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고지전>


<의형제>의 장훈 감독과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상연 작가가 의기투합했다. 그들의 전 작과 이어지는 감정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다. ⓒ쇼박스




1953년 2월, 6·25전쟁은 여전히 휴전 협정 중에 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뺏고 뺏기는 고지 때문에 제대로 선을 긋고 휴전을 할 수가 없다.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 분)는 해서는 안 될 불순할 말을 내뱉어 영창에 갈 위기에 처하지만, 상사의 선처로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사건 하나를 조사하게 된다. 최전방 애록고지의 악어 중대에서 죽은 중대장 시신에 아군 총알이 발견된 것. 


애록고지에서 은표는 죽은 줄만 알았던 친구 김수혁(고수 분)을 만난다. 이등병이었던 그는 2년 만에 중위가 되어 있었다. 한편 이제 갓 약관의 나이가 된 듯한 청년 신일영(이제훈 분)이 임시중대장으로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걸 보고 기시감을 느낀다. 그는 모르핀 중독 상태였다. 이후 은표는 악어 중대의 비밀을 하나 둘씩 알아간다. 


겁쟁이 수혁이가 어떻게 이리도 매섭고 대범하게 변했는가, 약관의 청년은 어떻게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고 또 왜 모르핀 중독 상태가 되었는가, 죽은 중대장 시신에서 아군 총알이 발견된 사유는 무엇인가, 전쟁통에 술은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이들이 쉬쉬 하는 그 예전 '포항 철수 작전' 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쟁이 주는 참혹함,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참혹함


이 영화가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기 위해선 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참혹함이 아닌, 진짜 참혹함을. 그들은 '왜' 서로 죽이고 죽였어야 했나? ⓒ쇼박스



영화 <고지전>은 <태극기 휘날리며>와 <웰컴 투 동막골> 이후 오랫동안 맥이 끊겼던 6·25 전쟁 배경의 전쟁영화이다. 이 영화는 내적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외적으로 많은 논란이 일며 흥행에 실패했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6·25 전쟁영화는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전과 이후에  <포화 속으로>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이 영화들이 맥을 잇는 건 어불성설이다. 공교롭게도 감독이 같다. 비극이다. 


지금에 와서 60년도 더 된 전쟁 이야기를 꺼내 무엇하랴 싶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전쟁을 그저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 한다. 대표적으로 양대 산맥이 있을 텐데, '애국'과 '반전'이 그것이다.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그린 것, 전쟁을 반대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을 그린 것. 


<고지전>은 '반전'에 속한다 하겠다. 그렇지만 그런 영화는 액션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감동도 약한 반면 참혹함이 상대적으로 강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으며 전쟁의 당사자들에게 일면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아, 논란이 일기 쉽고 외면 받기 쉽다. 어찌하여 모든 걸 파괴하는 '전쟁'에 액션과 감동이 주가 될 수 있을까마는, 그게 그렇지 않은가 보구나 싶다. 


이 영화는 전쟁이 주는 눈에 보이는 참혹함보다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참혹함을 전하려 한다. 6·25전쟁의 특수성이 기인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 전쟁은 1951년에 끝났다. 하지만 이후 2년 6개월 동안 휴전 협정이 계속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되풀이 되는 '고지전쟁'으로 50만 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도 모른 채 동포를 죽이고 자신 또한 죽어갔다. 


'이' 전쟁은 생존의 숙제일 뿐, 애국이 낄 자리는 없다


'이' 전쟁, 6.25는 특수성을 진하게 띠는 전쟁이다. '동포'끼리 '애국'을 걸고 싸우는 모양새. 하지만 이 영화는 '생존'일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내가 죽기 싫어 상대방을 죽이는... ⓒ쇼박스



영화는 사건을 통해서, 캐릭터를 통해서, 대사를 통해서 시종일관 반전 메시지를 드러낸다. 정확히는 '6·25 반전'. 북한군 저격수 '2초'를 잡기 위해 10명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길을 나선 수혁, 17살 막내가 2초에게 당한다. 아무도 그를 구하러 가지 않고 오직 2초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다. 은표의 분노에 수혁이 날리는 한마디, '네가 전쟁을 알아? 네가 지옥을 알아? 난 아주 잘 알아. 매일 같이 수많은 남상식이 죽어간다고.'


엄청난 수의 중공군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 새로 부임한 대위 유재하 중대장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항전할 것을 명한다. 이에 유재하를 쏴죽이고 중대장이 된 수혁은 즉각 퇴각 명령을 내린다. 이 상황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은표에게 수혁이 날리는 한마디, '나를 죽이면 네가 중대장이 된다. 그러면 부대를 지휘하게 될 텐데, 네가 우리 부대원들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자신 있으면 어서 쏴. 시간이 없어.'


허무하고 어처구니 없는 죽음, 그 죽음을 방조하고 실행하는 이들, 그런 그들도 누군가에게 죽고, 그들을 죽인 이들 또한 누군가에게 죽는다. 전쟁에서 죽음은 일상일 테지만 인간이라면 절대 죽음을 일상처럼 받아들일 수 없을 터,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죽음을 방조하고 죽음을 당연시하고 죽음을 자초한다. 그렇다고 죽음이 친근하지도 죽음을 환영하지도 죽음과 대면하지도 못한다. 죽음의 지옥에서 허우적댈 뿐이다.


문제는 이 전쟁의 근원에 있다. 사실상 끝난 이 전쟁을 '왜' 지속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전쟁터에 있는 이상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은 치우고서라도, 다름 아닌 '이 전쟁'에 대한 의문은 풀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최소한으로 내가 죽기 싫고 내 부대원들을 죽게 만들기 싫어 상대방을 죽인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에게 이 전쟁은 생존의 숙제일 뿐이다. 거기에 애국은 낄 자리가 없다. 


더 이상의 전쟁영화는 안 된다, 하지만 <고지전>은 되새겨야 한다


수많은 전쟁영화를 봐왔다. 이제 더 이상 전쟁영화는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누누이 외친다. 하지만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바, 그렇다면 차라리 <고지전> 같은 영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쇼박스



전쟁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영화는 그 자체로 '전쟁'에 대한 미화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라는 틀로 전쟁을 대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 전쟁은 우리와는 먼 얘기, 아무리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내장이 튀어나와도 그게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내가 그곳에 있다면 상대방이 그렇게 될 거라는 무의식, 애초에 나는 그곳에 없기에 그곳을 향해 갖게 되는 동경,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이 갖는 초유의 액션. 


반전을 지향하는 전쟁영화라고 해도 이 정도인데,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전쟁영화는 어떻겠는가. 전쟁 승리를 상정해놓고는, 어떻게 상대방을 몰살시켜 버릴까 고심하는 전쟁영웅, 거기에 여지 없이 중심축을 이루는 극단의 이데올로기. 우리는 여기서 이데올로기에 따른 애국심이 고취됨과 상관 없이, 전쟁 자체에 대한 동경을 전에 없이 끌어올리게 된다. 이 얼마나 멋진가, 이 얼마나 필수불가결한 전쟁인가. 


지난 이야기지만, <고지전>의 흥행 실패가 주는 씁쓸함과 <인천상륙작전>의 흥행 성공이 주는 참혹함은 앞날을 걱정케 한다. 영화의 만듦새와 극단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기는 요소들의 향연을 뒤로 한채, 전쟁을 미화하는 본새가 그렇다. 앞으로 전쟁영화는 반드시 또 나올 텐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고지전>이 아닌 <인천상륙작전>류일 가능성이 크다. 정녕 또 한 번 전쟁을 치르고 싶은 것인가?


영화에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나아가 전쟁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고지전>을 되새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린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거기에 지옥이 있을지라도, 아니 아마 지옥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할 텐데 그럼에도 우린 바로 그곳을 주시해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지옥과도 같은 '고지전쟁'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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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20세기 가장 극적인 사건 '히틀러 암살 계획'. <작전명 발키리>는 이 사건을 다루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역사에 '만약'은 있을 수 없다. 설령 미래의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와 역사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가 속한 차원에서의 일일 것이다. 모든 차원을 관통하는 역사의 수정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역사를 보면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다. 21세기는 채 20년도 되지 않았으니, 20세기를 한번 보자. 


수많은 위인들이 20세기를 수놓았지만, 그중 단연 으뜸의 위치에 있는 이는 '히틀러'다. 그가 무슨 짓을 했든 그 영향력과 파급 면에서 따라올 자가 없다. 그는 살아생전 15번의 암살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독일민족을 구할 진정한 지도자'로 생각하는 만큼, '독일민족을 구하기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그중 단연 유명한 암살 미수 사건은 나치 패망 1년 여 전인 1944년 7월 20일 사건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 보고 싶은 이야기로 변모했을까?


반전 영화의 기원격인 <유주얼 서스펙트>와 현대 슈퍼 히어로 영화의 시초격인 <엑스맨>을 연출한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는 다름 아닌 이 사건을 그린다. 사건 이름만 봐도 결과를 알 수 있는 이 사건을, 반전 영화의 대부가 왜 살려낸 것일까. 영화 외적으로 나치 독일의 만행을 간접적으로 알리고 싶었을까, 영화 내적으로 사건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극적인 요소가 훌륭하다고 판단해서 였을까. 둘 다일까. 


영화는 실제 인물의 행적으로 고스란히 추적한다. 먼저 반나치주의자들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맛보기로 보여준다. 긴박감 넘치는 액션은 없고 인물들 간의 숨막히는 고요와 어설픈 심리 게임이 주를 이룬다. 과연 본 사건으로 넘어가서는 긴박감이 추가될지? 이대로 숨막히는 고요와 어설픈 심리 게임만 계속된다면 조금은 실망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누구나 알고 있을 만한 사건인 '작전명 발키리'를 왜 영화로 살려냈을까? 과연 보고 싶은 이야기로 훌륭하게 살려냈을까?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슈타펜베르크 대령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 중이다. 그런데 나치스 SS 친위대들의 만행을 전해 듣고 치를 떨며 '반나치'의 길을 걷고자 다짐한다. 얼마 뒤, 영국군의 기습 공격으로 부상을 당해 왼쪽 눈과 오른손 전체,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고 본국으로 귀환한다. 요양 후 히틀러 제거 계획 모임에 가담하며 베를린 국방군 본부에 예비군 참모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어떤 고뇌도 없이 오직 히틀러 제거를 위해 내달린다. 


영화는 충분히 보여줄 만한 요소인 슈타펜베르크의 고뇌를 과감히 삭제한다. 또한 히틀러와 나치가 무슨 짓을 했는지, 히틀러 제거를 위한 반나치 세력이 누군지, 슈타펜베르크가 어떤 사람인지 일절 알려주지 않는다. 오로지 독일의 현 상태와 그에 따른 히틀러 제거 계획만이 영화의 대상이다.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오래된 이야기이기에 굉장히 지루할 것만 같은 소재는, 굉장히 서스펜스 넘치고 보고 싶은 이야기로 변모한다. 감독의 역량일 것이다. 동시에 그에 부흥할지 기대를 갖고 임하게 된다. 박진감이나 숨막힘 등의 서스펜스에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일단 그쪽으로 집중하게 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 


결정적 순간에 꺼져버린 서스펜스


다양한 논의 끝에 나온 '발키리 작전'. 이는 연합군의 폭격이나 예기치 못한 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을 시 각 지역 국방군 본부에 있는 예비군을 출동시켜 사태를 수습하게 하는 계획이었다. 반나치 세력의 좋은 수단이 된 이 작전을 히틀러가 직접 승인하고,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한 후 이 작전을 발동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 목적은 전군을 장악하고 연합군에 휴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단연 히틀러 암살인데, 슈타우펜베르크가 히틀러에게 직접 브리핑할 수 있는 요직에 임명되었기에 직접 처리하기로 마음 먹고 실행에 옮긴다. 그의 불구된 몸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덜 경계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는 전시 최고회의를 기회로 서류 가방으로 위장한 시한 폭탄을 들고 회의장으로 향한다. 거사는 1944년 7월 20일에 감행된다. 성공적인 폭발을 두 눈으로 확인한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에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지시한다. 속전속결, 베를린은 예비군을 효율적으로 이용한 반나치 세력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브라이언 싱어가 이 사건을 영화로 살려내며 '영화적 재미'에 충실했을 텐데, 가장 극적인 사건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오랫동안 준비해 실행에 옮기는 히틀러 암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문제는 영화의 사실상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거니와 최고의 하이라이트인 그 장면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나버린다는 점이다. 약간의 박진감과 숨막힘이 있었을 뿐, 기대를 상회하는 서스펜스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그의 소식을 기다리는 베를린의 반나치 세력의 초조함이 더 와닿았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를 떠받치는 서스펜스는 아니었을 거다. 그 장면에서 보여줬어야 했다. 


'왜'가 삭제되고 '어떻게'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막상 '어떻게'의 실행이 아쉬운 상황이라니, 난감하다 아니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했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라고 할까. 가타부타 설명 없이 내달리는 어조를 그 장면에서 만큼은 좀 지양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전체적으론 더할 나위 없었는데. 


'왜'를 과감히 생략했지만, '어떻게'가 충족되지 못했다


익히 알려진 만큼 스포일러도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 암살을 확신한 슈타우펜베르크는 반나치 세력과 속전속결로 쿠데타를 감행한다. 하지만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전세는 역전된다. 히틀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아닌가! 결국 김옥균의 삼일천하만도 못한 반나절천하로 막을 내리고, 관련자들은 자살을 강요당하고 처형 당한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슈타우펜베르크를, 반나치 세력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겠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반나치 운동의 대표 인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기념비, 거리, 추모관 등으로 그들을 기리고, 영화나 다큐멘터리도 제작되었다. 하지만 독일인이 아닌 입장에서 보면 선뜻 경의를 표시하기가 힘들다. 애매하다. 


'왜' 나치는 나치이고 반나치는 반나치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어떻게'에 심혈을 기울이며 영화적 재미를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를 본 이유가 그들의 위대한 작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흥미롭고 극적인 작전'을 재밌게 감상하며 아울러 20세기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새기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얻고자 하는 걸 얻지 못하니, 엄한 다른 곳으로 시선이 쏠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어떻게'가 충족되지 못하니 '왜'라도 알아야겠다는 언잖은 기분이랄까. 그 '왜'조차 별로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에 충분히 위대함이 있다. 대의를 위해 자신 한 몸을 던진 게 아닌가. 그런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을 친다. 


물론 아닌 것도 있다. 얼마 전 개봉한 감독판으로 다시 찾아온 <인천상륙작전>을 보자. <작전명 발키리>와 상당히 유사한 모양새다. 하지만 영화 만듦새만 가지고도 한나절을 떠들 수 있을 만큼 형편 없다. 같은 '애국 영화'이자 '첩보 영화'인데, <인천상륙작전>은 <작전명 발키리> 정도의 스릴과 서스펜스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오로지 밑도 끝도 없는 애국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애국을 외쳐대지 않고 영화 내적으로 승부를 봤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애국이 충분히 드러난다. 왜 독일의 역사는 그렇게 그려질 수 있고, 우리 역사는 그려질 수 없는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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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길찾기


우리나라 만화계의 경우, 여타 문화 전반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귀엽고 미성숙한 모습의 그림체, 혼을 쏙 빼놓는 액션 위주의 스토리 등. 그래서인지 몰라도 만화를 생각하면,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림체는 예뻐야 하며 어린 친구들만 봐야 하는 것이라고 규정을 내버리곤 했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국(및 유럽) 만화계는 일찍이 그 방향을 크게 틀었다. 이른바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는 장르가 출현했고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학과도 견줄 수 있는 스토리와 철학이 아닌 만화는 거의 퇴출되다시피 하였다. 그들에게 만화는 더이상 우리나라처럼 미풍양속을 해치고 어린 친구들에게나 읽히는 B급 내지 하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그림체에 액션 위주의 스토리를 추구해도, 그 안에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굳이 철학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생각할 거리'가 있다. 이는 어린 친구들을 위한 교육용 만화와는 전혀 다르다.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를 시각적으로 더 잘 전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학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든 상상력을 그림에 쏟아 붓다


그런 면에서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라는 부제가 달린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이미지프레임)는 일반적인 만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분히 교육적이고 정보전달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제나 소재가 결코 쉽게 다뤄질 수 없다는 면에서, 작가의(나아가 출판사의) 문제의식이 깊숙이 아로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만화를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작가는 스토리에서의 상상력은 완전히 배제한 채, 그 모든 상상력을 그림에 쏟아 붓는다. 한국현대사에서, 겉으로는 가장 화려했지만 안으로는 가장 더럽고 추악하고 저질의 시대였던 1970년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대의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인지, 작가의 그림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너무나 불편해서 피해버리고 싶지만, 반드시 인지해야 할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화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챕터마다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도 지워서도 안 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그려진다.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스토리라인에서 상상력을 배제한다. 그 대신 수많은 현대사 관련 책들을 인용해서 사건들의 디테일을 채웠고, 더불어 작가가 직접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인터뷰까지 하였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의 한 장면. ⓒ길찾기


요즘 한창 네이트 웹툰에서 연재 중인 윤태호 작가의 <인천상륙작전>도 상당히 많은 책들을 참조하고 인용하고 있는데, 그 차이는 명확하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가 몰랐던 혹은 눈 감고 지나치려 했던 정보의 정확한 전달과 문제 의식 고취를 최우위에 두고 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이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눈에 띈다. 굳이 나누자면, 팩트와 팩션이라고 할까.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


이 만화는 분명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작가도 말했듯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용히 울부짖고 있는 피해자들을 그냥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만화를 본다고 해서, 그렇게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당장 뭔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과 행동 앞에 '앎'이 오는 것 아니겠는가. 먼저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면 누군가들은 말한다. 직접 그 시절에 살아보지도 않고 직접 그 상황에 맞딱뜨려 보지도 않고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투철한 정신과 박학한 이론으로 무장해도, 조용히 있어야만 하는 걸 알고 있느냔 말이다. 그건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미래로 전달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그것이 조작되고 삭제된 현실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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