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지난 7월 4일부터 7일까지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 아내, 그리고 저 5명. 개인적으로 제주도를 많이 가보지 않았기에 그냥저냥 가는 휴가보다 더 설레고 들떴죠. 하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습니다. 다름 아닌 3일째에 잡혀 있는 한라산 등반 때문이었죠.
산을 타는 데 두려움은 전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높지 않으나마 산을 자주 다녔습니다. 한 번도 중간에서 퍼진 적은 없었죠. 그런데 결혼하고 수원의 처가 근처에 내려와 살게 된 후 언젠가 한번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광교산이라는 산에 함께 다녀온 후 산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이후 2년 정도는 산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산을 어마어마하게 잘 타는 체력 좋은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따라가겠다고 멋모르게 덤빈 탓이었죠. 채 해발 600m도 되지 않는 산을 정상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정상 근처까지 가서 그야말로 벌렁 누워버렸죠. 퍼진 것입니다. 퍼져 누운 채로 장인어른, 장모님, 아내가 정상을 다녀오는 걸 보고 있었습니다.
폭우 속 출발
ⓒ김형욱
이틀째인 7월 5일부터 제주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한라산으로 출발하는 다음날에도 비가 내렸고요. 새벽 5시부터 등반이 가능한데, 우린 5시 20분 경에 도착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3시 30분에 기상해 준비하고 4시 조금 넘어 출발했는데,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심한 도로를 뚫고 도착했더랬죠.
솔직히, 중간에서 포기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들한테도 그렇게 말했죠. 설상가상으로 비도 오는데 무리도 이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님과 어머님이 먼저 출발해 조금 뒤엔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더군요. 처남도 바짝 뒤를 따랐습니다. 비록 군대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속도면 퍼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조금 티격태격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내에게 빨리 따라잡자고 윽박을 지르고 만 것이죠. 아내는 그러다가 퍼질 게 분명하다고 했고 저는 바로 수긍하고는 우리의 페이스대로, 즉 아내의 페이스대로 길을 나섰습니다. 천천히, 부담 갖지 말고, 그렇지만 포기 하지 말고.
초반, 별 거 없는 길인데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아직 숨이 터지지 않았기로서니 이렇게 답답할리가 없었죠. 알고 보니 우비 때문이었습니다. 비는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지만 우비를 벗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린 우비를 벗고 조금 더 가뿐한 육체와 정신으로 중간 지점으로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관음사 탐방로
ⓒ김형욱
한라산 탐방로는 7개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중 어승생악과 석굴암 탐방로는 1km 남짓한 길이로 산책로 정도이고, 어리목과 영실과 돈내코 탐방로는 백록담을 가는 코스가 아니죠. 남은 게 성판악과 관음사 탐방로인데, 성판악은 가장 길지만 비교적 무난하고 관음사는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합니다. 하필 성판악 탐방로가 단기적으로 폐쇄되었기 때문에 우린 관음사 탐방로를 이용했습니다.
왕복 19.4km에 정상까지 가는 데만 평균 5시간이 소요된다고 알려진 관음사 탐방로. 아버님과 어머님은 왕복 6시간을 목표로, 우리는 왕복만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하산해서 점심을 먹는 코스라고 할까요. 얼핏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더군다나 아내의 페이스는 그리 빠르지 않은 것 같았거든요. 아니, 느려보였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산을 타는 게 두려워진 제가 일명 '헥헥'거리는 걸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남한 최고의 높이 한라산의 최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관음사 탐방로를 폭우 속에서 등반하면서 오직 코로만 숨을 쉬었습니다.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페이스 메이커'를 아시는지? 장거리 육상 경기에서 일정한 거리까지 선두를 이끌어 주는 역할을 맡은 선수를 말하죠. 이번 한라산 등반에서 제 아내가 그런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싶어요. 페이스 유지와 더불어 '함께' 하는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못 탈 산이 없죠.
백록담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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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관음사 탐방로 중간에는 삼각봉 대피소라 하여 쉼터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한 번 쉬면서 이것 저것 챙겨 먹고 체력을 보충했는데요. 급격히 추워지더군요. 우비를 다시 챙겨 입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등반에 방해만 할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이후부턴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 갔지만, 이미 반이나 왔다는 생각 하나로 버텼습니다.
한라산은 정녕 천해의 자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해발이 높아질수록 더욱 그러했죠. 동식물에 관심이 많고 일가견이 있는 아내의 말에 따르면, 평소에 종종 봐왔던 식물들의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상 근처에서는 어린 노루도 볼 수 있었습니다. 폭우에 안개까지 짙은 날씨의 한라산 정상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고 있는 노루라니,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결국 백록담 정상에 도착했지만 너무나도 심한 안개로 백록담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원래 백록담 위치도 잘 찾지 못했죠. 여하튼 시간은 9시 반이었습니다. 4시간 만에 올라온 것이죠. 아버님과 어머님은 한참 전에 내려가셨고, 정상에는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중간에서 내려오는 한 명을 추가로 보았으니, 아마도 우리가 7월 6일 1950m의 한라산 등반 6, 7번째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내려오는 건 수월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냥 내려오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습니다. 폭우. 폭우 때문에 발을 디디는 모든 게 미끄러웠고 길마다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올라갈 때보다 온몸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실어야 했죠. 그리고 나름 뛰어서 빨리 내려온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느렸습니다. 10km 육박하는 길이 얼마나 지루하던지요. 정말 힘든 한라산 하산길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정말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한라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과 폭우가 주는 물리적 압박만 해도 쉬이 헤쳐나가지 못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죠. 그 모든 걸 뚫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7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왕복하는 데 평균 10시간인 탐방로를 말이죠. 이제 가지 못할 산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건 한라산등정인증서가 증명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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