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그 여름>


소설 <그 여름> 표지 ⓒ아시아



'동성애' 이슈는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지만, 지난 4월 25일 4차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의 질문에 대한 문재인 후보의 확고한 대답에 대선 주요 이슈를 넘어 사회 전체 이슈가 되었다. 동성애를 좋아하지 않고, 동성혼 합법화에 반대하지만, 동성애 차별은 반대한다는 대답. 


감히 말하지만, 위 세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어찌 동성애를,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좋아하거나 하지 않거나 반대하거나 반대하지 않거나 하는 범주 내에서만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성애 차별 또한 동성애를 특별 취급한 말이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어떤 차별에도 반대한다는 대답이 맞지 않은가, 싶다. 동성애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그동안 수많은 동성애 코드 콘텐츠를 봐왔다. 특히 영화와 소설로.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부분 동성애 반대나 혐오를 반대하는 뉘앙스였다. 이제는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 동성애가 이슈화되지 않는, 동성애를 그저 사랑으로 대하는 그런 콘텐츠를 봤으면 했다.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작년에 첫 책을 낸, 데뷔 4년차 신인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 소설 <그 여름>. 


소설은 두 주인공 김이경, 이수이의 신(新)고전적 서사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다. 이들은 분명 남자와 여자가 아닌 여자와 여자이지만, 우린 어느새 이들이 그런 관계라는 걸 잊고 만다. 그리곤 그저 이들의 사랑을, 청춘을, 서사를 따라갈 뿐이다. 그 기점은 이들의 사랑이 확고해지는 시점이다. 


"사랑을 하면서 이경은 많은 일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수이의 단단한 사랑을 받고 나니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람들의 시선과 자신에 대한 판단이 예전만큼 겁나지 않았다." (본문 28, 30쪽)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경과 수이는 열여덟 여름에 우연한 사고로 처음 만난다. 수이가 찬 공에 이경의 얼굴이 맞아 안경테가 부러지고 코피까지 났고, 그들은 함께 양호실과 안경점에 갔다.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이경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던 반면 수이는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둘은 서로 강렬한 끌림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그저 어지러운 기분이었고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 뿐이었다. 그리고 계속 시선이 갔고 몸이 반응했다. 


스무 살이 되며 둘은 서울로 갔다. 이경은 서울 중심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고 수이는 서울 외곽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자동차 정비를 배우기 시작했다. 변함 없을 것 같은 그들의 단단한 사랑은 이경의 예감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언젠가 수이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연한' 예감. 그 기저에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수이에 대한 이경의 깨달음이 있었다. 


수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이경에게 은지가 다가온다. 아니, 이경이 은지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이경이 생전처음 사랑을 해본 이는 다름 아닌 수이, 하지만 생전처음 강렬한 끌림을 경험한 당사자는 은지다. 이경과 수이의 사랑이 당연하듯 다가왔듯이, 이경과 은지의 끌림도 당연하게 다가온다. 이들의 삼각관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소설이 도달한 곳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이다. 다만 소설에서 남자를 찾아볼 수 없을 뿐이다. 여자와 여자의 사랑. 학창시절 축구선수로 활동했고 성인이 되어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는 수이가 남자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쨌든 그녀도 사랑의 당사자일 뿐이다. 


갈 길 먼 인식의 변화, 이 소설로 시작


단편에 메시지가 있기는 쉬운 반면, 서사와 분위기가 존재하긴 힘들다. 구현해 내기 힘들다는 걸 알기에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그 여름>은 서른넷의 이경이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옛날의 '그' 여름을 시작으로 십삼 년 전까지의 일을 회고하는 후일담 문학의 형식을 띄기에 서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서사 덕분에 이들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다. 집중하다 보면 이들의 '특별한 동성애'적 사랑이 '평범한' 사랑으로 치환되는 걸 발견한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사랑과 평범한 사랑의 만남이 있다. 이경이 느끼는 사랑, 거기엔 누구나의 사랑도 있고 이경 만의 사랑도 있다. 


"수이를 만나기 전,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는지 이경은 기억했다.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무리를 이뤄 다니는 아이들과 좀체 어울릴 수 없었던 기억을. 아무리 아이들을 따라 하려고, 비슷해지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되지 않았고,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애써 바꿔보려 했지만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바뀌지 않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본문 106쪽)


급기야 '내'가 겪었던 사랑과 다를 바 없다는 것까지 느낄 수 있다. 싸우고 화해하고, 환희를 느끼고 아프고, 만나고 헤어지고... 나를 포함한, 이경과 수이와 은지를 포함한, 누구나의 사랑 이야기다. 이 소설이 동성애적 요소로 동성애가 아닌 '애(愛)'를 말한 건 탁월한 선택이고, 나아가 그 선택을 문학적 실력으로 잘 살려나갔다는 점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신인다운 패기가 아닌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이 번뜩였다. 


그럼에도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나라의 인식은, 시대의 인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 논쟁 거리가 될 이유가 될 수 없는 게 동성애인데, 첨예한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는 게 한심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앞으로도 논쟁 거리가 될 수 없는 동성애적 요소가 점철된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계속되길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우선 인식이 변화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여름>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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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로 뽑을 만한 <해피 투게더>. 왕가위 감독의 대표작이다. ⓒ(주)서우영화사



벌써 20년이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 하나로 뽑을 만한 <해피 투게더>가 나온지 말이다. 1988년 <열혈남아>로 연출 데뷔를 한 왕가위 감독의 6번째 작품이자 <아비정전>으로 시작된 '왕가위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준 작품이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갔다. 왕가위 감독의 수많은 명작 중에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해피 투게더>를 골라야 할 것이다. 


<해피 투게더>를 말함에 있어 또 한 명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우리 곁을 떠난 장국영이다. 1978년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1985년 <영웅본색>으로 스타덤에 오르고 1990년 <아비정전>, 1991년 <종횡사해>로 최고의 배우로 거듭났다. 1993년에는 <패왕별희>로 세계적인 스타로 올라섰다. 앞서 <아비정전>과 <동사서독> <해피 투게더>로 왕가위 감독과 함께 했다. 


<해피 투게더>의 또 다른 주인공을 맡은 양조위가 왕가위 감독의 자타공인 페르소나(왕가위와 양조위는 자그마치 7편을 함께 했다)라지만, 장국영이야말로 왕가위의 진정한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1983년에 데뷔한 양조위는 홍콩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다. <해피 투게더>가 크게 일조한 건 당연하다. <와호장룡> <적벽대전> <일대종사> 등으로 친숙한 장첸의 앳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영화팬들에겐 잔치나 마찬가지다. 


간결한 스토리, 비로소 발휘되는 감독의 능력


누구나 예측할 만한 간결하고 단편적인 스토리다. 왕가위 감독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기 위해서 일까? ⓒ(주)서우영화사



야휘(양조위 분)와 보영(장국영 분)은 홍콩을 떠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아간다. 내성적이지만 책임감 강하게 삶을 영위하려는 야휘에 반해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이기만 한 보영, 헤어졌다가 만나기 일쑤이다. 떠나간 사람은 당연히 보영일 테니, 돌아오는 사람도 보영일 테다. 그렇지만 야휘는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괘씸하지 않은가. 어느 날, 양손에 피를 흘리며 찾아온 보영을 야휘는 받아들여 극진히 보살핀다. 보영도 평소완 달리 얌전히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손이 낳은 보영은 다시 예전의 보영으로 돌아간다. 바깥으로 싸돌며 야휘를 가슴 아프게 한다. 어김없이 파국을 치닫는 모양새다. 한편, 힘들어 하는 야휘 곁에 식당에서 일하는 동료 창(장첸 분)이 살며시 다가온다. 그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며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곧 떠나야 할 시간이 임박한다. 각자의 길로 말이다. 야휘와 보영은 함께 가고 싶어 했던 이구아수폭포를 함께 갈 수 있을까.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힘들어하고 위로받는 절대보편의 간결한 스토리다.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감독의 능력이 발휘된다. 왕가위가 말하고자 하는 것들. 간결한 스토리에 투영되는 당시 사회 상황,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동성애, 그리고 제목과 연결되는 영화의 주제까지. 


이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황홀하다. 만사를 제쳐두고 그저 왕가위가 구축해놓은 미장센만 감상해도 충분할 텐데, 그 수면 아래에서 편안하게 헤엄치는 것들을 들여다보는 행운을 만끽하다니. 정녕 '해피 투게더'다. 


동성애, 시대상, 그리고 '해피 투게더'


간결한 스토리 안에 동성애, 시대상, 관계의 메시지까지 횡행한다. 하나하나 잘 짚고 지나가자. ⓒ(주)서우영화사



가장 먼저 동성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히는 남자들의 사랑. 영화는 시종일관 세 남자 야휘, 보영, 창만 비춘다. 여자는 단 한 명이 단 한 컷에 등장할 뿐이다. 시작과 동시에 러브신과 섹스신에 돌입하는 야휘와 보영의 모습에 충격을 금치 못하는 것도 잠시, 곧 그 기시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대신 흔하디 흔한 사랑 싸움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의 동성애는 인류보편의 연애인 것이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를 많이도 봐왔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 받아 본다. 아마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런 느낌을 받을 영화는 없지 않을까. 심지어 '호모 포비아'도 이 영화를 보고 기시감을 크게 느끼지 않을 거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그건 다분히 배우들의 연기에 기댄 바가 크겠다. 특히 왕가위 감독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설득시킨 양조위는 실제 동성애자인 장국영보다 더 동성애자처럼 보였다. 


더불어 당시 시대상을 엿봐야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홍콩 영화의 상당수가 1997년 '홍콩 반환'을 주제에 덧입힌다. 1985년작 <영웅본색>도 그러하니, 예견된 큰 사건에 홍콩 사람들의 심정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1997년에 제작된 <해피 투게더>는 더 말해 무엇하랴. 야휘와 보영의 끝이 헤어짐일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바, '홍콩'이라는 단일 개체의 사라짐에 대한 불안이 투영된 것일 테다. 반면 창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따듯할 것 같다고 예상되는 바, 중국으로 합병되는 불안 속 희망이 엿보인다. 


'해피 투게더'라는 단어가 주는 행복과 더불어 원제인 '춘광사설’(春光乍洩)이 뜻하는 ‘구름 사이로 비추는 봄 햇살'이 주는 희망까지, 중국과 홍콩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 시기에 멀리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내는 왕가위 감독의 메시지이다. 이는 사람과 사람, 도시와 자연, 국가와 국가까지 어이진다. 우리는 이 작고 짧은 영화에서 대서사와 맞먹는 깊고 넓은 관계의 파노라마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많다!


정녕 <해피 투게더>는 영화팬들의 잔치다. 감독, 배우, 영상, 장면, 메시지, 파격, 해석 등 즐길 게 너무나도 많다. ⓒ(주)서우영화사



왕가위 감독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다름 아닌 '미장센'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돋보적인 비쥬얼리스트다. 색감과 카메라 구도만으로 장면이 보여주려는 이면까지 설명한다. 이 영화에서도 단연 압권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쉽게 인지할 수 있는 건 색의 대비, 흑백과 컬러다. 의도적으로 야휘와 보영의 관계를 색으로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이가 좋을 때는 컬러로 좋지 않을 때는 흑백으로 처리하며 영화적 기법 사용에 있어 최상의 것을 보여준다. 덕분에 더욱 풍성하게 다각도로 영화를 볼 수 있다. 


독특한 카메라 구도와 슬로우 모션 또는 스톱 모션도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데 한몫 한다. 정확히는 카메라 구도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라고 해야 하겠다. 구도만 바꾼다고 해결되진 않기 때문이다. 색의 대비가 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라면, 카메라 구도와 연기 앙상블은 입장 변화를 보여준다 하겠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보이는 걸로 상태를 설명하기란 정말 힘들 텐데 말이다.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택시 장면 두 컷이다. 영화 초반, 헤어지고 난 후 보영을 본 야휘, 반면 보영은 야휘를 못 본 듯하다. 택시를 타고 떠나버리는 보영, 그때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슬쩍 뒤를 돌아 야휘를 본다. 그때 보영은 야휘가 필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반면, 보영이 두 손을 다쳐 야휘를 찾아가고 함께 살아갈 때다. 택시릍 타는 둘, 보영은 살며시 야휘에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이때 보영은 야휘가 필요했던 듯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있다. 당대 최고의 감독 위치에 올라선 왕가위 감독에, 당대 최고의 스타 '장국영'과 '양조위'까지. 거기에 아르헨티나 현지 로케와 동성애 소재, 홍콩 반환 정서. 잔치도 이런 잔치가 있을까 싶다. 반면 스토리 자체는 솔직히 볼 게 없으니, 자연스레 속담이 생각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해피 투게더>로 황홀경을 맛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장면, 아니 한 프레임도 놓치고 싶지 않다. 오글거리기 짝이 없는 '한 땀 한 땀 장인이 만들었다'는 어구를 다름아닌 이 영화에 쓰고 싶다. 앞뒤 장면과의 연계를 무시하면서도 오직 최고의 한 장면을 추구하는 '왕가위 스타일'에 딱 들어맞지 않는가. 그렇지만 왕가위 스타일에 함몰되지 않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왕가위 스타일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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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브로크백 마운틴>


'이 세상에 둘밖에 없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은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으면 좋았겠다'로 바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과 길고긴 여운은 그 지점의 연장선이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포스터. ⓒCJ엔터테인먼트



약관 20세의 두 청년 잭(제이크 질렌할 분)과 에니스(히스 레져 분), 함께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떼를 몬다. 광활한 대지에 두 사람뿐이라 어색하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친해져 브로맨스를 선보이는 두 사람. 어느 날 잭은 밖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자는 에니스에게 텐트에 들어 오라고 한다. 새벽녘 그들은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에니스, 받아들이는 잭.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들의 친밀감은 전에 없이 높아져 있었다. 갑작스레 철수하게 되는 그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혼란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들은 헤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


에니스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가끔 만나서 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광활한 대자연에 던져진 두 청년의 혼란에서 시작한다. '이 세상에 둘밖에 없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날 무렵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었으면 좋았겠다'로 바뀐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위대함은 그 지점에서 발현되고, 이 영화의 길고긴 여운은 그 지점의 연장선이다. 


그렇다. 이 영화의 주요 소재와 주제는 남성 간의 로맨스, 즉 동성애다. 그런데 그들은 격정적인 로맨스를 한 차례 겪은 후 이성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기른다. 그들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 겪어보는 사랑의 감정이 남성을 향했을 뿐이니, 젊은 날의 경험이라고 치부하며 넘어갔을 수 있겠다. 기나긴 인생에서 스쳐지나간 금지된 사랑을 그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그들의 사랑은 헤어진 지 4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각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현실에 안주하며 살고 있은 지도 한참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4년 만에 만난 그들은 그 자리에서 격한 키스를 나누고 가족에겐 거짓말을 한 후엔 사랑도 나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을 재확인 했으니만큼 이제라도 같이 살며 모든 걸 초월한 진정한 사랑의 앞날을 도모할 것인가? 에니스는 말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고. 가끔 만나서 몰래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어느 사랑보다 절절한 사랑, 잔잔하게


그들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엔 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보니 아내와 가족들에게선 멀리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주 배경은 1960~70년도이다. 더구나 그들은 서부 사나이들이고. 잭은 가장 사나이다운 직업인 로데오 카우보이가 되고자 한다. 에니스는 어릴 때 아버지가 동성애자를 죽여서 버린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태생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들은 서로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성과 결혼을 한 거고. 그 와중에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걸 숨기지 않은 것만해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들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간다. 겉으로 보기엔 남과 다르지 않다. 다만,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보니 아내와 가족들에게선 멀리 있을 수밖에 없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욕을 먹더라도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삶은 평탄치 않았고 가시밭길이었다. 


영화는 어느 사랑보다 절절한 그들의 사랑을 얼핏 전혀 절절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담담해 지루하다 싶을 만큼 잔잔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니까 가능한 거지, 영화잖아.'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로맨틱하지 못했으니까, 로맨틱한 연출은 그들의 사랑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 


상황에 맞는 OST가 거의 깔리지 않는 게 한 몫 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시의적절한 OST가 큰 몫을 차지하는데, 이 영화는 오히려 그러지 않았기에 분위기를 살릴 수 있었다. 그들의 감정선을 오롯이 따라가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고, 보는 이 또한 그러했다. 그 덕분에 치기 어리고 혼란스러운 첫 경험에서 시작해 20년 간 지속되는 사랑의 절절함이 폭발하는 감정의 선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 터진 울음은 영화가 끝나고서도 한참을 간다. 시종일관 터져 나오는 울음으로 끝나는 여타 영화에서는 느끼기 힘든 바다. 


그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울부짖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한 장면. ⓒCJ엔터테인먼트



금지된 사랑을 하는 이들은 누구나 '우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잭과 에니스는 이미 그런 곳에서 주기적으로 만난다. 다름 아닌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그들의 사랑이 시작된 그곳, 그들에겐 이상향과도 같은 그곳, 그들의 도피처이자 그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곳이다. 


참으로 슬프고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없이 오직 그들만 있어 자유롭지만 극도로 폐쇄적이고 고독한 곳이 아닌가. 그들은 도대체 왜 그곳에서만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 잘못한 게 있어서? 그들이 죄를 지어서? 반면에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곳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인가. 


영화는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하고 울부짖지 않는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사랑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라는 것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어떤 게 필요할까. 그저 사랑, 사랑, 사랑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그거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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