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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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난 11월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영면에 드셨다. 향년 89세.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듯 정정했던 그였기에, 조금은 충격이었다. 내 삶에서 처음으로 기억나는 대통령이 김영삼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의 기억이 있지만, 당시의 대통령인 노태우에 대한 기억은 없다. 





문제는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니, 치가 떨릴 정도로 나쁜 기억만 있을 뿐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대구 도시가스 폭발 사고, 대구 지하철 폭발 사고, 그리고 IMF... 1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비록 TV로 보고 들은 것들이지만, 그 기억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의 경우, 우리 아버지가 지나간 뒤 5분 만에 무너져 내려서 후덜덜하게 다가온다.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사건사고가 그의 통치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특히 IMF는 한 번에 확 와 닿지는 않았지만, 우리 가족 삶의 분명한 분기점이었다. 내 기억으론 IMF가 있기 전엔 우리 집도 꽤 잘 나갔다(?). 돈 걱정 없이 나름 펑펑 쓰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내가 뭘 사달라고 했을 때 엄마가 거절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 IMF가 지나간 후 중학교 때부턴 그러지 못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돈 얘기가 나오면 하얗게 질리곤 했다.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게 김영삼은 내 기억 속 최악의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2010년대 대통령들이 하는 걸 보니, 김영삼 대통령이 그리워진다. 그가 비록 역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사건사고이 일어난 시기를 통치했지만, 한편으로 역시 역사에 길이 남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전두환, 노태우의 하나회를 단 칼에 척결했다든지, 계속 미뤄왔던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든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정식 선포하는 등 역사바로세우기를 실시했다든지, 등등. 어느 대통령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가는 일들을 해냈다. 그것들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업적이다. 





그는 김대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오랫동안 독재와 맞서 싸운 민주화 투사였다. 재야가 아니라 대놓고 정치판에서 싸운 뚝심 있고 겁 없는 투사였다. 그는 독재와 싸우며 당한 것도 참 많고, 이뤄낸 것도 참 많다. 그 중 제일 섬뜩한 건, '질산 테러'다. 1969년에 일어난 일로, 김영삼 의원이 3선 개헌에 반대하는 대정부 질의를 한 일주일 후 귀가 길에 테러를 당한 것이다. 다행히 직접적인 피해를 입진 않았는데, 왠만한 사람이라면 의원직을 내놓고 칩거했을 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배후를 중앙정보부라 보고, 더더욱 달려들어 반대하고 비판을 가하며 싸웠다. 


한편 그가 행한 유명한 '단식 투쟁'이 있다. 김영삼은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년 기념일부터 6월 9일까지 민주화 5개항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바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5월 27일에는 전두환을 대신해 권익현이 찾아 와서 단식 중단을 요청했으나 거절했고 다음날, 다다음날에도 찾아왔지만 거절했다. 이 투쟁은 민주화 투쟁에 불을 붙여 결국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는 평가가 있다. 그야말로 민주화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 중에 하나이다. 





김영삼 하면 잊지 못할 대사건이 하나 더 있다. 1990년 '3당 합당'이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정당과 제2야당 민주당, 제3야당 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지금의 새누리당 전신이다. 이는 노태우 정권의 철저한 노림수였다. 당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에 압박을 받고 있던 정권은, 급기야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보수 연합을 추진한다. 이에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며 3당 합당을 이끌어냈다. 노태우, 김종필 그리고 김영삼.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김영삼 입장에서는 거악(巨惡)이나 마찬가지인 이들과의 조우라니. 어떤 변명을 대도 신통치 못할 사건이었다. 





'애증'의 대상이라고 할까. 김영삼은 나에게,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그런 사람인 듯하다. 정말 잘한 일도 많고 위대한 일이라고까지 할 만한 일도 많이 했지만, 도무지 용서하지 못할 일들도 행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그는 분명 부끄러운 짓을 행했다. 그럼에도 그를 마냥 증오하지 못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다. 김영삼을 규정하는 건 참 힘들다. 아니, 오히려 쉬울까? 어쩌면 김영삼의 적자니, 아들이니 떠드는 사람들에게 힘든 일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현 보수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신념은 반독재와 민주화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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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 포스터 ⓒ BoXoo 엔터테인먼트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의 출현으로 파멸의 직전까지 직면한 인류. 가까스로 거인을 물리친 후 거인보다 훨씬 큰 높이의 50m 방벽을 아주 두텁게 쌓는다. 이후 100년 간 거인의 침공을 받지 않은 채 평화가 지속된다. 얼마나 더 오래 계속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10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계속 되어 왔기에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는 믿음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두텁고 높은 방벽만 믿고 있을 수는 없기에, 방벽 밖은 거인 뿐이 없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곳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사병단을 꾸려 탐사한다. 결과는 처참할 때가 많다. 현존 인류 최고의 병사들로 꾸려진 이들이지만 거인에게 대항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초대형 거인이 출현한다. 기존의 거인에 대비해 만든 방벽을 훨씬 상회 하는 크기의 거인이다. 단 한 마리의 힘으로 지난 100년 간 인류를 지켜왔던 방벽이 한순간에 무용지물로 변한다. 그러고는 수많은 거인들이 방벽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인류는 또다시 파멸의 위기에 처한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의 한 장면 ⓒ BoXoo 엔터테인먼트



이 만화가 인기 있는 이유, '단순함'


만화 <진격의 거인>은 2009년 연재를 시작해 6년 동안 약 4500만 부를 팔아 치우는 괴력을 발하고 있다. 인류와 거인이라는 단순 명쾌한 대립 구조, 어떤 누구를 대입하든 아귀가 들어 맞는 해석력을 지닌 구조, 한 아이의 성장담으로 읽힐 수 있을 만큼 소년 친화적이면서도 다분히 정치철학적으로 읽힐 수 있을 만큼 어른 친화적인 스토리, 극우적 성적을 띄는 발언으로 수없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는 원작자 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애니메이션, 그리고 극장판으로 오면 한 가지가 더 붙는데 '퀄리티'이다. 화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한 듯한 극강의 퀄리티는 원작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액션적인 요소가 상당하고 그게 주로 빠르다 보니 눈이 더 호강하는 듯하다. 반면 스토리는 극장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원작을 요약해 놓은 듯하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은 2부작으로 나뉘는 시리즈 중 1부에 해당한다. 


영화는 거시적으로 시작한다. 거인에 대비해 방벽을 쌓고 평화를 가장한 채 살아가는 인류를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그러다가 초대형 거인이 출현한 후 방벽을 뚫리면서 미시적으로 접근해 간다. 조사병단을 선망하며 거인이 언제 침공할지 걱정하는 주인공 소년 엘렌. 하지만 정작 거인이 출현하자 속수무책으로 눈 앞에서 엄마를 잃고 도망친다. 이후 그는 군대에 들어가 거인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는 일을 수행한다. 


초대형 거인은 급기야 3개의 방벽 중 2번째 방벽마저 뚫어버린다. 엘렌을 비롯한 군인들은 어떻게 하든 거인을 맞아야 한다. 그게 말처럼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건 오래지 않아 깨닫는다. 점점 패퇴하는 만다. 와중에 엘렌은 거인에게 잡혀 먹히고 마는데... 제일 성적이 좋았던 엘렌마저 그 지경이라면, 다른 소년들은 어떠했는가? 인류는 그야말로 파멸의 직전까지 몰리고 만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의 한 장면 ⓒ BoXoo 엔터테인먼트



이 영화는 인류 대 거인이라는 너무나 단순한 구조에, 막지 못하면 파멸 한다는 역시 단순한 명제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스토리가 전개되기 위해서는 인류가 거인을 전멸 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가까스로 막고 다시 평화를 찾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야 하겠다. 그건 물론 주인공에 관련된 것일 테고. 또한 주인공은 위험에 빠질 테고, 그 위험을 어떻게 하든 헤쳐 나올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단순한 구조와 명제에 예측 가능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만화)의 인기는 그 '단순함'에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인류 대 거인' 여기에 누구라도 대입할 수 있다


'인류 대 거인'. 위에서 말한 것처럼 여기에 누구라도 대입할 수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말이다. 먼저 일본을 인류에 대입해보자. 거인은 아마도 중국이 아닐까. 중국은 세계금융위기를 전후해 이른바 '슈퍼차이나'로 부상해 세계 경제를 부양하고 있다. 한때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 중 하나로 호령했던 일본은 지금도 물론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 그 이하의 존재가 되었다. 


일본은 극우적인 성향을 지닌 아베 총리가 국수주의 정책으로 오직 일본 만을 생각하는 경제 정책으로 경제 부양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중국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중국이 두려운 건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미국과 일본이 한 패거리를 이루어 대항 아닌 대항을 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100년 간의 평화가 깨진 것처럼, 실제로도 일본의 중국에 대한 평화가 깨졌다. 


인류에 일본의 불안정한 젊은이들을 대입 시킬 수도 있다. 일찍이 버블의 붕괴로 경제가 파탄 났으며 세계금융위기를 겪고 이어 동일본 대지진과 같은 대재앙까지 겪으며 나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일본. 더욱이 세계 최고의 고령화가 진행 중이며, 그에 비례해 노동력은 급감하고 있다. 직격탄을 맞은 일본 젊은이들. 그들 중 일부는 극우적인 성격을 띄며 외국인들을 배격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논리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외국인이 와서 특혜를 받으며 손쉽게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는 모습이, 거인이 침공해와 삶의 터전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는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이 극단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가 한순간에 좋은 모습을 보일 리가 없기 때문에 그들의 불안정함은 계속 될 테고, 끝 모를 불안감은 결국 다른 것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격의 거인: 홍련의 화살>의 한 장면 ⓒ BoXoo 엔터테인먼트



현재까지는 일본에 국한된 거라 할 수 있겠지만, 거인을 동일본 대지진과 같이 언제 어디서 일본을 덮칠 지 모르는 자연재해에 대입할 수 있다. 물론 자연재해는 세계 어디서 사람들을 덮칠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경우가 다른 게, 세계 최고의 재해 방비책을 마련해 놓고 있음에도 그를 훨씬 상회 하는 재해가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이미 수차례 겪어본 지라 그에 대한 두려움을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영화에서 아무리 높은 방벽을 쌓아 거인을 방어한다 한들 그보다 훨씬 큰 초대형 거인이 출현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큰 불안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은 총체적 난국 일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복구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쉽지 않은 실정이다.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 눈앞에 두려움에 총력을 기울일 뿐


시대를 반영하는 콘텐츠는 장르를 떠나 인기를 끌기 마련이다. 요즘처럼 좋은 소식 하나 없는 시대에는 그런 콘텐츠 또한 암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201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진격의 거인 신드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상을 이야기하는 만화가 말이다. 그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눈 앞의 방어를 위해 수많은 목숨을 바치는 스토리가 말이다. 


일본에 아포칼립스가 들이닥친 지 오래되었다. 비단 일본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 일본이 그러하다면, 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에 그 파급력이 상당할 것이다. 희망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장밋빛 미래를 예견하지 않는다. 다만 눈앞의 두려움을 상쇄하는 데 총력을 기울일 뿐이다. 지금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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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플레전트빌>



영화 <플레전트빌> 포스터 ⓒ뉴라인 시네마



영화 <플레전트빌>은 판타지 동화 같은 분위기와 설정으로 시작된다. 이혼한 편모 슬하에 있는 전혀 다른 성격의 남매 데이빗(토비 맥과이어 분)과 제니퍼(리즈 위더스푼 분). 오빠 데이빗은 '플레전트빌'이라는 프로그램에 푹 빠져 지내는 자칫 찌질해 보이는 학생이고, 제니퍼는 성적으로 굉장히 개방적이고 괄괄한 성격의 학생이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다른 TV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싸우다가 리모컨을 고장 낸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다가 들렀다는 수리 기사가 전해주는 마술 리모컨. 설마 하니 그 리모컨은 '플레전트빌' 프로그램 속으로 그들을 데려다 주었다. 암울한 현재와는 다른 1958년을 배경으로 하는 그 프로그램은 모든 것들이 완벽했다. 완벽한 가정은 물론이었다. 하지만 데이빗에게는 파라다이스, 제니퍼에게는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시궁창 같은 현실과는 다른 완벽한 세계


'현시창'이라는 인터넷 신조어가 있다. 풀어 쓰면 '현실은 시궁창'이란 뜻인데, 대한민국 청년의 현재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이 이러니 스스로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 요즘 들어 대대적으로 광고도 하는 등 모바일 게임의 인기가 치솟고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현상일까. 시궁창 같은 현실과는 다른 완벽한 세계, 그리고 언제든 내가 최고가 될 수 있는 세계. 그곳으로 가고 싶다.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 파괴에서 오는 문제는 비단 IT의 고속 성장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미래는 현재보다 더더욱 암울할 것이라 한다. 경제는 추락하고, 환경은 안 좋아지며, 어떻게 하든 죽을 확률은 계속해서 높아질 것이다. 도망치고 싶은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가상현실? 아니면 암울한 현실이나 미래가 아닌 과거? '플레전트빌'은 이 두 개를 충족시킨다. 



영화 <플레전트빌>의 한 장면 ⓒ뉴라인 시네마



데이빗과 제니퍼가 가게 된 가상현실 공간 '플레전트빌'의 시간적 배경은 40년 전 과거인 1958년이다. 미국에게 있어 1950년대는 평화와 번영, 그리고 보수의 시대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유럽과는 달리 직접적인 피해가 전무했던 미국은, 50년대에 유례 없는 완벽한 시기를 보낸다. 그런 시대에 뚝 떨어진 데이빗과 제니퍼였던 것이다. 


흑백 세계에 나타난 '색깔'


데이빗은 이 세계를 잘 알고 있다. 완벽한 세계.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 흑백 세계. 변화가 전무한 세계. 그래서 그는 이 세계의 변화를 원치 않는다. 이상한 것들 투성이지만 이해하려 한다. 반면 제니퍼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그녀는 먼저 남자들에게 섹스의 욕망을 뿌린다. 그것 하나로도 이 세계는 바뀌기 시작한다. 흑백 세계에 '색깔'이 나타난 것이다. 변화는 겉잡을 수 없다. 



영화 <플레전트빌>의 한 장면 ⓒ뉴라인 시네마



"평소처럼 퇴근해서 현관으로 들어가서 외투를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는 '여보, 나왔어' 라고 외쳤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아내도 없고 불은 꺼져 있었고 저녁도 안 차려 놨더군. 오븐을 열어 봤는데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녀는 사라졌어요. 사방으로 찾았는데 어디에도 없었어요."


영화는 1950년대 나타났던 저항과 반문화를 답습한다.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 영화 <이유 없는 반항> 등으로 대표 되는 이 문화는 당시 한편에서는 전에 없던 열렬한 환호를 받고 한편에서는 최악의 반대에 부딪힌다. 영화에서는 데이빗과 제니퍼가 그 역할을 한다. 데이빗은 내면에 잠재된 진짜 모습을 끄집어 내려 하고, 제니퍼는 잠자고 있던 욕망을 깨우려 한다. 


그렇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메카시즘'으로 대표 되는 좌파 색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순응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공산주의자 딱지를 붙여 철저히 색출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생존 아니면 죽음의 시대가 도래한다. 변화는 죽음을, 순응과 불변은 생존을 뜻했다. 선택이 필요했다. 


변화 그리고 선택


영화에서는 변화한 이들은 흑백이었던 몸에 색이 생기고, 불변을 선택한 이들은 여전히 흑백으로 남아 있게 된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한때 어울린다.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니까. 하지만 위정자들은 변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디까지 변할지 알 수 없는 그들을 보고 '가만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 결과 '유색 인종'들은 폭력을 당하고, 모든 색깔 있는 것들은 파괴 당하며,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책이 보관된 도서관은 폐쇄된다. 유채색 그림은 금지 당하며, 유쾌한 노래만 허락된다. 


"진짜 비가 내리고 있어요. 저절로 치유되는 병균이 아니오. 마을이 변했소. 그 이유는 모두 알겠죠? 결정을 내립시다. 우리가 뭉쳐야만 이 난국을 풀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현실 도피에서 변화의 단계를 넘어 선택의 단계에 다다른다. 변화라는 개념조차 갖춰지지 않은 이들에게 '변화'를 심어줬을 때 비로소 그들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변화냐 불변이냐. 그 대표적인 장면이 데이빗과 제니퍼의 변화, 그리고 선택이다. 



영화 <플레전트빌>의 한 장면 ⓒ뉴라인 시네마



데이빗은 처음엔 '플레전트빌' 세계에 순응하고 세계의 불변을 외치지만 결국엔 변화를 선택하고 그것이 자신의 진짜 모습임을 알게 된다. 반면 제니퍼는 처음엔 앞장서서 '플레전트빌' 세계의 변화를 외치고 그런 모습이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남자에게 관심 없고 오히려 공부에 적성과 소질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보수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진보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금 헷갈리는 건 제니퍼의 변화이다. 변화를 추구하는 게 진보라 한다면, 초반의 제니퍼는 진보의 선봉과 같았다. 그러던 제니퍼가 진짜 자신의 모습인 보수적이고 순응하는 여인으로 '변화'한다. 진보가 보수로 '변화'했으니 이 또한 진보인 것인지? 진보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진보가 보수로 '역행'했으니 이는 보수인 것인지? 


영화는 변화 자체를 진보라고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변화를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것으로 치환하고 있다. 진보라고 한다면 그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더 좋은 게 많습니다. 어리석고, 섹시하고, 위험하고, 간단한 것들이죠.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러분 모두에게 잠재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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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한승동 기자의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 Ⓒ마음산책

왜 우리나라가 아니고 동아시아인가? <지금 동아시아를 읽는다>(한승동 지음, 마음산책 펴냄)를 처음 접하고 든 느낌은 약간 이해가 안가는 제목이었다. 부제는 '보수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생각'이었는데, 추측으로 진보적 색채가 강한 책이겠구나 싶었다. 저자부터 찾아보았다. <한겨례 신문>의 한승동 기자님이었다. 지난해에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 이분의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조선책략>이 쓰인 100여 년 전의 상황이 지금 우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논조의 글이었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글이었던 기억이 들어, 읽기 전에 이 책에도 믿음이 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아닌 동아시아라는 타이틀에 수긍이 간다. 외세의 침략뿐만 아니라 외세에 엄청난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이기에, 우리나라를 읽는 건 곧 동아시아를 읽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저자는 지금 우리나라가, 아니 동아시아가 100년 전과 다름없는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천하대란' 한국, 중국, 일본에 미국까지. 100년 전과 나라 간의 상관관계와 힘의 추가 달라졌을 뿐, 나라는 그대로이다.

 

이 천하대란의 원인은 뭘까? 저자는 말한다. 일본 극우 세력의 집권이라고.

 

"만주국과 전후 일본을 만든 기시 노부스케와 요시다 시게루의 외손자 아베 신조와 아소 다로가 다시 권력을 탈환하고, 그들보다 더 오른쪽으로 기운 이시하라 신타로와 하시모토 도루까지 이른바 '제3극'으로 가세한 가운데 좌파는 물론 중도 리버럴을 표방했던 민주당까지 사실상 해체 상태로 전락한 일본"(책을 내면서 중)

 

이들이 중국의 대두를 저지 또는 재역전을 꿈꾼다는 것이다. 미국 역시 일본 우익을 보호하며 중국의 대두를 저지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나라는 여기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 우리나라의 기득권 층은 우익의 탈을 쓴 채로 기회주의적 행보를 계속해 왔고, 앞으로도 계획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기득권층의 기회주의적 행보

 

이들 기득권층은 어떤 기회주의적 행보를 해왔던 것일까? 그건 각종 조작들로 인해서이다. 이데올로기, 사상 조작과 프레임 조작들. 이들은 해방 조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시 최대 과제였던 친일파 청산 문제 대신, 미국의 냉전 전략에 철저히 편승한 '반공주의'을 내세운다. 이에 사상을 떠나서 민족을 위해 독립투쟁을 벌인 수많은 '반미친북 좌파'들이 죽임을 당했다. 거기에 편승해 친일파에서 반공파로 자리매김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아 거론하기도 힘들다.

 

이뿐이랴? 1960년대 이후가 되면서 반공주의는 '반민주주의'로 변형된다. 자신들을 '경제화'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며, 민주화 세력을 '빨갱이'로 묶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정한 '반미친북 좌파'일까?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대다수가 단지 기득권층의 반대 세력일 뿐이라고. 즉, 정치적 반대파일 뿐이라고. 이와 같은 프레임 조작에 의한 확실한 이항 대립 구조로 영원한 절대 기득권 확보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주류 언론(신문)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그런 신문들에도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민족지라고 불러도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말도 되지 않는 논리라고 일축한다. 이들의 행보도 역시 기회주의적이었다.

 

"민주 정부 10년간 '비판적 정론'을 앞세우며 사실상 맹목적 정부 비난˙비판으로 일관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역시 맹목적으로 옹호했던, 자신들과 한배를 탄 정치 세력이 정권을 탈환하자 이제까지의 정부 비난 논조를 하루아침에 찬양하고 지지하는 논조로 바꿨다."(111쪽)

 

일본의 평화를 위한 주변국의 희생

 

저자는 책에서 동아시아, 즉 일본에 대해 430여 페이지 중에 130여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를 읽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를, 동아시아를 읽기 위해서는 일본이 빠질 수 없다는 뜻일 게다. 저자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의 극우 세력을 배제하되 일본 자체를 극우로 보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 또는 일본인으로 뭉뚱그리지 말고 다수 일본인, 시민과 분리해서 봄과 동시에 동아시아 시민연대 구상을 그려보고 있다. 이는 한일 간의 지난한 역사를 그려낸 <남왜공정>(다빈치북스)라는 책의 결론 부분에서도 볼 수 있는 생각이다.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저자는 이 복잡한 것만 같은 질문에 단순명료하게 답한다.

 

"문제의 핵심은 '돌아온 그들'에 있고, 그들이 왜 다시 돌아왔느냐 또는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느냐에 있다."(201쪽)

 

돌아온 그들,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극우 세력들. 그들의 기상천외한 생각과 발언은 동아시아를 요동치게 하며, 일본의 평화를 말하지만 주변국의 희생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국화와 칼'(평화와 폭력)의 기막힌 모순적인 조화다. 그들이 절대 끈을 놓지 않는 '영토 분쟁'(한국과의 독도 분쟁, 중국과의 댜오위다오 분쟁 등)은 언젠가 제국 부활의 신호탄이자, 동아시아 불행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있겠다.

 

동아시아 시민연대 구상이라는 해결책과 더불어 저자는 또다른 해법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 들고 있다. '남북통일' 재일 조선인 백종원의 <조선 사람>이라는 책을 통해 그는 지금의 분단 체제 역시 "나라 없는" 상태와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화해와 평화 그리고 통일만이 해법이라는 것이다.

 

"일본을 위해서나 동아시아 전체를 위해 일본은 바뀌어야 하고, 그러려면 일본 지배 세력이 바뀌어야 한다. 그들까지 포함한 과거사 청산은 일본만의 과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의 과제가 돼야 한다. 그들이 건재하는 한 '동아시아 공동체'는 없다."(258쪽)

 

문제는 보수냐 진보냐, 좌냐 우냐가 아니다

 

"경험적으로 우리는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니라, 세상을 그래도 모두 함께 잘되기를 바라며 양심적으로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냐, 아니면 비열하게 남을 해치며 더럽게 살아온 자들이냐, 또는 자기 욕심만 채우려 안달해온 자들이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걸 안다."(65쪽)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고. 이 문제의 본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역사적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고. 진짜 문제는 기회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치는 대한민국 역사와 현재에서 본질을 감추고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세력의 판짜기 조작에 있다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우리 사회, 우리 역사. 저자는 말한다. 이 사회가 과연 안정화된 사회인 것이냐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인 것이냐고.

 

책은 기자인 저자의 성향으로, 장황하고 넓게 때로는 깊고 날카롭게 동아시아를 파헤치고 있다. 그 복잡한 흐름 속을 흐트러짐없는 눈으로 헤집고 다니며, 능수능란하게 감춰두고 아프고 몰랐던 부분들을 짚어내고 치료한다.

 

문체나 논조가 약간 세어 보여 자칫 이념의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을 보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의 시대에서 단순히 진보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닌, 보수를 틀리다고 가정하고 보는 것이 아닌, 독자들에게 올바른 눈을 가질 것을 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눈을 가지고 진정한 가치를 읽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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