제일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서 미저리 시리즈 완결편을 보게 된다. 매일같이 조금씩 읽고 감상을 전해주는 애니. 찬양의 찬양을 거듭한다. 하지만 어느 날, 미저리의 죽음을 알게 된 애니는 폴에게 엄청난 분노를 표출한다. 그녀에게 미저리는 절대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영화 <미저리>의 한 장면. ⓒ 콜롬비아 픽쳐스
"당신, 이 나쁜 인간. 이럴 수가 있어? 그녀를 죽여선 안돼. 미저리 채스틴은 죽으면 안 돼. 난 미저리를 원해! 당신이 그녀를 죽였어!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당신은 늙고 더러운 거짓말쟁이야."
이 영화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의 <미저리>(1987년)를 원작으로 했다.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따랐고, 큰 예산을 투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건 영화를 감상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단 한 가지만 봐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바로 애니 윌키스를 연기한 '케시 베이츠'의 연기이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또 극진히 보살피는 천사 같은 연기와 그것이 배신 당했다고 느꼈을 때 나오는 극도의 분노와 광기의 연기, 한 사람한테서 이처럼 양 극단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녀의 연기 하나만으로 이 영화는 영화 역사상 최고의 공포 스릴러 중 하나로 남을 수 있었다.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유명 작가
이제 영화는 어떻게든 빠져 나가려는 폴이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모습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애니는 미저리가 죽는 완결편 원고를 폴이 직접 불태우게 한 다음, 미저리가 죽지 않는 원고를 집필하게 강요한다. 책상, 의자, 타자기, 종이 등을 직접 가져다 주고 몇 날 며칠이고 앉아서 쓰게 한 것이다. 폴은 살기 위해서 써야 했다.
영화 <미저리>의 한 장면. ⓒ 콜롬비아 픽쳐스
"저질 원고를 태웠으니 이제 좋은 작품을 써야죠. 최고의 소설을 새로 쓰는 거예요. 돌아온 미저리.
그녀를 죽게 한 건 진심이 아니었잖아요. 날 위해 써 줘요. 난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이 세상 모두가 날 부러워할 걸요?"
한편 폴의 저작권 대리인은 폴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이 일을 늙은 보안관이 맞게 되는데, 의외로 명석해서 범위를 점점 좁혀간다. 이 부분에서 강하게 생각나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다. 이 영화에서도 늙은 보안관 한 명이 명석하게 범위를 좁혀 간다. 하지만 그는 항상 한 발자국 느리다. 결국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미저리>에서도 늙은 보안관은 사건 해결의 끝자락에서 실패하고 만다. <노인을 위한...>에서는 이를 운명론에 입각해 해석한다. 과연 <미저리>에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한편 폴과 애니는 나름 좋은(?) 시간을 보낸다. 다만 이것은 폴이 일부러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애니로 하여금 방심하게 해 놓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려 한 것이다. 그러던 중 폴은 애니의 과거를 알게 된다. 그녀는 정신병자로 간호사 시절 몇 명의 유아를 죽게끔 만들었다. 기어코 폴은 최후의 수단을 이용해 탈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늙은 보안관은 애니의 산장에서 폴의 기척을 듣게 된다. 과연 폴은 탈출에 성공하게 될까?
이 영화를 감상하는 다양한 방법
이 영화를 감상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분위기를 통해 공포스릴러로 감상하며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게 제일 무난한 방법이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열렬한 팬의 죽음의 협박으로 살기 위해 산장에 갇혀 글을 쓰는, 두 다리를 못 쓰는 유명한 작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도 언제 돌변할 지 모르는 미치광이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서.
영화 <미저리>의 한 장면. ⓒ 콜롬비아 픽쳐스
또 다른 면에서 감상할 수도 있다. 작가와 독자, 그리고 작품의 관계이다. 작품의 저작권은 엄연히 작가에게 있다. 작가가 마음대로 창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아무도 그의 작품을 읽어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결국 독자에게 맞춰서 써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자 스티븐 킹은 작가의 이런 고민을 소설로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부러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장면도 넣었을 것이다. 그런데 애니의 입김 아래서 완성된 돌아온 미저리가 이례적으로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그려진다.
무섭게 그려낸 공포 스릴러가 아닌, 정말 재밌게 그려낸 공포 스릴러라 말할 수 있겠다. 이 길지 않은 러닝 타임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도 많지만 결코 중구난방이지 않다. 거의 모든 장면 장면들이 명장면이며, 스토리 라인과 배경이 간결해서 지루할 만 하지만 외려 그것을 장점으로 승화 시킨다. 긴장감을 배가 시키는 데에는 오히려 간결하게 집중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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