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 표지 ⓒ문학동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인 세 명을 뽑자면,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조선의 세종대왕, 이순신을 뽑지 않을까 싶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정복하고, 길이 남을 한글을 창제하였으며, 백전 백승으로 나라를 지켰다. 이 세 위인은 드라마(태왕사신기, 뿌리깊은 나무)와 영화(명량)은 물론 소설(뿌리깊은 나무, 칼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두 왕에겐 정치적 내홍이 없었다.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국가의 틀을 완벽히 잡고 아버지 고국양왕이 잘 이은 와중에 뒷탈 없이 정복 전쟁에만 힘을 쏟은 광개토대왕, 아버지 태종이 대대적 숙청으로 완벽하게 왕권을 강화한 와중에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은 세종대왕. 이러나 저러나 그들은 '왕'이었던 것이다. 


반면, 이순신에게는 평생 정치적 내홍이 뒤따랐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게 생긴 마당에 오직 이순신밖에 없을 정도의 위기 상황에서 이순신으로만 향하는, 향할 수밖에 없는 민심을 두려워한 왕(선조)과 왕을 따르는 무리들의 시기와 질투. 이순신은 외부의 적을 절대적으로 막아내야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내부의 적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전쟁 내내 겪어야 했다.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절대적 영웅임에 분명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이리저리 휘둘리고 고민하고 자책하고 그러면서도 앞뒤를 막아야 하는, 철저히 발가 벗겨진 인간 이순신을 알아야만 한다. 이 말도 안 되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했을까. 김훈 작가의 명작 소설 <칼의 노래>는 영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알게 하는 좋은 기회를 선사한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것, 삶과 죽음


소설은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부터 시작된다. 때는 1597년 4월 초, 같은 해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고된 신문을 받은 후 3개월 만에 풀려난 것이다. 7월에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8월 초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다. 그에게 남은 함선은 12척뿐이었다. 그는 12척으로 명량해전의 기적을 일으킨다. 


명량의 기적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에겐 참으로 비현실적인 고민이 따라다녔다. 어디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항상 사지(死地)를 물색했다. 전쟁을 치르며 이순신에겐 가족이 하나둘 죽어갔다. 당시 조선 어느 누가 그러지 않았겠냐마는, 머나먼 곳에서 나라의 명운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그에게 가족의 죽음을 생각하고 슬퍼하는 건 일종의 사치와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적들을, 적들이지만 누군가의 가족임에 분명한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하였고 그 때문에 수많은 백성과 아군들도 죽어나갔다.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유의미한 게 아니었다. 무의미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내가 죽으면 조선은 끝장이다'.


사지를 물색한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적의 완벽한 궤멸과 절대적인 철수를 지켜본 후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을 테고, 혹시라도 모를 그 이전의 죽음으로 조선 전체가 피로 물들지 않게 또는 덜 물들게 전라도 해안이 아닌 경상도 해안에서 죽어야 했다. 그에게 삶은, 죽음은 무엇이었을까. 


김훈은 이순신을 짓누르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다. 분명 이순신이라는 무게에, 이순신이 느꼈을 삶과 죽음의 무게에 처참하게 짓눌렸을 텐데, 그것들을 온전히 글로 승화시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순신이 감당했어야 할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참으로 많이 힘들고 아팠겠다. 


영웅 아닌 인간 이순신


시종일관 이순신이 염두에 두는 건 적만큼 알 수 없는 임금 선조의 의중이다. 임금은 이순신을 죽여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선의 국토가 유린당하는 와중에 백전 백승의 그에게로 쏠리는 민심이 두려웠다. 하지만 임금은 이순신을 살려야 사직을 보존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임금은 적에게서 사직을 보존하고 싶었다. 이순신은 살았고 적 덕분에 적 앞에 섰으며 적을 무찌르고 나서는 임금의 손에 죽을 것이었다. 


진정한 절망은, 현재의 좌절에서 오지 않는다. 미래의 희망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미래 따위는 없었다. 결정된 죽음만이 있을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래서 사지를 물색하는 일뿐이었다. 그가 싸운 건 외부의 적(왜)과 내부의 적(임금), 그리고 무의미한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순신은 세상에 칼로 베어버릴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음에 절망했다. 오직 적들만 베어버릴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벨 수 있는 걸 벴다. 하지만 임금을 벨 수 없었고, 무의미를 벨 수 없었다. 악몽도, 끼니도, 자책도, 그 어느 것도 칼로 벨 수 없었다. '인간' 이순신에게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은 참으로 힘겹게 다가왔다. 그는 괴로웠다.  


<칼의 노래>에서의 이순신은 인간 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심지어 유약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맹렬히 진격하는 적의 칼끝을 피해 물러서기만 반복하다가 매복한 아군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뭍의 적군 포탄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박되어 있는 적군 배를 섬멸하고, 물길과 뭍지형을 살펴 적이 스스로 섬멸되게 하고... 그가 행했던 백전백승 전투는 화려하지 않았고, 그의 전쟁은 그 전투들에 있지 않았다. 


이 소설을 기점으로 이순신은 더 이상 절대무력으로 적에게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 영웅전설의 주인공이 아니게 되었다. 이순신은 절대적으로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승리만을 원해야 했던 망국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었던 그,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순신은 역사상 그 어느 위인보다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 책은 완벽히 수행했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천명관 소설가의 <고령화 가족>


소설 <고령화 가족> 표지 ⓒ문학동네



쫄딱 망한 영화감독에 아내와 이혼한 후 혼자 사는 마흔여덟의 중년 남자 '나'는 죽기보다 싫은 일을 감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칠순이 넘는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된 것. 칠순이 넘은 엄마는 별말 없이 나를 받아 주었고 이후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나를 챙겨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엄마는 그 연세에도 화장품을 팔러 밖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가셨다.  


엄마 집에는 쉰두 살이 된 형 '오한모', 일명 '오함마'가 얹혀살고 있었다. 그는 백이십 킬로그램, 폭력과 강간, 사기와 절도로 얼룩진 전과 5범의 변태성욕자, 정신불구의 거대한 괴물... 한마디로 인간망종이다. 교도소를 오가고 사업을 말아먹은 후 엄마 집에 삼 년째 눌어붙어 있다. 얼마 안 가 셋째 미연이까지 딸 민경이를 데리고 엄마 집에 들어왔다. 개 같은 인간인 두 번째 남편이 툭하면 술을 처먹고 들어와 개 패듯 하여 집을 나와버렸다는 것이다. 


몇십 년만에 다시 모인 삼 남매는 평균 나이 사십구 세에 칠순 넘은 엄마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굳이 속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이미 콩가루 집안임에 분명해 보이는 이 집안, 그 와중에도 나는 믿기 힘들고 믿기 싫은 집안의 과거사와 속사정을 하나하나 알게 된다. 이놈의 집구석... 안 그래도 밑바닥인 나를 어둠의 심연까지 밀어넣는구나... 우리 삼 남매와 엄마 그리고 민경이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꾼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문학동네)은 이 시대 대표적 이야기꾼 천명관 작가가 지난 2010년에 두 번째로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 줄에 이르러 영화판에 뛰어들었고 몇몇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었지만 마흔 줄까지 메가폰을 잡지 못해 문학판으로 와 지금에 이른 천명관 작가의 파란만장 인생이 담겨 있는 듯하다. 


사실 <고령화 가족> 이후에 내놓은 소설들, 특히 장편소설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예담)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예담)에도 그만의 향기가 진하게 풍긴다. 영화판과 문학판을 오가며 어느 한 곳에 온전히 발 붙이지 못하는 그의 애환 또는 속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밑바닥 인생을 그리고 있고 말이다. 


그는 그 스스로도 말하듯 문학에서 인정 받았지만 영화에 적을 두고 싶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들에서는 문학 아닌 영화쪽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대중영화. 그의 소설은 너무너무 재밌고 너무너무 잘 읽힌다. 더불어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소소할 수 있는 누구나의 가족 이야기이지만, 웃지 않고 못 배길 요소들이 곳곳에 깔려 있지만, 개인의 인생이나 사회를 관통하는 감당못할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선뜻 '아끼는' 소설이라고 말하기 힘들 수 있지만, 다름 아닌 천명관의 소설이기에 '아껴 읽는' 소설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막장 가족


소설은 '막장' 가족의 의미와 '밑바닥' 인생들을 말하고 있을 테다. '가족'과 '인생'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신을 이루는 가장 큰 개념들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공을 들인다. 하지만 제대로 꾸려 나가기가 가장 힘들기도 하다. 가족과 인생은 필연적으로 이 '세상'과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막장이 되어버린, 아니 이미 되어버렸던 이 가족은 다시 모이받니 콩가루가 되어버린다. 도무지 답이 없는 구제불능의 이 가족이지만, 주요 구성원 삼 남매는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래도 이 세상에 나를 받아줄 곳은 여기 뿐이라서. 그리고 쉽게 저버리지 않는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이들을 받아줄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가족의 의미가 더 이상 혈연에 의한 천륜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는 데 있지 않다. 가족에 있어 '관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보이는 막장 콩가루 가족의 모습은 혈연에 의한 천륜이 아닌 관계로 비춰지기에 충분하다. 거기엔 서로에 대한 의무와 책임보다 차라리 서로에 대한 노력과 학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상황 연출이 선행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작가가 메시지를 그런 식으로 전달한 것일 테다. 


밑바닥 인생


일본의 나오키상 수상자 나카지마 교코의 장편소설 <어쩌다 대가족, 오늘만은 무사히!>(예담)를 보면 사회에서 낙오된 밑바닥 인생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대가족을 이뤄 살게 되는데, <고령화 가족> 또한 얼핏 비슷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가족은, 가족의 구성원들은 마냥 받아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나갈 때 나간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세상에 둘도 없는 따뜻한 보금자리도 아니거니와, 한 번 발 디디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감옥 같은 곳도 아니다. 어찌 보면 굉장히 이성적이다 못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들의 집합소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족은 다시 쓰여져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 소설은 그런 메시지를 한 축에 놓고 천명관 작가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밑바닥 인생'을 한 축에 놓아 나아간다. 이 '비정상적인' 이들이 아니었다면 사실은 비정상적일 수 있는 작금의 '정상적인' 가족의 행태에 따끔한 일침을 놓지 못했을 것이 자명하다. 참으로 건들기 힘든 부분을 이토록 예리하면서도 수려하게 돌리도 돌려서 말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에 정녕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미스 함무라비>


<미스 함무라비> 표지 ⓒ문학동네



지난 5월 21일 시작된 JTBC 월화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지금까지 본 적 없던 법원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솔직히 담아내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법정 드라마나 영화는 많이 봐와서 익숙하고 거기에 검사나 변호사 또한 굉장히 익숙한 편이지만, 판사는 전혀 익숙하지가 않다. 이 드라마가 신선하고 색다른 재미를 주는 건, 다름 아닌 판사들이 주인공이 되어 판사들의 일상과 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드라마의 원작 소설 <미스 함무라비>(문학동네)는 글쓰는 판사로 유명한 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문유석의 세 번째 책이다. 그는 '현직 부장판사'가 전하는 법과 사람과 일상에 대한 전문적 혹은 비전문적 글을 모아 이미 두 권의 베스트셀러 <판사유감>(21세기북스),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을 내놓은 바 있다. 


저자의 기존 두 책이 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무엇이었다면, 이 책 <미스 함무라비>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판사가 바라보는 판사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심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철학 아래 엄격한 법치주의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던 고대 바빌로니아 왕조의 함무라비 왕 이름이 별명으로 달린 초임 판사 박차오름이 있다. 그녀의 기행(?) 아닌 기행은 정숙하고 위엄 있는 법정에 어떤 바람을 불러 올까.


처음 담아내는 판사의 일과 법정의 모습


서울중앙지법 제44부로 발령 받은 초임 판사 박차오름은 첫 출근 날 아침 만원 지하철에서 젊은 아가씨를 추행하는 아저씨에게 거침없는 언사를 날리고 그의 사타구니에 니킥을 날리기도 한다. 그러곤 지하철 경찰대에 넘겨버렸다. 그걸 가지고 '짧은 치마나 입고 다니니까 그런 일을 당하지'라며 일갈하는 한세상 부장판사에 대항해 다음 날에는 초미니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출근한다. 


한 부장이 그녀에게 '그게 판사 옷차림으로 가당키나 하냐'고 일갈하니, 이에 박 초임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천을 시커먾게 덮어쓰고 눈 부위도 망사로 가린 부르카 차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의 정의 실현에 물불 가리지 않고 다혈질적인 면모로 달려드는 박 초임, 그녀와 한 방을 쓰는 선배 임바른 판사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소설은 '글쟁이' 판사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온전한 '소설 작품'으로서 무엇을 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그보다 저자가 밝혔듯, 단편소설보다 훨씬 적은 분량의 소설을 연재하는 콩트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인생의 한 단면을 예리하게 담되 착상이 기발해야 하고 유머와 풍자까지 담고 있어야 하는 콩트에 합당한 글인지도 애매하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일반 소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일단 눈을 낮춘 후 범위를 넓히고는 판사의 일과 법정의 모습을 사실상 처음 담아내는 의의를 지닌 작품이라는 점에 천착해야 한다. 소설이니 콩트니 하는 건, 단지 수단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권 남용 의혹이 일파만파로 커지며 현 대법원장이 나서서 사과하고 전국 법관에게 이메일을 발송하는 등 사태 수습에 나섰다. 조만간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립해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라고 한다. 민주 정치를 지탱하는 국가 3 권력 중 하나인 사법부(법원)를 향한 불신은 더 하면 더 했지 나아지지 않고 있다. 또 하나의 권력인 입법부(국회) 못지 않은 것이다. 


이 귀여운(?) 소설은 존재의 밑바닥,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판사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신뢰 회복을 위한 최소한의 밑거름을 위한 듯이 보인다. 일반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판단을 '신'의 목소리를 대신해 내려주는 듯한 판사의 신비로움은, 그동안은 알아서도 안 되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은 그것이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내려와야 할 시대라는 것을, 그 높고 저 먼 곳에서 우리들이 두 발 붙이고 살고 있는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저자는 더불어 그가 오래전부터 천착해온 듯한 '개인주의자' 개념을 통해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지적한다. 두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판사들의 움직임과 맞물린 시민들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유석 판사의 전작들에서뿐만 아니라 이 가벼워 보이는 소설 곳곳에서 그런 주장이 담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는 시민들이 행해야 할 움직임을 한마디로 암축한 문장이다. 시민에게는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주장해 실행하고 실현에 옮기고 이후에도 계속 쟁취해 나가는 건 굉장히 귀찮을 뿐만 아니라, 생존에 기반한 삶을 영위하기에도 벅찬 많은 이들에겐 '힘든' 일이다. 


저자는 바로 그것이 권리 위에 잠자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랜 판사 일을 통해 위에서 언급한 힘든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오랫동안 다져진 땅을 파내 잘게 부수고 다른 무엇으로 만드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들에게 긍정적으로밖에 필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해야 하지 않겠나. 문유석 판사에게 박수를 보내며, 박차오름 판사를 응원하고, 우리들도 움직여보자.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


<인 콜드 블러드> 표지 ⓒ시공사



1959년 11월 15일, 미국 서부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클러터 일가족 네 명이 근거리에서 엽총에 맞아 무참히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모두 밧줄에 묶여 있었으며 각기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단서를 찾기 힘들었던 바 확실한 증거를 찾기 힘든 완전범죄에 가까웠다. 


캔자스 주에서 명성이 자자한 클러터의 집인 만큼 범인들이 훔쳐간 게 엄청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집에서 없어진 건 고작 4~50달러의 현금과 라디오, 만원경 따위였다. 이 믿기지 않는 살해 동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범인의 자백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이에 범인들은 캔자스 주로 다시 돌아오는 모험을 저지르는데...


한편, 홀컴 마을은 이 사건 이후 범인이 잡힐 때까지 서로 못 믿고, 무서워서 죽을 만큼 서로 겁주는 흉흉한 동네가 되었다. 몇몇은 마을을 떠났고,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전에 없이 철두철미하게 집을 지키려 했다. 캔자스 주 수사국에서 가든시티 책임자이자 서부 캔자스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앨빈 애덤스 듀이는 이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는다. 일찍이 본 적도 없는 극악한 사건, 하지만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 유명한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저자 트루먼 카포티는 클러터 일가족 살인 사건이 일어난 1959년 11월 어느 날 '뉴욕 타임스'의 짤막한 기사를 읽고 흥미를 느껴 직접 조사하기 위해 친구 하퍼 리(<앵무새 죽이기> 저자)와 함께 홀컴으로 향한다. 이후 6년 만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흔들 작품을 내놓았으니 <인 콜드 블러드>다. 


이상적인 희생자, 아웃사이더 가해자


저자는 마치 창조한 듯한 이상적이고 완벽한 가족인 희생자 클러터 일가를 다루는 데 작품 초중반을 할애한다. 그들은 그렇게 살해당해서는 안 되었고 그렇게 살해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캔자스 주에서 보기 드물게 존경받고 올곧은 삶을 살아가는 클러터 일가, 그들은 왜 끔찍한 죽임을 당해야 했는가. 


그렇지만 카포티는 그들 희생자보다 가해자인 딕과 페리에게 천착한다. 평범하기 그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학창 시절을 보냈음에도 평생 범죄를 저질러 왔던 딕, 그에 반해 불우하기 짝이 없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음에도 풍부한 감수성을 유지했지만 그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페리. 


딕은 몰라도 페리야말로 특별한 케이스이다. 그의 살인에는 사회적 맥락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불우한 가정환경, 체로키 인디언 엄마와 백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정체성, 작은 키에 유독 짧은 다리의 신체, 거기에 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기까지 하는 장애인. 그야말로 그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저자는 나름 중립을 지키며 죽은 사람들, 죽인 사람들, 죽인 사람들을 쫓는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그밖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감수성과 철저하게 객관적인 자료와 인터뷰를 혼합해, 지극히 주관적인 논픽션을 내놓았지만, 그와 철저히 닮은 듯한 페리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 보니 보는 이들도 페리에게 끌리고 일말 일순간 동정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이 나온 지가 50년이 지나는 동안, 페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범죄자를 등장시킨 콘텐츠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회적으로 철저히 버림받은 이가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는 내용. 이 괴물을 만든 이는 누구인가,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라는 주제. 무작정 동조하기도, 그렇다고 무작정 방치하고 무시하기도 힘들다. 이 책의 위대한 점이 바로 그 부분을 굉장히 다양한 관점과 소견과 견해와 감정을 혼합해 쉽게 풀 수 없게 했다는 점일 테다.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논픽션 노블'로 들여다보는 1960년대 미국


<인 콜드 블러드>는 저자와 맞닿아 있는 페리를 들여다보며 객체로서의 개인이 아닌 집합체 사회 안에서의 개인을 끄집어내어 경종을 울리는 한편, 1950~60년대 미국 사회를 해부하며 사회 자체에 경종을 울린다. 일면 평화로운 시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나 베트남전쟁 사이의 화려한 시대, 중산층이 비상하고 히피문화가 활황하는 와중 냉전 한복판에서의 세계 최강대국 미국.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이 시대, 이 사회를 저자는 홀컴이라는 작은 마을로 수렴시켜, 명망 높은 한 가족에 닥친 끔찍한 사태가 온 동네를 휩쓸어가는 모습을 포착한다. 일면 단단해 보였던 사회의 구조물은 실상 아주 부실한 구조로 쌓아올려졌던 것이다. 그들 모두 갈팡질팡 어쩌질 못한다. 


카포티는 이 책을 오로지 사실만으로, 또는 완전한 픽션만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논픽션 노블'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면서 거짓으로 진실을 들여다보기도 하는 모순이 공존하는 이와 같은 책을 쓴 이유는, 페리로 대표되는 개인과 홀컴으로 대표되는 사회를 복합적으로 효과있게 그러면서 임팩트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 작품을 통해 참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인간-개인-사회-시대라는 전체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부터, 삶-죽음이라는 핵심 가치의 개념을 지나, 살인-수사-사형이라는 범죄 특성상의 전문 개념까지 아우르다 보니, 살아가다 맞닦드리는 생각의 굉장히 많은 부분을 이 작품으로만 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인 콜드 블러드>의 부제는 '일가족 살인사건과 수사과정을 다룬 진실한 기록'이다. 우선, 일가족 살인'사건'을 다뤘다. 범죄소설의 외형이다. 다음으로 '수사'과정을 다룬다. 개인과 사회를 들여다보는 개념의 일환이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기록이다. 아웃사이더 저자에 의한 아웃사이더 페리를 위한, 거짓같은 진실과 진실같은 거짓이 오가는 기록이다. 이 책과 함께 트루먼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를 완성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영화 <카포티>를 보면 더 많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


소설 <남아 있는 나날> 표지 ⓒ민음사



이야기가 옆길로 새는 건,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원류를 제대로 이어나갈 능력이 없거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거나, 옆길로 새는 것도 전부 이야기 원류의 거대한 판 안에 있다거나. 대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으면 차라리 거대한 판을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런데, 여기 오로지 거대한 판을 만든 것도 아니면서 옆길로 새는 것처럼 느끼게끔 하거니와 그것들이 전부 이야기 원류에 포함되어 있게 하는 작가가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인데,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보다 샛길의 이야기가 훨씬 재밌거니와 그 샛길이 원류로 이어지기에 결국 이야기 전체의 완성도가 터무니 없이 올라간다. 


아직 그의 소설을 <나를 보내지 마>와 <남아 있는 나날> 두 권밖에 읽지 않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았고, 거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자잘한 이야기들이 가지는 재미와 인간 본령의 존재를 뒤흔들어 놓는 메시지가 엄청나다는 것도 똑같았다. 한 편으로 팬이 되어버렸고 두 편째를 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세 편째부터는 주기적으로 볼 생각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할 말은 정해져 있고, 그걸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전해주며, 우린 그저 순간순간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빠져 들며 자연스레 목적지에 도달해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편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대한 무엇에 맞닥뜨리고 만다. <남아 있는 나날>이야말로 정확히 그것이다. 


삶과 진실


1956년 영국의 저명한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 스티븐스, 주인의 배려로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잉글랜드 서부로의 여행, 그 결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주인이 아니라 오래전에 달링턴 홀을 떠난 켄턴 양의 7년 만의 편지였다. 그는 그녀가 돌아오고 싶다고 지레짐작하고는 그녀를 만나러 6일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와중에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는 스티븐스이다. 소설은 여행과 회상의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스티븐스는 1920~30년대 달링턴 홀의 주인 달링턴 경을 맹목적으로 모셨다. 그는 진정 '위대한 집사'로, 그것을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는 걸 포기했고 켄턴 양에 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의 말마따라 사적인 실존을 포기하고 전문가적인 실존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집사의 필수조건. 


하지만 스티븐스의 회상이 거듭됨에 따라 하나둘씩 드러나는 진실은 그로 하여금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그의 인생과 사랑에 앞서 그를 규정하는 '위대한 집사'라는 정체성 말이다. 그리고 그걸 회상하는 지금은 인생의 황혼기, 회상은 곧 후회와 다름 아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의미부여가 쉽지 않다. 


소설은 '남아 있는 나날' 즉 미래에 방점을 둔 제목과는 다르게, 회상과 여행 즉 과거와 현재에 방점을 둔 내용을 전한다. 곧 소설의 지향점은 미래에 있고, 주인공이 가야 할 곳도 결국 미래라는 얘기일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스티븐스의 정체성 혼란을 일으키는 '진실'일 텐데, 그건 무엇일까. 


인생과 사랑


진실은, 스티븐스가 충분히 알 수도 있었을 것이고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고 맹목적으로 모신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위대한 집사의 옷을 입어 자신의 진정한 실존을 가린 결과 떠나보낸 켄턴 양을 사랑했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과 '아이히만'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자신의 일만 성실하게 했을 뿐인 아이히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가 한 짓은 역사상 최악의 '악'으로 귀결된다. 그 너머의, 그 이면의 진실은 알고자 하지 않았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스티븐스와 겹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이라는 개념을 녹여내게 한 켄턴 양의 존재가 가즈오 이시구로표 문학의 진정한 발화점이다. 그녀야말로 스티븐스로 하여금 계속 나아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거니와, 한편으로 그가 과거를 회상함으로써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필수적인 아픔을 겪게 한 장본인인 것이다. 켄턴 양 덕분에 스티븐스라는 캐릭터는 극히 평면적인 인물에서 입체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스티븐스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야 할까. 저자는, 소설은 말한다. 나아가야 한다고. 그의 과오 아닌 과오 또는 명백한 과오를 뒤로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가야 한다고 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생과 사랑을 깨달을 시간과 양식은 충분하다. 


남아 있는 나날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민음사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표지 ⓒ황금가지



1800년대부터 시작되었다는 추리소설, 그 수많은 작품들 중 단연 가장 유명한 건 무엇일까? 우선, 가장 유명한 소설가는 누구일까?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를 들 수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추리소설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애드거 앨런 포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는 '유명'보다 '위대'의 칭호를 붙여야 하겠다. 


셜록 홈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고의 추리소설 캐릭터이다. 아서 코난 도일이 창조해, 언젠가부터 그의 손을 떠나, 하나의 상징이자 살아 있는 인간처럼 되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힘과 영향력이 더 막강해지니 신기할 노릇이다. 적어도 캐릭터로는 셜록 홈즈를 넘어설 게 절대 없다. 


가장 유명한 작품을 들라고 하면, 그것도 또 골치가 아프다. 정녕 수없이 많은 명작들이 있지 않은가. 앨러리 퀸, 반 다인, 존 딕슨 카 등의 정통 추리소설가 작품도 많고, 레이먼드 챈들러를 빼놓으면 섭하고,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들 몇몇은 반드시 최상위권에 위치시켜야 한다. 


그래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최고의 위치에 놓는 데 아무도 반대하진 않을 거다. 가장 대중적인 선택이고 가장 안정적인 선택이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확실한 믿음을 주는 작품인 건 확실하다. 지극히 일반적인 추리소설 독자로서는, 추리소설이란 이 소설에서 시작해 이 소설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소설은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다.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다양한 남녀 8명이 각자 다른 이유로 무인도 인디언섬에 초대받는다. 그들 각자의 사정상 그들은 그곳에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녕 치명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정작 인디언섬에 도착한 그들 앞에 초대한 사람은 없었다. 대신 하인 두 명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스피디하게 사람이 죽어나간다. 남은 이들을 더욱 두렵게 하는 건, 식탁 위에 있는 인디언 인형의 개수와 벽에 붙어 있는 인디언 동요의 가사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양이 인디언 동요 가사와 같고, 한 명이 죽을 때마다 인디언 인형 한 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정작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건 다함께 있을 때 어디선가 울려퍼진 그들 각각의 '죄상'들이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를 직간접적으로 죽게 했다는 것이고, 이 섬에 모이게 한 이유는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하겠다는 확신의 발로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같이 현실뿐만 아니라 과거의 두려움과도 싸워야 한다. 


문제는 범인, 조그마한 섬을 모조리 뒤져도 범인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으니, 범인은 다름 아닌 이 10명 안에 있다는 사실. 더구나 험악하기 짝이 없는 날씨 때문에 그들은 꼼짝 없이 이 무인도에 갇힌 꼴이 되고 만다. 만화 <명탐정 코난> <소년탐정 김전일>의 명언 "범인은 이 안에 있다!"의 진정한 시조라고 할까. 


위대한 추리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외형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또다른 걸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유사하다. 한정된 공간에 갇힌 피해자이자 용의자, 그리고 국가의 손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범죄를 개인이 대신 심판하려는 모습까지 닮았다. 특히 이 소설은 애초에 대놓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 죄를 저질렀지만 법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는 없었던 사건들의 당사자를 불러내어 확실하게 응징한다. 


물론, 이 추리 '소설'의 위대한 점은 마지막 반전의 도덕적 뒤틀림에 있겠지만 말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보여준 슬프기까지 한 반전과는 완전히 반대의 느낌이랄까. 한편, 이 '추리' 소설이 주는 서스펜스는 극렬하기 짝이 없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씩 숨통을 조여오는 느낌이랄까. 


심리 추리의 대가 포와로 경을 굳이 불러오지 않아도 애거서 크리스티는 심리를 자유자재로 다뤄 우리 앞에 풀어놓는다. 그 자리에 있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사람이 죽어갈수록 극심해지는 그들의 심리전쟁을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건 차라리 하나의 게임이다. 찾을 수 없는 범인을 찾아야 하고, 풀 수 없는 사건을 풀어야 하며, 탈출할 수 없는 섬을 탈출해야 한다.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한다. 


터무니 없이 빨리 읽히는 와중에 수없이 많은 장면과 생각과 심리들이 소용돌이 치게 만드는 소설, 그러면서도 애거서 크리스티가 절대로 간과하지 않는 '사회 정의', 추리소설만이 주는 서스펜스와 반전은 차라리 덤이다. 이제야 이 소설을 추천하는 건, 애거서 크리스티를 보라고 하는 건, 염치가 참으로 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한다. 난 소설 같은 거 재미없어서 안 봐, 하는 분이 있다면 무조건 이 소설을 봐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10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황금가지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애거서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 표지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아서 코난 도일과 영국 추리소설의 양대산맥이라 불리우는 '추리소설의 여왕'이다. 그녀의 소설들은 100여 편에 이르는 2차 콘텐츠(영화, 드라마 등)로 제작되어 소설 독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관객과 시청자들까지 즐기고 환호할 수 있게 했다. 그녀는 80편이 넘는 단·장편 소설을 선보였는데, 과연 그중 어느 작품이 최고로 칠까?


흔히 세계 3대 추리소설이라 하여,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 그리고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뽑는다. 이에 따르면 애거서 크리스티 최고의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일 것이고, 그녀의 주요 작품들을 읽어본 필자의 소소한 식견으로도 이견은 없다. 


다만, 다른 건 몰라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전에 나왔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빼놓으면 섭하다. 두 작품 모두 공교롭게도 크리스티가 창조한 두 명의 명탐정 중 하나인 에르퀼 푸아로가 나오는데, '회색 뇌세포'를 이용한 그만의 추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최적의 안성맞춤이겠다. 


그중에서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된 폭설로 고립된 열차라는 배경과 함께 어느 정도 정해진 범인의 양상을 완전히 뒤바꿔버린 반전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다. 더불어 거기엔 크리스티가 추구하는 사회적 정의의 다양한 면면들이 포진하고 있어 정녕 '가치'가 있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누구도 예상 못할 범인, 푸아로의 씁쓸하고 슬픈 해결


명탐정으로 이름난 에르퀼 푸아로, 터키 이스탄불에서 급한 전보를 받고 런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급히 오리엔트 특급을 예약해 유럽을 횡당하는 사흘 간의 여행을 한다. 라쳇이라는 큰 부자가 적이 있으니 자신의 안전을 부탁하지만 푸아로는 단번에 거절한다. 그런데 머지 않아 폭설로 오가지 못하게 된 오리엔트 특급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살해당한 이가 라쳇임이 밝혀진다. 


경찰이 올 때까지 사건을 맡게 된 푸아로, 완벽한 밀실이 된 열차에서 국적과 나이가 모두 다른 열두 명의 승객과 차장 한 명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몇몇에게 불리한 증거가 발견되지만, 모두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 더군다나 서로가 서로의 알리바이를 입증해주고 있지 않은가. 푸아로는 '회색 뇌세포'를 이용, 심리 게임을 시작한다. 


한편, 라쳇의 정체가 중요하다. 그는 저 유명한 암스트롱 가 유괴 사건 당시 데이지 암스트롱을 유괴해 돈을 뜯고 무참히 살해해버린 이 '카세티'였던 것이다. 그때문에 임신 중이었던 암스트롱 부인은 아이를 사산했고 자신도 죽고 말았고, 남편은 권총 자살을 했다. 불운한 하녀도 죽었다. 경찰이 그녀를 의심했고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아 자살했던 것이다. 라쳇은 그런 사람, 짐승만도 못한 죽어도 싼 사람이었다. 


소설은 사건 발생-열차 탑승객들, 즉 용의자들의 증언과 푸아로의 탐색-증거와 심리에 따른 푸아로의 수색과 질문-해결 순으로 진행된다. 굉장히 깔끔하고 일목요연한 진행은 푸아로의 체계적인 머릿속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범인의 정체와 그에 따른 푸아로가 제시한 해결책은, 씁쓸한 한편 슬프기까지 하면서 '사회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하게끔 한다. 반전이 주는 쾌감만을 신성시 하는 여탄 기막힌 '반전' 소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품마저 인다. 


공권에 의하지 않은 개인의 복수, 심판


크리스티 여사는 이 소설을 단지 '추리 소설'로 생각하고 쓰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우린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기가 막힌 상황을 환상적이고 다채로우며 번뜩이는 추리로 헤쳐나가는 명탐정의 톡톡 튀는 면모를 만끽할 수 없다. 먼 이국 땅에서 폭설에 갇혀 오가지 못하는 열차에서의, 다양한 국적과 나이와 계급의 사람들이 주는 미묘한 긴장이 마음을 졸이게 할 뿐이다. 


한편, 밝혀진 살해당사자 라쳇의 정체는 범인의 정체를 향한 본능적 궁금함과 함께 범인을 향해 발산되는 극렬한 반감이 사라지게 만든다. 라쳇은 죽어마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생각, 크리스티는 이미 거기에서 사회 정의의 맹점을 파고든다. 그녀는 암암리에 묻는다. 죽어마땅한 사람이 죽었는데, 범인을 밝히는 게 무슨 소용이랴? 


그래서 그녀는 다양한 사람들 특히 낮은 계급에 위치한 이들에게 애정어린 관심을 쏟는 데 소설을 상당 부분 할애한다. 암스트롱 사건에서 하녀가 억울하게 의심을 당한 것과는 다르게, 이때 하인과 하녀들은 용의선상에서 상당히 멀어진다. 더불어 소설의 상당 부분을 암스트롱 사건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에 대한 관심으로 채운다. 자연스레 '라쳇은 죽어마땅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말이 퍼지고 암암리에 당연시 된다. 


이는 요즘 많은 범죄 영화에서 보이는, '공권에 의하지 않은 개인의 복수 또는 심판'의 선조격이기도 하다. 구도로 보아 라쳇을 죽인 범인은 사적인 복수를 한 게 분명하거니와, 사건을 담당하게 된 푸아로도 공권을 대표하는 이가 아니다. 인간사에는 언제 어디서나 공권이 해줄 수 없는 게 많다. 공권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 일개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누구인가. 


오리엔트 특급 살인 - 10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황금가지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 표지 ⓒ학고재



김훈 작가의 글은 우직하다. 밍기적 거리지 않고 직진한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살필 줄 아는데, 어느 글보다도 수려하게 대상을 그려낸다. 공수(攻守) 양면을 다 갖춘 작가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그의 글은 따라하고 싶고 그의 숙고를 닮고 싶고 무엇보다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그의 글을 읽기 전의 설렘은 글의 끝까지 함께 하고, 그의 글을 마치면서 찾아오는 여운은 아주 오래간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김훈을 <칼의 노래>로 시작했다. 20살 남짓의 어린 나이였으니 단번에 읽어내리지 못하고 자꾸만 서게 되는 그 소설을 완독하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걸렸을 건 자명한 일이다. 몇 번의 도전 끝에 2년여 만에 완독해냈던 게 기억난다. 한마디로 가늠해내기 힘든 소설이고 소설가이다. 


<칼의 노래> 이후 그의 장편은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공터에서> 등으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리스트를 보면, 글로 표현되어 역사에 남지 않은 말을 상상해 쓰지 않았음에도 그 안에서 우린 '말'과 함께 '울음'을 느낄 수 있다. 그 행간에 드러내는 김훈의 능력은 탁월하다 못해 경탄스럽다. 


개인적으로도, 아마도 김훈을 읽은 많은 사람들도 <남한산성>을 최고로 치지 않을까 싶다. '김훈 스타일'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특징들이 모두 극대화되어 있다. 특히 '한달음에 읽어내리지 못하는' 김훈 작가 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건 문체 때문일 수도, 극중 사건과 인물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생각지 못하게 빨리 읽어내려갈 수 있는 건 정말 '잘' 쓰인 글 덕분일 것이다. 


병자호란, 주전파와 주화파


163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용골대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지만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홍타이지는 용골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와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란간다. 병자호란이다. 


한겨울의 매서운 날씨, 터무니 없이 적고 오합지졸인 병력, 한계를 보이는 식량과 사기, 현실을 보지 못하고 말뿐인 주전파의 득세,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는 임금과 영의정. 1636년 남한산성은 총체적 난국 그 자체이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임금이라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김상헌을 위시한 주전파에겐 사는 게 곧 죽는 것이다.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건 어버이 나라 명을 배반하는,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결사항전 후 장렬히 죽어야 한다. 사는 건 한순간이지만 치욕은 영원하다.


최명길을 위시한 주화파에겐 사는 건 사는 것이고 죽는 건 죽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의리고 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 여지는 없다. 치욕은 한순간이지만 사는 건 영원하다. 


인간의 위대한 단상, 그리고 입체적 인물


주전파와 주화파의 계보와 변화, 그들을 향한 시선들은 매우 복잡하다. 특히 조선 말이 되어서는 주전파는 폐쇠적이지만 나라의 존망을 끝까지 걱정하고 저항했지만, 주화파는 외국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개화파에서 친일파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누구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보다 백성을 위한 선택으로 치열하게 나아갈 뿐이다. 


그들 모두가 나라의 앞날을 진심으로 위하고 걱정했기에 옳고 그름의 철학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니, 그런 철학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의 수장격이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을 그래서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위했다. 우린 그 모습에서 인간의 위대한 단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소설에선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의미있게, 또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다. 관노 출신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청조 통역으로 위세를 떨친 정명수라는 인물과 남한산성 안에서 기거하는 대장장이 서날쇠가 그들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 하염없이 오로지 부정적인 면모만 생각했던 인조라는 인물을 조금은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그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빼앗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전란의 참화 속에 내던지게 한 것도 모자라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였고 이후에는 아들을 독살시켜 나라 부흥의 싹을 지워버렸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소설 속 남한산성에서의 그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가엾고 힘없는 인간이었다. 


여러 세계와 삶을 경험하다


정명수는 본래 조선 사람으로, 조선 입장에선 그야말로 나라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적군의 길잡이이자 위세 좋은 앞잡이이다. 하지만 그의 출신은 관노, 그에게 과연 조선이란 나라는 무엇이었나. 그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나라인가? 그에게 어떤 극렬한 적의를 느낄 수 없었다. 주화파와 먼 친척뻘이라 할 수도 있는 그의 면면이 흥미롭다. 


서날쇠는 김상헌의 부탁으로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말끔히 수행한다. 그가 보이는 특유의 행동력은 남한산성 내 그 어떤 사람도 따라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임금을 포함해 나라를 떠받드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조선이란 나라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살기 위해, 김상헌이라는 사람을 위해 모진 임무를 떠맡았다고 본다. 자신도 모르게 주전파의 임무를 행하는 그가 흥미롭다. 


<남한산성>은 흥미로운 인간군상들의 집합체를 보여준다. 각자 다른 이유로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며 나아가는 모습들은 의도치 않게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이들 중 누구의 역할을 하였을까. 아무래도 이름없는 지나가는 백성 중 한 명이었을 테지만, 정명수가 되기에는 배포가 작고 서날쇠가 되기에는 중심이 부족하며 김상헌이나 최명길이 되기에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인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을 전하게 될 그때 그곳, 그 이면에는 철학을 위시한 수많은 말들의 부딪힘과 삶, 죽음을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육체적 부딪힘이 있었다. 이 소설은 그 이면들에 관한 것이다. 그 이면들은 실제적인 것들과 관념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고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 우린 이 소설로 여러 세계와 여러 삶을 경험할 수 있다. 


남한산성 - 10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학고재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소설 <나를 보내지 마> 표지 ⓒ민음사



많은 소설을 읽다 보면, '이건 진짜다' 하고 감탄하고 가슴 속에 깊숙이 저장시키는 작품이 있다. 그런 소설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읽게 되어 있는데, 나의 영혼이 뒤바뀌거나 몸에서 나가버리지 않는 이상 한 번 영혼을 건드린 작품은 앞으로도 더욱 거대한 무엇을 선사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얼마 전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2005년작 <나를 보내지 마>는 이제야 나에게 그런 작품, 나의 영혼을 건드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거대한 흔적을 남길 게 분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와 분위기, 압도적이기까지 한 세밀한 심리묘사는 이전까진 느끼지 못한 그것이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분명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분명 SF적 요소가 다분한 성장 소설로 분류할 만하다. 거기엔 스펙터클한 사건이나 사상 초유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참으로 많은 걸 느끼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여운에 한동안 잠식당할 게 분명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들


'헤일셤'이라는 기숙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여느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당연히 학교도 별다른 게 없다. 우리가 보기엔 그곳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클론, 인간에게 장기이식을 하는 목적으로 복제되어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다. 헤일셤은 클론만을 위한 학교인 것이다. 


지금, 캐시는 그곳 헤일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코티지에서 간병사 교육을 받은 후 회복 센터에서 간병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간병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장기이식을 한 클론으로, 그녀는 학창 시절 가장 친하게 진했던 루스와 토미를 간호하고 또 여지 없이 떠나보낸다. 그녀도 결국 장기이식 후 죽음을 맞게 될 운명이다. 


소설은 캐시의 지금과 캐시가 회상하는 헤일셤, 코티지, 회복 센터 간병사 시절을 오간다. 그녀와 함께 한 이들은 그녀가 간병하고 또 떠나보낸 루스와 토미다. 그들은 함께 클론으로선 절대 얻지 못할 평범한 생활에서 기인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혹들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참으로 인간적인 울림을 준다...


그들이, 클론들이 인간적으로 보일수록 인간적인 울림을 줄수록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픈,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그들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길,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생을 위해 자신을 내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로만 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의 삶을 엿본다. 그들은, 아름답게 슬프고 슬프게 아름다운,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다. 


정녕 특별한 소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에 관한 작품을 무수히 봐왔다. 그 작품들에서 그들은 여지없이 다양한 형태의 존재부정, 현실부정을 통해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인간이 되려 하고, <아일랜드>에서는 탈출을 하려 하는 게 그 대표적 모양새다. 


하지만, 그런 존재 부각의 모양새는 오히려 그들의 존재 주체의 측면에 소홀하기 쉽다. 그들은 거대 담론과 논쟁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반면,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려내는 <나를 보내지 마> 속 클론들의 삶은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충분히 격렬한 논쟁의 한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면서도 그런 방향성을 견지 하지 않고 다분히 안으로 안으로 천착함으로써 궁극적인 성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클론의 시선을 통해 소외된 모든 존재,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 그리고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해본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든 존재이니까. 그들을 그들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에 맡길 의무가 인간에게 있고, 그들을 신의 손에 맡길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그런데, 그들에게 평범한 삶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다. 


그들에게 '학창시절'의 추억을 준 헤일셤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우리가 그들의 학창시절을 '성장'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작가의 능력 또한 특별하다. 이 소설로 조금은 세상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특별할 것이다. 특별한 존재이지만 평범함을 소원하는 클론들도 평범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특별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정녕 특별한 소설이다. 


나를 보내지 마 - 10점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민음사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표지 ⓒ민음사



미국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언론과 신문의 최고 명예와 같은 '퓰리처상'이 조셉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100년 넘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반면 언론과 신문의 최악 수치와 같은 '옐로저널리즘'이 퓰리처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역시 100년 넘게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옐로저널리즘은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악용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찌라시로 돈을 벌려는 자들을 일컫는데, 자본주의 팽창의 폐해라고 볼 수도 있다. 자본가들의 언론을 이용한 광고 수집에 언론들이 놀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론들끼리의 경쟁에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인 기사를 보낼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옐로저널리즘은 개인을, 사회를, 나라를, 시대를 속절없이 망쳐버리기도 한다. 한 개인을 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이 1975년 내놓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옐로저널리즘의 폐해를 넘어 그 폭력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살인을 부른 옐로저널리즘 폭력


카타리나 블룸은 1974년 2월 24일 일요일 저녁 7시 4분경에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르곤 놀란 뫼딩에게 자수한다. 자신이 12시 15분경에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다고 말이다. 곧 수사가 시작되었고, 시간을 거슬러 2월 20일 수요일에 당도한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성실하고 한편 적막하게 사는 평범한 여성. 2월 20일 저녁 볼터스하임 부인 집에서 열린 작은 파티에 참석한다. 그녀는 오직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자와 춤을 추었고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녀의 집은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다. 괴텐이라는 자가 은행강도이자 살인범으로 수배되고 있던 자였기 때문. 


목요일 오전 경찰은 카타리나 집을 급습한다. 하지만 괴텐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곧 카타리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고 당연한듯 옐로저널리즘에 의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공표된다. 그것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형태로.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마수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로 뻗는다. 괴텐을 진정 사랑했던 카타리나는, 사랑을 얻고자 명예를 잃는 선택을 한다.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그녀에게 '명예'라는 게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차이퉁>지와 <존탁스차이퉁>지는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마치 그녀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도 한 짓을 저지르게끔 몰아간 것 같다. 카타리나가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쏴죽인 것과 퇴트게스 기자가 카타리나를 옐로저널리즘 기조의 기사로 갈갈이 찢어발긴 것, 어느 것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


카타리나의 '잃어버린 명예'는 '인격'과 다름 아니다. '인격살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 체(體)를 살해한 것이다. 비록 육체적 살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육체 안에 자리잡은 인격의 살인은 사실 인간 자체의 살인과 다르지 않다. <차이퉁>과 <존탁스차이퉁>이 '표현의 자유'와 '무지'를 앞세워 카타리나를 향해 던진 돌은 명백히 살인자의 돌이었다. 


이 책의 부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인간을 자본에 종속된 하수인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고의를 빙자한 무지의 소산인 언어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어떤 식의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혹, 책에서 카타리나가 저지른 폭력의 원인과 결과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다. 


작가가 저격하는 대상은, 결코 <차이퉁>, <존탁스차이퉁>을 비롯한 옐로저널리즘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말을 비틀고 사실을 날조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기사를 날리려 해도, 최소한의 기본 바탕이 되는 말, 언어가 있어야 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소문, 삶 자체를 의심하는 경찰의 수사 및 조사,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 이 모든 게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범접할 수 없는 강물을 이룬다. 


이 책은 긍극적으로 그런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에게 화살을 쏘아보내려 하는 것이다. 그 위엔 옐로저널리즘의 탄생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자본주의 체제 따위가 아닌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풍요에 가려 절대로 볼 수 없는 정신적 폐허 말이다. 


그래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비단 카타리나뿐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잃어버린 명예이기도 하다. 부지런하고 능력 있고 지극히 비정치적이며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는 한 사람, 카타리나 블룸에게 일어난 사건. 아주 다반사로 일어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나한테 일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건의 주인공은 당연히 누구라도 가능하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