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김씨 표류기>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내려 자살하려는 한 남자 김씨가 있다. 뛰어 내린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대신 밤섬에 표류 된다. 죽었다 살아난 김씨는 이곳을 떠나 살던 곳으로 가고자 한다. 하지만 이 섬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들락거리지 않는다. 즉,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는 눈앞에 고층 빌딩이 보이는 이곳에서 꼼짝 없이 살아야 한다. 


영화 <김씨 표류기>는 얼핏 <캐스트 어웨이>를 생각나게 한다. 설정 상 어쩔 수 없이 그럴 진대, 실상은 완전히 다른 영화이다. <캐스트 어웨이>가 생존과 인생, 방황과 고독에 관한 이야기라면 <김씨 표류기>는 행복과 아픔, 관계와 욕망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자가 공감을 일으킨다면, 후자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진다. 


버림받은 존재, 고독으로 다시 태어나다


먼저 김씨가 자살하려 했던 이유를 보자. 그는 뭘 해도 안 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이다. 누가 보기엔 하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에겐 큰 이유이다. 그렇게 그는 버림받았고 자살을 통해 이번엔 자신이 세상을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아무도 없는 섬에 표류 됨으로써 다시 한 번 버림 받는다. 눈 앞에 보이는 도시를 향해 아무리 소리치고 울고 불고 난리 쳐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금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생리 현상이 발생한다. 그는 대변을 봤고, 목이 너무 말랐기에 또 하필 그 앞에 있던 꽃으로 목을 축인다.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 감정 때문에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그렇게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제 그는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심심함도 맛본다. 서서히 아무도 없는 완벽한 고독에 적응되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라는 싯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설명할 때 가장 적합한 구절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섬에서 더 이상 나가기 힘들어 할 것이다. 섬에서 나가 그 사람에게로 가게 되었을 때 일으켜지는 반작용은 온갖 것들의 집합이다. 마냥 좋을 수도 마냥 싫을 수도 있다. 그 온갖 것들의 집합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다. 차라리 섬에서 나가기 싫다.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외톨이는 그런 반작용을 병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김씨 표류기>의 또 다른 주인공인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가 밤섬에 홀로 표류 되어 있는 것처럼, 자신의 방에 표류 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표류 되어 있는 게 아니라 표류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나갈 마음이 전혀 없다. 남자 김씨는 나가려 하고 여자 김씨는 나가지 않으려 한다. 홀로 섬에 갇혀 있는 건 같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독에서 나와 소통을 원하다 


여자 김씨가 유일하게 하는 건 인터넷을 통한 가상 현실 체험인데, 그곳에서 그녀는 아주 멋지고 예쁜 여성이다.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실제와 달리, 그곳에서 여자 김씨는 완벽한 인기인이다. 그녀에게는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밤에 달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어 아무도 없는 공간을 관찰하고 사진 찍는 취미도 있다. 그녀는 정녕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원하는 것일까. 


그러던 중 우연히 남자 김씨를 발견한다. 변태 같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알 수 없는 남자. 그녀는 점차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해졌고, 그동안 지켜왔던 고독의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는 걸 발견한다. 그녀는 그와의 소통을 갈망하게 된다. 인간이 완벽한 고독의 세계를 갈망하면서도 누군가와의 소통을 꿈꾸는, 아이러니이자 딜레마다. 정답이 없기에 끊임없이 방황한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고 아픔을 느낀다. 


인간 관계에 있어 모든 면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연인 관계, 친구 관계, 부모와 자식 관계, 상사와 부하 관계 등.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또 서로를 극도로 증오하기도 한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지만, 그러면서 서로를 누구보다 경멸하고 아프게 한다. <김씨 표류기>에서 남자 김씨와 여자 김씨도 그렇다. 서로를 알아감에 있어 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알고자 한다. 자신도 모르게 고독에서 나와 소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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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용서 받지 못한 자>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포스터. ⓒ 청어람



철없는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된 남자에게 "군대를 갔다 와야지 철도 들고 정신차리지"라는 말은, 마냥 듣기 싫은 말이기 보다 일종의 기대심리가 적용되는 말이다. 말인즉슨, 누구나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 세상이 원하는 진정한 남자가 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엔 필수적으로 '변화'가 뒤따른다. 과연 어떤 변화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 그 중심에 있는 남자들만의 위계질서. 군대를 가기 전의 '무질서'에서 군대를 다녀온 '질서'로의 변화가 이를 주도한다. 군대는 문신을 새기듯 질서를 몸에 체득시킨다. 이는 곧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남자가 되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수많은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이 존재한다.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라는 소재를 아주 미시적으로 접근해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남자로의 변화, 권력의 질서 안에서 변해가는 자들의 모습 등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너무나 공감이 되는 내용에, 몇 번이고 몸서리치며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난다. 필자 또한 '용서받지 못한 자' 중의 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또 한 번 몸서리가 처진다. 한 점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용서 받지 못한 자들


영화는 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된다. 승영이 자대 배치를 받고 난 후 군대에서의 이야기와, 승영이 상병 휴가를 나와 태성과 만나는 이야기. 먼저 군대에서의 이야기부터 풀어본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리고 등장인물들 또한 간단하다. 제목처럼 전부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 중에 누가 봐도 용서 못할 인물이 있다. 


말년 병장 '수동'(임현성 분). 그는 내무실 최고참으로 최 정점의 위치에서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 후임의 팬티를 훔쳐 입고, 후임의 편지를 훔쳐 읽으며, 성추행까지 행하는 등의 각종 부조리한 짓거리를 일삼는다. 그가 하는 말은 대체적으로 이렇다. "고참이 하자면 하는 거지." "야, 나도 옛날에 그렇게 당하면서 지냈어." 그렇다.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되물림 하는데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군대가 낳은 용서 받지 못한 자이다. 그러면서도 제일 큰 희생자이기도 하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일방적 가해자와 희생자로 비춰지는 수동과 승영. ⓒ 청어람



그런 그와 거의 동년배인 분대장이자 병장 유태성(하정우 분)이 있다. 그는 스스로 군대 생활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즉, 뒤 끝없이 조이고 풀어주는 역할을 잘했다는 말이다. 수동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적당히 풀어줄 줄 아는 그는 사실, 수동보다도 더 용서 받지 못한 자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그의 신참 부사수이자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승영(서장원 분)과의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태성은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승영과 허물없이 지내려 한다. 그래서 부조리한 군대 생활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승영을 언제나 감싸주려 한다. 하지만 결국은 이와 같은 행동이 군대라는 곳에서 승영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승영은 부조리한 군대 권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선임과 다툼을 하고 그럴수록 미움만 받는다. 그런 사이에 승영의 부사수인 허지훈(윤종빈 분)이 들어온다. 지훈은 일명 고문관으로, 지지 리도 어리바리한 인물이다. 승영은 그런 모습을 착하다고 생각하며 한없이 잘해준다. 이윽고 얼마 후 태성이 전역을 하고 그들에게 시련이 닥친다. 여기저기에서 후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승영을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이에 승영은 결국 돌아서고 만다. 그 누구보다도 부조리한 권력을 반대했던 그마저도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훈을 버리고 권력에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승영. 갈 곳 없는 지훈은 자살을 택한다. 어리바리하게 군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지훈을 욕할 것인가, '전향'에 가까운 변화를 택한 승영을 욕할 것인가. 진정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일방적 희생자였던 승영은 어느샌가 가해자가 되어 있다. ⓒ 청어람



진정 용서 받지 못할 자는 누구인가


영화의 다른 파트를 들여다보자. 승영은 상병 휴가를 나와서 태성을 만나려 한다. 그런데 태성은 좀처럼 만나주려 하지 않는다. '민간인'에게는 '군인'이 별거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그들에게 쓸 시간이 아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태성을 만난 승영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지훈에 대해 상의하려 한다. 물론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승영. 이에 태성은 '군인은 다 힘들어'라는 말을 전달하며 더 이상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군대에서의 일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힘들기 때문에 그냥 버티라는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며 애초에 차단을 해버리니, 승영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태성한테 말해봐야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는가. 그는 어설픈 자기 학대를 시도하고, 태성에게 매달려 울어도 본다. 하지만 남는 건 생채기와 '괜찮아'라는 태성의 영혼 없는 위로 뿐. 


이 타이밍에서 영화가 말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승영이다. 그는 신병 때부터 고수해온 권력에의 반(反)함과 '후임이 왕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 때문에 지훈은 자살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사실 지훈은 여자친구와의 헤어짐으로 인한 충격으로 승영과 다른 선임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고, 이를 본 승영은 폭발해 지훈을 심하게 나무랐고 지훈은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휴가를 나온 승영이 자살을 택하고 만 것이 아닌가. 이는 누구 때문일까. 자신의 선택으로 빚어진 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택했으니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태성이 조금이라도 승영의 말을 들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렇다면 태성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인가? 몇 번이고 돌려봐도 진짜 '용서 받지 못한 자'를 찾기란 가히 쉽지 않다.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멱살잡기는 가해자와 희생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 청어람



혹시 나는 용서 받지 못한 자가 아니었나?


테이프를 앞으로 감아본다. 다시 처음부터. 용서할 수 없는 또는 자신도 모르게 용서 받을 수 없는 자가 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성은 승영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승영은 결정적일 때 지훈을 질책하며 그를 저버렸다. 지훈 역시 시간이 가도 군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동을 비롯한 승영과 지훈의 선임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군대에 만연한 권력 구조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후임들을 몰아세웠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모두 군인이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란 말인가. 몇 번이고 영화를 돌려봐서 얻은 결론이다. 군대로 상징 되는 이 시대의 거대한 틀, 구조.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서 받지 못한다. 가해자이기 때문에. 


생각해본다. 나는 군대에서, 사회에서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희생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사슬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처음 볼 때는 코믹하고 일상적인 군대 이야기로 보이다가, 보면 볼수록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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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표지 ⓒ 다산책방

난 현재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남들처럼 아침에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아침도 먹지 않은 채 출근길을 재촉해 출근을 완료하고 정신없이 오전을 보낸다. 점심을 먹고 졸음을 참아가며 오후를 보내고 퇴근을 기다린다. 퇴근길에는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을 탐독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컴퓨터를 하고 TV를 보다가 잠자리에 든다. 너무나 단조롭고 평범한 일상이 계속 되다보니, 이 범주 밖에서의 기억들은 자연스레 해체된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한 시간이 흘러 온전히 기억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누군가 나의 말이나 행동에 상처 받거나 감동을 받았을지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내 평생에 걸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장면이 있지만, 정작 장면 속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래서 그에 관련된 무엇을 간직해 놓거나 기록해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기억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온전히 떠올리기에 불충분하다. 그렇게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다. 


2011년 세계적 권위의 영어권 최고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산책방)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노년의 주인공이 불충분한 문서를 얻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부정확한 기억에 의지해 이 문서가 무엇인지 추론해 보지만,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너무나 뜬금없고 생각지도 못했던 문서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어린 시절(중학교 때)과 노년 시절을 구분 짓는다. 1부의 어린 시절은 주인공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으로 기반한다. 그에겐 친한 두 친구가 있었고, 그 시절엔 으레 그렇듯이 허영심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 앞에 '진짜'가 나타난다. 전학생 에이드리언이다. 그는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명철하고 이성적인 철학자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보였다. 


그러던 중, 그리 친하지는 않은 친구인 롭슨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소문이 떠돌기 시작한다. 제일 유력한 진상으로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서 아기가 생겨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토니와 에이드리언을 비롯한 친구들은 갖가지 허영심에 가득 찬 해석을 한다. 에이드리언은 역사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인 '역사란 무엇인가'의 대답에서 롭슨의 자살을 예로 들며 이 해석에 종지부를 찍는 발언을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은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중략) 우린 그가 죽었다는 것, 그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것, 그녀가 현재 임신했다는 것, 아니면 과거에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뭘 알고 있을까요?(본문 속에서)


토니에게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가 생긴다. 허세만 있을 뿐 실세는 없는 토니는 베로니카에게 숙맥 같은 모습을 보인다. 베로니카는 이에 싫증을 느낀 것일까? 결국 그들은 헤어지고 시간이 흘러 베로니카는 에이드리언과 사귀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이를 허락받기 위해 토니에게 편지를 쓴다. 토니도 이에 성실히 답변을 해준다. '아주 유하게'


한편,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지기 전 베로니카 집에 초대를 받는다. 그녀의 가족들은 알듯 모를 듯 뭔지 모를 위화감이 들게 한다.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훗날 토니에게 다가올 거대한 파국의 강도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된다. 흩어져 있던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면서. 


그리고 시간이 흘러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친구들과 만나서 그가 왜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너무 똑똑해서 자살을 했다? 그들로써는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에이드리언의 자살이었다. 


2부는 토니의 현재인 노년 시절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묘사하는 노년 시절은 아주 섬세하고 실제적이다. 그 노년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문학동네)에 필적하고도 남는다. 어떤 면에서는 더욱 와 닿기도 한다. 이 소설을 즐김에 있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과는 약간 다르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며 쉬어가는 페이지로 너무나 훌륭한 역할을 하고 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토니는 어느 날 우연히 문서를 발견한다. 그 문서는 편지봉투이다. '고 사라 포드 여사의 재산 처분 문제'로 집 주소를 확인하고 여권 사본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오백 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가 남겨졌다는 것. 오백 파운드는 포드 여사의 유산이다. 두 개의 문서 중 한 개는 포드 여사의 유언, 두 번째 편지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다. 이 일기장은 현재 베로니카의 소유로 되어 있다. 하지만 포드 여사의 유서 내용 상으로는 토니의 것이기에 토니는 베로니카를 찾아 나선다. 그녀와 만나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거대한 파국으로 점점 다가가게 된다. 


그런데 토니에게는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하라 포드 여사가 왜 유산과 유언을 자신에게 남겼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왜 하라 포드 여사가 가지고 있었는지, 그걸 또 어떻게 베로니카가 소유하고 있는지. 이 모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베로니카를 만나야 했다. 


결국 베로니카를 만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충격적 사실을 듣게 된다. 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베로니카와 사귀는 것을 허락 받는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해 토니가 답장을 보냈을 때, 그 내용은 '아주 유하게'가 아니라 '아주 격하게'였다는 것이다. 그의 기억은 완전히 반대로 되어 있었다. 


나는 이 편지를 몇 번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내가 그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나 그렇게 험담을 퍼부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행여 하소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본문 속에서)


'부정확한 기억'에 대한 충격, 그리고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토니의 아주 격한 편지에 대한 충격. 그리고 이어지는 베로니카가 데리고 다니는 조금은 지능이 낮아 보이는 아이에 얽힌 충격. 여기에 또 다시 이어지는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여사와 에이드리언에 얽힌 충격적 반전. 


소설은 토니의 정확해 보이는 기억에 기반한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그의 평온한 노년 시절을 지나, 마구 쏟아지는 충격과 거대한 비극적 반전으로 끝을 맺는다. 부정확한 기억과 닫힌 뇌의 폐쇄 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경구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 끝에는 거대한 혼란만이 남아 있다. 


언뜻 보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과는 정반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읽는 사람에 따라 확실히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마케팅적인 측면이 강한 제목이었다고 생각된다. 책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데는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지만 읽을 때는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았나 싶다. 


내용면에서도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작가인 줄리언 반스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스토리에 완전히 녹아들지 만은 않는 내용들이 언뜻 언뜻 보인다. 이런 내용들이 누구에게는 좋게 다가오고 누구에게는 너무 생소하고 뜬금없어 나쁘게 다가올 것이다. 


마지막 최후의 반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내용을 밝히지는 않겠다.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최후의 반전이 전개되는데, 웬만한 독자도 이 반전을 알게 된 후 바로 책을 덮지는 못할 것이다. 중간 중간 메모를 하지 않은 이상, 앞을 다시 뒤적일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한 반전이지만, 주인공 1인칭 시점이 발목을 잡는다. 시종일관 토니의 입장에서만 서술되기 때문에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독자가 아는 사실은 거의 없다. 토니의 부정확한 기억과 토니가 얻게 된 불충분한 문서가 전부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고 나서도 뒷맛이 개운치 만은 않다. 여전히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다. 모든 걸 해결하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알 도리가 없다. 처음 읽을 때는 주인공의 시선을 쫓아가기 바쁘겠지만, 다시 한 번 읽게 될 때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될 것이다. 짧고 잘 읽히는 이 소설이 결코 짧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이유이다. 소설 작법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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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파수꾼>


영화 <파수꾼>. 영화의 주인공은 세 명이지만, 표지에는 두 명뿐이다.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필라멘트 픽쳐스

좁혀지는 미간, 꿈틀대는 눈썹, 뿜어져 나오는 한숨, 쯥쯥거리는 입술, 바싹 당겨지는 뒷목. 영화 <파수꾼>을 보고 난 후 남겨진 것들이다. 10대 친구들을 그린 이 '성장영화'를 보며 이런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에게서 나의 오욕의 학창시절을 투영했기 때문일까. 영화 자체가 소름끼치게 하였던 것일까.


영화 <파수꾼>은 독립영화에 속한다. 상업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소규모의 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눈을 속이는 현란한 특수효과나 가슴을 뻥뚫리게 하는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장면을 볼 수는 없다. 대신 디테일하기 그지없는 미시적 심리묘사와 짜임새있는 스토리가 송곳에 찔린 것처럼 가슴을 파고들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필자가 독립영화를 처음 본 기억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주인공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케이블 TV에서 보내줬던 <용서 받지 못한 자>이다. 휴가나와서 하필이면 군대 영화를 보다니. 그럼에도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 몇 번이고 되돌려 보면서 계속해서 나만의 해석을 덧붙였지만, 여전히 그 재미는 반감되지 않았다. 독립영화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2008년에 <똥파리>를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난 2011년, <파수꾼>을 접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이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인데, '파수꾼'이라는 단어와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같았기에 자연스레 접하게 된 케이스이다. 거기에 3년마다 찾아오는 명작 독립영화라는 일종의 징크스가 작용했을지도.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남학생 3명이라는데 과연 어떻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궁금하였다.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를 접하기 전에 영화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게 된 계기가 있다. 아주 간단한 거였는데, 바로 제목이었다. 한글 제목은 <파수꾼>이지만, 영어 제목은 <Bleak Night>였던 것이다. 풀이하면, 암울하고 절망적이고 음산하고 황량한 밤 정도가 되겠다. 그들이 누군가의 파수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들을 파수해줄 수 없다는 내용이 그려졌다.


영화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자살한 기태(이제훈 분)의 아버지가 기태의 죽음을 쫓아 기태의 생전 친구들을 수소문한다. 그렇게 찾아낸 기태의 친구 희준(박정민 분). 그는 기태가 자살하기 몇 주전에 전학을 갔지만, 그 전까지는 기태와 가장 친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 동윤(서준영 분). 그는 중학교때부터 기태와 가장 친한 친구였고, 희준이 전학간 사이 기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장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었다. 그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세 친구는 단짝이었다. 그들은 철로가 끝날 때까지 같은 걸어갈 수 있을까. ⓒ 필라멘트 픽쳐스



주지한대로 주인공은 세 명의 단짝 친구들이다. 기태와 동윤은 중학교때부터 친구였고, 희준은 고등학교때 알게된 친구이다. 이들 셋은 언제나 붙어다닌다. 그런 그들의 관계에 약간의 금이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윤과 희준이 좋아하는 세정과 보경이와 함께, 남자 셋 여자 셋 월미도 여행을 떠난다. 기태는 진심으로 친구들의 사랑이 성사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보경이는 희준이 아닌 기태를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보경은 기태에서 고백하고 이 장면을 본 희준은 기태에게 따지고 든다. 이에 기태는 언짢음을 느낀다.


이어서 학교에서의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진다. 어머니가 안 계시는 기태 앞에서 부모님 얘기를 하지 말자는 동윤과 다른 친구의 눈짓을 본 기태가 또 다른 의미의 언짢음을 느낀다. 또한 기태는 싸움을 제일 잘하는 일명 '짱'이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을 모두 자신의 부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중학교때부터 단짝인 동윤을 제외하고, 희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에 역시나 언짢음을 느끼는 희준이지만, 기태는 그런 희준에게 자신의 속마음과는 다른 서툰 감정 표현을 하고 만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서툰 표현들과 이로 인해 빚어지는 오해와 갈등으로 이들의 관계는 점철되고 만다.


결국 기태와 그의 불량한 친구들의 괴롭힘을 참지 못한 희준은 전학을 가버리고, 동윤은 그들 사이에서 제대로 된 중재를 하지 못한 채 희준의 편만을 든다. 이에 기태는 동윤에게 참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만다. 그의 여자친구인 세정이 과거에 안 거쳐간 남자가 없었다는 것. 이어서 기태는 세정에게 말한다. 동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참을 수 없는 동윤은 기태를 찾아가서 대판 싸운 끝에 절교를 선언한다. 이 도중에 기태의 불량친구들 또한 기태를 떠나간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고,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건 자살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프로이트는 방어 기제를 '미성숙한 방어 기제'와 '성숙한 방어 기제'로 나누었다. 미성숙한 방어 기제로는 부정, 투사, 행동화, 건강 염려증, 퇴행, 수동 공격적 행동, 신체화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기태가 사용하는 방어 기제는 행동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대의 미성숙한 자아와 어미니가 안 계시는 상황, 트라우마가 겹치면서, 이가 폭력적인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극 중의 내용으로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는 계속해서 그와 관련하여 갈등을 겪거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태가 말한다.


"난 집에 가면 내가 밥 해먹어. 가끔 아버지 얼굴 보면 인사하고 아침에 눈 떠보면 지각이라서, 왜 안 깨웠냐고 막 화내거든. 안 계시잖아. 엄마가. 아무도 없어. 그 정도야. 그 정도가 내가 얘기할 수 있는 우리 집 관련된 얘기야. 됐지? 됐냐고?"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는 기태의 자살이 결국은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필자는 다르게 생각한다. 그의 잘못만은 아니라고. 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증거는 또 있다.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사소한 오해와 갈등으로 그들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 필라멘트 픽쳐스



기태는 희준이 좋아하는 보경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기태는 계속해서 희준에게 다가가 사과를 한다. 그의 표현 방법이 조금은 서툴고 거칠지만 희준이 받아줄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희준은 시종일관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정말 조금이라도 마음의 빗장을 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기태는 계속해서 엇나가고 만다. 급기야 희준을 향한 분노가 극단으로 흐르고 마는 것이다. 이번엔 희준이 말한다.


"너는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네가 날 친구로 생각해본 적 한 번이라도 있냐? 내가 언제까지 네 앞에서 꼬리 흔들며 살아야 되는데? 내가 네 앞에서 그렇게 맞고도 오기로 버텨온 이유가 뭔지 알아? 네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알량한 자존심. 나도 한 번 부려봤다. 왜, 안 되냐? 저 친구들도 네 옆에 있는 거 아니야. 착각하지마. 너랑 학교 다니면 편하니까 붙어있는 거지. 나도 널 친구로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고, 알아?"


영화를 보는 내내 희준을 향한 답답함이 극에 달했다. 마치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 인간 관계란 것이 칼로 무자르듯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렇게 했던 것 같다. 죽고 못사는 단짝 친구가 있었는데, 어떤 일로 인해 단번에 그 친구와 절교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는 매일같이 사과를 했지만 나는 무엇인지 모를 오기로 그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금의 여지를 남겨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은 성숙한 지금의 내가, 미성숙했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그의 사과를 받아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불안한 관계, 그 끝은...


우리가 믿고 있는 깊숙한 관계는 무엇일까. 그리고 진정한 친구는 무엇일까. 진정한 친구와의 깊숙한 관계는 불안정한 나에게 이득일까 손해일까. 이 영화는 자칫 손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인에게 만연한 불안은 관계에 있어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외려 끝까지 자신의 불안을 꺼내들고 상대를 대하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기태는 겉으론 한없이 강한 척 하며 자신의 불안을 꺼내들면서도 나약했다. 그는 희준에게 거듭 사과를 하며 불안을 감추려 한 것이다. 하지만 희준은 자신의 불안을 완전히 굳혀서 기태를 대한다. 희준의 입장에서는 기태야말로 자신의 불안을 극도로 내보이며 상대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또한 미성숙하기 그지없었다.


미성숙한 인물은 또 있다. 바로 동윤. 그야말로 제일 미성숙한 인물일 것이다. 시종일관 기태와 희준의 갈등 속에서 중재를 시도하지만, 일방적으로 희준의 편만을 들었을 뿐. 또한 기태의 마지막 사과를 매몰차게 거절해 버린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제일 성숙해 보였던 그였기에, 그의 말은 꽤나 반전이었다. 동윤의 말이다.


"너한테 기분 상해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똑바로 들어. 내가 네 진정한 친구다,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지껄일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지 알아?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네 진정한 친구였단 생각하지 마라. 생각만 해도 역겨우니까... 네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 있잖아 가식적인 인간 싫다고. 근데 네가 제일 가식적이야. 네가 역겨우니까 다 너 떠나는 거야... 처음부터 잘못된 거 없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영화 <파수꾼>의 한 장면. 혼자 남게된 동윤. 아무도 그들을 파수해줄 수는 없었다. ⓒ 필라멘트 픽쳐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빛을 갚는 다는 속담이 있다. 죽마고우도 말 한 마디에 갈라진다라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말'의 힘은 대단하다. 말은 '관계'에 있어 그 시작과 끝을 조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 <파수꾼>은 10대 친구들을 통해, 관계에 대한 밀도 높은 고찰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세대를 초월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bleak night에 던져진 이들은 비단 미성숙한 그들만이 아닐 것이다. 이 시대를 규명하고 있는 거대한 bleak night에 던져진 우리들은 어떤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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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대학교 1학년 시절은 그리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쉽사리 적응할 수가 없었다. 온갖 열등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내성적인 성격과 변하지 않는 외모, 너무나 말랐던 몸 등. 결정적이었던 건, '나는 얘들과 달라.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야'라는 의식이었다(고백하건대, 모의고사 점수보다 수능점수가 상당히 많이 떨어져 원하지 않은 대학교를 갔다. 당시에는 많이 후회를 했고 오랜 시간 콤플렉스로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이겨냈다). 절대적 열등감과 상대적 우월감이 아주 교묘하게 자리 잡아 나를 괴롭혔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멀리하거나 왕따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모임에 꼬박꼬박 참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종종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가식과 불신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진정한 친구 운운하며 테두리 안에 있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나는 그 테두리를 벗어나기에는 너무도 나약했기에, 아웃사이더를 부러워하면서도 행동을 해야 했다. 그 행동이 제대로 된 행동이 아니었기에, 이도저도 아닌 최악의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물리적인 소외를 맛보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언제나 소외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어떤지 몰라도 소외되어 있다고 느꼈다.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무엇을 했어도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일본 전후(戰後)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으며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났다. 

다자이 오사무의 불운한 삶

<인간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기 불과 3개월부터 2개월 동안 연재된 소설로, 그의 죽음 이후 1개월만인 1948년 7월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즉, <인간실격>은 그의 마지막 소설이다. 소설을 말하기에 앞서 다자이 오사무를 간략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자이 오사무는 명망있는 집안의 아들(11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는 유약해, 유모의 손에 키워졌다. 중학교 때까지는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수재였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좌익운동에도 참여했고 자살까지 시도하였다. 졸업할 때쯤에는 성적이 수직 낙하해 중하위권을 맴돌았다. 대학에 진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했고,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에 대한 자기혐오는 깊어져만 갔다. 

이를 이겨 내보려고 더욱 문학에 매진했고, 마르크시즘에 심취하기도 했으며, 여성편력이 심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지는 그의 문학세계와는 달리 그는 불운한 또는 불운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는 39년의 짧은 생애를 보내면서 총 5번의 자살시도를 했고, 결국 5번째 만에 성공(?)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심히 유약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으로 훌륭히 승화시킨 걸 보면 그는 영락없는 예술가였다. 

'인간실격자'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시키는 주인공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표지 ⓒ 민음사



공교롭게도 <인간실격>이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직전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라, 자전적인 면이 상당히 많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인간실격>의 주인공과 다자이 오사무의 삶과 사상이 매우 흡사하다. 소설은 주인공의 수기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수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요조는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고,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 외로움과 소외감, 불안감 등은 요조의 삶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뿌리 깊게 형성된 것이다. 

그럼에도 요조는 인간을 놓칠 수 없었고 '익살'을 통해 웃음을 유발해 인간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기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킬까봐 전전긍긍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며 술과 마약, 비합법 운동(좌익 운동)으로 도피하게 되고, 복잡한 여성관계를 반복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중 자신을 진정 믿고 사랑해주는 여자 '요시코'를 만나게 된다. 그녀 덕분에 인간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그리고 외로움과 소외감 등이 치유됨을 느낀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가 세상의 위선과 가식에 극도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껴 힘들어 할 때, 그의 죽은 여동생과 살아있는 여동생이 유일한 안식처라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다. 홀든 콜필드는 비오는 날 여동생이 회전목마를 타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세상은 살 만 하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는 치유는 안 됐을망정, 최소한 살아갈 힘은 얻었다. 

반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요시코'가 어떤 놈에게 겁탈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 마지막이자 유일한 희망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치유는커녕, 기존의 깊은 상처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견딜 수 없었던 요조는 자살을 기도했으나 살아남았고, '인간실격자'가 되었다. 마지막엔 정신병원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거악(巨惡)의 시대를 맞대면하다

이 소설은 전후 일본에서 젊은이들에게 신앙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젊은 시절 반드시 읽는 소설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 혼란과 퇴폐, 비(非)윤리를 맞대면하며 자신을 돌아보고 한 단계 성숙할 수 있게 만드는 가장 좋은 콘텐츠였다. 이 점이 그를 기성의 윤리와 도덕, 문학관에 반발한 작가를 뜻하는 '무뢰파(無賴波)' 작가로 칭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자기혐오는 일본에 대한 혐오, 나아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이어진다. 반면 전쟁이 끝난 시기는 아니지만 국가의 큰 위기가 10년을 주기로 연거푸 일어난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의 자기혐오는 말 그대로 자신을 향한 혐오에서 그친다. 종종 국가와 시대를 향해 자기혐오의 외연화를 행하려 하지만, 결론은 경쟁 사회에서 이기지 못한 자기 탓이다. 

물론 막무가내로 자기혐오의 외연화를 행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공허한 메아리로 끝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자기혐오의 침참은 더욱 가속화되어 이 사회는 더욱 빨리 끝장나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위험하기 짝이 없다. 자기혐오의 외연화가 자칫 자신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려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차치하고라도,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불안, 혼란과 퇴폐, 비(非)윤리는 도외시한 채 자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가 너무 힘들거나, 어딘가에 부딪혔거나, 무서운 놈들을 만나 다시 애벌레가 되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서 자기혐오로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 또한 그렇게 죽어갔다. 그의 본심은 알 수 없지만, 그의 삶과 시대적 맥락을 생각해 볼 때 그의 자기혐오는 그 자신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거악(巨惡)의 시대와 맞대면한 결과인 것이다. 다만 그는 나약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했기에, 자신이 나약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최대한의 저항인 자기파괴를 이용해 부딪치고 부딪히고 또 부딪혔다. 

다자이 오사무의 자기파괴는 시대에 대항해 그가 행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지금은 수많은 대항무기들이 있다. 하지만 거대한 조직 뒤에 숨어서, 자신의 존재를 숨겨주는 익명의 숲에 숨어서 '대항하는 척' 하거나, 타인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여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짓은 안 하느니 못하다.

그렇다고 '젊음'이란 것이 '저항'과 같은 말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항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저항은 못할망정 최소한 피하지는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과 맞대면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소름끼치게 힘든 일이다.



"오마이뉴스" 2013.6.3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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