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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인권 선언 문서

인권선언 문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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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민주주의의 발달과 관련하여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이 바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입니다. 13세기 초 영국에서 공표한 이 선언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1215년에 공표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공표의 배경


십자군 전쟁 참여로 인해 국내에서 제대로 된 왕 노릇을 하지 못했으면서도 영국 역사에 용맹하고 신앙심 깊은 왕으로 깊이 아로새겨진 리처드 1세(일명 '사자심왕')이 1199년 사망하자, 사실상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던 존(리처드 1세의 막내아우)이 왕위계승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몇몇 제후들과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이에 반대하고, 리처드 1세의 어린 아들 아서를 선택했다. 이에 존은 재빠르게 행동해 왕으로 즉위했다. 


뒤이어 필리프 2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존 왕은 아서를 포함한 많은 영주들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그 중에서 20여 명을 굶어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아서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져 그의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이때 필리프 2세가 대륙에 있는 잉글랜드의 영토를 수복했고 존 왕은 궁지에 몰렸다. 


한편 존 왕은 비교적 안정된 치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캔터베리의 수도사들이 은밀히 그들의 부원장을 선출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으려 하자, 존 왕이 반대하여 노리치 주교를 선출케 한 것이다. 이에 당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두 후보에 모두 반대하고 당대 유명 신학자 스티븐 랭턴을 대주교로 선출케 했다. 하지만 존 왕은 반대하고 랭턴의 잉글랜드 입국을 막았고, 교황은 잉글랜드 내에서의 성무금지(가톨릭교회에서의 성사 그림)를 명령하고 존 왕을 파문에 쳐했다. 또한 존 왕의 폐위를 선고하고 필리프 2세에게 집행하게 하였다. 결국 존 왕은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굴복 이후 교황과 화해한 존 왕은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 수복에 나섰다. 대륙 내의 여러 제후들과 연합하여 프랑스로 쳐들어 갔지만 패배하고 만다. 이 패배는 존 왕에게 큰 타격을 입힌다. 안 그래도 선왕인 리처드 1세와 여러 면에서 비교당하던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이었다. 거기에 이미 존 왕은 가혹한 강제징수를 실시하고 있었다. 선왕들 시대에서도 많은 돈을 거두어들였지만 신민들의 저항이 별로 없었던 반면, 존 왕의 이미지는 너무나 좋지 않았던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공표의 경과


러니미드 목초지에서 영주들과 만나 서명하는 존 왕.



1213년 한 무리의 영주들이 헨리 1세의 즉위 헌장(영국인들의 자유를 최초로 인정)을 낭독하고, 1214년에는 존이 요구한 면역세 납부를 거부했으며, 1215년에는 무장을 하고 런던으로 향했다. 여기에 교회, 시민들이 합세했다. 결국 존 왕은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존 왕은 러니미드 목초지에서 영주들과 만나 1215년 6월 15일 '배런들의 요구조항'에 서명했으며, 영주들은 존 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다. 이 문서는 7월 15일에 공식 문서로 작성되었다. 곧 '마그나 카르타'이다. 


'마그나 카르타'는 사실 영주들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작성된 문서이다. 하지만 영주들이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 교회와 상인들의 원조가 필요하였고, 그래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넣었던 것이다. 반면 당시 농노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로 인해 왕의 권리는 축소되었고, 왕 또한 법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러니미드 목초지에 있는 마그나 카르타 메모리얼. 존 왕이 영주들과 만나 서명한 곳(마그나 카르타가 탄생한 곳)



그런데 이후 영주들 또한 방자하고 교만한 태도로 여러 분쟁을 일으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존 왕은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고, 교황은 스티븐 랭턴에게 지시해 영주들을 파문시켰다. 그리고 또한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를 선언하기도 했다. 


한편 잉글랜드는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존 왕에게 반기를 든 영주들이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제의하면서 잉글랜드를 침공한 것이다. 존 왕은 이를 막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왕위에 오른 헨리 3세는 다시금 대헌장을 반포했고, 그 이후 에드워드 1세는 이를 '헌장확증'이라는 제정법의 일부로 확정했다. 


1800년도에 들어와 마그나 카르타 대부분이 폐기되었고, 지금까지 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조항은 제1조, 제13조, 제39조 뿐이다. 다음은 마그나 카르타 제1조, 제13조, 제39조의 전문이다.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1조

첫째로, 잉글랜드 교회는 자유로우며, 온전한 여러 권리와 손상되지 않은 여러 특권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하느님 앞에서 승인하며, 이 헌장으로 나 자신과 나의 후계자들에게 영구히 이를 확인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대로 준수되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나와 나의 배런들 사이에 다툼이 시작되기 전, 나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잉글랜드 교회에 가장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선거의 자유를 내가 허용하고 나의 헌장으로 확인한 사실, 그리고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이를 확인받은 사실로 보아 분명한 일이다. 나는 이를 준수할 것이며 나의 후계자들 역시 이를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하기를 바란다. 나는 또한 나 자신과 나의 후계자들이 아래에 기재된 모든 특권들을 나의 왕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영구히 부여했으며, 이 특권들을 그들과 그들의 상속인들이 나와 나의 후계자들로부터 영구히 누리고 보유하도록 허용했다. 


제13조

또한 런던 시는 육로와 수로 양면에서 모든 옛날부터의 특권과 자유로운 관례를 누리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모든 다른 시, 버러, 읍과 항구들도 그들의 모든 특권과 자유로운 관례를 누릴 것을 바라며 또한 이를 허용한다. 


제39조

자유민은 그의 동배에 의한 합법적 판결 또는 나라의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체포되거나 투옥되거나 재산을 빼앗기거나 법의 보호를 박탈당하거나 추방당하거나 또는 그 밖의 어떤 방법으로도 해침을 당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나 스스로 그를 처벌하거나 사람을 시켜 처벌토록 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한울 펴냄, 나종일 편역·해설)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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