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쇼콜라>


광대극에 혁명을 가져온, 역사상 유명한 두 광대의 실화를 다룬 영화 <쇼콜라> ⓒ판씨네마



19세기 말 프랑스, 한때 잘나갔던 광대 푸티트는 여지 없이 퇴물 취급을 받으며 서커스단 합류를 성공시키지 못한다. 단장은 그에게 20세기 관객들이 원하는 새로운 무대를 원한다. 푸티트는 구상에 들어가고, 식인종 연기를 하는 흑인 광대 카낭가를 눈여겨 본다. 설득 끝에 콤비를 이룬 푸티트와 카낭가, 단번에 상종가를 올리며 지방의 소규모 서커스단을 인기 서커스단으로 탈바꿈 시킨다. 


최초의 백인과 흑인 조합 콤비, 단장은 카낭가의 이름을 쇼콜라로 바꾼다. 그렇게 광대극의 일대 혁명을 가져온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탄생한 것이다. 그 인기가 수도 파리까지 퍼진듯,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파리의 누보 서커스단이 그들을 스카웃한다. 파리 진출도 단번에 성공시키는 그들, 하지만 오직 '광대'라는 것 하나만을 목적으로 매진하는 푸티트와는 달리 쇼콜라는 치솟는 인기로 여자와 도박과 사치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인기는 시들지 않는다. 


영화 <쇼콜라>는 영화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의 <푸티트와 쇼콜라의 시소의자> 실제 주인공 인생 역전을 그린다. '영화'라는 장르의 시작을 함께 할 정도이니 그 엄청난 인기와 명성이 짐작가는 바, 영화는 특히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누리고자 했던 쇼콜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의 인생은 다사다난했고 다층적이었으며 다변적이었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다.


'광대' 쇼콜라, 그리고 '흑인' 쇼콜라


푸티트는 '광대'이고 싶었고, 쇼콜라는 '연예인'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흑인'이었으니... ⓒ판씨네마



영화의 시작은 쇼콜라가 아닌 푸티트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오디션에 임하는 푸티트, 한물 간 스타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하는 패기어린 애송이 같은 이미지다. 영화는 푸티트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푸티트는 영화에서 '백인'이라는 점을 제외하곤 사실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제 푸티트 부활 프로젝트의 파트너, 쇼콜라가 나올 차례. 곧 그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을 것 같다. 영화는 푸티트가 아닌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만 같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콤비는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의 연결고리 정도일 뿐이다. 


인기와 명성을 얻을 대로 얻은 쇼콜라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어차피 모든 무대 기획은 푸티트의 몫, 쇼콜라는 그가 하라는 대로 할 뿐이다. 일은 하되, 밖으로 싸도는 쇼콜라. 영화는 푸티트 또는 푸티트와 쇼콜라 콤비가 아니라 쇼콜라의 인생 역전을 그릴 것 같다. 그렇다. '흑인' 쇼콜라와 '광대' 쇼콜라. 


이 콤비 무대의 백미는 '백인' 푸티트가 '흑인' 쇼콜라의 엉덩이를 걷어 차는 것. 이 콤비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포인트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행사 관계자들이나 푸티트와 쇼콜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분증이 없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과 압력을 받고 돌아와 깨달음을 얻은 쇼콜라는 그 행위가 더 이상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대'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광대 이전에 '흑인'으로 자신을 취급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혀 다른 존재 말살의 층위


연예인에서 시작해 광대로 나아가고 자 했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진정한 광대가 되지 못한 쇼콜라. 다른 길을 택한다. ⓒ판씨네마



당시 광대라고 하면, 지금의 연예인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대중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면에서 푸티트는 진정한 광대다. 반면, 쇼콜라는 광대라기보다 광대병에 걸린, 지금으로 말하면 연예인병에 걸린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단한 콤비의 한 축이지만, 푸티트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진 좋다. '광대'라는 층위로 평등하게 다룰 수 있으니. 


하지만 푸티트보다 대외적으로 더 알려진 존재 쇼콜라가 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단순히 더 인기가 많고 더 알려지는 것이면 하등 문제될 게 없지만, 쇼콜라가 흑인이라는 점을 이용해 그를 인간 이하의 원숭이로 표현해 비하를 이용한 코미디를 양산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완전히 다른 층위로의 이동이다. 


누보 서커스단장은 이 완전히 다른 두 층위를 하나로 슬며시 묶어버린다. 시궁창에 있던 너를 건져내 이 자리에 있게 해준 게 어디냐며, 광대라면 자신을 잊고 대중을 위해서만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아닌 누군가의 소유물이었다. 쇼콜라는 '광대'라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고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는 존재 말살의 층위를, '흑인'이라는 절대 납득할 수 없고 당연히 잘 해낼 수 없는 존재 말살의 층위와 일치화해야 하는 숙제를 떠맡게 된 것이다. 


당대 세계 최고의 평등 국가 프랑스조차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흑인은 인간이 아닌 소유물'. 푸티트가 그와 함께 한 건 광대로서의 쓰임새를 본 것이지만 그 안에도 그런 시각은 있었다. 더욱이 누보 서커스단장이 그를 가져다 쓴 건 다분히 '흑인 광대'로서의 쓰음새를 본 것이겠다. 이 뿌리 깊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틀에 반기를 들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봐야 할 건 쇼콜라의 '반기'인 것이다. 


혁명을 향한 위대한 한 걸음


광대를 넘어, 흑인을 넘어, 자신이고 싶었던 쇼콜라. 하지만 그 비극적인 끝이 예견되어 있는 것 같다. ⓒ판씨네마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층위를 걷어내고 쇼콜라에게 집중해야 할 건, 그의 달라진 생각 이후 행동으로 옮기는 직접적 '반기'다. 아니 '혁명'에 가깝다고 할까. 그 장면은 굉장한 충격과 함께 사이다 같은 속시원함을 선사하는데, 그 어떤 폭력·비폭력 혁명 또는 반기보다 매력적이다. 방법으로 보면 문학적이라고 할까 급수로 보면 고급지다고 할까. 


그의 마지막은 어느 정도 예견이 된다. 당대 흑인이 그 정도의 인기와 명성을 얻었을 때 어떻게 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 자리는 흑인의 자리가 아니고, 그 인기와 명성은 흑인의 것이 아니다. 아니, 흑인의 것이 되면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혁명의 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보여줄 뿐이다. 


혁명이란 수많은 실패와 희생 위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걸 알 것이다.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혁명의 빛이 조금이나마 비출 것이다. 쇼콜라는 그 작은 생각과 작은 움직임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잊혔고 지금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잊히고 모르는 사람이었을까?


영화는 그의 '위대한' 한 걸음 한 걸음을 가벼운 와중에 진중하게 스크린에 옮겨 놓았다. 그의 주위에는 흑인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혁명의 모습을 보일 순 없었거니와 함께 하는 누구도 없었다. 혼자였다. 혼자였기에 완전한 한계에 직면하고 끝없는 방황을 했지만, 나아갔다. 당연한 걸 뒤로 하고 홀로 나아간다는 것, 100년이 지난 지금은 얼마나 나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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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서평 쓰는 법>


<서평 쓰는 법> 표지 ⓒ유유


서평이랍시고 책 읽고 글 쓴지 4년이 넘었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지라, '내가 만든 책 내가 홍보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체계적으로 제대로 방법을 배우지 않은 채 엉겹결에 시작한 서평, 그 수가 족히 4백 편 가까이 된다. 이젠 매너리즘의 시기를 지나, 퇴행의 시기가 온 것 같다. 슬슬 힘에 부치는 게 아닐까. 


다른 분들의 서평을 두루 살펴왔다. 각기 다른 스타일, 거기에 정답은 없었다. 나에게 맞은 옷을 찾기란 힘들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 라며 내 식대로 밀어 붙였다. 쓰면 쓸수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잘 쓰고 있는 게 맞는지, 한 번쯤 제대로 된 방법을 연구해봐야 하는 게 아닌지 자문했다. 그렇지만 나름 베테랑(?)이라 자부하는 바, 다른 누구의 지도편달을 받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계속 뒷걸음칠 치는 것 같은 느낌이 한없이 들었다. 그동안 '황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으로 우연에 우연이 겹쳤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판단했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책 읽기와 서평 쓰기의 방법론을 이번에는 집고 넘어가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이원석 작가의 <서평 쓰는 법>(유유)을 들었다. 


서평은 무엇이고, 서평을 왜 쓰는가


이 책에서 어떤 빛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제목처럼 '서평 쓰는 방법' 즉, 기술을 얻고자 한 것도 아니다. '진짜' 서평가는 서평을 어떻게 쓰는지 한 번쯤 들여다보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내 서평을 진단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 서평은 형편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저자에 따르면 애초에 내 서평은 서평보다 독후감에 가깝다. 매우 정서적이고 내향적이며 일방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초장부터 자괴감을 들게 만드는 저자의 단호함이 짧디짧은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기 어렵게 만들었다. 차근차근 일게 되었다. 본질을 건드리니 머리와 가슴이 모두 반응하는 게 아닌가. 그럼에도 바뀌지 않는 건 서평보다 독후감 쪽에 가깝다고 진단한 나의 서평들이다. 


서평이 무엇인지만큼 중요한,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서평을 왜 써야하는지일 것이다. 저자 또한 동의하는 분위기인데, '자아 성찰'과 '삶을 통한 해석이자 실천'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진부하지만 지극히 올바른 논의를 끄집어 낸다. 매우 공감하는 바다. 서평을 쓰고자 마음 먹었을 때 목적을 정했는데, '책으로 세상을 바꾸자'는 거창하기 이를 데 없는 모토였다. 저자한테 칭찬 좀 들을 것 같다. 


저자는 독후감과 서평 구분에 책 소개와 서평을 엄격히 구분하고자 하는데, 역시 한 발 빼고 다시 최후 변론을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독후감과 서평이 궁극적으로 서로 통하는 것처럼, 책 소개와 서평도 서로 통한다는 것. 제대로 된 서평이 되려면 논리에 입각한 서평가의 목소리가 존재해야 하겠다. 서평쓰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이었나, 싶다. 난 단지, 세상을 바꾸겠다는 큰 목적 하에 독자에게 좋은 책과 나쁜 책을 소개해주면 왜 그 책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 말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 초심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 초심으로 돌아간 나를 보여주고 싶다. 


서평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이 책은 지금의 나에게 딱 알맞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줍잖게나마도 서평의 목적과 방향을 설정해두고 꾸준히 상당량의 서평을 써왔지만, 제대로 체계를 세우진 않은 사람에게 말이다. 반면, 제목만 믿고 초보자가 덤벼들었다간 시작도 못한 채 끝맺음을 할 수도 있겠다. 실용적 기술보다 본질적 기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초보자는 이 책을 읽을 바에 차라리 좋은 서평을 찾아 읽고 그 구성을 따라해보는 게 좋을지 모른다.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에서도 여전히 실용보단 본질에 가까운 설을 풀어내고 있는 저자는, 깊고 다양한 책 읽기와 양가적 태도 장착을 전제로 요약과 평가라는 핵심을 가장 길게 펼쳐놓는다. 그러곤 10개도 채 되지 않는 '서평의 방법'을 짧게 설명하고 있으니, 누군가는 '낚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반면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는 걸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특히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자리하고 있는 '평가'는, 저자가 몇 번이고 언급하고 강조하는 '서평'의 '평'에 해당하는 바로, 핵심 중의 핵심이다. 다른 건 건너 뛰고 이 부분만 잘 살펴도 이 책에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거니와 더불어 저자와 내공까지 짐작할 수 있다. 


서평의 핵심인 평가, 평가의 핵심은 맥락화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맥락화를 잘 해왔는가? 그렇지 못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책 한 권 읽고 그 책에 대한 요약과 평가를 하는 데도 벅찼으니까. 일전에 아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저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데, 내 서평에 없는 게 있다면 다름 아닌 맥락화라고 말이다. 맥락화가 기본이 되는 (석사)논문을 기똥차게 잘 쓴 아내가 한 말이었으니 맞는 말일 텐데 애써 무시하고 지금까지 왔다. 지금에라도 나는 제대로 된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책 읽는 모두가 서평을 쓰자


'책으로 세상을 바꾸자'라는 모토는 아직 변함 없고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서평으로 세상을 바꾸자'일 텐데, 그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책도 읽지 않는데, 서평은 무슨 서평... 물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의 서평 쓰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했고, 이제 막 글도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아마 혼자서는 아무리 수천 편의 좋은 서평을 써도 세상을 바꾸진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라면 어떨까? 우리 모두 좋은 서평을 쓰고자 한다면? 그래, 좋다. 한 발 물러나 우리 모두 서평을 쓰고자 한다면 어떨까? 저자도 말했듯이, 저자와 독자 사이의 위계가 사라지고 대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는 분명 '사회를 번혁하고 세상을 바꾸는' 혁명에 다름 아니다. 


내가 꿈꾸는 게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그려왔던 '바뀐 세상'의 모습 말이다. 내가 이 얇지만 강한 책에서 발견한 가장 빛나는 생각은 서평이 무엇인지, 서평을 왜 써야 하는지, 서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아닌 '서평이 가야할 길'이다. 이 책은 나에게 '모두가 서평을 쓰는 그 날까지 난 서평을 쓰겠다'는 일념을 새롭게 심어준 것이다. 정녕 열심히 쓸 것을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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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살바도르 아옌데>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서해문집



20세기 초중반, 세계는 요동쳤다. 어느 나라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을 전성기를 누렸고, 어느 나라는 역사적으로 다시 없을 악화일로를 걸었다. 누군가는 차후 100년을 이어질 권력과 부를 손에 쥐었고, 누군가는 차후 100년은 더 이어질 가난과 설움을 견뎌내야 했다.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 격차가 심했다. 그 중심엔 오랜 시간 계속된 외세의 침략과 그에 따른 혼란과 부침이 있었다. 


체 게바라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의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가 이룩한 혁명과 이른 죽음은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쿠바가 아닌 아르헨티나 출신의 중산층 출신으로 장차 의사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다. 평범한 그가 여행을 하며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참혹한 가난과 고통을 직시하고, 쿠바의 반정부 혁명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혁명에 성공한 후 다른 나라의 혁명에 참가, 결국 전사하고 만다. 그는 혁명가였다. 


여기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인이 한 명 있다. 그는 칠레 명망가 출신으로 장차 의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어 겨우 들어간 병원 주검 안치소에서 노동자들의 참혹한 민낯을 목격한다. 이후 군대, 감옥에서 경험한 것도 다를 바 없었다. 어딜 가든 노동자들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을 위해 사회주의의 길로 간다. 제32대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다.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서해문집)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해 최초로 소개하는 전기다.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한 모든 것


체 게바라를 말할 때 쿠바혁명과 죽음을 말하는 것처럼, 아옌데를 말할 때 반드시 말하는 것이 있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다는 점과 죽음이다. 그는 당연한 수순처럼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의 쿠데타로 대통령 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2008년 세계를 강타한 금융 위기로 자본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좌파 돌풍이 불고 있는 이 시대에, 아옌데가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라 생각한다. 


1930년대 미국은 볼셰비즘을 막는다는 명분 하에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군부 독재를 지원한다. 그 와중에 1937년 아옌데는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 인생을 시작한다. 그의 나이 불과 30세였다. 15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51년 아옌데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연대조직인 '인민전선'의 대선 후보로 첫 대선을 치른다. 결과는 5.6%, 참담한 실패에 가까운 수치였지만 그는 전국구가 되었다. 


이후 아옌데는 1954년에 상원 부의장에 당선되고, 1958년과 1964년에는 사회당과 공산당 등의 좌파 연합 연대조직인 '인민연합전선'을 대표해 대선주자로 나선다. 결과는 모두 실패였다. 더구나 1959년에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전 세계를 강타한 '쿠바혁명'으로 사회주의는 더할 수 없는 호황이었다. 하지만 그건 미국이라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결과를 나았고,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과 압력은 수위가 전에 없이 높아졌다. 칠레도 예외는 아니었다. 


책은 아옌데를 상당히 주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고 있지만, 옹호하는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아니, 그동안에는 아옌데의 생에 대해 제대로 된 책이 나온 적이 없으니 오히려 객관적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후에 나올 거라 기대되는 아옌데에 대한 책의 시선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아옌데는 4수 끝에 결국 대통령이 된다.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를 만한 사건이었다. 사회당과 공산당, 급진당, 독립진보연합, 그리고 당시 여당이었던 기독민주당의 탈당파까지 모인 '인민연합'을 대표한 것이었다. 완벽한 승리라고 보기 힘들었거니와,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수없는 압력을 이겨내고 '칠레식 사회주의'를 앞세워 수많은 개혁을 추진해나간다. 그리고 역사적인 '구리 산업 국유화'를 일궈낸다. 지금까지도 칠레를 먹여 살리는 주요한 구리 산업 국유화이다. 이는 곧 그의 죽음과 다름 아니었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의 그 유명한 피노체트 장군에 의해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그는 죽음을 맏이한다. 이후 피노체트에 의한 독재가 20년 가까이 지속된다. 


분명 성공했지만 처참히 실패도 했던 아옌데가 남긴 것은?


그는 절대적으로 폭력을 배재한 혁명을 원했다. 폭력으로 이뤄낸 정권은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전의 사회주의 정권과 공산주의자들의 분열로 무너진 모습에서 처절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폭력은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폭력을 배재한 채 선거로 혁명을 이뤄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폭력 없이 이끌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폭력이 들끓는 라틴 아메리카 한복판에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그의 패착이었을까? 그의 뒤를 이은 이가 최악의 피의 통치를 했으니.


또한 그는 비폭력의 연장선상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은 통합을 원했다. 그래서 우파 정당의 협조를 원했고 내부의 반대를 무릎쓰고 끊임없이 협상했다. 문제는 오히려 내부에서 터졌는데, 우파 정당과의 연대가 거의 성공했음에도 내부의 반대로 무산되자 우파 정당의 좌익 세력이 떨어져 아옌데 쪽으로 왔고 그들의 목소리가 높아져 우파 정당과의 협력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후 결국 우파 정당의 우익 목소리가 커졌고 의회 내에서의 세력 또한 커지며 좌파와의 균열이 확실해졌다. 결국 아옌데의 시도가 균열을 더 부추긴 꼴이 된 것일까? 


이처럼 아옌데의 이상적이리만치 온건적인 노선은 빛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럼에도 그를 칠레 역사상 최고의 위인으로 뽑고, 지금에 와서 또다시 주목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인생 역전, 곧 칠레의 현대사는 우리 나라 현대사와 많은 부분 겹친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대부분의 부를 소유하고 있고, 군부 쿠데타로 민주 정권이 무너진 경험이 있다. 또한 아옌데를 '좌파 악마'로 만드는 등 평생 괴롭혔던 보수 언론의 극악무도한 행태도 존재한다. 지금은? 지금도 물론 이 모든 게 존재하고 계속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될 거라 생각한다. 


그는 분명 성공했지만 처참히 실패했다. 이상을 실현했지만 그 뒤에 따라온 건 더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상을 실현하지도 못하고 더 없는 고통만 받은 것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를 성공과 실패로 재단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다만 우리는 그에게서 분명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고 얻어야 한다. 


그의 이상을 실현시킨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혁명' 말이다. 시작도 하지 못한 혁명의 뒷 이야기를 논하고 걱정하며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하기 전에 시작부터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아옌데가 전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들어야 한다. 그의 삶 자체가 메시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를 반면교사 삼아 평화적인 혁명과 그 후의 민주주의의 지속을 논해야 하겠다. 


한 사람의 인생은 곧 한 나라, 그 역사를 대변하기도 한다. 아옌데도 그 대표적 예라 하겠다. 하지만 그 (비)극적이고 미스터리한 죽음으로 삶은 많이 가려져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어느 정도나마 장막을 거두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걸 배제한 채 한 인물의 일생을 올곶이 들여다보는 건 참 지난한 일인데, 그걸 간결하고 시원시원하게 해준 것 같다. 이 책은 매력적이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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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 표지 ⓒ카멜북스


어릴 때, 그러니까 20년 전에는 전자 제품을 살 때 삼성이니 LG니 한국 브랜드를 애용했다. 내가 아닌 부모님이 애용한 것이나,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게 뻔하다. 아는 게 그것 뿐이고 보이는 게 그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10여 년 전부터 바뀌었다. 적어도 난 애플을 애용하게 되었다. 비록 상당한 고가이고 폐쇄적이고 이용하기도 불편하지만 괜찮았다. 스마트폰이니 MP3니 소형 가전제품을 애플로 도배했다. 


그렇게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은? 중국 브랜드로 조금씩 이양 중이다. 샤오미 미밴드와 보조배터리를 사용하고, 알리바바의 타오바오로 중국 제품을 직구한다. 동영상 사이트 소후 또는 요우투도우를 이용해 영화, 드라마, 예능을 시청한다. 텐센트의 QQ나 시나의 웨이보, 바이두 검색을 최소 한 번씩은 이용해봤다. 나도 모르게 나는 중국 브랜드를 섬렵하고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줄은 몰랐다. 


요즘 나와 거의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는 샤오미의 미밴드는 샤오미의 3대 상품 중 하나다. 다른 두 개는 스마트폰과 보조배터리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만만치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좋은 성능을 뽐내는 샤오미의 제품들은 오랜 애플 팬인 나조차 굴복시켰다. 초창기엔 '대륙의 실수'로 불리며 애플을 완벽히 모방하는 것에 그쳤지만, 이제는 '대륙의 실력'으로 불리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세계적인 브랜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4대 천왕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12개 기업들


그런 샤오미와 더불어 중국 4대 천왕이라고 불리는 기업이 있는데,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그리고 샤오미이다. 물론 나는 이들 브랜드를 모두 접해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 텐센트의 QQ와 위쳇, 바이두의 바이두, 샤오미의 제품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을 움직이는 거인들과의 대화>(카멜북스)에서 이들 4대 천왕과 함께 12개의 중국을 대표하는 기업들을 간략하게나마 접할 수 있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 그중에서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IT 기업들 이야기는 그들 기업들을 세운 이들과 함께 널리 알려져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구글의 에릭 슈미트 등. 이들은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나 거의 같은 시기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195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1970~80년에 사업을 시작했다. 이런 사례는 우리나라에도 있다. 지금 한국을 호령하는 IT 기업들인 넥슨, 다음, 엔씨소프트, 네이버는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에 생겼다. 이들 기업을 창업한 이들이 공교롭게도 86학번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비슷하다.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이들이 2000년대를 거치며 성장해 2010년대에 이르러 중국을 등에 업고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을 넘어 중국으로 흘러가는 분위기이다. 양(量)으로는 이미 세계 최고 반열에 올라 있는 중국이 질(質)까지 넘보고 있으니, 질로만 승부를 거는 다른 나라 기업들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현상은 지극히 환영한다. 그동안 질적으로만 승부를 걸어 왔던 기업들의 행태는 참으로 볼 만했다. 혁명과도 같은 변화 속에서 선구자격인 그들의 제품을 고객들은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가격 면에서 고객은 호구로 전락했다. 고객이 주인이 아니고 기업이 주인이었던 것이다. 따져보면 애플의 폐쇄적 디바이스 체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고객이 기업에게 맞추는 게 아닌가. 


그런 와중에 중국 기업들이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무기로 들고 나왔다. 제일 큰 게 가성비라고 할 수 있겠는데, 초창기에는 질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해 그런 전략을 들고 나왔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중국' 그 자체다. 세계의 1/5에 달하는 인구를 대상으로 축척한 자본과 역량 말이다. 이건 중국 기업의 힘이 아닌 중국의 힘이다. 


비로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부를 보는 '중국' 기업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다름아닌 '중국'이다. 한국, 일본, 미국의 기업과 기업인들의 신화와 큰 차이점을 보이는 점이 바로 '중국'인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들을 '중국'의 기업이 아닌 중국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들이 과연 중국을 등에 업지 않고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해왔음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또 이런 류의 책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이제야 막 소개되고 알려지는 건, 그들이 비로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승부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즉 오래지 않아 그동안 승승장구해온 그들 중 몇몇은 사라질 거라는 것, 반면 몇몇은 비로소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기업으로 우뚝 솟을 거라는 말이 된다. 지금이 그 분기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기존의 기업들과 '중국' 기업들의 대전이 발발하고 있는 한중간에 말이다. 


소위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 이야기는 재밌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그 시대를 조망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나날이 변하는 것들을 체험하는 건 재밌고 흥미롭다. 그런 면에서 난 행운아이지 않을까. 혁명과도 같은 변화를 체험하고, 그 체험을 인지하고, 미래를 예측하고 기대하고. 계속 같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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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표지 ⓒ문학동네


혁명. 대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피 튀기는 투쟁 끝에 독재자를 끌어내린다. 자연스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독재 정권 아래서 힘들게 살아왔던 이들이 활짝 기지개를 편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꿈 같은 현재를 즐기며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혁명, 이토록 좋은 세상을 주는데 누구든 뛰어들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가. 


먼저,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혁명에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자신의 모든 걸 뒤로 한 채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세상을 바꾸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혁명에 동참할 사람이? 5,000만 명의 인구에서 5만 명이라도 있다면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렇게 장렬히 산화한 이들이 많다. 


어떤 방법으로든 독재자를 끌어내렸다고 하자. 그런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있는지? 이 독재 정권을 파괴하는 데만 해도 벅찬대 어찌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하겠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게 다분하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독재자를 끌어내려고 또 다른 독재자가 그 자리를 꽤 찰 것이다. 이 역시 역사를 들여다보면 무수히 발견할 수 있는 경우다. 


과연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체계적인 계획으로 훌륭한 민주주의 정권을 세웠다고 하자. 그렇게 하면 끝나는 걸까?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을까? 저절로 행복한 미래가 만들어질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다분하다. 혁명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폭력 투쟁은 무엇이고, 왜 해야 하는가


'혁명'하면 가장 먼저 누가 떠오르는가. 체 게바라, 레닌, 마오쩌둥. 반면 간디, 넬슨 만델라, 마틴 루서 킹은? 이들은 모두 혁명의 세기인 20세기 인물들로 인류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이들이다. 다만, 앞의 세 명은 유혈이 낭자한 폭력 투쟁을, 뒤의 세 명의 비폭력 투쟁을 하였다. 그런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들은 폭력 혁명가들이다. 그들은 카리스마가 넘치고 그들의 삶은 화려하다. 반면 비폭력 투쟁은 그렇지 않다. 무엇이 진정한 투쟁인가? 이에 세르비아의 세계적인 비폭력 운동가 스르자 포포비치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문학동네)를 통해 비폭력 혁명을 설파한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방법'을 설명하는데, 먼저 비폭력 투쟁의 모습과 특징을 보여주며 이어 비폭력 투쟁을 적용하는 실질적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먼저 저자에 대해 말하자면,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세르비아의 세계적 반독재 비폭력 운동 단체 오트포르!의 리더였으며, 비폭력 행동주의와 전략 응용 센터인 캔바스를 설립해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책은 '오트포르!'와 '캔바스'의 활동, 그리고 '직접적인 도움'과 함께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사례로 풀어나간다. 그리고 역사상 수많은 비폭력주의 운동 사례가 함께 한다. 


저자의 '강의'를 요약해보자. 먼저 이길 수 있는 작은 전투가 무엇인지, 내 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세울 수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건 싸움의 절반에 불과하고 나머지 절반은 새롭게 얻은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건 다름 아닌 비전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귀 기울이고 비전에 그들이 바라는 바를 포함 시켜야 한다. 사람들에게 정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비로소 비폭력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제 권력을 지탱하는 기둥이 어떤 모습인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비폭력 투쟁 이론의 아버지'로 알려진 미국학자 진 샤프의 이론을 들어, 모든 정권은 몇 안 되는 기둥에 유지되며 기둥 한두 개에 압력을 가하면 체제 전체가 붕괴된다고 말한다. 모든 독재자는 경제적 기둥에 의지하며, 다름 아닌 평범한 국민들에 의해 유지된다. 즉, 평범한 국민들에 의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면 독재자는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웃음과 유머 전략, 역풍 전략을 얹어라. 


당신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제일 먼저 이야기하기에 제일 중요한 건, 바로 '통합'이다. 운동을 하려면 언제나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2011년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을 대표적 실패 사례 중 하나로 뽑았는데, 이 운동을 엄청난 유명인들이 지지했지만 미국 내에서 매우 구체적인 특정 계층에게만 큰 호소력을 지녔다고 일침 한다. 이는 제대로 된 통합을 하지 못한 채 선거를 치러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의 야권에게 보내고 싶은 메시지의 대신이다. 제발 좀 통합합시다. 더 광범위하게. 당신들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들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비폭력주의 운동의 역사적 인물인 넬슨 만델라는 본래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섰다. 그러다가 몇 번이나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이후 극단적 폭력주의자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공격을 감행했고 정부의 가장 두려운 적이 되었다. 그는 다시금 체포되어 27년 간 투옥되었는데, 노선을 완화해 다시금 비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폭력으로는 그와 국민이 누리고자 하는 미래를 성취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숫자 상으로도 비폭력 투쟁의 성공 확률이 폭력 투쟁의 성공 확률을 앞선다고 한다. 26%대 53%다. 저자는 통합, 계획, 그리고 비폭력이 성공적 투쟁의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마무리가 있다. 위에서 말했던 '혁명에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라는 생각과 이어진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성과는 제대로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는 과제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승리로 간주될 수 있다는 얘기다. 원하던 목적을 이룬 순간이 언제인지 파악하고 제때에 승리를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잊으면 안 된다. '독재자 퇴진'이 끝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만 정확히 따르자


우리나라는 4.19 혁명, 부산마산 항쟁, 6.10 항쟁을 통해 우리 힘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민주화를 달성한 역사가 있다. 그 정신은 1919년 3.1 혁명으로부터 이어진, 굉장히 유서 깊은 '전통'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혁명의 깃발을 내세우고 시위에 나선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부터도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그들을 지지하지만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 상당수가 특정 정당을 응원하며 선거를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낫다거나, '어쩔 수 없이' 찍고 있는 것 같다. 나부터 그러니까. 이 역시 '우리'와는 상관 없는 '그들' 만의 리그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래도 최소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뜻을 보태야 하겠다. 


이 책의 매뉴얼 중 하나 만이라도 정확히만 따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수단의 운동 단체 기리프나의 '우리는 이제 신물이 난다', 오트포르!의 2010년 메시지 '그는 끝났다' 같은 여러 이익 단체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메시지를 통해 광범위한 통합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 만으로도 싸워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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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리틀 브라더>



<리틀 브라더> 표지 ⓒ아작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교가 처참하게 폭발했다. 미국은 9.11을 능가하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테러라고 규정한다. 그러곤 대 테러 단체인 국토안보부로 하여금 용의자를 색출하게 한다. 운 나쁘게도 테러가 있었던 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마커스 얄로우를 비롯한 네 명의 '십 대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국토안보부가 판단하기에 의심스러운 기기가 있었다. 


마커스는 학교 방화벽을 젖은 휴지처럼 뚫어버리고, 보조 인식 소프트웨어를 속이고, 학교가 그를 추적하기 위해 심어 놓은 감시칩을 박살 내기도 한다. 그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천재적인 관심과 능력을 보여준다. 테러가 일어났을 때 그와 친구들은 <하라주쿠 펀 매드니스>라는 대체현실게임을 하는 중이었고, 위에서 말했던 능력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의심스러운' 기기들을 지니고 있었다. 국토안보부는 그 자리에서 그들을 체포한다. 게임을 하던 이 십 대 아이들은 졸지 테러리스트 용의자가 된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이 소설은 <리틀 브라더>라는 제목을 취했다. 어쩔 수 없이 어떤 소설이 생각나게 한다. 다름 아닌 조지 오웰의 <1984>. 그 소설에 나오는 '빅 브라더'. 통칭 '감시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든 빅 브라더가 지켜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시스템이다. 만약 이 소설이 <1984>와 결을 같이 한다면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감이 잡힌다. 빅 브라더가 되려는 국토안보부를 위시한 정부와 자유를 되찾기 위한 십 대 아이들(마커스를 위시한)의 대결이 되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내용이 현실로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연쇄 테러가 발생했다. 6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테러의 배후가 명확하진 않지만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농후해, 미국 오바마 정부의 '대 IS 격퇴'에 대한 미온적 대응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은 지상군 투입 절대 불가를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빅 브라더 시대로의 이행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언제 어디서 무고한 시민들을 위협하는 테러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9.11을 능가하는 테러가 실제로 발생했으니, 감시는 더 철저해 질 것이며 인권 및 기본권 침해를 간단히 무시하는 상위의 법이 만들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 그야말로 소설 <리틀 브라더>의 내용이 실제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우연찮게 하루를 시간 차로 우리나라 광화문에서는 '민중총궐기 투쟁대회'가 있었다. 2008년 촛불 집회 이후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어김없이 정부는 물대포와 함께 캡사이신까지 분사했다. 이 모습 또한 <리틀 브라더>에 나오는 모습과 판박이다. 소설 속에서는 뮤직 페스티벌을 열어 '25살 이상은 아무도 믿지마!'라는 구호와 함께 자유를 울부짖었다. 정부는 이를 불법집회라 규정하고 해산을 요구하지만 응하지 않자 캡사이신을 분사하며 수백 명을 체포한다.


테러, 감시, 그리고 자유


한편 마커스는 국토안보부에 의해 개인 안보에 대한 모든 것을 탈탈 털린다. 국토안보부는 그를 용의자로 점찍고 그러하기에 그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반면 마커스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자신만의 개인 자료를 넘겨줄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모든 걸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그곳에서 영원히 풀려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가까스로 풀려 나온 마커스는 복수를 꿈꾼다. 언제 어디서나 그를 지켜볼 거라는 협박과 만약 잡혀갔던 사실을 발설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거라는 협박을 이겨내면서 그는 자신의 장기를 이용해 그들에게 복수할 방법을 강구한다. 그러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들을 향한 복수의 길을. 그는 단지 자유를 되찾고 싶어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큰 힘이 되어준다.


"이런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가 정부를 조직했으므로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한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인민은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원리를 바탕으로 그런 형태의 권력을 조직해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본문 중에서)


이 소설은 테러로 시작되지만 전체적으로는 테러 이후에 자행 되는 무자비한 대 테러 작전이 주를 이룬다. 작전의 일환으로 감시 체제가 전에 없이 심화되었고 그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커스와 그의 친구들인 것이다. 자유로운 세상에서 자유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느껴지지도 않지만, 그 자유가 떨어져 나가버리면 참을 수 없을 때가 온다. 그렇지만 복종은 때로 굉장히 달콤하다. 마커스는 그 달콤한 복종에 대항해 힘겨운 자유로의 싸움을 계속해나간다. 


한편 이 감시 체제를 환영하는 이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커스 학교의 교감, 마커스의 아버지, 마커스의 친구 찰스 등이다. 이들에게는 수천 명의 인명을 희생 시킨 테러리스트 체포가 그 어떤 것보다 위에 있다. 본래 이들은 자유보다 복종과 권력을 중요시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들 중 마커스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에 엄청나게 급진적인 활동을 했었지만 '꼰대'가 되면서 지키는 것에만 급급하게 되었다. 


21세기 십 대 혁명 매뉴얼


모르긴 몰라도 마커스와 친구들, 그리고 자유를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국토안보부와 정부에 대항해도 이길 순 없을 것 같다. 그들은 너무 견고하고 거대하다. 설령 가까스로 국토안보부를 파쇄한다고 해도 테러가 계속되는 한 정부는 대책으로 또 다른 무엇을 획책할 것이다. 그건 국토안보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또 다른 보는 눈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십 대다. 우리네 역사의 큰 분수령이었던 4.19 혁명의 주체가 십 대 였듯이. 그들이 못하면 아무도 못한다. 소설은 십 대만이 할 수 있는 혁명의 방식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며 중간 중간 소설 답지 않은 행태(?)를 보이는데, 도무지 알기 힘들고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한 전문가급 지식들의 향연이 그것이다. 21세기 십 대 혁명 매뉴얼 같다. 


그러하기에 이 소설은 유쾌 통쾌 상쾌하다. 암울한 세상이지만 십 대의 상상력이 뿜어내는 열기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게 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 바뀐 세상은 그들의 것이고, 나는 그 세상을 응원한다. 앞으로도, 꼰대가 되어서도, 그들을 응원하길 바란다. 그들의 세상이 행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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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


<설국열차> 표지 ⓒ 현실문화연구

<구약성서> '창세기' 6~8장을 보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온다. 최초의 인류가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있어 하느님이 대홍수로 심판하려 한다. 홀로 타락하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하던 노아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홍수가 올 것을 미리 알게 된다. 그는 120년에 걸쳐 길이는 약 135m, 폭은 약 23m 높이 약 14m의 삼층 구조 배를 만든다. 8명의 가족과 여러 쌍의 동물들을 데리고 방주에 탑승한다. 


대홍수는 40일(또는 150일)동안 계속되어, 노아의 방주에 탄 이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이 전멸한다. 인간의 탐욕이 초래한 재앙을 피할 길은 오로지 노아의 방주 뿐인 상태이다. 언제 끝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 노아의 가족은 어떤 생활을 할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종교적 상징을 뒤로 하고 상황 자체만을 두고 봤을 때,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이다. 극도의 두려움과 절망감, 고립감 그리고 안도감 등의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 칠 것이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사랑, 정치, 종교가 뒤섞일 것이다. 


극악의 상황에 놓인 인간들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의 배경은 이와 비슷하다.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아 기후 무기까지 개발하기에 이르렀고, 세상은 눈으로 뒤덮였다. 설국열차에 오른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생물은 전멸했다. 이 대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설국열차에 탑승하는 것뿐이고, 설국열차의 정지는 죽음을 의미한다. 


영원히 달리게끔 되어 있는 설국열차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이 인류 생존의 마지막 보루에도 계급이 존재하는데, 위기가 닥치자 위의 계급이 아래 계급을 밀어내려 한다. 일명 '꼬리 자르기'로, 꼬리칸을 떨쳐버리려 하는 것이다. 이 죽음의 레이스의 전말을 알게 된 꼬리칸의 한 남자는 반란(혁명)을 시도한다. 


4년 전에 개봉해 엄청난 흥행과 더불어 많은 논란거리를 남겼던 영화 <2012>의 후반부 스핀오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마야설에 근거해 2012년에 세상이 멸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후반부에 현대판 노아의 방주가 출현한다. 영화는 재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노아의 방주 탑승과 노아의 방주 내에서의 생활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 내린 노아의 방주 탑승자들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설국열차>는, 이런 극악의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극도로 좁은 공간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극대화된 상징성들


<설국열차>는 그래픽노블로서의 장점(눈을 자극하는 화려한 그림체와 시각적 상상력 등)을 어느 정도 포기하면서까지 상징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철저히 인간을 그리려는 문학에 가까워 보인다. 그 상징성을 몇 가지 살펴본다. 


계급

설국열차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 구조이다. 고로 계급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엄연히 칸이 나뉘어져 있고 그에 따라 계급이 확연히 나뉘어져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죽음에 가까워 있으면서도, 공존의 길을 찾지 않고 공멸의 길로 가려는 모습이 안타깝다. 오히려 서로를 더욱 증오하는 모습은 자못 아이러니하다. 


전염과 이분법

꼬리칸에서의 치욕스러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칸으로 건너가려는 주인공은 군사당국에 붙잡히고 만다. 이때 그들은 주인공에게 '전염병'이 있을지 모른다며, 그의 머리를 밀고 목욕을 시킨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가 꼬리칸 출신이라는 것. 낮은 계급에, 못 먹어서 건강하지 못하고 못 씻어서 더럽다고 생각한다. 극명한 이분법적 생각이다. 너는 너, 나는 나. 너는 우리가 될 수 없고, 나는 너희가 될 수 없다. 


돌진

<설국열차>를 영화로 제작한 '봉준호'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격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보고나면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인간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들으면 무슨 뜬구름 잡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여기에 배경이 들어가면 이해가 된다. 꼬리칸 출신의 주인공은, 처음엔 끌려가고 나중엔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가고자 하는 칸은 부자와 권력자들의 칸이다. 즉, 돌진은 혁명이고 혁명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봉준호 감독은 다른 의미로 해석했을 수도 있다. 가령 '돌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 자체를 생각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고 말이다. 


고립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이상 뛰어내릴 수 없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또한 설국열차의 밖은 곧 죽음이기에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히 차단된 고립무원의 상태이다. 옛날 달마대사는 소림사에 들어가 면벽좌선 9년 후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고립을 자처해 한계를 넘어섰다. 감옥에서 또 다시 사고를 치면 아무도 없는 독방에 고립시켜 놓지 않는가. 고립은 그토록 끔찍하다. 고립된 설국열차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타인과 분리되어 멀어진 상태인 고립과 수많은 사람들이 만났을 때, 어떤 문제들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수많은 콘텐츠들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인간

<설국열차>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간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자행된 파멸, 파멸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전쟁 그리고 혁명, 영원히 멈추지 달린다지만 인간이 있어야만 하는 기계. 한마디로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이다. 기계의 움직임도 목적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공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협력이 가능하다


언제 어느 때나 생존은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가 곧 생존의 역사이다. 그 역사에는 무수한 반목과 협력이 있어왔다. 반목의 역사는 지워졌고, 협력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협력이 무조건적인 찬성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의 조건이 필요할 것이고, 반목 또한 무조건적인 반대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협력과 반목에 공존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함은 자명하다. 


우리나라는 시간이 갈수록 '갑과 을', '너 아닌 나'와 같은 이분법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은 시간이 갈수록 자국만 생각하는 일방적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먼 이웃나라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인류 공동의 가치 실현에 앞장서려는 나라를 찾을 수 없다. 그런 인간을 찾기도 어렵다. 


인간은 '人'의 생김새에 기반을 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아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때 희망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돌진'하지 않으면 '전염'의 공포로 점철된 '고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계급'주의적 세상의 '인간'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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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 읽기] 님 웨일즈, 김산의 <아리랑>


<아리랑> 표지 ⓒ 동녘

역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승리자들이다. 그들은 그 대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패배자들을 완전히 말살해 버림은 물론이고 역사적 사실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물론 위대한 승리자들도 많다. 인류 역사에 크나큰 공헌을 한 인물들 말이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군사 독재 시절. 그 당시 세계는 여전히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주의 진형과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진형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그 중심에 한반도가 있었고 공산주의라면 치를 떨고 적대시하도록 세뇌 당했던 시대였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독립 운동을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발자취가 지워져 버렸고 변질되어 알려졌다(필자도 어렸을 땐 그런 사람들이 독립 운동을 했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 중에 한사람인 김산. 나에게 충격과 감동을 주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해준 <아리랑>(동녘)의 주인공이다. 


이 책은 본래 1941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84년에 최초로 비밀리에 출간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군부 독재 시절로, '공산주의자'의 생애를 아주 긍정적으로 그린 이 책은 바로 '용공서적'으로 분류되었다. 출판사 사장은 기관에 불려갔고, 번역자는 가명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1990년에야 비로소 고 리영희 선생을 통해 책의 원저자인 '님 웨일즈'와 연락이 닿았고, 정식 출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김산의 불꽃 같은 삶에 못지 않은, 책의 불꽃 같은 출간기이다. 


김산의 어린 시절과 일본 유학 그리고 만주


그는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평양 교외에서 태어났다. 앞으로의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어린 시절에 언제나 성격이 격렬했고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셌는데, 그런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어떤 일로 인해 아버지께 대들고 어린 나이에 집을 나온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는 또한 기독교를 믿었는데 일생 안 기독교 사상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김산이 15세 되던 1919년. 그의 인생에 크나큰 족적을 남기게 되는 사건인 3·1 운동이 일어난다. 그는 그의 정치 경력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회상한다. 김산의 인생에 크나큰 영향을 준 3·1 운동.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 파리평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 믿고 일으켰다. 김산은 그 당시 기독교계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기독교는 천도교와 함께 3·1 운동의 중요한 대중적 조직이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 조선은 빠졌고 결국 일본의 총칼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총독까지 바뀌게 된다. 김산은 그 이후 일본의 정책을 '발톱을 숨긴 제국주의'라고 표현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3·1 운동은 식민지 운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바뀐 정책에 의해 수많은 친일파들이 생겨나고 조선 국내에서는 더 이상의 전국 규모 독립 운동은 이뤄질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대신에 망명자들의 손에 의해 해외에서 운동이 일어나고 김산도 후에 합류한다. 


김산은 3·1 운동의 실패 후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정한다.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는 직접 돈을 벌면서 공부를 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게 고학을 했다고 한다. 그것도 자신들의 조국을 식민지 삼은 나라에서 말이다. 온갖 수모와 멸시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상'의 원천인 모스크바를 향해 일본을 떠날 것을 결심한 김산. 일단 조선으로 건너와 작은 형의 돈을 훔쳐 압록강을 건넌다. 오랜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달하고 군사 학교에서 여러 가지를 배운다. 아마도 배움은 김산의 인생을 관통하는 또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이후의 인생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항상 무엇을 배우고 가르친다. 이에 반해 필자는 아직까지 '인생의 스승'을 만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훌륭한 선생님들은 많이 봐왔지만 말이다. 비록 책으로 밖에 볼 수 없지만 김산이 나의 인생의 스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자, 그럼 지금부터 펼쳐질 중국 대륙에서의 드라마 같은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자. 


김산의 선택, 상하이


당시 중국의 상하이는 망명자들의 도시라고 불렸다. 상하이에는 프랑스 조계가 있어 일본 경찰로부터 어느 정도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래 국제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이미 많은 망명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김산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상하이에 도착해서 베이징으로 떠날 때까지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었다. 상하이에 도착해서는 민족주의자였고 이후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상들을 접하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유명한 군인인 이동휘 장군. 민족주의자들의 두 거성인 안창호와 이광수. 걸출한 테러리스트들인 김약산(김원봉), 오성륜.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김충창. 1921년에 베이징으로 간 김산은 그곳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공부한 후에 상하이로 다시 돌아오고 공산주의자가 되기를 결심한다.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였던 김산.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떠나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 것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한국의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예전 군사 독재 시절에는 전혀 빛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의 삶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는데 과연 김산은 패배자일까 하는 생각도 함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죽어간 그를 단지 공산주의자라는 시각에서만 보는 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김산의 삶과 한국 근현대사


김산은 근대적 인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렸을 때 집을 나와서 일본, 만주를 거쳐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공부를 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근대적인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에 따라 배움이 한계가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앎을 공유할 수 없었다. 


그의 결혼과 여자에 대한 생각 또한 굉장히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한 시선에서 바라보았는데 이는 안창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틀에 박힌 생각을 버리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경제적, 생물학적 측면에서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의 사람들도 배워야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김산이 공산주의자가 되고 처음으로 한 혁명 활동은 중국 대혁명에 참가한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전근대적 산물인 봉건군벌을 타도하기 위해 북벌을 행하였는데 여기에 김산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다. 이렇게 김산의 삶을 지배한 생각들은 전근대적인 관념에서 벗어난 근현대적인 사상의 한 전형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혁명가였던 그는 중국혁명만이 조선의 독립혁명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한평생 중국혁명을 위해 힘썼다. 그가 추구한 진정한 혁명은 중국, 조선만 아니라 일본, 러시아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체의 인민 혁명이었다. 중국 대혁명에서 알 수 있듯이 봉건지주들에 의해 착취 당한 사람들과 계급적으로 하위 층에 속해 있었던 상인들 그리고 노동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한편으로 김산은 당시 동아시아를 삼키려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제국주의에 대항해 동아시아 인민 해방에 힘쓴 김산. 자연스레 체 게바라가 생각난다. 체 게바라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라틴 아메리카 인민 해방을 위해 죽어갔다. 더구나 그는 쿠바인이 아니라 아르헨티나인 이었다. 김산과 상당히 겹쳐진다. 하지만 체 게바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쿠바 역사에서도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 받는 반면, 김산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김산은 그래도 이 책 님 웨일스(<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거 스노'의 부인)의 <아리랑>으로 재조명되었지만, 그러지 못한 독립 투사들이 너무나 많다. 


김산은 진정한 혁명가였다. 일찍이 한국 근현대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살아서 조선 독립을 봤으면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건 있을 수 없지만 독립 후 좌와 우를 아우르려고 했었던 여운형이나 김규식과 같은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그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선혁명을 위해서는 중국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중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쟁취하려는 행동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한계, 그리고 그 시대에 있어서 조선의 한계였다고도 생각된다. 


비록 한계가 있었고, 실패를 맛보았지만 그가 생각하고 노력했었던 건 분명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또한 그는 단순히 생각만 하고 소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였다. 가르쳤고 연설하였고 글도 썼던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몰되고 왜곡된 일제시대 36년. 그 한복판에서 김산과 또 다른 수많은 김산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인민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투쟁의 시대를 살다간 김산. 그의 삶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남과 북으로 분단 되어진 60년이 된 지금. 일본의 제국주의는 패망했지만 여전히 미국의 패권주의가 한국을 짓누르고 있는 지금.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김산의 사상과 한국 현대 사회


김산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 많은 사상들과 사람들한테서 영향을 받는다. 어린 시절 믿었던 기독교의 윤리사상, 그의 영원한 마음 속 스승이었던 톨스토이의 인본주의 사상,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 그리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런 다양한 사상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그가 인민 해방을 위해 혁명 활동을 했지만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 활동을 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수많은 지도자들은 국민을 1순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의 사상과 체제를 위해서 국민을 이용하는 게 아닐까. 반면 김산은 오직 인민을 위한 혁명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친일로 전향을 하는 와중에서도 그는 배신하지 않았다. 오직 공산주의를 위한 혁명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배신을 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일진대. 


그의 이러한 이념을 초월한 인민을 위한 활동들. 현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 동아시아 혁명을 통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중요하다. 지난 정권에 북한과의 대화가 단절되었는데 그 모든 책임을 북한에게만 돌리고 노력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정권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 점점 뻗쳐오는 중국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앞장서서 남북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현재는 중단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 북한 인민을 위한 대북 원조도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북한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핏줄이 아닌가. 말로만 다자주의를 외치지 말고 실제 외교에서도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었으면 한다. 이건 꼭 알아야 한다. 현재 시대는 김산이 살았던 그 당시의 시대와는 다르다. 지금은 대항하기보다는 동반자의 입장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김산이라면 서슴없이 이런 주장을 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그의 가감 없는 모습이 그리워진다. 


김산의 혁명 활동


한편 중국 대혁명에서 시작된 김산의 혁명 활동은 광둥코뮌, 하이루펑 등지로 옮겨진다. 책에서 그 모습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데 그걸 읽으면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생각났다. 필자가 대학교 입학하기 전 겨울에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비록 소설이지만 사실에 입각하였고 따로 조사를 해보니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었다. 또한 왜곡된 사실들도 많은 걸 알고 나서 상당히 허무하였던 기억이 든다. 


김산은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혁명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침과 동시에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글을 써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였고 대중들 앞에서 연설함으로써 대중운동을 선봉에 서서 이끌었다. 대부분의 혁명 활동이 글, 말,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그는 활동과 실천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그의 혁명 활동의 밑바탕에는 기독교 윤리 사상과 톨스토이의 인본주의 사상이 깔려져 있었기 때문에 폭력을 지극히 혐오하였다. 장제스 정부의 무차별적인 백색테러에 대해 치를 떨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재판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어 반혁명적인 분자들을 재판하게 되었을 때 처형판결에 대해 참기 힘든 불쾌함을 느끼곤 한다. 또한 무장봉기에 바탕을 둔 혁명에 대해서도 반대를 한다. 이처럼 그는 투쟁의 시대에 태어나 충실하게 혁명에 힘을 쏟았지만 평화를 사랑하였다. 모순적인 생각이지만, 아니꼬운 시선으로 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랑 고개를 넘다


김산은 1930년과 1933년에 일본 경찰과 남의사에게 체포당한다. 그 당시에 일본의 정책은 친일파 육성을 기본골자로 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친일파로 전향하거나 중국에서는 장제스 정부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김산도 이 부분에서 많은 고민을 한다. 전향을 하여서라도 출소하여 인민을 위한 혁명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켜 배신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고 말이다. 


결국 그는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 그러며 혁명 활동이 실패로 끝나는 일이 있더라도 차라리 정직하게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또한 역사는 우리 편이며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p.425~426 참고). 


김산은 시대가 요구하는 걸 잘 알고 거기에 모든 걸 쏟아 부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지금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노력에 의해 이룩한 땅 위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투쟁과 노력은 그 사람들이 하고 있고 지금의 젊은이들은 단지 자신의 광명을 위해 미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삶을 따라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가 걸어간 길을 우리도 바라볼 필요는 있지 않겠는가.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 생각을 하고 글로 쓰고 있지만 행동에 옮겨 실천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산을 비롯한 수많은 혁명가들이 행했던 실천의 길이 떠오른다.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제는 수면 위로 올려, 모든 사람의 눈에 띄어야 할 필요가 있다. 수십, 수백 년 뒤에야 재조명되길 바란다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해여-승리했을 뿐이다.'(p.464) 


김산은 <아리랑>에서의 마지막을 이렇게 시작한다. 또한 그는 좌절하지 않는 자만이 역사가 알아준다고 하였다. 패배와 좌절이 무엇이 다른가. 패배는 좌절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또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그는 수많은 혁명 활동에서 실패하고 두 번이나 체포 당했으며 부인과의 결혼생활까지도 실패를 맛보았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실패해본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했지만 결국 역사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또한 하위계층들은 대대로 내려오는 핍박과 설움을 참아내고 지금까지 왔다. 아직도 역사는 계속되고 있고 실패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겨낸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알아봐 준다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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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 <대구>


<대구> ⓒRHK

경제학 분야에서 유명한 말이 있다. 200여년 전, 애덤 스미스가 자원 배분의 효율성을 이루는 시장 기능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자유경쟁시장에서는 재화에 관련되어 계획하고 조정하는 사람 또는 시스템의 존재가 불필요하며, 시장 스스로가 조정을 한다고 보았다. 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론의 중추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학 분야의 시장을 설명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계 역사를 설명하는 데에도 통용되고 있다면? 더군다나 그것이 버젓이 실체를 띠고 있다면?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라 칭하는 이유는, 이것이 실체를 띠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실체를 알아차린 몇몇 사람들이 역사를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극작가, 어부, 항만 노동자, 법률가 보조원, 요리사, 제빵사의 직업을 거쳐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마크 쿨란스키'는 <대구>(RHK)라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역사를 변화시킨 주인공이 바로 대표적 어류 중 하나인 '대구'라고 밝혀내고 있다. 작년에 <멸치 머리엔 블랙박스가 있다>(부키)를 펴낸 물고기 박사 황선도에 따르면, 대구(학명 Gadus macrocephalus. Cod)는 명태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구과 어류를 대표한다. 참고로 명태에는 '왕눈폴락대구'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대구는 최대 크기가 1미터가 훌쩍 넘는 대형 어종인데, 2000년대 들어 어획량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본래 제일 흔한 어류임에도 맛이 일품이라 많은 사랑을 받았었는데, 어획량이 1990년대에 급감해서 침체기를 겪었다고 한다.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는 바로 이 대구의 어획량이 급감했던 1997년에 출간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어획량이 급감한 1990년대 현재의 비루한 어부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자유경쟁시장으로서의 어업을 행하는 어부가 아니다. 이제는 정부의 보조를 통해, 대구를 잡아 파는 것이 아니라 대구를 잡아 정부 소속 과학자들에게 보고함으로써 대구 어족의 발달 여부를 측정하도록 보조 한다. 잡아도 잡아도 끝없이 잡힐 것만 같았던 대구. 이들은 지난 1000년간 흥청망청 이어진 대구 어업에서 하필이면 제일 끝물에 있었다. 


이 책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결국 대구와 연관이 있다. 즉, 지난 1000년간의 세계가 '대구'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그 안에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순간을 연출한 위인들, 전 세계를 호령했던 강대국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이끈 세기적 기술들까지. 보다 많은 대구를 낚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고, 보다 많은 대구를 낚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항해와 관련된 기술이 수직으로 상승 발전했다. 또한 이 '대구' 때문에 전쟁과 혁명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중세 내내 유럽인이 막대한 양의 고래 고기를 먹을 때, 바스크 인은 머나먼 미지의 해역으로 나가 고래를 잡아왔다. 이들이 그처럼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엄청난 대구 어족을 발견했고, 그걸 잡아서 소금에 절였다. 그래서 긴 항해에도 불구하고 상하지 않고 영양가도 높은 식품을 먹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스크 인이 사상 최초로 대구를 소금에 절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여러 세기 전에,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에 도착했는데 이 경로가 대서양대구의 서식 범위와 정확히 같았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본문 중에서)


대구와 관련된 대표적 전쟁으로, 20세기 중반 영국과 아이슬란드는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일명 '대구 전쟁'이 있는데, 그 결과 아이슬란드가 승리 아닌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8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의 예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식민지는 본국 영국의 과도한 세금 수탈 등으로 인해 불만이 터졌고, 이를 결정적 계기로 독립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 식민지가 영국에 대해 불만을 가진 점 중에는 과도한 세금 수탈 말고도 '대구 무역 제한 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사항은, 독립 전쟁이 끝나고 협정을 맺을 때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했던 사항이 바로 '대구잡이 권리' 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살아가는 데 일자리가 세금보다 중요하지 아니한가? 그들에게 있어 대구 어업은 생존과 직결된 사항이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가 전 세계의 승인을 얻은 이후로 대부분의 국가는 저마다 200마일 영해를 선언하고 나섰다. 전 세계의 기존 어장 가운데 90퍼센트는 최소한 한 나라의 해안에서 200마일 범위 안에 속했다. 이제 어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법률에도 따라야 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물고기를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범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으로 바뀌었다." (본문 중에서)


결국 이 책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즉, 대구의 위상이 땅바닥으로 떨어진 현실로 돌아와 1000년 왕국의 끝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며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자연에 대한 재인식. 한 마리가 수백만 마리의 새끼를 낳을 정도로 엄청난 개체 수를 자랑하는 대구가 멸종을 향해 가고 있다면, 이 세상 어느 누가 멸종을 면할 것인가 하는 명확하고도 섬뜩한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인간에 의한 일방적인 자연에의 수탈 다시 보기. 끝물에 와서 비로소 인식하고 보호를 하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제 와서 자연과 소통하려 해보았자,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은 자연이 받아줄지 의문이다. 대지의 어머니 답게 언제든지 와서 모두 가져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 도움을 청하고 그 품 안에서 마음껏 뛰어 놀다가 무한으로 주는 것들을 받고... 그런데 고마워할 줄은 모르는 인간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런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해묵은 시선을 '대구'라는 흔하디 흔한 어류를 통해 형상화 시키고 있다. 10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돌아 왔듯이, 전하고자 하는 말도 돌고 돌아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타 인문서처럼 진중하게 그리고 지식욕이 충만하게 읽히면서도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히기도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대구'를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의 부록 부분을 살펴보시길. 정말로 다양한 대구의 조리법이 50여 쪽에 걸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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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명품 동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프랑스 명품 동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 ⓒ엣나인필름



우리나라의 언어 활동 중에서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이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르다'와 '틀리다'의 혼용이다. 예를 들어, '너와 나는 달라'가 아니라 '너와 나는 틀려'라고 말하곤 하는 것이다. 이는 온 국민이 시청하는 방송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일상 생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뜻이 비슷해서 일까, 발음이 비슷해서 일까. 아니면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게 된 우리나라 특유의 민족성 때문일까. 혹시 모든 면에서 양극화되어 가는 우리나라의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상징일까.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나라만의 특징은 아닌 것 같다. 최근에 개봉한 프랑스 동화(애니메이션 영화)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화 속 세계는 완벽히 둘로 나뉘어져 있다. 지상의 '곰' 나라와 지하의 '쥐' 나라. 이 두 나라는 서로를 끔찍하게 여기며 교류 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다르게 생기고 다른 문화를 지니고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틀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환영 받지 못하는 이들의 조우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 장면. 꼬마 쥐 셀레스틴은 금기시되는 생각때문에 왕따를 당한다. ⓒ엣나인필름



꼬마 쥐 셀레스틴은 이런 '다름'의 성질을 태생적으로 알고 있다. 그녀는 "쥐는 왜 곰하고 친구가 되면 안 되는 거지?"라는, 쥐 나라에서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며 주위에서 치과의사가 되라고 촉구하는 것도 무시한 채, '곰' 그림을 그린다. 주입식 교육으로 제도화 된 세계에서 혼자만 튀면 어떻게 되는지 그녀의 모습이 잘 보여준다. 그녀는 매일 같이 '틀린 생각'은 그만하라고 꾸지람을 듣고 왕따를 당하기까지 한다. 


한편, 곰 나라에도 환영 받지 못하는 이가 있다. 거리 음악가 '어네스트'. 그는 가난하게 살면서 돈이 궁할 때면 거리에 나가 노래를 부르며 구걸한다. 그러다가 경찰에 의해 악기들을 압수 당하기 일쑤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고, 급기야 남의 것을 훔치기까지 한다. 왜 그는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과연 그만의 잘못일까?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 장면. 곰 어네스트는 가난한 거리 음악가로, 사회로부터 배척당한다. ⓒ엣나인필름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가까워진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은 엄연히 다른 종족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 세계에서는 서로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사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 정확히는 셀레스틴이 개의치 않았고, 어네스트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나중에는 셀레스틴의 진심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 간의 진심 어린 소통은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속한 전체로 퍼지기에 이른다. 


이 영화를 보는 다양한 방법


이는 영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방면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모더니즘 세계에서는 문화와 문화 사이가 엄격히 구분되어 있고, 서로 간에 폐쇄성이 깊게 작용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간에 확실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나타난다. 엄격한 구분을 파기하고 서로 간의 벽을 넘나들며 혼합하고 차용하고 합병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영화 속 세계가 작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영화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도 시청이 가능하다. 점점 계층화, 양극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의 기멸찬 현상에 대한 반발로 말이다. 그 반발이 셀레스틴의 사례를 통해 사회적 통념에 반하는 순수하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고, 어네스트의 사례를 통해 사회가 미쳐 발견하지 못했거나 무심코 지나치거나 짓밟아버린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동화적 상상력과 한 없이 여리고 귀여운 그림체로 말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빨려 들어가 감정이 이입 되고 있는 것이다. 기막힌 연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의 한 장면. 곰 어네스트와 쥐 셀레스틴은 세계공통적 금기를 깨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엣나인필름



여하튼 그들은 세계공통적 금기를 깨고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일종의 혁명을 이룬 것이다. 사회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고 세계가 바뀌는 건, 단순히 정치 세력이 바뀜에 따라 이뤄지지 않는다. 모든 이들의 통념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론이 발현되어야 할까. 영화 속에서처럼, 어떤 이가 영웅의 모습으로 나타나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나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영화가 행하는 것처럼,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저에 감춘 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끔 해야 하는 것일까? 정답은 없다. 어떻게든 실행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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