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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너무나도 유명한, 충분한 가치 <오리엔트 특급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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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 표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아서 코난 도일과 영국 추리소설의 양대산맥이라 불리우는 '추리소설의 여왕'이다. 그녀의 소설들은 100여 편에 이르는 2차 콘텐츠(영화, 드라마 등)로 제작되어 소설 독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관객과 시청자들까지 즐기고 환호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80편이 넘는 단·장편 소설을 선보였는데, 과연 그중 어느 작품이 최고로 칠까?


흔히 세계 3대 추리소설이라 하여,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그리고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뽑는다. 이에 따르면 애거서 크리스티 최고의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일 것이고, 그녀의 주요 작품들을 읽어본 필자의 소소한 식견으로도 이견은 없다. 


다만, 다른 건 몰라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전에 나왔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빼놓으면 섭하다. 두 작품 모두 공교롭게도 크리스티가 창조한 두 명의 명탐정 중 하나인 에르퀼 푸아로가 나오는데, '회색 뇌세포'를 이용한 그만의 추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안성맞춤이겠다. 


그중에서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된 폭설로 고립된 열차라는 배경과 함께 어느 정도 정해진 범인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린 반전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다. 더불어 거기엔 크리스티가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의 다양한 면면들이 포진하고 있어 정녕 '가치'가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누구도 예상 못할 범인, 푸아로의 씁쓸하고 슬픈 해결


명탐정으로 이름난 에르퀼 푸아로, 터키 이스탄불에서 급한 전보를 받고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급히 오리엔트 특급을 예약해 유럽을 횡당하는 사흘 간의 여행을 한다. 라쳇이라는 큰 부자가 적이 있으니 자신의 안전을 부탁하지만 푸아로는 단번에 거절한다. 그런데 머지 않아 폭설로 오가지 못하게 된 오리엔트 특급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살해당한 이가 라쳇임이 밝혀진다. 


경찰이 올 때까지 사건을 맡게 된 푸아로, 완벽한 밀실이 된 열차에서 국적과 나이가 모두 다른 열두 명의 승객과 차장 한 명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몇몇에게 불리한 증거가 발견되지만, 모두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 더군다나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푸아로는 '회색 뇌세포'를 이용, 심리 게임을 시작한다. 


한편, 라쳇의 정체가 중요하다. 그는 저 유명한 암스트롱 가 유괴 사건 당시 데이지 암스트롱을 유괴해 돈을 뜯고 무참히 살해해버린 이 '카세티'였던 것이다. 그때문에 임신 중이었던 암스트롱 부인은 아이를 사산했고 자신도 죽고 말았고, 남편은 권총 자살을 했다. 불운한 하녀도 죽었다. 경찰이 그녀를 의심했고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아 자살했던 것이다. 라쳇은 그런 사람, 짐승만도 못한 죽어도 싼 사람이었다. 


소설은 사건 발생-열차 탑승객들, 즉 용의자들의 증언과 푸아로의 탐색-증거와 심리에 따른 푸아로의 수색과 질문-해결 순으로 진행된다. 굉장히 깔끔하고 일목요연한 진행은 푸아로의 체계적인 머릿속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범인의 정체와 그에 따른 푸아로가 제시한 해결책은, 씁쓸한 한편 슬프기까지 하면서 '사회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하게끔 한다. 반전이 주는 쾌감만을 신성시 하는 여탄 기막힌 '반전' 소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품마저 인다. 


공권에 의하지 않은 개인의 복수, 심판


크리스티 여사는 이 소설을 단지 '추리 소설'로 생각하고 쓰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린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기가 막힌 상황을 환상적이고 다채로우며 번뜩이는 추리로 헤쳐나가는 명탐정의 톡톡 튀는 면모를 만끽할 수 없다. 먼 이국 땅에서 폭설에 갇혀 오가지 못하는 열차에서의, 다양한 국적과 나이와 계급의 사람들이 주는 미묘한 긴장이 마음을 졸이게 할 뿐이다. 


한편, 밝혀진 살해당사자 라쳇의 정체는 범인의 정체를 향한 본능적 궁금함과 함께 범인을 향해 발산되는 극렬한 반감이 사라지게 만든다. 라쳇은 죽어마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크리스티는 이미 거기에서 사회 정의의 맹점을 파고든다. 그녀는 암암리에 묻는다. 죽어마땅한 사람이 죽었는데, 범인을 밝히는 게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 특히 낮은 계급에 위치한 이들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쏟는 데 소설을 상당 부분 할애한다. 암스트롱 사건에서 하녀가 억울하게 의심을 당한 것과는 다르게, 이때 하인과 하녀들은 용의선상에서 상당히 멀어진다. 더불어 소설의 상당 부분을 암스트롱 사건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채운다. 자연스레 '라쳇은 죽어마땅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말이 퍼지고 암암리에 당연시 된다. 


이는 요즘 많은 범죄 영화에서 보이는, '공권에 의하지 않은 개인의 복수 또는 심판'의 선조격이기도 하다. 구도로 보아 라쳇을 죽인 범인은 사적인 복수를 한 게 분명하거니와, 사건을 담당하게 된 푸아로도 공권을 대표하는 이가 아니다. 인간사에는 언제 어디서나 공권이 해줄 수 없는 게 많다. 공권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일개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누구인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 - 10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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