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행복의 나라>


영화 <행복의 나라> 포스터. ⓒ인디스토리



지하철역 플랫폼, 어떤 남자 한 명이 철로로 뛰어든다. 자살을 하려는 것 같다. 옆에 있던 남자가 가방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뛰어든다. 자살하려는 남자를 구하려는 것 같다. 곧이어 열차가 들이닥치고, 구하려는 남자는 죽고 죽으려는 남자는 산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산 남자 민수는 결혼도 했고 아내가 임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구하고 죽은 남자 진우의 제삿날 그의 집으로 향한다. 


아들 진우가 죽고 진우가 구한 민수를 아들처럼 생각하는 희자, 그녀의 민수를 향한 애정과 행동은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장 꺼려하는 이는 민수이다. 그곳엔 자신을 구하고 대신 죽은 진우의 가족들이 있고, 그때마다 오는 진우의 여자친구였던 세희도 있다. 


민수는 결심한다. 더 이상 진우의 제삿날에 희자네 집으로 오지 않기로. 희자가 말한다.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들을 끔찍히도 생각했던 희자는 자신이 죽은 후엔 민수가 진우의 제사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수는 말한다. "그럼 제가 언제까지 와야 되요?"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생겼으니 민수도 더 이상 진우가 아닌 민수로 살고 싶다. 


죽고 싶었지만 살게 된 한 남자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영화 <행복의 나라>는 죽고 싶었지만 강제로 살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문제는 그를 대신해 죽고 싶지 않았던 한 남자가 죽게 되었다는 것. 그건 민수가 원하지도 않았고 행하지도 않았지만, 죽음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삶 때문에 그는 죄의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민수는 살고 싶다. 이렇게 사는 건 죽음보다 못한 것이기에. 민수는 행복하고 싶다. 하지만 희자는 그가 행복하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다. 비록 그를 진우의 대신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진우가 아니기에. 영화는 삶과 죽음의 충돌, 민수의 죄의식과 삶에의 욕망의 충돌, 민수와 희자의 충돌, 희자의 민수를 향한 진우에 대한 충돌이 주를 이룬다. 


짧고 굵은 이 영화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건 희자보다 민수이다. 시종일관 답답하고 축 처진 모습, 그것도 절반 이상 뒷모습만 보이는 그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삶의 고통과 힘듦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살아가는 것도 힘든데, 죽지 못해 사는 것 이상의 죽을 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건 무엇일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생각해본다. 내가 '민수'라면이 아닌 내가 '희자'라면. 단순히 죽고 싶다라는 생각이 아닌 실제로 죽으려고 했던 민수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아무리 해도 힘들다. 감히 생각할 수도 없다. 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고 그를 대신해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나라도 희자처럼 할 것 같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왜 하필 내 아들 앞에서 죽으려고 했느냐'고, 강제로 살려진 죽으려고 했던 이의 입장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고,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 싶다.


내가 '민수'라면. 자살하려는 생각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강제로 살려진 이후의 생각을 따라가는 건 가능은 할 것 같다. 너무나도 억울할 듯하다. 죽고자 했는데 강제로 살려진 것도 모자라 죄의식 속에 살아도 산 게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누가 살려달라고 했나... 희자는 뭘 바라는 걸까, 민수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걸까.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인디스토리



우린 이 영화의 큰 두 축인 민수와 희자 모두 각각의 입장에 철저히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민수와 희자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럴 땐 한쪽이 사라져야 한다. 외부에서 보면 파국일, 그들이 보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어야 하는 것이다. 


영화 <해바라기>가 묘하게 겹쳐진다. 자신의 개차반 아들을 죽인 오태식이 철저히 교화되어 가석방되자 덕자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따뜻하게 맞아준다. 태식은 그들과 함께 희망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게 그의, 그들의 제자리인 것인가?


<행복의 나라>는 엄연히 다르다. <해바라기>의 태식과 덕자의 파국은 그들 간의 관계가 아닌 외부에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행복의 나라>의 민수와 희자의 파국은 그들 간에 뿌리내려진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관계에 의한 것이다. 


어느 누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까. 서로 연락을 끊고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민수가 평생 속죄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희자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고 살고 싶고 행복해지고 싶은 민수 입장에선 안 보는 게 능사가 아닌 것이다. 


행복할 수 없는 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입장들이 양립하고, 행복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그저 불쌍할 뿐이다. 살아있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건 서로가 아닌, 죽고자 했던 민수를 살리고 죽은 희자의 아들 '진우'가 아닌가... 하지만 진우는 잘못은커녕 영웅적인 일을 했기에 탓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살아있는 한 행복이란 요원한 것인가. 그들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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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소공녀>


영화 <소공녀>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1999, 면회> <족구왕> <범죄의 여왕> 그리고 <소공녀>의 공통점은 무얼까? 한국 독립영화라는 점. 모두 괜찮게 감상했다는 점. 그리고 '광화문 시네마'라는 독립영화 제작사의 작품들이라는 점. 요즘 가장 유명하고 잘 나가는 독립영화 제작사로,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이었던 감독 다섯 명과 프로듀서 한 명이 뭉쳤다고 한다. 


마블 영화의 대표적 아이콘인 '쿠키영상'을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모든 독립영화에서 볼 수 있는데, 홍보가 쉽지 않은 독립영화의 여건 상 효과적인 방법임에 분명해 보인다. 영화 한 편의 홍보 뿐만 아니라 제작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도 일조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독립영화 제작사로서 계속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알리는 데도, 스스로 계속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고취시키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광화문 시네마는 6명의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 동창 중 전고운 감독과 김태곤 감독이 공동으로 대표를 맡아 이끌어 가고 있다. 김태곤 감독은 <1999, 면회>를 연출했고, 2년 전 <굿바이 싱글>로 흥행감독 반열에 올라섰다. 전고운 감독은 <소공녀>로 장편 데뷔를 했다. 


대한민국의 현시절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광화문 시네마가 제작한 네 번째 영화이자 최신작 <소공녀>는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을 휘감는 트렌드들을 상당수 결합하여 '힙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분위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3~40년 전 힘들기 짝이 없던 시절이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정도의 현시절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소(이솜 분)는 하루 45000원을 벌어 혼자 살아가는 3년 차 가사도우미다. 월세 30만 원 짜리 단칸방에서 살면서, 매일 하루도 빠짐 없이 5000원 짜리 밥을 먹고 12000원 짜리 위스키 한 잔을 마시며 2500원 짜리 담배 한 갑을 피운다. 그런데 집주인이 월세를 5만 원 올려버렸다. 그리고 2015년이 되자 담배가 4500원으로 올라버렸다. 


매일 같이 가계부를 적는 미소는 2015년 새해 벽두 6000원 적자가 나자 포기해야 할 것을 생각한다. 그녀가 포기한 건 위스키 한 잔도, 담배 한 갑도, 빌빌 거리는 남자친구도 아닌 집이다. 그 즉시 집주인에게 밀린 월세를 청산하고 집을 나선다. 우선 대학교 때 함께 밴드 활동을 하며 즐겼던 크루 5명을 찾아가 당분간 신세를 져보려 한다. 


대기업으로 이직하기 위해 점심시간에 셀프 링거까지 맞아가며 일하는 베이스 문영, 30년 동안 중국집을 운영했던 시댁 부모님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형편 없는 음식 솜씨로 욕먹고 사는 키보드 현정, 결혼해서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아파트를 장만하여 20년 동안 돈을 갚아야 하는 이혼 위기남 드럼 대용, 늦은 나이에도 부모님 집에 얹혀 살며 빈둥대는 보컬 록이, 으리으리한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 같지만 남편 비위 맞추기에 급급할 뿐인 기타 정미. 그리고 웹툰 작가 지망생이자 현재 백수로 재직 중인 남자친구 한솔까지. 


2018년 트렌드와 인간 군상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N포'를 기본으로 하는 트렌드들과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결합시켰다. 특히 주인공 미소는, '미소 서식 환경, 즉 미생물·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의 영문명 microhabitat과 '미생물·곤충'을 뜻하는 이름으로 유추해보고 더불어 하루 일당 45000원과 하루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 남자친구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을 생각해볼 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전형을 보여준다. 


혹자는 그녀가 바라는 행복의 기준이 터무니 없거나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위스키 한 잔과 담배 한 갑과 남자친구를 포기하지 않고 집을 포기했으냐는 것이다. 그리고 왜 일을 더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쯤에선 소확행 트렌드의 '유행적 부분'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더불어 그녀의 생각과 행동을 가성비가 아닌 가심비, 즉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의 한 행태라고 할 수 있는 트렌드라고 치부할 수 없게, 해선 안 되게 된다. 


우린 잘 알고 있다. 영화도 우리가 아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계가 있다는 걸 말이다. 2015년작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보여준 열심·악착의 비극은 이제 포기·행복의 미학으로 변했다. 발전이라고 해야 할까, 퇴행이라고 해야 할까. 사회 전체로 보면 퇴행이겠지만, 개인으로 보면 발전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유행이 아닌 '삶의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이 트렌드를 바라봐야 하겠다. 


영화는 비단 한 개인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미소가 집을 포기한 것처럼, 그녀가 찾아가는 친구들마다 모두 한 가지 이상은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친구들은 미소처럼 가심비의 트렌드를 따르지 않는, 따를 수 없는,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미소를 보고 집이 없어 불쌍하다느니 청년 실업만큼 청년 주거 대책이 시급하다느니 하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이 트렌드는 유행도 아니고 사회정치도 아니다.


'웃픈' 비현재적 부분들


영화 <소공녀>의 한 장면.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몇몇 부분, 아니 여러 부분에서 비현실 아닌 비현재적이다. 21세기 세계 경제대국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3~40년 전 경제·사회 과도기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경천동지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바뀐 건 그걸 잘 받아들인 사람들 뿐이라는 게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이 비현재적인 장면들은 그야말로 '웃프다'. 한껏 찌질함을 풍겨 웃기고, 그 찌질함이 너무나도 진지한 자기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슬프다. 특히 광화문 시네마의 네 작품에서 모두 얼굴을 비친 페르소나 안재홍이 분한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의 면면은 웃픈 찌질함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공녀>는 나에게, 우리에게 확고한 자기 신념과 삶의 방식이라는 트렌드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새로운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나의 신념이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듣지 않고 비난도 무시할 수 있지만, 과연 이 문제가 거기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인가. 아무리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안 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배제시켜 단절되는 것과 존중하되 강제하지 않고 범 공동으로 함께 가는 것과는 천지 차이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사회는, 정부는, 이 미생물·곤충처럼 작은 이들도 존중하고 또한 함께 가야하는 구성원으로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반면 이들은 어떤가. 이들은 기성세대, 사회, 정부에 반발하고 신념을 지키고 삶의 방식을 영위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권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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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나의 서른에게>


퇴색되긴 했지만, 여전히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서른'. ⓒBoXoo 엔터테인먼트



'서른'이라는 나이,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긴 했다. 백세 시대에 서른이 갖는 의미가 클 수 없는 것이다. 예전 삼십대가 인생의 최절정기라고 했다면, 요즘 삼십대는 이제 막 세상에 한 발을 내딛는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서른에게 여전히 관심을 갖고 의미부여를 하려는 건 예전부터 이어온 관념 때문이다. 


서른이라는 말이 들어간 콘텐츠는 소설, 시, 노래, 영화 등 부지기수이다. 1992년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대를 관통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4년 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국민가요가 되었다. 이들은 '서른'이라는 나이의 상징성을 특유의 감정선으로 내보내 만민의 호응을 얻었다. 


요즘 서른에 투여하는 바는 많이 다르다. 일례로 얼마전 출간되어 꽤 호응을 얻고 있는 손원평 작가의 <서른의 반격>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게 아닌 삼십대가 된 주인공을 내세워 청춘세대론을 설파하고 있다. 와중에 홍콩에서 날아온 영화 <나의 서른에게>가 눈길을 끈다. 예전의 서른과 요즘의 서른을 바라보는 시선과 의미부여를 적절히 섞은 듯한 느낌이랄까. 


29살, 슬픔과 행복 사이에서


서른을 앞둔 시기는 '서른'이라는 숫자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방황하는, 즉 충분히 의미부여가 가능한 시기다. ⓒBoXoo 엔터테인먼트



괜찮은 직장에 다니고 오랫동안 사귄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있으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괜찮은 외모를 가진 '29살' 임약군, 그녀는 여자 나이 서른이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괜찮은 걸까. 서른을 앞두고 그녀에게 온갖 일들이 생긴다. 


팀장으로 승진한 그녀에겐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주어진다. 친한 친구의 '서른 살' 생일 축하 파티를 소소하게 해주며 서른 살 여자에 대해 이런저런 긍정적이지만은 이야기를 나눈다. 치매가 부쩍 심해진 아버지이지만 병원에 가라는 말만 할 뿐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는 부쩍 소원해진 느낌이다. 집주인의 일방적인 통보로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가야 하는 게 결정적이다. 


갈 곳 잃은 임약군이 향한 곳은 일면식 없는 이가 잠시 내놓은 집. 그곳은 황천락이라는 동갑내기가 파리로 잠시 여행을 떠나면서 빌려준 집이다. 영화는 임약군의 이야기에서 황천락의 이야기로 선회한다. 그녀의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는 임약군처럼 다사다난하지 않다. 그녀는 10년 동안 음반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서른을 맞이해 처음 비행기를 타고 파리로 여행을 가려는 듯하다. 


서로 전혀 다른 외모에, 가정환경에, 능력에, 삶을 산 임약군과 황천락. 하지만 그들은 같은 날 서른이 된다. 그런데 임약군은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황천락은 행복에 겨워 웃음꽃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어째서일까?


조금 더 자신을 들여다보고 사랑했으면


영화는 이왕이면 보다 행복한 서른을 맞이했으면 하는 마음을 29살에게 보낸다.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원제는 <29+1>이다. 영화 제목처럼 30이 주(主)라기보다 30이 되기 전의 20에서의 마지막이 주(主)라고 할 수 있다. 막상 되면 전과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미래와 엄청난 변화가 함께 올 것 같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임약군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누가 봐도 그녀의 삶은 괜찮은데, 그건 오로지 남에게 보여지는 삶의 부분 부분들 뿐이었다. 그 부분들을 괜찮게 보이려고 그녀는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은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황천락은 특별한 게 없다. 아니, 남들만큼 못한 삶이니 특별하다고 할 수 있나. 여튼 직장도 변변치 않고 남자친구도 없다. 가끔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하찮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기록하기로 한다. 그 모든 게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인생이니까. 


여기에 옳고 그름은 통용되지 않는다. 임약군은 정녕 열심히 노력했고 잘했다. 그녀가 굳이 잘못한 게 있다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녀는 그저 지쳤을 뿐이다. 황천락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황천락처럼 자신을 좀 더 돌보고 자신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사랑하라는 거다. 남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걸 잘 알지만... 다들 비슷한 선에서 출발했다면 29, 30이면 누구나 그럴 나이이고, 그래야만 하는 나이이다. 


흔하디 흔한 우리네 삶


영화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만나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BoXoo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탁월한 통찰력으로 핵심을 찌르는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임약군의 이야기도, 황천락의 이야기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 뿐, 우리가 보기에 그들의 삶은 흔하디 흔한 삶이다. 영화가 노린 점이 바로 그 점이 아닐까 싶다. 만인의 서른이 이 영화에 있는 것이다. 


보편적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만나게 되는 '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저런 삶도 한 번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흔한 워너비 커리어 우먼 또는 자유로운 영혼의 보편적 전형. 솔직담백한 이 영화에 참으로 적당한 배치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는 후반부에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해 현실에서 탈피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서른을 준비하려는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며 진정 소중한 게 무엇인지 질문하고 자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보이며 규정하진 않는다. 각자 다른 답이 있는 것이니까. 다만, 이왕이면 '함께' 답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고 운을 뗀다. 그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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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한국이 싫어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 표지 ⓒ민음사



2010년대 들어 한국을 강타한 신조어 중 하나가 '헬조선'인데, 아무도 지옥에서 살고 싶진 않을 것이다. 희망 따윈 찾을 수 없는 지옥 같은 한국을 탈출하는 여러 방법을 강구한다. 남들처럼만 살기 위한 피나는 노력, 인생 한방 역전을 위한 로또, 이전까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의 포기, 헬조선 땅을 떠나는 이민. 이중에서 가장 현실적인 건 무엇일까. 노력은 남들도 다 하고, 로또는 가능성이 희미하다. 반면 포기가 가장 쉬운 것 같다. 이민은? 가능성이 농후한 것 같다. 


10여 년 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었다. 헬조선 탈출의 의미 부여는 전혀 아니었고, 외국에서 살며 일하고 놀고 여행을 떠나는 특별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였다. 이왕이면 공부도 하면 좋고. 그런데 요즘 워킹홀리데이는 다른 의미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이민의 교두보인 것이다. 워킹홀리데이가 최장 2년까지 가능한대, 그렇게 돈을 모으고 스스로를 현지화시킨 다음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으며 영주권 준비를 한다. 


사실 이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가에 의한 계획적 이민이든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이민이든,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외하벌이를 위한 국가의 계획적 이민이 주를 이뤄왔다고 한다. 그러던 외환위기 이후 양상이 크게 바뀌어 경제불안정과 교육 불안 때문에 중산층의 이민이 주를 이룬다. 그 이후가 경쟁력이 없는(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010년대 헬조선 탈출이다. 


장강명 작가가 소설 <한국이 싫어서>(민음사)를 통해 보여주는 헬조선 탈출 양상은 사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는 누구든 생각하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했고, 내 동생은 실행에 옮겼지만 실패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난 그곳에선 행복할까


'계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한 행운아다. 그것도 대기업이라 할 만한 W종합금융에. 그녀는 또한 예의 바르고 허세 부리는 거 없고 목표가 뚜렷한 남자 친구 '지명'도 있다. 그럼에도 3년 동안 회사를 다닌 후 때려 치우고 호주로의 이민을 위해 무작정 호주 시드니로 떠난다. 그녀는 왜 한국을 떠나는가? 그녀의 말을 빌리면, '한국이 싫어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다. 


N포 세대 당사자들이 보기에 기가 찰 노릇일지 모른다. 취업도 했고 연애도 하고 있는데 더 무얼 바라냐 하고 생각할 거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비전이 없다고도 생각한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가난하고, 그렇다고 엄청 예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린 여기서 N포 세대가 가진 엄청난 스펙트럼을 발견한다. 계나처럼 '행운아'조차도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다. 그 스펙트럼만큼 슬퍼지는 바, 급기야 '희망'까지 포기했다는 N포 세대의 비애도 엿보인다. 계나가 포기한 건 희망이고, 계나를 부러워 하는 이들이 포기한 건 여전히 현실적인 조건들이다.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게 계나가 정착하게 된 호주는 어떨까. 그곳에서라도 잘 산다면 그녀가 포기한 희망이 갈 곳을 찾는 것이다. 한국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그곳에 가서 되찾을 수 있기에, 국가야 어쨌든 한 개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소설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아니, 계나의 삶을 위시한 실제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 많은 이들의 삶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계나는 그곳에서도 지옥을 맛본다.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개념의 지옥이다. 기본적인 거주 조건조차 최악인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영주권을 딴 계나이지만 그녀는 '외부인'이라야만 겪을 곤경을 계속해서 겪는다. 그녀가 찾고자 했던 희망은 눈에 어른거리지도 않는 상황의 연속. 인간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소설이 끝날 때쯤 일이 있어 한국에 왔다가 다시 호주로 가는 계나가 하는 말 '이제부터 진짜 행복해질 거야'는 그래서 허무하게 들린다. 


한국을 떠나지 말고 바꿔 보자


동생이 한국을 떠나 호주로 갔던 건 '한국이 싫어서'가 '한국에서 더 잘 살아보려고' 란다. 계나의 남자친구 지명이 하는 말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계나에게 시민권을 딴 후에는 한국에 와서 같이 살고 늘그막에 다시 호주로 가서 살자고 한다. 호주 영주권 가치가 한국 돈으로 10억 원쯤 된다면서. 그러나 계나에게 호주 영주권이 수단으로 작용하긴 힘들어 보인다. 그러기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싫다. 그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나도 한국이 싫다.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칠 것이다. 앞으로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진 않을 것 같다. 또한 적어도 한국을 좋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을 쉽게 떠나진 못할 것 같다. 한국을 떠나서 외국으로 가도 큰 틀에서 달라질 게 없다는 것과 오히려 더욱 하찮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몸소 겪어봤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계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안다. 호주가 천사들이 모여 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럼에도 그녀는 호주가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녀는 왜 호주에서 '지금' 행복하지 못하는지? 왜 '앞으로' 꼭 행복해져야지 하는 다짐을 계속 하는지? 헬조선의 물질적 탈출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최고의 방법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지 않을까. 작가가 그려내며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같이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국에서 희망까지 포기한 삶을 영위하며 그저 현실에 안주하란 말인가. 저성장 시대인 만큼 다들 그렇게 사니까, 나만 그러는 건 아니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까. 그렇지 않다. 다른 방도가 있다. 거칠 게 말해서, 한국을 바꾸는 것. 물론 계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그것을 이유로 한국을 떠난 것이기는 하다. 


방법은 다양하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끊임없이 고민하며 강구해야 한다. 사자와 맞짱뜨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지만, 사자를 굶어죽게 할 수도 있고 사자를 나돌아 다니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며 하물며 사자를 하이에나로 둔갑시켜 버릴 수도 있는 시대다.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논란과 논의가 있을 줄 안다. 논란에서 그치지 말고 논의로 발전되길 바란다. 


한국이 싫어서 - 10점
장강명 지음/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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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표지 ⓒ더숲



리처드 파인만, 아인슈타인의 뒤를 이은 20세기 최고의 스타 물리학자이자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 중 한 사람. 1986년 우주왕복선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 그 유명한 미국 우주왕복선 첼린저 호의 폭발 사고 원인을 풀어내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바로 그 파인만이다.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원자 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고, 1965년엔 노벨물리학상을 타기도 했다.  


서른도 되기 전에 코넬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 파인만은 1950년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일명 '칼텍'에서 계속 재직한다. 1981년 가을, 한 젊은 과학도가 연구원으로 부임해 파인만 연구실 근처로 온다.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더숲)를 비롯해 많은 베스트셀러 과학 교양서를 낸 칼텍 교수 레너드 믈로디노프였다. 다시 젊디 젊었을 그가 명성이 자자한 박사 논문으로 칼텍에 스카웃된 것이었다. 


우린 믈로디노프의 젊은 시절 회상을 기반으로 한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 리처드 파인만의 특별한 말년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196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머레이 겔만과 리처드 파인만의 은근한 경쟁과 서로를 향한 존경의 모습, '모든 것의 이론' 후보 중 하나이자 현재 가장 중요한 이론인 끈 이론의 초기 모습을 엿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길 잃은 젊은 물리학도의 모습을 통해 보편적 삶과 길을 함께 고민해볼 수 있겠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길을 묻고 부단한 고민 끝에 그 길을 간다. 


'과연 내가 이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이들이 한다. 누군가는 '이런 누추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고, 누군가는 '이런 대단한 곳'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테다. 나는 지극히 후자의 입장인데, 가끔은 전자처럼 생각할 때도 있다. 정답은 끊임없이 양자를 옮겨가며 균형을 유지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저자는 박사논문이 몇몇 유명한 물리학자들의 눈길을 끈 '덕분에' 칼텍이라는 위대한 곳에 특별연구원 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입장이다. '내가 이런 대단한 곳에 맞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파인만을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나의 아이디어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과학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창조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는 파인만으로부터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고, 그 중요한 것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파인만 덕분에 새로운 각도로 삶에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만의 길을 찾았다는 뜻일 테다. 우리가 이 책을 보며 얻게 될 것도, 얻어야 하는 것도 과학과 과학자의 본질보다는 그것이겠다.


대단하지 않은 말들, 거기서 얻는 대단한 깨달음


전설적인 인물인 파인만의 전설과 부합하지 못하는 첫인상처럼, 저자 못지 않게 우리 또한 파인만의 말들에서 어떤 크나큰 깨달음을 얻으려 해선 안 되겠다. 배울 게 많을 것 같다는 저자의 말에 '나는 나 자신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 뭐가 좋은지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파인만이다. 더불어 그는 지극히 당연하고 누구나 인지할 만한 이야기만을 건네준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깨달음들이 떠다닌다. 


상대방의 진심을 얻기 위해선 자신부터 진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저자는 파인만에게 그 어떤 사심이 아닌 오직 길만을 찾기 위해 다가간다. 전설적인 존재와 어떻게든 친해져 그 유명세로 사익을 추구하려는 꼼수를 가졌다면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파인만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인만은 저자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인 과학자의 자질에 대해 답한다. '보통 사람이 하는 일과 과학자가 하는 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파인만의 일련의 생각들은 길잃은 젊은 시절의 저자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을 보고 있는 모든 이에게 깊숙히 전달될 게 분명하다. 


파인만은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도 전해준다. '문제 푸는 건 간단한 거야. 모두 상상력과 끈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 라고 말이다. 저자는 이 생각을 받아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가정에 가정을 되풀이하고 어림에 어림을 되풀이해야 한다. 여기에 앞으로 나가는 능력, 직관을 따르는 능력, 자신이 하는 일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믿어야 한다.' 


당연한 말들이 아닌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당연한 말을 스스로를 돌아봐도 부끄럼 없이 하기까지 어떠한 역경을 뚫었을까 생각하면, 마냥 당연하게만 들리지 않는다. '재미 있는 일'과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는 다분히 자기계발적이고 그래서 오글거리기까지 한 파인만의 조언도 연장선상에서 생각해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분석에 영감을 준 무지개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파인만에게 당연하게도 과학적으로 대답하는 저자, 거기에 다시 답하는 파인만 대답이 압권이다. 이는 저자가 가려하는 '파인만의 길'이고 파인만의 과학이다. 


"자네는 이 현상의 핵심적인 특징을 놓치고 있군. 그의 영감의 원천은 무지개가 아름답다는 생각일세."(본문 159쪽)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는 삶


저자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심했을까. 그가 걸어가기로 한 파인만의 길은 어떤 것일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인물인 리처드 파인만의 길은, 누가 보아도 성공한 길이었을 테니 일반적으로 유추하긴 쉽다. 성취를 하고, 남에게 감명을 주고, 중요한 사람이 되고, 리더가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 길은 파인만의 길이 아니라 겔만의 길이라고 말한다. 


파인만의 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나를 감동시킨 목표를 추구하며 내 인생의 한정된 시간을 쓰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절대 놓치지 않는 삶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의 길을 저자의 길로 치환하니, '하나의 연구 분야에만 매달리지 않고, 한 가지 직업에만 매달리지도 않는, 내부에 초첨을 맞춰 관습적인 또는 물질적인 맥락에서의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는 삶'이 되었다. 


저자가 묻는 것 같다. 너는 어떤 길을 가고 싶으냐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면 나를 따라 파인만의 길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무시, 경멸감 어린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행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스승' 리처드 파인만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위대한 위인보다 '스승'에 힘을 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거다. 그만큼 우리는 스승에 목 말라 있다. 시대의 진정한 스승은 점점 사라지고 스승을 자처하는 '짝퉁 스승'이 판친다. 


평생 애제자 한 명 남기지 않은, 일반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스승과는 가장 거리가 먼 파인만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을 엿볼 때, 스승은 제자가 만드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한편 진정한 스승은 진심어린 마음만을 전할 뿐 진심따윈 없는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구나 하고 생각해본다. 이 책을 읽으며, 파인만이라는 새로운 스승을 발견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 


시대의 스승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마음 둘 곳이 점점 없어지는 기분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는 내가 또는 내 또래의 누군가가 시대의 스승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해본다. 한 없이 부끄럽고 저어되지만, 누군가는 시대를 이끌며 다음 세대를 끌어올려야 하는 게 인간 사는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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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민음사



1960년대,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한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수적이고 답답하며 까다롭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곧 결혼한 그들은 천생연분이었고,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나가길 원했다. 굉장히 전통적인 형태의 가정을. 


많은 자식을 낳아 키우며 주기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반대를 무릅쓰고 분수에 맞지 않는 큰 집을 산다. 큰 집을 사는 것도 사는 거지만, 무엇보다 많은 자식을 낳는 것에 반대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서두른, 그래서 모든 걸 다 움켜쥐려 한다는 인상. 기어코 그들은 많은 자식을 낳는다. 막상 그들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그 모습에 심취한다. 


허위에 가득 차 있는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


영국을 대표하는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싱의 1988년작 <다섯째 아이>는 평범하고 지루하기까지 한 인상을 주는 초입부를 내보인다.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까다로운 젊은 부부의 고집이 많은 이들의 질타를 뚫고 나아간다. 거기엔 왠지 모를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의도한 바이겠는데, 작가가 보기엔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생각과 행동'이 허위에 가득 차있는 것이다. 


1960년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이 요동치고 있는 시기다. '혁명의 시대', 그런 시대에 이토록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고집을 꺾지 않는 젊은이들이라니. 그들의 고집은 혁명이 야기한 혼돈을 수습하는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생각이라고 볼 요지가 충분했다. 실제로 그들은 훌륭하게 이어간다.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 넘치는 가장의식으로 무장한 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넓은 집에서 키우며 흩어진 가족들을 불러 어디에도 없을 돈독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옛날식의 행복', 어찌되었든 행복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밖에서 닥쳤다. 좋은 시절이 간 것이다. 데이비드의 회사도 일격을 받고 승진은 없었다. 


아이는 계속 태어났다. 첫째, 둘째, 셋째, 넷째까지 숨쉴 틈 없이 계속.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지쳐갔지만, 그래도 그들이 상정한 행복의 기준은 그대로였다. 사촌 브리짓은 그들을 자신의 롤모델로 여긴 참이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저도 결혼하면 이렇게 할 거예요. 난 데이비드와 해리엇 같이 될 거예요. 커다란 집을 갖고 애를 많이 낳고... 그러면 모두들 오셔야 해요."


그들이 택한 '행복'의 길, 질문을 계속 던지게 만든다


다섯째 아이 벤은 누가봐도 비정상적인 아이다. 뱃 속에 있을 때부터 엄청난 힘으로 엄마 해리엇을 괴롭혔다. 벤은 태어나기도 전에 '원수'가 되었고, 해리엇을 '미친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그 '사건'은 해리엇으로 하여금 평생을 '죄인'처럼 생각하게 한 원인이었다.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나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의 존재는 그를 포함해 다른 모든 이를 불행으로 몰아넣었고, 그 집단을 파괴했다. 


소설은 더할 나위 없는 행복에서 시작해 끝모를 불행으로 나아간다. 모든 '불행'의 씨앗은 물론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선택. 모든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하게 밀어붙인, 시대정신까지 역행하면서도 밀어붙인, '행복'으로의 길이다. 아이러니하기 그지 없다. 소설은, 작가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시대정신을 역행한 그들은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다섯째 아이 벤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벤은 파괴자인가, 소외자인가? 당신이라면 벤을 어찌하겠는가? 벤을 제외한 모든 이를 위해서 벤을 삭제하겠는가, 그럼에도 벤을 버리지 않고 다른 모든 이들이 희생하겠는가? 과연 벤을 동정할 수 있겠는가? 


나라면, 벤을 마냥 동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벤을 삭제해버리는 당사자가 될 수도 없을 것 같다. 함께 있되 그저 방관, 관찰만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이 할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무관심'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희생하는 '착한 사람'도 죄책감에 시달릴 '나쁜 사람'도 되기 싫은데. 누구도 그러지 않을까 싶다.  

'소외'에 대처하는 방법, '친화적 구별짓기'

 

소설은 그러나, 이런 류의 윤리적·도덕적 가치관의 재고만을 질문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벤이 소설의 중심에 서게 되는데, '소외'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를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했을 때,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그가 해야하는 행동은 무엇인가. 부모들은 그를 일반 학교에 보내 보통 아이들처럼 만들고자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틀린' 인간이 아닌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돌연변이가 틀린 게 아니라 다만 다르다는 걸 훌륭한 비쥬얼과 올바른 메시지로 보여주어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들은 절대 '보통' 사람들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이 그들을 적대적으로 구별짓는 한. 오직 방법은 그들을 오직 그들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 하지만 그건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적개심과 공포심으로 '소외 당하고 보호 받지도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방법이 있을까. 어쩔 수 없이 구별 짓기가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구별 짓기에 내재된 적대감을 절대적으로 멀리해야 한다. '친화적 구별 짓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가능하다면 말이다. 


모두에게 칭찬받아 마땅한 삶을 추구한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 벤은 필요 없는 존재다. 절대 있어선 안 될 존재.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삶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우리 나라에, 우리 세상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불행'만을 가져다주는가? 우리는 행복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행복의 허상, 그리고 소외의 이면, 다른 것의 정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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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해피엔딩>


<해피엔딩> 표지 ⓒ엔자임헬스



10년도 훌쩍 넘은 것 같다. '웰빙'이라는 거의 모든 곳에서 쓰였던 적이 있다. 단순히 먹고 사는 시대를 지나 잘 먹고 잘 사는 시대에 진입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혹은 오로지 물질적인 풍요와 성공만을 강요하는 시대를 지나 정신적인 풍요와 성공이 삶의 진정한 척도로 부상했다는 뜻이기도 했을 거다. 


웰빙의 뜻은 점차 확대 되었다. 이제는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이 아닌 '잘 죽는 것'도 웰빙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한지도 10년이 넘은 줄 안다. 일명 '웰다잉'이다. 말이 쉬워 웰다잉이지,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웰다잉이 사회적으로 퍼진 건 '고 김수환 추기경' 연명 치료 중단 판결 덕분이다. 2009년 선종한 그는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한 2008년 말부터 기계적 치료에 의한 생명 연장을 거부해왔고, 법원은 환자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웰다잉과 관련된 중요한 논쟁인, '존엄사' '안락사'에 대한 말들이 오갔다.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본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서 들려 온다. 시류에 은근히 민감한 출판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음을 주제로 하는 책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제목에서 죽음이 물씬 풍기는 <해피엔딩>도 그중 하나다. 영화, 소설에서나 봤음직한 '해피엔딩' 즉, 행복한 죽음이 가능할까 싶다. 


죽음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라고 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서 반드시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반드시 자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죽는다. 문제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죽음을 생각하면 오싹해지며 한기가 흐르고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를 문다. 막연한 두려움이랄까. 


책은 죽음에 조금 더 긍정적으로 접근해보려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이 여기에 해당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할까'까지 도출해보려 한다. 산증인이 필요하다. 아름다운 죽음을 실천한 이들이 있다면 가능하다 하겠다. 


김수환 추기경이 대표적이다. 그는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책에는 그런 죽음들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러서 화해하고 화합하는 현장.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죽음 앞에서 하는 것이다. 또한 죽음 앞에서 비로소 욕심 없이 모든 걸 비울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죽음이 축복이고, 행복한 죽음이 가능하다.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의 이야기


책을 보면서 내가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음 앞에 서게 되었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내 가족이나 지인이 죽는 게 더 참지 못할 순간이 될 것 같다. 반면 내가 죽는 건, 너무 두렵지만 심적으로 이전보다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면. 


그렇다. 죽음은 삶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삶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죽음과 삶을 따로 떼어낼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로 떼어낸 채 살고 있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음 앞에 와서야 비로소 삶을 후회하고 삶을 축복하고 삶을 찬양한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죽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거다. 그렇다고 괜찮지 않은 삶이 행복한 죽음을 막진 않는다. 누구나 행복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다만, 삶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정녕 후회 없이 살다가 마지막을 맞이하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산다기 보다, 삶의 소중함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맞지 싶다. 


책에는 행복하지 못한 죽음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예기치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 억울하기 그지 없는 죽음, 쓸쓸히 혼자 맞이하는 죽음 등.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죽음을 생각하기가 불가능한 죽음이다. 가족을 비롯해 그 죽음을 그나마 챙겨주고 보살피는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존엄사


일명 '연명치료결정법'이 통과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된다. 자세한 사항을 숙지할 필요가 있지만, 자신의 죽음을 자신이 결정하게 된 첫 걸음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그것인데, 더 이상 회생의 가능성이 없을 때 생명 연장 혹은 특정 치료 여부에 대한 본인의 의사를 사전에 서류로 작성해 놓는 것이다.  그건 곧 내 죽음을, 내 삶을 내 손으로 맞이하겠다는 표시이다. 


물론 여전히 연명치료와 존엄사에 대한 논란은 거세다.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개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 자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그건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단 이승이 낫다'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회생불능의 환자에게 고통만을 가해 살게 할 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존엄사를 자살과 동일시 하는 건 '틀린' 생각이다. 존엄사는 최후의 순간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책은 소개한다. 무한긍정 에너지로 마지막을 살다가 간 어느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녀는 살아생전 후회 없이 열심히 즐겁게 살았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여전히 열심히 즐겁게 '살았다'. 정말 큰 축볼인진데, 그런 '죽음'이 부러운 게 아니라 그런 '삶'이 부럽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삶을 살았다. 


죽음에 대한 보다 깊이 있고 심오한 걸 원했다. 하지만 죽음 자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어찌 훨씬 나아간 고찰이 있을 수 있겠나 싶다. 죽음을 '홍보'하는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 했다 하겠다. 죽음이 제대로 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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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젖은 모래 위의 두 발> 표지 ⓒ열린책들



책을 읽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나와 다른 삶을 구경하고 싶은 욕망에서 기인한다. 나보다 못한 삶 또는 나보다 나은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다. 아무래도 나보다 나은 삶보다는 못한 삶을 들여다보는 게 편할 것이다. 그래서 나은 삶은 거의 자기계발 영역으로 빠졌다. 반면 못한 삶은 소설이나 에세이, 자기계발에서 예전 삶으로 다방면으로 가능하다. 


<젖은 모래 위의 두 발>은 자전적 에세이이다. 그것도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을 그리고 있다. 못한 삶의 정도가 한계를 넘어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을 놓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의 필력뿐 아니라 치명적인 비극과 불행에 의한 압도적인 슬픔보다 그보다 더한 사랑과 용기 덕분이다. 이제까지 봐왔던 최루성 콘텐츠와는 결을 달리한다. 


서서히 죽어가는 두 아이와 함께 하게 될 가족


엄마 쥘리앙과 아빠 로이크는 영영 빼도 박도 못할, 일상에 아로새겨질 시련에 맞닥뜨린다. 그들의 두 살 된 여자 아이 타이스가 돌이킬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 심각한 유전병으로, 오래 살지 못하는 퇴행성 질환이다. 서서히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이 멀고, 결국에는 생명 기능까지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리고 환아의 동생이 태어날 경우 네 명 중 한 명 꼴의 발병 위험성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나쁜 유전자들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생기발랄하고 부산스럽고 자기 주도적이고 고집도 센 아이 타이스는 서서히 죽어간다. 죽어가는 타이스를 보며 쥘리앙과 로이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의학의 힘을 빌리고 24시간 곁에서 지켜보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것밖에. 이토록 치명적인 병은 들어본 적도 본 적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러 길이 있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에 압도되어 타이스의 남은 생을 눈물 바다로 보낼 것인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몸부림치는 타이스를 포기할 것인지, 아니면 슬픔과 고통과 불 보듯 뻔한 비극과 불행을 딛고 타이스의 예견된 삶을 행복과 사랑으로 채워줄 것인지. 마지막의 삶이 그들이 가야 할 길이라는 건 명백하다. 하지만 그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기 힘든 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길을 택한다. 무엇보다 타이스를 위해...


"네가 이제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된대. 엄마 아빠는 어떡하지. 그래도 우리 딸, 엄마 아빠는 너를 언제까지나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네가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뭐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우리 예쁜 아기, 엄마가 약속할게. 너는 아주 예쁘게 살다 갈 거야. 다른 아이들이나 가스파르 오빠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네가 뿌듯해 할 만한 삶일 거야. 그 삶에 사랑만큼은 모자라지 않을 거야." (본문 중에서)


그들은 처참하고 지옥 같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한다


쥘리앙과 로이크는 셋째 아이를 낳는다. 언니와 같은 병에 걸릴 확률이 25%에 달하는 아이. 25%의 확률은 100%가 되어 그들의 심장을 겨냥했다. 셋째 아이 아질리스도 이염성 백질 이영양증이란다. 소름이 끼치고 억장이 무너지고 눈물이 비 오듯 내린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진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타이스를 잘 보내고... 아질리스를 잘 살려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이 모순 속에서 중심을 잡고 살아가려니 너무 힘들다. 그들은 도움을 청한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들을 돕는다. 숨통이 트이고 눈물이 흐른다. 기쁨의 눈물인가, 안도의 눈물인가, 체념의 눈물인가.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하다. 그들의 삶을 보고 있으면 매일매일 순간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내 삶은 반대로 화창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그들의 처참한 삶에 압도되어 감히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그런 길을 걷기로 결연하게 맹세했기로서니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능한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타이스 덕분이다. 타이스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노래하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사랑한다. 그저 사랑밖에 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타이스한테 '사랑'은 남을 것이다. 타이스가 준 사랑, 타이스에게 준 사랑.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내다


흔히 비극과 고통을 억지로 이겨내려는 사랑을 보고 '오그라든다'는 말을 쓴다. 그럴 때 고통의 눈물과 사랑의 환희는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자 방법이다. 반면 이 이야기는 어떤가. 비극과 고통의 극단에서 행복과 사랑의 극단을 끄집어냈다. 극단으로 치닫는 건 좋지 못하고 극단과 극단은 서로 통한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전자는 틀리고 후자는 맞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극단에는 극단만이 대항할 수 있는 것이다. 


"귀여운 우리 딸, 엄마가 애원하잖니, 조금만 더 싸워 줘. 제발 버텨 줘. 네가 없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나의 태양이고, 나의 세상이고, 나의 마음, 나의 힘, 나의 급소란다. 네가 나의 반석이고, 나의 심연이야. 사랑한다, 내 딸아. 지금 가면 안 돼. 오늘은 여기 있어 줘.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본문 중에서)


이 짧은 소개로는 그들의 고통을 1%도 전해줄 수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한다고 해서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또한 각자의 아픔이 있을 뿐이다. 온전히 그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없다. 


그런데 신기한 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 만은 이 짧은 소개로도 충분히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접하면 그들의 사랑을 더욱 이해하고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또한 사랑을 힘껏 공유하고 있다. 온전히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고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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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아들러의 격려> 표지 ⓒ생각정거장


2015년에는 아들러 열풍이 계속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 열풍은 지난해 말부터 시작되었는데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시작이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아들러 심리학 제1인자인 철학자와 베스트셀러 저자의 문답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아들러 심리학 철학자와 세상에 부정적이고 열등감 많은 청년으로 포지션 시켰습니다.

 

이 문답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얻으려 한 건 다름 아닌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복지수가 최하로 떨어진, 앞으로도 계속 떨어질 것 같은 지금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어본 콘텐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계발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아들러에게 영향을 받은 자기계발의 멘토들 책이 불티나게 팔렸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야 상륙한 아들러 열풍의 상황은 아이러니하면서도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소위 대박을 터뜨리고 난 후, 아들러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년도 안 된 지금 얼추 30권 이상은 출간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한 사람 또는 한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많은 콘텐츠가 생산되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는 건 거기에 독자들을 확실하게 잡아 끌만한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겠죠. 다름 아닌 행복일 것입니다.

 

아들러 열풍이 한창이었던 지난 20155월 출간된 <아들러의 격려>는 열풍의 수혜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1931년 아들러의 직속 수제자이자 동료였던 W. 베란 울프가 아들러의 연구 자료를 모아 출간했다고 합니다. 원제는 한국 제목과는 전혀 다른 <How to be happy though human>인데요. 그야말로 행복을 전면으로 내세운 저작이라 하겠습니다. 과연 그는 아들러 심리학을 가져와 행복에 관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을까요?

 

본격적으로 책을 다루기 전에 아들러를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러, 아들러 하는데 도대체 아들러는 어떤 사람인가? 아들러는 어떤 이론을 만들었나?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자랐다고 합니다. 그에겐 형과 동생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 껴서 고생을 했다고 하네요. 어렸을 때 동생이 죽은 걸 경험하기도 했고요. 한편 그는 매우 낮은 학업 성적을 기록했고 유난히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열등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이후 그는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고 결국 의사가 되었습니다.


열등감과 행복

 

이런 그의 삶은 고스란히 그의 이론으로 나타납니다. 그는 프로이트와 함께 활동했는데요. 이들은 기본적인 생각은 유사했지만, 이론을 이루는 결정적 틀이 달랐습니다. 프로이트가 과거의 경험과 타고난 기질만이 그 사람의 정신세계 전체를 결정한다고 했던 반면, 아들러는 개인의 행동에 따라 충분히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죠. 아들러는 인간은 타고난 불안전성을 갖고 있다며 여기서 발생한 열등감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 열등감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죠. 열등감은 족쇄가 아니라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프로이트가 과거를 빚대어 현재를 해석하려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아들러는 현재에 목적을 두고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과거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죠. 이는 곧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베란 울프는 <아들러의 격려>에서 이와 같은 아들러의 이론을 독자적 해석과 다양한 임상 사례을 통해 풀어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단언하면서 시작하는데요. 아들러 심리학을 꿰뚫는 제일 중요한 명제일 것입니다. 이 열등감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이를 설명할 가장 쉬운 사실은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경험하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독립된 생명체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지만, 인간은 그러지 못하다는 것이죠. 의존성이 높은 인간, 그 의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존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죠. ,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태생적인 결점, 부족함, 열등감을 인간은 이를 보상하려는 생각이 자연스럽습니다. 베란 울프는 이 보상 작용 중 가장 훌륭한 예를 어떤 결함을 지닌 기관이나 열등감을 보상해 주는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라고 합니다. 열등감을 극복하고 보상하기 위해 노력이죠. 책에서는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아이는 요리하는 일이나 식료품을 공급하는 조직에 일생을 바치려 하고, 의사나 장의사 중 가족의 죽음이나 병의 기억을 지닌 사람이 많다고 하는 예를 듭니다. 누구나 다 그렇다면, 저 또한 그런 경험이 있을 텐데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아기였을 때 어른들이 저를 자주 울렸다고 해요. 하도 귀여워서 괜히 만지고 건드리고 했나 봐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이가 어느 정도 된 후 아기가 우는 게 그렇게 싫을 수가 없어요. 아기가 울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르고 달래주어야지요. 아기가 싫어할 만한 행동 말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행동만 해야지요. 사촌들이 하나 같이 나이 차이가 많이 났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그 사촌들을 참 잘 보았던 기억이 나요. 저하고 같이 놀면 절대 울지 않았죠. 이것도 일종의 보상 작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편 베란 울프는 책을 통해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며 행복이라는 목표는 변하지 않지만, 그 목표를 위한 도구는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도구를 잘못 선택하게 되면, 행복이란 목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인데요. 그는 허영심과 야심, 질투, 우유부단함, 꾸물거림, 갈등과 죄악감, 완전주의, 경건주의 등을 불행해지기 쉬운 도구로 뽑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도구들 또한 잘 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그입니다.

 

예를 들면 야심을 사회적으로 유용한 목적을 지향할 때 사용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적이라는 말이 중요한데요. 아들러가 창안한 개인심리학이 개인이 사회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해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죠. 행복 또한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베란 울프는 야심의 측면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동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와 같은 굉장히 사회지향적인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측면은 현대 사회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개인주의적인 성향에 환멸을 느끼고 지칠 대로 지친 지금 딱 맞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들러 열풍의 근원지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를 부정하다


베란 울프는 이 책을 통해 아들러를 칭송하는 한편 여지없이 프로이트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요. ‘프로이트를 버려라’,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함정’, ‘사실 어릴 적 기억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등의 챕터를 통해서입니다. 그 중 가장 강렬한 제목인 프로이트를 버려라를 통해 베란 울프는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인 ()’을 부정합니다. 전면적인 부정은 아니지만 말이죠.

 

먼저 열등감을 보상하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살아라’, ‘자신과 사이좋게 살아라라는 주장을 하며, 특히 두 번째 방법을 내적 보상이라고 명명하며 이를 위해 창조적인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며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하면 성적 에너지를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그렇게 내적 보상을 유도한다고 비꼬고 있죠. 그는 성적 에너지를 배고픔이나 갈증, 호흡, 노폐물의 배설과 동급으로 취급하며. 인간의 창조 활동을 설명하는 데 프로이트의 이론은 필요 없다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론이라는 것이 기존 이론을 계속 혁파하며 발전하는 것이라지만, 이런 식의 편협한 부정은 조금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그것이 주를 이루지는 않고 있기에 균형감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베란 울프가 책을 통해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는 바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행복이라는 목표에 다다르는 방법에 있습니다. 그는 행복이라는 목표가 정해지면 그를 위해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방식을 동료들의 행복과 안정을 위해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표현인지요! 그리 되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겠습니다.

 

매력적인 책


이 책의, 나아가 아들러의 이론의 결정적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당히 이상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다른 아들러 관련 책이 아닌 이 책에 한정적일 수 있겠지만, 너무 교훈적인 내용의 나열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존의 일명 힐링책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상당히 구체적인 해결책 내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이렇게만 하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여러 면을 아울러 검토해 본 결과, 중간 중간 보이는 조금씩의 어폐에도 불구하고 이 책, 분명 매력적입니다. 세계 대공황 당시 출간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게 다가올 정도로요. 그때 못지않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금, 아들러 열풍이 어찌 보면 당연하게 찾아왔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한편 역사는 돌고 돈다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의 시기는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할 테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며 어느 때보다 행복을 찾아 헤맬 테죠. 그럴 때면 여지없이 누군가가 이론을 정립하여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 열광하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역사의 반복성이야말로 모든 것의 위에 있는 진리가 아닐지, 새삼 반추해봅니다. 


아들러의 격려 - 10점
W. 베란 울프 지음, 박광순 옮김/생각정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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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부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2년이 지났다. 10살 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20년 동안 혼자 사신 건데, 그럼에도 외할아버지는 정말 건강하셨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쓰려지셔서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건강을 되찾고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그러고는 얼마 안 있어서 다시금 쓰러지시곤 일어나지 못하셨다.  


그때 집안 어른들은 외할아버지를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호스피스 병원으로 모셨다. 그리고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된 모든 가족들이 한 번씩 왔다 갈 때까지 살아 계셨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당신 생의 마지막에 만족하셨을까? 혹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가족들을 원망하셨을까?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생의 끝까지 죽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과 이별 후에 남겨질 슬픔, 그리움을 견디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발전해 왔다고 한다. 생명 연장의 꿈! 그 꿈은 거의 현실이 되었다. 비록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겠지만, 무슨 수를 쓰던지 생명을 연장 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 의학이 오히려 죽음의 순간을 망가뜨린다


문제는 죽음을 적으로 인식하고 어떻게 하든 피하려고 만 할 뿐, 죽음을 자연스러운 이치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는 여기서 시작한다. 죽음이 비록 우리의 적일지 모르지만,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말이다. 이런 인식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는 지금, 현대 의학은 오히려 죽음의 순간을 망가뜨리고 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 의학이 해결하지 못할 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해결하지 못할 문제에 달려 들어 환자들의 죽음을 단지 의학적 경험으로 생각해 인위적인 생명 연장을 실행한다면? 분명 엄청난 고통을 초래하게 되고 말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양한 사례와 함께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먼저 자신을 포함한 의료계 종사자들에게 말한다. '건강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 그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한다고. 그건 바로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부는 것이다. 그 방법론으로 '완화치료'가 떠올랐고, 저자는 이 방법으로 환자의 마지막을 보살펴준다면 분명 환자에게 놀라운 혜택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에는 수많은 실제 사례들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 사례들의 주인공인 환자들은 하나같이 생의 마지막을 고통스럽게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죽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들과 함께, 온갖 의료 기기들에 둘러싸여 생명만 부지하며,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건 병원 뿐만 아니라 요양원도 마찬가지다. 앨리스 할머니는 "집이 아니라 병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기도 했다. 


요양원도 환자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도 존재한다. 집에서 보살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노인 환자들의 경우, 병원이 아닌 요양원으로 보내지곤 한다. 치료 보다는 요양을 통해서 보살핌을 받고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요양원에서의 보살핌은 환자가 원하는 보살핌이 아니라고 말한다. 환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는 저물어 가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곁에 있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수 있게, 그리고 그저 수수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도 생의 마지막까지 '삶의 질'을 우선시한다는 것,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주길 바란다는 것, 그리고 그저 안식을 원하고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란다는 것. 하지만 이 문제를 기존의 병원이나 요양원이 완전히 이행할 수 없다는 것. 저자는 이를 위해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며 그 개념을 지지한다. 앞서 말한 '완화치료' 방법론을 실행에 옮긴 것이리라. 


1990년대 초, 미국 오리건주의 케런 브라운 윌슨은 '어시스티드 리빙'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집이라는 환경 안에 환자들이 원한 바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개념은 '보호시설에 감금됐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자'는 데 목표를 두었다. 환자는 없었고, 거주민 만 있을 뿐이었다. '집'과 다를 바 없는 시설에 반려동물을 키우는 걸 비롯해 거의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다만 단지 내에 항상 간호사가 대기해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하였다. 


삶의 질을 추구하기 위한 생의 마지막에 대한 구상


이 실험을 비롯한 '생의 마지막에 대한 구상'의 개념은 성공한 듯 보인다. 오히려 기대 수명이 늘어 났고, 무조건적인 생명 연장에 따른 의료 비용이 줄었기 때문에 종말기 의료 비용도 엄청나게 줄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질을 추구했기에 환자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는 사망률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결과가 가장 중요하진 않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했다는 것 그 자체다. 그들은 의미 있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물론 얼마나 더 오래 사는 지에 더 중점을 둘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것은 의학이 만들어낸 가면이 아닐까? 


"의료 전문가들은 마음과 영혼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 집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기울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의료 전문가들에게 맡겨버렸다." (본문 중에서)


시선은 호스피스로 옮겨간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 가톨릭계 병원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그래서 인지 호스피스 하면 종교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호스피스를 엄연한 의학의 한 부분으로,  지난 10년 동안의 '연명치료' 실험을 뒤로 하고 심각한 질병을 앓는 환자들을 대할 때 중요한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이 또한 앞서 언급했던 '완화치료' 개념의 실행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당하는 죽음에서 맞이하는 죽음으로


책은 '독립적인 삶'에서 시작해 '용기'로 끝난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서인 것 같은데, 반대로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우리는 삶의 주인으로서 자율성(자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핵심적 가치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립적인 삶은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하지만 죽음 또한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는 신봉하고 그 자유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면서도, 정작 죽음과는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건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에 '용기'를 말하는 것 같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대하는 용기 말이다. 


과연 나에게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삶의 질을 우선하여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떤 기술도 행하지 않겠다며,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여 치료를 해서 완치가 된다면? 완치는 안 되더라도 단 며칠, 몇 개월, 몇 년을 더 살 수 있다고 한다면? 물론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더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삶이 고통의 연속 아니던가? 


선택의 독자의 몫이고 우리의 몫이다. 이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바, 삶에서 선택의 순간들이 자신들의 몫이었듯 죽음의 순간도 자신들의 몫이라는 걸 인지해야 한다. 미국은 2010년 이미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한 비율이 70%를 넘었다고 한다. 이는 의식을 회복할 수 없을 때 환자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으로, 연명치료를 포기한다는 문서이다. 


우리나라에도 '웰다잉(Well-dying)'이라는 개념으로 차츰 정착되고 있다. 지난 2009년 고 김수환 추기경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존엄사를 몸소 실천한 바 있다. 죽음은 결코 친숙해지기 쉽지 않다. 죽음에는 '혼자'라는 개념이 깊숙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외롭지 않은 죽음이라면 어떨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관심을 갖고 생각은 해봐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10점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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