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 표지 ⓒ학고재



김훈 작가의 글은 우직하다. 밍기적 거리지 않고 직진한다. 그러면서도 주위를 살필 줄 아는데, 어느 글보다도 수려하게 대상을 그려낸다. 공수(攻守) 양면을 다 갖춘 작가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그의 글은 따라하고 싶고 그의 숙고를 닮고 싶고 무엇보다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그의 글을 읽기 전의 설렘은 글의 끝까지 함께 하고, 그의 글을 마치면서 찾아오는 여운은 아주 오래간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김훈을 <칼의 노래>로 시작했다. 20살 남짓의 어린 나이였으니 단번에 읽어내리지 못하고 자꾸만 서게 되는 그 소설을 완독하는 데 시간이 무척 오래걸렸을 건 자명한 일이다. 몇 번의 도전 끝에 2년여 만에 완독해냈던 게 기억난다. 한마디로 가늠해내기 힘든 소설이고 소설가이다. 


<칼의 노래> 이후 그의 장편은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공터에서> 등으로 이어졌다. 이 일련의 리스트를 보면, 글로 표현되어 역사에 남지 않은 말을 상상해 쓰지 않았음에도 그 안에서 우린 '말'과 함께 '울음'을 느낄 수 있다. 그 행간에 드러내는 김훈의 능력은 탁월하다 못해 경탄스럽다. 


개인적으로도, 아마도 김훈을 읽은 많은 사람들도 <남한산성>을 최고로 치지 않을까 싶다. '김훈 스타일'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특징들이 모두 극대화되어 있다. 특히 '한달음에 읽어내리지 못하는' 김훈 작가 글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그건 문체 때문일 수도, 극중 사건과 인물들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생각지 못하게 빨리 읽어내려갈 수 있는 건 정말 '잘' 쓰인 글 덕분일 것이다. 


병자호란, 주전파와 주화파


1636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는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용골대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지만 조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홍타이지는 용골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한다. 인조와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빈궁과 왕자들은 강화도로 피란간다. 병자호란이다. 


한겨울의 매서운 날씨, 터무니 없이 적고 오합지졸인 병력, 한계를 보이는 식량과 사기, 현실을 보지 못하고 말뿐인 주전파의 득세,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는 임금과 영의정. 1636년 남한산성은 총체적 난국 그 자체이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임금이라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김상헌을 위시한 주전파에겐 사는 게 곧 죽는 것이다.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건 어버이 나라 명을 배반하는,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결사항전 후 장렬히 죽어야 한다. 사는 건 한순간이지만 치욕은 영원하다.


최명길을 위시한 주화파에겐 사는 건 사는 것이고 죽는 건 죽는 것이다. 자존심이고 의리고 뭐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살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 여지는 없다. 치욕은 한순간이지만 사는 건 영원하다. 


인간의 위대한 단상, 그리고 입체적 인물


주전파와 주화파의 계보와 변화, 그들을 향한 시선들은 매우 복잡하다. 특히 조선 말이 되어서는 주전파는 폐쇠적이지만 나라의 존망을 끝까지 걱정하고 저항했지만, 주화파는 외국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개화파에서 친일파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누구의 생각과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다만 보다 백성을 위한 선택으로 치열하게 나아갈 뿐이다. 


그들 모두가 나라의 앞날을 진심으로 위하고 걱정했기에 옳고 그름의 철학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니, 그런 철학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철학의 수장격이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을 그래서 서로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고 위했다. 우린 그 모습에서 인간의 위대한 단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소설에선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은 아닐지라도 의미있게, 또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인물들이 있다. 관노 출신으로 청나라에 끌려가 청조 통역으로 위세를 떨친 정명수라는 인물과 남한산성 안에서 기거하는 대장장이 서날쇠가 그들이다. 


그리고 소설을 읽기 전까지 하염없이 오로지 부정적인 면모만 생각했던 인조라는 인물을 조금은 새롭게 보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 그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빼앗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를 전란의 참화 속에 내던지게 한 것도 모자라 치욕스러운 항복을 하였고 이후에는 아들을 독살시켜 나라 부흥의 싹을 지워버렸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소설 속 남한산성에서의 그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가엾고 힘없는 인간이었다. 


여러 세계와 삶을 경험하다


정명수는 본래 조선 사람으로, 조선 입장에선 그야말로 나라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적군의 길잡이이자 위세 좋은 앞잡이이다. 하지만 그의 출신은 관노, 그에게 과연 조선이란 나라는 무엇이었나. 그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나라인가? 그에게 어떤 극렬한 적의를 느낄 수 없었다. 주화파와 먼 친척뻘이라 할 수도 있는 그의 면면이 흥미롭다. 


서날쇠는 김상헌의 부탁으로 여러 중요한 임무를 말끔히 수행한다. 그가 보이는 특유의 행동력은 남한산성 내 그 어떤 사람도 따라할 수 없는 그것이었다. 임금을 포함해 나라를 떠받드는 수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조선이란 나라는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살기 위해, 김상헌이라는 사람을 위해 모진 임무를 떠맡았다고 본다. 자신도 모르게 주전파의 임무를 행하는 그가 흥미롭다. 


<남한산성>은 흥미로운 인간군상들의 집합체를 보여준다. 각자 다른 이유로 나라를 위하고 자신을 위하며 나아가는 모습들은 의도치 않게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이들 중 누구의 역할을 하였을까. 아무래도 이름없는 지나가는 백성 중 한 명이었을 테지만, 정명수가 되기에는 배포가 작고 서날쇠가 되기에는 중심이 부족하며 김상헌이나 최명길이 되기에는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인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장면을 전하게 될 그때 그곳, 그 이면에는 철학을 위시한 수많은 말들의 부딪힘과 삶, 죽음을 넘나드는 무시무시한 육체적 부딪힘이 있었다. 이 소설은 그 이면들에 관한 것이다. 그 이면들은 실제적인 것들과 관념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고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 우린 이 소설로 여러 세계와 여러 삶을 경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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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


소설 <나를 보내지 마> 표지 ⓒ민음사



많은 소설을 읽다 보면, '이건 진짜다' 하고 감탄하고 가슴 속에 깊숙이 저장시키는 작품이 있다. 그런 소설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읽게 되어 있는데, 나의 영혼이 뒤바뀌거나 몸에서 나가버리지 않는 이상 한 번 영혼을 건드린 작품은 앞으로도 더욱 거대한 무엇을 선사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부끄럽지만, 얼마 전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그 이름을 처음 듣게 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2005년작 <나를 보내지 마>는 이제야 나에게 그런 작품, 나의 영혼을 건드렸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거대한 흔적을 남길 게 분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와 분위기, 압도적이기까지 한 세밀한 심리묘사는 이전까진 느끼지 못한 그것이었다. 


현실을 기반으로 하되 분명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이야기는 분명 SF적 요소가 다분한 성장 소설로 분류할 만하다. 거기엔 스펙터클한 사건이나 사상 초유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참으로 많은 걸 느끼고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여운에 한동안 잠식당할 게 분명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들


'헤일셤'이라는 기숙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여느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당연히 학교도 별다른 게 없다. 우리가 보기엔 그곳은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데 사실 그들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클론, 인간에게 장기이식을 하는 목적으로 복제되어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다. 헤일셤은 클론만을 위한 학교인 것이다. 


지금, 캐시는 그곳 헤일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코티지에서 간병사 교육을 받은 후 회복 센터에서 간병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간병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장기이식을 한 클론으로, 그녀는 학창 시절 가장 친하게 진했던 루스와 토미를 간호하고 또 여지 없이 떠나보낸다. 그녀도 결국 장기이식 후 죽음을 맞게 될 운명이다. 


소설은 캐시의 지금과 캐시가 회상하는 헤일셤, 코티지, 회복 센터 간병사 시절을 오간다. 그녀와 함께 한 이들은 그녀가 간병하고 또 떠나보낸 루스와 토미다. 그들은 함께 클론으로선 절대 얻지 못할 평범한 생활에서 기인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혹들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하고 체념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아간다,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참으로 인간적인 울림을 준다...


그들이, 클론들이 인간적으로 보일수록 인간적인 울림을 줄수록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픈, 복잡하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그들은 절대 바꿀 수 없는 정해진 길,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인간의 영원한 생을 위해 자신을 내주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소설로만 볼 수 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의 삶을 엿본다. 그들은, 아름답게 슬프고 슬프게 아름다운, 너무나도 인간적인 비인간 존재다. 


정녕 특별한 소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에 관한 작품을 무수히 봐왔다. 그 작품들에서 그들은 여지없이 다양한 형태의 존재부정, 현실부정을 통해 일종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한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인간이 되려 하고, <아일랜드>에서는 탈출을 하려 하는 게 그 대표적 모양새다. 


하지만, 그런 존재 부각의 모양새는 오히려 그들의 존재 주체의 측면에 소홀하기 쉽다. 그들은 거대 담론과 논쟁의 소모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반면, 가즈오 이시구로가 그려내는 <나를 보내지 마> 속 클론들의 삶은 다른 무엇의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충분히 격렬한 논쟁의 한 담론을 도출해낼 수 있으면서도 그런 방향성을 견지 하지 않고 다분히 안으로 안으로 천착함으로써 궁극적인 성찰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클론의 시선을 통해 소외된 모든 존재,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 그리고 나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나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무얼까 생각해본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을 위해, 인간이 만든 존재이니까. 그들을 그들의 손이 아닌 인간의 손에 맡길 의무가 인간에게 있고, 그들을 신의 손에 맡길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 그런데, 그들에게 평범한 삶을 줄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다. 


그들에게 '학창시절'의 추억을 준 헤일셤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하다. 우리가 그들의 학창시절을 '성장'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작가의 능력 또한 특별하다. 이 소설로 조금은 세상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다면, 우리 또한 특별할 것이다. 특별한 존재이지만 평범함을 소원하는 클론들도 평범하기에 가능할 수 있는 특별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정녕 특별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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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표지 ⓒ민음사



미국의 신문왕 조셉 퓰리처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다. 언론과 신문의 최고 명예와 같은 '퓰리처상'이 조셉 퓰리처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어 100년 넘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반면 언론과 신문의 최악 수치와 같은 '옐로저널리즘'이 퓰리처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역시 100년 넘게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옐로저널리즘은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악용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찌라시로 돈을 벌려는 자들을 일컫는데, 자본주의 팽창의 폐해라고 볼 수도 있다. 자본가들의 언론을 이용한 광고 수집에 언론들이 놀아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론들끼리의 경쟁에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더 자극적인 기사를 보낼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옐로저널리즘은 개인을, 사회를, 나라를, 시대를 속절없이 망쳐버리기도 한다. 한 개인을 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뵐이 1975년 내놓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옐로저널리즘의 폐해를 넘어 그 폭력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살인을 부른 옐로저널리즘 폭력


카타리나 블룸은 1974년 2월 24일 일요일 저녁 7시 4분경에 발터 뫼딩 경사의 집 초인종을 누르곤 놀란 뫼딩에게 자수한다. 자신이 12시 15분경에 자기 아파트에서 베르너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살해했다고 말이다. 곧 수사가 시작되었고, 시간을 거슬러 2월 20일 수요일에 당도한다. 


그녀는 가정부로 일하며 성실하고 한편 적막하게 사는 평범한 여성. 2월 20일 저녁 볼터스하임 부인 집에서 열린 작은 파티에 참석한다. 그녀는 오직 루트비히 괴텐이라는 자와 춤을 추었고 함께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녀의 집은 철저한 감시 하에 있었다. 괴텐이라는 자가 은행강도이자 살인범으로 수배되고 있던 자였기 때문. 


목요일 오전 경찰은 카타리나 집을 급습한다. 하지만 괴텐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곧 카타리나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고 당연한듯 옐로저널리즘에 의해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공표된다. 그것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정적이기 짝이 없는 형태로.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마수는 그녀와 조금이라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로 뻗는다. 괴텐을 진정 사랑했던 카타리나는, 사랑을 얻고자 명예를 잃는 선택을 한다.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있었을까. 그녀에게 '명예'라는 게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차이퉁>지와 <존탁스차이퉁>지는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는다. 마치 그녀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도 한 짓을 저지르게끔 몰아간 것 같다. 카타리나가 퇴트게스 기자를 총으로 쏴죽인 것과 퇴트게스 기자가 카타리나를 옐로저널리즘 기조의 기사로 갈갈이 찢어발긴 것, 어느 것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까.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


카타리나의 '잃어버린 명예'는 '인격'과 다름 아니다. '인격살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적 체(體)를 살해한 것이다. 비록 육체적 살인은 아닐지 모르지만, 육체 안에 자리잡은 인격의 살인은 사실 인간 자체의 살인과 다르지 않다. <차이퉁>과 <존탁스차이퉁>이 '표현의 자유'와 '무지'를 앞세워 카타리나를 향해 던진 돌은 명백히 살인자의 돌이었다. 


이 책의 부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는 인간을 자본에 종속된 하수인보다 못한 존재로 보고 고의를 빙자한 무지의 소산인 언어적 폭력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어떤 식의 결말에 다다르게 되는가를 유추할 수 있게 한다. 혹, 책에서 카타리나가 저지른 폭력의 원인과 결과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겠다. 


작가가 저격하는 대상은, 결코 <차이퉁>, <존탁스차이퉁>을 비롯한 옐로저널리즘 따위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말을 비틀고 사실을 날조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기 짝이 없는 기사를 날리려 해도, 최소한의 기본 바탕이 되는 말, 언어가 있어야 한다. 무명으로부터 시작된 소문, 삶 자체를 의심하는 경찰의 수사 및 조사,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한 마디, 이 모든 게 자신들도 모르는 새에 범접할 수 없는 강물을 이룬다. 


이 책은 긍극적으로 그런 언어들의 혼합되고 혼란한 집합이 만들어낸 무명, 무지, 무책임의 폭력에게 화살을 쏘아보내려 하는 것이다. 그 위엔 옐로저널리즘의 탄생에 전적인 책임이 있는 자본주의 체제 따위가 아닌 폐허가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풍요에 가려 절대로 볼 수 없는 정신적 폐허 말이다. 


그래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비단 카타리나뿐 아니라 이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의 잃어버린 명예이기도 하다. 부지런하고 능력 있고 지극히 비정치적이며 경제적으로 번창하고 있는 한 사람, 카타리나 블룸에게 일어난 사건. 아주 다반사로 일어나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나한테 일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건의 주인공은 당연히 누구라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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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표지 ⓒ민음사



종종 시대를 뛰어넘는 시대를 앞서가는 작품을 목격한다. 이 시대에 이런 생각이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우린 그런 작품을 보고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라고 평하곤 한다. 가령, 1960년대 만들어진 영화 <졸업>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최소 30년 후에 만들어졌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만했다. 


비쥬얼적 요소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상당한 영화와는 달리 소설은 기시감을 거의 느낄 수 없다. 1960년대가 아닌 16세기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을 아주 친숙하게 읽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전체에 흐르는 감각이나 생각 등에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나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 거리감이나 기시감은커녕 현재를 사는 우리보다 더 감각적이고 생동하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가 낳은 세기의 문제적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네 번째 작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이다. 1959년에 발표했으니 어언 60년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촌스러움을 발견할 수 없다. 시대상이나 시대정신이 발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소설은 2010년대에도 통용되는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과 감정을 무참할 정도로 혼란에 빠뜨리고 모호하게 만들면서 파괴해버린다. 그나마 어울리는 단어로 '파격'이 있을까. 그런데, 파격 이후엔 그것을 기점으로 정립된 '정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 이 작가의 것을 결코 따라하긴 힘들 것 같으므로, 홀로 그만의 견고한 성을 쌓은 느낌이다. 그야말로 사강은 괴물이 아니고 뭔가, 싶다. 


시대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사랑 이야기, 사강이 그려낸 사강만이 그려낼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사랑은 그 시대의 사랑이 아니다. 시대를 초월한 사랑이다. 이 난해하지만 평범하고 혼란스럽지만 전형적이고 모호하지만 정해진 듯한 길로 향하는 사랑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섬세함을 따라가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 


서른아홉의 커리어우먼 폴은 실내장식가로 일한다. 그녀는 20대 중반에 이미 결혼했었지만 파경에 이르렀고, 이후 만난 연인 로제와 오랫동안 지내고 있다. 오래된 연인은 으레 그런 것인가? 완전한 익숙함에 폴은 로제와 무슨 일이 있어도 헤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로제는 그녀와 연인 관계를 이어나가면서도 틈만 나면 젊고 아름다운 여자와의 하룻밤을 즐기고 있고 폴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가는 폴, 어느 날 폴은 반 덴 베시 부인의 아파트 실내 장식을 부탁받고 일을 시작한다. 그 첫날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눈부신 미남 시몽, 반 덴 베시 부인의 아들이다. 헐렁한 실내복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호리호리한 몸매와 까무잡잡한 살결, 섬세해 보이는 연한 빛을 띠는 눈동자까지. 


이후 시몽은 폴에게 적극적으로 대쉬한다. 자그마치 14살 차이가 나는 폴과 시몽, 폴은 시몽의 대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밖으로만 돌며 사랑다운 사랑을 주지 않는 로제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맞는 짝은 로제인 것 같다. 반면 시몽은 치명적인 사랑을 준다. 인생의 다시 없을 황홀한 때, 주인공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시몽은 자신에게 맞는 짝이 절대 될 수 없을 것 같다. 


혼란 속에서도 평범을 꿈꾸는 현대인


이 소설은 '권태'에 빠진 연인의 불륜 또는 바람 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표피를 이룬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권태에 빠지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소설의 시작과 동시에 이미 폴과 로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느낌이다. 


'사랑'이 보인다. 폴, 로제, 시몽 세 주인공의 사랑 말이다. 이들을 통해 엿보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은 형편없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하다. 이들의 모습을 총합해 보면 사랑의 본질이 나올 것도 같다. 그렇지만 결국 사랑도 사람이 하는 게 아닌가?


우린 이쯤에서 사강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게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거기에 뜻하지 않게 운명적 체념도 엿보인다. 타고난 성격에 의한 운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면서도 죽음의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밖에 부나방처럼 말이다. 


결국 이 모든 게 무언가? 이것도 저것도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사람의 운명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게 만들어진 것인가? 어떤 슬픔도 환희도 즐거움도 기쁨도 없다. 그저 덧없고 덧없는 무의미와 무미건조만 있을 뿐이다. 


이 소설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삶을 엿본다. 그녀의 사랑을 엿본다. 결국 그녀를 엿본다. 이토록 우울한 사랑을 이토록 감각적이고 섬세하게 그려낸 그녀는 어떤 사람인가. 깨지기 쉽고 매순간 바뀌고 극도의 혼란 속에서 평범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현대인 그 자체가 아닌가. 그런 그녀가 창조해낸 불안한 매력의 이들과 사랑은 통찰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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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


소설 <점과 선> 표지 ⓒ모비딕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추리소설가가 아닌)들이다. 추리,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독자도 이들의 소설 한 편쯤은 접해봤음직하다. 30여 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더욱 대단한 건 장르 작가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장르 소설을 제외한 소설이 거의 죽다시피 한 일본 소설계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장르 소설을 엄연히 소설의 주류로 받아들이는 일본 소설계의 넓은 아량(?)을 엿볼 수 있겠다고도 하겠다.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사회파 소설가'라 칭한다. 추리를 위한 추리, 미스터리를 위한 미스터리가 아닌, 사회 구조를 테마로 하되 그 방법론으로 추리를 적용하여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그 끝에는 결국 '인간'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을 단순히 추리소설가로 폄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사회파 소설의 시초는 따로 있다. 궁핍과 차별을 뛰어넘어 늦게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등 그 자체의 파란만장한 삶으로도, 글에 대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집념으로도, 일본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한 '마쓰모토 세이초'다. 그리고 그의 첫 장편소설 1958년작 <점과 선>은 오늘날 사회파 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 부조리와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추리


10년도 더 전에, 그야말로 추리소설에 푹 빠져 개걸스럽게 섭렵하고 있었을 때 당연히 이 소설도 접했다. 당시의 나에게 추리소설이란, '추리를 위한 추리'가 중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는, 그 출중하고 복잡하고 완벽한 트릭에도 불구하고 수단에 불과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그 안에 갇힌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수단. 


더군다나 이제껏 본 적 없는 복잡한 시간과 숫자들의 맞물림은 나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완벽히 해결되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빨리 읽은 소설도 드문데, 이토록 어렵고 치밀한 트릭과 추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니. 그동안 머리가 큰 것도 있겠고, 번역의 차이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완벽한 게 아니었나 싶다. 


관청 납품으로 급성장한 회사의 오너 야스다 다쓰오는 요정 '고유키'에 자주 들렀다. 그가 올 때마다 오토키가 담당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엔가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 둘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이다. 그러곤 그들은 도쿄역으로 함께 가는데, 그곳에서 다름 아닌 오토키가 하카타행 특급에 오르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중앙 관청 부정부패 사건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과장대리 사야마 겐이치와 함께 있었다. 여러 말들이 오가던 중 6일 후 후쿠오카 가시이 해안에서 그 둘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보아도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동반 자살 건을 후쿠오카 경찰서의 베테랑 형사 도리카이 준타로가 의심을 갖고, 경기청에서 부정부패 사건을 조사하던 미하라 기이치 경위가 의문을 던진다. 자살이 아닌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의문. 이후 미하라는 끊임없는 의심과 의문, 섬광 같이 번뜩이는 깨달음, 상사인 가사이 경감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간다. 


종국에는 일본의 끝과 끝인 훗카이도와 규슈를 오가는 종횡무진 끝에 애당초 점 찍은(?) 용의자를 색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방법론으로 극도의 리얼리티를 첨가한 추리 기법을 선보이는데, 열차 시간을 시작으로 당대의 항공, 배, 숙박 시간을 모조리 완벽히 꿰어 맞춘 트릭과 알리바이들이었다. 그 사이에 1950~60년대 일본 사회의 시대상을 오밀조밀하게 그려내고, 부조리를 대범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 <점과 선>의 흥미점과 위대함


우린 이 소설에서 몇 가지의 흥미점을 찾을 수 있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광분할 만한 트릭이 그 중 하나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환상적인 트릭이 있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비밀>이 보여준 세계 최초의 밀실 미스터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보여준 완벽한 알리바이 깨기 등. <점과 선>의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완벽한 트릭 깨기도 이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재미를 선사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더 와닿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 트릭과 추리에 이어지는 깨달음도 있다. 미하라 경위가 계속해서 순간적으로 깨닫는 것들이 그것인데, 다름 아닌 '맹점'이다. 모르는 사이에 작용하는 선입관으로 당연하다고 지나치는 것들을 범인이 이용한 것인데, 이 만성이 된 상식이야말로 정녕 무서운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수사에 임할 땐 당연한 상식이라도 일단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흥미점이다. 위의 트릭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점으로, 부정부패 사건으로 얼룩진 사회의 부조리와 어두운 내면을 고발하고자 하는 장면이다.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은 부정부패 사건을 덮으려는 더러운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대형 비리 사건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꼭 정통 실무자인 과장 대리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출세에 희망이 보이니 상관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보신보다 출세를 위해 상관의 뜻에 엽합해서 협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인정이고, 관청은 그런 인정이 얽혀 있는 동네라고 못 박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비리, 부정부패, 자살을 빙자한 타살 사건들이 판을 치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 사실 개 중엔 소설에서처럼 고위층이 연류된 사건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이 아닌 그들을 따른 이가 대신 책임 지고 인생이 파멸에 이르며, 그들은 다른 어딘가로 가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곤 한다. 이는 더 이상 소설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설도 아니고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 속에서 살고 있다.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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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편혜영 소설가의 <재와 빨강>


소설 <재와 빨강> 표지 ⓒ창비



C국에 있는 본사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 방역업체 직원 '그',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중인 전염병 때문에 가벼운 감기 증상을 보이는 그는 입국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입국했고 본사 출근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이 있지만 열흘 후엔 문제 없을 것 같다. 그가 자리잡은 곳은 '4구'. 쓰레기로 뒤덮혀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기는 이곳은, 사실 쓰레기매립지를 재개발해서 만든 외딴섬이다.


전염병 때문에 고립된 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그는, 어느 날 모국으로부터 아내가 처참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얼마 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으로 들이닥치려 하자 그는 자신이 아내 살인 용의자로 몰린 것이라 생각하고 아파트먼트 4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린다. 그가 추락한 곳은 '안전한' 쓰레기 더미. 그는 곧 부랑자가 된다.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행세는, 그가 전염병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다른 부랑자 무리에 의해 하수구로 추락하면서 '지하'로 내려간다. 그곳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4층에서의 고립된 생활이, 쓰레기 더미에서 그나마 음식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먹고 버려진 옷가지를 주워 입고 어떻게든 깨끗한 물로 씻을 수 있었던 부랑자 생활이, 너무도 그립게 만든다. 쥐를 잘 잡아 본사파견에 뽑힌 그가, 쥐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앞날은 어떨까?


얼마 전 편혜영 소설가의 2010년작 <재와 빨강>(창비)가 '2016년 폴란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설적 대단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일찍이 그의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단편 1~2편 정도) 나로서는,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재와 빨강>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단편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필체와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 때문이었는데, 더욱이 이 소설은 그 정점이었다. 


전염병 세상으로 치환된, 현대사회의 무감각과 단절


편혜영 소설가 또는 편혜영 소설을 관통하는 건 부정적 이미지들이다. 그로테스크, 어둠, 암울, 고독 등. <재와 빨강>은 2000년에 데뷔한 그의 의외로 늦은 첫 번째 장편소설이니, 그동안 묵혀 왔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을 게 분명하겠다. 그 중심엔 '전염병'이, 그리고 그에 죽을동 살동 생존 투쟁을 벌이는 '인간'이 있다. 


전염병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소설은 카뮈의 <페스트>다. 우린 이 소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와 빨강>에서는 '절망'만을 발견할 뿐이다.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1918년 스페인독감, 거슬러 올라가 중세 유럽을 초토화 시켰던 페스트, 그리고 불과 2년 전에도 나라 전체를 벌벌 떨게 했던 메르스까지, 수백 수천 수만 년의 전염병과의 투쟁에서 인간이 깨달은 건 무엇일까. 


예방법 혹은 퇴치법?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를 퇴치했고, 파스퇴르는 페스트를 퇴치했다. 하지만 인간이 깨달은 건, 아니 깨달아야 하는 건 전염병 자체가 아니라 전염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전염병 의심자를 관리하는 '권력'이다. '그'가 하염없이 추락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의심'과 '권력' 때문이었다. 물론 1차 추락은 다른 종류와 층위의 의심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 그의 삶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보여지고 다뤄지는 건 다름 아닌 주인공 '그'이지만,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가 끊임없이 의심받고 의심하고 짓눌리고 결정적으로 고독한 건 전염병으로 점절된 세상으로 치환되는 현대 사회의 지독한 무감각과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과 절망이다. 세상을 뒤덮은 쓰레기를 태워서 나오는 '재'와 고독에 몸부림치며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짓으로 얼굴을 덮은 '빨간' 피가 한없이 몸을 떨게 만든다. 


이 소설의 강점이자 약점, 수많은 층위와 상징들


SF 스릴러에 가까운 장르적 느낌이 나는 이 소설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수많은 층위와 상징들에 있다. 이 소설을 '그'의 지독한 생존 투쟁기로 읽어도 좋고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의 종말기로 읽어도 좋다. 작가는 이 둘을 모두의 서사를 충실하게 내놓으며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의 아내는 왜 처참히 죽었는지, 그는 모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소소한 맥락들을 따라가는 것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한다. 


더불어 도처에 깔린 각종 상징들은 완벽할 정도다. 그의 빈틈없는 문체와 이야기 구조의 기반 위에 정교하게 계산된 상징들이기에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시대의 최고 권력인 '방역'과 '의료', 거기에 그의 본사 임원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자본 권력이 서로를 인정하고 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쥐를 잘 잡아 본사로 파견된 그가 쥐보다 못한 부랑자가 되고 쥐한테 위협당하는 지하인이 되어 결국 다시 쥐를 잡는 것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해 지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모습은, 인간과 쥐의 당황스럽지만 틀리지 않은 동급 자각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쓰레기매립지 위에 세워진 도시, 굳이 쓰레기가 도처에 산더미처럼 쌓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는 구역질 나는 구취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기반이 다름 아닌 인간이 싸질러 놓은 것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건 즉, 모든 게 무너지는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와중에 한낱 개인이 절망에 고통스럽고 고독에 울부짖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겠다. 


이 비극인듯 희극인듯, 비극적 세상을 비극적으로 투쟁하는 한 인간의 여정의 끝은 어디일까.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쓰레기로 뒤덮인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통에도 사랑은 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염병 창궐 사회에서도 일을 해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많은 것들이 달라졌으리라 본다. 당사자만 모를뿐이다. 우리도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고독한지 모르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더 오래 버틸지 알 수 없듯이, 또는 알고 싶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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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한국이 싫어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 표지 ⓒ민음사



2010년대 들어 한국을 강타한 신조어 중 하나가 '헬조선'인데, 아무도 지옥에서 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희망 따윈 찾을 수 없는 지옥 같은 한국을 탈출하는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남들처럼만 살기 위한 피나는 노력, 인생 한방 역전을 위한 로또, 이전까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의 포기, 헬조선 땅을 떠나는 이민. 이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무엇일까. 노력은 남들도 다 하고, 로또는 가능성이 희미하다. 반면 포기가 가장 쉬운 것 같다. 이민은?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다. 


10여 년 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헬조선 탈출의 의미 부여는 전혀 아니었고, 외국에서 살며 일하고 놀고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였다. 이왕이면 공부도 하면 좋고. 그런데 요즘 워킹홀리데이는 다른 의미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민의 교두보인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최장 2년까지 가능한대, 그렇게 돈을 모으고 스스로를 현지화시킨 다음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으며 영주권 준비를 한다. 


사실 이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에 의한 계획적 이민이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이민이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외하벌이를 위한 국가의 계획적 이민이 주를 이뤄왔다고 한다. 그러던 외환위기 이후 양상이 크게 바뀌어 경제불안정과 교육 불안 때문에 중산층의 이민이 주를 이룬다. 그 이후가 경쟁력이 없는(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010년대 헬조선 탈출이다. 


장강명 작가가 소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통해 보여주는 헬조선 탈출 양상은 사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는 누구든 생각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고, 내 동생은 실행에 옮겼지만 실패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그곳에선 행복할까


'계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한 행운아다. 그것도 대기업이라 할 만한 W종합금융에. 그녀는 또한 예의 바르고 허세 부리는 거 없고 목표가 뚜렷한 남자 친구 '지명'도 있다. 그럼에도 3년 동안 회사를 다닌 후 때려 치우고 호주로의 이민을 위해 무작정 호주 시드니로 떠난다. 그녀는 왜 한국을 떠나는가? 그녀의 말을 빌리면,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다. 


N포 세대 당사자들이 보기에 기가 찰 노릇일지 모른다. 취업도 했고 연애도 하고 있는데 더 무얼 바라냐 하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비전이 없다고도 생각한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가난하고, 그렇다고 엄청 예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린 여기서 N포 세대가 가진 엄청난 스펙트럼을 발견한다. 계나처럼 '행운아'조차도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 스펙트럼만큼 슬퍼지는 바, 급기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N포 세대의 비애도 엿보인다. 계나가 포기한 건 희망이고, 계나를 부러워 하는 이들이 포기한 건 여전히 현실적인 조건들이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게 계나가 정착하게 된 호주는 어떨까. 그곳에서라도 잘 산다면 그녀가 포기한 희망이 갈 곳을 찾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곳에 가서 되찾을 수 있기에, 국가야 어쨌든 한 개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아니, 계나의 삶을 위시한 실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계나는 그곳에서도 지옥을 맛본다.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의 지옥이다. 기본적인 거주 조건조차 최악인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영주권을 딴 계나이지만 그녀는 '외부인'이라야만 겪을 곤경을 계속해서 겪는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희망은 눈에 어른거리지도 않는 상황의 연속. 인간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소설이 끝날 때쯤 일이 있어 한국에 왔다가 다시 호주로 가는 계나가 하는 말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는 그래서 허무하게 들린다. 


한국을 떠나지 말고 바꿔 보자


동생이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던 건 '한국이 싫어서'가 '한국에서 더 잘 살아보려고' 란다.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이 하는 말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계나에게 시민권을 딴 후에는 한국에 와서 같이 살고 늘그막에 다시 호주로 가서 살자고 한다. 호주 영주권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 원쯤 된다면서. 그러나 계나에게 호주 영주권이 수단으로 작용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러기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싫다. 그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나도 한국이 싫다.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을 것 같다. 또한 적어도 한국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을 쉽게 떠나진 못할 것 같다. 한국을 떠나서 외국으로 가도 큰 틀에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과 오히려 더욱 하찮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몸소 겪어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계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호주가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는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는 왜 호주에서 '지금' 행복하지 못하는지? 왜 '앞으로' 꼭 행복해져야지 하는 다짐을 계속 하는지? 헬조선의 물질적 탈출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지 않을까. 작가가 그려내며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같이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국에서 희망까지 포기한 삶을 영위하며 그저 현실에 안주하란 말인가. 저성장 시대인 만큼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만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 다른 방도가 있다. 거칠 게 말해서, 한국을 바꾸는 것. 물론 계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그것을 이유로 한국을 떠난 것이기는 하다. 


방법은 다양하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고민하며 강구해야 한다. 사자와 맞짱뜨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사자를 굶어죽게 할 수도 있고 사자를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며 하물며 사자를 하이에나로 둔갑시켜 버릴 수도 있는 시대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논란과 논의가 있을 줄 안다. 논란에서 그치지 말고 논의로 발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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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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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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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바스커빌가의 개>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가의 개> 표지 ⓒ열린책들



소싯적에 추리소설 한번 읽지 않은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추리소설 접한 사람치고 한번 푹 빠져 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마 그 시작은 대부분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일 텐데, 그 시리즈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래 동화에 버금가는 친화력으로 무장해 수많은 이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했다. 물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소싯적에 추리소설에 한번 푹 빠진 적이 있다. 그때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Y의 비극> <환상의 여인>의 '3대 추리소설'이니 '10대 추리소설' 따위를 열심히 찾아보곤 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셜록 홈스 시리즈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단 하나의 소설만 빼고. 그건 다름 아닌 셜록 홈스 시리즈 최고의 소설로 통하며, '10대 추리소설' 중 하나에 들곤 하는 <바스커빌가의 개>이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은 소설의 내용과 분위기에 그대로 투영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 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 전에 내외적으로 소설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어 흥미를 더한다. 소설의 배경이 셜록 홈스가 죽었을 때라는 점이나, 여타 셜록 홈스 시리즈의 책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 때문에 코난 도일이 쓴 게 아니라는 의혹 등이 그렇다. 


현실로 다가온 바스커빌가의 '악마 개' 전설


영국 남서부 쪽에 위치한 다트무어, 바위가 많은 고원인 그곳의 황무지엔 바스커빌 홀이 있다. 오래된 가문 바스커빌가의 본가인 그곳엔 전설로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있다. '악마 개'가 바스커빌가의 망나니 선조를 물어 죽인 전설이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직계 후손인 찰스 바스커빌 경이 악마 개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전설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에 찰스 경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모티머 박사가 홈스와 왓슨을 찾아온다. 찰스 경의 죽음을 조사함과 동시에 그의 유일한 상속인인 헨리 바스커빌 경을 보호해 달라고 말이다. 홈스는 오랜 숙고 끝에 왓슨을 바스커빌 홀로 파견한다. 홈스는 당장 시급한 일 때문에 나설 수 없으므로. 


거기에는 오랫동안 바스커빌가를 모셔온 가문의 배리모어 부부가 있고, 근처에는 래프터 홀의 프랭클랜드 씨, 메리피트 저택의 스태플턴 남매가 있다.  찰스 경과 가깝게 지냈던 이들인데, 홈스는 이들 모두가 여전히 미지의 요소이기 때문에 빠짐없이 살펴 보고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황무지엔 살인범 탈옥수도 숨어들었다고 하는데...


왓슨이 바스커빌 홀에 온 이후 소설은 다른 양식을 따른다. 오로지 왓슨의 보고서와 일기에 의존한다. 홈스의 명쾌하고 기가 막힌 추리와는 다른, 지극히 조심스럽고 어딘지 어설픈 추리다. 나름 재밌지만 홈스가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반드시 홈스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언제쯤 어떤 식으로 등장하게 될까?


위대한 추리소설, <바스커빌가의 개>


<바스커빌가의 개>는 위대한 '추리소설'의 요소를 갖췄다. 위대한 추리소설이라하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정녕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추리'를 해내는 것이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상황을 만들어야 하겠다. <Y의 비극>이나 <노란 방의 비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굉장한 마니아가 존재할 것이다.


또 하나는 추리도 추리지만 '문학'적으로 굉장한 성취를 보이는 것이다. 추리소설이라는 딱지를 떼고서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수준이랄까. <바스커빌가의 개>를 포함한 <환상의 여인>, <기나긴 이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추리소설보다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갖는 위대한 양식 중 하나는 단연 '분위기'이다. 다트무어라는 지역이 주는 특징인 '바위가 많은 고원', 그런 곳의 음울하고 황량한 '황무지', '탈옥수'가 주는 불안, 그리고 바스커빌가의 전설 '악마 개'가 선사하는 초자연적 두려움까지. 이는 단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고딕소설'의 일환이다. 


추리소설이라는 하위 장르가 아닌, 그보다는 상위 개념인 고딕소설이라는 장르. 코난 도일은 고딕소설의 요소를 상당 부분 차용해 이 추리소설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고딕소설의 클리셰가 엄청 눈에 띄는데, 그게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게 백미다. 이 소설은 고딕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연히 추리소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셜록 홈스 시리즈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대영제국이 느낀 으스스함을 담다


낭만주의 소설 양식 중 하나인 고딕소설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루는데, 당대에 성행했던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등에 억압된 비합리성과 감성에 대한 갈망이 표출된 것이라 한다. 유명한 작품으로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등이 있는데, 이 소설에선 '바스커빌가의 악마 개'가 그 주체라고 하겠다. 


'악마 개'의 시작은 18세기 중반, 고딕소설로 표출될 억압된 욕망의 갈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사람들의 갈망이 만들어낸 허상은 허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때론 허상이 실상보다 무서운 법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소설이 만들어진 때가 1901년이니 복잡다단한 당시의 세계가 투영되었을 것이다. 보어전쟁이 한창인 당시, 17세기부터 전 세계를 호령한 대영제국은 서서히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 힘이 예전만 못한 것. 그런데 그 대상이, 그 적이 누구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사방이 적인 게 아닐까. 소설은 그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소설이 갖는 으스스한 분위기는 고스란히 당대 영국이 느끼는 으스스함이었을 것이다. 홈스와 왓슨은 과연 이 초자연적인 사건들과 알 수 없는 으스스함의 원인을 찾아 훌륭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까? 역시 그러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리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영국이 홈스를 사랑하는 이유, 홈스가 반드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 홈스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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