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올해로 30년이 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가지고 지난 2003년에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낸 <살인의 추억>.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낳은 최대 최고의 쾌거다. ⓒCJ엔터테인먼트



올해로 3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발생한 최초의 연쇄살인사건이자, 최악의 미제 사건. 일명 '화성 연쇄 살인 사건'. 1986년 9월 15일에 시작되어 10명의 여성이 피해를 입었다. 반경 5km 안에서 일어났음에도,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되었음에도, 결국 살인자를 잡을 수 없었다. 잡히지 않는 범인도 대단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경찰도 대단했다. 잡을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1990년대 중반에 3편의 단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한동안 연출을 이어나가지 않았던 봉준호 감독은,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에 데뷔한다. 비록 흥행엔 실패하지만 평단의 호평과 마니아층의 환호 속에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돌아온다.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그야말로 대대적인 흥행과 호평을 받으며, 봉준호 감독을 단번에 충무로의 총아로 발돋움시킨다. 


대사과 장면은 물론, 캐릭터까지 완벽한 영화로서, 한국만이 가지는 시대상에 그동안 한국 영화가 가지지 못했던 할리우드식 구도를 훌륭히 접목시켰다.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영화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영화 내적이니만큼, 전후 어디서도 찾아 보기 힘든 쾌거다. 


'왜' 그때 범인을 잡을 수 없었을까


영화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도대체 왜 범인을 못 잡는 것인가. 지금이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미제' 사건이니까... ⓒCJ엔터테인먼트



1986년 경기도 시골에서 강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오래지 않아 동일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진다. 두만(송강호 분)과 용구(김뢰하 분)는 토박이 형사로, 뛰어난 '감'과 끈질긴 '족치기'로 쉽게 범인을 잡으려 든다. 뒤늦게 서울에서 자진 합류한 태윤(김상경 분)은 거짓말 하지 않는 '서류'만 믿을 뿐이다. 


아무래도 처음엔 '감'에 의지하게 되는데, 도무지 '서류'에 맞지 않아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태윤을 무시한 채 현장검증을 했다가 범인이 부인해 전국적으로 망신살을 당하고 만다. 결국 반장이 파면당하고 서울에서 새로운 반장이 오기에 이른다. 그는 두만과 태윤의 감과 서류를 모두 이용해 또 다른 유력 용의자를 잡아 들였지만, 그마저도 상식적으로 범인이 아니다. 그렇게 사건은 한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영화는 한국 최악의 미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만큼 결말이 이미 나와 있는 거나 다름 없다. 결국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는 것. 그렇다면 도대체 '왜' 범인을 잡을 수 없었는가 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게 있다. 그때가 아닌 지금이라면 범인을 잡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그건 단순히 30년이라는 긴 세월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세월의 차이가 아닌 다른 차이,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이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


시골 형사, 도시 형사를 막론하고 그들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니만큼 그들은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이다. ⓒCJ엔터테인먼트



그건 시골이 가지는 후진성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두만'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할지도 모든다. 아니면 둘이 합쳐졌는지도. 그는 감에 의지해 곧잘 범인을 때려잡는다. 그런데 그에겐 좁디좁은 동네 돌아가는 사정을 꿰뚫는 여자가 하나 있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얘기를 귀담아들었다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과학에 입각한 수사'와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이게 과연 시골에만 해당하는 걸까.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만큼, 두만은 시골을 대표하는 게 아니라 나라를 대표하는 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연성 없는 서류 수사의 후진성일까. 이 또한 '태윤'이라는 한 개인이 가지는 특수성에 기인 또는 둘이 합쳐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서류에 의지해 범인을 잡으려 한다. 거기에는 사실만 있을 뿐이니까. 시험문제 답은 전부 교과서에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중학생한테 고등학교 시험 문제를 내주면 풀 수 없는 법, 태윤한테는 이 신출귀몰한 범인은 너무 어려운 시험 문제다. 교과서 밖에서 낸 응용문제다. 그는 두만이 잡아들인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는 걸 알 뿐이다. 두만과는 또 다른 종류의 '무능'. 나라를 대표하는 이들의 무능은 종류도 다양하다. 


이 판국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별의별 말 같지도 않은 추리를 진지하게 내뱉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 중에 절정은 무당. 두만과 용구는 무당한테 찾아가 범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아온다. 무당이 준 화선지에 먹물을 쓱 뿌리고 자연스럽게 내려 말리면 범인의 얼굴이 비춘다는 것. 얼마 전까지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이라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어련하시겠어요. 


영화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태로 천천히 흘러간다. 완벽한 짜임새다. 그들만의 세상 - 이물질 투여 - 대립 - 그들과 이물질의 실행 - 실패 - 결합 - 성공 징후 - 최종 동반대실패. 분명 이들에게도 성공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망치고,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정부가 도와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대가 그들을 버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 지금도 활개치고 있다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은 당시 '시대'에 있겠다. 그런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왜 여전히 이 사건은 미제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인가. ⓒCJ엔터테인먼트



때는 1986년, 전두환 시대의 절정이다. 비록 이듬해 민주화 운동의 거침 없고 매서운 불길에 움츠러들 테지만, 바로 그 전이기에 시대의 흐름에 저항하는 정권의 움직임은 매서웠을 것이다. 영화는 그런 모습들을 짧게나마 잡아내는데, 그 순간이 의미심장하다. 연쇄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에게 행하는 발길질을, 데모하는 여학생에게 똑같이 행하는 용구의 모습은 시대의 상징 그 자체이다. 


우린 그 순간의 모습으로 한 가지 사실이자 이 '미제' 사건의 근원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이 여성 강간 살인 사건을 수사할 저의가 없었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의 눈은 강간당해 죽은 여성에게 향해 있지 않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에게 있었다. 그들의 발은 자신을 위협하는 여성을 밟는 데 힘을 소진해, 강간당해 죽은 여성의 억울함을 밝히는 데 힘을 쏟을 여지가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지금도 그런 시대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 시대를 마음껏 욕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무능하고 악랄한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를 향유했던 이들을 욕하면서, 그 시대가 물려준 아픔과 상실과 치욕을 치유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 시대는 자칫 역사상 최악의 시대가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다고 해도, 분명 이 시대는 '무능의 시대'로 남게 될 거다. 


'살인의 추억'은 여러 모로 잔인했다.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서로 잘났다 못났다 싸우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화해한답시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동안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한다. 이보다 잔인한 게 있나. 에먼 사람을 잡아 족치는 것 자체가 희생자를 유발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을, 그런 추억은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억하고 되새기고 잊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왜 자꾸만 더 어처구니 없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벌어지고 마는 것일까. 어째서 잊지 않으려 하는 데에서 멈추고 바꾸려 하지 않는 것일까.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바뀌지 않는 것일까. 정녕 모든 걸 비우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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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트럼보>



영화 <트럼보> 포스터 ⓒ그린나래미디


진정 멋진 삶이란 무엇일까. 명예로운 직업에 돈 많은 부자까지 겸하고 있는 삶이나, 자신이 믿는 신념을 죽는 한이 있어도 부러뜨리지 않는 삶이 멋진 삶이라는 진부한 생각은 접어 두자. 단조롭기까지 하다. 최소한 이 둘을 합친 삶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적이 많을 것이기에 무엇 하나는 잃을 게 뻔 하다. 그럼에도 그런 삶을 산다면, 더욱이 많은 걸 가졌었고 많은 걸 잃었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정녕 위대하다고 하겠다. 역사상 수많은 위인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삶을 많이 보지 못했다. 대부분은 올바르지만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런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할리우드 최고의 고전으로 뽑히는 <로마의 휴일>의 각본가 '돌턴 트럼보'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제일 몸값 높은 작가로 부자였다가, 자신이 믿는 신념을 부러뜨리지 않아 힘든 삶을 살게 되지만, 흔들리지 않고 힘든 삶을 연명해가면서도 신념을 끌고 나가, 결국은 위대한 삶의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다. 


위대한 인물, 트럼보의 매력적인 인생 역전


영화 <트럼보>는 이런 그의 인생 역전을 아주 매력적으로 풀어냈다. 매력적인 실화와 인물과 스토리를, 영화가 더욱 매력적으로 풀어내어 '완벽하다'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트럼보 같은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쳐 오른다. 그 재능, 그 유머, 그 신념, 그 뚝심, 그 아량, 적어도 영화로는 그 어떤 단점도 찾을 수 없다. 


때는 1940년대 후반 미국, 냉전이 막 시작될 때다. 트럼보는 공산주의자로, 그를 위시한 영화계 종사자들은 모임을 결성해 스텝들의 파업을 지지한다. 감독과 작가와 주연배우 몇몇에 비해 터무니 없는 임금을 받는 영화계 종사자들이 지극히 합당한 요구를 해왔고 그에 지극히 합당한 지지를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곧 불어닥친 반미활동조사가 그의 인생을 바꾼다.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



1947년 미 의회 반미활동조사위원회로부터 소환을 받고 출두하는 트럼보. 그는 진보적 판사가 다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의 판결을 믿고, 출두하여 '공산주의적인 발언'을 한다. 그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다. '사상의 자유는 의회도 빼앗을 수 없다.' '네, 아니오로만 대답하는 사람은 바보나 노예일 뿐이다.' 하지만 진보적 판사가 사망하는 예기치 못한 일이 터지고, 아니나 다를까 트럼보를 위시한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할리우드 텐'은 감옥에 가게 된다. 


이 감옥행은 당연하게도 트럼보와 트럼보 가족 인생의 분기점이 된다. 그는 이제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그의 가족 괴로운 삶을 살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어떤 판단과 선택을 하게 될까. 더욱더 자신을 불사르며 공산주의자로서의 적의를 불태울까, 백기투항해 다시 예전처럼 부자로서 살게 될까. 그것도 아니면 실의에 빠져 술로 날을 지새울까. 


그의 선택은 다름 아닌 '가족'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며, 자신의 꿈만을 좆으며, 자신의 신념만을 우선시 하며, 가족을 온전히 부양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마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트럼보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대신, 자신을 버렸다. 그렇지만 자신을 버린 이상, 굽히지 않은 신념이 펴지지도 않았다. 


바로 가족들이 그에게 신념을 되찾아 준다. 오욕의 세월을 함께 견뎌내준 가족들이 말이다. 그가 자신을 버리고 모든 시간을 바쳐 부양하고자 했고 어찌 부양할 수 있었던 가족들이 말이다.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



악당도 영웅도 없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가족들이 그를 다시금 지지하고 믿음을 건넨 건 여러 가지로 읽힌다. 무엇보다 자신을 되찾았다는 점이다. 뒤를 든든히 받혀주는 가족이 있기에, 자신의 신념을 영화에 투영시키고도 두려울 게 없었다. 자신을 되찾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영화는 신념과 가족을 전면 배치하면서도 자신으로 하여금 항상 뒤를 받히게 하여, 무엇보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던지고 있다.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일념 하에 오직 일에 파묻혀 오히려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 가장을 받아들이고 가장 또한 가족을 위한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건, 가족 해체의 위기를 훌륭하게 해쳐나가는 일면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트럼보가 지향하는 바가 모든 이의 행복이라고 했을 때, 그 저반에는 가족이 있다. 


더 큰 의미로, 살인자, 배신자, 동조자, 피해자들 모두 '희생자'라는 한 그룹이라고 끌어안을 수 있을 때, 이들 간의 대승적인 결합이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다. 즉, 이들 모두를 같은 '희생자'이자 한 '가족'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럼보는 세월이 흘러 어느 수상식에서 이와 비슷한 논조의 연설을 한다. 


"악당도 영웅도 없어요. 희생자만이 있을 뿐이지요."



영화 <트럼보>의 한 장면 ⓒ그린나래미디



그 어느 때보다 어렵다고 하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절대 트럼보 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고난의 날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자신 없으니까. 다만, 그런 삶이 '올바르다'라는 건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건 꼭 말하고 싶다. 


나, 가족, 우리.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삶. 거기엔 트럼보의 말처럼 악당도 없고 영웅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말처럼 희생자만 있지도 않다.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 알기 위해 조금의 노력이라도 기울일 수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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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용서 받지 못한 자>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포스터. ⓒ 청어람



철없는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된 남자에게 "군대를 갔다 와야지 철도 들고 정신차리지"라는 말은, 마냥 듣기 싫은 말이기 보다 일종의 기대심리가 적용되는 말이다. 말인즉슨, 누구나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치면 세상이 원하는 진정한 남자가 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엔 필수적으로 '변화'가 뒤따른다. 과연 어떤 변화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 그 중심에 있는 남자들만의 위계질서. 군대를 가기 전의 '무질서'에서 군대를 다녀온 '질서'로의 변화가 이를 주도한다. 군대는 문신을 새기듯 질서를 몸에 체득시킨다. 이는 곧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남자가 되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그 길에는 수많은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이 존재한다.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라는 소재를 아주 미시적으로 접근해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남자로의 변화, 권력의 질서 안에서 변해가는 자들의 모습 등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너무나 공감이 되는 내용에, 몇 번이고 몸서리치며 보고 또 봤던 기억이 난다. 필자 또한 '용서받지 못한 자' 중의 한 사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또 한 번 몸서리가 처진다. 한 점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용서 받지 못한 자들


영화는 두 파트로 나뉘어 진행된다. 승영이 자대 배치를 받고 난 후 군대에서의 이야기와, 승영이 상병 휴가를 나와 태성과 만나는 이야기. 먼저 군대에서의 이야기부터 풀어본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그리고 등장인물들 또한 간단하다. 제목처럼 전부 '용서 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 중에 누가 봐도 용서 못할 인물이 있다. 


말년 병장 '수동'(임현성 분). 그는 내무실 최고참으로 최 정점의 위치에서 권력을 마구 휘두른다. 후임의 팬티를 훔쳐 입고, 후임의 편지를 훔쳐 읽으며, 성추행까지 행하는 등의 각종 부조리한 짓거리를 일삼는다. 그가 하는 말은 대체적으로 이렇다. "고참이 하자면 하는 거지." "야, 나도 옛날에 그렇게 당하면서 지냈어." 그렇다.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 되물림 하는데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군대가 낳은 용서 받지 못한 자이다. 그러면서도 제일 큰 희생자이기도 하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일방적 가해자와 희생자로 비춰지는 수동과 승영. ⓒ 청어람



그런 그와 거의 동년배인 분대장이자 병장 유태성(하정우 분)이 있다. 그는 스스로 군대 생활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즉, 뒤 끝없이 조이고 풀어주는 역할을 잘했다는 말이다. 수동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적당히 풀어줄 줄 아는 그는 사실, 수동보다도 더 용서 받지 못한 자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그의 신참 부사수이자 중학교 동창이기도 한 이승영(서장원 분)과의 애매모호한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태성은 중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승영과 허물없이 지내려 한다. 그래서 부조리한 군대 생활에 쉬이 적응하지 못하는 승영을 언제나 감싸주려 한다. 하지만 결국은 이와 같은 행동이 군대라는 곳에서 승영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승영은 부조리한 군대 권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참을 수 없어 몇 번이고 선임과 다툼을 하고 그럴수록 미움만 받는다. 그런 사이에 승영의 부사수인 허지훈(윤종빈 분)이 들어온다. 지훈은 일명 고문관으로, 지지 리도 어리바리한 인물이다. 승영은 그런 모습을 착하다고 생각하며 한없이 잘해준다. 이윽고 얼마 후 태성이 전역을 하고 그들에게 시련이 닥친다. 여기저기에서 후임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승영을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이에 승영은 결국 돌아서고 만다. 그 누구보다도 부조리한 권력을 반대했던 그마저도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훈을 버리고 권력에 한 가운데로 들어가는 승영. 갈 곳 없는 지훈은 자살을 택한다. 어리바리하게 군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지훈을 욕할 것인가, '전향'에 가까운 변화를 택한 승영을 욕할 것인가. 진정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누구인가.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일방적 희생자였던 승영은 어느샌가 가해자가 되어 있다. ⓒ 청어람



진정 용서 받지 못할 자는 누구인가


영화의 다른 파트를 들여다보자. 승영은 상병 휴가를 나와서 태성을 만나려 한다. 그런데 태성은 좀처럼 만나주려 하지 않는다. '민간인'에게는 '군인'이 별거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그들에게 쓸 시간이 아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태성을 만난 승영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지훈에 대해 상의하려 한다. 물론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승영. 이에 태성은 '군인은 다 힘들어'라는 말을 전달하며 더 이상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군대에서의 일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힘들기 때문에 그냥 버티라는 말 밖에는 해줄 말이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며 애초에 차단을 해버리니, 승영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태성한테 말해봐야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겠는가. 그는 어설픈 자기 학대를 시도하고, 태성에게 매달려 울어도 본다. 하지만 남는 건 생채기와 '괜찮아'라는 태성의 영혼 없는 위로 뿐. 


이 타이밍에서 영화가 말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승영이다. 그는 신병 때부터 고수해온 권력에의 반(反)함과 '후임이 왕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반대로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 때문에 지훈은 자살을 선택하고 만 것이다.(사실 지훈은 여자친구와의 헤어짐으로 인한 충격으로 승영과 다른 선임에게 무례한 행동을 했고, 이를 본 승영은 폭발해 지훈을 심하게 나무랐고 지훈은 자살을 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휴가를 나온 승영이 자살을 택하고 만 것이 아닌가. 이는 누구 때문일까. 자신의 선택으로 빚어진 일로 인해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택했으니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걸까? 꼭 그렇지 만은 않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태성이 조금이라도 승영의 말을 들어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렇다면 태성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인가? 몇 번이고 돌려봐도 진짜 '용서 받지 못한 자'를 찾기란 가히 쉽지 않다.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멱살잡기는 가해자와 희생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 청어람



혹시 나는 용서 받지 못한 자가 아니었나?


테이프를 앞으로 감아본다. 다시 처음부터. 용서할 수 없는 또는 자신도 모르게 용서 받을 수 없는 자가 된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보인다. 태성은 승영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승영은 결정적일 때 지훈을 질책하며 그를 저버렸다. 지훈 역시 시간이 가도 군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동을 비롯한 승영과 지훈의 선임들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군대에 만연한 권력 구조에 완벽히 적응한 모습을 보이며 후임들을 몰아세웠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모두 군인이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용서 받지 못한 자'는 군대란 말인가. 몇 번이고 영화를 돌려봐서 얻은 결론이다. 군대로 상징 되는 이 시대의 거대한 틀, 구조.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 희생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서 받지 못한다. 가해자이기 때문에. 


생각해본다. 나는 군대에서, 사회에서 희생자인가. 가해자인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희생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사슬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처음 볼 때는 코믹하고 일상적인 군대 이야기로 보이다가, 보면 볼수록 섬뜩하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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