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읽기] 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


소설 <점과 선> 표지 ⓒ모비딕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추리소설가가 아닌)들이다. 추리, 미스터리, 서스펜스 장르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독자도 이들의 소설 한 편쯤은 접해봤음직하다. 30여 년 동안 정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더욱 대단한 건 장르 작가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거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장르 소설을 제외한 소설이 거의 죽다시피 한 일본 소설계의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장르 소설을 엄연히 소설의 주류로 받아들이는 일본 소설계의 넓은 아량(?)을 엿볼 수 있겠다고도 하겠다. 


이 둘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사회파 소설가'라 칭한다. 추리를 위한 추리, 미스터리를 위한 미스터리가 아닌, 사회 구조를 테마로 하되 그 방법론으로 추리를 적용하여 더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진실에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그 끝에는 결국 '인간'이 있다. 그리하여 이들을 단순히 추리소설가로 폄하할 수 없는 노릇이다. 


사실, 사회파 소설의 시초는 따로 있다. 궁핍과 차별을 뛰어넘어 늦게 작가의 길에 들어서는 등 그 자체의 파란만장한 삶으로도, 글에 대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가공할 만한 집념으로도, 일본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도 유명한 '마쓰모토 세이초'다. 그리고 그의 첫 장편소설 1958년작 <점과 선>은 오늘날 사회파 소설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사회 부조리와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추리


10년도 더 전에, 그야말로 추리소설에 푹 빠져 개걸스럽게 섭렵하고 있었을 때 당연히 이 소설도 접했다. 당시의 나에게 추리소설이란, '추리를 위한 추리'가 중심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는, 그 출중하고 복잡하고 완벽한 트릭에도 불구하고 수단에 불과했다. 사회의 부조리와 그 안에 갇힌 인간을 묘사하는 목적에의 수단. 


더군다나 이제껏 본 적 없는 복잡한 시간과 숫자들의 맞물림은 나를 지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완벽히 해결되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빨리 읽은 소설도 드문데, 이토록 어렵고 치밀한 트릭과 추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다니. 그동안 머리가 큰 것도 있겠고, 번역의 차이도 있겠지만, 애초에 이 소설이 완벽한 게 아니었나 싶다. 


관청 납품으로 급성장한 회사의 오너 야스다 다쓰오는 요정 '고유키'에 자주 들렀다. 그가 올 때마다 오토키가 담당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날엔가 그녀가 아닌 다른 이들 둘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평소 그답지 않게 말이다. 그러곤 그들은 도쿄역으로 함께 가는데, 그곳에서 다름 아닌 오토키가 하카타행 특급에 오르는 걸 목격한다. 그녀는 중앙 관청 부정부패 사건으로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과장대리 사야마 겐이치와 함께 있었다. 여러 말들이 오가던 중 6일 후 후쿠오카 가시이 해안에서 그 둘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보아도 동반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이 동반 자살 건을 후쿠오카 경찰서의 베테랑 형사 도리카이 준타로가 의심을 갖고, 경기청에서 부정부패 사건을 조사하던 미하라 기이치 경위가 의문을 던진다. 자살이 아닌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과 의문. 이후 미하라는 끊임없는 의심과 의문, 섬광 같이 번뜩이는 깨달음, 상사인 가사이 경감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사건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간다. 


종국에는 일본의 끝과 끝인 훗카이도와 규슈를 오가는 종횡무진 끝에 애당초 점 찍은(?) 용의자를 색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 방법론으로 극도의 리얼리티를 첨가한 추리 기법을 선보이는데, 열차 시간을 시작으로 당대의 항공, 배, 숙박 시간을 모조리 완벽히 꿰어 맞춘 트릭과 알리바이들이었다. 그 사이에 1950~60년대 일본 사회의 시대상을 오밀조밀하게 그려내고, 부조리를 대범하게 드러낸다. 


이 소설 <점과 선>의 흥미점과 위대함


우린 이 소설에서 몇 가지의 흥미점을 찾을 수 있다. 추리소설 팬이라면 광분할 만한 트릭이 그 중 하나이다. 아직도 기억나는 환상적인 트릭이 있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유명한 가스통 르루의 <노란방의 비밀>이 보여준 세계 최초의 밀실 미스터리,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로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살인>이 보여준 완벽한 알리바이 깨기 등. <점과 선>의 열차 시간표를 이용한 완벽한 트릭 깨기도 이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재미를 선사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더 와닿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 트릭과 추리에 이어지는 깨달음도 있다. 미하라 경위가 계속해서 순간적으로 깨닫는 것들이 그것인데, 다름 아닌 '맹점'이다. 모르는 사이에 작용하는 선입관으로 당연하다고 지나치는 것들을 범인이 이용한 것인데, 이 만성이 된 상식이야말로 정녕 무서운 것이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수사에 임할 땐 당연한 상식이라도 일단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굉장히 도움이 되는 흥미점이다. 위의 트릭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과 연관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점으로, 부정부패 사건으로 얼룩진 사회의 부조리와 어두운 내면을 고발하고자 하는 장면이다. 이 소설의 주요 사건은 부정부패 사건을 덮으려는 더러운 목적에서 시작된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데, 대형 비리 사건에서 모든 걸 짊어지고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꼭 정통 실무자인 과장 대리급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출세에 희망이 보이니 상관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결국 자신의 보신보다 출세를 위해 상관의 뜻에 엽합해서 협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인정이고, 관청은 그런 인정이 얽혀 있는 동네라고 못 박는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비리, 부정부패, 자살을 빙자한 타살 사건들이 판을 치며 세상을 속이려 한다. 사실 개 중엔 소설에서처럼 고위층이 연류된 사건이 상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결국 그들이 아닌 그들을 따른 이가 대신 책임 지고 인생이 파멸에 이르며, 그들은 다른 어딘가로 가 이전보다 더 나은 생활을 하곤 한다. 이는 더 이상 소설도 아니고 영화도 아니고 설도 아니고 사실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 속에서 살고 있다.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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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편혜영 소설가의 <재와 빨강>


소설 <재와 빨강> 표지 ⓒ창비



C국에 있는 본사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 방역업체 직원 '그',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중인 전염병 때문에 가벼운 감기 증상을 보이는 그는 입국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입국했고 본사 출근하는 데에도 애로사항이 있지만 열흘 후엔 문제 없을 것 같다. 그가 자리잡은 곳은 '4구'. 쓰레기로 뒤덮혀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풍기는 이곳은, 사실 쓰레기매립지를 재개발해서 만든 외딴섬이다.


전염병 때문에 고립된 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그는, 어느 날 모국으로부터 아내가 처참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얼마 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으로 들이닥치려 하자 그는 자신이 아내 살인 용의자로 몰린 것이라 생각하고 아파트먼트 4층에서 베란다 밖으로 뛰어내린다. 그가 추락한 곳은 '안전한' 쓰레기 더미. 그는 곧 부랑자가 된다. 


더 밑으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행세는, 그가 전염병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다른 부랑자 무리에 의해 하수구로 추락하면서 '지하'로 내려간다. 그곳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했던' 4층에서의 고립된 생활이, 쓰레기 더미에서 그나마 음식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먹고 버려진 옷가지를 주워 입고 어떻게든 깨끗한 물로 씻을 수 있었던 부랑자 생활이, 너무도 그립게 만든다. 쥐를 잘 잡아 본사파견에 뽑힌 그가, 쥐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그의 앞날은 어떨까?


얼마 전 편혜영 소설가의 2010년작 <재와 빨강>(창비)가 '2016년 폴란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설적 대단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일찍이 그의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단편 1~2편 정도) 나로서는,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 <재와 빨강>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았다. 단편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로테스크한 필체와 어둡고 암울한 분위기 때문이었는데, 더욱이 이 소설은 그 정점이었다. 


전염병 세상으로 치환된, 현대사회의 무감각과 단절


편혜영 소설가 또는 편혜영 소설을 관통하는 건 부정적 이미지들이다. 그로테스크, 어둠, 암울, 고독 등. <재와 빨강>은 2000년에 데뷔한 그의 의외로 늦은 첫 번째 장편소설이니, 그동안 묵혀 왔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을 게 분명하겠다. 그 중심엔 '전염병'이, 그리고 그에 죽을동 살동 생존 투쟁을 벌이는 '인간'이 있다. 


전염병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소설은 카뮈의 <페스트>다. 우린 이 소설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재와 빨강>에서는 '절망'만을 발견할 뿐이다. 5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1918년 스페인독감, 거슬러 올라가 중세 유럽을 초토화 시켰던 페스트, 그리고 불과 2년 전에도 나라 전체를 벌벌 떨게 했던 메르스까지, 수백 수천 수만 년의 전염병과의 투쟁에서 인간이 깨달은 건 무엇일까. 


예방법 혹은 퇴치법? 에드워드 제너는 천연두를 퇴치했고, 파스퇴르는 페스트를 퇴치했다. 하지만 인간이 깨달은 건, 아니 깨달아야 하는 건 전염병 자체가 아니라 전염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전염병 의심자를 관리하는 '권력'이다. '그'가 하염없이 추락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의심'과 '권력' 때문이었다. 물론 1차 추락은 다른 종류와 층위의 의심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 그의 삶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보여지고 다뤄지는 건 다름 아닌 주인공 '그'이지만,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가 끊임없이 의심받고 의심하고 짓눌리고 결정적으로 고독한 건 전염병으로 점절된 세상으로 치환되는 현대 사회의 지독한 무감각과 단절 그리고 그로 인한 외로움과 절망이다. 세상을 뒤덮은 쓰레기를 태워서 나오는 '재'와 고독에 몸부림치며 자기도 모르게 행하는 짓으로 얼굴을 덮은 '빨간' 피가 한없이 몸을 떨게 만든다. 


이 소설의 강점이자 약점, 수많은 층위와 상징들


SF 스릴러에 가까운 장르적 느낌이 나는 이 소설의 최대 강점이자 약점은 수많은 층위와 상징들에 있다. 이 소설을 '그'의 지독한 생존 투쟁기로 읽어도 좋고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의 종말기로 읽어도 좋다. 작가는 이 둘을 모두의 서사를 충실하게 내놓으며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의 이름은 무엇인지, 그의 아내는 왜 처참히 죽었는지, 그는 모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소소한 맥락들을 따라가는 것도 충분한 재미를 선사한다. 


더불어 도처에 깔린 각종 상징들은 완벽할 정도다. 그의 빈틈없는 문체와 이야기 구조의 기반 위에 정교하게 계산된 상징들이기에 그렇게 느낄 수 있다. 전염병이 창궐한 시대의 최고 권력인 '방역'과 '의료', 거기에 그의 본사 임원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자본 권력이 서로를 인정하고 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쥐를 잘 잡아 본사로 파견된 그가 쥐보다 못한 부랑자가 되고 쥐한테 위협당하는 지하인이 되어 결국 다시 쥐를 잡는 것으로 자신이 인간임을 자각해 지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모습은, 인간과 쥐의 당황스럽지만 틀리지 않은 동급 자각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쓰레기매립지 위에 세워진 도시, 굳이 쓰레기가 도처에 산더미처럼 쌓이지 않아도 끊임없이 도사리고 있는 구역질 나는 구취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기반이 다름 아닌 인간이 싸질러 놓은 것들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건 즉, 모든 게 무너지는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와중에 한낱 개인이 절망에 고통스럽고 고독에 울부짖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겠다. 


이 비극인듯 희극인듯, 비극적 세상을 비극적으로 투쟁하는 한 인간의 여정의 끝은 어디일까. '그'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쓰레기로 뒤덮인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통에도 사랑은 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염병 창궐 사회에서도 일을 해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지만 많은 것들이 달라졌으리라 본다. 당사자만 모를뿐이다. 우리도 우리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고독한지 모르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더 오래 버틸지 알 수 없듯이, 또는 알고 싶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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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한국이 싫어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 표지 ⓒ민음사



2010년대 들어 한국을 강타한 신조어 중 하나가 '헬조선'인데, 아무도 지옥에서 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희망 따윈 찾을 수 없는 지옥 같은 한국을 탈출하는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남들처럼만 살기 위한 피나는 노력, 인생 한방 역전을 위한 로또, 이전까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의 포기, 헬조선 땅을 떠나는 이민. 이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무엇일까. 노력은 남들도 다 하고, 로또는 가능성이 희미하다. 반면 포기가 가장 쉬운 것 같다. 이민은?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다. 


10여 년 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헬조선 탈출의 의미 부여는 전혀 아니었고, 외국에서 살며 일하고 놀고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였다. 이왕이면 공부도 하면 좋고. 그런데 요즘 워킹홀리데이는 다른 의미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민의 교두보인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최장 2년까지 가능한대, 그렇게 돈을 모으고 스스로를 현지화시킨 다음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으며 영주권 준비를 한다. 


사실 이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에 의한 계획적 이민이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이민이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외하벌이를 위한 국가의 계획적 이민이 주를 이뤄왔다고 한다. 그러던 외환위기 이후 양상이 크게 바뀌어 경제불안정과 교육 불안 때문에 중산층의 이민이 주를 이룬다. 그 이후가 경쟁력이 없는(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010년대 헬조선 탈출이다. 


장강명 작가가 소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통해 보여주는 헬조선 탈출 양상은 사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는 누구든 생각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고, 내 동생은 실행에 옮겼지만 실패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그곳에선 행복할까


'계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한 행운아다. 그것도 대기업이라 할 만한 W종합금융에. 그녀는 또한 예의 바르고 허세 부리는 거 없고 목표가 뚜렷한 남자 친구 '지명'도 있다. 그럼에도 3년 동안 회사를 다닌 후 때려 치우고 호주로의 이민을 위해 무작정 호주 시드니로 떠난다. 그녀는 왜 한국을 떠나는가? 그녀의 말을 빌리면,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다. 


N포 세대 당사자들이 보기에 기가 찰 노릇일지 모른다. 취업도 했고 연애도 하고 있는데 더 무얼 바라냐 하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비전이 없다고도 생각한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가난하고, 그렇다고 엄청 예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린 여기서 N포 세대가 가진 엄청난 스펙트럼을 발견한다. 계나처럼 '행운아'조차도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 스펙트럼만큼 슬퍼지는 바, 급기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N포 세대의 비애도 엿보인다. 계나가 포기한 건 희망이고, 계나를 부러워 하는 이들이 포기한 건 여전히 현실적인 조건들이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게 계나가 정착하게 된 호주는 어떨까. 그곳에서라도 잘 산다면 그녀가 포기한 희망이 갈 곳을 찾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곳에 가서 되찾을 수 있기에, 국가야 어쨌든 한 개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아니, 계나의 삶을 위시한 실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계나는 그곳에서도 지옥을 맛본다.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의 지옥이다. 기본적인 거주 조건조차 최악인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영주권을 딴 계나이지만 그녀는 '외부인'이라야만 겪을 곤경을 계속해서 겪는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희망은 눈에 어른거리지도 않는 상황의 연속. 인간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소설이 끝날 때쯤 일이 있어 한국에 왔다가 다시 호주로 가는 계나가 하는 말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는 그래서 허무하게 들린다. 


한국을 떠나지 말고 바꿔 보자


동생이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던 건 '한국이 싫어서'가 '한국에서 더 잘 살아보려고' 란다.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이 하는 말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계나에게 시민권을 딴 후에는 한국에 와서 같이 살고 늘그막에 다시 호주로 가서 살자고 한다. 호주 영주권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 원쯤 된다면서. 그러나 계나에게 호주 영주권이 수단으로 작용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러기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싫다. 그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나도 한국이 싫다.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을 것 같다. 또한 적어도 한국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을 쉽게 떠나진 못할 것 같다. 한국을 떠나서 외국으로 가도 큰 틀에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과 오히려 더욱 하찮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몸소 겪어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계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호주가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는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는 왜 호주에서 '지금' 행복하지 못하는지? 왜 '앞으로' 꼭 행복해져야지 하는 다짐을 계속 하는지? 헬조선의 물질적 탈출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지 않을까. 작가가 그려내며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같이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국에서 희망까지 포기한 삶을 영위하며 그저 현실에 안주하란 말인가. 저성장 시대인 만큼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만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 다른 방도가 있다. 거칠 게 말해서, 한국을 바꾸는 것. 물론 계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그것을 이유로 한국을 떠난 것이기는 하다. 


방법은 다양하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고민하며 강구해야 한다. 사자와 맞짱뜨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사자를 굶어죽게 할 수도 있고 사자를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며 하물며 사자를 하이에나로 둔갑시켜 버릴 수도 있는 시대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논란과 논의가 있을 줄 안다. 논란에서 그치지 말고 논의로 발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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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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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


만화 <몬스터> 표지 ⓒ서울문화사



뇌리에 박혀 한 장면, 어쩌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지 모르는 한 장면, 누구에게나 그런 한 장면이 있을 테다. 나에게도 여러 장면이 있는데, 그 중 한 장면이 만화책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만화책은(만화가 아닌 만화책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 그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쯤이었나, 그때는 아직 동네에 도서대여점이 성행 중이었다. 반경 500미터 안에만 족히 5개는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당시 내가 주로 보는 장르는 학원물, 스포츠물, 판타지물 등이었다. 그야말로 그 나이에 걸맞는 장르가 아닌가. 그런데 한두 살 정도나 많은 형이, 당시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전혀 보고 싶지도 않은 장르의 만화책을 빌려가는 게 아닌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였다. 


한두 번이었으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우연히 계속 보게 되었다. 한두 권이 아니라 18권이나 되었으니까. 뭔가 어려워 보이고, 뭔가 수준 높아 보이는 그런 만화책. 왠지 내가 좀 수준 낮아 보여 그 형이 <몬스터>를 빌려갈 때면 난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빌려가곤 했다. 내가 <몬스터>를 보게 된 건 스무 살이 넘어 어른이 되었을 때다. 


우라사와 나오키 만화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 <몬스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가 접한 모든 콘텐츠 중에서 가장 상위권에 위치해 있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내가 읽는 그의 작품은 <파인애플 아미>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빌리 배트>, 즉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대부분을 접한 것이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마스터 키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몬스터>.


내용은 굉장히 미드스럽다. 안 그래도 미드로 제작 중에 있다고 하는데, 언제 나올지는 미지수다. 일본 국적의 독일의료계 신성 텐마는 천재뇌외과의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병원장 딸과 연애도 하고 있는 바, 차기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는 병원 정치에 발을 내딛고 있기에 온갖 술수에 희생양이자 앞장이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논문을 병원장 이름으로 내고, 터키인보다 오페라 가수를 살리는 게 우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던 찰나 사건이 터진다. 망명 온 동독의 고문 가족이 피살당한다. 부모는 죽고 쌍둥이 아이들은 살았지만 남자 아이가 머리에 총상을 입어 중태에 빠진 것. 텐마는 이 아이의 담당으로 배정되지만, 뒤이어 실려온 시장의 담당으로 다시 배정된다. 고민하는 텐마, 결국 그는 병원장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를 살려낸다. 반면 중요한 인물이었던 시자은 죽고 만다. 텐마는 곧바로 치프 자리를 빼앗긴다. 


살려놓은 아이 '요한' 앞에서 병원장과 끄나풀들의 죽음을 간절히 바란 텐마, 며칠 뒤 거짓말처럼 병원 고위층이 한 자리에서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고는 감쪽같이 사라진 요한과 여동생 안나. 새로 부임한 병원장은 텐마를 외과과장에 앉히고, 그렇게 10년이 흘러간다. 어느 날, 우연한 사건으로 텐마는 자신이 살려낸 요한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일삼는 괴물임을 알고 그를 죽이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는 길을 나선다. 아울러 그는 연쇄살인사건의 중요참고인 혹은 용의자로 수배된다. 


이 만화의 무궁무진한 포인트와 등장인물들


이 만화의 포인트는 무궁무진하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쫓기는 천재외과의사,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은 둘째치고 자신이 살려낸 괴물을 죽이고자 외로운 길을 떠난다. 그가 쫓는 괴물 요한의 정체는? 그의 쌍둥이 여동생 니나와의 접점은? 이 괴물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인격인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괴물, 즉 피해자인가.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인가. 


까도 까도 끝없이 까지는 양파처럼 이 만화에는 수많은 포인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나하나가 인간 군상의 개개인을 상징하고 있는 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 결국 모든 게 괴물 요한이라는 포인트로 수렴되지만 모두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어 공감이 간다. 


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 그뿐이랴? 그는 궁극의 혼란, 궁극의 파괴, 궁극의 고독을 원한다. 그런데 그에게 가까이 갈수록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과연 그가 원하는 것일까. 그가 원하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그 부분이 이 이야기가 가지는 매력이자 힘이다. 


'의사' 텐마가 요한을 죽이려는 건 결국 그를 '치료'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또한, 그를 찾아내어 처치하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인데,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도 치료한다. '네가 태어난 의미는 반드시 있어. 네가 살아갈 의미도 있어. 포기하지마. 희망을 가져.' 많은 이들이 요한으로 인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삶을 포기하려 하는데, 텐마는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희망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고전 서사를 즐기는 이유, <몬스터>를 즐기는 이유


우리는 여전히 고전 서사를 즐긴다. 거기엔 인간의 전형이 있기 때문이다. 고전 서사를 변형한 콘텐츠도 부지기수인데, <몬스터> 또한 고전 서사의 변형으로도 볼 수 있다. 모든 걸 원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한 한 인간의 사투, 자신이 되살려 놓은 악을 섬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는 한 인간의 모험, 악의 근원은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선의 근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내려가는 순환. 


이처럼 <몬스터>는 서사가 가지는 힘을 잘 알고 그를 극대화시켜 내보낼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극대화된 콘텐츠라 하겠다. 거기에 오그라들 만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놓았다. 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년에게, 당대 정세나 상황 설정은 장년에게 먹힐 만하다. 


이 세상에 나홀로 남게 되었을 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무얼까. 아무도 나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라고 만화는 말한다. 그건 비단 진정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아도 가능하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는 바, 나를 아는 사람이 모두 죽으면 나는 자연스레 존재하지 않는 게 되지 않을까. 요한이 본 '종말'이 바로 그런 모습, 그가 모든 이에게 선사하고 싶은 바도 그런 모습. 


'세상이 만들어낸 슬픈 몬스터', 요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일까. 그가 가진 몬스터의 요소 중 하나일뿐, 온전히 설명하는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우린 이 만화에서 '몬스터'보다 '인간'에게 눈길이 갈 것이다. 몬스터의 슬픔보다 인간의 희망에 기대를 걸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마'라는 전언이 깊이 새겨질 것이다. 그 전언이 몬스터도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는 큰 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린 그런 배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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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바스커빌가의 개>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가의 개> 표지 ⓒ열린책들



소싯적에 추리소설 한번 읽지 않은 사람 별로 없을 것이다. 추리소설 접한 사람치고 한번 푹 빠져 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아마 그 시작은 대부분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일 텐데, 그 시리즈는 하나의 통과의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래 동화에 버금가는 친화력으로 무장해 수많은 이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했다. 물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소싯적에 추리소설에 한번 푹 빠진 적이 있다. 그때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Y의 비극> <환상의 여인>의 '3대 추리소설'이니 '10대 추리소설' 따위를 열심히 찾아보곤 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셜록 홈스 시리즈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단 하나의 소설만 빼고. 그건 다름 아닌 셜록 홈스 시리즈 최고의 소설로 통하며, '10대 추리소설' 중 하나에 들곤 하는 <바스커빌가의 개>이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은 소설의 내용과 분위기에 그대로 투영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 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 전에 내외적으로 소설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어 흥미를 더한다. 소설의 배경이 셜록 홈스가 죽었을 때라는 점이나, 여타 셜록 홈스 시리즈의 책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 때문에 코난 도일이 쓴 게 아니라는 의혹 등이 그렇다. 


현실로 다가온 바스커빌가의 '악마 개' 전설


영국 남서부 쪽에 위치한 다트무어, 바위가 많은 고원인 그곳의 황무지엔 바스커빌 홀이 있다. 오래된 가문 바스커빌가의 본가인 그곳엔 전설로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있다. '악마 개'가 바스커빌가의 망나니 선조를 물어 죽인 전설이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직계 후손인 찰스 바스커빌 경이 악마 개로 인해 죽었다고 한다. 


전설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이에 찰스 경의 주치의이자 친구인 모티머 박사가 홈스와 왓슨을 찾아온다. 찰스 경의 죽음을 조사함과 동시에 그의 유일한 상속인인 헨리 바스커빌 경을 보호해 달라고 말이다. 홈스는 오랜 숙고 끝에 왓슨을 바스커빌 홀로 파견한다. 홈스는 당장 시급한 일 때문에 나설 수 없으므로. 


거기에는 오랫동안 바스커빌가를 모셔온 가문의 배리모어 부부가 있고, 근처에는 래프터 홀의 프랭클랜드 씨, 메리피트 저택의 스태플턴 남매가 있다.  찰스 경과 가깝게 지냈던 이들인데, 홈스는 이들 모두가 여전히 미지의 요소이기 때문에 빠짐없이 살펴 보고하라고 이른다. 그리고 황무지엔 살인범 탈옥수도 숨어들었다고 하는데...


왓슨이 바스커빌 홀에 온 이후 소설은 다른 양식을 따른다. 오로지 왓슨의 보고서와 일기에 의존한다. 홈스의 명쾌하고 기가 막힌 추리와는 다른, 지극히 조심스럽고 어딘지 어설픈 추리다. 나름 재밌지만 홈스가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반드시 홈스가 나오게 되어 있는데, 언제쯤 어떤 식으로 등장하게 될까?


위대한 추리소설, <바스커빌가의 개>


<바스커빌가의 개>는 위대한 '추리소설'의 요소를 갖췄다. 위대한 추리소설이라하면,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정녕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추리'를 해내는 것이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상황을 만들어야 하겠다. <Y의 비극>이나 <노란 방의 비밀>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굉장한 마니아가 존재할 것이다.


또 하나는 추리도 추리지만 '문학'적으로 굉장한 성취를 보이는 것이다. 추리소설이라는 딱지를 떼고서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수준이랄까. <바스커빌가의 개>를 포함한 <환상의 여인>, <기나긴 이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추리소설보다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이 갖는 위대한 양식 중 하나는 단연 '분위기'이다. 다트무어라는 지역이 주는 특징인 '바위가 많은 고원', 그런 곳의 음울하고 황량한 '황무지', '탈옥수'가 주는 불안, 그리고 바스커빌가의 전설 '악마 개'가 선사하는 초자연적 두려움까지. 이는 단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유행했던 '고딕소설'의 일환이다. 


추리소설이라는 하위 장르가 아닌, 그보다는 상위 개념인 고딕소설이라는 장르. 코난 도일은 고딕소설의 요소를 상당 부분 차용해 이 추리소설을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고딕소설의 클리셰가 엄청 눈에 띄는데, 그게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는 게 백미다. 이 소설은 고딕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연히 추리소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셜록 홈스 시리즈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 대영제국이 느낀 으스스함을 담다


낭만주의 소설 양식 중 하나인 고딕소설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루는데, 당대에 성행했던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등에 억압된 비합리성과 감성에 대한 갈망이 표출된 것이라 한다. 유명한 작품으로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등이 있는데, 이 소설에선 '바스커빌가의 악마 개'가 그 주체라고 하겠다. 


'악마 개'의 시작은 18세기 중반, 고딕소설로 표출될 억압된 욕망의 갈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다. 하지만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 사람들의 갈망이 만들어낸 허상은 허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때론 허상이 실상보다 무서운 법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소설이 만들어진 때가 1901년이니 복잡다단한 당시의 세계가 투영되었을 것이다. 보어전쟁이 한창인 당시, 17세기부터 전 세계를 호령한 대영제국은 서서히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 힘이 예전만 못한 것. 그런데 그 대상이, 그 적이 누구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사방이 적인 게 아닐까. 소설은 그 상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소설이 갖는 으스스한 분위기는 고스란히 당대 영국이 느끼는 으스스함이었을 것이다. 홈스와 왓슨은 과연 이 초자연적인 사건들과 알 수 없는 으스스함의 원인을 찾아 훌륭하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까? 역시 그러하겠지만, 이번에는 그리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그럼에도 영국이 홈스를 사랑하는 이유, 홈스가 반드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이유, 홈스가 죽으면 안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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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제노사이드>


<제노사이드> 표지 ⓒ황금가지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출간된 때가 2012년이니까 4년 반 동안 읽고 싶었던 책이 있다. 일본의 일급 엔터테인먼트 소설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그 표지와 두께에 압도 당해, 무엇보다 '제노사이드'라는 단어에 압도 당해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래서 먼저 얼마 전 그의 데뷔작이자 역시 읽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로 압도 당해 읽지 못했던 <13계단>을 독파하고 이 작품으로 넘어 왔다. 명불허전. 


다카노 가즈아키는 '추리 소설가'로서 명성이 자자한대, <제노사이드>는 장르를 완전히 초월해 버리는 나아가 단일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지식의 한계까지 초월해 버린다. 치밀한 조사로 뒷받침되는 무궁무진한 자료들과 그에 뒤지지 않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치지 않게 해주는 필력은 여전하다. 그의 팬이 되어버리기에 충분한 소설. 


'제노사이드'라고 하면 어떤 이유로 특정 종족이나 집단의 구성원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인류 사회가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를 뜻한다. 소설은 제목에 걸맞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어렵고 지루할 수도 있는 명제를 다룬다. 그 한 가운데 있는 것인 '선과 악'이다. 여기서 악은 제노사이드가 아닐까 싶고, 선은 그에 맞서는 노력이 아닐까 싶다. 


인류에 위협되는 신인류 출현, 그를 둘러싼 믿기 힘든 이야기


소설은 서로 전혀 상관 없을 것 같은 두 주인공, 특수부대 출신의 사설 경호업체 피고용인 미국인 '예거'와 약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평범한 일본인 '겐토'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국 대통령 '번즈'를 비롯한 미국 정부 수뇌부도 주요하게 다뤄진다. 접점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이들 사이엔 다름 아닌 '신인류'가 있다. 


아프리카의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열대 우림에 신종 생물, 즉 신인류가 출현해 미국 국가 안전 보장에 위협이 됨은 물론 전 인류 멸망의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번즈.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치부하며 재빨리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일에 착수한다. 예거를 비롯한 특집 정예 요원 4명을 훈련시켜 현장에 급파한 것. 극비리에, 돈은 두둑히. 아들이 '페포 상피 세포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투병하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예거는 앞뒤 볼 것 없이 뛰어든다. 


한편, 석연치 않게 급작스레 아버지를 잃은 겐토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알 수 없는, 알기도 힘든 연구에 착수한다. 미심쩍고 어이 없지만 모든 걸 알고 예견한 듯한 유언이 마음에 걸려 진행하게 된다. 먼저 이 연구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아버지의 살아생전 연구와 연결해보니 바이러스 감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검색된 건 '페포 상피 세포 경화증'이라는 질환. 예상 밖의 결과에 앞날이 까마득하다. 


아프리카에 출현한 것으로 생각되는 신인류, 미국 및 인류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신인류를 제거하려는 미국 정부, 페포 상피 세포 경화증에 걸려 투병하는 아들을 둔 예거의 신인류 제거 임무,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유언에 따라 페포 상피 세포 경화증 치료약 개발하게 된 겐토. 이어질듯 엇갈리는 이들을 스무스하게 이어주는 건 작가의 몫일 것이다. 그걸 감탄하면서 재미있게 읽어주는 건 독자의 몫이고. 


엔터테인먼트+사회고발성 메시지+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조사


데뷔작 <13계단>에서 보여주었던 '엔터테인먼트+사회고발성 메시지+방대한 자료와 치밀한 조사에 의한 전문적 식견'의 장점이 <제노사이드>에서 폭발한 느낌이다. 소설은 첫장을 열고 나서 '본격적 월드와이드 블록버스터'라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아무 생각 없이 읽는다 해도 정말 재밌는 오락 한 판 내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본문 415쪽)


정곡을 찌르다 못해 진리에 가까운 이 대사 하나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단순히 사회고발성 메시지를 훨씬 넘어서는 세상을 향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질문들과 대답들이 등장인물들을 거치지 않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작가가 끼어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것이 흐름에 방해는 할지언정 소설 자체를 훼손하진 못한다. 이 방대함에 모든 걸 끌어안고 가는 것 같다. 


방대함에는 자료와 조사에 따른 전문적 식견이 큰 몫을 차지한다. 작가는 약학, 밀리터리, 국제정세, 정치, 인류, 역사, 철학, 추격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일반인이라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항들을 거침 없이 풀어놓는다.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그걸 상쇄시킬 만한 필력과 시나리오를 위해 자료 조사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했을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하튼 그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사실 이해하지 않아도 큰 무리가 없는 부분은 겐토의 연구.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연구는 이 소설을 지탱하는 '선과 악'에서 '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연구 자체가 아닌 연구를 하는 마음가짐. 반면 15년 전의 미국 부시 정부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번즈 정부의 파렴치한 짓은 '악'의 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걸 말하고 전하고자 하는 모든 걸 전한 작가, 다양한 재료들을 재고 재단하고 붙이고 합치는 능력은 신이 내린듯. 개인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진 걸 보고 싶지만, 영화로는 절대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할 것 같다. 그나마 소설이기에 그의 머리 속에 있는 걸 이만큼이나 뽑아서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선'은 '선'에 있지 않고, '선'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게 아닐까.


"모든 생물 중에서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사람이라는 생물의 정의야. 인간성이란 잔학성이란 말일세. 일찍이 지구상에 있던 다른 종류의 인류, 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도, 현생인류에 의해 멸망되었다고 나는 보고 있네." (본문 472쪽)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보여질 수도 있는 발언. 하지만 충분히 타당한 생각이자 가설이다. 최소한 그 어떤 이유로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제노사이드'는 인간만이 저지르는 행위가 아닌가. 인간이 악마의 탈을 쓰고 하는 행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노사이드'이겠지만, 또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행위가 '제노사이드'이기도 하다.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번즈가 하려는 행위, 즉 신인류를 싹부터 제거해버리려는 행위는, 비록 그 대상이 '1'에 불과하지만 종족 자체를 말살해버리려는 것이기에 '제노사이드'이다. 어찌 이것이 인간이라는 생물의 정의일 수 있을까. 소름이 끼치지만 부정하기도 힘들다. 


세상을 바꾸는 건 항상 소수, 그들은 극비리에 벌이려는 이 제노사이드를 저지할 수 있을까? 무슨 힘으로?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선'에 의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노사이드'를 일으키는 이가 정치적인 것과는 다르게, 그걸 저지하려는 이들은 비록 고민은 할지언정 순수한 마음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선'은 '선'에 있지 않고, '선'으로 가는 길에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은 선이냐 악이냐로 절대 재단할 수 없다. 다만 어디에 가깝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제노사이드'라는 행위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선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행위 이면에 무수히 많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요소들이 뒤엉켜 있음은 물론이겠다. 그 길로 계속 나가야함도 물론이다. 선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길로 계속 가려고 하되 숙고와 질문과 돌아봄을 멈추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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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최고의 데뷔작 <13계단>


최고의 데뷔작 <13계단> 표지 ⓒ황금가지



우리나라는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실질적 사형제도 폐지' 국가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형 판결은 내려지고 있는 바, 유형철, 강호순, 조두순, 김길태 등 최악의 흉악 범죄가 벌어질 때마다 사형 제도 존폐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때문이다. 첨예한 대립 속에서 집행을 하지도 폐지를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판결은 내리고 집행을 하지 않는 양상이 20년 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 와중에 가까운 나라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일본도 사형을 집행하고 있다. 2012년 아베의 재집권 이후 17명의 사형수에게 사형 집행을 내렸다. 당연히 첨예한 논란과 대립이 있지만, 피해자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가해자의 인권보다 사회 정의 발현 목소리에 초점을 맞춘 것이겠다. 


개인적으로 사형 집행을 찬성하는 바,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아무리 살인 이상의 흉악 범죄를 저지른 '인간 이하'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로서니,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사형 판결이 아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돌이킬 수 없는 '집행'(또는 판결)을 한 후에 누명인 게 밝혀지면 누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고의가 아닌 살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살인을 저지르고는 회개하고 뉘우치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는 경우엔? 유족이 받아들인다면?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논란을 소설적 재미로


일본의 유명 추리 소설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최고의 데뷔작이자 문제작 <13계단>은 사형 제도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 속에서 펼쳐지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담았다. 그 이야기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유족은 물론이거니와, 사형 집행 실행자, 그리고 사형 집행 명령 절차가 출현한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는 다양한 유형의 가해자, 즉 사형수가 있다. 고의에 의한 흉악 살인, 합당한(?) 이유에 의한 살인, 미심쩍은 살인, 정당방위 살인, 살인 누명 등이다. '사형 집행'이 필요하되, 반드시 철저한 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한편 소설 자체는 극강의 재미를 선사한다. 첨예한 대립과 논란이 될 만한 요소를 가져와 소설적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데 쓰이게 한다. 주요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과 그들이 행하는 바를 들여다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13계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피말리는 모습을 그리며 시작된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간수의 발자국 소리, 그 저승사자가 멈추는 그곳에 헤아리기 힘든 죽음의 공포가 스며드는 것이다. 이 짧은 프롤로그로 독자는 이미 소설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들이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통해 '죽음'이란 무엇인지 '사형'이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어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명은 교도관 난고. 오랫동안 이어온 교도관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재회해 제2의 인생을 꿈꾸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거금이 필요한대 우연히도 때마침 의뢰가 들어온다. 사건 당시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형수 사카키바라 료의 무죄를 입증하라는 것. 몇몇 석연치 않은 점들과 그가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점, 그리고 최근 우연히 돌아온 기억 속의 '계단'이 전부다. 


다른 한 명의 주인공은 전과자 준이치. 다툼 도중에 상대방을 죽이게 해 상해 치사죄로 2년을 복역하다 얼마 전에 출소했다. 그는 부모님이 엄청난 거금을 피해자 유족에게 지불해 어려움에 처한 걸 알고는, 난고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거금을 받으며 난고가 하려는 일을 도우라는 것. 료의 무죄를 입증하고 진범을 찾아내 바로 그를 사형에 처하게 만드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남은 시간은 3개월 남짓. 그 이후엔 료의 사형 집행이 거의 확실시된다. 그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속출하는 다양한 유형의 피해자들


기억을 잃은, 즉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가 사형 판결을 받아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그에게서는 잘못을 뉘우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사형 집행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거나 다름 없다. 사형 제도의 첨예한 논쟁 속에서,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게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죽어도 괜찮은가. 


최근 '삼례3인조' 사건의 사법피해자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17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그에 이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되었고, 진범으로 추정되는 이가 잡혔다. 16년 만에 누명을 벗은 것이다. 소설 속에서 사형수 료는 7년 째 복역 중이며 사형 집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이야기의 정황 상 그의 무죄가 드러날 텐데, 그 억울함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그 무죄가 드러나기 전까지, 그 억울함과는 별개로 피해자 유족의 억울함은 어떠한가. 가해자가 사형을 당한다 해도 피해당사자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평생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겐 그나마 가해자의 사형이 유일한 안식일지 모른다. 어느 누가 그들을 욕하랴? 어느 모로 보나 가해자는 죽어 마땅하다. 


그 와중에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한다. '사형'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행태의 하나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살인'에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테다.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행해야 하는. 그야말로 가해자 아닌 가해자, 피해자 아닌 피해자로서, 경계에 서서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록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만, 누가 그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을 것인가. 


피해자는 속출한다. 실질적으로 가해를 행한 이들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아니, 있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순 없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누명을 쓴 이들은 제쳐두고,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그 이유가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다. 이 또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다분한대,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그렇지만 아마 직접적으로 의견을 입 밖에 내진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공분을 살 '사형 집행 절차'의 황당함


<13계단>에서 무엇보다 공분을 살 내용은 '사형 집행 절차'에 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절차.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여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형 제도 찬반 논쟁은 여기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거대하고 그칠 줄 모르는 그 논쟁 속에 존재하는 실질적이고 문제 많고 가려진 문제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더 중요할 수 있다. 


"160번은 법이 지켜야 할 이익, 법익을 침해했기에 처형당한다. 난고는 유족의 편지를 다시 읽었다. 이 여성은 가족을 모두 살해당하고도 피고인의 사형을 원치 않는다. 내일의 처형은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가. 피해자 유족의 의지와는 달리 범죄자에게 절대 응보를 과하는 것은 더 더욱 범죄 피해자에게 상처를 입히는 행위가 아닐까." (본문 186~187쪽 중에서)


"난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얄궃은 미소를 띠었다. 같은 해에 체포된 사키카바라 료가 이미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 오하라는 아직 확정도 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재판 제도가 지닌 문제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을 범한 경우,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죽인 쪽이 심의 과정이 지체되면서 오래 살 수 있다." (본문 215~216쪽 중에서)


"역대 법무 장관 중에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방패 삼아 사형 집행 명령을 거부한 장관이 있었다. 또한 이유를 명언하지 않더라도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은 장관도 몇이나 있다. 그러한 행동은 사형 제도 반대론자들에게는 환영받을지 몰라도 명확한 직무 유기였다. 집행 명령이 법률에 장관의 직무로 규정된 이상, 그게 싫으면 장관 취임을 거절해야 마땅하다. 법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권력의 자리에만 앉으려 하는 것은 법무 당무에 있는 자로서 납득할 수 없다." (본문 240쪽 중에서)


"누가 이것을 보상해 줄까요. 민사 재판이 성사되었더라도, 위자료라는 이름의 푼돈으로 유리의 마음을 다시 사 들일 수는 없습니다. 육체의 상처에만 상해죄가 적용되고, 망가진 사람의 마음은 방치되는 것입니다. 법률은 옳습니까? 진정 평등합니까? 나쁜 인간은 범한 죄에 걸맞게 올바르게 심판받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 367쪽 중에서)


추리소설과 사회파 소설의 조합 그 이상


<13계단>은 추리 소설다운 서스펜스와 사회파 소설이 가지는 문제제기가 굉장히 훌륭하게 버무러져 있는 소설이다. 거기에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영화를 보는 듯한 전개, 그리고 정녕 관련 논문 이상 가는 정보와 이론과 주장과 실제는 환상적이라 할 만하다. 사형 제도와 관련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서술 또한 이 소설이 단순한 추리 소설 이상가는 소설이라는 점을 입증해주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지금은 그의 또 다른 걸작이자 대작 <제노사이드>를 읽고 있다고 살포시 고백한다. 일반 대중을 위시한 재미, 평단 제위를 위시한 메시지와 소설다움, 그 사이 어딘가를 위시한 '있어 보이는, 실제로 뭔가 있는' 소설로서의 매력까지 두루 갖춘 소설을 본 후인 만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주요 등장 인물들은 모조리 가해자다. 그런 면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또 그들은 모조리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런 류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인간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느껴야 한다. 


살인을 하여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자가 사회를 위해 다른 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하게끔 허락해야 하는가? 그들은 교화의 대상인가, 응보의 대상인가. '가해를 위한 가해'는 애초에 생각의 대상이 아니다. 여지가 없다. 반면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서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가해 쪽으로 발을 딛게 된 이들은 대상이 되지 않을까. 여지는 있지 않을까. 알 수 없다. 내 곁에 그런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극 중에서 사키카바라 료가 무죄로 방면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막힘 없이 대답하는 친구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때는 또 녀석과 함께 열심히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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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박범신<은교>


소설 <은교> 표지 ⓒ문학동네



소녀는 데크의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적요 시인은 소녀에게 낯선 감정을 느낀다. 그건 저돌적이기 그지 없는 '욕망'. 그는 우주의 비밀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소녀의 이름은 '은교', 머지 않은 곳에 사는 17살 아이다. 그 아이는 이적요의 서재를 청소하게 되었다. 소설 <은교>(문학동네)의 모든 건 은교의 출현에서 비롯된다. 


소설은 이적요 시인이 남긴 노트와 그의 제자 서지우 작가가 남긴 일기, 그리고 시인의 후견인이라 할 수 있는 Q변호사의 현재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된다. 진정한 주인공이라 할 만한 은교의 시점은 끝내 비춰지지 않는다. 


시작은 '시인이 마지막 남긴 노트'인데, 이곳에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 전체가 담겨 있다. 소설은 시작하며 그 모든 걸 풀어 놓는다. 스스로 스포일러를 푼 것이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를 사랑했고 서지우를 죽였으며 자신 또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들은 변태적인 애욕이라 부르는 '사랑'과 '욕망' 그리고 누구도 막지 못할 '운명'의 결과물이다.


사건 자체에 반전은 없다. 그대로이다. 다만,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수많은 반전들이 있다. 이적요 시인과 은교, 은교와 서지우 작가, 이적요 시인과 서지우 작가. 얽히고 설킨 삼각 관계, 전쟁을 방불케 하는 심리 스릴러, 관능적인 섹스 판타지까지. 


처참한 영화, 수불석권 소설


소설보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영화 <은교>는 개봉도 하기 전에 역시 '노출'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배우 김고은이 이 영화로 데뷔했는데, 헤어 노출을 감행한다. 더불어 박해일은 대역이었다고 하지만 성기 노출을 감행한다. 영화를 안 볼 수 없게 하는 치졸한 언론 플레이였는데, 135만 명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을 뿐이다. 영화 자체가 소설에 비해 별 거 없었단 뜻이다. 


조금이라도 박범신 작가의 원작에 그 화살이 돌아갈 순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최신작의 영화 성적이 상당히 별로인 것 같다. <은교>도 은교지만, 최근에 개봉한 <고산자>는 100만 명도 안 되는 처참한 성적을 거두었다. 박범신 작가의 야심작 '욕망 3부작'의 멀티 유즈가 사실상 모조리 실패한 것이다. <촐라체>는 연극으로, <고산자>와 <은교>는 영화로 나왔는데, 큰 반향도 큰 감동도 큰 흥행도 일으키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선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는데, 우연히 잡아들게 된 소설은 가히 '수불석권'하게 되는 마력이 있었다. 결코 얇지 않은, 아니 상당히 두꺼운 소설이었는데 욕망의 점점들을 그 끝에 파국이 있을 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 같다고 할까. 


가끔씩 이런 장르적 글쓰기가 가미된 소설을 읽곤 하는데, 잘못 선택하면 소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내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소설을 보고 있는 나의 파국이 눈앞에 선하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책을 덮고 다신 거들떠도 안 보겠구나.' <은교>는 '오래지 않아 소설이 끝나겠구나.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하겠구나. 어서 다른 소설을 꺼내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했다. 결코 흔치 않은 경우다. 


노인의 사랑은 특별한가, 당연한가


소설에서 가장 눈살을 찌뿌리게 하면서도 가장 가슴을 친 이는 다름 아닌 초로의 노린 이적요이다. 그의 나이가 되려면 족히 40년은 필요한데 어찌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는가. 그의 욕망이, 은교를 향한 변태적인 애욕이자 '사랑'이, 역시 제자 서지우를 향한 삐뚫어진 '사랑'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니 누구나 느낄 만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구나'에서 가장 수요가 적은 노인을 택해 극적 요소를 극대화했을 뿐이다. 


이적요의 사랑은 특별했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건 그가 노인이라는 점이다. 노인은 사랑을 하지 '못한다' 라는 생각보다 하면 '안된다' 라는 생각이 앞선다. 거기에 어떤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노인이 사랑을 하면 추태인 거다. 그런 와중에 10대 여자 아이를 '사랑'한다고? 절대로 용인할 수 없을 거다. 


그럼 노인의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어떠한가. 노인이 아니더라도 10대 여자 아이를 향한 사랑은 쉽게 용인하기 힘들다. 여자 '아이'이기 때문인데, 100% 변태로 찍힐 것이다. 이 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 수 없다. 이적요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꺼내들기 어려운 두 개의 요소를 가지고 사랑이라 말한다.


여기에 제자 서지우가 있다. 이적요와 서지우는 단순한 사제 지간은 아니다. 서지우는 이적요를 스승 이상으로, 아버지처럼 모신다. 시중이나 비서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적 신과 다름 없지 않을까? 그렇지만 인간으로서의 이적요도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으로 마음을 주지 못한다. 이적요는 그런 서지우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게서 문학적 심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보다 더 아들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그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문학'과 '인간'이라는, 가깝지만 먼 두 개체의 소용돌이가 이들 사이에서 요동친다. 


연애소설? 예술소설!


<은교>는 어느 모로 봐도 연애소설이다.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소설의 주요 골격을 이루고, 사랑이라는 뿌리에서 모든 이야기의 줄기가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엔 사랑이라는 욕망과 다른 것들이 있다. 노인의 '사랑'도 있지만 '노인'의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노인에 초점을 맞추면, 삶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끝인데 내 마음대로 사랑이라 외치고 사랑을 실컷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다가도, 죽고 나서 영원히 남는 이름인데 살아생전 쌓아올린 명성을 무너뜨릴 순 없겠다 싶은 거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확연히 갈리는 부분이다. 거기엔 삶도 있다. 


또한 이적요는 소설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이기에, 문학이란 무엇인지 시란 무엇인지를 말하기도 한다. 공대생 출신인 서지우로선 절대로 제대로 된 시를 쓰지 못할 거란 강한 믿음과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러며 이적요가 쓴 소설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된 서지우를 보면서 이적요가 갖는 복잡한 심리를 통해 '문학 동네'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이 별개 아니게 느껴지기도 한다. 


더이상 연애소설로만 볼 순 없지 않을까. 이정도면 예술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이 소설은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닙니다. 예술소설을 표방하고 있죠.'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가 소설 전체에 깔려 있어 불편하다는 점이다. 에돌아 은은하게 깔려 자연스럽게 알면 훨씬 좋았으리라. 작가의 실력이 모자랐을까? 그렇진 않은 듯하다. '노인도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외치듯이 '이 소설은 예술소설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는 노작가의 기백이 느껴진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박범신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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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마스터 키튼>


어른이 되고서야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접했고, 나의 모든 콘텐츠 리스트 중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중에 특히 <마스터 키튼>은 특별하게 남아 있다. <마스터 키튼> 표지 ⓒ대원씨아이



만화책을 처음 보기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미스터 초밥왕> <더 파이팅> 등이 주는 '노력이 모든 걸 압도한다' 식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드래곤볼> 류의 비현실적인 소년 만화는 조금 뒤에 받아들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콘텐츠를 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재미'와 '감동'이 된 게 말이다. 무엇보다 캐릭터에 나를 이입할 수 있는 걸 원하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은 나에게 있어 최고의 만화가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는, 오랫동안 나의 만화 리스트에 오르지 못했다. 심각하고 우울하며 재미와 감동과는 거리가 먼 듯한 그의 만화에 관심을 둘리 만무했다. 다 때가 있는 걸까. 어른이 되고서야 그의 만화를 접했고, 나의 모든 콘텐츠 리스트 중 최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스터 키튼>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 등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었고, 소설도 이런 소설을 접하기 힘들었다. 그중에 특히 <마스터 키튼>은 특별하게 남아 있다.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에게도 '꿈'이 있다


<마스터 키튼>은 히라가 키튼이라는 영국인과 일본인 혼혈 보험조사원의 활극을 다룬다. 세계 최고의 보험사인 로이드에서 일하면서, 파트너 다니엘 오코넬과 자체적으로 보험조사회사를 차려 운영하고 있다. 매 에피소드마다 완결성을 갖는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로, 심리 추리 스릴러가 주를 이루는 그의 만화 중에서 그나마 가볍게 볼 수 있다. 


키튼은 굉장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세계적인 명문 옥스퍼드 대학교 고고학과를 졸업했다. 학생 시절에 옥스퍼드 최고의 미인과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지만 오래 가지 않아 파경을 맞아 이혼하고 만다. 그는 군대로 도망간다. 다름 아닌 SAS(영국육군특공대), 세계 최고 최악의 특수부대다. 키튼은 그곳에서 서바이벌 교관으로 있었다. 한편 포클랜드 전쟁과 이란대사관 점거사건에서 부사관으로 활약한 경력도 있다. 그야말로 '전투의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최고'의 자리에 있던 그이지만, 그에게는 꿈이 있다. 고고학자. 그것도 학계에서 이단 취급을 받을 정도로 비주류인 '유럽 문명의 도나우 강 기원설'을 지지하는. 그가 위험한 보험조사원 일을 계속하는 것도,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할 게 뻔한 유적 발굴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는 게 어렵거니와, 얻는다 해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키튼의 고민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의 현실과 꿈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현실을 멀리하고 있지도 않은 바, 그동안의 경력을 살리며 목숨까지 내놓고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불가능을 꿈꾸는 리얼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체 게바라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허구와 진실, 현실과 비현실의 조화


만화는 세계 정세가 급변하는 1989년에 시작되었거니와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보험조사원 일을 하는 히라가 키튼을 주인공을 내세웠기에 그야말로 스케일이 크다. 더욱이 당대 세계 정세와 유럽 역사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취재가 엄청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여서, 단순한 만화 읽기로 완전히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세계 정세와 유럽 역사만 보면 대하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데, 만화라는 장르 특성상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것도 이 만화를 읽는 큰 재미 중 하나일 것이다. 반면 주인공의 활약을 보면 누가 보아도 만화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다. 무슨 일을 하든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헤쳐 나간다. 


그 중심이 아주 잘 잡혀 있다. 허구와 진실, 현실과 비현실이 서로의 자리를 아주 잘 커버한다. 궁금할 필요 없이 그냥 키튼을 따라 가면 된다. 정 궁금하면 찾아 봐도 되고 직접 해봐도 된다. 그것도 이 만화를 읽는 한 방법일 터, 작가가 의도했을 법하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학력과 이력, 경험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것들을 크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비현실과 현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가 히라가 키튼이다. 정녕 매력적인 캐릭터다. 


이 만화를 계속 다시 보는 이유


20년이 훌쩍 지났으며, 당시의 시대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만화. 거기에 진지하고 때때로 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제 아무리 고증이 잘 되어 있다고 해도 만화이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굳이 만화로 이런 내용을 들여다볼 이유는 하등 없어 보인다. 역사를 좋아하고, 진지한 리얼극을 좋아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 만화에는 여타 어느 콘텐츠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주인공 '키튼',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어느새 극을 이끌고 있는, 허술한 듯 허당인 듯 행동으로 믿음을 안기는,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게 없지만 굉장히 여린 마음을 가진 캐릭터다. 특히 아이들에게 '멋진' 사람인 그다. 


3대 째 이혼의 아픔이 있지만, 그가 대면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에 비해서 더 하다고 할 수가 없다.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픈 거다. 멋진 사람이지만 잘못도 많이 저지르고 후회도 많이 하고 아픔도 많이 있다. 이 시대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렇지만 키튼은 현대인에게서 점점 사라지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 꿈, 이상, 동심 따위들이다. 굉장히 복잡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이 만화를 계속 다시 보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거다. 어느 콘텐츠에서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지독한 현실을 헤쳐나가면서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들을 지켜나가는 캐릭터가 말이다. 아마 중심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욕 먹기 딱 좋기 때문일 텐데, <마스터 키튼>은 참으로 적절하다.


얼마 전에 <마스터 키튼> '리마스터'가 출간되었다고 한다. <마스터 키튼>이 끝나고 20년 후가 배경인데, 그가 지켜왔던 것들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20년이면 모든 게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모든 게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일깨워줬으면 좋겠다. 그걸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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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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