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월>


소설 <세월> 표지 ⓒ아시아



2014년 4월 16일,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참사가 발생한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탑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했다. 당년 11월에 결국 수색이 종료되었는데, 9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 여가 지난 2017년 3월 22일 드디어 세월호가 인양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참사 3주기가 지난 4월 18일에는 미수습자 9명 수색이 시작되었다.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색은 나라가 바뀌고 있다는 청신호일까? 그 청신호에 맞춰, 아니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많은 관련 책들이 나왔고 나오고 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나왔는데, 세월호의 그늘을 그린 이는 감히 없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출간한 방현석 소설가의 <세월>은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당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한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그리고 여섯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 엄마는 희생자, 아빠와 오빠는 미수습자... 다섯 살 아이만 혼자 살아 돌아왔다. 언론에서 소소하게 다뤄졌을 뿐, 많은 이들이 모를 이 이야기는 실화다. <세월>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월호 베트남'으로 검색하면 겨우 몇몇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 실화가, 이 소설로 그늘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나는 감히 이 실화가 그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그늘, 베트남 이주민 가족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는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아니다. 이 세월호에서 희생된 엄마 린의 아버지 쩌우다. 쩌우는 베트남 까마우에서 어부로 살아간다. 딸 린이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그는 마뜩잖아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던 일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행동과 결정은 자본주의 물결의 한 갈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한탄하고 한탄한다. 


그런 와중, 갑자기 딸 네가 제주도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농사 지으면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다는 바람. 그런데 그 소식은 곧 여객선 침몰 소식으로 점철된다. 자본주의 물결의 한탄이 자본주의 침몰로 갈 길을 잃었다. 처음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안도하고, 곧 잘못된 발표고 사실 구조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쩌우는 큰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쩌우는 세상에서 가장 기막힌 축하를 받는다. 딸 린이 일주일 만에 건져 올려졌기에,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받은 축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들을 간직한 채 하염 없이 기다릴 뿐이다. 탈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딸이 거기서 죽어야 했는지, 사위와 외손자가 왜 아직도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소설이 주목하는 건, 그리고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주목해야 하는 건,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겠다. 쩌우는 세월호 참사에서 유일하게 생존자, 희생자, 미수습자 가족이다. 기뻐하면서, 비참한 부러움과 기막힌 축하를 받으며, 끔찍한 기다림까지 교차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다름 아닌 그들은 이주민. 똑같은 슬픔을 느끼고 똑같은 목숨일진대, 차별 받는다. 


세월호 참사, 그 다양한 이야기와 진실의 시작


단편에 가까운 중편, 이 짧은 소설에는 참으로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라는 당대 최대 비극이라는 층위 아래, '베트남 이주민'을 한국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더 깊이 들어가 그럼에도 존재할 '차별', 한편으론 한국은 물론 베트남까지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까지. 


각 층위의 갯수와 깊이만큼 스토리의 얼개가 얇고, 그러다 보니 소설보다는 논픽션으로 읽힐 여지도 많지만, 던지는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가 워낙 많고 깊다 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오히려 목적에 충실한 글쓰기와 쉬운 문체,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빨리 읽힐 뿐이다. 그러곤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층위가 보인다. 


큰 사건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명백한 한 쪽의 잘못과 한 쪽의 명예로움만으로 비춰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도 계속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오는 게 그 예다. 세월호 참사는 이제 3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인양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우린 그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진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세월>이 그 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비롯해 일명 '베트남 3부작'을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세월호 참사와는 또 다른 '한국과 베트남'의 다양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우리가 결코 고개를 돌려선 안 되는 진실이겠다. 마음 졸이는 한편 작가의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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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최악의 하루>


현 남친과 전 남친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는, 진심을 전할 여력조차 마련되지 않은 '최악의 하루' ⓒCGV 아트하우스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좋아해요.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하는듯, 넋두리를 하는듯, 어쩌다가 홀로 남겨진 은희는 정체모를 말을 내뱉는다. 그녀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였다. 현 남친과 전 남친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하루를 시작할 때는 괜찮았었는데. 우연히 길을 헤매는 일본인 소설가를 만나 아무 꺼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어쩌다가 그녀는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비단 그 하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연인과 초면을 향한 연기, 생각과는 반대의 아이러니


연기 못하는 연기지망생 은희(한예리 분). 수업을 마치고 나와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난다. 은희는 일본말을 못하고, 료헤이는 한국말을 못한다. 둘 다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은희는 설명하기가 어려워 직접 함께 료헤이가 찾는 곳으로 간다. 시간이 남아 카페로 향한 그들.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보기에 풋풋하고 설레기까지 한 듯한 대화가 이어진다. 왠지 편해보인다. 


은희의 '최악의 하루'에서 유일하게 최악이지 않은 때가 바로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 료헤이를 만나는 때다. ⓒCGV 아트하우스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가 유일하게 하루 중 '최악'이지 않은 때가 바로 료헤이를 만나는 때이다. 말도 안 통하니 속마음을 제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니 내 본 모습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가 편할 수 있다. 연기 못하는 은희는 아이러니하게 일상 생활에선, 즉 사랑의 대상에겐 연기를 잘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 즉 처음 보는 사람에겐 연기를 잘 못하니 그 모습이 부담 없이 다가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연기를 하지 않은가. 


사람은 연기자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연기를 한다. 그건 주로 만나는 사람마다 달라진다. 처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건 연기보다 본능에 가깝다. 초면, 연인, 가족, 상사, 동료, 후배, 친구 등. 여기서 가장 마음 쓰이는, 즉 가장 많은 연기를 필요로 하는 이는 누굴까? 연인이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하면, 아니 사실 가장 마음이 덜 쓰이는 이는 처음 보는 사람일 것이다. 굳이 연기를 하면서까지 잘 보이거나 자신을 감추고 그에게 맞는 모습을 보이려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은희가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 태도


은희는 료헤이와의 대화 중에 온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의 메시지를 받고 서촌에서 남산으로 향한다. 현오는 아침드라마 조연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모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타났다.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은희가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게 오버하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아주 꼴 보기 싫다. 다만 그는 아주 잘 생겼기에, 그런 모습이 꼴 보기 싫다는 거지 본판은 아주 좋아라 한다. 은희를 밤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현오, 언제나처럼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다 선글라스를 뺏어 도망가려는 은희를 향해 한마디 한다. "유경아!" 은희는 선글라스를 밟아 부셔버리고 산을 내려간다. 


현오와 있을 때면 은희는 장난꾸러기가 된다. 여느 커플처럼 그와 티격태격하며 귀엽게 지낸다. 아니, 그렇게 지내고 싶은데 현오는 그렇지 않다. 꼴에 티비에 나온다고 유세떠는 것 같다. 그리고 몇 마디 안 가 은희의 과거를 들춘다. 잠시 현오가 옆에 없을 때 유부남과 바람을 핀 은희, 사실 은희는 현오와 함께 있을 때면 너무 힘들다. 우울했다가 즐거웠다가, 왔다갔다 하는 게 눈에 보인다. 물론 현오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현오도 현오 자신이 병신같다고 한탄한다. 이 커플, 답이 없다. 


은희는 현오가 너무 좋으면서 너무 싫다. 마음이 떠난 것 같은데,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끈만 존재하는 것 같은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지 않나 보다. ⓒCGV 아트하우스



씩씩거리며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서서 아래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남자 하나가 오는 게 아닌가. 다름 아닌 은희가 바람 핀 유부남 운철(이희준 분)이다. 아까 현오를 만나러 가는 도중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왔댄다. 대단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 은희와 운철은 커피 한 잔 하며 근황을 묻고 답한다. "진심이 어떻게 진실을 이겨요?"라며, 행복하지 않으려 헤어진 아내와 합한다는 운철. 은희는 어이가 없어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갈 길을 간다. 


운철과 있을 때면 은희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우린 이루어질 수 없나 봐요. 우리 다신 만나지 마요. 또 만나면 나도 나를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 같은 대사를 읊을 것만 같다. 그건 운철도 마찬가지다. 말인지 방귄지 모를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60년대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대사를 읊는 게 아닌가. 그들은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아니, 연기를 하는 게 맞다. 그럼으로써 좀 더 현실적인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절대 할 수 없는 걸 그(그녀)를 만나며 할 수 있으니까. 


얄궃게도 거짓 위에서라야 전해지는 진심


이들 삼각 관계는 지구상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적어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서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관계 설정 중 하나다. '리얼리티하다'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하다. 그럼에도 현실적이긴 하니 그런 말을 붙일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이렇게 연극적인지? 왜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운철과 있을 때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은희. 연기 연습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은희에게 있는 여러 '진심' 중 하나일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



연기는 거짓말과 다름 없다. 내가 아닌 사람을, 내가 처하지 않은 상황을 연기하는 것과 "연기하고 있네"할 때의 그 연기도 모두 그렇다. 그건 엄연히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진심'을 전하고자 한다. 진심을 전하고자, 소통다운 소통을 하고자, 진실을 숨기는 게 아닌가. 만약 진실을 전하게 되면 진심과 소통은 쓰레기가 될 뿐이다. 운철이 은희에게 말한 궤변이 생각난다. "진심이 어떻게 진실을 이겨요?" 아마 진실이 갖는 힘이 훨씬 셀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 이기길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진실을 숨겨야 할 때가 수없이 생긴다. 얄궃게도 그래야만 진심이 전해진다. 진실을 숨긴 거짓 위에서라야 진심이 전해지는 것이다. <최악의 하루>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거짓 위에서 춤춘다. 거짓 위에서 진심을 전하고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딱 한 커플만 빼고. 다름 아닌 은희와 료헤이다. 그들은 비록 소설가와 연기자라는 거짓 위에서 진심을 전하는 걸 가장 좋아하고 잘 하는 이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거짓이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절대적으로 진심을 위한 거짓이 존재해야 하는 건가. 


감독의 의도도 훌륭하지만 그에 맞춤복인 듯한 배우들의 열연도 최고였다. 은희, 료헤이, 현오, 운철. 3명의 각기 다른 매력과 찌질함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 그리고 그에 맞춰 마치 다른 인격인 양 변하는 은희. 은희와 현오와 운철이 한데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데, 심장이 쪼그라드는데 발가락도 쪼그라드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거다. 연기 속의 연기가 서로 출동하면서 일어나는, 난감함, 찌질함, 억울함, 코믹함, 시원함 등의 온갖 감정들의 폭발이다. 그 복잡미묘함을 투박한듯 보이게, 즉 아주 섬세하게 연기를 해냈다. 이런 영화라면,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겠다. 파도 파도 또다른 의미를 받으면서, 지루하지 않은 코믹함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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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더 헌트>



영화 <더 헌트> ⓒ노르디스크 필름



덴마크의 한적한 마을, 루카스는 그곳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도시에서 결혼해 일하고 있던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이다.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은 한적한 고향 땅에는 친한 친구들도 있어서 마음을 다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다들 그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마음의 부담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그의 마음 속에 부담으로 남아 있는 건 아들 마커스다. 이혼한 아내가 쉽게 아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 아들이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데도 말이다. 


그런 그에겐 가족 같이 친한 친구 테오가 있다. 테오에겐 딸 클라라가 있는데, 루카스가 유치원에서 보살핀다. 클라라는 걸핏하면 싸우는 테오 부부보다 자상하고 친절한 루카스가 더 좋다. 나이를 떠나 서로 외로운 처지에 있으니 마음이 통했나 보다. 몇 번 같이 유치원에 오가다 보니 클라라에게 어떤 마음이 생겼나 보다. 클라라는 루카스에게 안기고 뽀뽀하고 선물까지 준다. 그런데 루카스는 그 선물을 다른 아이에게 가져다주라고 말한다. 클라라에겐 일생 최초의 고백이었고 최초의 거절이었다. 큰 상처를 받는다. 


말 한 마디 때문에 꼬이는 인생


영화 <더 헌트>의 극 초반 내용이다. 굳이 말하자면 1/10 지점까지 인데, 여기서 영화는 급격하게 선회한다. 큰 상처를 받은 클라라는 유치원 원장에게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한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언젠가 오빠가 지나가다 보여준 남자의 성기를 기억해낸 클라라는 확실하지 않은 투로 원장에게 루카스의 성기를 봤다고 말한다. 그러며 루카스에게 준 선물을 루카스가 준 선물이라 거짓말한다. 


이 한 마디 때문에 루카스의 인생이, 그리고 마을 전체가 꼬이기 시작한다. 하룻밤 사이, 루카스에겐 나디아라는 새로운 연인이 생겼고, 마커스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클라라에게도 큰 상처를 준 것이다. 그 한 마디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원장은 이를 루카스에게 알리고 전문가를 불러 클라라와 대질 시킨다.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고 하면 혼날 것이 불 보듯 뻔하고 원장이 믿지도 않을 것이기에, 어찌 되었든 루카스가 클라라를 성폭행 했다는 건 기정사실화 된 거였다. 작은 마을은 순식간에 루카스와 클라라 사건에 휘말린다. 루카스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는 이렇듯 루카스에게 진실이 있고 클라라에게 거짓이 있다는 걸 천명한 채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그 진실이 어떻게 묻히고 거짓이 어떻게 진실로 둔갑하는 지의 과정, 그리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 이후 피해자의 삶, 이를 타개하려는 피해자의 행동 등이 포인트가 될 것이다. 


진실만큼 약하고 허무맹랑한 게 없다


유치원 원장은 거짓이 진실이 되는 과정에게 제일 가는 공로를 보인, 연결 고리의 핵심이다. 그녀는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본 것을 그대로 말한다' 등의 명제를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클라라가 루카스에게 성적으로 학대를 당했다고 폭로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유치원생들 모두를 대상으로 조사를 해서 루카스가 클라라 뿐만 아니라 많은 아이들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루카스는 하루 아침에 유치원생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인간 쓰레기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 


루카스가 할 일은 해명 밖에 없다. 마을 전체가 그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진실은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는 한 마디에 무너져 버렸다. 진실은 위대하다고 하는데, 진실만큼 약한 게 없다. 누구든 진실을 입에 달고 살아가지만, 진실만큼 허무맹랑한 게 없다. 루카스를 몰아 붙이는 마을 전체가 거짓으로 점철된 진실을 말하지만, 사실 거짓이 아닌가 말이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영화가 한적하고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서로 서로 모르는 게 없이 모두 아주 각별한 사이인 만큼,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곳을 노리는 집중 또한 엄청난 것이다. 곧 '집단 폭력'이다. 진상은 알지 못한 채 들려온 말 한 마디에 마을 모든 사람들은 루카스에게 전에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집단은 진실이고 개인은 거짓이 되는 마녀 사냥


여기서 생각나는 게 '마녀 사냥'이다. 과거 백년 전쟁 때 이단으로 몰리고 남장을 했다는 혐의로 처형된 잔 다르크가 대표적이다. 한번 밑 보여 부정적인 말이 퍼지면 곧 치명적인 독으로 변하고 만다. 마녀사냥의 양상은 참으로 다양한데, 전체주의의 산물이자 집단 히스테리의 산물 그리고 정상이 아닌 것들에 대한 가혹한 처사, 집단의 개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 행위 등이다. 그야말로 개인은 절대로 집단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 집단은 진실이고, 개인은 거짓이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집단의 광기는 루카스 개인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클라라의 아버지이자 루카스의 제일 친한 친구인 테오보다도, 다른 친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니 말이다. 오히려 테오가 말리고 있지 않는가. 집단의 폭력은 테오의 아들 마커스에게도 심지어 반려견에게도 미친다. 과연 진실의 개인은 거짓의 집단에게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진실의 개인일 때도, 거짓의 집단에 속해 있을 때도 많을 것이다. 작게는 가정, 학교, 직장 나아가 인터넷 상, 국가, 세계까지. 이 작은 나라에서는 몇 개의 주요 언론이 거짓된 같은 기사를 쓰면 국민 모두가 믿곤 한다. 그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곧 '빨갱이'의 낙인이 찍힌다. 



영화 <더 헌트>의 한 장면 ⓒ노르디스크 필름



집단은 개인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자신들이 내세우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속죄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면 쫓아내지 않고 같이 살게는 해준다는 것이다. 그럴 때 개인은 대부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고 휩쓸리고 만다. 자신의 생각이 진실에서 거짓된 진실로 바뀌고, 자신의 입에서 거짓을 진실인 양 말하게 된다. 그리고 곧 집단으로 편입된다. 


거짓된 집단에 대항하는 개인의 방법?


세월호, 밀양 송전탑, 쌍용차 해고, 땅콩회항 사건 등에서 개인의 진실은 쉽게 묻히고 만다. 자본 집단, 권력 집단, 국가 집단의 거짓과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게 개인의 진실을 압도해 버린다. 그리고 한번 묻힌 진실은 다시 진실의 권위를 찾기 힘들다. 집단의 진실 아닌 진실을 상쇄할 그 무엇을 찾기란 힘들다. 


그래도 루카스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잘못이 없는 걸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자신이 알고 아들이 알고 가족이 알기에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그의 방법은 집단 대 개인이 아니다. 사건의 당사자와 개인 대 개인으로 진실을 어필한다. 제일 현명한 방법이자 어쩔 수 없는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나마 이런 방법이 통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그런 조직에 몸담고 있는가? 그런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신이 진실과 거짓을 올바르게 판명할, 거짓된 집단에서 과감히 몸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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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읽기] 리영희의 <역정 : 나의 청년 시대>



<역정: 나의 청년시대> 표지 ⓒ (주)창비



조심스럽게 그분을 부르며 시작한다. '리영희'. 2010년 12월 5일, '시대의 스승'이자 '사상의 은사'라 불린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타계했다. 하지만 2주기 즈음인 2012년 12월 4일 김지하 시인이 한 조간신문에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쑥부쟁이라며 폄하했고 아울러 그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리영희는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고 깔아뭉게버렸다. 이 칼럼은 당시 대선이 얼마남지 않은 시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굽이진 현대사를 넘어온 그(리영희)의 역정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일까? 


그의 역정은 그 하루 전 저녁에 열린 리영희 2주기 '해직언론인 복직 콘서트'로 계속 이어졌다. 행사를 주관한 리영희재단은 이명박 정권에서 해직된 언론인 24명을 두고 '이 시대의 리영희들'이라고 명명했다. 또 그의 역정이 계속 이어지게끔 하는 매개체가 즉, 그의 책이 2012년 11월 30일에 그의 2주기에 맞춰 재출간되었었다. 


<역정: 나의 청년시대>(창작과비평사). 그의 사상의 방향이 온전히 갖추어졌을 때 그의 저서의 독자들에 대한 도의적 의무감에서 썼던 그의 관한 이야기로, 1988년 3월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된 바 있다. 이 책의 부제가 '나의 청년시대'인 것은 의도치 않은 것이다. 


1982년 겨울, 나는 원고지 뭉치를 싸가지고 경기도 양평군 한강 가에 있는 유인호 교수 소유의 농장에 틀어박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쓰며 한 겨울을 보냈다. (중략) 1983년 초, 원고의 3분의 2가량이 끝났을 대 나는 또 과거에 있었던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의 통일문제에 관한 강의와 관련하여 유인호 교수의 그 농장에서 곧바로 당국에 연행되어 집필은 거기서 중단되었다. (중략) 이 책의 구성이 나의 소년시절부터 1963년으로 끝난 것이 그 때문이다.(본문 중에서)


1980년, 광주시민의 민주항쟁 사건과 관련하여 '배후조종자'로 찍혀 신군부로부터 다시는 글을 쓸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은거하던 중에 쓰게 된 글이라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글을 접하는 독자들에 있어서도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청년시대 뒷 이야기는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2005년에 나온 리영희와 임헌영의 대담집인 <대화>(한길사)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체 내용의 앞부분은 <역정: 나의 청년시대>와 상당부분 중복되는 이 책은 이영희 선생의 "70년 삶의 줄거리"를 "역사의식이 투철한 비판적 담론"으로 엮은 회고록이다. 리영희 선생의 청년시절 뒷 이야기를 포함해 그의 삶과 사상의 궤적을 볼라치면 <대화>를 접하면 되겠다. 


그의 청년시절은 어떠했을까? 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서 삭주군에서 어린 꿈을 키웠다. 통상 '이영희'가 아닌 '리영희'로 불리우는 이유 중 하나가 생전 저자의 뜻이었고, 그 뜻에는 '평안북도'가 있다. 이후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4살 되던 해에 서울의 경성공립공업학교를 다니게 된다. 격이 높았던 학교를 다닌다는 자부심을 가졌던 소년의 머리와 가슴 속에는, 학교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본인 학생들과 어울려가는 사이에 민족적 각성이 자리잡아갔다. 


해방이 되기 한 달여 전, 경성 상공에서 B29가 투하한 폭탄으로 인해 모두가 뒤숭숭해하고 있었다. 17살의 리영희는 이대로 있다가는 가족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고향으로 가버릴 결심을 굳힌다. '경성유학'은 실패작으로 끝나지만, '해방'은 고향에서 맞게 된다. 비록 실감되지 않았지만.


희망을 품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리영희는 해방된 혼란 사회에서 신학년도가 된다. 때는 1946년. 학교는 '국립한국해양대학'이었다. "학비면제, 숙식·제복 국가부담"이라고 씌어진 공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시골 소년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줄 안다.


1950년까지 4년간 대학에 몸을 담은 소년은 20대에 영어선생으로 새로운 시절을 열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전쟁으로 안동에서의 생활을 접고 피신을 간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20대, 그는 남자. 군대를 모면할 길은 없었다. 그는 국군-통역장교-미국 군사고문의 길을 걷는다. 


그러던 중에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의식에 눈을 띄게 해준다. '거창양민학살사건'. 리영희가 속해 있던 연대의 제3대대가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사이의 밤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719명의 양민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그가 지휘관이나 전투병과 장교가 아닌 통신장교에 불과했기에 직접적인 책임이나 관련이 없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그에게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신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본문 중에서)


7년간의 군대생활을 마치고 그는 권총을 펜으로 바꾸어 합동통신사 외신기자로 본격적으로 세상을 향해 일침을 날린다. 외신기자로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고, 비록 우울했던 미국 체재였지만 '워싱턴 포스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후 군대생활을 통해 알게 된 한국사회의 추악한 권력의 진면목을 목격한 그는 이승만을 증오하는 일념으로 '워싱턴 포스트'에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 기사를 올린다. 이런 그의 신념에 찬 기사들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4.19가 지나고 5.16이 왔다. 그의 말을 빌리면 '군치'의 시대가 온 것이다. 리영희는 군부독재 정권의 '구악' 척결에 어느 정도 찬성의 뜻을 내비친다. 하지만 군인통치하의 정치적 파쇼화 경향을 걱정하면서 판단을 유보한 상태로 기사생활을 계속한다. 그 이후 18년 동안의 군부독재가 이어질 것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러던 1961년 11월 어느 날, 리영희 기자는 박정희를 따라 워싱턴을 방문한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방미여행 수행기자로 임명된 것이다. 박정희와의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 결정타는 그가 쓴 정상회담의 진짜내용을 담은 '특종기사' 덕분이었다.


케네디는 앞으로 군사정권의 태도를 보면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달라는 대로 다 주기로 약속했다"는 식의 다른 수행기자들의 기사와는 전혀 다르다.(분문 중에서)


군인정권이 "잘 기억해두겠다"던 협박은 김빠진 형태로 훗날에 표시되었다. 박 의장이 15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후, 청와대에서는 공식·비공식 수행원을 초대한 자축 겸 위로연이 베풀어졌다. 수행취재 기자들도 초대되었으나 나 한 사람만이 그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본문 중에서)


책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리영희의 험난한 청년 시절도 끝을 맺는다. "20대에 이르도록 사회적 및 역사적 문제의식·지식이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다"(<대화>)고 자조하는 그는 "실존적 선택을 강요당하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대화>) '지식인'이 되어갔다. 상식조차 범죄로 규정되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의 곧은 신조를 바탕으로 한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그 시작이자 맛보기로서 이 책 <역정: 나의 청년시대>을 대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이 다시금 우리 앞에 나타난 이유는 그의 2주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지난 5년간의 민주주의의 퇴행과 2012년 대선의 결과로 알게 된 대한민국 절반의 역사 인식,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박정희 시대 독재의 망령까지 리영희의 삶과 사상이 다시금 조명받아야 할 이유가 아닌가 한다. 


한 쪽에서는 '시대의 스승', 한 쪽에서는 '의식화의 원흉'으로 불리며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삶 자체로 보여준 리영희.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른다. 그의 대표작조차 접하지 못했다. 단지 젊기 때문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너무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를 알아야 한다. 당시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의 주류·비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의 이름 하나에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누구는 입에 게거품을 물지 않는가. 


누구보다 '진실'을 원했고, '진실'의 공유를 바랐고, '진실'의 전도를 실천했던 그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그를 접하고 알아야 하는 건 필수이다. 그리고 이 책 <역정: 나의 청년 시대>을 시작으로 그의 삶과 사상을 천착해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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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제보자>


영화 <제보자> 포스터 ⓒ 메가박스㈜플러스엠


실화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 등의 콘텐츠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보여주기'와 '보여지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실화인 만큼 이미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그 테두리 안에서 어떤 울림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보여주기'이다. '보여지기'는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즉 타이밍의 문제이다. 관객들이(나라가, 국민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보여주기'는 영화 내적인 부분이고, '보여지기'는 영화 외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레 미제라블>, <광해>, <변호인>, <명량>은 실화 또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갖춰야 할 '보여주기'와 '보여지기'가 거의 완벽하게 실행된 사례이다. 실화를 중심 뼈대에 두고 큰 틀을 헤치지 않는 하에서 부분적인 사실들을 극적으로 처리했다. 그 자체로도 감동이 물씬 풍기는 실화를 선택했음에도, 사소한 감동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들을 볼 관객들의 생각과 상황을 잘 읽어냈다. 정치적으로 힘든 시기,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대리만족을 느끼게 할 대상이 필요하거나 어떤 구심점이 필요한 것이다. 만약 지금이 어느 때보다 정치적 갈등이 없고 경제적으로 호황일 때라면, 위의 영화들이 그 만큼의 성적을 낼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 논란'을 바탕으로 한 영화


최근에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한 편 개봉했다. 제목은 <제보자>, 2005년 전국을 충격에 빠뜨린 '황우석 줄기세포 조작 논란'을 바탕으로 했다. 개인적으로 2005년이면 군대에 있을 시절이라, 해당 사건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간이 흘러 굳이 관심을 가지고 들춰보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 진실인지 잘 모르고 지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여기저기에서 지금까지도 가끔 들려오는 말들을 듣고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굉장히 빨리 진행된다. PD추적이라는 NBS 시사 보도 프로그램의 윤민철 PD(박해일 분)은 어떤 제보자의 말을 듣고 있다. 그런데 그 제보자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아 핀잔을 주고 가려 한다. 그때 그 제보자가 사실을 얘기한다. 그 사실은 특종감이다. 난자를 불법으로 판다는 사실을 입수한 것이다. 그리고 그 난자들이 줄기세포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이장환 박사(이경영 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윤민철은 이장환 박사를 타깃으로 잡는다. 그때 걸려오는 제보자의 전화. 다름 아닌 이장환 박사와 관련된 제보였다. 그것도 이장환 박사의 줄기세포 연구가 모두 조작된 것이라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믿기 힘든 제보! 그 제보자는 이장환 박사 연구팀에서 나온 심민호 전 팀장(유연석 분)이었다. 단, 물증 증거가 없었다. 그의 말만 믿고 취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 메가박스㈜플러스엠



쉴 새 없이 빠르게 진행되다 보니,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불법적인 현장을 잡았고, 때마침 제보가 들어왔고, 방송국과 제보자의 필수적인 고민 끝에 프로그램이 잘 방영되어 전파를 탔고, 이슈가 되어 이장환 박사의 조작이 기정사실화 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찜찜한 기분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일이 틀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 영화에서 의미를 부여해야 할 부분은?


과연 일은 틀어지고 만다. 윤민철이 섭외한 또 다른 이장환 박사 연구팀의 전 연구원이 인터뷰 사실을 번복해, 방송국 측의 협박에 의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고 거짓된 기자회견을 연다. 동시에 제보자 심민호의 물증 증거가 없다는 부분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윤민철이 심민호를 몰아세우며 어서 증거를 내놓으라고 말한다.


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윤민철은 어떤 수를 둘 것인지? 이장환 박사의 협박과 회유는 계속 될 것이고, 이장환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시위 또한 계속 될 것이다. 또한 방송국 고위층의 압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윤민철은, 그리고 그와 함께 배를 탄 팀장과 국장은 분명히 버티고 버텨서 증거를 찾아내 이장환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논란의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자, 영화 줄거리는 실화와 조금씩 다를 지라도 결과는 실화와 같을 것이다. 줄기세포 연구의 조작이 맞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의미를 부여해야 할 부분은 어딘가?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 해가 뜰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 조작 논란의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윤민철과 심민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내부고발자라고도 할 수 있는 심민호는,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가 훗날 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보다 내부 사정을 잘 알고 헌신적이었던 이가 그곳의 허위를 고발하는 것.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내부고발자 심민호는 완전한 중심 캐릭터가 되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심민호가 이장환 박사 연구팀에 완전한 헌신을 보여주었다는 부분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이장환 박사의 연구에 끌려 합류했는데, 조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참을 수 없어서 나왔으며, 사기를 치고 있는 모습을 참지 못해 제보를 했다는 것이다. 



영화 <제보자>의 한 장면. ⓒ 메가박스㈜플러스엠



바통은 윤민철에게로 넘어간다. 무조건 버티고 버틴 다음, 확실한 물증 증거를 찾아내 방송으로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심도 있게 그리고 조금은 감동적이기까지 그려진다. 온갖 협박과 압력과 회유를 견뎌내고 언론의 의무를 다하는 모습. 그 덕분인지 영화는 개봉 중에서 영화 내적이 아닌 외적으로 많은 이슈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제보자>라는 제목에 의문이 간다. 처음에는 제보자에 초점을 맞췄다가 끝날 때 즘에는 아나운서에게 초점이 가는 것이다. 제보를 하는 사람이나 알리는 사람이나 모두 중요하다. 둘 다 자신의 안위보다 진실을 알리려는 데 힘쓴다. 


마지막으로 영화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 영화를 보면 '국익이 우선이냐, 진실이 우선이냐' 라는 물음이 자주 나오는데, 이 둘을 대척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인가? 사실 진실이 곧 국익이 아닌가? 결국은 진실을 알게 해주는 게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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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로몽드 20세기사>


<르몽드 20세기사> ⓒ휴머니스트

우리는 21세기의 1/6.5 시기를 보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 훗날 21세기를 규정할 때 이 시기는 어떻게 불릴까 자못 궁금하다. 2001년에 역사적인 9·11 테러가 있었으니, 미국에서는 테러의 시대 비슷하게 규정할지도 모른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비약적인 기술의 발달로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생활 패턴을 바꿨으니 스마트폰의 시대라 명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의 것은 사실 이 시대를 포괄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경제 위기의 시기는 어떨까? 그나마 가장 이 시기를 포괄할 수 있는 설명인 듯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반의 시기는, 20세기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위에서 말한 테러, 과학 기술의 발달, 경제 위기까지 모두 지난 20세기에 이미 거쳤던 바 있다. 


20세기를 통틀어 전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전쟁(테러를 포함한)이 있었고, 과학 기술 전반에서 너무나 급격한 변화가 있었으며,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경제 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런 것들이 21세기 초반에 다시금 일어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21세기 초반을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명제가 떠오르는데, '변화'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볼 수 있다. 점점 더 빨라지는 변화의 속도 말이다. 


20세기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태어난 책


<르몽드 20세기사>는 우연하게도 필자의 생각을 공유하며 그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즉, 21세기의 한복판인 지금 우리는 20세기와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많은 것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20세기를 살고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20세기의 연장선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태어났다. 


이 책은 20세기를 4개의 시기로 나눈다. 광기의 시대(1910년대~1929년), 암흑의 시대(1930년~1945년), 적색의 시대(1945년~1970년대), 회색의 시대(1980, 90년대). 알기 쉽게 굳이 년도를 구분해 놓았지만 정확하지도 않고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 시기들은 서로 칼 같이 구분되지 않고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알면 까무러칠 사건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라는 언론관으로 유명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획 하에 만들어진 만큼 4개의 시대에 속한 알려지지 않은 사건들을 한 개씩만 간략히 소개해본다. 먼저 광기의 시대에서는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이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두 차례의 학살이 있었고, 20만 명과 100만 명이었다. 그 중 20세기 초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주범국에 속해 있었다. 오스만제국은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그 패배의 책임을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돌린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 주민을 시리아 사막으로 이주 시켜 약 100만 명 가량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사에 기록된 첫 대량 학살이다. 터키 정부는 이 범죄를 부정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공개적인 토론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대량 학살은 없었다. 다만 폭력 행위로 인해 30만 명이 희생되었다. 설혹 대량 학살이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바로 터키를 배반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다." (본문 중에서)


암흑의 시대에는 단연 제2차 세계대전이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생각지도 못한 후원자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파시스트 정권은 반자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금에 와서 보면, 당시 승전국들인 미국, 프랑스, 영국 등이 모두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돈의 힘(지주, 기업가, 은행가 등)을 빌려 힘을 키워나갔고 이후 이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후하게 보상 받았다고 한다. 


적색의 시대에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있을까? 역시 냉전 체제와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1946년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영어권 세계의 공동유산인 자유와 인권의 위대한 원칙'을 내세워 소련의 '독재'를 규탄했다. 이어 1947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은 '미국이 전 세계 민주주의와 자유 수호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의 대외 정책 노선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모순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와 '독재'는 엄연히 정반대의 성질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보호 아래 구축된 자유 세계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독재 정권에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 면면을 열거하자면 포르투갈, 도미니카공화국, 니카라과, 쿠바,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에콰도르, 온두라스,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스,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이 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민주주의 세력을 옹호했다. 


앞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전쟁, '기억과의 전쟁'


마지막으로 회색의 시대는? 사실 이 시대의 많은 부분들이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알릴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자, 질문 하나 해본다. 나치즘이 더 나쁜가? 스탈린주의가 더 나쁜가? 딱히 누가 '더' 나쁘다고 말할 수 없겠는가? 그러면 그냥 둘 다 똑같다고 해두자.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가 똑같다는 생각. 


미국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즘에 대항한 '같은 편'이었다. 하지만 승전 후 곧바로 백색과 적색으로 갈라진다. 이후 이들이 한 짓은 정말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백색이 승리했고, 적색은 과거의 나치즘과 다를 바 없는 족속이 된다. 와중에 전쟁 당시 소련의 적군에 맞서 싸우거나 학살 당한(또는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당시 나치스 독일과 손을 잡았던 이들이다. 이들은 '애국'이라는 명제 아래서 나치스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회색의 시대에서 물타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련이 단순히 미국에게 졌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소련의 수많은 잘못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걸 이용해 '기억'을 전복 시키고, '역사'를 수정하려는 행위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초중고 시절에 자주 보곤 했던 '사회과부도'를 생각나게 하는 이 책은, 단순히 한눈에 살펴보기 쉽게 그려 놓은 그림, 지도, 그래프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전혀 아니다. 글을 먼저 읽어보면 그런 그림 따위는 솔직히 전혀 눈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 글이 너무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 충격의 이유는 일종의 두려움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전부가 아니구나', '내가 알고 있는 역사가 수정되어 있을 수 있구나', '시간이 흐르면 나라는 사람의 역사도 손쉽게 바뀔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들. 그래도 알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천지 차이가 아닌가.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꼭 봐야 한다. 꼭 보고 20세기 역사의 민낯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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