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어메이징 메리>


오랜만에 힘뺀 마크 웹 감독이 역시 오랜만에 힘뺀 크리스 에반스를 주축으로 좋은 배우들과 함께 <어메이징 메리>로 돌아왔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몸에서 힘을 빼면 더 좋은 연기를 선 보일 수 있을 거라는, 알듯 말듯한 조언이 있다. 비단 연기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통용되는 조언이겠다. 이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말일 텐데, 진짜로 힘을 잔뜩 들인 것들만 맡다가 가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은 가벼운 것을 맡기도 한다. 분위기 전환이랄까, 쉬어가는 시간이랄까, 아니면 그것이 진짜 하고자 하는 바일까. 


마크 웹 감독은 데뷔작 <500일의 썸머>로 또 하나의 현대판 클래식 주인이 되었다. 매우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특유의 감각으로 특별함을 끄집어 냈다. 그런 그를 할리우드가 가만히 놔두지 않았던 바, 그만의 감각만 쏙 빼어내 블록버스터를 만들게 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 2>다. 극히 나쁘진 않았지만, 전혀 좋지 않았다. 


<어메이징 메리>라는 작품으로 데뷔적의 감성과 감각을 다시 선보이려 한다. 조만간 <리빙보이 인 뉴욕>이라는 로맨스 영화로 또 한 번 더 찾아온다고 하니, 그 전초전이라고 해야 할까. 수없이 많은 히어로 영화들로 근육질을 뽐내며 미국을 지켜내느라 진땀 흘리고 있는 크리스 에반스도 함께다. 둘이 나란히 힘 뺀 와중에, 연기파 배우 두 명과 천재 아역배우 한 명이 자리를 지킨다. 


치졸한 법정 공방, 그래도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가족끼리 벌이는 법정 공방, 참으로 치졸하지 않은가. 그래도 그들의 시선은 오직 메리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미국 플로리다의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 마을에서 배를 고치며 살아가는 프랭크(크리스 에반스 분), 그에겐 여자 아이 한 명이 있다. 다름 아닌 여조카 메리(멕케나 그레이스 분)인데, 그녀는 불과 7살 짜리 수학 천재다. 하지만 프랭크는 그녀를 영재 학교가 아닌 평범한 학교에 보낸다. 메리는 적응하기 힘들어 한다. 


소소할 수도 심각할 수도 있는 사건을 일으킨 메리는 쫓겨날 위기 또는 영재 학교로 갈 기회를 갖지만, 프랭크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 이 평범한 학교에 메리가 계속 다닐 수 있게 한다. 얼마 후 메리의 외할머니이자 프랭크의 어머니 에블린(린제이 던컨 분)이 찾아온다. 그녀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학자로, 메리 역시 수학자로 크길 바란다. 


에블린과 프랭크는 메리의 앞날을 두고 대립하고 급기야 법정 공방까지 이어진다. 그 대립 사이에는 에블린의 작은딸이자 프랭크의 여동생인 천재 수학자 다이앤의 자살이 있다. 에블린은 다이앤이 못다 이룬 수학자의 꿈을 메리가 이어 받게 하려는 것이고, 프랭크는 다이앤의 불행한 삶과 죽음이 메리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수학 천재 메리를 둘러싼 할머니 에블린과 삼촌 프랭크의 치졸해 보이는 법정 공방이 기본 골자인 이 영화는, 더 많은 시간을 메리를 향한 두 혈육의 보다 합리적이고 감정적이며 진심어린 걱정과 고뇌에 투자한다. 물론 거기에는 각자 자신의 상황과 생각이 투영되어 있지만 언제나 시선은 메리로 향한다. 마크 웹의 감각이 이를 보좌한다. 


마크 웹이 선사하는 소중하고 예쁜 순간들


마크 웹이 <500일의 썸머>에서 보여주었던 순간과 일상의 아름다움을 이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선보인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천재의 이야기와 가족들 간의 치졸한 공방, 힘든 과거에 기인한 현재의 방향성 다툼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를 평범하게 만드는 이런 소재들이야말로 마크 웹이 감각적으로 잘 다룰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인데, 쉽게 잊히지 않는 순간들을 잘 포착할 줄 안다. 


메리는 그 나이대에 걸맞게 놀며 플로리다의 자연과 벗하는 허허벌판과 해변도 좋아하지만, 수학 천재로서의 기지를 한껏 뽐내며 보스턴의 최첨단과 최신식이 주는 멋스러움과 세련미도 좋아한다. 그처럼 프랭크 또는 에블린과 함께 하는 시간은 메리에게도 소중하고 예쁘며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도 소중하고 예쁜 순간을 선사한다. 


그러며 놓치지 않고 그려내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들은 다름 아닌 프랭크와 에블린의 생활과 생각의 연유다. 프랭크는 메리만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플로리다 구석에서 지내고 있다. 그에게도 그만을 위한 생활이 필요한 법, 마크 웹은 그 순간들에 <500일의 썸머> 감성과 감각을 살짝살짝 녹여 놓는다. 전혀 위화감을 느낄 수 없는 일상. 


한편, 에블린은 자신의 이야기가 없다. 오직 딸 다이앤의 과거와 손녀 메리의 현재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을 뿐이다. 역시 천재였지만 자신의 손에서 완전히 벗어나다시피 한 아들 프랭크에겐 그래서 아무런 정을 느끼지 못한다. 사보다 공에 자신의 인생을 쏟은 에블린의 대를 이은 공적 투신 열망은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하다. 


중도적 방향과 방법, 그리고 기본


메리의 인생은 누구도 재단할 수 없다. 그렇다고 어리디 어린 본인도 선택할 수 없다. 그럴 땐 중도와 기본이 필요하겠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너무 어린 메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어른들의 메리를 향한 진심어린 일편단심 또는 그것을 빙자한 자신의 삶을 향한 인정에의 열망에 따라 휘둘리고, 결국 법원의 판결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찾아야 할 방법은 '중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사자의 생각도 중요하지만, 그녀와 같은 천재의 사회적 공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양쪽 모두를 열망하고, 앞으로도 열망할 것이다.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외로운 천재의 내재적 비극, 또는 외톨이 천재의 외부적 비극 모두의 안타까움을. 영화는 천재의 삶을 공적, 사적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의 앞서 선행되어야 할 삶의 기본이다. 세상에 나온 건 자신의 뜻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기본, 가족이라는 끈 하나로 자신의 모든 걸 관철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뭐든지 일방적으로 몰아가서 후회가 남을 수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등 말이다. 


여러가지 삶의 길이 있다. 한 가지 길로만 평생 갈 수도 있고, 수많은 길들을 오갈 수도 있으며, 길 아닌 곳을 헤치며 갈 수도 있다. 아니, 멈춰서서 관망할 뿐 길을 가지 않을 자유도 있다. 우리 어메이징한 메리에겐 어떤 길이 펼쳐져 있을까, 그녀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뭐든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좋은 선물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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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인의 사랑>


능력과 의욕 상실의 찌질한 시인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해야만 하겠는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랑? ⓒCGV아트하우스



제주도 토박이 시인(양익준 분)은 등단만 했을 뿐 동인 합평회에서 심심찮게 까이는 수준의 재능을 지녔다. 겨우 방과후교실 선생님으로 활동하지만 아이들에게도 무시당하는 입장이다. 그야말로 시인으로서의 능력도 없고 가장으로서의 능력도 없다. 대신 가정을 이끌다시피하는 아내(전혜진 분)가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해서 늦은 나이가 걱정되어 병원에 갔는데, 아내의 노산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시인의 정자감소증이 문제가 된다. 급기야 남자로서의 능력도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능력과 의욕 상실의 시인은 어느 날 아내가 건네준 도넛을 먹고 눈이 번쩍 뜨인다. 환상적인 도넛 맛에 감동을 금치 못한 것, 매일 같이 동네에 새로 생긴 도넛 가게로 달려가 도넛을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 그 힘 덕분일까? 동인 합평회에서 소소한 합격점을 성취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도넛 가게 화장실에서 도넛 가게 알바생 소년(정가람 분)이 어느 소녀와 섹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시인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정녕 오랜만에 수음도 하고 정자수도 증가했단다. 뭔가를 느낀다. 사랑일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심상치 않다. 그 대상이 소녀인지 소년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소년인 것 같다. 어느 날 술취해 밖에서 잠을 청하는 소년에게 다가가고 함께 소년의 집으로 향한다. 하루종일 일만 하는 엄마 대신 다 죽어가는 아빠를 보살피는 소년, 점점 그에게 뭔지 모를 감정을 느껴가는 시인.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까? 아니, 시인이라는 존재가 특별한가? ⓒCGV아트하우스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편은 품고 살고, 누구나 시인을 동경해 마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금지된 사랑에의 욕망을 품고 살 테다. 영화 <시인의 사랑>은 평범 이하의 시인의 삶을 통해 이런저런 드러낼 수 없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드러내 오히려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시인의 사랑은 어떨까. 아니, 이전에 시인이란 누구이며 무엇일까. 시인이 아니라서 재단할 수 없지만, 누구나 시인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라고 다를 바 없으며 누구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시인은 특별할 것이다. 즉, 시인도 다양한 사람들 중 하나이겠다. 시인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시인에겐 관찰력, 상상력, 집중력 등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인의 사랑 양태는 셋 다 충족해야 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력, 대상으로부터 날갯짓하는 상상력, 대상을 향한 집중력까지. 그렇다면 소년에의 시인의 사랑은 특별할 게 없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영화가 훌륭히 소화해내는 것들


영화는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의 감정선에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키며 잘 소화해낸다. ⓒCGV아트하우스



자연스러운 '시인의 사랑'을 시인만의 특별함에 가둬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벽은 높다. 시인에겐 찌질하게 그지없는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해주고 시인이 도저히 이끌 수 없는 가정을 대신 이끄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임신한 아내 아닌가. 그녀를 뒤로 하고 소년에게 마음이 가는 건 시인만의 사랑으로서도 용납하기 힘들다.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영화는 벌써부터 복잡한 내러티브를 선사한다. 시인의 사랑과 시인만의 사랑의 층위 위에, 그 자체로 이상할 게 없는 정상적인 사랑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사랑의 층위가 겹친다. 동성애 코드는 덤에 불과할 정도다. 영화는 시인에서 시인과 아내, 시인과 소년으로 집중하는 시선을 옮겨가며 복잡한 내러티브를 나름 훌륭히 소화한다. 


무엇보다 훌륭히 소화하고 또한 훌륭한 점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어느 쪽으로도 선을 넘지 않고 나아가는 감정선에 있다. 시인과 소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인지, 연민하고 이용해먹는 것인지, 그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도망가고자 또는 조금은 타파해보고자 잠시잠깐 다녀오는 수준의 대상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영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천재가 만든 영화


한끗 차이로 졸작이 아닌 수작으로 '판명'난 <시인의 사랑>, 여러 면에서 가히 천재의 영화라 할 수 있다. ⓒCGV아트하우스



시인의 여성성이라기 보다 여성적인 시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시인, 다분히 남성적인 역할을 하는 아내와 다르게 성격이든 신체든 섬세하고 소극적이다. 하지만 그는 남자이기에 한없이 찌질하고 능력없는 이로 보인다. 그런 그가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소년에게는 뭐라도 해줄 수 있는 게 있다. 남성의 발로일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행보일까. 여기에서도 복잡한 내러티브와 아슬아슬한 경계가 엿보인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또한 수작과 졸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여러 코드와 층위를 나열할 뿐 정리하고 해결하지 못해 쓸데없는 상상력만 소진하게 할 뿐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반면, 산발한 코드와 층위 사이를 때론 발 빠르게 때론 정면으로 우직하게 지나가며 그것들을 이용해 상상력에 살을 붙여 평범함 위에 특별함으로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졸작보단 수작에 가까운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최소한 동성애 코드 위에 우리가 생각하는 '시인'의 사랑이 아닌 '여성적인' 시인의 층위를 입힌 건 아주 참신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열연으로 빚어낸 코믹과 진지함의 병렬과 긴장감 어린 경계에서의 나아감은 최고의 감각을 선물한다. 얼핏 허술한듯 보이는 전체적 이미지 이면엔 그 어느 영화보다 촘촘하고 꼼꼼하게 직조된 경계들의 조합이 보인다. 천재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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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


<꿀벌과 천둥> 표지 ⓒ현대문학



중2 음악 시간, 선생님께서 종종 수업 대신으로 영화 한 편을 보여주셨다. 족히 20년은 흐른 지금까지도 개인적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 <아마데우스>를 그때 처음 보았고, 여전히 뒷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절정의 영화 <파리넬리>도 그 시간을 통해 처음 보았다. 공교롭게도 둘 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다뤘고 그 덕분인지 몰라도 오랫동안 클래식은 나의 조그마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유독 그때 그 음악 시간은 클래식 음악 숙제가 많았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의 대표곡들을 듣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직접 오페라 콘서트 실황을 보고 감상문을 써오는 숙제 등. 우리나라 교육의 폐해였을까. 악기를 직접 연주하는 건 리코더나 멜로디언 정도였고, 나머진 사실 글쓰기 과제였던 거다. 


음악 감상의 느낌을 글로 쓰는 건 고역이었다. 머리가 훨씬 큰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아예 한 글자도 쓰지 못할 것 같은데, 감정이 팔팔한 그 나이대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묘사가 태반을 차지한다는 걸 알고 일본 만화에서 참조한 적도 있는 것 같다. 당시 한창 <미스터 초밥왕>을 열독했었는데, 거기엔 무수히 다양한 묘사들이 있었다. 나중에는 <신의 물방울>이 이어받았으려나. 하여튼 일본 음식 만화가 답이었다.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절정


일본이 자랑하는 온다 리쿠 작가의 신작 <꿀벌과 천둥>(현대문학)을 보고 있으려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 굴지의 피아니스트 콩쿠르 오디션의 전초전 격인 일본의 요시가에 피아노 콩쿠르 이야기를 다룬 소설로, 일명 온다 리쿠 스타일의 정점이다. 뭐랄까, 오그라들다 못해 민망한 스토리와 캐릭터를 아주 진지하게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랄까. 극단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 


소설은 일본 소년 성장 만화의 영향을 극단적으로 받았다 못해 낳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슬램덩크>를 필두로 하는 천재와 둔재의 성장과 경쟁의 한 시절, <신의 물방울>을 필두로 하는 민망하지만 헤어나오지 못하는 묘사의 절정이 모두 이 한 소설에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은 한 명이 아니라 네 명, 여지없이 모두 천재적이고 구구절절 사연이 있고 확고한 캐릭터성이 있다. 양봉가 아버지를 따라 떠도는 10대 중반의 최연소 천재 소년 가자마 진이 전설적인 음악가 호프만의 추천서와 절대적인 자유로움으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운데 다른 세 명이 각자의 자리에서 경쟁을 벌인다. 


천재 중 천재로 불렸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갑작스럽게 무대를 떠났다고 부활의 날개짓을 하는 소녀 에이덴 아야, 완벽 그 자체로 모두를 압도하는 줄리아드 음악원 출신 소년 마사루 카를로스 레비 아나톨, 그리고 어렸을 때 음악을 전공했었지만 악기점 점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20대 후반의 최고령 다카시마 아카시까지.


피아노 연주를 글로 표현해내는, 이 소설의 백미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작품임에도 헤어나오기 힘든 흡입성을 보이는 건 이미 일본 현지에서 입증되었다. 제156회 나오키상과 제14회 서점대상을 최초로 동시 수상하는 영예를 받은 것. 둘 다 지극히 대중성과 거리가 가까운 상들인데, '읽히는 소설'을 쓰는 온다 리쿠 앞에서 작품성 운운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되묻게 된다. 나아가 작품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중간하면, 욕하면서 시간때우기용으로 적당히 볼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들이 그런 취급을 받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런 취급을 받을 줄 알면서 그렇게 만든 것이겠지만. 그런데 이 소설 <꿀벌과 천둥>은 그걸 넘어선 듯하다. 피아노라는 예술의 한 면을 다뤄서가 아니라, 이쯤 되는 캐릭터와 묘사에의 열정이라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분량이 워낙 길기도 했고, 1차 예선이니 2차 예선이니 해서 구분도 되어 있고, 주인공마다 챕터가 확연히 갈라져 있어, 중간 중간 쉬면서 다른 책들도 보면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봤음에도 그때마다 주인공들이 확연히 되살아날 정도였다. 굳이 책을 앞에서 다시 일별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그 형상이 잡혀 지워지지 않게 된 것이다. 자칫 가소로워 보이는 캐릭터들을 얼마나 연구했을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이자 하이라이트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글로 표현해낸 부분들이라 하겠다. 몇 쪽에 걸쳐 펼쳐지는 각종 묘사의 향연은 솔직히 한 번 웃지 않고 지나갈 사람 없을 만한 민망함을 깔고 있지만, 작가가 소설을 통해 연주를 표현한 것처럼 '비범하고 환상적이다'. 그때만큼은 '소설의 신'이 내려온 것 같다... 종종 온다 리쿠를 찾을 것 같다. 매일 건강에 좋지만 맛은 그다지 없는 음식만 먹을 순 없으니, 종종 한없이 달콤하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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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히든 피겨스>


1960년대 초, NASA에서 오직 실력으로 '흑인 여성'으로 받는 차별을 이겨내려는 세 천재의 이야기, <히든 피겨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천재에 관한 영화를 많이 봐왔다. 차별을 이겨내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영화도 참 많이 봐왔다. 이 두 이야기를 합쳐, 차별을 이겨내고 실력으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천재 영화도 봤다. 모두 진중하고 장엄하고 비장하기까지 했다. 끝이 좋지 않아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유쾌하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딱 그런 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히든 피겨스>다. 


1961년, 전 세계를 반반으로 가르는 미국과 소련의 승부가 한창이다. 이른바 냉전시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물러설 수 없는 경쟁을 계속하는데, '우주전쟁'도 그중 하나다. 소련의 선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미국,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1958년에 개편창설된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그 중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역사상 그 누구도 실행에 옮긴 적이 없는 전대미문의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세 명의 흑인 여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관리자로, 엔지니어로, 그리고 로켓 발사 담당자로. 출중한 실력으로 NASA에 들어왔지만,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에 걸맞게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하다. 그럼에도 해내야만 한다. '적국' 소련에 맞서 우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도, 차별이라는 '적'에 맞서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말이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흑인 여성'들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이라는 이면, 그들이 차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흑인 여성이라는 이면.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숨겨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제목, 미국이 이룩한 위대한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진짜 주인공들이 겉으로 드러난다. 모든 찬사는 당대 대통령 케네디와 NASA 국장, 로켓에 탑승해 우주로 날아간 당사자에게로 쏟아졌지만, 그 뒤엔 이름 없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 우린 그들의 이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아니 그들의 이름이야말로 기억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다름 아닌 '흑인 여성'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1961년 당시는 비록 마틴 루터 킹의 활약이 극에 치닫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흑인 여성의 인권은 없다시피 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당하는 어이 없는 차별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준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용 커피 포트를 쓸 수 없어 커피를 마실 수 없고 공용 화장실을 쓸 수 없어 800미터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절대적인영향력을 뽐내며 비어 있는 관리자의 일까지 더할 나위 없이 해내지만, 절대 관리자로 승진할 수 없는 처지다. 그 누구보다 대단한 학위를 자랑하지만 남자들만 하는 엔지니어가 될 수 없다. 물론 그 어떤 남자 엔지니어보다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누구나 알고 있다, 그들이 '백인 남성'보다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들에게 돌아가는 건 존경은커녕 일말의 믿음도 아니다. 더욱 철저한 멸시뿐. 


속시원한 차별 첼폐,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1단계의 이면과 2단계의 이면, 그런데 3단계의 이면이 있다? '누군가에 의한' 차별 철폐라는 함정이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들은 반정부·반사회적 폭력 투쟁으로 자신의 인권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철저히 체제에 순응하며 그 안에서 절대적인 실력을 앞세워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럴 때 필요한 건 누군가의 도움 내지 깨달음이다. 누군가는 아마도 백인 남성이지 않을까. 백인 남성이어야만 이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슬프게도, 그 사실을 보여준다. NASA의 고위층 백인 남성이, 오로지 우주 비행 프로젝트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일념 하에 엄청난 실력을 자랑하는 흑인 여성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기 위해선 흑인 여성이 포함된 집단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차별 받고 있는 그 집단의 존재를 없애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흑인 여성은 출중한 실력을 조국을 위해 뽐낼 수 없는 것이다. 


헷갈린다. 양파를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느낌이다. 이 고위층이 보여준 행동은 분명 인류가 달에 첫발을 디딘 위대한 한걸음 못지 않은 위대한 한걸음이다. 그가 보여준 파워풀한 차별 철폐는 소름 돋게 하는 데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차별을 당하는 당사자가 아니다. 과정 또한 철저히 실력으로 쟁취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한편 드는 생각은, 과연 그녀가 출중한 실력이 없었더라도 백인 남성이 그처럼 차별 철폐를 시행했을까 하는 것이다. 마냥 통쾌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우리 손으로 쟁취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면 될까. '누군가에 의해서'. 그렇게 되면, 그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누군가의 마음이 바뀌거나, 그 누군가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취할 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다르다면 어찌하겠는가.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웰메이드 영화


그럼에도 영화 자체는 나무랄 데 없는 웰메이드 영화다. 그저 즐겨도 아무 이상 없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비록 '숨겨진 사람들'을 내세워 유쾌하게 차별을 이겨내는 이야기를 풀어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은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일부러 풀어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어쨋든 여러모로 위대한 이들의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뭘 더 바라냐,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뿌리 깊은 차별을 이기는 건 정말로 힘드니까. 


정녕 차별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함부로 차별과 차별 이면에 숨겨진 생각들을 지꺼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지꺼릴 순 있어도 힘이 있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별에도 등급이 있듯이 차별 철폐의 방법에도 등급이 있다. 엄밀히 말해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세 명은, '백인 사회에서의 흑인으로서 최초'가 되었을 뿐이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영화는 이런 이면 속의 이면을 생각하기 민망할 정도로 유려했다. 할리우드식으로 보기 좋게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이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전통적 구성이 완벽하리만치 재현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할 틈도 없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남는 건 영화가 말하고자 한 확고부동한 메시지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기본.


요즘 상업영화의 추세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였다는 말도 하고 싶다. 높아진 관객의 눈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민감한 부분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와 상업적으로 이용해먹는 것이다. 거기에 당대가 아닌 조금이라도 지난 시대라면 수위는 높일 수 있고 범위는 넓일 수 있다. 여차하면 '영화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재미를 위해 각색을 했으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하면 된다.


<히든 피겨스>는 분명 열광할 만한 소재와 주제와 만듦새를 자랑하지만, 한 번쯤 그 이면을 생각해 볼 일이다. 우주 비행 프로젝트의 숨겨진 조력자라는 1단계를 지나, 흑인 여성으로서 받았던 차별을 실력으로 돌파했다는 2단계를 지나, 차별 철폐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3단계에 이르길 바란다. 물론 영화는 2단계 정도까지만 생각하며 재밌게 보시고, 3단계는 영화가 끝난 후 도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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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빌리 엘리어트>


우리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천재 신화의 기본 스토리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뭔가 좀 다르다. 무엇일까? ⓒ팝엔터테인먼트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아이가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에 안착하는 이야기,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되풀이 되는 이야기 구조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기 힘들기에, 일종의 대리만족이라 하겠다. 굳이 보지 않고도 대략을 알 수 있다. 


그(또는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정작 자신은 모른다. 우연히 눈을 뜨고 그를 이끄는 선생님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모르고 단지 끌려서 시작하고, 점점 더 끌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오래지 않아 역경이 닥친다. 태생적으로 불우한 환경, 주위 사람들의 반대, 스스로에 대한 믿음 철회. 


어느새 다시 끌리고 결국엔 모든 역경을 이겨낸다. 결정적으로 그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고 가장 반대했던 주위 사람들이 가장 믿음직한 서포터가 된다. 모두의 기대와 믿음을 한 몸에 받고, 또 자신에 대한 믿음 또한 우뚝, 다시 찾아보기 힘든 성공을 쟁취한다. 우린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이 스토리 라인을 정확히 발견할 수 있다. 


'천재'가 아닌 천재를 둘러싼 '환경'을 조명하다


무수히 많은 천재 이야기들, 분명 거기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계속 양산 되는 듯. 반면 이 영화는 천재가 아닌 천재의 환경에 집중했다. 그곳엔 무수한 이야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팝엔터테인먼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고 심지어 누구라도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 하지만 유독 이 영화에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것엔 분명 다른 무엇이 있을 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 엘리어트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를 둘러싼 것들을 보아야 한다. 


1984년 영국 탄광촌, 대규모 파업으로 동네는 마비 상태다. 아빠와 형 모두 광부인 빌리 엘리어트네도 마찬가지.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빌리는 춤을 좋아하는데, 아빠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 못해 권투를 배우러 다닌다. 


어느 날 함께 체육관을 쓰게 된 발레수업단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곧 그의 눈은 그곳에 못박혀 움직일 줄 모르고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한다. 선생님은 한 눈에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발레를 배울 것을 중용한다. 하지만 그에겐 상남자 아빠와 형이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가 발레를 하는 건 잘못된 거다'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당시다. 이후의 스토리는 누구나 익히 알만 할듯. 빌리는 과연?


영화는 '천재'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 천재의 성장과 고민, 천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형상화 시키는 요소들, 즉 춤과 행동과 음악들에 집중한다. 그렇게 감독은 지극히 식상한 스토리를 지극히 개념있는 영화적 스토리로 탈바꿈 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참으로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를 만끽할 수 있다. 


상승과 하강, 이 영화에서 보고 느껴야 하는 키워드


이 영화의 빛나는 성취가 있다면, 상승과 하강의 기막힌 대비에서 보여지는 천재의 이면이다. 절대적 공감의 끝엔, 천재가 천재일 수 있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다. ⓒ팝엔터테인먼트



영화의 또 다른 중요 키워드는 다름 아닌 '파업'이다. 정확하게는 파업으로 대변되는 '현실'이겠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천재는 다분히 망상에 가까운, 희망이라는 말도 꺼내기 힘든 '이상'이 아니겠는가. 천재, 아니 한 아이의 성장 그 이면에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괴리가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능력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빌리의 점프 장면이 계속된다. 중반부쯤, 빌리가 멋도 모르게 발레 동작을 따라할 때면 전에 없이 극렬해지는 파업 현장이 비친다. 마지막에 빌리의 점프 장면이 다시 나오는데, 그 직전엔 다시 땅굴로 내려가는 아빠와 형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한 후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빌리의 모습이 대비된다. 


시종일관 상승과 하강의 연속이다. 당연히 상승은 성공과 이상을 하강은 시련과 현실을 뜻하겠다. 빌리가 이상에 가까이 갈수록 아빠와 형은 현실로 향한다. 빌리의 기막힌 재능이라는 씨앗도 아빠와 형의 헌신이라는 거름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 이토록 극렬한 대비를 이토록 유려하게 표현해내니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이자 보고 느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와호장룡>에서 아름답고 슬프기까지 한 상승과 하강의 절묘한 대비를 볼 수 있다. 오로지 상승을 목표로 살아왔던 용, 하강이 갖는 부드러운 강함의 경지를 체득한 리무바이. 영화의 마지막, 용이 끝없는 안개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선사한다. <빌리 엘리어트>가 선사하는 바가 이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하지만, 충분히 빛나고 빛나는 성취다.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시대,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빌리가 아닌 빌리 엘리어트 가족을 응원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식상하고 진부하고 고루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다. ⓒ팝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빌리가 아닌 빌리의 가족, 엘리어트 가를 응원한다. 그들에게서 우리 윗세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구어 '개천에서 용 난다'를 가문의 단 하나의 목표로 삼고 될 성 싶은 잎 한 명을 골라 그만을 지원했다. 다른 이들은 현실의 무거운 짐을 일찌감치 지고 평생을 희생했다. 


빌리의 아빠와 형은 파업으로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지만, 빌리를 위해선 자신이 자신일 수 없었다. 그 소박한 이상조차 버리고 현실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땅굴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니 윗세대에서 '용'이 된 사람들 대부분이 겪었을 이야기다. 


이제는 희생으로라도 엮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성공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사람이 꿈도 꿀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된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가 참조한 식상한 이야기는, 그래서 또 다른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욱더 응원하게 된다. 식상한 이야기의 주인공을. 식상하더라도 좋으니 꼭 성공하라고 말이다. '천재'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의 성공 이야기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릴까봐 두렵다. 부디 많은 이들이 '빌리 엘리어트'를 꿈꾸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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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무한대를 본 남자>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천재' 영화. 이번에는 어떤 천재를 그려낼까? 그에게서 천재말고 어떤 특별함을 찾아낼 수 있을까? ⓒ판씨네마(주)



천재에 관한 영화를 꽤 봐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아마데우스>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에 관한 영화이고, 주기적으로 다시 보는 <굿 윌 헌팅>, <뷰티풀 마인도>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천재 영화이다. 재작년과 작년과 올해에도 천재 영화를 봤는데 <사랑에 대한 모든 것> <이미테이션 게임> <세기의 매치>가 그것이다. 역시 모두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했다. 


2016년이 저무는 지금, 또 하나의 천재 영화가 나왔다.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의 삶을 옮긴 <무한대를 본 남자>.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알아준 '하디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라마누잔은 다름 아닌 영국에 의해 점령당한 식민지 인도 출신인 것이다. 반면 하디 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 교수이자 왕립학회 회원이고. 정녕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둘은 라마누잔과 하디였지만, 누군가에겐 '식민지 유색인종'과 '영국의 저명인사'였다. 


빈민가에서 죽어갔을지 모를 '천재' 라마누잔



역사에 길이남을 수학 천재 중 한 명인 '라마누잔'. 그는 인도 빈민가에서 평생 지내다 그렇게 죽어갈 운명이었다. 그런 그에게, 그리고 수학계와 인류에게 빛이 되는 존재가 있으니, 대영제국의 하디 교수다. ⓒ판씨네마(주)



영화는 '천재' 라마누잔의 삶을 엿보며,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의 특별한 관계를 조명한다. 당대 수학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라마누잔, 그는 하디 교수가 아니었으면 식민지 인도의 어느 빈민가에서 죽어갔을 것이다. 한편, 하디 교수 또한 라마누잔을 발견해내 따로 또 같이 연구함으로써 세계 수학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였다. 


라마누잔은 인도 마드라스의 빈민가에서 일자리를 찾아다닌다. 숫자에 관해선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실력을 갖춘 그는 회계 일을 하고 싶어했고,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수많은 거절을 당한 끝에 우체국 회계과에서 일을 한다. 그곳에서 만난 인도인 상사는 그의 천재적인 수학 실력을 알아채고 더 큰 세계인 영국으로 떠날 것을 중용한다. 누구 한 사람만 알아주라는 기대로, 수없이 많은 편지를 날리는 라마누잔. 그 편지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하디 교수한테까지 전해진다. 


단번에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알아챈 하디 교수는 동료 교수와 합심해 라마누잔을 데려온다. 라마누잔은 머릿속에서 춤추는 수많은 수학 공식과 숫자들을 뿜어내기 위해 갓 새신부와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영국으로 간다. 그는 매일 하디 교수의 집무실로 찾아가 개인 교습, 토론, 연구를 계속한다. 하디 교수는 라마누잔이라는 다이아몬드 원석을 다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편 라마누잔은 유색인종, 종교로 괴롭힘을 당하고, 집과 가족이 너무 그리워 앓기도 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정진하지만, 급기야 결핵에 걸리고 마는데...


라마누잔를 발견해낸 하디 교수


대영제국의 왕립협회 회원이자 저명한 교수인 하디 교수. 그는 식민지 인도의 일개 회계원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그를 영국으로 불러와 함께 수학의 차원을 몇 단계 올리는 일에 매진한다. ⓒ판씨네마(주)



거의 매년 만들어다시피 하는 천재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엔 얼마나 많은 천재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며 사람들은 왜 그렇게 천재 이야기에 열광하는가 궁금해진다. 대부분의 일반인이 천재가 아니기 때문일 텐데, 그들에게 천재란 '특별'하고 '다른' 삶일 것이다. 평생 직접 겪어볼 수 없기에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보고 싶은 게 아닐까. 그래서 천재 이야기는 오락성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천재 이야기는 많은 경우 실화이고, 실화는 오락성을 표출하기에 한계가 있기에 정극으로 가곤 한다. 그럼에도 천재의 삶이 대부분 평범하지 않고 우여곡절이 많기에, 그 자체로도 극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 <무한대를 본 남자>도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천재라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라도 라마누잔의 삶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기 힘든 경험이 주를 이룬다. 


그렇지만 영화가 '천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천재' 라마누잔과 그를 알아준 하디 교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천재 '라마누잔'과 '그를 알아준' 하디 교수의 이야기인 것이다. 제목이 내포하고 있는 바와는 거리가 좀 있어 보인다. 재미는 많이 퇴색되고, 감동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것이 괜찮은 선택이었는지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할 듯하다. 


개인적으론 무난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수학' 천재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많진 않을 거다. 음악, 미술, 건축과는 달리 오직 그들만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치열함이나 그의 위대함이 제대로 비춰질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럴 바엔 그 부분을 줄이는 게 좋을지 모른다. 반면, 천재만의 특별하고 다른 세상을 제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은 건 또 그런 영화만이 가지는 장점을 퇴색시켜버린 게 된다. 그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잘 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난했다는 건 경계선을 많이 침범하곤 했다는 의미이다.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의 특별한 관계 이야기


수학계를 몇 단계 끌어올린 라마누잔의 천재성은 역사가 보증한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알아봐준 하디 교수야말로 정녕 위대한 인물이다. 그런 그들의 특별한 관계는 아름답다. ⓒ판씨네마(주)



이 영화가 승부를 본 건 다름 아닌 '관계'이다.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의,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별한 관계 말이다. 첫째로 그들은 제국 영국인과 식민지 인도인 사이다. 둘째로 왕립협회 회원의 교수와 무명인 사이다. 셋째로 그들은 절대적 무신론자와 독실한 종교인 사이다. 당시로선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 먼 사이인 것이다. 그런 그들 사이에 '관계'라는 말이 들어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 기적은 라마누잔의 천재성보단 하디 교수의 태도에 기인한다.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가 만나면서 영화는 '천재' 이야기에서 '관계' 이야기로 무게의 중심이 옮겨진다. 여기에서 호불호가 갈린다. 영화로 소개되지 않았던 또 다른 천재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른 방향에서 보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그들만의 특별한 관계의 세계로 들어온다면 후회하지 않을 거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준다. 


하디 교수의 라마누잔을 향한 관심과 애정은 지극히 사적인 것 같지만 사실 지극히 공적이다. 천재인 그를 총애해 그를 향해서만 애정을 쏟으며 자신의 시간과 공력을 투자해 가르치고 그의 공식이 공신력을 얻을 수 있게 발벗고 나선다. 라마누잔에겐 기적과도 같은 이런 상황을, 어째서 하디 교수는 정력적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그건 라마누잔으로 하여금 수학계를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게 하려는 의도의 발현이다. 그것이 아니고는 하디 교수의 라마누잔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설명할 다른 도리가 없다. 돈? 명예? 권력? 모두 아니다. 


한편 라마누잔은 어떨까. 그는 머릿속에서 춤추는 무한대의 숫자와 공식들을 밖으로 보여내기 위해 하디 교수를 찾았다. 말그대로 그의 머릿속엔 수학 말고는 다른 무엇이 들어 있지 않았다. 가족도 뒤로 한 채, 자신의 나라를 식민지로 둔 제국의 한복판으로 오지 않았는가. 그때 이미 결정이 난 것이리라. 그의 인생에서 다른 무엇도 필요 없다는 것을. 그 부분에서 라마누잔과 하디 교수는 일치단결했다. 


올바른 관계 설정은 정말 어렵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아닌가. 어려울 때 도와준 이에게 평생 감사하며 은혜를 베푸는 게 또 인간의 도리 아니겠는가.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지만, 공이라는 게 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진짜 문제는 이런 것들이 아닐 거다. 우리는 알고 있다.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없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지극히 잘 알고 있는 그 선을 지키며 나아가는 게 어려울까. 관계 설정은 어려울지 모르나, 설정이 끝난 뒤 선을 긋는 건 '선(善)'과 '악(惡)'의 차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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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4등>


영화 <4등> 포스터 ⓒCGV아트하우스



4등은 참 애매하다. 특히 스포츠에선 애매하다못해 잔인하다. 1, 2, 3등만 시상식에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누구는 4등이나 꼴등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4등이라서 다른 누구보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4등이 참으로 잔인한 이유다. '희망고문'이라고 할까. 


영화 <4등>은 자타공인 수영에 소질이 있지만 대회만 나갔다 하면 4등을 면치 못하는, 즉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는 소년 준호의 이야기다. 그에겐 누구보다도 그를 챙겨주고 걱정하고 괴롭히는 극성스러운 엄마가 있다. 그녀에겐 4등이 꼴등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준호가 소질이 있다는 걸 알거니와 하필 4등이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녀는 어떻게든 메달을 따게 해준다는 코치를 찾아간다. 


한편 준호는 왜 1등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굳이 1등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수영에 소질이 있는 건 알지만, 수영이 좋고 물이 좋은 것 뿐이다. 물에 있을 때 편안하고 좋은데, 자꾸만 1등을 하라고 하면 그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왕이면 메달을 따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 엄마 따라 코치에게 배워보고자 한다. 신기하다. 성적이 올랐다. 그런데 이 코치가 사정없이 때리는 게 아닌가.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오로지 1등을 위해서


영화는 이처럼 세 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아들 준호를 위해서' 오로지 1등을 외치는 엄마, 역시 '준호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코치 광수,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지만 수영이 하고 싶다는 것 하나는 잘 알고 있는 준호. 코치 광수는 때려야만 몸이 체득하고 말을 잘 듣고 악이 생겨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준호는 1등하는 건 싫진 않지만(1등을 해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맞는 건 싫다고 말하며, 엄마는 아들이 맞는 건 싫지만 맞아서 1등을 하면 나쁠 것 없다고 말한다. 


"형, 1등하면 기분 좋아요? 그런데 왜 1등을 하려는 거예요?"


누가 옳고 누가 틀린 걸까. 여기에 옳고 그름이 존재하는 걸까. 중요한 건 당사자인 준호의 마음일 텐데, 또 그렇지만도 못한 현실이다.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이 커서 제 구실을 못할까봐 걱정이다. 경쟁의 정점인 스포츠에서 순위권에 들지 못하고 어떻게 제 구실을 할 거란 말인가. 극 중 엄마의 모습에 마냥 너무하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코치 광수의 경우엔 조금 다르다. 그는 가해자임에 분명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유로 인해 가해를 했다. 또한 그도 피해자다. 그는 오래 전 아시아 신기록까지 이뤄낸 적이 있는 천재였다. 하지만 술도 마시고 노름도 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그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감독에게 체벌을 받아 그 분을 참지 못하고 대표팀을 뛰쳐 나왔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인데, 그에겐 굳이 스승이 필요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체벌(폭력)이 되물림 되었다. 


<위플래쉬>와 <4등>


이쯤에서 1년 전 개봉해 많은 인기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위플래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악마와 같은 인신 공격과 한계를 뛰어 넘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천재성을 끄집어내는 플래처의 방식은 광수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 방식을 뿌리치고 그만둬버리지만, 열정과 관심을 뒤로 돌리지 못하고 자신 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끄집어내는 앤드류는 준호를 연상시킨다. 


영화 <위플래쉬> 포스터 ⓒ소니 픽처스 클래식스



개인적으로 <4등>이 훨씬 유려하게 풀어낸 것 같다. 앤드류는 플래처를 뛰어 넘는 엄청난 연습으로 플래처 앞에서 보란듯이 훌륭한 연주를 선보이지만, 준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습을 한다. 그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거기에 엄마와 코치가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의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동안이나마 수영을 그만둘 수밖에 없지 않았다면, 그렇게 수영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으니까. 


대표팀 감독이 광수를 체벌하고 광수가 준호를 체벌하고 급기야 준호가 동생을 때리는(체벌하는 것처럼) 장면을 보고 있자니, 폭력의 되물림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의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면 군대 내에서의 폭력의 되물림이 두 명을 죽음으로 몰고가는데, <4등>에서는 두 명의 수영 인생을 망치거나 망칠 뻔 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폭력의 되물림, 정확히는 스포츠계에서의 체벌의 일상화와 되물림 또한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어려운 문제인 아이 교육, 답은 있을까?


영화는 참으로 중대하고 풀기 어렵고 심각한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뤘다. 도무지 풀 수 없을 것만 같은, 차라리 아이가 없었으면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다. 다들 문제는 인식하고 있지만, 막상 닥치면 누구라도 준호의 엄마처럼 또는 그에 준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 <4등>의 한 장면. ⓒCGV아트하우스



"엄마, 내가 맞더라도 1등을 하는 게 좋아?


영화는 소년의 훌륭한 성장담을 유려하게 풀어내며 답을 제시한다. 문제를 풀 수 있는 답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에 있다는 것이다. 부모들이 아이의 앞날을 걱정해 1등을 외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부모 자신들의 위신도 그 1등에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부모들부터 여유를 갖고 중심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 문제는 영화에서 준호가 지니고 있는 '천재성'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평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모든 걸 떠 맡기고, "너의 삶이니 너가 알아서 해라"하는 건 답이 될 수 없다. 이것도 완전한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여유를 갖고 "한 번 해봐"라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칭찬해주고 지원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아갈 준비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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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아쿠타가와의 중국 기행> 표지 ⓒ섬앤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우리나라의 '이상'과 같은 느낌이자 위상을 갖고 있다. 각각 30대,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도 그렇고, 일본의 '아쿠타가와상'과 한국의 '이상문학상'이 그 이름에 걸맞게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것도 그렇다 하겠다. 실제로 이상은 아쿠타가와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천재들의 합창이다.


우리에게 아쿠타가와는 어떻게 다가올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알지 모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라쇼몽>. 그 원작을 그가 썼다. 1915년 작인 <라쇼몽>과 1922년 작인 <덤불 속>을 교묘히 각색했다. 인간의 내면, 나아가 심연을 이토록 완벽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니. 또한 이 작품은 굉장히 다각적이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뽐내는데, 그 의식과 수법은 다름 아닌 그의 생애 처음의 '중국 기행'에서 영향을 받았다. 대단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그는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1/5이 지나가는 시점에 자살로 생을 마쳤으니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짧은 평생, 외국에 나가보는 게 꿈이었던 그에게 기회가 온다. 1921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의 객외 사원이 되었고 곧 중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곳에서 약 4개월 간 체류하였고 돌아와 <상해유기> <강남유기> <장강유기> 따위를 집필했다. 


만족스러운 거 하나 없는 중국의 첫인상


중국에 가기 전, 아니 평생에 걸쳐 그는 서구 지향 일변도의 문단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외려 한문맥적인 전통에 근거해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그렇게 중국에 대한 관념을 쌓아 올린 아쿠타가와는, 그 근원인 중국에 가게 된 것을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완전하게 즐기고 만끽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서 본 중국의 실상은 그가 쌓아올린 관념으로서의 중국과는 완전히 달랐다. 낯 두꺼운 노파와 낮에 탔던 인력거,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아쿠타가와가 받은 중국의 첫인상이었다. 그들은 초라하고 비참해 보였고 약싹 빠르고 비굴해 보였다. 또한 그가 중국에서 보낸 첫날 밤의 숙소에서 느낀 건 '만족스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현대 중국에 무엇이 있는가?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모두 타락해 있지 않나? 특히 예술에 대해서 말하자면 가경과 도광 시기 이후 무엇 하나라도 자랑할 만한 작품이 있나? 게다가 국민은 노소를 불문하고 제 멋대로 태평이다. 물론 젊은 국민 중에는 조금이나마 활력이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라 해도 전 국민의 마음에 울릴 정도로 커다란 정열은 없음이 사실이다. 나는 중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가 없다." (본문 212p 중에서)


첫인상이 안 좋은 건 괜찮다. 앞으로 나아지면 되니까. 그렇다면 과연 아쿠타가와의 중국에 대한 인상은 나아졌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중국 자체에 대한, 요컨대 자연 풍경이나 사람들의 행태에 대한 인상은 하등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가도 그가 그리던 중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가 애초에 품어 왔던 중국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기에, 실망을 하면서도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다만, 그가 만난 위대한 인물들은 '역시'라는 생각이 들 만했다. 


아쿠타가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다층적인 중국 기행


중국을 가기 전과 후의 상호 모순적인 생각을 공유하게 되는 아쿠타가와. 그 혼란의 와중에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생각을 거두지 않는다. 특히 중국은 당시 일본과 전쟁 중에 있었기 때문에, 타자가 일본을 보고 느끼는 바를 적나라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걸 여실히 보여주는 천평산 백운사 정자 벽의 배일 낙서.


" 그중에는 "여러분! 거기 있는 당신 말입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저 굴욕적인 21개조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것과 "개와 일본 놈은 벽에 낙서하지 말 것"이라는 것도 있었다.(그러나 시마쓰 씨는 태연하게 층운파의 하이쿠 제목을 짓고 있었다.)" (본문 154p 중에서)


이런 낙서를 마주하면 어떤 느낌이 들까. 자신이 동경하는 곳에 와서 자국을 욕하는 낙서를 보는 심경이. 그러면서 함께 간 또 다른 자국민은 태연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란. 자기 분열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또 그는 몸이 좋지 않았는데, 빡빡한 일정의 여행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행을 다녀와 글을 쓰는 와중에도 좋지 않은 몸이 더욱 안 좋아져 많은 고생을 한다. 이처럼 그의 생애 최초 중국 여행은 다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 그의 작품 활동과 그의 세상을 보는 눈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책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전환점을 마련해준 계기가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우리에게도 아쿠타가와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해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21세기 초, 전 세계는 혼란했다. 아시아는 그 혼란의 중심에 있었다. 거즌 100년이 지난 지금은? 혼란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여러 의미로 아시아가 그 중심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때 그 시절 일본 최고의 작가가 바라본 혼란의 한 가운데는 어땠을까. 처연했을 거다. 헛헛했을 거다. 혼란스러웠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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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세기의 매치>



영화 <세기의 매치> 포스터 ⓒ판시네마(주)


1972년, 냉전 한복판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체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 그 주인공은 미국의 체스 천재 '바비 피셔'와 러시아의 체스 황제 '보리스 스파스키'. 6세에 체스 입문, 13세에 미국을 제패하고, 15세에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획득한 바비 피셔는 30세에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다. 보리스 스파스키는 30세에 그랜드마스터가 되었고 33세인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적의 체스 황제로 군림하고 있었다. 


천재 대 황제의 대결에서는 천재가 이기곤 한다. 그렇게 한 시대가 흐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재에겐 우여곡절이 많다. 체스를 예로 들면, 천재는 오로지 체스만 잘 할 뿐이다. 체스 이외의 것에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문제는 천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그들은 체스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고 잘 알지 못한다. 천재가 체스를 잘 해서 이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 ⓒ판시네마(주)



미국과 소련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1972년 체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은, 천재 바비 피셔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었다. 그건 보리스 스파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체스로 상대방을 이기고 챔피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시대는 그것 만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자국 선수의 승리를 자국의 승리로 여겼다. 


예민함과 외로움이 천재적인 체스 재능으로


영화 <세기의 매치>는 바비 피셔의 어린 시절부터 1972년 체스 세계 선수권 대회 결승까지, 그의 체스 일대기를 다뤘다. 바비 피셔(토비 맥과이어 분)는 혁명을 주창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당연히 감시가 따라다녔고 피셔에게 감시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몹쓸 것이었다. 그 때문에 피셔는 어릴 때부터 극도로 예민했고 외로웠으며, 그 예민함과 외로움이 체스로 옮겨졌다. 


곧 체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피셔, 일사천리로 미국을 재패하고 세계 재패로의 길을 떠난다. 그렇지만 어릴 때의 트라우마는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그가 실력을 100% 낼 수 없게 만들었다. 드디어 세계 챔피언 보리스 스파스키에게 도전한 피셔, 하지만 첫 번째 도전은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 ⓒ판시네마(주)



이듬해 다시 도전장을 내민 피셔, 전 세계의 수많은 그랜드마스터들을 꺾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셔는 당당히 그들을 모두 꺾고 다시금 보리스 스파스키 앞에 선다. 그의 실력은 이미 세계 최고, 그가 넘어서야 할 대상은 보리스 스파스키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적, 트라우마를 넘어서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주최 측과 상대방에게 여러 무리한 요구를 한다. 과연 이번에는 이길 수 있을까?


시대의 희생양이 된 개인의 아픔, 제대로 그리지 못하다


<세기의 매치>는 15년 전인 2001년 작품인 론 하워드 감독의 <뷰티풀 마인드>가 생각나게 한다. <뷰티풀 마인드>는 <세기의 매치>와 마찬가지로 천재와 냉전에 관한 이야기로, 미국의 수학 천재가 소련의 암호 해독 프로젝트에 비밀리에 투입되었다가 소련 스파이가 미행하고 감시한다는 망령에 사로잡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랑으로 이겨냈고 노벨상을 타기에 이른다. 그의 이론은 전 세계 수많은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영화 또한 시대의 희생양이 된 한 개인의 아픔을 그려내고자 했다. 혁명의 이면에 있는 감시와 미행으로 괴로워했고 냉전 시대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가는 개인의 정신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온전히 그려내지 못한 것 같다. 분위기, 메시지 등이 <뷰티풀 마인드>와 비교되지 않았다. 


연출력과 시나리오는 괜찮았지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한 것인지 뚜렷하지 못했다. 알았다고 해도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결국은 주인공인 바비 피셔에 대한 이야기인데, 피셔가 어릴 때 당했던 감시와 미행은 혁명에 의한 것임에 반해 나중에 망상으로 감시와 미행을 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건 무엇인가? 단순한 한 개인의 트라우마인가? 아니면 냉전 시대의 국가주의로 인한 감시와 미행인가?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감시와 미행을 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없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서로 호응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를 이끌어가는 제일 중요한 부분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 ⓒ판시네마(주)



여러 아쉬움에도, 실화를 다룬 영화는 환영한다


큰 허점에도 이 영화는 힘을 갖고 있다. 다름 아닌 '실화' 덕분이다. 일종의 인간 승리 스토리이다. 그가 세계 챔피언이 되었든 되지 못했든 한 곳 만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인간의 숭고함은 인간을 공감의 장으로 불러들여 울리게 마련이다. 바비 피셔가 왜 힘들어 했는지 생각하기 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한다면, 더 재밌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바비 피셔에게는 두 조력자가 있었다. 한 사람은 자칭 애국자인 변호사 마샬과 전직 체스 선수인 신부 롬바디이다. 마샬은 체스를 잘 모르지만 피셔를 스타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계속해서 그를 압박하고 이용하려 들었다. 반면 롬바디는 그를 이해해주는 인물이다. 그가 힘들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면 체스로 풀어주었다. 영화는 이 두 조력자의 입장 차로 다른 면으로 피셔의 상태와 맞물려 바라보려 했는데, 그 또한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크게 남은 영화 <세기의 매치>. 개인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길게 남지 않은 여운이었다. 실화라면 아무래도 여운이 길게 남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에도, 새드엔딩이라고 하기에도, 어정쩡한 결말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에 접한 천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도 그리 길지 않은 여운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 길이가 더욱 짧은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천재의 실화를 다룬 영화를 언제나 환영한다. 실존 인물의 삶을 들여다보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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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위플래쉬>



영화 <위플래쉬> 포스터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천재와 폭군의 만남. 천재는 아직 자신이 천재인 줄 모르고, 폭군은 그의 재능이 진짜인 걸 안다. 천재는 최고가 되기 위해 폭군의 가혹한 채찍질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폭군은 역시 그의 재능을 최고로 끌어올리기 위해 모질고 가혹한 채찍질을 선사한다. 이들에게는 재능이 밑받침 되는 노력, 한계를 가볍게 넘어서는 열정,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의 광기만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천재는 자신이 천재인 줄 모르기 때문에 어느 순간 한계에 직면한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그리고 폭군의 가혹한 채찍질에 대해. 무엇보다 그 모멸감 가득한 채찍질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최고가 되기 전에 내 자신이 파괴될 것 같은 기분이다. 폭군 앞에서는 천재는 커녕 인간쓰레기에 불과하다. 


반면 폭군은 천재를 위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모멸감과 가혹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천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폭군은 철저히 교육에 의한 천재 양성을 지지한다. 문제는 방법에 있다. 누구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그는 칭찬은 개나 줘버리고 오직 채찍질만이 천재를 만든다고 한다. 


나를 따르면 반드시 최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 이야기다. 여기에서 천재는 주인공 앤드류이고, 폭군은 플렛처 선생이다.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최고의 명문 음악학교 신입생이다. 그는 학교의 모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음악 교수인 플렛처 눈에 들어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말그대로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했고 마침내 플렛처의 눈에 들었고 그의 반으로 직행한다. 


영화는 이제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악연도 이제 시작이다. 완벽함이란 단어가 가장 완벽하게 들어 맞는 플렛처의 반에서는 연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말만 연습일 뿐이다. 연습 때라도 완벽하게 연주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메인과 보조의 자리가 바뀌거나, 아예 반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쫓겨난 이는 다시는 플렛처의 반으로 돌아올 수 없다. '연습도 실전처럼' 이란 명구가 생각나게 한다. 


플렛처의 교육 방법론은 피교육자의 실력을 최상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 먼저 그는 실력 뿐만 아니라 잠재능력과 열정이 있는 학생 만을 골라 가르치기 때문에 최상위로 오를 수 있는 기본 바탕이 갖춰져 있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 만의 지독하고 모질고 가혹한 방법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그의 방법은 다른 게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익숙할 것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될 때까지 하라' 단, 플렛처 교수 자신의 기준에서 단 1%의 오차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의 기준이 곧 최고가 되는 기준인 것만은 분명하기에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다. '나를 따르면 반드시 최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음악 영화가 아닌 교육 영화, 황당한 교육 방식


앤드류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시련을 겪으며 한 발씩 나아간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연습 시간을 버티며 보조에서 일약 메인을 꿰찬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시시각각 메인과 보조를 오간다. 플렛처는 왜 앤드류한테서 최고의 실력을 끄집어 내놓고는 곧바로 그를 내동댕이 치는 것인지? 앤드류는 분노가 폭발하기에 이른다. 


폭군 플렛처는 그의 분노가 폭발하기를 기다린 듯하다. 그리고 그의 분노가 열정으로, 광기로 변해 최상의 실력을 뽐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길 원한다. 그것이 바로 최고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생각은 한 장면에 꽂혀 있다. 


역사상 최고의 재즈 아티스트 '찰리 파커'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아티스트가 되게끔 해준 '조 존스'의 이야기. 조 존스는 찰리 파커의 연주가 삼류라며 얼굴을 향해 드럼 심벌을 날린 적이 있다. 이 모멸감 가득한 사건을 계기로 찰리 파커는 각성했고 그 분노를 광기로 승화시켜 이후 최고의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플렛처의 교육 방식의 핵심 사례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 <위플래쉬>의 한 장면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를 다르게 보게 된다. 음악 영화가 아닌 교육 영화로. 전율이 흐르는 음악을 듣는 것도 황홀하지만, 전율이 흐르는 교육 방식을 보는 것도 황당하다는 걸. 그렇다. 플렛처의 교육 방식은 황당하기 그지 없다.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그저 황당할 뿐이다. 또 눈살이 찌뿌려지고 짜증이 난다. 그가 만들어 낸 최고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없다. 광기만 있을 뿐. 


그래도 <위플래쉬>는 영화 자체로 최고의 수작


문제는 수요에 있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플렛처의 교육 방침을 기꺼이 따르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런 교육이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교육을 추호도 옹호할 수 없다. 천재 또는 최고인 이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그런 세상을 지탱해가는 이들이 바로 평범하지만 올바른 이들 아닌가. 


이런저런 논란을 제외하고 영화 자체의 재미로 보자면, 이 영화 <위플래쉬>는 가히 최고의 수작이다. 시종일관 눈과 귀가 즐거웠고, 단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너무나도 몰입이 잘 되었다. 자칫 무겁고 재미 없을 수 있는 소재와 주제임에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음악 영화로도, 교육 영화로도, 심지어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스릴러 영화로도 감상할 수 있다. 앤드류의 광기 어린 연주는 전율 그 자체였고, 플렛처의 동작 하나하나는 마치 나를 향하는 것 같아 섬짓함이 폐부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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