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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와호장룡> 사랑을 택한 영웅과 영웅처럼 살고 싶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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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고등학교 때, 언제나처럼 공부에 매진(?)하던 와중에 시간이 나 TV를 켰다.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 없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렸고 어느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버튼 누루기를 멈췄다. 당시는 무엇을 하든 무엇을 보든 무엇을 생각하든 따분하고 지루하기만 했던 시절이었지만, 이 한 편의 영화가 내 마음에 확 와닿게 된다. 비록 중간부터 보기 시작해서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음에도. 제목은 <와호장룡>.  


<와호장룡> ⓒ소니 픽쳐스 클래식


마침 한창 무예를 겨루고 있던 장면이어서, 머리도 식힐 겸 넋을 놓고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끝이 난 영화. 나는 엔딩 크레딧 장면이 끝날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무예의 화려함과 정교함으로 인해 정말 대단한 무협영화라 생각해서? 배우들이 정말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해서? 스토리가 정말 황홀할 정도라서? 아니었다. 당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슬픔의 '여운' 그 자체였다. 


생각해보니 음악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무협을 기반으로 한 완벽한 동양 영화에 울려퍼지는 구슬픈 '첼로' 소리와 이와 적절히 짝을 맞추는 '북' 소리. 특히나 첼로 소리는 이 영화의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그 여운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사랑 앞에서는 영웅도 어쩔 수 없는 법이란다


사랑 앞에서는 영웅도 어쩔 수 없는 법. ⓒ소니 픽쳐스 클래식


영화는 무당파의 실질적 수장이자 강호의 영웅 이묵백(저우룬파(주윤발) 분)이 득도 수행을 파계하고 돌아와 사숙인 수련(량쯔충(양자경) 분)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묵백은 수련에게 그의 몸과도 같은 절대신검인 '청명검'을 베이징에 있는 사부의 친구인 철 대인에게 맡길 것을 부탁한다. 사실 이묵백이 득도 수행을 파계하고 돌아온 이유는 수련과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실을 맺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강호를 떠나려 했고, 그 상징적 의미로 청명검을 떠나보내려 한 것이다. 


수련이 철 대인에게 청명검을 맞긴 당일, 누군가가 청명검을 훔쳐 달아난다. 이를 쫓아가는데 실패한 수련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철 대인의 집에 투숙 중이던 고위 관리 옥 대인의 딸인 소룡(장쯔이(장자이) 분)을 의심한다. 


어느 날 이묵백이 친히 수련을 찾아온다. 수련은 이묵백이 청명검 도난 사건때문에 찾아온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묵백은 수련에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하자고 말하고자 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 다시 실패하고 만다. 


한편, 이묵백과 수련은 소룡의 정체를 눈치채게 되고 그녀를 교화하려 애쓴다. 알고 보니 그녀는 푸른 여우의 제자였던 것이다. 이묵백에게 푸른 여우는 사부인 강남학을 죽인 원수였다. 이묵백은 푸른 여우를 죽이고 그의 제자인 소룡을 교화시켜 제자로 삼은 뒤 수련에게 고백하려 한다. 그에게 청명검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소룡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라도 돌려받아야만 했다. 


전 소설 속의 영웅처럼 살고 싶어요


소설 속 영웅처럼 살고 싶은 소룡. ⓒ소니 픽쳐스 클래식


소룡은 고급 관리의 딸로,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성 밖의 강호를 동경해 왔고 그 삶이 진정한 자신의 삶이자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몰래 하녀(푸른 여우)로부터 무예를 배워왔던 그녀. 그녀는 정략 결혼이 뻔한 혼인을 앞에 두고 청명검을 훔치게 되고 만다. 그녀가 해왔던 고민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영웅처럼 살고 싶다는 그녀.  


스승과 함께 도망쳐 강호의 한 가운데로 뛰어들 것인가. 그렇지만 소룡은 이미 예전에 스승의 무예 실력을 월등히 앞서고 말았다. 그녀에겐 더 강한 스승이나 멘토가 필요했다. 그렇다면 예전 소호(장첸(장진) 분)와의 자유로운 사막 생활로 돌아갈 것인가. 이 또한 자유로운 강호가 아니다. 단지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성향이 강하게 반영된 행동이 될 공산이 크다. 현실과 다를 바 없이 자유가 업악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었다. 


이제 그녀의 길은 사실상 이묵백의 의도대로 무당파의 제자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수련의 반대에도 계속되는 이묵백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진정한 자유를 원했던 것일까? 수련이 말했던 "며칠씩 목욕도 못하고 벼룩과 벗하며 잔다는 등등"의 소설 속 강호인의 모습을?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소룡은 모든 걸 뿌리치고 청명검만을 지닌 채 홀로 강호를 유랑하기로 한다. 이묵백과 수련은 그 뒤를 쫓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강호의 유명한 고수들이 그녀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건 그녀가 바랐던 소설 속의 자유, 모험, 영웅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게 소룡의 강호 생활은 짧게 끝나고, 그녀는 수련의 표국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소룡은 수련과 이묵백을 차례로 상대하게 된다. 


이후 나타난 푸른 여우가 수련을 납치해가고 죽이려 하고, 이 함정에 걸려든 이묵백은 푸른 여우를 죽이면서 복수를 마치지만 푸른 여우가 쏜 독침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소룡은 이묵백을 도우려 하지만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만다. 수련의 배려로 무당산으로 가 소호를 만나게 된 소룡. 그러나 소룡은 산에서 뛰어내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소룡, 그녀가 한 선택은? ⓒ소니 픽쳐스 클래식


<와호장룡>이 중국에서 실패한 이유


이묵백의 시선과 소룡의 시선으로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 줄거리를 설명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상당히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진행에 방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꼼꼼하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캐릭터들의 인과 관계와 선택 이유 등이 그 사이에 다 설명이 되어 지는 것이다.


그만큼 스토리에 신경을 썼다는 것인데, 이 영화는 1930~40년도에 중국에서 활동했던 왕두루의 청강만리(철기은병)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와호장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감독은 2006년과 2013년에 각각 <브로크백 마운틴>과 <라이프 오브 파이>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쥔 바 있는 '이안'. 


이 작품 역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타임>에서 2000년도 최고의 영화로 선정하였으며, 2001년에는 아카데미에서 4개(외국어영화상,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북미에서 역대 최고의 외국어 영화 흥행 기록을 가지고 있다. 북미에서만 1억 3천 만불에 육박하는 성적으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인생은 아름다워>나 <영웅>의 거의 3배에 이르고 있다. 


정말 의외인 사실은, 본토인 중국에서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실패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000년 당시까지도 중국인이 생각하는 무협이란 <와호장룡> 같은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의 머릿 속 무협은 <동방불패>, <천녀유혼>, <신용문객잔> 등의 스타일이었던 것이 아닐까. 굉장히 '동적'인 무협영화들이다. 반면 <와호장룡>은 무협을 빙자한 '멜로'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거기에 굉장히 '정적'인 면이 부각되어 있다. 


<와호장룡> 같은 작품이 다시금 나올 수 있을까?


자,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와호장룡> 같은 작품이 다시금 나올 수 있나 하는 것이다. <와호장룡>이 나왔던 2000년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정신 없이 휘몰아치는 액션이 주를 이루는 영화들이 판을 치는 지금 또는 이후에서 말이다. 


물론 지금까지 <와호장룡>과 비슷한 류의 영화들이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2년에 <영웅>을 필두로, 2004년 <연인>, 2006년 <야연> 등. 모두다 <와호장룡>의 히로인 '장쯔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고, 정적인 무협영화들임과 동시에 멜로를 표방했다. 거기에 음악과 미술에서 그 화려함과 정교함을 더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영웅>까지만 했어야 했다. 나머지는 <와호장룡>의 아류작인 것만 같은 느낌으로, 오히려 그 느낌을 퇴색하게 만들었다. <와호장룡> 같은 영화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아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얼마 전 나온 <일대종사>가 최소한 왕조위의 위신을 높이는 데 성공하지는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잘 만든 작품이라도, 계속적으로 비슷한 류의 것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와중에 소식이 들려왔다. 내년에 <와호장룡 2>가 개봉할 것이라는 소식. 감독은 <와호장룡>의 무술감독이었던 위안허핑(원화평). 주연은 량쯔츙과 견자단에 장쯔이가 합류했다는 소식이다. 기대가 되는 만큼 걱정이 따라온다. 혹여나 무협이라는 한계를 넘어 '위대한' 영화의 범주에 합류했다고 생각되는 <와호장룡>의 누를 끼치게 되지나 않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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