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다/인권 선언 문서'에 해당되는 글 4건





1755년에 시작되어 1763년에 막을 내린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 미국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든 반면 영국의 식민지 미국에 대한 지배는 전에 없이 강화됩니다. 이에 당연하게 식민지 미국의 불만이 쌓이고 반발이 일죠. 식민지 미국을 제일 크게 건드렸던 건 '세금'이었습니다. 또한 1773년에는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도 발생하죠. 


그런 도중, 1772년에 각자 발전을 추진했던 13개 식민지(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코네티컷, 뉴욕, 뉴저지, 펜실베니아,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는 조지아주를 제외하고 교신위원회를 발족시킵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1774년 제1차 대륙회의로 발전되죠. 본격적으로 영국 본국 정부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4월 렉싱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식민지 미국은 영국 본국 정부와의 화해를 도모하려 했습니다. 13개 주는 5월에 제2차 대륙회의를 개최합니다. 이때의 회의에서 13개 식민지는 각기 헌법을 제정하여 제각기 하나의 '나라(state)'가 됩니다. 하지만 전쟁의 정세는 나날이 악화되었죠. 



미국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급기야 6월에 미국 식민지의 독립에 관한 제의가 대륙회의에 주요 안건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이에 토머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벤저민 프랭클린, 존 애덤스, 로버트 리빙스턴, 로저 셔먼의 다섯 사람이 독립선언서 기초위원회가 되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6월 말에 대륙회의에 제출하고, 얼마 되지 않은 7월 4일에 공포하는 것이죠. 이후 미국은 약 8년 간의 싸움 끝에,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에 의해 완전한 독립을 인정받게 됩니다. 


미국 독립선언은 천부인권, 저항권, 혁명권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존 로크의 사회계약이론과 자연법이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서



다음은 미국 독립선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들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표들은 전체회의에 모여 우리 의도의 올바름을 세계의 최고심판자에게 호소하면서, 이 식민지의 선량한 인민의 이름과 권한으로 엄숙히 공포하고 선언하는 바이다. 이들 연합 식민지들은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들이며, 또한 당연히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들이어야 하며, 이 나라들은 영국의 왕에 대한 모든 충성의 의무에서 해방되어야 하며,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들로서 이들 나라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화의를 맺고 동맹을 체결하고 통상관계를 수립하며, 또한 독립된 나라들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행위와 일들을 할 수 있는 완전한 권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선언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들은 신의 섭리의 보호에 굳게 의지하면서 서로 우리의 생명과 재산과 신성한 명예를 걸기로 다짐한다. 


참고문헌

나종일,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한울 아카데미

http://ko.wikipedia.org/wiki/미국_독립_선언

http://ko.wikipedia.org/wiki/미국_독립_전쟁

http://ko.wikipedia.org/wiki/프렌치_인디언_전쟁

http://ko.wikipedia.org/wiki/13개_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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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헌정사상 제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제정법 3가지 중 마지막 '권리장전'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청교도 혁명(1642~1651)에서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가 승리 한 후, 찰스 1세는 처형당했고 찰스 2세는 추방당합니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찰스 2세가 돌아옵니다. 하지만 그는 적장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우인 요크 공 제임스 2세(1633~1701)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찰스 2세 시절에 의회파의 후신에 의해 무수한 압력과 암살 시도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잠재우고 확실한 왕위를 물려줄 수 있었죠. 이에 제임스 2세는 확고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제임스 2세



이런 탄탄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2세는 곧 형편없이 무너지게 되고 맙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그가 극단적인 가톨릭 신봉자이자 절대 왕권 신봉자였기 때문이죠. 그에게는 정치적 감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국가의 중요한 법체계를 하나씩 하나씩 가톨릭교에게 유리하게 세우려 합니다. 이는 궁정당의 후신인 토리파가 보기에도 너무한 처사였죠. 당연히 반대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오랫동안 적정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대에서만 계속될 것이 분명한 처사들을 극렬히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1688년 6월에 왕자가 태어납니다. 가톨릭교도로 양육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가톨릭교도 국왕의 치세가 계속될 것이었던 거죠. 상황이 급변하자 토리파(궁정파의 후신)와 휘그파(의회파의 후신)와 종교계가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하다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하다 메리 2세



그건 바로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의 남편인 네덜란드 오렌지공 윌리엄을 불러들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밀사를 통해 윌리엄으로 하여금 잉글랜드를 침공하게 하였고, 윌리엄은 이를 따릅니다. 이에 제임스 2세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프랑스로 도망가고 말죠. 명예혁명의 전말입니다. 


1689년 1월, 사태 수습을 위해 소집된 공회에서는 논의 끝에 윌리엄과 메리에게 공동으로 왕권을 부여하고 국정을 윌리엄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들이 곧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입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인민의 권리를 열거한 '권리의 선언'을 채택하게 되죠.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 이 선언을 법으로 제정합니다. 잉글랜드 인민의 권리와 특권을 선언하고 왕위계승을 법으로 규정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권리장전'입니다. 



권리장전 원문



'권리장전'은 입법권과 징세권과 군사권이 의회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국왕으로 하여금 의회에서 제정된 법의 지배를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즉, '입법군주제'의 기초를 닦은 것이죠.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법률의 적용, 면제, 집행, 정지를 금지한다.

의회의 동의없는 과세, 평시의 상비군을 금지한다. 

선거의 자유, 의회의 발언의 자유, 국민 청원권을 보장한다. 

국민의 청원권, 의원의 면책 특권, 신체의 자유에 관한 규정을 준수한다. 

로마 가톨릭 교도는 왕위 계승자에서 배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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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 카르타 및 권리장전과 함께 인권선언의 선구적 역할을 한 '권리청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628년에 공표된 '권리청원' 원문


권리청원 공표의 배경


17세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로 시작된다. 스코틀랜드의 왕 제음스 6세가 잉글랜드 제임스 1세로 즉위한 것이다. 제임스 1세는 즉위와 동시에 종교문제와 당면한다.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여러 개혁안(예배의식의 단순화, 설교의 중시, 새로운 성경의 번역 등)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제임스 1세는 주교들과 청교도 대표자들을 함께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이때 주교들과 청교도 대표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오고갔고, 제임스 1세는 주교 편을 들어주며 논의가 끝난다. 청교도들은 실망과 불만을 가득 앉게 된다. 이런 실망과 불만은 가톨릭교도들에게도 있었다. 주교들이 가톨릭교도들에게도 불만을 드러냈고, 제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억압정책을 시행했던 것이다. 


제임스 1세(1566~1625)


더불어 제임스 1세는 잦은 전쟁, 무분별한 낭비와 사치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이에 제임스 1세는 의회의 동의도 없이 법률과 왕령을 제정하려 했고, 각종 세금과 강제 기부와 상납금을 남발하였다. 의회와 왕의 전면전이나 다름없는 분위기가 계속된 것이다.


1625년 제임스 1세에 이어 찰스 1세가 즉위한다. 그는 선왕에게서 물려받은 왕권신수설을 더욱 확고히 하여 의회와의 마찰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한편 제임스 1세 치하에서 권력을 휘둘렸던 버킹검 공은 찰스 1세 치하에서도 여전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전쟁에 패하면서 재정을 궁핍하게 하였는데, 이에 의회에서 제동을 걸으려 하였다. 하지만 찰스 1세의 보살핌으로 버킹검 공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전쟁을 계속하였고 계속해서 패하였다. 재정조달이 더더욱 어려워진 왕과 버킹검 공은 전보다 훨씬 무자비한 세금과 기부와 상납긍 등을 의회의 승인 없이 부과하고 남발하였다. 


권리청원 공표 경과


계속되는 찰스 1세와 버킹검 공의 전횡에 의회는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었다. 1628년 3월에 찰스 1세는 세 번째 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 하원의원 에드워드 쿠크는 보통법의 우월을 주장하며 국왕의 대권을 제한하는 권리청원을 작성해 국왕에게 제출했다. 궁핍한 제정을 해결해야 했던 찰스 1세는 여기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 1세(1600~1649)


권리청원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어떤 기부금, 차입금, 세금 등의 납부가 강제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자유인은 누구나 합당한 이유없이 구속할 수 없다. 

섯째, 병사를 민가에 주인의 동의 없이 숙박시킬 수 없다. 

넷째, 민간인에게 군법을 적용시킬 수 없다. 


이 청원은 1628년 6월 2일에 제시되었다. 


이에 대해 1628년 6월 7일 찰스 1세의 비답이 내려졌다. 


왕은 이 왕국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정의가 실행되기를 바라며, 제정법들이 제대로 집행됨으로써 왕의 신민들이 그들의 정당한 권리와 특권들에 반하여 어떤 부정이나 억압에 대한 불만을 호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 같은 권리와 특권의 유지에 대해서는 그의 대권(국왕 자신의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사하는 배타적 권한)의 유지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것과 같은 의무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찰스 1세는 1629년에 의회를 해산시키고 전제정치를 단행하였다. 이후 11년 동안이나 의회를 소집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청교도 혁명'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청교도 혁명'은 1642년~1651년에 잉글랜드 전역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권력 다툼이다. 그 결과 의회파가 승리하며 찰스 1세가 처형당했고, 찰스 2세는 추방당했으며, 의회파는 잉글랜드 연방을 건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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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주의의 발달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입니다. 13세기 초 영국에서 공표한 이 선언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215년에 공표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공표의 배경


십자군 전쟁 참여로 인해 국내에서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으면서도 영국 역사에 용맹하고 신앙심 깊은 왕으로 깊이 아로새겨진 리처드 1세(일명 '사자심왕')이 1199년 사망하자, 사실상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던 존(리처드 1세의 막내아우)이 왕위계승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몇몇 제후들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이에 반대하고, 리처드 1세의 어린 아들 아서를 선택했다. 이에 존은 재빠르게 행동해 왕으로 즉위했다. 


뒤이어 필리프 2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존 왕은 아서를 포함한 많은 영주들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 20여 명을 굶어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아서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져 그의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이때 필리프 2세가 대륙에 있는 잉글랜드의 영토를 수복했고 존 왕은 궁지에 몰렸다. 


한편 존 왕은 비교적 안정된 치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캔터베리의 수도사들이 은밀히 그들의 부원장을 선출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으려 하자, 존 왕이 반대하여 노리치 주교를 선출케 한 것이다. 이에 당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두 후보에 모두 반대하고 당대 유명 신학자 스티븐 랭턴을 대주교로 선출케 했다. 하지만 존 왕은 반대하고 랭턴의 잉글랜드 입국을 막았고, 교황은 잉글랜드 내에서의 성무금지(가톨릭교회에서의 성사 그림)를 명령하고 존 왕을 파문에 쳐했다. 또한 존 왕의 폐위를 선고하고 필리프 2세에게 집행하게 하였다. 결국 존 왕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굴복 이후 교황과 화해한 존 왕은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수복에 나섰다. 대륙 내의 여러 제후들과 연합하여 프랑스로 쳐들어 갔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 패배는 존 왕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안 그래도 선왕인 리처드 1세와 여러 면에서 비교당하던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다. 거기에 이미 존 왕은 가혹한 강제징수를 실시하고 있었다. 선왕들 시대에서도 많은 돈을 거두어들였지만 신민들의 저항이 별로 없었던 반면, 존 왕의 이미지는 너무나 좋지 않았던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공표의 경과


러니미드 목초지에서 영주들과 만나 서명하는 존 왕.



1213년 한 무리의 영주들이 헨리 1세의 즉위 헌장(영국인들의 자유를 최초로 인정)을 낭독하고, 1214년에는 존이 요구한 면역세 납부를 거부했으며, 1215년에는 무장을 하고 런던으로 향했다. 여기에 교회, 시민들이 합세했다. 결국 존 왕은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존 왕은 러니미드 목초지에서 영주들과 만나 1215년 6월 15일 '배런들의 요구조항'에 서명했으며, 영주들은 존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다. 이 문서는 7월 15일에 공식 문서로 작성되었다. 곧 '마그나 카르타'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사실 영주들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작성된 문서이다. 하지만 영주들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교회와 상인들의 원조가 필요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넣었던 것이다. 반면 당시 농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로 인해 왕의 권리는 축소되었고, 왕 또한 법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러니미드 목초지에 있는 마그나 카르타 메모리얼. 존 왕이 영주들과 만나 서명한 곳(마그나 카르타가 탄생한 곳)



그런데 이후 영주들 또한 방자하고 교만한 태도로 여러 분쟁을 일으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존 왕은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교황은 스티븐 랭턴에게 지시해 영주들을 파문시켰다. 그리고 또한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를 선언하기도 했다. 


한편 잉글랜드는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존 왕에게 반기를 든 영주들이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제의하면서 잉글랜드를 침공한 것이다. 존 왕은 이를 막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왕위에 오른 헨리 3세는 다시금 대헌장을 반포했고, 그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헌장확증'이라는 제정법의 일부로 확정했다. 


1800년도에 들어와 마그나 카르타 대부분이 폐기되었고, 지금까지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조항은 제1조, 제13조, 제39조 뿐이다. 다음은 마그나 카르타 제1조, 제13조, 제39조의 전문이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1조

첫째로, 잉글랜드 교회는 자유로우며, 온전한 여러 권리와 손상되지 않은 여러 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하느님 앞에서 승인하며, 이 헌장으로 나 자신과 나의 후계자들에게 영구히 이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대로 준수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나와 나의 배런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되기 전, 나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잉글랜드 교회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선거의 자유를 내가 허용하고 나의 헌장으로 확인한 사실, 그리고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이를 확인받은 사실로 보아 분명한 일이다. 나는 이를 준수할 것이며 나의 후계자들 역시 이를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하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나 자신과 나의 후계자들이 아래에 기재된 모든 특권들을 나의 왕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영구히 부여했으며, 이 특권들을 그들과 그들의 상속인들이 나와 나의 후계자들로부터 영구히 누리고 보유하도록 허용했다. 


제13조

또한 런던 시는 육로와 수로 양면에서 모든 옛날부터의 특권과 자유로운 관례를 누리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모든 다른 시, 버러, 읍과 항구들도 그들의 모든 특권과 자유로운 관례를 누릴 것을 바라며 또한 이를 허용한다. 


제39조

자유민은 그의 동배에 의한 합법적 판결 또는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투옥되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또는 그 밖의 어떤 방법으로도 해침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나 스스로 그를 처벌하거나 사람을 시켜 처벌토록 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한울 펴냄, 나종일 편역·해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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