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포스터의 홍보문구가 이토록 와닿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영화'이자 '한 여인의 위대한 여정'을 그렸다. ⓒ티캐스트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는 참혹함을 아는가? 그때만큼은 다른 어떤 영화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이제 영화를 졸업해야 하는 건가?' 같은 황당무계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테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이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당혹감인데, 다름 아닌 감독의 면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드니 빌뇌브는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는다. 전 세계적인 호평 일색. 이어 내놓은 작품들도 마찬가지. 2010년에 내놓은 <그을린 사랑>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소개된다. 하나 같이 명감독의 걸작들이다.


2010년대에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는 전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슬슬 흥행에도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올해 말에는 고전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35년 만에 내놓아 정점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을린 사랑>이 준 충격과 전율은 무엇도 따라하지 못할 그 영화만의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


일개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들, 역사와 전쟁과 운명.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한 여인 나왈 마르완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맞선다. 아니, 품는다. ⓒ티캐스트



영화의 시작은 황당하고, 이어지는 전개는 조금 지루하다. 진도가 팍팍 빠지진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기막힌 연출력과 꽉 짜인 각본에 있는 것 같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 공증인에게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듣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그 존재도 모르는 형제를 찾아 자신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 그전까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이자 약속이었다. 쌍둥이는 어머니의 뿌리와 흔적을 찾아 중동으로 향한다. 


한편 나왈 마르완의 충격적 옛일을 들여다본다. 중동에서 기독교와 회교도의 전쟁이 한창인 1970년대, 기독교 집안의 딸 나왈, 회교도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나왈 집안의 오빠들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그 사랑의 댓가로 그를 죽이고 그녀 또한 죽이려 한다. 할머니의 중재로 살아난 나왈,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다. 그 또한 용서받지 못할 대죄, 결국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녀는 아기를 반드시 찾을 것을 다짐하고 약속한다. 


도시에 있는 친척네로 보내진 나왈, 그곳에서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회교도 난민들의 입장에 서서 활동한다. 이내 탈출해 목숨을 걸고 아기를 찾아나서는데, 끝내 찾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회교도인 척 하고 차를 얻어탄다. 하지만 기독교도 민병대에 습격당해 몰살 당하고, 나왈은 다시 기독교도로 돌아와 홀로 살아남는다. 여기서 나왈은 결심한 듯하다. 기독교를 용서치 않겠노라고. 


계속되는 비극의 고리는 그녀를 놔주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참혹한 비극이 그녀를 찾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더 원형적이고 원초적이며 지옥불 같은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파괴적인 역사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주는 아픔보다 그녀를 더욱 옥죄는 건 인간의 힘으론 털 끝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다. 그럼에도 우린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사랑과 약속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고리 끊기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 분명한 비극을 마주하고, 사랑과 약속이라는 더없이 순결무구하고 위대한 것들과 맹세한 바를 지키고자 한다. ⓒ티캐스트



영화는 대번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 때문에 버려지는 오이디푸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이웃 나라의 왕자로 성장해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오이디푸스의 현현이라 하겠다. 


고로 이 영화를 역대급 반전이 주는 쾌감과 감동과 전율로 포장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건,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건 과정에서 보여주는 한 여인의 위대함 때문이리라. 오이디푸스가 아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결과의 반전이 아닌, 과정의 서사에 천착해야 한다. 


그녀에게서 '비극의 고리 끊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형용할 수 없이 넓고 깊은 품과 지극한 자기 희생이 바탕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이 결단은, 영화 <똥파리>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차원을 달리하는바, 인간의 존재가치와 존엄성 파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 모든 건 태초의 '사랑'과 사랑에의 '약속'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널 찾아내 내 사랑을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중심에 이 두 요소를 자리잡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일찍이 이런 사랑은 목격한 적이 없다. 이리도 숭악한 것들 사이에 피어난 이리도 숭고한 사랑의 꽃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랑의 주체도 객체도 당사자도 되기 싫다. 너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아프다. 


포용, 조화, 그리고 함께 하기


무조건적인 끌어안음, 그리고 역시 무조건적인 함께 하기. 이는 영웅이라면 할 수 없고, 무명의 개인에게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티캐스트



영화는 다름 아닌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한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혹자가 보기에는 가장 쓸데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가 그것인데, 종교라고 하는 숭고한 존재가 내뿜는 잔혹한 파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허무하게 존재를 말살당한다. 나왈은 사랑과 약속에의 '약속'으로 종교마저 헤쳐나간다. 자신이 자신일 수 있게 하는 집안과 가문과 종족과 나라의 기반인 종교를 저멀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나마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입에도 올리기 싫은 비겁자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를 떠는 가해자가 되며,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혹한 짓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된다. 그렇게 될 걸 모를리 없지만, 이 역사와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일개 개인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얻는 생존.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날을 손꼽게 될 사랑. 


그녀가 궁극적인 얻고자 했던 건 무얼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얼까. 나왈이 끝의 끝까지 손에 쥔 채 놓지 않았던 생존과 사랑과 약속으로 얻고자 했던 게 도대체 무엇일까. 포용, 조화, 함께 하기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가 받아들였는데 어느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 쏘냐. 그녀가 어울리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엇나가려 하겠는가. 그녀가 함께 하길 바라는데 어느 누가 등을 돌리겠는가 말이다. 


결국 영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대립과 전쟁을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하고 기가 막히고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인생사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자신 자체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낸 것을 빗대어, 종교 대립과 전쟁도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개 연약한 인간이 이토록 위대할 수 있구나를 말하며, 그런 인간도 행할 수 있는 포용과 조화와 함께 하기를 한 집단, 한 종족, 한 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영화 중 하나다. 영화 따위가 이런 깨달음을 주고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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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줄리에타>


<줄리에타> 포스터의 두 여인은 사실 한 명이다. 젊을 때의 줄리에타와 중년의 줄리에타. 젊은 줄리에타를 분한 아드리아나 우가르테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새로운 뮤즈로 손색이 없다.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줄리에타는 로렌조와 함께 마드리드의 삶을 청산하고 포르투갈로 떠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수심이 가득한 바 어떤 사연이 있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가던 중 우연히 마주친 베아, 베아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딸 안티아의 소식을 듣는다. 12년 만에 듣게 된 딸의 소식에 줄리에타는 포르투갈로의 이주를 취소하고 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구구절절 풀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딸을 향한 사죄의 시작인 양. 


스페인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 <줄리에타>는 줄리에타가 딸에게 쓰는 편지와 편지를 쓰는 현재가 교차되는 형식을 취한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줄리에타가 있고 감독은 줄리에타의 삶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여성' '사죄' '욕망' 등과 과거와 현재, 문학과 신화가 뒤엉켜 상당히 복잡다단한 이 영화는, 상징으로 표출되는 메시지와는 다르게 이야기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중심으로 주요 줄기들을 살펴보면 될 것이다. '이런 삶도 있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삶에서 이런 층위를 발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들지 않을까, 싶다. 필자가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하는 중년 여성도, 회상 속 20~40대 여성도, 그렇다고 줄리에타의 딸 안티아처럼 '여성'이 아니지만, 그녀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은 이 중에 하나인 바 최선을 다해 들여다보고 싶다. 


줄리에타를 따라다니는 삶과 죽음의 운명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선명한 대비는 삶과 죽음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평생 줄리에타를 따라다닐 운명 말이다. 그녀는 그 속발을 풀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때는 1980년대, 대학에서 고전문학 강사로 있는 젊은 줄리에타, 난해한 패션의 소유자이지만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 그녀, 야간기차를 타고 여행 중이다. 그녀 앞에 난데 없이 나타난 나이든 남자가 말을 건다. 너무 싫었던 줄리에타는 그의 말을 무시하다시피 한 후 레스토랑 칸으로 자리를 피한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만나게 된 소안,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아픈 아내를 몇 년 동안 간호해 왔다는 소안. 거기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줄리에타. 


얼마 후 일어나게 된 끔찍한 사고, 줄리에타가 무시한 나이든 남자가 자살을 한 것. 줄리에타는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곧 소안과의 육체적 관계로 해소한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후 받게 된 소안의 편지로 그를 찾아가고 그들은 곧 함께 한다. 기차에서의 관계로 얻게 된 아이 안티아도 함께. 기차에서 겪은 죽음은,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혀진다.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비극은 그녀를 빗겨가지 않는다.


영화 초반, 원색의 색채 그리고 색채들의 대비로 죽음과 삶의 강렬한 대비를 전한다. 그 둘이 줄리에타의 삶을 따라다니며 곧 그녀의 삶을 규정하는 바, 기차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다. 기차는 일상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한정된 곳에서 타에 의해 정해진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바, 운명적 요소가 굉장히 진하다. 줄리에타도 그 운명적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운명의 열차는 그녀를 계속 따라 다닌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며 유추해 따라 올라가다 보면 태초에 시작된 운명의 문이 거기 있다. 문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건 알겠는데,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줄리에타는 운명이 선사한 지독히 속박에 갇혀 헤어나기 힘들어 하고 있다. 로렌조가 보낸 구원의 손길도 어쩌지 못한다. 스스로만 풀 수 있을 뿐.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모녀 관계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모녀 관계다. 일반적이지 않은, 일반적일 수 없는 애증의 관계.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비극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줄리에타에겐 누워 지낸 지 오래된 엄마가 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살핀 아빠도 있다. 그리고 엄마 대신 집안 일을 하게 된 여자도 있다. 줄리에타는 아이와 함께 부모님 댁을 방문하는데 아빠와 여자의 야릇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모습도 목격한다. 역겨움을 느끼는 줄리에타, 하필 그때 즈음에 소안이 예전 아내가 아팠을 적에 그의 절친 아바와 적절치 못한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싸늘하게 소안을 물리는 줄리에타, 소안은 어부로서 할 일을 하러 나가지만 곧 폭풍우가 몰아친다. 소안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줄리에타는 옛날 기차에서의 죽음이 겹쳐 죄책감이 되살아난다. 어느새 큰 안티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울증으로 어린 안티아에게 삶을 위탁하다시피 하는 신세를 진다. 참으로 오랫동안 신세를 지고는 정신을 차린 줄리에타. 어린 안티아는 이제 다 커서 18살, 부모 곁을 떠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줄리에타에게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오는데...


새로운 생명과 삶으로 잊힌 죽음의 그림자가 다시 한 번 그녀를 덥친 건, 그녀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잃음'의 트라우마, 그 트라우마는 간신히 회복한 그녀를 또다시 후려친다. 이번엔 딸의 독립으로. 그녀는 도무지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현재는커녕 과거에 머무르기도 힘들다.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개인적으로 <줄리에타>에서 기억에 남는 부부은 줄리에타와 안티아의 관계다. 자신으로 인해 저질러 졌다고 믿는 두 명의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해줄 정도의 존재가 그녀에게는 딸 안티아다. 우연치 않게 홀모 밑에 살았다는 딸의 말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엄마는 '애증'의 존재 그 자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없어선 안 될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멀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존재처럼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건 엄마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거다. 일반적인 엄마와는 달리, 그녀에게는 이 세상 다 하는 날까지 함께 해야 하는 존재가 딸이다. 딸의 인생에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진 최선의 사랑이자 모성애다. 하지만 딸에게는 최악의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건 곧 엄마에게 돌아가 빙퉁그러진 모성애로 나타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경우 엄마와 딸은 서로의 감정을 너무 생각하기에 서로의 삶에 대한, 그리고 서로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못할 것이다. 어떤 말을 하든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걸 누구보다 서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침묵'은 갈수록 영화를 침식한다. 그리고 침묵은 '잠적'으로 확대된다. 잠적은 곧 '관계의 끝'으로 치닫는다. 더이상 어떤 인생이 남아 있나.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율리시스가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10년 만에 돌아와 아들과 재회한 것처럼, 줄리에타도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고는 재회할 수 있을까? ⓒ(주)쇼미미디어앤트레이딩



아무리 80년대라지만 이해하기 힘든 패션, 그럼에도 그녀가 '고전문학' 강사인 건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독이 의도했다는 게 조금, 아니 상당히 드러나는 부분인데 그녀가 강의하는 내용이 그녀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율리시스' 이야기. 


율리시스는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여신 칼립소를 만나 살다가, 영원한 젊음과 영생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폰투스를 건너 이타카 섬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율리시스는 10년 만에 아들과 재회한다. 영화에서 소안은 줄리에타와 만나 살지만,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한편 줄리에타는 12년 만에 딸의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복잡다단한 층위를 이루는 이 영화에서 '율리시스' 모티브는 단연 정점이다. 


줄리에타는 딸과 재회할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만약 그녀들이 재회한다면 다신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을 것이다. 또다시 불행해지기 싫을 테니까. 이제는 오랜 침묵을 깨고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할 게 분명하다. 12분 마다, 12시간 마다, 12일 마다, 최소한 12개월 마다는 재회하는 우리들은 어떨까. 서로에 대해서 잘 알까? 잘 알고 싶어나 할까? 상실을 경험해야 슬픔을 알까. 


줄리에타를 응원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와 딸을 응원한다. 이 시대의 모든 여성을 응원한다. 아니다, 사랑과 모성애는 엄마만, 여성만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럼으로 이 시대의 모든 인간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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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


문인 출신을 대표하는 유하 감독, 그를 대표하는 '거리 3부작', 그 중에서도 대표격인 <비열한 거리>다. ⓒCJ엔터테인먼트



거장 이창동 감독과 함께 한국 영화판의 대표적 문인 출신 감독으로 유명한 유하 감독. 1988년에 등단해 90년대 초 문명을 날렸다. 시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에 가야 한다>가 평단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대중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베스트셀러가 되니, 영화 제작 제의가 들어 왔다. 이미 1990년에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거액의 판권 계약을 거절하고 직접 연출에 이른다.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이후 10여 년 동안 그는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10여 년 만에 들고 온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수작이었다. 새천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제목부터 센세이션했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지금은 고유명사를 넘어 보통명사가 되었다. 이후 3년 만에 기대를 안고 찾아 온 <말죽거리 잔혹사>. 이 작품으로 '유하'라는 이름이 고유명사가 되었다. 10년 간 이어질 '거리 3부작' 혹은 '강남 3부작'의 시작이다. 


이 3부작 중 2번째 작품이자 유하 감독의 대표작, '유하'를 보통명사로 만들어 줄 작품은 <비열한 거리>다.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와 같은 제목이다. 한국 느와르에서도 길이 남을 만하니, 그 제목에 큰 누를 끼치진 않을 듯하다. 


완벽한 시나리오,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벼르고 벼른 듯한 완벽한 시나리오 그리고 편집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 없이 꽉 짜여 있다. 주인공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만든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까? 어딜 봐도 찾기 힘들다. 그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신의 기계적 출현을 의미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철저히 배제했다. 


'비열'하기 짝이 없는 판에서 '순수'한 영혼의 병두. 그는 식구들을 건사하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그를 낚는 황 회장. ⓒCJ엔터테인먼트



병두(조인성 분)는 여러 동생들을 건사하는 건달이다. 스폰서를 잘못 만나 허송세월 보낸 것도 모자라 빈털털이가 되었다. 그래도 식구들을 건사하고 동생들을 챙겨야 하기에, 돈 찾아와서 형님께 바치고 일정 부분을 받고 성인 오락실을 운영하며 어떻게든 살아가려 한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다. 형님은 돈을 적게 나눠 주고, 성인 오락실도 라이벌 조직에게 박살났다. 결국 그 때문에 후배한테 성인 오락실이 넘어가기도 했다.  

뭐든 했다고 생각하는 병두. 실상은 조직의 보스이지만 겉으론 엄연히 사업가인 황 회장은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박 검사 때문에 두 발 뻗고 살 수가 없다. 그를 '보고' 싶다. 그런데 최측근이자 병두의 형님인 상철이 못한댄다. 그 기회를 잡은 병두, 박 검사를 죽이면 황 회장이 스폰서를 서주고, 그는 다시금 메인이 되며, 식구들을 건사할 수 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헤어나올 수 없는 개미지옥으로 빨려 들어간다. 


빛나는 폭력성, 비열하지만 순수한 이들


영화는 조직폭력배의 실상을 통해 극대화된 폭력성을 선보인다. 병두로 하여금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한, 극도로 사실적인 조폭들끼리의 싸움신이 초반에 펼쳐진다. 여러 조폭 영화들에서 봐 왔던, '준비, 시작' 류의 싸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짜고짜 덤벼 싸우다가 칼을 꺼내 급소만 피해서 찌르고 베고 찍고. 이게 진짜겠구나 싶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섬뜩한 싸움신에 버금가는, 폭력성이 빛나는 명장면이다. 


또다른 장면은, 병두가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 친다. 폭력성 이상의 '욕망'이, 헤어나올 수 없는 욕망의 시작과 현재와 미래를 보여준다. 그가 조폭이 아니었더라도, 그와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욕망에서 비롯된 행동이니까 말이다. 그 욕망이라는 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거다. 가장 큰 건, 식구들 건사해야겠다는 의지 그리고 위로 더 올라가고 싶다는 본능, 지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 등. 일반 회사원의 욕망과 다를 게 무언가. 


<비열한 거리>는 폭력을 극대화한다. 싸움과 살인을 대표로 내세웠는데, 그 한 가운데에 병두가 있다. 극도의 사실주의에서 오는 소름. '이것이 진짜다.' ⓒCJ엔터테인먼트



그래서 병두는 이 영화에서 가장 비열하지만 가장 순수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가장 비열하다고 생각해 속을 끓이지만 사실 가장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황 회장을 비롯해 형님 상철, 친구 민호, 동생 종수 등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그 사실을 그만 빼곤 누구나 알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기 짝이 없는 캐릭터다. 


감독은 소름끼치는 싸움신과 이들의 비열한 모습을 통해, 이야말로 진짜 조폭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적자생존, 단순히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이자 형제가 되고, 어제의 식구가 오늘의 적이 되어 나를 죽인다. 그런데, 이들은 비열한가? 이들도 병두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다만 병두보다 조금 덜 순수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순수한 병두 덕분에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이들도 비열한 건가? 진짜 비열한 건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밖에 할 수 없게 만든 누군가 혹은 운명이라는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가 아닌가?


'강남' '거리' '욕망' '폭력' 3부작


<비열한 거리>를 논할 때면, <말죽거리 잔혹사>와 <강남 1970>을 앞뒤로 둔 '거리 3부작' 또는 '강남 3부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합쳐서 '강남 거리 3부작'이라고 해야 할까. 잘 들여다보면, '욕망 3부작'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싶다. 더 포괄적이고 핵심에 가깝다. 그렇지만 큰 얘기라 미시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박쥐>, <스토커>, <아가씨>도 '욕망 3부작'이고, 박범신 소설가의 <촐라체>, <고산자>, <은교>도 '욕망 3부작'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러니 유하 감독의 3부작은 욕망 중에서도 '폭력'을 말하는 것이니 앞엣것보다는 '폭력 3부작'이라 하는 게 맞겠다. 


우린 여기서 한 개의 '라인'을 발견할 수 있다. '강남'에서 '폭력'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화려하게 치장된 그곳이 태초에 폭력과 욕망이 서로를 잉태하고 서로를 죽이는, 그야말로 아수라의 지옥이다. 그 정점이 바로 이 <비열한 거리>인 것이다. 


한번 시작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가야 한다. 가지 않는 것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아수라의 지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고뇌. ⓒCJ엔터테인먼트



유하 감독의 '폭력 3부작' 앞에는 '청춘'이 따라다닌다. 그렇지만 거기에 '여성'은 없다. 여성은 남성의 전유물 또는 주위 인물로 비춰질 뿐이다. 그러는 한편 폭력의 한 가운데 던져진 남성이 유일하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안식처이기도 하다. 여하튼 중심이 될 순 없으니, '폭력 세계'에 발을 들여다 놓지 않게 하려는 의도의 산물일까 아니면 폭력으로 움직이는 이 '인간 세계'의 주변 인물인 걸까. 아무래도 전자가 맞지 않나 싶다. 감독이 그린 폭력 세계는, '폭력' 자체는 보편적일지는 몰라도 '세계'는 특수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라는 게, 욕망이라는 게, 반드시 시작이 있다. 누구나 그때가 있다. 그건 한 번 시작되면 돌이킬 수 없는, 헤어나올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우린 그렇게 살아간다. 인간이기에, 수위를 조절하면서 내보이지 않으면서 자신과 싸우면서 욕망에 먹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욕망이 이끄는 대로 가버리면 어떡하지, 정신을 차려보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면 어떡하지, 그것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이면 어떡하지... 순간 치를 떠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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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포레스트 검프>


내 인생, 최초의 '제대로' 된 영화 <포레스트 검프>. 그전까지 영화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이나 다름 없었던 내게, 이후로 '영화 세계'가 열렸다. ⓒ파라마운트



영화를 몰랐던 10대 시절에 우연히 주옥 같은 영화들을 만났다. 중학교 3학년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아마데우스>, 고등학교 3학년 때 집에서 공부하다가 잠깐 쉬며 TV 채널을 돌리다가 마주한 <와호장룡>. 그들은 아마 영원히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기재로 작동할 것이다. 


'넌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게 되었니?'라고 누군가 물어 왔을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영화는 따로 있다. 때는 중학교 2학년 어느 주말이었던 것 같다. 큰 이모네가 놀러 왔다. 큰 이모 내외는 우리 부모님과는 다르게 영화나 음악에 일가견이 있었다. 큰 이모부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도서·비디오 대여점에 갔다. "너네 혹시 이 영화 봤니? 안 봤으면 오늘 빌려가서 꼭 봐야해"라며 건네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였다. 


20여 년 전의 장면이지만 아직도 생생한 건 그 이후로 내게 '영화 세계'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아예 존재하지 않던 세계였다. 큰 이모부의 추천 덕분이었는지, 영화가 너무 좋았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둘 다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영화라는 건 그저 보기만 하는 거였다. 가타부타 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할 말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 영화는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영상이나 다름 없었다. 


달리기로 달라지는 인생


<포레스트 검프>는 1994년에 개봉했고 22년 만에 재개봉한다. 명장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에 명배우 톰 행크스가 열연했다. 대대적인 흥행과 대대적인 호평, 그리고 대대적인 상복이 뒤따랐다. 명실상부한 90년대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영화로 '영화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으니, 나는 참 복 받은 것 같다. 22년만에 재개봉을 하게 되었는데, 많은 이들에게도 이 영화가 특별했으면 좋겠다. 


선천적으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포레스트 검프, 제니의 한마디 "달려! 포레스트!"로 달리기 시작한다. 이후 그의 인생이 달라진다. ⓒ파라마운트



IQ 75에 척추가 활처럼 휘어 걷지 못하는 아이 '포레스트 검프', "넌 남들과 다르지 않아, 명심하렴"을 주문처럼 아이에게 말해주는 엄마 덕분에 보통 학교에 들어간다. 등교 첫날, 스쿨 버스에서 아무도 자리를 함께 하려 하지 않을 때 "앉고 싶으면 앉아도 돼"라는 '제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후 포레스트와 제니는 실과 바늘처럼 언제나 함께 다닌다. 


어느 날, 여지 없이 포레스트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나타나 돌멩이를 던진다. 그때 포레스트의 인생을 바꾼 제니의 한마디가 울려퍼진다. "달려! 포레스트, 달려!" 포레스트는 자전거를 타고 쫓아 오는 아이들을 따돌리려 사력을 다한다. 불편한 다리는 어느 순간 불편하지 않게 되고, 자전거를 훨씬 능가하는 속도로 도망간다. 이후 달리기는 포레스트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달리기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간 기관차'라 불리는 에밀 자토펙은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라고 했다. 인간은 달리도록 태어났다는 거다. 포레스트의 우여곡절 인생역전은 달리기로 점철되어 있다. 더군다나 그는 원래 걸을 수 없었는데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으니, 가장 인간답지 못한 삶에서 그야말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된 것이 아닌가. 그것은 포레스트의 정해진 운명이었을까, 포레스트가 개척한 운명일까. 


정해진 운명과 운명의 개척, 어떤 게 맞을까


포레스트 검프의 삶은 마치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그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즉 운명을 개척했다는 생각도 든다. 무엇이 맞을까? ⓒ파라마운트



포레스트는 평생 엄마의 말씀들을 숙지하고 실행에 옮기며 산다. 그중에서도 "인생은 초콜릿 상자 같단다. 어떤 걸 집어 들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를 특별하게 생각한다.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으니, 어떤 기대나 실망 없이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던진 게 아닐까 싶다. 영화가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이 의미하는 바다. 


한편 포레스트의 삶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처럼 흘러간다. 달리기를 너무 잘해 우연히 미식축구를 '하게 되고' 전미미식축구팀에도 뽑혀 스타가 되고 군대에 들어가게 '되고' 베트남전쟁에 출전해 달리기 덕분에 큰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아 영웅이 되고 우연히 탁구를 접해 탁구의 신처럼 '되고' 죽은 동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새우배 선장이 '되어' 백만장자가 된다. 


제니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운명'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포레스트는 첫만남 이후 그 어느 순간에라도 제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또한 만날 때마다 변해 있는 제니에게 실망을 한 적도 없다. 첫만남 때의 기억과 느낌과 사랑을 간직하고 전한다. 정해진 운명에 순종하는 삶의 자세도 엿보이는 것이다. 


과연 어떤 게 맞는 걸까. 포레스트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둘 다 맞는 거라고. 정해진 운명과 개척하는 운명이 공존하는 거라고. 나의 생각도 같다. 이 세상을 생각해보면, 자연이 선택한 대로 만들어지고 진화해온 한편 신의 개입 없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포레스트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을 거다. 


확실한 재미와 희열을 보장한다


마치 한 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포레스트 검프와 케네디 대통령. 이것이 1990년대 초반의 CG란다. 엄청나다. 영화를 보면 믿을 수 없는 엄청난 CG들이 계속 나온다. 확실한 재미를 보장한다. ⓒ파라마운트



영화는 몇 번을 봐도 확실한 재미와 희열을 보장한다. 그런 부분들이 있다. 포레스트의 인생역전 그 자체. 어쩜 그리 인생이 우연의 연속으로 인해 우여곡절로 점철될 수 있는가.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포레스트, 결코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그의 생각과 행동을 보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거다. 우리의 삶도 그처럼 '재미'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삶이 아닌 그의 삶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것일까. 막상 그처럼 살아보면 재밌다고 느낄 수 있을지?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유명인들이 함께 한다. 모두 실존 인물들인데, 엘비스 프레슬리, 케네디를 비롯한 네댓 명의 미대통령들, 존 레논 등 60~80년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그의 인생에 종종 얼굴을 내민다. 하지만 그는 잘 모르는 듯, 그 간극에서 오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삶도 잘 복기해보면 그런 순간들이 종종 눈에 띄지 않을까?


무엇보다 '특수효과의 거장'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의 손에 탄생한 CG들이 압권이다. 그저 서사에 압도되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느끼기 힘든 부분들인데, 모든 CG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1994년에 개봉했다고는 믿기 힘든 만큼 완벽한대, 60~70년대 활동했던 실존 인물들과 94년 당시 현재 인물을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듯 효과를 낸 것이다. 차라리 실존 인물들인 것처럼 분장을 했다는 걸 믿고 싶을 만큼 완벽하다. 다만, 그가 <백 투 더 퓨쳐>를 연출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수긍이 간다. 뿐만 아니라 <아바타> 이전에 이미 3D 혁명을 이룬 로버트 저메스키다. 


볼 때마다 감동은 줄어드는 것 같다. 아는 게 많아지니까. 포레스트의 제니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이 답답하다. 그에 더해 필요할 때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제니의 행동이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포레스트의 사랑에서 유발되는 감동이 사라지진 않을 거다. 반면 재미는 더해지는 것 같다. 역시 아는 게 많아지니까. 웃음 포인트들이 눈에 더 많이 띈다. 


적절한 고전 음악 OST들과 여전히 황홀한 풍경들은 영화의 백미 중 하나다. 절대 지나치지 못할 것이니, 넋 놓고 감상하는 걸 추천한다. 미국 60~80년대 서사와 포레스트라는 한 인간의 서사가 훌륭히 어우러져 생각지 못한 감동을 줄 것이다. 최소한 이 감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포레스트 검프>, 언젠가 반드시 무조건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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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500일의 썸머>


명작의 재개봉이 열풍을 넘어섰다. 여기, 6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가 있다. 기 개봉 당시의 기록을 넘어섰다. 수많은 재개봉 명작을 넘어선 것,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 무엇보다 겨우 6년 만에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재개봉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영화 <500일의 썸머> 포스터.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명작의 재개봉이 열풍을 넘어섰다. 재개봉을 하지 않은 영화는 명작이 아니라는 등식이 생겨날 것 같은 지경이다. 본래 재개봉은 개봉 당시 큰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입소문이 퍼져 열화와 같은 성원에 팬서비스 차원에서 시행하는 의미가 크다. 이제는 재개봉작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2015년에는 <이터널 션사인>이 30만 명 이상을 동원하는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2016년에는 <인생을 아름다워>가 10만 명 이상을 동원했다. 


그리고 여기, 겨우 6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500일의 썸머>가 있다. 14만 명 정도 동원했던 6년 전 기 개봉 당시의 기록을 넘어섰다. 현재까지 모든 재개봉 영화 중 2위에 해당한다고 한다. 수많은 재개봉 명작을 넘어선 것,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 무엇보다 겨우 6년 만에 명작의 반열에 올라 재개봉하게 된 연유가 궁금하다. 


6년 동안 입소문이 퍼지며 끊임없이 재조명된 게 가장 큰 이유일 테지만, 감독과 배우들의 인지도 수직 상승도 큰 몫을 차지했다. 감독 '마크 웹'은 이 영화로 데뷔했고 이후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단번에 이름값을 올렸다. 영화의 질까지 따라간 건 의문이지만. 극 중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으로 잠깐 잠깐 얼굴을 비추는 '클레이 모레츠'는 어떤가. 영화 고르는 눈이 아직 모자라서 그런지, 흥행에서는 계속 미끄러지지만 여러 영화를 통해 그 얼굴과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무엇보다 주연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변화가 눈에 띈다. 그는 이 영화가 개봉할 당시만 해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후 <인셉션> <다크 나이트 라이즈>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조토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제는 어엿한 '원톱' 주연 배우로 우뚝 섰다. 아마 <500일의 썸머> 재개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가 바로 그일 것이다. 


100명이든 1000명이이든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영화 


영화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연애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100명이든 1000명이이든 이 영화를 보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톰은 운명의 상대를 '기다린다'. 어느 날 회사에서 운명의 짝으로 확신할 만한 이를 보게 되는데, 사장 비서 썸머다. 그는 딱히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고 기다린다. 소심해서 그런건지, 그래서 소심해진 건지는 아직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썸머는 운명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운명을 믿지도 않는데,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한다. 어릴 때 이혼한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썸머도 톰이 호감이었나 보다. 톰이 충분히 먼저 다가갈 수 있었을 텐데, 썸머가 음악 취향을 물으며 먼저 다가간다.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관계는 항상 톰의 기다림과 망설임, 썸머의 다가감과 되돌아옴이다. 그러면서 썸머가 조금이라도 다가오지 않는 걸 느꼈을 때 심하게 자책하며 친구들과 동생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다. 이 사랑이 너무 힘들다고. 썸머는 조금씩 '나쁜 년'이 되어 간다. 


정녕 찌질한 톰, 장담하건대 톰 같은 남자들 정말 많다. 필자도 그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필자를 포함한 톰 같은 남자들, 이 영화를 보고 100% 공감하며 썸머에게 욕을 퍼부었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톰을 가지고 논 거냐고,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지 않느냐고. 


영화는 감각적으로 톰의 썸머와의 500일을 보여준다. 그중 절반 정도는 썸머와 함께, 절반 정도는 썸머와 헤어진 후다. 사실 일상다반사의 하나인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보여줬을 뿐인데, 이 영화가 특별한 건 보는 이에 따라,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보는 이의 기분에 따라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톰의 시선에서 보면 썸머가 나쁜 년이고, 썸머의 시선에서 보면 톰이 나쁜 놈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평범한 연애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어느새 자기 이야기가 된다. 결정적으로 같은 사람이 봤어도 연애 초보일 때 보는 것과, 시간이 흘러 연애 고수 또는 연애를 잘 이어나가고 있을 때 보는 게 완전히 다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연애 이야기라고 할까. 100명이든 1000명이이든 이 영화를 보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톰의 시선, 썸머의 시선, 제3자의 시선


톰의 시선에서 보면 썸머가 나쁜 년이고, 썸머의 시선에서 보면 톰이 나쁜 놈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평범한 연애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어느새 자기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는 반드시 두 번 이상 봐야 한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톰의 시선에서, 톰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들어보자. 톰은 사실 잘못한 게 없다. 그는 단지 소심한 것 뿐이다. 소심해서 망설였고 기다렸다. 더해 운명을 믿었기에 굳이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운명이란 내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저절로 나타나는 게 아닌가. 내가 무엇을 하려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운명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기에 톰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지, 콧대가 하늘을 찌르거나 한 게 아니었다. 


썸머의 시선에서, 썸머를 옹호하는 목소리를 들어봐야 한다. 영화는 오로지 톰의 시선만 볼 수 있기에 지나치기 쉽다. 그렇지만 썸머의 입장을 들여다봐야 영화가 완성된다. 썸머는 어릴 때 겪은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에 대해, 운명에 대해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따라 다닌다. 진정한 운명도 없고 사랑도 없다. 자유롭게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면 되는 거다. 진지할 필요가 어디 있나. 


그런데 그런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한다. 독립적이고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삶과 사랑의 방식을 추구하기에 먼저 다가가는 걸 꺼리지 않는다. 먼저 다가갔기에 먼저 발을 빼는 것도 꺼리지 않을 뿐이다. 그녀가 겪었던 대부분의 연애가 그렇게 시작되어 그렇게 끝난다. 그녀는 나쁜 년이 되기 일쑤다. 그녀라고 그렇게만 흘러가길 바라겠나? 만약 그녀가 다가가기 전에 한 발 빨리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적어도 그녀가 나쁜 년이 되는 경우는 적을 거다. 


제3자의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자.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보면, 톰은 소심하고 찌질하다. 보기에 따라서 나쁜 놈이라고 할 수도 있다. 도무지 뭘 하려고 들지 않고 뭘 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큰소리 치는 건 그라니,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썸머는 오히려 불쌍하다. 시작부터 먼저 다가간 이후 매번 먼저 다가간다. 심지어 톰이 잘못을 했을 때도 썸머가 먼저 다가갔다. 그러니 지칠 수밖에. 그녀가 지쳤을 때 톰은 역정을 낸다. 그녀가 불쌍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녀의 그런 모습이 보는 이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비추니, 더더욱 불쌍하다. 그녀가 불쌍하지 않다면, 그건 연애 초보 또는 연애에 무지한 소심하고 찌질한 운명론자일 뿐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영화를 다시 보시라. 


수많은 연인들에게 축복이 되길...


수많은 찌질한 남자들의 성장을 도모했다면, 영화는 수많은 연인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던 때에 이 영화를 봤었다. 오래 있지 않아 정확히 톰과 썸머처럼 연애를 시작했고 연애를 했다. 그리고 그들처럼 헤어질 뻔 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누구나 겪는 일상다반사처럼 말이다. 다행히 바로 그 분과 결혼을 했고 그녀에게 줬던 수많은 아픔들을 속죄하며 갚아나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나에게 끊임없이 다가왔고 기회를 줬고 신호를 보냈고 실망을 했지만 돌아왔다. 이제야 조금씩 깨달아가는 나, 평생 다가갈 거라 다짐해본다. 


그렇게 찌질했던 때 본 <500일의 썸머>, 조금씩 깨달아가는 지금 재개봉에 맞춰 그녀와 함께 다시 보았다. 나는 두 번째로, 그녀는 처음으로 보는 거다. 나는 비로소 영화의 진면목을 그리고 썸머의 본 모습을 깨달았고, 그녀는 단번에 모든 걸 꿰뚫어 보았다. 이 영화는 톰의 성장과 나의 성장을, 그리고 수많은 찌질한 남자들을 도모했다. 


수많은 찌질한 남자들의 성장을 도모했다면, 영화는 수많은 연인들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비로소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톰은 썸머가 비틀즈에서 링고 스타를 좋아한다는 걸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삶의 궤적이 바뀌면서 영화를 적어도 두 번 정도 보았을 이들은 그걸 이해했을 것이다. 톰이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머릿속으로 들어 오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도달한다. 


비록 만나고 연애하고 헤어지는 게 일상다반사라지만, 마음이 아픈 건 변함 없다. 그러니 부디 이 영화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과거를 후회하더라도 '아,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현재와 미래를 위해 '아, 그렇게 해야 겠다. 그러면 후회 없이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말이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고 이해하려 하고 측은하게 여기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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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20년 만에 친구를 만났어요. 정녕 20년 동안 보지 못했었죠.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내내 제일 친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각자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고 그 친구는 이사까지 갔어요. 그동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좋더군요. 신기한 건, 정말 오랜만에 봤는데도 어색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마치 어제도 만난 사이인 듯 했지요. 


며칠 전에는 여자친구와 사귄 지 1800일 되는 날이었어요. 분명 의미 있는 날이지만, 기념할 만한 무엇도 하지 않았어요. 귀찮아서? 사랑이 식어서? 원래 기념일을 챙기지 않아서? 그렇지는 않아요. 앞으로 새로 만들 기념일이 있기에, 이 정도의 기념일은 지나쳐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하다 보니 단순한 연인 이상의 무엇을 느끼는 것 같아요. 친구는 물론이고, 동반자나 분신이라고 하는 게 맞겠죠. 그러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요. 서로 말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났니?" 


그럴 때면,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죠. 하늘이 내린 사랑. 수많은 인연들 중에 우연히 만나 함께 하고 사랑을 하고 서로를 자신보다 사랑하게 된, 무엇으로도 설명할 길 없는 우리의 모습은 하늘이 내린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현생이든 전생이든 언젠가 만나 사랑했던 던 게 분명해요.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거죠. 그러고는 금세 친근해지는, 오래전 헤어졌던 오래된 친구라고 해도 무방하겠어요.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반갑잖아요? 항상 그립고요. 


잔잔하게 흐르는 호수 같은 저의 사랑 방식이 그녀에게는 어떻게 비춰질 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약속할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겠다고요. 불 같은 사랑은 분명 상대로 하여금 엄청난 걸 느끼게 해줄 거예요. 저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아요. 다만 지치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답니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동반자로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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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넘겨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내가 그녀와 처음 말을 나눈 순간이었다. 대학 강의 시간이었는데, 그녀의 발표 후 바로 내가 발표를 하였다. 그녀가 내 발표 PPT를 넘겨주겠다는 제안이었는데, 내가 거절했다.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렇게 1년 반 동안의 '지켜봄'이 시작되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나? 그녀와 난 같은 과였는데, 1년 반 동안 즉 3학기 동안 같은 수업을 5개나 들었던 것이다. 매학기마다 1~2개의 강의를 같이 듣게 되었다. 서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당연히 친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같은 수업을 선택했을까? 더욱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 아닌 것도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반했는지, 매학기마다 같은 수업을 들으니 점점 호감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녀에게 호감이 갔다. 길에서도 마주치고, 도서관에서도 마주치고, 엘레베이터에서도 마주쳤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냥 인사만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언젠가 밤새 놀다가 새벽녘에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멀리서 도서관으로 가는 그녀가 보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도 뭔가 신경을 쓰고 있는 분위기였다. 조금은 허세스러운 느낌? 그런데 내가 아랫쪽에 있었고 그녀가 윗쪽에 있어서 그런지, 그녀에게서 광채가 났다. 마침 그녀 뒤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또 한번은 숙제를 위해 친구들과 도서관을 찾았는데, 마침 같은 수업을 듣고 있던 그녀가 있었다. 나를 본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곤 수북히 쌓인 책을 들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닌가? 난 상처를 받고 말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아니라 내 친구들을 보고서 그랬던 거란다. 그녀는 그들이 마냥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다니는 나도 싫었다고. 


1년 반이 지난 뒤 난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게 되었다. 그녀와 난 같은 과, 나는 언젠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1년 반 만에 말이다. 그 한마디는 우리의 운명을 바꾼다. 


너도 중국 가니? 나는 가는데.

네, 저도 중국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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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지나간 책 다시읽기] 위화의 <인생>


위화의 <인생> ⓒ푸른숲

우리나라와 중국의 근현대사 사이에는 은근히 공명하는 부분들이 많다. 특히나 일반 민초들이 겪어온 삶은 그 사건의 내막이나 미세한 부분이 다를 뿐, 느꼈던 바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압력, 시달림과 저항과 부역과 버티기, 배고픔과 슬픔과 분노와 포기, 계속되는 정국과 정책의 변화에 의한 혼란 등을 공통분모로 두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보고, 우리의 모습에서 그들을 볼 수 있다. 일반 민초들의 삶은 그래서 인류적 보편성을 띠고 있나 보다.


'운명의 소용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말일 것이다.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이라기 보다는, 생사나 존망에 관한 처지라고 해석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즉,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처지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영웅과도 같은 기개로 운명을 치열하게 헤치고 돌파해야 하는 것인가, 조용히 내 앞가림이나 하며 때론 엎드리고 때론 숨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격하게 소용돌이 치는 운명 앞에 놓였을 때 해야 하는 행동이 꼭 이 두 가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운명에 대항하거나 운명에 굽실대지 않고, 운명을 인정하며 같이 살아가는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희노애락이 진하게 겹쳐 있을 것이다. 분노와 초조함과 혼란만 있지도 않을 것이고, 기쁨과 환희와 즐거움만 있지도 않을 것이며, 슬픔과 무력감과 비참함만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에 있어 가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다. 


운명을 인정하며 살아가다


중국의 소설가 위화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해준 소설 <인생>(푸른숲)은 바로 이런 삶과 인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운명을 인정하며 같이 살아온 노인이다. 그는 공교롭게도 중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다 겪어온 인물이다. 사실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를 헤쳐나오면서, 딱히 어떤 행동을 하지도 그렇다고 어딘가에 바짝 엎드려 숨지도 않았던. 


푸구이라는 이름의 노인은 열심히 일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작중의 '나'에게 옛 이야기를 해준다. 신세타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굉장히 유용하다.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어찌 하든 살아가고야 마는 모습


푸구이는 지체 높은 부잣집 아들이었지만, 그에 걸맞는 행동거지를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여자와 도박을 일삼았다. 그의 아버지 또한 소싯적에 그러하였기에, 시간이 지나 철이 들면 돌아올 것이었다. 하지만 도박이 그의 집안을 파멸로 이끌었다. 도박으로 모든 것을 잃은 푸구이의 집안. 그들은 허름한 초가집으로 쫓겨나고, 얼마 안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부인 자전은 장인 어른이 강제로 데리고 가고 말았다. 푸구이에게 남은 건 어머니와 딸 펑샤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철이 들었다. 


분량에 상관없이 이 소설을 둘로 나누라면, 바로 푸구이가 지체 높은 부잣집에서 가난한 농민이 되는 장면을 기준으로 하겠다. 아무도 못말리던 망나니에서 착실한 농민으로의 재탄생 과정은, 비록 큰 희생을 치렀지만 성공적이다.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그 대단원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결국 성공하고야 마는 즉, 어찌 하든 살아가고야 마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고 희열까지 느끼게 된다.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들께서 그렇게 사셨으니까. 


억울하고 극적인 가족과의 생이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푸구이 앞에 아내 자전과 막내 아들 유칭이 돌아온다. 기쁨이 용솟음친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푸구이는 국공내전이라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영문도 모른 채 그리고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푸구이는 국민군 산하로 전쟁에 참가한다. 죽음의 문턱을 넘기고 공산군에 의해 풀려난 푸구이는 가족들 품에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이런 생이별 장면이야말로 우리네 근현대사에서 부지기수로 봐왔다. 한국전쟁 당시 뿐만 아니라, 군부독재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니 말이다. 민초들의 삶에서 이보다 더 억울하고 극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나라를 위하려는 행동이 결국 국민을 해하게 되는 행동으로 변하는 아이러니. 덕분에 더 애뜻한 관계가 되었다고 하면 위로가 될까?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힘든 죽음들


푸구이 가족은 계속해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치며,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과 직간접적으로 대면한다. 그 사이 막내 아들 유칭과 딸 펑샤가 어이없게 죽어간다. 차라리 중국 전토를 뒤흔든 사건에 휘말려 죽었으면 그나마도 덜 억울하지 않을까. 이 또한 운명이라며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다. 이어 아내 자전도 죽고 만다. 이제 남은 건 푸구이와 사위 얼시 그리고 외손자 쿠건... 그들의 운명 또한 다를 바 없다. 그래도 푸구이는 이 모든 게 운명이려니 하고 무던히 살아간다. 현명한 처사인지 냉혹한 처사인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 그는 사회가, 국가가 떠맡긴 짐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21세기에 들어선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과연 푸구이는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우리네 민초들의 삶은 반 세기 전과 달라졌을까? 달라진 건 분명하다. 대부분이 타의에 의한 배곪음을 느껴본 적이 없고, 전쟁 등에 의한 파리 목숨의 경험도 거의 없다. 하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불안에 떨고 있으며, 훨씬 더 불만족스러운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빈부격차는 더더욱 벌어졌으며, 인지 하기 싫은 불평등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은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을 보고 있으려니, 주인공 푸구이의 삶의 굴곡을 고스란히 듣고 있으려니,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불안이 스르르 사라지는 느낌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힘겨웠을 그의 삶이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그 삶을 두 발로 굳건히 살아 왔다는 것이 고맙기 때문이다. 반세기의 역사의 보편적인 면을 그가 대표해주고 있기에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힘겹게 살아왔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아버지는 내가 가문을 빛내기를 바라셨지만, 당신은 사람을 잘못 보신 게야.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사람은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게 좋은 거야."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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