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전성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거장으로 가는 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롯데엔터테인먼트



드니 빌뇌브 감독의 스타일은 명확하다. 기본적으로 정적이고 건조하며 느릿느릿하다. 김훈 소설가의 작품들, 그리고 그의 문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멀리서 조망하다가도 급격히 치고 들어가 깊숙히 찌른다. 정적이면서 느릿한 전개는 어느 순간 숨도 못쉬게 내달리는 전개로 바뀌기도 한다. 그리고 건조함은 피비릿내에 자리를 내준다.


거의 매년 장편을 내놓고 있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전성기는 지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는 이미 더 없이 좋은 작품들을 내놨고 흥행감독이 아님에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영화의 참맛을 알아가는 건 축복이 아닐까. 


그의 2015년작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그의 연출작들 중에서도 특히 빼어나다. 드니 빌뇌브의 스타일을 모두 구현해내면서도 완벽하리만치 표현해냈다. 적어도 해당 장르에서는 역대 최고급 퀄리티를 자랑하고, 영하를 본 사람이라면 찬사를 던지지 않을 수 없으며, 영화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빈틈없이 배치했기에 교과서라 불러도 하등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치밀하게 그려낸 치열한 심리전쟁


세 주인공이 각각의 목적과 목표를 시카리오에 모였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애리조나에서 있었던 아동납치살인사건 수사에서 소기의 성과를 올린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 분), 법무부의 요청에 따라 멕시코 카르텔 소탕작전의 일원으로 차출된다. 그녀가 성과를 올린 사건의 실상이 카르텔에 의한 거대 범죄였던 것. 그녀가 속한 팀을 이끄는 이는 CIA 소속의 맷(조슈 브롤린 분),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또 하나의 인물인 멕시코 검사 출신이라는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로 분). 


그들이 향하는 곳은 멕시코 후아레즈로, 일명 암살자의 도시로 불린다. 그들이 과연 어떻게 최악의 카르텔 조직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맷과 알레한드로는 잘 알고 있는 반면 케이트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특히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이 도시 자체인 것 같다. 민간인들 눈앞에서 카르텔이라 의심되는 이들을 무차별로 죽여버리는... 그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모두들...


케이트에게는 이 모든 게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충격은 곧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곧 스스로의 무력감과 순진함에 대한 체념으로 바뀐다. 그들 앞에는, 그녀 앞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 어떤 예측도 쉬이 할 수 없다. 


영화는 범죄 스릴러를 기본으로, 세 주인공 간의 치열한 심리 전쟁을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범죄 장르에 어울리는 액션과 더불어 피와 살이 난무하는 모습도 물론 볼 수 있지만, 영화가 스릴러 장르에 더 가깝다고 말하는 듯한 제스처가 영화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 우린 세 주인공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직 '이익'만이 있을 뿐인 그곳


거기엔 선악 따위, 이상과 현실 따위의 구분은 없다. 오로지 이익 추구만 있을 뿐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의도적으로 줌아웃과 줌인을 교차하는 듯하다. 암살자의 도시 후아레즈를 비롯 선과 법과 윤리를 찾아볼 수 없는 곳을 멀리서 조망하며, 개인과 조직을 위해 그곳의 생리를 이용하는 이들의 행동거지와 모양새롤 밀착해 보여주려 한다. 단순히 촬영 기술적인 줌아웃과 줌인이 아닌, 영화 전체에 스며든 이야기며 분위기를 뜻한다. 


케이트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상주의자이다. 오로지 현실만이 있는 이곳에서 법을 지키며 작전을 수행하려는 그녀는 이상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선악 개념은 모호하다. 악의 행동이 분명한 카르텔을 섬멸하고자 그들이 벌이는 짓들은 선보다 악에 가깝다. 최소한 의도는 선하되 행동은 악하다고 할 수 있다. 


고민이 깊어진다.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들의 행동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야 하는지. 특히 평범한 가정을 둔 어느 멕시코 경찰의 끝을 목격한다면 반드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선한 의도와 악한 행동이 만나 빚은 결말이 선하게 끝나는지 악하게 끝나는지, 아니 애초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기나 한 건지. 


거기엔 오로지 이익만 있을 뿐이다. 법 따위는 당연히 없고, 선과 악의 개념 따위도 없으며, 옳고 그름의 기준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 케이트는 철저히 이용만 당한 채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었고, 차라리 그곳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게 나았으며, 그곳은 여전히 그곳이었다. 그들은 언제고 그곳을 그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것이었다. 과연 '암살자'는 누구인가. 


모든 면에서 교과서 같은 영화


영화는 각본, 연출, 촬영, 음악, 사건, 인물 등 모든 면에서 교과서적인 풍모를 풍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앞서 말했듯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는 모든 면에서 교과서 같다. 현존 최고의 각본가이자 연출에도 일가견을 보인 테일러 셰리던의 정석적인 각본, 오로지 영화에만 몰입하게 만드는 치밀하면서도 독창적인 연출, 개개인이 따로 빛나면서도 영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캐릭터들, '이게 바로 영화음악이다'라고 할 만한 음악까지. 무엇보다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이끌 이 도시가 압권이다. 


숨막히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건, 영화 속 사건들 때문이지 드니 빌뇌브의 숨막히기만 하는 연출 때문은 아니다. 그는 줌아웃과 줌인을 자유자재로 교차하듯 전체적인 흐름과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평화 속에 전쟁이 있고, 정적 속에 동적이 있으며, 무표정 속에 수많은 곡절들이 숨겨져 있다. 


드니 뵐뇌브와 테일러 셰리던의 연출과 각본의 앞날을 기대한다. 그들의 뛰어나고 빼어난 영화적 능력만이 아닌, 독창적 시선 속에 내포된 다채로운 비판의식과 소외를 향한 따뜻함 말이다. 소외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또한 다채로우니 기대의 수치는 더 높을 수밖에. 


마지막 장면, 그 무법지대에 여전히 남겨진 사람들을 비추는 영화의 시선이 씁쓸하다. 결국 그들이 이용한 그곳의 정체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모든 종류의 전쟁, 그 진정한 피해자는 민간인들이 아닌가. 우리가 이 영화를 보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영화 또한 그 부분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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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포스터의 홍보문구가 이토록 와닿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영화'이자 '한 여인의 위대한 여정'을 그렸다. ⓒ티캐스트


완벽에 가까운 영화를 보고 난 후 느끼는 참혹함을 아는가? 그때만큼은 다른 어떤 영화도 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이제 영화를 졸업해야 하는 건가?' 같은 황당무계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테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이 나에게 그런 경험을 선사해주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당혹감인데, 다름 아닌 감독의 면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드니 빌뇌브는 불과 서른한 살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내놓는다. 전 세계적인 호평 일색. 이어 내놓은 작품들도 마찬가지. 2010년에 내놓은 <그을린 사랑>부터 본격적으로 국내에도 소개된다. 하나 같이 명감독의 걸작들이다.


2010년대에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컨택트>는 전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고 슬슬 흥행에도 시동을 거는 느낌이다. 올해 말에는 고전 SF 명작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를 35년 만에 내놓아 정점을 맞이할 예정이다. 그럼에도 <그을린 사랑>이 준 충격과 전율은 무엇도 따라하지 못할 그 영화만의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


일개 개인이 맞서기에는 너무나도 큰 것들, 역사와 전쟁과 운명. 그러나 이 영화에서 한 여인 나왈 마르완은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맞선다. 아니, 품는다. ⓒ티캐스트



영화의 시작은 황당하고, 이어지는 전개는 조금 지루하다. 진도가 팍팍 빠지진 않는 듯하다. 그럼에도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는 건, 기막힌 연출력과 꽉 짜인 각본에 있는 것 같다.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 공증인에게 어머니 나왈 마르완의 유언을 듣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그 존재도 모르는 형제를 찾아 자신의 편지를 전하라는 것. 그전까진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유언이자 약속이었다. 쌍둥이는 어머니의 뿌리와 흔적을 찾아 중동으로 향한다. 


한편 나왈 마르완의 충격적 옛일을 들여다본다. 중동에서 기독교와 회교도의 전쟁이 한창인 1970년대, 기독교 집안의 딸 나왈, 회교도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다. 나왈 집안의 오빠들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그 사랑의 댓가로 그를 죽이고 그녀 또한 죽이려 한다. 할머니의 중재로 살아난 나왈, 하지만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한 상태다. 그 또한 용서받지 못할 대죄, 결국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보내진다. 그녀는 아기를 반드시 찾을 것을 다짐하고 약속한다. 


도시에 있는 친척네로 보내진 나왈, 그곳에서 기독교도임에도 불구하고 회교도 난민들의 입장에 서서 활동한다. 이내 탈출해 목숨을 걸고 아기를 찾아나서는데, 끝내 찾지 못한다. 돌아오는 길, 회교도인 척 하고 차를 얻어탄다. 하지만 기독교도 민병대에 습격당해 몰살 당하고, 나왈은 다시 기독교도로 돌아와 홀로 살아남는다. 여기서 나왈은 결심한 듯하다. 기독교를 용서치 않겠노라고. 


계속되는 비극의 고리는 그녀를 놔주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참혹한 비극이 그녀를 찾아 왔다고 생각했지만, 더욱 더 원형적이고 원초적이며 지옥불 같은 비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파괴적인 역사와 전쟁의 소용돌이가 주는 아픔보다 그녀를 더욱 옥죄는 건 인간의 힘으론 털 끝 하나도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다. 그럼에도 우린 역사와 전쟁과 운명의 아픔조차 품어내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사랑과 약속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고리 끊기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 분명한 비극을 마주하고, 사랑과 약속이라는 더없이 순결무구하고 위대한 것들과 맹세한 바를 지키고자 한다. ⓒ티캐스트



영화는 대번에 오이디푸스 신화를 우리 앞에 불러온다. 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리라는 신탁 때문에 버려지는 오이디푸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이웃 나라의 왕자로 성장해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오이디푸스의 현현이라 하겠다. 


고로 이 영화를 역대급 반전이 주는 쾌감과 감동과 전율로 포장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 건,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는 건 과정에서 보여주는 한 여인의 위대함 때문이리라. 오이디푸스가 아닌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결과의 반전이 아닌, 과정의 서사에 천착해야 한다. 


그녀에게서 '비극의 고리 끊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형용할 수 없이 넓고 깊은 품과 지극한 자기 희생이 바탕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이 결단은, 영화 <똥파리>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차원을 달리하는바, 인간의 존재가치와 존엄성 파괴의 한복판에서 이루어낸 업적이다. 


그 모든 건 태초의 '사랑'과 사랑에의 '약속'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널 찾아내 내 사랑을 줄 것을 약속한 것이다. 중심에 이 두 요소를 자리잡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간다. 일찍이 이런 사랑은 목격한 적이 없다. 이리도 숭악한 것들 사이에 피어난 이리도 숭고한 사랑의 꽃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사랑의 주체도 객체도 당사자도 되기 싫다. 너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아프다. 


포용, 조화, 그리고 함께 하기


무조건적인 끌어안음, 그리고 역시 무조건적인 함께 하기. 이는 영웅이라면 할 수 없고, 무명의 개인에게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티캐스트



영화는 다름 아닌 인간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치열한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혹자가 보기에는 가장 쓸데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종교'가 그것인데, 종교라고 하는 숭고한 존재가 내뿜는 잔혹한 파멸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안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빨려들어가 허무하게 존재를 말살당한다. 나왈은 사랑과 약속에의 '약속'으로 종교마저 헤쳐나간다. 자신이 자신일 수 있게 하는 집안과 가문과 종족과 나라의 기반인 종교를 저멀리 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나마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그녀는 누군가에게는 입에도 올리기 싫은 비겁자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치를 떠는 가해자가 되며, 누군가에게는 가장 잔혹한 짓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가 된다. 그렇게 될 걸 모를리 없지만, 이 역사와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일개 개인으로서 '살아남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모든 걸 내려놓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얻는 생존. 그리고 앞으로 얻게 될 날을 손꼽게 될 사랑. 


그녀가 궁극적인 얻고자 했던 건 무얼까.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건 무얼까. 나왈이 끝의 끝까지 손에 쥔 채 놓지 않았던 생존과 사랑과 약속으로 얻고자 했던 게 도대체 무엇일까. 포용, 조화, 함께 하기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가 받아들였는데 어느 누가 받아들이지 않을 쏘냐. 그녀가 어울리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엇나가려 하겠는가. 그녀가 함께 하길 바라는데 어느 누가 등을 돌리겠는가 말이다. 


결국 영화는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종교 대립과 전쟁을 비판하는 방법론으로, 한 여인의 파란만장하고 기가 막히고 잔혹하기 그지 없는 인생사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종교와 자신 자체를 저버리면서까지 지켜낸 것을 빗대어, 종교 대립과 전쟁도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일개 연약한 인간이 이토록 위대할 수 있구나를 말하며, 그런 인간도 행할 수 있는 포용과 조화와 함께 하기를 한 집단, 한 종족, 한 나라가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영화 중 하나다. 영화 따위가 이런 깨달음을 주고 이런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는 걸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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