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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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빌리 엘리어트>


우리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천재 신화의 기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 무엇일까? ⓒ팝엔터테인먼트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가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에 안착하는 이야기,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되풀이 되는 이야기 구조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기 힘들기에,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하겠다. 굳이 보지 않고도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또는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정작 자신은 모른다. 우연히 눈을 뜨고 그를 이끄는 선생님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끌려서 시작하고, 점점 더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지 않아 역경이 닥친다. 태생적으로 불우한 환경, 주위 사람들의 반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철회. 


어느새 다시 끌리고 결국엔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반대했던 주위 사람들이 가장 믿음직한 서포터가 된다. 모두의 기대와 믿음을 한 몸에 받고, 또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우뚝, 다시 찾아보기 힘든 성공을 쟁취한다. 우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이 스토리 라인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다. 


'천재'가 아닌 천재를 둘러싼 '환경'을 조명하다


무수히 많은 천재 이야기들, 분명 거기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계속 양산 되는 듯. 반면 이 영화는 천재가 아닌 천재의 환경에 집중했다. 그곳엔 무수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고 심지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것엔 분명 다른 무엇이 있을 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엘리어트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를 둘러싼 것들을 보아야 한다. 


1984년 영국 탄광촌, 대규모 파업으로 동네는 마비 상태다. 아빠와 형 모두 광부인 빌리 엘리어트네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빌리는 춤을 좋아하는데, 아빠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 못해 권투를 배우러 다닌다. 


어느 날 함께 체육관을 쓰게 된 발레수업단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곧 그의 눈은 그곳에 못박혀 움직일 줄 모르고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한다. 선생님은 한 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발레를 배울 것을 중용한다. 하지만 그에겐 상남자 아빠와 형이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가 발레를 하는 건 잘못된 거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당시다. 이후의 스토리는 누구나 익히 알만 할듯. 빌리는 과연?


영화는 '천재'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 천재의 성장과 고민, 천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형상화 시키는 요소들, 즉 춤과 행동과 음악들에 집중한다. 그렇게 감독은 지극히 식상한 스토리를 지극히 개념있는 영화적 스토리로 탈바꿈 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를 만끽할 수 있다. 


상승과 하강, 이 영화에서 보고 느껴야 하는 키워드


이 영화의 빛나는 성취가 있다면, 상승과 하강의 기막힌 대비에서 보여지는 천재의 이면이다. 절대적 공감의 끝엔, 천재가 천재일 수 있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팝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다름 아닌 '파업'이다. 정확하게는 파업으로 대변되는 '현실'이겠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천재는 다분히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라는 말도 꺼내기 힘든 '이상'이 아니겠는가. 천재, 아니 한 아이의 성장 그 이면에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괴리가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능력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빌리의 점프 장면이 계속된다. 중반부쯤, 빌리가 멋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할 때면 전에 없이 극렬해지는 파업 현장이 비친다. 마지막에 빌리의 점프 장면이 다시 나오는데, 그 직전엔 다시 땅굴로 내려가는 아빠와 형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한 후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빌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시종일관 상승과 하강의 연속이다. 당연히 상승은 성공과 이상을 하강은 시련과 현실을 뜻하겠다. 빌리가 이상에 가까이 갈수록 아빠와 형은 현실로 향한다. 빌리의 기막힌 재능이라는 씨앗도 아빠와 형의 헌신이라는 거름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 이토록 극렬한 대비를 이토록 유려하게 표현해내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이자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와호장룡>에서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한 상승과 하강의 절묘한 대비를 볼 수 있다. 오로지 상승을 목표로 살아왔던 용, 하강이 갖는 부드러운 강함의 경지를 체득한 리무바이. 영화의 마지막, 용이 끝없는 안개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빌리 엘리어트>가 선사하는 바가 이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하지만, 충분히 빛나고 빛나는 성취다.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시대,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빌리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상하고 진부하고 고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팝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빌리가 아닌 빌리의 가족,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그들에게서 우리 윗세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구어 '개천에서 용 난다'를 가문의 단 하나의 목표로 삼고 될 성 싶은 잎 한 명을 골라 그만을 지원했다. 다른 이들은 현실의 무거운 짐을 일찌감치 지고 평생을 희생했다. 


빌리의 아빠와 형은 파업으로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지만, 빌리를 위해선 자신이 자신일 수 없었다. 그 소박한 이상조차 버리고 현실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땅굴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윗세대에서 '용'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겪었을 이야기다. 


이제는 희생으로라도 엮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된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참조한 식상한 이야기는, 그래서 또 다른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욱더 응원하게 된다. 식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식상하더라도 좋으니 꼭 성공하라고 말이다.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릴까봐 두렵다. 부디 많은 이들이 '빌리 엘리어트'를 꿈꾸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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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무한대를 본 남자>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천재' 영화. 이번에는 어떤 천재를 그려낼까? 그에게서 천재말고 어떤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을까? ⓒ판씨네마(주)



천재에 관한 영화를 꽤 봐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에 관한 영화이고, 주기적으로 다시 보는 <굿 윌 헌팅>, <뷰티풀 마인도>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천재 영화이다. 재작년과 작년과 올해에도 천재 영화를 봤는데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이미테이션 게임> <세기의 매치>가 그것이다. 역시 모두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했다. 


2016년이 저무는 지금, 또 하나의 천재 영화가 나왔다.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의 삶을 옮긴 <무한대를 본 남자>.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알아준 '하디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라마누잔은 다름 아닌 영국에 의해 점령당한 식민지 인도 출신인 것이다. 반면 하디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 교수이자 왕립학회 회원이고. 정녕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둘은 라마누잔과 하디였지만, 누군가에겐 '식민지 유색인종'과 '영국의 저명인사'였다. 


빈민가에서 죽어갔을지 모를 '천재' 라마누잔



역사에 길이남을 수학 천재 중 한 명인 '라마누잔'. 그는 인도 빈민가에서 평생 지내다 그렇게 죽어갈 운명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리고 수학계와 인류에게 빛이 되는 존재가 있으니, 대영제국의 하디 교수다. ⓒ판씨네마(주)



영화는 '천재' 라마누잔의 삶을 엿보며,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의 특별한 관계를 조명한다. 당대 수학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라마누잔, 그는 하디 교수가 아니었으면 식민지 인도의 어느 빈민가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한편, 하디 교수 또한 라마누잔을 발견해내 따로 또 같이 연구함으로써 세계 수학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였다. 


라마누잔은 인도 마드라스의 빈민가에서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숫자에 관해선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실력을 갖춘 그는 회계 일을 하고 싶어했고,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거절을 당한 끝에 우체국 회계과에서 일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인도인 상사는 그의 천재적인 수학 실력을 알아채고 더 큰 세계인 영국으로 떠날 것을 중용한다. 누구 한 사람만 알아주라는 기대로, 수없이 많은 편지를 날리는 라마누잔. 그 편지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하디 교수한테까지 전해진다. 


단번에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알아챈 하디 교수는 동료 교수와 합심해 라마누잔을 데려온다. 라마누잔은 머릿속에서 춤추는 수많은 수학 공식과 숫자들을 뿜어내기 위해 갓 새신부와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영국으로 간다. 그는 매일 하디 교수의 집무실로 찾아가 개인 교습, 토론, 연구를 계속한다.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라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다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편 라마누잔은 유색인종, 종교로 괴롭힘을 당하고, 집과 가족이 너무 그리워 앓기도 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정진하지만, 급기야 결핵에 걸리고 마는데...


라마누잔를 발견해낸 하디 교수


대영제국의 왕립협회 회원이자 저명한 교수인 하디 교수. 그는 식민지 인도의 일개 회계원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그를 영국으로 불러와 함께 수학의 차원을 몇 단계 올리는 일에 매진한다. ⓒ판씨네마(주)



거의 매년 만들어다시피 하는 천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천재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천재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궁금해진다. 대부분의 일반인이 천재가 아니기 때문일 텐데, 그들에게 천재란 '특별'하고 '다른' 삶일 것이다. 평생 직접 겪어볼 수 없기에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보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천재 이야기는 오락성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천재 이야기는 많은 경우 실화이고, 실화는 오락성을 표출하기에 한계가 있기에 정극으로 가곤 한다. 그럼에도 천재의 삶이 대부분 평범하지 않고 우여곡절이 많기에, 그 자체로도 극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무한대를 본 남자>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천재라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라마누잔의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기 힘든 경험이 주를 이룬다. 


그렇지만 영화가 '천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천재' 라마누잔과 그를 알아준 하디 교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천재 '라마누잔'과 '그를 알아준' 하디 교수의 이야기인 것이다.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바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재미는 많이 퇴색되고, 감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는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할 듯하다. 


개인적으론 무난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수학' 천재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진 않을 거다. 음악, 미술, 건축과는 달리 오직 그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함이나 그의 위대함이 제대로 비춰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럴 바엔 그 부분을 줄이는 게 좋을지 모른다. 반면, 천재만의 특별하고 다른 세상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은 건 또 그런 영화만이 가지는 장점을 퇴색시켜버린 게 된다. 그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잘 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난했다는 건 경계선을 많이 침범하곤 했다는 의미이다.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의 특별한 관계 이야기


수학계를 몇 단계 끌어올린 라마누잔의 천재성은 역사가 보증한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봐준 하디 교수야말로 정녕 위대한 인물이다. 그런 그들의 특별한 관계는 아름답다. ⓒ판씨네마(주)



이 영화가 승부를 본 건 다름 아닌 '관계'이다.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의,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관계 말이다. 첫째로 그들은 제국 영국인과 식민지 인도인 사이다. 둘째로 왕립협회 회원의 교수와 무명인 사이다. 셋째로 그들은 절대적 무신론자와 독실한 종교인 사이다. 당시로선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 먼 사이인 것이다. 그런 그들 사이에 '관계'라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 기적은 라마누잔의 천재성보단 하디 교수의 태도에 기인한다.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가 만나면서 영화는 '천재' 이야기에서 '관계' 이야기로 무게의 중심이 옮겨진다. 여기에서 호불호가 갈린다. 영화로 소개되지 않았던 또 다른 천재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그들만의 특별한 관계의 세계로 들어온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하디 교수의 라마누잔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지극히 사적인 것 같지만 사실 지극히 공적이다. 천재인 그를 총애해 그를 향해서만 애정을 쏟으며 자신의 시간과 공력을 투자해 가르치고 그의 공식이 공신력을 얻을 수 있게 발벗고 나선다. 라마누잔에겐 기적과도 같은 이런 상황을, 어째서 하디 교수는 정력적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그건 라마누잔으로 하여금 수학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게 하려는 의도의 발현이다. 그것이 아니고는 하디 교수의 라마누잔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돈? 명예? 권력? 모두 아니다. 


한편 라마누잔은 어떨까. 그는 머릿속에서 춤추는 무한대의 숫자와 공식들을 밖으로 보여내기 위해 하디 교수를 찾았다. 말그대로 그의 머릿속엔 수학 말고는 다른 무엇이 들어 있지 않았다. 가족도 뒤로 한 채, 자신의 나라를 식민지로 둔 제국의 한복판으로 오지 않았는가. 그때 이미 결정이 난 것이리라. 그의 인생에서 다른 무엇도 필요 없다는 것을. 그 부분에서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는 일치단결했다. 


올바른 관계 설정은 정말 어렵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아닌가. 어려울 때 도와준 이에게 평생 감사하며 은혜를 베푸는 게 또 인간의 도리 아니겠는가.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지만, 공이라는 게 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진짜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닐 거다.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없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지극히 잘 알고 있는 그 선을 지키며 나아가는 게 어려울까. 관계 설정은 어려울지 모르나, 설정이 끝난 뒤 선을 긋는 건 '선(善)'과 '악(惡)'의 차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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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4등>


영화 <4등>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4등은 참 애매하다. 특히 스포츠에선 애매하다못해 잔인하다. 1, 2, 3등만 시상식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누구는 4등이나 꼴등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4등이라서 다른 누구보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4등이 참으로 잔인한 이유다. '희망고문'이라고 할까. 


영화 <4등>은 자타공인 수영에 소질이 있지만 대회만 나갔다 하면 4등을 면치 못하는, 즉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는 소년 준호의 이야기다. 그에겐 누구보다도 그를 챙겨주고 걱정하고 괴롭히는 극성스러운 엄마가 있다. 그녀에겐 4등이 꼴등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준호가 소질이 있다는 걸 알거니와 하필 4등이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어떻게든 메달을 따게 해준다는 코치를 찾아간다. 


한편 준호는 왜 1등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굳이 1등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수영에 소질이 있는 건 알지만, 수영이 좋고 물이 좋은 것 뿐이다. 물에 있을 때 편안하고 좋은데, 자꾸만 1등을 하라고 하면 그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왕이면 메달을 따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 엄마 따라 코치에게 배워보고자 한다. 신기하다. 성적이 올랐다. 그런데 이 코치가 사정없이 때리는 게 아닌가.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오로지 1등을 위해서


영화는 이처럼 세 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들 준호를 위해서' 오로지 1등을 외치는 엄마, 역시 '준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코치 광수,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지만 수영이 하고 싶다는 것 하나는 잘 알고 있는 준호. 코치 광수는 때려야만 몸이 체득하고 말을 잘 듣고 악이 생겨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준호는 1등하는 건 싫진 않지만(1등을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맞는 건 싫다고 말하며, 엄마는 아들이 맞는 건 싫지만 맞아서 1등을 하면 나쁠 것 없다고 말한다. 


"형, 1등하면 기분 좋아요? 그런데 왜 1등을 하려는 거예요?"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걸까. 여기에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걸까. 중요한 건 당사자인 준호의 마음일 텐데, 또 그렇지만도 못한 현실이다.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이 커서 제 구실을 못할까봐 걱정이다. 경쟁의 정점인 스포츠에서 순위권에 들지 못하고 어떻게 제 구실을 할 거란 말인가. 극 중 엄마의 모습에 마냥 너무하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코치 광수의 경우엔 조금 다르다. 그는 가해자임에 분명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유로 인해 가해를 했다. 또한 그도 피해자다. 그는 오래 전 아시아 신기록까지 이뤄낸 적이 있는 천재였다. 하지만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감독에게 체벌을 받아 그 분을 참지 못하고 대표팀을 뛰쳐 나왔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인데, 그에겐 굳이 스승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체벌(폭력)이 되물림 되었다. 


<위플래쉬>와 <4등>


이쯤에서 1년 전 개봉해 많은 인기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위플래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악마와 같은 인신 공격과 한계를 뛰어 넘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천재성을 끄집어내는 플래처의 방식은 광수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 방식을 뿌리치고 그만둬버리지만, 열정과 관심을 뒤로 돌리지 못하고 자신 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끄집어내는 앤드류는 준호를 연상시킨다. 


영화 <위플래쉬> 포스터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개인적으로 <4등>이 훨씬 유려하게 풀어낸 것 같다. 앤드류는 플래처를 뛰어 넘는 엄청난 연습으로 플래처 앞에서 보란듯이 훌륭한 연주를 선보이지만, 준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습을 한다. 그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거기에 엄마와 코치가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동안이나마 수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았다면, 그렇게 수영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대표팀 감독이 광수를 체벌하고 광수가 준호를 체벌하고 급기야 준호가 동생을 때리는(체벌하는 것처럼) 장면을 보고 있자니, 폭력의 되물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의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면 군대 내에서의 폭력의 되물림이 두 명을 죽음으로 몰고가는데, <4등>에서는 두 명의 수영 인생을 망치거나 망칠 뻔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되물림, 정확히는 스포츠계에서의 체벌의 일상화와 되물림 또한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어려운 문제인 아이 교육, 답은 있을까?


영화는 참으로 중대하고 풀기 어렵고 심각한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뤘다. 도무지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차라리 아이가 없었으면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다들 문제는 인식하고 있지만, 막상 닥치면 누구라도 준호의 엄마처럼 또는 그에 준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엄마, 내가 맞더라도 1등을 하는 게 좋아?


영화는 소년의 훌륭한 성장담을 유려하게 풀어내며 답을 제시한다.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의 앞날을 걱정해 1등을 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 자신들의 위신도 그 1등에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부모들부터 여유를 갖고 중심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영화에서 준호가 지니고 있는 '천재성'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평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모든 걸 떠 맡기고, "너의 삶이니 너가 알아서 해라"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이것도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여유를 갖고 "한 번 해봐"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칭찬해주고 지원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아갈 준비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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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표지 ⓒ섬앤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우리나라의 '이상'과 같은 느낌이자 위상을 갖고 있다. 각각 30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그렇고, 일본의 '아쿠타가와상'과 한국의 '이상문학상'이 그 이름에 걸맞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것도 그렇다 하겠다. 실제로 이상은 아쿠타가와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천재들의 합창이다.


우리에게 아쿠타가와는 어떻게 다가올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알지 모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라쇼몽>. 그 원작을 그가 썼다. 1915년 작인 <라쇼몽>과 1922년 작인 <덤불 속>을 교묘히 각색했다. 인간의 내면, 나아가 심연을 이토록 완벽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니. 또한 이 작품은 굉장히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뽐내는데, 그 의식과 수법은 다름 아닌 그의 생애 처음의 '중국 기행'에서 영향을 받았다. 대단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1/5이 지나가는 시점에 자살로 생을 마쳤으니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짧은 평생, 외국에 나가보는 게 꿈이었던 그에게 기회가 온다. 1921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의 객외 사원이 되었고 곧 중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약 4개월 간 체류하였고 돌아와 <상해유기> <강남유기> <장강유기> 따위를 집필했다. 


만족스러운 거 하나 없는 중국의 첫인상


중국에 가기 전, 아니 평생에 걸쳐 그는 서구 지향 일변도의 문단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외려 한문맥적인 전통에 근거해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중국에 대한 관념을 쌓아 올린 아쿠타가와는, 그 근원인 중국에 가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완전하게 즐기고 만끽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본 중국의 실상은 그가 쌓아올린 관념으로서의 중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낯 두꺼운 노파와 낮에 탔던 인력거,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아쿠타가와가 받은 중국의 첫인상이었다. 그들은 초라하고 비참해 보였고 약싹 빠르고 비굴해 보였다. 또한 그가 중국에서 보낸 첫날 밤의 숙소에서 느낀 건 '만족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현대 중국에 무엇이 있는가?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모두 타락해 있지 않나? 특히 예술에 대해서 말하자면 가경과 도광 시기 이후 무엇 하나라도 자랑할 만한 작품이 있나? 게다가 국민은 노소를 불문하고 제 멋대로 태평이다. 물론 젊은 국민 중에는 조금이나마 활력이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라 해도 전 국민의 마음에 울릴 정도로 커다란 정열은 없음이 사실이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가 없다." (본문 212p 중에서)


첫인상이 안 좋은 건 괜찮다. 앞으로 나아지면 되니까. 그렇다면 과연 아쿠타가와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나아졌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중국 자체에 대한, 요컨대 자연 풍경이나 사람들의 행태에 대한 인상은 하등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가도 그가 그리던 중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가 애초에 품어 왔던 중국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기에, 실망을 하면서도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다만, 그가 만난 위대한 인물들은 '역시'라는 생각이 들 만했다. 


아쿠타가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다층적인 중국 기행


중국을 가기 전과 후의 상호 모순적인 생각을 공유하게 되는 아쿠타가와. 그 혼란의 와중에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생각을 거두지 않는다. 특히 중국은 당시 일본과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타자가 일본을 보고 느끼는 바를 적나라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걸 여실히 보여주는 천평산 백운사 정자 벽의 배일 낙서.


" 그중에는 "여러분! 거기 있는 당신 말입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저 굴욕적인 21개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것과 "개와 일본 놈은 벽에 낙서하지 말 것"이라는 것도 있었다.(그러나 시마쓰 씨는 태연하게 층운파의 하이쿠 제목을 짓고 있었다.)" (본문 154p 중에서)


이런 낙서를 마주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자신이 동경하는 곳에 와서 자국을 욕하는 낙서를 보는 심경이. 그러면서 함께 간 또 다른 자국민은 태연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란. 자기 분열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그는 몸이 좋지 않았는데, 빡빡한 일정의 여행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행을 다녀와 글을 쓰는 와중에도 좋지 않은 몸이 더욱 안 좋아져 많은 고생을 한다. 이처럼 그의 생애 최초 중국 여행은 다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그의 작품 활동과 그의 세상을 보는 눈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책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전환점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우리에게도 아쿠타가와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21세기 초, 전 세계는 혼란했다. 아시아는 그 혼란의 중심에 있었다. 거즌 100년이 지난 지금은? 혼란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여러 의미로 아시아가 그 중심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때 그 시절 일본 최고의 작가가 바라본 혼란의 한 가운데는 어땠을까. 처연했을 거다. 헛헛했을 거다. 혼란스러웠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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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기의 매치>



영화 <세기의 매치> 포스터 ⓒ판시네마(주)


1972년, 냉전 한복판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체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 그 주인공은 미국의 체스 천재 '바비 피셔'와 러시아의 체스 황제 '보리스 스파스키'. 6세에 체스 입문, 13세에 미국을 제패하고, 15세에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획득한 바비 피셔는 30세에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다. 보리스 스파스키는 30세에 그랜드마스터가 되었고 33세인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적의 체스 황제로 군림하고 있었다. 


천재 대 황제의 대결에서는 천재가 이기곤 한다. 그렇게 한 시대가 흐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재에겐 우여곡절이 많다. 체스를 예로 들면, 천재는 오로지 체스만 잘 할 뿐이다. 체스 이외의 것에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문제는 천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들은 체스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한다. 천재가 체스를 잘 해서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 ⓒ판시네마(주)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1972년 체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은, 천재 바비 피셔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건 보리스 스파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체스로 상대방을 이기고 챔피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 만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자국 선수의 승리를 자국의 승리로 여겼다. 


예민함과 외로움이 천재적인 체스 재능으로


영화 <세기의 매치>는 바비 피셔의 어린 시절부터 1972년 체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까지, 그의 체스 일대기를 다뤘다. 바비 피셔(토비 맥과이어 분)는 혁명을 주창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연히 감시가 따라다녔고 피셔에게 감시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몹쓸 것이었다. 그 때문에 피셔는 어릴 때부터 극도로 예민했고 외로웠으며, 그 예민함과 외로움이 체스로 옮겨졌다. 


곧 체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피셔, 일사천리로 미국을 재패하고 세계 재패로의 길을 떠난다. 그렇지만 어릴 때의 트라우마는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그가 실력을 100% 낼 수 없게 만들었다. 드디어 세계 챔피언 보리스 스파스키에게 도전한 피셔, 하지만 첫 번째 도전은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 ⓒ판시네마(주)



이듬해 다시 도전장을 내민 피셔, 전 세계의 수많은 그랜드마스터들을 꺾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셔는 당당히 그들을 모두 꺾고 다시금 보리스 스파스키 앞에 선다. 그의 실력은 이미 세계 최고, 그가 넘어서야 할 대상은 보리스 스파스키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적, 트라우마를 넘어서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주최 측과 상대방에게 여러 무리한 요구를 한다. 과연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까?


시대의 희생양이 된 개인의 아픔, 제대로 그리지 못하다


<세기의 매치>는 15년 전인 2001년 작품인 론 하워드 감독의 <뷰티풀 마인드>가 생각나게 한다. <뷰티풀 마인드>는 <세기의 매치>와 마찬가지로 천재와 냉전에 관한 이야기로, 미국의 수학 천재가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비밀리에 투입되었다가 소련 스파이가 미행하고 감시한다는 망령에 사로잡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으로 이겨냈고 노벨상을 타기에 이른다. 그의 이론은 전 세계 수많은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 또한 시대의 희생양이 된 한 개인의 아픔을 그려내고자 했다. 혁명의 이면에 있는 감시와 미행으로 괴로워했고 냉전 시대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가는 개인의 정신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 것 같다. 분위기, 메시지 등이 <뷰티풀 마인드>와 비교되지 않았다. 


연출력과 시나리오는 괜찮았지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한 것인지 뚜렷하지 못했다. 알았다고 해도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결국은 주인공인 바비 피셔에 대한 이야기인데, 피셔가 어릴 때 당했던 감시와 미행은 혁명에 의한 것임에 반해 나중에 망상으로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건 무엇인가? 단순한 한 개인의 트라우마인가? 아니면 냉전 시대의 국가주의로 인한 감시와 미행인가?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감시와 미행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호응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를 이끌어가는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 ⓒ판시네마(주)



여러 아쉬움에도, 실화를 다룬 영화는 환영한다


큰 허점에도 이 영화는 힘을 갖고 있다. 다름 아닌 '실화' 덕분이다. 일종의 인간 승리 스토리이다. 그가 세계 챔피언이 되었든 되지 못했든 한 곳 만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인간의 숭고함은 인간을 공감의 장으로 불러들여 울리게 마련이다. 바비 피셔가 왜 힘들어 했는지 생각하기 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한다면,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비 피셔에게는 두 조력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자칭 애국자인 변호사 마샬과 전직 체스 선수인 신부 롬바디이다. 마샬은 체스를 잘 모르지만 피셔를 스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계속해서 그를 압박하고 이용하려 들었다. 반면 롬바디는 그를 이해해주는 인물이다. 그가 힘들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면 체스로 풀어주었다. 영화는 이 두 조력자의 입장 차로 다른 면으로 피셔의 상태와 맞물려 바라보려 했는데, 그 또한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크게 남은 영화 <세기의 매치>. 개인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길게 남지 않은 여운이었다. 실화라면 아무래도 여운이 길게 남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에도, 새드엔딩이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결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접한 천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도 그리 길지 않은 여운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 길이가 더욱 짧은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천재의 실화를 다룬 영화를 언제나 환영한다. 실존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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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 포스터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천재와 폭군의 만남. 천재는 아직 자신이 천재인 줄 모르고, 폭군은 그의 재능이 진짜인 걸 안다. 천재는 최고가 되기 위해 폭군의 가혹한 채찍질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폭군은 역시 그의 재능을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해 모질고 가혹한 채찍질을 선사한다. 이들에게는 재능이 밑받침 되는 노력, 한계를 가볍게 넘어서는 열정,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의 광기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천재는 자신이 천재인 줄 모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한계에 직면한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그리고 폭군의 가혹한 채찍질에 대해. 무엇보다 그 모멸감 가득한 채찍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최고가 되기 전에 내 자신이 파괴될 것 같은 기분이다. 폭군 앞에서는 천재는 커녕 인간쓰레기에 불과하다. 


반면 폭군은 천재를 위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모멸감과 가혹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폭군은 철저히 교육에 의한 천재 양성을 지지한다. 문제는 방법에 있다. 누구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그는 칭찬은 개나 줘버리고 오직 채찍질만이 천재를 만든다고 한다. 


나를 따르면 반드시 최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 이야기다. 여기에서 천재는 주인공 앤드류이고, 폭군은 플렛처 선생이다.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최고의 명문 음악학교 신입생이다. 그는 학교의 모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음악 교수인 플렛처 눈에 들어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말그대로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했고 마침내 플렛처의 눈에 들었고 그의 반으로 직행한다. 


영화는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악연도 이제 시작이다. 완벽함이란 단어가 가장 완벽하게 들어 맞는 플렛처의 반에서는 연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만 연습일 뿐이다. 연습 때라도 완벽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메인과 보조의 자리가 바뀌거나, 아예 반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쫓겨난 이는 다시는 플렛처의 반으로 돌아올 수 없다. '연습도 실전처럼' 이란 명구가 생각나게 한다. 


플렛처의 교육 방법론은 피교육자의 실력을 최상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 먼저 그는 실력 뿐만 아니라 잠재능력과 열정이 있는 학생 만을 골라 가르치기 때문에 최상위로 오를 수 있는 기본 바탕이 갖춰져 있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 만의 지독하고 모질고 가혹한 방법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그의 방법은 다른 게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될 때까지 하라' 단, 플렛처 교수 자신의 기준에서 단 1%의 오차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의 기준이 곧 최고가 되는 기준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다. '나를 따르면 반드시 최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음악 영화가 아닌 교육 영화, 황당한 교육 방식


앤드류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시련을 겪으며 한 발씩 나아간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연습 시간을 버티며 보조에서 일약 메인을 꿰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시시각각 메인과 보조를 오간다. 플렛처는 왜 앤드류한테서 최고의 실력을 끄집어 내놓고는 곧바로 그를 내동댕이 치는 것인지? 앤드류는 분노가 폭발하기에 이른다. 


폭군 플렛처는 그의 분노가 폭발하기를 기다린 듯하다. 그리고 그의 분노가 열정으로, 광기로 변해 최상의 실력을 뽐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길 원한다. 그것이 바로 최고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생각은 한 장면에 꽂혀 있다. 


역사상 최고의 재즈 아티스트 '찰리 파커'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아티스트가 되게끔 해준 '조 존스'의 이야기. 조 존스는 찰리 파커의 연주가 삼류라며 얼굴을 향해 드럼 심벌을 날린 적이 있다. 이 모멸감 가득한 사건을 계기로 찰리 파커는 각성했고 그 분노를 광기로 승화시켜 이후 최고의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플렛처의 교육 방식의 핵심 사례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를 다르게 보게 된다. 음악 영화가 아닌 교육 영화로. 전율이 흐르는 음악을 듣는 것도 황홀하지만, 전율이 흐르는 교육 방식을 보는 것도 황당하다는 걸. 그렇다. 플렛처의 교육 방식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저 황당할 뿐이다. 또 눈살이 찌뿌려지고 짜증이 난다. 그가 만들어 낸 최고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다. 광기만 있을 뿐. 


그래도 <위플래쉬>는 영화 자체로 최고의 수작


문제는 수요에 있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플렛처의 교육 방침을 기꺼이 따르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런 교육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교육을 추호도 옹호할 수 없다. 천재 또는 최고인 이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런 세상을 지탱해가는 이들이 바로 평범하지만 올바른 이들 아닌가. 


이런저런 논란을 제외하고 영화 자체의 재미로 보자면, 이 영화 <위플래쉬>는 가히 최고의 수작이다. 시종일관 눈과 귀가 즐거웠고,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너무나도 몰입이 잘 되었다. 자칫 무겁고 재미 없을 수 있는 소재와 주제임에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음악 영화로도, 교육 영화로도, 심지어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러 영화로도 감상할 수 있다. 앤드류의 광기 어린 연주는 전율 그 자체였고, 플렛처의 동작 하나하나는 마치 나를 향하는 것 같아 섬짓함이 폐부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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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이미테이션 게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포스터 ⓒ메가박스 플러스엠


천재에 대한 영화를 몇몇 알고 있다. <굿 윌 헌팅> <뷰티풀 마인드> <어거스트 러쉬> <샤인> 등. 앞의 두 영화는 수학 천재, 뒤의 두 영화는 음악 천재를 다룬다. 느낌은 다르다. 이 영화들을 보면 수학 천재는 사람들에게 환멸의 시선을 받는 반면, 음악 천재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는다. 이 두 종류의 천재 영화를 비교하면 수학 천재를 다룬 영화에 더 애착이 간다. 


수학을 천재적으로 잘 하는 사람이 일반인에게 찬사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그는 '다른 사람', 나아가 '틀린 사람' 취급을 받기 때문에 경외의 시선보다는 환멸의 시선을 받는다. 정신병자 같이 바라볼 때도 있다. 수학에 관해서는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언제 어느 때나 같은 것 같다. 그래서 천재들 자신도 자신이 단지 이상한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기도 한다. 


<굿 윌 헌팅>과는 다르게 <뷰티풀 마인드>는 이런 경향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천재라서 남들과 다르고, 그러하기에 남들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자신은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소심하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게 변해간다. 하지만 그야말로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위대한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생각과 실행력을 가진 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이런 절차를 충실히 실행한다.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생각과 실행력을 가진 이가 있다. 그의 이름은 앨런 튜링.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달랐고 고독했다. 영화는 그의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악마적 암호 시스템 '이그니마'를 푸는 과정,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튜링의 감춰진 행적을 쫒는 형사의 시선,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간순으로 나열되지 않고 교차로 마구잡이로 나왔다 들어간다. 


어린 시절 그는 왕따와 함께 일상적인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를 도와주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그 친구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끼지만, 그 친구는 결국 결핵으로 죽고 만다. 그야말로 유일한 친구가 사라진 그에게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독일은 빠른 속도로 유럽을 점령 중이었다. 거의 유일하게 바다 건너 섬나라 영국만이 점령당하지 않고 대항할 수 있었다. 영국은 천재적인 언어학자, 수학자, 체스 챔피언, 퍼즐 천재 등을 모아 나치독일의 암호 시스템 '이그니마'를 풀고자 했다. 그 암호만 푼다면 나치독일의 현재와 미래를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이었다. 앨런 튜링은 천재 수학자로 팀에 합류해 매일 24시간마다 새롭게 바뀌는 이그니마를 풀고자 최선을 다한다. 과연 풀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한참 후 어떤 형사가 튜링의 과거 행적을 추적한다. 그의 행적으로 보아 소련 스파이가 의심되는 이유에서였다. 그를 집적 불러와 취조를 하고 과거 행적까지 낱낱이 팠지만, 돌아온 결과는 소련 스파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들쑤신 결과 돌아온 답은 '동성애자'였다. 그렇다. 그는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형사는 허탈함을 감추지 못한다. 


'천재'가 아닌 '다름'에 포커스를 맞추다


영화는 다름 아닌 바로 이 '동성애자'에 포커스를 맞춘다. 천재인 것도 모자라 동성애자였다니,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지금에야 동성애에 대한 큰 진보를 이뤘지만, 당시만 해도 동성애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불법이었다. 천재는 '다르'지만, 동성애는 '틀린' 것이었다. 그가 전쟁을 종결시키고 1,400만 명의 인명을 구하는 데 큰 일조를 했다고 해도 말이다. 


튜링은 천재들을 모아 놓은 팀 중에서도 단연 튀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그니마에 대항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 기계는 인간 같이 생각하면서도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또한 일시적이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가는 기계였다. 지금은 튜링 기계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기계, 컴퓨터의 시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영화는 시종일관 앨런 튜링을 통해 '다름'에 대해 천착한다. 제목인 '이미테이션 게임'이 그 줄기의 시작이라고 할 만한데, 이 게임을 통해 인간인지 기계인지 판단한다고 한다. 즉, 기계가 인간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지를 기계가 지능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로 삼는 것이다. 이 게임은 튜링이 고안했기에 '튜링 테스트'라고도 불린다. 튜링은 이 게임을 자신과 빚대어 말한다. 


"나는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기계입니까? 전쟁영웅입니까? 범죄자입니까?"


그는 당시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튜링 기계를 만든 전쟁영웅이자, 동성애자인 범죄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든 그는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지 못했고 단지 남들과 다르다는 것 하나로 멸시만 당했다. 


전쟁영웅도 범죄자도 아닌, 인간을 그리다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은 진보를 이룩한 지금도 남들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지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외골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으로, 천재는 다른 차원의 사람으로, 비 이성애자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사람으로, 생각이 트이고 자유로운 사람은 또라이로 비춰지기 일쑤인 것이다. 이런 멸시와 혐오스런 시선을 받기 싫으면 자신을 감추고 어느 누군가를 모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앨런 튜링은 결국 그렇게 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한 장면 ⓒ메가박스 플러스엠



영화는 그런 앨런 튜링을 전쟁영웅으로도, 범죄자로도 그리지 않는다. 인간으로 그리고자 한 것 같다. 그리고 남들과 다르다는 걸 감추고자 하지도 않는다. 달랐기에 위대한 생각으로 인류에게 큰 공헌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 자신이 결국 불행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게 안타깝지만, 그만큼 그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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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굿 윌 헌팅>



<굿 윌 헌팅> ⓒ미라맥스 필름



옛말에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말할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인생에서 진정한 스승을 만나기란 정말 힘든 법이다. 그런데 이 옛말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부모의 존재이다. 부모를 '두 명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모의 교육은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 


부모라는 최고의 스승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아니 오히려 부모에게서 어마어마한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입었다면 어떤 인격이 형성될 것인가? 그에게는 진정한 스승과 친구, 그리고 사랑이 누구보다도 필요하다. 영화 <굿 윌 헌팅>은 진정한 스승과 친구, 그리고 사랑을 만난 어느 불운한 천재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미국 보스턴 남부 빈민촌, 그리고 MIT.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둘이 한 청년에 의해 엮어진다. 

윌 헌팅(맷 데이먼 분)은 남부 빈민촌에서 살며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게시판에 적어 놓은 수학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 버린다. 사실 그 문제는 수학과 학생들 중에서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수학과는 발칵 뒤집히고 램보 교수는 그 학생을 찾아낸다. 


헌팅이 천재라는 걸 알게 된 램보는 그를 본격적으로 키워보려 하지만, 헌팅은 그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매일같이 사고를 치는 건 둘째 치고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너무나 쉽게 풀어버리는 게 문제였다. 헌팅에게는 그 어려운 문제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그보다 그의 닫힌 마음을 여는 게 먼저였다. 램보는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 숀 맥과이어 교수(로빈 윌리엄스 분)를 찾아간다. 


헌팅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어렸을 적 당한 심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게 되었다. 그와 비슷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있을 뿐이다. 척키 슐리반(벤 애플렉 분)은 진정한 친구이다. 



<굿 윌 헌팅>의 한 장면. ⓒ미라맥스 필름



언젠가부터 스승의 개념이 '멘토'라는 개념으로 대체된 것 같다. 스승은 아무래도 다가가기 힘들고 일방적인 가르침의 개념이 있는 반면, 멘토는 상대적으로 동등하고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개념보다 상담이나 조언에 더 힘이 실린다. 천재 헌팅은 스승보다는 멘토가 필요했던 것 같고, 램보는 헌팅에게 멘토가 될 수 없었다. 과연 맥과이어 교수는 헌팅에게 멘토가 될 수 있을까?


헌팅은 맥과이어를 램보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맹공을 퍼붓는다. 상담 시간에서 자신의 얘기를 해보라는 맥과이어의 말에 천재적 지식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상담은 아무런 진척도 없이 끝나기 마련이고 서로 지쳐간다. 


"너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척하면서 내 그림을 통해 내 삶을 망쳐버렸어. 너는 고아야. 만약 내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기 때문에, 고아로서 겪었던 너의 어려움과 고아인 네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떠들면 어떻겠느냐?... 개인적으로, 나는 네가 떠들어 대는 얘기에 하나도 관심이 없다. 그런 얘기들은 엿 같은 책만 들추면 다 나오는 얘기들이니까. 그런 것으로부터는 '너'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어... 나는 '너'를 알고 싶어. 네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바로 그런 얘기들이 내 마음을 확 잡아 끌지. 그러나 넌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아."


맥과이어의 진정한 마음을 알게 된 헌팅은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맥과이어라면 모든 걸 이해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길을 인도해줄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천재 헌팅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 결여된 것은 엄청 많았다. 하필 그것들이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라는 것. 사랑, 우정, 믿음, 신의...



<굿 윌 헌팅>의 한 장면. ⓒ미라맥스 필름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젠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드려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라는 말도, 작별의 말도 없이 네가 떠났을 때라고. 적어도 그 순간 만은 행복할 거야."


헌팅의 진정한 친구 슐리반의 대사는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친구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의 덕목이라는 걸 안다고 해도 실행에 옮기는 게 쉬운 일인가? 한편 맥과이어 교수는 헌팅과의 인생 상담을 마무리 지으며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는다. 사랑을 찾아 나서라고 말이다. 


"그때 말을 걸지 않았으면 난 평생 후회했을 거다. 낸시와의 18년 결혼 생활도, 아내가 아파서 6년이나 일을 관뒀던 것도, 또 병상을 지켰던 2년도 난 후회하지 않아. 그깟 시합 못 본 건 아무 것도 아냐, 후회하지 않아."


헌팅은 사랑, 우정, 믿음, 신의와 같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인생 필수품들을 얻을 수 있을까? 또는 되찾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헌팅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자칫 이런 류의 영화가 가질 수 있는 '오글거림(?)'이 전혀 없다. 진지한 말은 진부하지 않은 명언이 되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내게서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지난 2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을 떠나보내고 6개월 만에 '로빈 윌리엄스'를 떠나보냈다. 언제나 환하게 웃으며 영화 안팎에서 누군가의 멘토가 되어줄 것만 같았던 그가 말이다. 비록 전성기는 지났을 지 몰라도 <익스펜더블>의 오래된 영웅들처럼 언제나 건재함을 과시할 것만 같았는데, 솔직히 믿기지 않는다. 그가 안녕이라는 말도 작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 버린 지금, 그 순간 만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진짜' 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일까? 안타깝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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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워너브라더스



중학교 음악 수업. 음악 선생님께서 뜬금없이 영화를 보여주신다. 음악 수업 시간에 영화를 보여주는 건 절대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을듯. 아마도 음악 관련된 다큐멘터리 정도가 아닐까? 수업 시간이 한 시간 정도이니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 그리고 더 시간을 들여 영화가 끝날 때까지 보여준다고 하신다. 도대체 어떤 영화기에?


일단 다큐멘터리는 아니고 그냥 영화이다. 분위기는 우중충하고 배경은 중세 이후의 서양 같아 보인다.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가 나오고 신부가 그를 면회한다. 그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옛일을 회상한다. 그러기 전에! 그는 능숙한 솜씨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신부에게 물어본다. 이 멜로디를 아시는가? 모릅니다. 그럼 이건? 흠... 몰라요. 그래요? 그렇다면 이건! 아...아... 이건 알아요! 앞의 두 개는 내가 작곡한 거라오. 그리고 당신이 아는 그건 이제부터 내가 얘기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가 작곡한 것이라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영화 <아마데우스>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4년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후 지금까지 나온 수많은 음악 관련 영화 중에서 최고로 남아 있다. 15년 전 중학교 음악 수업 시간 때 아무런 사전 정보나 기대 없이 보게 된 이 영화는 나에게는 최고의 영화로 남아 있다. 음악 장르 영화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정말로 좋은 영화이며 완벽한 영화이다. 스토리, 캐릭터, 배경. 그리고 음악까지. 


영화를 이끌어 가는 화자이자 초반의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는 살리에르(머레이 에이브러햄 분)이다. 그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자질,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그 누구보다 노력해 궁중음악장의 위치까지 오른다. 천재는 아니지만 노력 하나로 그 자리에까지 오른 그의 모습은 인간적으로 끌린다. 하지만 어김없이 그에게 찾아오는 위기. 인간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는, 신의 대리인 천재 작곡가 모짜르트(톰 헐스 분)의 출현이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전 인류적 천재. 지금까지 인류사에 수많은 방면에서 수많은 천재가 출현했지만 그만큼 유명하며 압도적인 천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모짜르트의 출현으로 살리에르의 위치는 흔들리며 결정적으로 왕의 관심이 그에게로 쏠린다. 요즘 말로 모짜르트는 살리에르에게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고나 할까.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그런데 살리에르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건, 모짜르트가 음악 외적으로는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순수하다는 점 때문이다.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세상물정을 모르며 음악적 재능을 음악 외적으로 끌어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살리에르가 보기엔 그런 모짜르트가 굉장히 오만방자해 보이고, 오히려 가식적으로 보였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를 증오하고, 신을 증오한다. 


"나는 그때부터 신을 믿지 않았소. 당신의 도구로 그런 오만방자한 녀석을 선택하시고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능력만 줬기 때문입니다. 그건 부당하며 매정해. 맹세코 당신(신)을 매장시키겠소."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음악 영화다운 출중한 음악이다. 이 영화의 OST는 유명한 지휘자인 '네빌 마리너'의 지휘로 완성되었는데, 클래식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명반으로 뽑힐 정도이다. 모짜르트에 대한 가장 적확한 해석과 연주를 영화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이다. 


모짜르트와 살리에르의 캐릭터 충돌은 이 영화가 갖는 가장 큰 매력 두 번째 요소이다. 신의 대리인이자 신이 낳은 최고의 천재 모짜르트.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수가 없다. 반면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재능 살리에르.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짜르트를 이길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 괴롭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살리에르에게 모짜르트는 그 반대이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는 미워하되 그의 음악을 미워할 수 없었다. 살리에르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사랑했다. 그의 음악을 갖고 싶었고 계획을 짠다. 그는 어떻게 모짜르트의 음악을 뺏을 것인가? 그의 재능과 반비례하는 가난을 이용하면 될 터였다. 평범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난 평범한 이들의 대변인이라오."


이 영화는 처음 볼 때 영화를 보고, 두 번째는 음악을 듣고, 세 번째는 살리에르의 입장에서 봐야 한다. 그 이후에는? 계속 곱씹어 보며 우리네 인생을 되돌아 봄이 좋을 것이다. 영화도 인생이라 말하며 음악도 인생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인생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평범하기 그지 없는 우리 인생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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