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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열전/신작 영화

선악의 경계에 서 있는 아이들이 보여주는 불편한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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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이노센트>

 

영화 <이노센트> 포스터.&nbsp;ⓒ스튜디오 디에이치엘

 

9살 여아 이다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언니 안나,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새로운 곳의 아파트로 이사를 온다. 이다는 언니를 시샘해 몰래 못된 짓을 하기도 하는데, 부모님이 더 어린 자신 말고 언니에게 훨씬 더 많은 관심을 쏟기 때문이다. 비록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졌기에 항상 옆에서 보살펴 주며 계속 말을 시키고 행동다운 행동을 유발해야 하지만 말이다.

동네를 둘러보는 이다, 벤자민이라는 남자아이와 친구가 된다. 자연과 벗 삼아 놀다가 벤자민이 신기한 능력을 선보인다. 그는 사물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말해 봤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비밀 아닌 비밀이 생겼다. 한편 백반증을 앓고 있는 여자아이 아이샤는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어느 누구와도 친해지기 힘든 안나와 친해진다.

이다와 벤자민, 안나와 아이샤는 따로 또 같이 어울린다. 하지만 벤자민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양이를 죽이는 모습을 본 이다는 한편으론 충격적이었지만 한편으론 희열을 느낀 것 같아 혼란스럽다. 자기는 언니와 말이 안 통하고 언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반면 아이샤는 너무나도 잘 아니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와중에 동네에서 이상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다와 안나 그리고 아이샤는 누가 저지른 일인지 알고 있다.

 

노르웨이 영화의 현재이자 미래

 

노르웨이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감독이 있다. <라우더 댄 밤즈> <델마> 그리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등을 연출한 '요아킴 트리에'다. 누구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이야기로 내놓는 작품마다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타는 건 물론 대중적으로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니, 노르웨이 영화의 현재이자 미래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주지한 모든 작품들의 각본 작업을 맡은 이가 있다. 일찍이 <블라인드>라는 영화로 성공적인 연출 데뷔를 이룬 '에실 보그트'다. 요아킴 트리에의 작품 세계의 핵심이자 중추다. 그가 실로 오랜만에 연출작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서늘하면서 풍부한 상상력과 설득력이 충분히 발휘된 영화로, '아이'라는 객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나아가 '동심'이라고 칭하는 아이의 마음, 아이의 세계를 눈앞으로 불러왔다.

영화 <이노센트>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아무런 설명도 없는 '순수', 아이들을 바라볼 때 어른이 느끼는 바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의미에서 순수하다고 칭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 작품은 '순수'라는 단어를 다르게 바라본다. 순수한 악이 될 수도, 순수한 선이 될 수도 있는 아이들의 본성을 그려내고자 했다.

 

순수한 악인가, 순수한 선인가

 

어렸을 때를 떠올려본다. 괴롭힘의 대상은 주로 곤충이었다. 강제로 싸움을 붙인다든지 집을 파괴해 버린다든지 잠자리 꼬리에 실을 매달아 연 날리기처럼 날려본다든지… 이보다 더 끔찍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특별한 이유나 의도 없이 무심결에 저질렀다. 나쁜 행동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곤충 따위 뭐 어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악이 서린 폭력성일까.

이다와 벤자민이 처음 만나 벤자민의 특출 난 재주를 보고 감탄하며 함께 천진난만하게 개미집을 파괴한다. 이후엔 벤자민이 길고양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곤 눈물을 흘린다. 보고도 믿기 힘든 폭력성이다. 영화는 여기서 나아가 벤자민에게 힘을 부여한다. 사물은 물론 사람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힘 말이다. 순수한 악의 결정체처럼 폭력을 행하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힘이 부여된다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을까.

그런가 하면 벤자민의 대척점에 아이샤가 있다. 그녀는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에 안나와 소통할 수 있다. 하여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안나와 친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다는 딱히 힘을 가진 것 같지도 않고 벤자민처럼 폭력 어린 악의 결정체도 아닌 것이 아이샤처럼 선하디 선한 것 같지도 않다. 갈팡질팡 어쩌질 못해 헤매고 있다. 안나는 벤자민이 조종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다른 차원의 단단함이다.

인간의 본성을 두고 동양에선 성선설, 성악설, 성무성악설 등의 주장이 있다. 선한지 악한지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지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는지. 이 영화는 어느 주장에 방점을 뒀을까.

 

내면의 불편한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

 

아이들이 주인공인 호러 영화는 대체로 아이들이 주체로 작동하지 않는다. 선의 결정체 아이들이 악의 결정체에 대항해 살아남고자 한다. 어른이 할 수 없는 애초에 알아차릴 수조차 없는 바, 오직 아이들만이 해낼 수 있다. 반면 이 영화는 아이와 아이가 대면한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선인지 악인지 또는 저 친구가 악인지 선인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해선 안 될 것 같을 뿐이다.

배경은 지극히 평범하고 또 어두침침하지도 않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큰 싸움이 벌어진다. 모두 아이들이 행하는 일이다 보니 명명백백하지 않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비단 아이들의 세계뿐만 아니다. 배울 만큼 배운 어른들이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세워 온 시스템 아래에서 살아가지만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저지르곤 한다. 아이의 세계와 어른이 세계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북유럽의 환경 때문인지 북유럽 영화는 대체로 서늘한 분위기를 풍긴다. 또한 장르적으로도 스릴러와 호러가 주를 이룬다. 날것의 고기를 씹는 듯 물컹하고 비릿하기도 하며, 송곳으로 한 점을 깊숙이 찌르는 듯 숨이 턱 막힌다. 티도 안 나게 살점이 베어진 듯 기분이 매우 나쁘기도 한다. 호러 영화가 전하려는 여러 감정 중 '불편'의 측면에서 완벽히 부합하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자주 접하는 건 힘들 것 같지만 종종 접하며 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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