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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대한 소설가 발자크의 창작 도구, 음식. 당신은? <발자크의 식탁> 2017.03.20
  •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 황송해 하라고?(4) 2015.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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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소설가 발자크의 창작 도구, 음식. 당신은? <발자크의 식탁>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7. 3.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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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발자크의 식탁>


<발자크의 식탁> 표지 ⓒ이야기나무


이런 책, 좋다. 치열한 연구, 오타쿠적이기까지 한 관심과 열정, 종횡무진 오가며 확대재생산시키는 와일드함으로 무장한 책. 일단 뿌리 부분을 완벽히 꿰고 있어야 하겠다. 그에 못지 않게 가지나 잎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바, 보는 입장에선 얻을 게 무궁무진하다. 지식은 물론, 앎에서 오는 재미도 한가득이다.


앙카 멀스타인의 <발자크의 식탁>(이야기나무)이라는 책을 두고 하는 말이다. 뿌리 부분은 다름 아닌 '발자크'다. 19세기 초중반 프랑스 소설가,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그 말이다. 90편이 넘는 개별 소설들을 통해 당대를 완벽히 그려낸 방대한 소설 <인간 희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소설 세계는 <인간 희극>으로 집약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다. 여기에 '식탁'이라니. 발자크의 음식 사랑을 탐구하는 책인가, 싶다. 


막상 읽어 보면, 발자크가 아닌 발자크의 소설을 들여다본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인간 희극>을. 솔직히 말해, 발자크를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나 유명한 <고리오 영감> 정도? 하지만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읽어보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그럼에도 책에 손이 가고 글에 눈이 가는 이유는, (읽어보지 못한) 위대한 소설가와 음식의 만남 때문이다.


일단 이런 류의 '콜라보레이션'을 좋아한다. '딱'하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들의 만남은 많은 재미를 준다. 더군다나 관심은 지대하지만 막상 대한 적은 없는 발자크 아닌가. 발자크와 음식, 둘 다 따로따로 놔둬도 관심이 가는데 둘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그것도 지금의 나로선 전혀 알 수 없는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배경 아닌가.


발자크의 대표작 <인간 희극>, 미식의 도시 파리가 보인다


저자는 발자크가 장갑과 돈과 음식에 집착했다고 한다. 그중 뜻밖의 것이 음식인데, 그는 미식가도 아니었거니와 제대로 된 식습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음식에 집착했던 이유는 당대의 사회상을 짚기 위해서 였다. 그에게 음식은 영양 섭취 대상이나 미식적 대상이 아니라, 그의 소설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인간 희극>을 구성하는 소설들에는 여지 없이 음식이 등장하는데, 인간 군상의 성격이나 재력, 집안 내력까지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있기 전, 파리에는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들 자체가 그다지 훌륭한 식생활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혼란한 시기에 으레 그렇듯 신흥 부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혼란한 시기의 부담감 때문에 자신의 부를 함부로 과시할 수 없었기에, 도망간 황족들이 남겨두고 간 궁전 요리사들이 차린 레스토랑을 은근한 부의 과시 장소로 택한다. 프랑스 파리에 비로소 식산업다운 식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미식의 도시 파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저자는 발자크가 이런 시대 변화를 누구보다 발빠르게 알아차리고 소설에 수용했다고 한다. 그가 <인간 희극> 속 등장인물들을 가장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부터 가장 싸구려 레스토랑까지 찾아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 희극>은 파리 사회와 미식 문화에 대한 실용적인 보고서나 다름 없다. 발자크 소설이 곧 19세기 프랑스 파리였고,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곧 발자크 소설이었다. 저자는 발자크와 발자크 소설과 프랑스 파리를 종횡무진 누비며, 발자크를 읽고 싶게 만들고 나아가 파리를 여행하며 온갖 음식들을 먹고 싶게 만든다. 


특별한 날과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저자는 본격적으로 <인간 희극>에 뛰어 든다. 특별한 날, 평범한 날,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 그리고 침대까지. 들여다보면, <인간 희극>을 예로 드는 건지 당대 프랑스 파리를 예로 드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그만큼 발자크가 당대를 완벽히 파악하고 재연해낸 것이리라. 저자의 철저한 치밀한 연구도 한 몫 했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음식과 함께 특별한 연회가 있어야 함은 상식이다. 하지만 당대, 특별한 음식과 연회(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 막 '야만'의 식생활에서 벗어난 신흥 부자들이 뭘 알겠냐는 것이다. 그건 발자크도 마찬가지. 갓 습득한 예의범절과 겉치레는 음식과 술이 섞이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발자크는 가장의 권위와 취향, 야망에 탐구를 바탕으로 특별한 날의 음식과 연회를 글로 옮겼다. 다분히, 인간 군상 중 하나인 '가장'을 표현하기 위해 음식이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의 평범한 일상은?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의외로 <인간 희극>을 통해 프랑스의 중심인 파리 사람들의 음식 이야기는 제대로 서술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리 사람들이 열정 없이 음식을 먹고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음식보다 사업을 하고 음모를 꾸미고 정보를 얻고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발자크가 생각한 이상적인 미식은 신선한 재료를 쓰고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에 있다며, 평범한 식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시골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이다. 


발자크에게 돈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와 음식을 향한 강한 집착의 소유자는 같은 종류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가 지나치면 살을 위협한다는 발자크의 철학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발자크는 저녁이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너무 잘 챙겨 먹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아버지의 지론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구두쇠와 음식 숭배자를 구분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등장인물에게 엄격한 심판의 철퇴를 내렸는데, 악인이 아니라 해도 스스로 만들어 낸 집착의 노예가 되게 하였다. 그가 생각한 미식의 천국은, 자연 그대로의 풍미가 이상적인 미식이듯 어머니의 손길로 만들어진 과도함 없는 디저트였다.


매력적인 창작 도구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발자크는 음식을 소설로 옮겨왔다. 저자는 이를 그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데, 반면 발자크 이후에는 플로베르, 졸라, 모파상, 프루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미식의 세계를 소설에 담았다고 한다. 혀 위에서 녹아내리는 굴의 맛을 감상하고 싶다면 모파상을, 노란 크림으로 가득 찬 항아리를 꿈꾼다면 플로베르를, 소고기 아스픽을 생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럽다면 프루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전에 석영중 교수가 지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라는 책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다. 여러 위대한 러시아 소설가 중 고골은 엄청난 대식가이자 식도락가로 글쓰기 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이었다고 한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의 코드에 의존해 범속한 일상을 전달하려 했다고 하고 푸슈킨은 먹는 것을 좋아했지만 음식을 탐하지는 않아 그 소박한 식성이 소설 문체와 분위기, 주제와 소재로 나타났다고 하니, 발자크와의 접점이 보인다. 그들에게 음식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양물 또는 살아가는 데 가장 자주 접하는 욕망 중 하나가 아닌, 그야말로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아니었을까. 


발자크에게 음식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었다면, 저자에겐 역사적 인물이라는 창작 도구가 있는 것 같다. 전기 문학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자랑하는 저자 앙카 멀스타인은 빅토리아 여왕,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 프루스트, 로스차일드, 메디치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고 하는데, 한국에는 이 책이 처음 소개되었다. 근래 출간 예정인 <프루스트의 서재>가 심히 기대된다.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창작 도구가 있을 것이다. 아니, 창조 도구라고 해두자. 나와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경우, '책과 영화'다. 삶의 거의 모든 것들을 책과 영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고, 표현해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아내는 '음식과 공부'일 것 같다. 누군가는 돈일 테고, 누군가는 사랑일 테며, 누군가는 더 디테일한 하위 개념의 무엇일 테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 없다. 그걸 '어떻게' '어떤 이유'로 사용하는지도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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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발자크의 식탁, 빈곤, 소설, 음식, 파리, 풍요,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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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 황송해 하라고?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5. 1.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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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사회 고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삼우반



[지나간 책 다시 읽기] 조지 오웰의 사회 고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잘 알려진 소설가 조지 오웰은 영국인으로 식민지 인도 태생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누이를 따라 영국으로 돌아왔고, 공부를 잘해서 명문 이튼 스쿨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부터 외려 성적이 떨어졌다고 한다. 19살이 되던 해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인도 제국경찰에 들어가 버마(미얀마)에 부임한다. 굉장히 안정된 직업이었지만, 그는 견디지 못했다. 식민지 경찰로써 제국주의의 온갖 추악한 면모와 모순을 겪게 된 것이다. 그 한계를 절감하고 오웰은 이후로 그 누구보다도 이를 통렬히 비판한다. 


결국 6년 뒤 경찰을 그만두고 파리로 건너가 작가 수업을 쌓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부랑자와 접시닦이 등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건너갔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나날들이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자그마치 5년 간 지속된다. 이 5년은 그에게 잊지 못할 소중한 체험으로 남아, 이듬해인 1933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르포르타주 자전 소설 출간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은 알다시피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세계가 침체되었던 시기였다. 더구나 유럽은 그 직격타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리는 실직자와 부랑자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이 의도적으로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는지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6년 간의 식민지 경찰 생활이 죄의식으로 남아 그를 괴롭혔을지도 모르겠다. 


조지 오웰은 이 소설로 처음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고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앞으로 계속될 그의 집필에서 이 소설은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의 날카롭지만 유머가 번뜩이고, 비판적이지만 풍자적인 문학적 분위기가 첫 소설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가 겪은 밑바닥 생활은 얼마나 '더럽고 힘들고 위험했을까'(3D-Dirty, Difficult, Dangerous).


나의 밑바닥 생활


잠시 나의 밑바닥 생활을 소개해본다. 지금은 책에 관련된 고상한(?) 일을 하며 황송하게도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고 있지만, 나의 지난 아르바이트 경력을 돌이켜보면 현장에서 몸을 움직여야 하거나 밤을 새며 하는 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보수나 처우 면에서는 정말 형편없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정말 "내가 밑바닥이구나"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아르바이트가 몇 개 있었다.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만 하면 아주 진저리가 처진다. 호주에서 1년 간 체류했을 때였다. 가자마자 다음 날부터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밤샘 아르바이트였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대형 마트 2개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도착하자마자 30분 만에 미친 듯이 화장실 청소를 해치운다.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 대형마트 1, 2층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큰 초대형 마트를 쓸고 닦는다. 그걸 두 명이서 해야 했다. 본래 3명이서 해야 할 일을 말이다. 


당연히 6시간 만에 끝낼 수 없었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했다. 고용주가 한국인이었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추가 수당은 지급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밥으로 라면을 끓여주곤 했다. 일당은 6시간에 72불이었으니, 시간당 12불(한화 12000원)이었다.


한국의 3배에 달하는 액수였으나, 당시 호주의 최소 시급은 17불이었다. 애초부터 명백한 위반에 추가 수당 54불(추가 수당은 1.5배)도 주지 않았으니, 호주까지 가서 일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한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정말 피가 나고 알통이 배기고 이가 갈리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서러운 외국에서의 밑바닥 생활은 이제 시작이었다. 한 달 동안 수십 통의 이력서를 뿌렸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 곳들이 전부 호주인이 운영하는 곳이라는 점. 그래서 한국인 가게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가 지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 브리즈번 유일의 중국집에서 연락이 왔다. 바로 달려가 주방 보조로 일하게 되었다. 인생 최악의 아르바이트가 시작된 것이다. 


주방 보조가 할 일은 참 쉽지만 너무나 많았다. 30분 일찍 와서 밥 32인분을 얹혀 놓고, 청소를 하고, 기본적인 재료들을 준비한다. 손님이 들이닥치면 요리사를 위해 수십 가지 재료들 중에서 조합을 맞춰 준비를 해주고, 요리사 시중(땀 닦아주기, 각종 심부름 등)을 들고, 미친 듯이 설거지를 하고, 선임 주방 보조와 다른 요리사들이 시키는 잡다한 심부름을 한다. 평소에는 과묵한 사람들이 일만 시작되면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나는 수첩에 각종 밑 재료 조합들을 써서 외웠음에도 그들의 윽박지름과 욕설에 머리가 하얘지곤 했다. 시간이 가도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바로 전번에 했던 일에서 패배를 맛보았고 한 달 동안이나 일없는 고통 속에서 살았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역시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다. 나의 밑바닥 생활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너무나 괴로워서 급여도 받지 않고 그만둔 것이 큰 타격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또 스트레스를 풀 요량으로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녔기 때문에 수중에서 돈이 점점 사라졌다. 결국 한 달이 지나도록 일자리를 잡지 못해 방세 조차 내지 못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일주일 안에 일자리를 잡지 못하면 2개월 만에 무일푼, 무경험으로 집에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더구나 편도로 와서 엄마한테 비행기 삯을 빌려야 했다. 지옥 같은 나날들이 계속되었고 정점에 올랐을 때 다행히 일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덕분에 이후의 호주 생활은 적어도 밑바닥은 아니었다.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파리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은 그의 자전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다. 주인공은 빈민가 싸구려 호텔에 머물며 영어 교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일자리를 잃고 본격적으로 무일푼 생활에 뛰어든다. 몇 개월 동안 일자리를 잡지 못해 며칠 씩 굶는 날과 씻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었고, 옷가지들을 전당포에 맞기며 겨우 겨우 목숨을 연명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파리 밑바닥 생활 1기는 가난과 배고픔으로 점철되었다. 


배고픔은 사람을 완전히 무척추, 무뇌 상태로 전락시키는데, 증상이 무엇보다 독감 후유증과 비슷하다. 몸속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다음, 미지근한 물로 채워져버린 듯하기도 하다. 배고픔에 대한 주된 기억은 완전한 무기력이다. 또 침을 아주 자주 뱉게 되고, 좀매미 거품처럼 이상하게 하얗고 솜털 같은 침이 나온다.(본문 속에서)


이후 친구의 도움으로 호텔 식당에서 접시닦이 일을 하게 된다. 일은 말할 수 없이 바쁘고, 고되며, 지루하다. 또한 너무나 길다. 환호 속에서 일을 시작해 가난과 배고픔을 면했지만, 또 다른 고통이 그를 찾아간다. 처음에는 하루에 15시간씩 지속되는 일이라도 감지덕지해 고마워하며 일을 했지만, 점점 더 지쳐갔다. 온갖 멸시와 괄시는 견딜 수 있었지만, 수면 부족과 함께 찾아오는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없었다. 파리 밑바닥 생활 2기는 수면 부족과 참기 힘든 육체적 고통으로 점철되었다.


배고팠던 경험이 나에게 음식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주었듯이 호텔 노동은 잠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잠은 단순한 신체적 필요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능적인 것이었고, 휴식이기보다 폭식이었다.(본문 중에서)


조지 오웰의 밑바닥 생활-런던


견디기 힘든 파리에서의 생활을 뒤로 하고, 주인공은 런던으로 떠난다. 파리에서의 고된 노동에 비해 수월한 듯한 일. 하지만 다른 문제가 뒤따른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괄시, 무시를 받는 문제였다. 파리에서는 영국 사람으로서의 메리트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던 것에 반해, 런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국인이었다. 주인공은 그냥 부랑자에 불과했다. 런던의 밑바닥 생활 1기는 심적 고통이 뒤따른다.


여자들은 죽은 고양이를 본 듯이 혐오스럽다는 몸짓을 솔직히 드러내며 몸서리치며 피한다.(본문 속에서)


여기에 말도 못할 정도로 지독한 잠자리도 주인공을 괴롭힌다. 헐값인 숙박소에서 마치 수용소에서처럼 한 방에 10명씩 자는 생활을 한다. 냄새와 소음, 불결한 환경에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돈이 떨어져 무료 구호소를 전전하는 생활까지 하게 된다. 런던의 밑바닥 생활 2기는 육체적 고통이 뒤따른다. 런던에서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파리보다 짧다. 체류 기간도 짧지만, 결과적으로 일이 잘 풀렸다. 


혹시 무일푼이 되면 당신에게 이런 세계가 기다린다는 것 정도만은 말할 수 있겠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히 탐구하고 싶다. (중략)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본문 속에서)


조지 오웰의 사회 고발


이 소설이 단순히 조지 오웰의 체험기로 그쳤으면 그리 많은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소설은 중간 중간 주인공의 '소비자 고발', '사회 고발' 등을 적절히 가미 시킨다. 예를 들어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아주 자세하게 일류 호텔 식당과 상위 클래스 식당의 속살을 폭로한다. 사회 하위계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런던에서는 사회복지랍시고 행해지는 갖가지 행태들을 꼬집는다. 복지가 일종의 희망고문과도 같다. 정부는 사회 하위계층에 대한 복지를 보여주기 식으로 행할 뿐이다. 


또한 작가는 사회에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중 최하위 계층은 해고 내지 감옥이 아닌 이상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고용주는 그가 죽지 않을 만큼만 돈을 주고 죽지 않을 정도의 일을 시킨다. 그들은 너무나 적은 돈에 너무나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 아무런 여가 활동을 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평생 일만 하다가 죽는다. 문제는 그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더욱 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황송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7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바뀐 것이 없다. 이 사회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고, 그 계급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경쟁의 일상화에 더해 총체적 경제 난국의 시대이다. 고용주의 말은 곧 하늘의 계시이다. 그 계시를 따르지 않을 시, 죽음으로 가는 길은 훤히 열린다. 그 계시를 충실히 따른다면 그나마 죽지 않고 먹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보장된 미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찬란했던 과거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죽지 못해 사는 현실이 있다.


소설에 따르면 나도 접시닦이이다. (소설에서 돈이 많든 적든 노동자는 모두 접시닦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도 일을 할 수 있는 것 만으로 황송해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성공한 접시닦이들은 말한다.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거라고. 그건 마치 열심히 접시를 닦다가 실수로 깨뜨린 접시에서 다이아몬드가 튀어나왔는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믿은 접시닦이가 운 좋게도 그걸 발견해 잘 이용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열심히 일하고 먹고 살면서 그때를 기다려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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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계급, 런던, 밑바닥 생활, 사회 고발, 접시 닦이, 조지 오웰, 주방 보조, 파리,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5.01.28 23:24 신고

    아...진짜 엄청..괴롭게 읽었습니다.
    밑바닥인생이라...일하는것을 다행이 여기며..살아간다..
    너무 적은돈에..너무 많은일을 하고 있기때문에..여가생활이 없다....
    도대체..오늘날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네요..
    잘읽고 갑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2.01 18:37 신고

      그래도 조지 오웰 최고의 르뽀라고 칭송받고 있는 책이니 만큼 한 번쯤 꼭 읽어보시길!

  • BlogIcon 늙은도령
    2015.01.29 15:32 신고

    현재의 런던과 파리에 조지 오웰처럼 살았던 사람들이 더욱 늘었습니다.
    그들은 파리의 제13구역처럼 할렘가로 쫓겨났지만, 곳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런던과 파리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공간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더 악화됐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5.02.01 18:39 신고

      그렇군요ㅠㅠ 그건 미쳐 몰랐네요ㅠ 안 보이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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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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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두 도시 이야기> ⓒ창비

"최고의 시간이었고,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가고 있었고,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요컨대 그 시대는 현재 시대와 아주 비슷해서, 그 시대의 가장 요란한 권위자들 중 일부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시대가 최상급으로만 견주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고집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첫 문장이다. 여기서 두 도시는 영국의 런던과 프랑스의 파리를 가리키는데, 이 문장에서 좋은 쪽으로 말하는 건 런던이고 나쁜 쪽으로 말하는 건 

파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야기의 배경이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 전후라 그렇다. 


이 문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마지막 부분인데, '그 시대'와 '현재 시대'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프랑스 혁명 전후와 <두 도시 이야기>가 출간된 1850년대가 비슷하다는 얘기다. 찰스 디킨스는 혁명의 불길이 지나가고 오히려 산업혁명으로 노동 계급이 안정을 되찾으며 전체적으로 번영을 추구했던 1850년대의 영국이,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 전후의 프랑스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이다. 


출간 이후 2억 부 이상 팔린 <두 도시 이야기>는 단행본 소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유명하고, 가장 찰스 디킨스답지 않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 두 사실 간의 상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가장 찰스 디킨스답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엄청난 인기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 


이 작품은 위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당대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끌어왔다. 그러며 그 역사적 사건 위에 수많은 개개인의 삶을 올려놓는다. 그 삶의 중심에는 복수와 로맨스, 그리고 희생과 책임감 등이 있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주제라는 것은 차치해두고, 사회비판이나 풍자보다 개개인의 삶을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있는 것이 그 답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소설가가 사회비판이나 풍자를 아예 버리지 않는 선에서 개개인의 삶을 그리며 그들을 보듬어 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또한 두 도시 런던과 파리에 대한 묘사가 영국인들의 입맛에 맞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프랑스혁명 당시의 프랑스를 1850년대 영국과 빗대며 매우 좋지 않게 그리고 있는 반면, 프랑스혁명 당시 영국의 런던은 매우 '괜찮은' 도시로 그리고 있다. 물론 치안이 불안하고 법이 백성을 억압하며 고루하기 짝이 없는 체제이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프랑스 파리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파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런던에서 안전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는 뜻하지 않은 애국주의 반응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디킨스는 이 작품에서 유독 개개인의 삶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정확히는 그들이 보여주는 헌신과 희생, 책임감 등의 지극히 도덕적이고 관습적인 면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사회가 뒤바뀌며 역사가 요동치는 격변기에 어찌 하나같이 그런 모습들만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생기는 부분이지만, 작가는 이야말로 프랑스 혁명 당시 추구했어야 할 바라고 말하고 있다. 즉, 1850년 당대 영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와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굳이 프랑스 혁명이었어야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더욱이 당대에서 70년이나 전의 다른 나라 이야기인데 말이다. 위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찰스 디킨스의 기존 소설과 달리 이 소설에서 프랑스 혁명은 큰 의미가 없는 배경에 불과했다. 1850년대 당시 런던을 배경으로 해도 큰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찰스 디킨스의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된 기획으로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파리를 탁월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그의 <두 도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나도 프랑스 혁명 전야의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굶주림으로 시작되어 "빵을 달라", "자유와 평등을 달라"의 외침이 온 나라를 뒤덮은 프랑스 혁명.


"굶주림은 그에 알맞은 곳은 어디든 머물렀다. 범죄와 악취로 가득한 좁고 구불거리는 길은 다른 좁고 구부러진 길로 갈라지고, 온통 누더기와 나이트캡을 쓴 사람들로 우굴거리면서 누더기와 나이트캡 냄새를 풍기고, 모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병들어 보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또한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엄청나게 재밌다는 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가 치밀한 계산을 했던, 이 소설이 그 답지 않은 소설이던, 이 소설을 둘러싼 어떤 해석도 상관없이 마냥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야말로 소설 다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재미에 천착해서 보자면 말이다. 


<두 도시 이야기>는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끊임없이 재탄생 되고 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그 시대와 현재 시대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18세기 프랑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파리와 1850년대 영국 런던과 2010년대 우리나라가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 우린 최고의 시간에 살고 있을까, 최악의 시간에 살고 있을까. 빛의 계절에 살고 있을까, 어둠의 계절에 살고 있을까. 지금은 희망의 봄일까, 절망의 겨울일까. 우리 모두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어서 빨리 잡아 세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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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두 도시 이야기, 런던, 사랑, 사회비판, 찰스 디킨스, 파리, 프랑스 혁명, 헌신
  • BlogIcon Blueman
    2014.08.03 14:26

    간만에 들러봅니다.
    서로 다른 두 도시를 비교하고 묘사하는 이야기라... 어느 정도 흥미가 생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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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인 파리> 환상적이고 재미있기만한 과거 여행?

오래된 리뷰 2014. 7. 5.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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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소니픽쳐스



이런 말을 자주하는 지인이 있다. “1930년대에 태어나고 싶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거리를 활보했던 그 낭만적인 시대에.” “조선 시대에 태어나고 싶다. 그때 태어났으면 뭐가 되어도 되었을 텐데.” “중세시대 유럽에서 태어나고 싶다. 산 속에서 세상 모르게 소박한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끝없이 이어지는 과거 지향적 발언에 두 손 두 발 다 들곤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나도 과거 지향적이니까.

 

나는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다. 한국 역사 교육의 폐해인지는 몰라도, 연도나 인물 그리고 사건 등의 역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몇 년도에 누가 어떤 사건을 일으켰거나 휘말렸는지 그 자체가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롭다. (물론 머리가 커짐에 따라,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때에 태어나고 싶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는 단지 유명한 무엇에 대한 갈증이 있나 보다.

 

파리를 사랑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한 남자

 

우디 앨런의 2011년 작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를 사랑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3분을 할애해 파리의 아침부터 밤까지의 하루 전경을 달달한 음악과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주인공의 파리에 대한 예찬, 예찬, 예찬.

 

“끝내주네! 저길 봐! 이런 아름다운 도시는 세상에 다시 없을 거야. 파리에 자주 못 오니까, 비 내리는 이 도시가 얼마나 멋진지 사진 한 장 찍자. 1920년대의 이 도시를 상상해봐. 20년대 파리를. 빗속에 작가들과 화가들을.”

 

전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주인공 길(오웬 윌슨 역)은 파리를 예찬하며 약혼자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 역)에게 파리에서 살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이네즈는 미국으로 돌아가 살 것을 확고히 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


 

사실 이 첫 장면에서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려하는 길이 못마땅한 이네즈인데, 더군다나 파리라는 이상에 사로잡혀 있다니 말이다. 더욱이 1920년대의 과거를 사랑한다니. 영화의 줄거리는 안 봐도 뻔하고, 이 둘의 끝 또한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 예정된 결말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재미있고 환상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가지고 있을 법한 보편적 생각을 끄집어내 이야기에 버무리고 있어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 이야기는 길이 현실에 지친 어느 날, 자정이 지난 골목에서 클래식 푸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를 지치게 한 현실이라 하면, 그의 약혼녀 이네즈가 있다. 이네즈는 낭만이라고는 없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이고 속물이다. 또 그녀의 부모는 어떤가? 역시 속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였던 길은 환영해도 소설가 지망생 길은 못마땅해 한다. 여기에 이네즈의 친구들도 가관이다. 그 중에서도 길이 사이비지성인이라 칭하는 폴은 풍부한 지식을 자랑하는 아주 재수 없는 녀석이다. 길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무시해 현실에서 도망치려 하는 것일까? 어느 정도는 맞지만, 그건 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과거 지향적이지 않던가.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과거 여행

 

여하튼 길의 비현실적인 과거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클래식 푸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느 파티 현장. 그곳에서 길은 스콧 피츠제럴드 연인을 만나고, 헤밍웨이를 만나게 된다. 그 파티는 장 콕토가 주최한 것이었고, 시종일관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는 콜 포터가 피아노치는 소리였다. 그는 꿈에 그리던 1920년대 파리에 와 있던 것이었다. 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는 황홀경에 빠져 이 시간을 즐기고 매일 자정에 어김없이 클래식 푸조를 타고 1920년대 파리를 누빈다.

 

가는 곳마다 역시나 전설적인 명사들이 즐비하다. 피카소, 찰스톤, 벨 몬테, 달리, 부뉴엘, 레이, 앨리엇, 거트루드 스타인 등. 이 밖에도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명사들이 나온다. 즉, 1920년대 파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이 명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이미 말이 되지 않는 설정 위에서의 설정이므로 웃으면서 흥미롭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영화의 큰 흥미거리 중 하나가 이 전설적인 명사들의 면면인 것이다.

 

그러던 중 길은 아드리아나(마리옹 꼬띠아르 역)을 알게 된다. 당시 그녀는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지만, 곧 헤어진 뒤 헤밍웨이와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돌아온다.(이는 영화적 설정이 많이 가미된 부분이다. 실존 인물이고 헤밍웨이와 관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시기가 맞지 않고 피카소와의 관계는 없었다.) 길은 아드리아나와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타이밍에 그들은 1890년대로 가는 마차에 오른다.

 

1890년대로 가자 더욱 더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 로트렉, 고갱, 드가... 아드리아나는 이 시대를 황금시대라 칭하며 1920년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자신이 사는 1920년대는 너무 지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길은 1920년대야말로 완벽한 황금시대인걸? 그때 불현 듯 깨달음을 얻게 된 길. 그는 아드리아나와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러며 미래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그녀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을 봐요. 이 사람들의 황금기는 르네상스에요. 이들은 황금시기를 버리고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해요. 또 그때 사람들은 쿠빌라이 칸 시기를 동경할걸요?... 아드리아나, 당신이 여기 살면 여기가 현실이 되는 거요. 그럼 당신은 또 다른 세계를 동경하게 돼요. 진짜 황금시기를요... 현실은 그런 거예요. 항상 불만족스럽죠. 인생은 그런 거니까요... 저도 당신처럼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어요. 황금시기로... 하지만 이건 진짜가 아니에요. 내가 진정한 글을 쓰고 싶다면 내 환상을 없애야 해요. 과거가 더 좋았다는 환상을.”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장면. ⓒ소니픽쳐스



이 영화가 더욱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음악가이면서 음악애호가이기도 한 우디 앨런 감독의 음악적 취향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파리를 가본 적도 없거니와 그 실체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레 파리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게 될 것이다. 극단의 과거 지향적 성향에 대해서는 결국은 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말지만, 파리에 대해서는 끝까지 우호적인 감정을 유지한다.

 

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상당히 많다. 우디 앨런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라면 그의 색다른 취향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파리의 기막힌 전경을 감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또한 위에서도 주지했듯 수없이 등장하는 전설적인 명사들을 보는 재미가 무엇보다도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의 도피와 과거에 대한 동경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는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는 영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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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과거, 미드나잇 인 파리, 역사, 우디 앨런, 장 콕토, 콜 포터, 파리, 피츠제럴드, 피카소,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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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05 07:22 신고

    현실에 대한 도피, 아마 모든 사람들이 유혹받고 있고 그 유혹에서 어떻게 싸우느냐가.. 삶은 가꾸는 근본열쇠가 되겠지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 항상
    2014.09.03 02:41

    잊을만 하면 네이버 메인에 뜨는 영화네요.
    그만큼 매력있는 영화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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