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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다

조정래 작가의 쓴소리, 과연 합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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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우리 소설이 왜소화했다. 첨단 정보통신기기의 등장도 한 원인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객관적인 3인칭 소설을 쓸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보낸 소설을 10쪽 이상 읽기가 힘들다. 전부 ‘나’로 시작하는 1인칭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걸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소설 독자들은 계속 떨어져 나갈 것이다." 


ⓒ해냄 제공


지난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정글만리> 출판 기자간담회에서 조정래 작가가 후배 작가들에게 날린 일침이자 쓴소리였다. 요점은 "1인칭이 아닌 3인칭으로 소설을 써라"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7월 26일에는 YTN 라디오에 출현해 비슷한 논지의 말을 했다. "1인칭 시점으로된 소설에서는 주인공말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죽어버린다. 즉, 그 들러리가 되어버린다"는 논지였다. 3인칭으로야만 개개인이 모두 움직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며 유명하다고 하는 세계 문학전집 작품들 100편, 한국 문학전집 100편 전부 3인칭 소설이라고 말했다. 


황홀한 글감옥 ⓒ시사IN북

사실 조정래 작가의 "3인칭 소설론"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9월 말에 나온 자전에세이인 <황홀한 글감옥>(시사IN북)에 나오는 메시지인 것이다. 해당 도서 124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1인칭으로 서술되다 보니 다른 인물들은 '나를 통해서만 움직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인물들의 자율성이 없어지고, 능동성이 억압되고, 개성이 빈약해지고, 전형성이 결여되어 하나같이 그림자 같은 인물이나 죽은 인물이 되고 맙니다. 그리 되면 남는 것은 소설의 실패입니다."


조정래 작가의 "3인칭 소설론"은 그의 대표작인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해냄)을 통해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세 작품 모두 철저한 전지적 3인칭 소설로, 작가가 작품 속 세계의 조물주가 되어 모든 이들의 마음 속을 들락거린다. 작품 속 세계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모든 인물들에게 확실한 캐릭터성이 부여되고 진짜 살아있는 것마냥 생동감있는 인물로 연출된다. 


각각 수백만부씩 팔리며 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조정래 작가의 말이니 누구도 부인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헛점이 보인다. 세 작품 모두 호흡이 무지 긴 대하소설이자 장편소설이라는 점이다. 이 점을 간과한 듯 싶다. 대하장편소설의 프레임으로 후배 작가들의 중단편 소설을 바라본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대하소설은 사장되다시피 했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데 진득하니 긴 호흡의 소설을 읽을 만한 시간이나 능력도 없어졌다. 특히나 스마트폰과 태블릿 PC의 보급으로 볼 게 너무 많아졌다. 자연스레 작가들도 이에 발맞춰 짧은 사소설류를 많이 쓰게 된 것이고. 


더불어 너무나도 아픈 지금 이 시대를 어루만져 주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했다. 1980년대의 대적 공감이 아닌 지극히 사적인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3인칭보다는 1인칭이 훨씬 효과적이었으리라. 작가들이 능력이 없어 3인칭을 못 썼겠는가? 그건 절대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게을러서? 그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들도 시대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이건 잘잘못을 따질 개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조정래 작가의 말과는 달리 '무조건' 3인칭으로 써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후배 작가들에게 하는 당부정도만 그치던가 아니면 자신만의 지론을 피력하는 정도로만 그치던가 했어야 했는데, 이 둘을 합쳐서 자신의 지론을 설파하는 식으로 되어버린 점이 심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나의 조정래 소설에 대한 사랑(?)은 변함 없을 것이다. 20대가 되자마자 밤새도록 <태백산맥>을 읽었고, 몇 년 전에는 <허수아비춤>(문학의문학)을, 그리고 최근에는 <정글만리>를 읽었다. 정말 재밌더라. 캐릭터를 살아있고, 현실과 맞물린 세계관은 충실하고. 그래도 후배 작가들에게 보내는 3인칭 소설론 쓴소리는 합당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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