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고양이와 할아버지>


10살 고양이 타마와 75세 할아버지 다이키치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일일. 더이상 주인과 애완동물이 아니다. 반려자이자 동반자이다. <고양이와 할아버지> 표지. ⓒ미우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모든 것들이 하향세에 있다. 뿐만이랴. 제로에 수렴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그 직접적인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그러한데 취업, 연애, 결혼, 집, 출산 등이 그렇다. 반대급부로 1인(2인) 가구의 증가는 엄청나다.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도 1인 가구의 증가를 부추긴다. 


그들에게 반려동물은 특별한가보다. 또 다른 가족이라 할 만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친밀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텐데, 예전처럼 단순히 애완의 개념이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외로움과 고독감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의미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콤비의 일일


10살 고양이 타마와 75세 할아버지 다이키치의 일일을 선사하는 만화 <고양이와 할아버지>, 그 둘은 더 이상 주인과 애완동물 사이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반려자이자 동반자이다. 1000만 명에 육박하는 반려동물 인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원하는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 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콤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거다. 


다이키치 할아버지는 2년 전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10년 전 집 마루 아래에서 주운 고양이 타마와 함께 살아간다. 평소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다이키치, 함께 살자는 아들의 부탁을 가차 없이 거절하는 꼬장꼬장한 성격의 그는 귀엽고 시크한한 타마한테는 꼼짝 못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할아버지를 잘 부탁한다'는 비밀약속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는 타마, 심심하고 불쌍한 다이키치를 위해 자주 놀아준다. 


만화는 고양이만의 특징을 아주 잘 잡아내 웃음을 선사한다. 주인을 하인이라고도 생각하고, 주인이 아니라 자기가 놀아주고 챙겨주는 거라고 생각하며, 자기가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물의 본능을 억제하지는 못하는 바, 고양이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다. 


가만히 있어도 귀엽기 짝이 없는 고양이들의 매력이 바로 거기에 있는데, 만화가 그 점을 아주 잘 포착한다. 굳이 과하게 표현할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아이구, 귀엽다. 힐링? 고양이만 보고 있어도 된다. 이 만화의 고양이는 실제 그대로다. 


인간과 동물, 반려자이자 동반자


인간은 결코 반려동물을 대신할 수는 없을 거다. 자연스럽게 반려동물도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말을 할 수도 없고 경제 활동을 할 수도 없고 하다 못해 알아서 밥을 챙겨먹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인간을 대신해 반려동물이 할 수 있는 게 많다. 


<고양이와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일상이 대변한다. 뭐가 다른가 싶다. 타마가 어렸을 땐 부부의 자식과 다름 없었고, 타마가 컸을 땐 혼자가 된 타마의 친구와 다름 없다. 혼자가 된 그에게 타마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래지 않아 할머니를 따라간다고 해도 이상한 게 없다. 고독에 몸부림치며 외로움을 달래지 못할 것 같다. 고양이 한 마리로 완전히 다른 삶이 꾸려지는 것이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여생을 즐기는 그들에게 뜻밖의 일이 닥칠 뻔한다. 언제 무슨 일이 닥쳐도 크게 이상할 것 없는 나이, 다이키치는 언젠가 가슴에 찌를 듯한 통증을 느끼곤 쓰러진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혼자 있게 될 타마이다. 오랫동안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에, 자신이 고독사 하면 타마도 갇혀 있다가 죽게 되지 않을까. 다행히 큰 일은 없었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반려동물이 많은 사랑을 받고 또 반려동물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지는 건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1인 가구의 증가가 있다. 그 이면의 이면에는 강제로 잔잔해지는 경제가 있고. 건드리긴 싫지만 건드릴 수밖에 없게 되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반려동물이 어떻게 해줄 수 없지 않은가. 씁쓸하다. 


귀여움, 따뜻함, 잔잔함의 조화


만화가 다른 콘텐츠보다 유리한 점은 단연 그림에 있다. 그림이 마음에 들면 글이든 캐릭터든 스토리든 무슨 상관이랴. 이 만화는 수체화풍의 그림체가 일품인데, 분위기를 잘 살릴 뿐더러 고양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귀여움을 극대화 했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조차 귀여우니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만약 고양이의 귀여움을 다른 식으로 극대화하려 했다면, 이렇게 고즈넉한 곳에서의 한가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이렇게 따뜻하게 표현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자칫 무의미하고 건조하게 보일 수 있었다. 본래 만화가의 그림체가 그랬을 텐데, 고양이 만화에 최적화된 듯하다. 


거기에 일본 특유의, 일본 콘텐츠만이 제공할 수 있는 잔잔한 일상의 힘이 한 몫 했다. 화려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아도 많은 걸 줄 수 있고 많은 걸 느낄 수 있다. 이 만화에서 그 깊은 내공을 엿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만화를 보는 눈의 확장을 체험할 수 있었다. 참으로 귀중한 체험이다. 조만간 2권으로 다시 찾아온다는데, 어떤 귀여움과 따뜻함으로 힐링을 선사할지 기대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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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화가의 마지막 그림>


<화가의 마지막 그림> 표지 ⓒ서해문집



여섯 살 때 찾아온 척수성 소아마비, 18살 때 당한 끔찍한 교통사고로 평생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살았던 프리다 칼로. 그녀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그림에 '삶이여, 만세'라는 메시지를 남긴다. 오롯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기에 오히려 삶에 집착하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가 쓴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 적혀 있었다 한다. 


화가들 생의 마지막 그림으로 삶을 유추하다


가수는 노래로 말하고, 작가는 글로 말하며, 화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화가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는 어떤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생각해봄직하다. 처음 그린 그림보다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에 그가 더 많이 담겨져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서해문집)은 제목 그대로 누구나 알 만한 유명한 화가들의 생의 마지막 그림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삶을 유추한다. 


책에 소개되는 19명의 화가들, 그 중에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위태롭고 가장 불행했을 듯한 그녀의 삶이, 가장 빛나 보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기에. 그건 아마 그녀의 마지막 그림에 담긴 메시지가 죽음이 아닌 삶을 말했기 때문이다. 다른 18명의 화가들이 남긴 생의 마지막 그림들은 어떨까?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삶이 담겨 있을까, 죽음이 담겨 있을까.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산 화가들


화가 하면 천재가 떠오른다. 천재 하면 고독하지만 화려하고 화창한 삶이었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그리도 하나같이 불행했을까. 책에서 소개하는 19명의 화가들이 물론 수없이 많은 화가들의 삶을 완전히 대변하진 못하지만, 그들은 누가 뭐래도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이었다.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실상 잘 알지 못하는 이중섭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자. 이중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다. 그렇지만 그는 평생 가난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일본인 아내를 두었는데 한국 전쟁이 발발해 남쪽으로 피신을 간다. 결국 아내를 일본으로 돌려 보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잠시 떨어져 있기로 결정하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이후 그들은 잠깐 만났을 뿐 가난 때문에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이중섭은 그 때문에 삶을 망치고 허망하게 죽는다. 역동적인 그림을 그리곤 했던 그의 마지막 그림이 굉장히 조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절박한 그리움, 기다림. 


또 한 명의 유명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오랫동안 우리는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알고 있었다. 이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저자는 전문가의 최근 연구를 바탕으로 그가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리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마지막 그림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일반적으로 고흐의 마지막 그림을 <까마귀가 나는 밀밭>으로 알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무 뿌리> 미완성본이라는 것이다. 그 작품은 다름 아닌 '생명'을 말하고 있는데, 자살을 하려는 사람이 생명의 메시지를 그린다는 게 어딘지 이상하지 않은가. 여러 정황상 동네에 살던 소년 세크레탕에 의한 타살이 유력하다고 한다. 


사랑과 희망이 가난으로 꺾이고 파괴당한 이들이다. 비단 가난 뿐이겠는가. '삶이 곧 고통'이라는, 삶의 변하지 않는 한 면이자 진리를 몸소 보여준 게 아닌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어쩌지 못하는 바, 그저 안타까워하며 기릴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남았으니 괜찮다고 해야 할까.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으니,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살다간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괜찮다고 해야 할까. 그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을지라도.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삶과 죽음의 화가들


이처럼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만 있는 건 아닐 거다. 그러면 어느 누가 살고 싶을까. 어느 누가 예술을 하고 싶어 할까. 어느 누가 화가가 되고 싶어 할까. 20세기 미국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는 주로 현대인의 고독을 화폭에 담았지만 그 자신은 헌신적인 아내 덕분에 외롭지 않게 살았다. 그는 아내 조세핀을 만나 그녀의 도움 덕분에 무명화가에서 단숨에 유명화가가 되었다. 조세핀은 호퍼의 반려자이자 모델이자 친구이자 조력자이자 멘토였다. 85세 천수를 누리고 조세핀이 보는 앞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호퍼의 사망 10개월 후 조세핀 또한 세상을 떠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삶이 있을까. 그의 마지막 그림 <두 코미디언>의 모델이 호퍼 자신과 조세핀이었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그는 정확한 인체 비례와 대칭 구도로 조각된 작품들로 균형과 조화를 완벽하게 규현해냈다. 그는 어렸을 때 함께 공부하던 동료와 싸웠는데, 그때 코가 주저 앉는 큰 부상을 당했다. 그 흔적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외모 콤플렉스를 야기시켰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미(美)'에 집착한다. 그가 '미적인 표현을 신의 섭리로 보는'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에 감화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했는데, 당시 동성애는 당연히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행위였다. 남색은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아마 평생을 두고 고민했을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향한 시선과 독신할 그리스도교적 믿음 사이에서 말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 그림을 통해 독실한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남긴다. 20대 때 조각한 이상미의 극치 <피에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기시키는 <론다니니 피에타>를 통해서. 


그래도 이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선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삶과 살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는 살아생전 금지된 사랑을 당당히 밝히고 살았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 그 또한 호퍼와 마찬가지로 90세의 천수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천수'라는 단어는커녕 화가로서의 능력이 아닌 인간으로서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태반인 19인 중에, 그래도 삶다운 삶을 살다간 이들이다.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마지막 그림으로 보상받다


우린 죽음보다 삶에 관심이 많고, 그가 천재이자 예술가라면 죽음이나 삶보다 작품에 관심이 많다. 반대인 경우엔, 그의 죽음과 삶이 영화보다 극적일 것이다. 책에 소개된 19인들은 어떠한가. 아마 이 모든 걸 충족시켜 줄 거다. 그의 작품도, 삶도, 죽음도 모두 극적이다. 그런 이들의 마지막 작품이라면 더 말할 게 무엇이랴. 그를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테다. 


나의 마지막은 어떨지 상상해본다.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마지막일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맞는 포근한 마지막일까, 나조차 모르는 새 급작스럽게 맞는 마지막일까, 너무나도 억울하게 맞는 고통스러운 마지막일까. 어렸을 땐 모든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두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최상의 죽음이 아닌가. 


죽음의 형태를 내가 선택할 수 없다면, 이들처럼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것을. 그것으로 나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도록. 이 또한 하늘이 내릴 수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들 19인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 또한 마지막 작품으로 보상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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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모던 아트 쿡북>



<모던 아트 쿡북> 표지 ⓒ디자인하우스



경제가 안 좋아지면 제일 먼저 문화 활동을 줄인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독서 활동. 같은 문화 활동인 영화나 TV가 시간 죽이기를 겸한 스트레스 해소로 오히려 수요가 느는 것과는 다르게, 책은 스트레스를 가중 시킨 다는 것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데 무슨 책을 보느냐... 그렇다면 먹고살기 힘들 때조차도 줄이지 않는 게 있을까?


있다. 먹고살기 힘들 때도 '먹는' 건 줄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니까. 먹지 않으면 죽고 말 테니까. 그래서 인가? 경제 불황기에는 먹는 사업이 (상대적) 호황이라고 한다. 이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해보자면 요즘은 확실한 불황인가 보다. 


수많은 앱 중에서도 음식 관련 앱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CF를 통해 알 수 있다. 배우 류승룡을 앞세운 <배달의 민족>, 배우 차승원을 앞세운 <요기요> 등. 한편 요리 프로그램이 육아 프로그램을 이어 TV를 장악하고 있다. <삼시세끼>를 시작으로 <냉장고를 부탁해>, <수요 미식회>, <오늘 뭐 먹지> 등, 어림 잡아도 10개는 넘을 것 같다. 


음식을 먹되, 그림 또는 글과 함께 하자


그럼 한 발 더 나아가 죽지 못해 먹을 거라면 이왕이면 맛있는 걸 먹어야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맛있게 먹는 법은 사람마다 다를 진데, <모던 아트 쿡북>(디자인하우스)이라는 책이 상당히 고상한 방법을 추천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되, 그림이나 글과 함께 하라는 것이다. 


단순히 먹을 것을 그린 그림, 음식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혹은 재료나 식기를 그린 그림도. 글은 더 다양하다. 물론 음식과 관련된 글이겠지만, 시도 있고, 레시피도 있고, 산문도 있고, 소설도 있고, 노래도 있다. 이렇게 그림 또는 글과 함께하는 요리는 특별할까? 더욱 맛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특별한 질감과 풍미를 더해 주는 것 같다고 한다. 음식에 관한 글을 읽고 그림을 보면 음식에 대해 즐거움을 얻을 테고, 자연스레 음식에 완벽함을 더해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번 해보았다. 음식에 대한 기가 막힌 묘사 글을 읽거나, 완벽하게 짜인 레시피를 접하고,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어 본다. 음식을 만들기도 전에 묘사 글에서 이미 군침이 돌기 시작한다. 어떻게 만드는 지 레시피를 보고 있을 때는, 어서 빨리 요리를 해서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대할 때의 행복함이란...




<모던 아트 쿡북> 중에서 ⓒ디자인하우스



반면 생각과는 다르게 그림을 볼 때는 별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거니와 냄새도 맡을 수 없는 그림에서는 별 느낌이 없다. 오히려 글에서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그림 또는 사진의 연사체라고 할 수 있는 TV를 본다.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있으니 본능적으로 참기가 힘들다. 거기에 얼마든지 글을 얹힐 수 있다. 당장 부엌으로 달려가 그들이 하는 요리를 따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 또는 글과 함께 하는 음식과 요리는 '특별하다'


이를 테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바는 정확하다. 그림 또는 글과 함께하는 요리는 특별하며 더욱 맛있게 해준다. 그걸 함께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건 그렇고 이 책에는 다른 게 있다. 책에서 소개하는 그림과 글은 누가 그리고 누가 썼겠는가? 당연히 유명한 이들일 테고, 그들은 여지 없이 음식과 요리를 좋아했다. 이 책을 보면 누가 어떤 음식과 요리를 좋아했고 잘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에 나온 레시피 하나만 간단히 소개해본다. 레시피를 쓴 이도, 레시피의 주인공도 너무 유명하다. 피카소의 상그리아다. 냄비에 와인 1병을 붓고 막대 계피 1개를 넣은 다음 센 불에서 가열한다. 와인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바로 오렌지 3개분의 껍질과 정향 3개를 넣고 다시 한 번 끓어오르게 둔다. 여기에 아카시아 꿀 4큰술과 코냑 2큰술, 끓는 물 반 잔 정도를 넣고, 아주 뜨거운 상태에서 두꺼운 와인 잔에 담아 낸다. 


아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전형적인 상그리아이지만, 피카소의 레시피라고 하니 왠지 특별해 보인다. 그림과 글이 함께 하는 요리가 특별한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유명한 이의 그림과 글이라는 점도 있지만, 누군가와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누군가도 나와 같은 요리를 하는 구나, 나와 같은 음식을 먹는구나. 



<모던 아트 쿡북> 중에서 ⓒ디자인하우스



참으로 사랑스러운 음식이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한편 저자는 음식에 대한 찬사를 아낌없이 하는데, 소개해본다. 우리가 흔히 즐기는 그런 음식에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이야. 저자는 달걀에게 다음과 같은 찬사를 건넨다. 심히 동의하는 바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문제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둘 다 하루 중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에 구할 수 있고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할 뿐이다." (본문 중에서)


그런가 하면 버섯에 대해서는 첼리스트인 필립스의 회고록 <쇼베네 과수원에서 딴 체리>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버섯이 없으면 우리는 척박한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생물이 만들어 내는 온갖 쓰레기를 분해하는 것이 바로 버섯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버섯은 땅속에서 뿐 아니라 땅 밖으로 나와서도 모든 종류의 식물에 영양을 공급하고 키운다는 점이다." (본문 중에서)


참으로 사랑스러운 음식이고 사랑스러운 책이다. 저자의 사랑스러운 글과 유명 화가들의 그리 사랑스럽지는 않은 그림, 그리고 유명 작가들의 사랑스러운 글이 한데 어울린다. 결론적으로는 여기에서 사랑이 배어 나온 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이기도 한데, 독자 입장에서 자연스레 느끼게 되는 바이기도 하다. 


이제 음식을 접하기 전에, 요리를 하기 전에 한 번쯤 그림(이건 쉽지 않으니 TV 요리 프로그램으로 대체!)이나 글로 음식의 '사랑스러움'을 느껴보시라 권하고 싶다. 죽지 못해 먹고살아야 하니 이왕이면 맛있는 걸로 맛있게 먹어보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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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팝, 경제를 노래하다>


<팝, 경제를 노래하다> 표지 ⓒ아트북스

예술은 가치는 무엇인가? 먼저 미적 가치가 있다. (위대한) 음악을 들으면, 그림을 보면, 건축물을 감상하면 거기서 느낄 수 있는 미(美)로 황홀함을 느낄 수 있다. 마냥 기분이 좋아지고, 차분해지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다음으로 해석 가치가 있다. 예술 작품을 보고 시대적 배경과 맥락을 들여다보고 숨겨진 메시지를 푸는 것이다. 예술의 해석 가치를 더욱 높이 사는 사람들은 예술의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곤 한다. 어찌 보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도 해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많이 쓰이는 해석은 시대적 배경과 맥락이다. 그 중에서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느끼는 경제, 정치 등이 핵심이 아닐까 한다. 


돈에 대한 찬가를 '비틀스'가 노래했다?


현존 최고의 대중음악 평론가라 할 수 있는 임진모 평론가의 신작 <팝, 경제를 노래하다>(아트북스)는 예술의 해석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팝(노래)로 경제(정치와 사회도 포함)를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또는 반대로 경제를 통해 노래를 해석하는 시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책은 일단 팝이 주(主)가 되고 경제가 부(副)가 되는 양상이다. 겉으로 보나 안에서 보나 노래가 원문과 함께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노래의 가사만 읽어봐도 당시의 시대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 그만큼 직설적인 노래 가사가 많다. 예를 하나 들어 본다. 


사랑이 나를 설레게 하지만 / 그렇다고 내 청구서를 내주는 것은 아니야 / 내게 돈을 주라구 / 

돈이 내가 원하는 거라구 / 돈이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거야 /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 

물론 돈이 모든 걸 다 주지는 않아, 그건 사실이야 / 하지만 돈이 없으면 아예 쓸 수도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돈'이라는 제목의 이 직설적인 노래는 누구의 노래일까? 영국 리버풀 출신의 찢어지게 가난한 노동계급의 후손들이자, 역사상 최고의 슈퍼스타(모든 방면을 막론하고)인 '비틀스'의 노래이다.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초반 전후 영국의 오랫동안 계속되는 차가운 경제 현실 속에서 오로지 성공을 위해 내달렸다. 당시 정반대로 호황의 절정에 있었던 미국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경하면서 말이다. 


임진모 평론가의 대중음악에 대한 해박한 지식, 특유의 과도함에서 한 발자국만 물러서 있는 화려한 수식어들, 그리고 손에 잡힐 듯 읽히는 경제까지. 특별하게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구성이고 진행이다.  평소 그의 평론에서 보았던 남다른 시각과 지식이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하다. 


음악과 경제의 균형 잡힌 이야기


책은 그러나 읽다 보면 경제가 주(主)가 된다. '팝을'이 아니라 '팝으로'이기 때문이다. '팝으로' 또는 '팝을 통해서' 경제를 읽는 기획이기 때문에, 사실 경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온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더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식의 기획은 많은 단행본에서 접할 수 있다. 특히 철학을 주로 영화, 그림 등을 접목 시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진다. 그런 책들을 보면 단연 철학 이론들이 눈에 띈다. 즉, 영화나 그림 등은 어려운 철학 이론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얼마 전에도 그런 책을 읽다가 얼마 못 읽고 접고 말았다. 시작과 끝은 영화 얘기로 하면서 하고자 하는 얘기는 전부 철학으로 채워 놓지 뭔가. 


반면 이 책 <팝, 경제를 노래하다>(아트북스)는 균형을 잘 잡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행히(?) 저자가 경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경제 관련된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지 않고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쉽게 풀어 쓰려는 듯한 뉘앙스가 풍긴다. 한편 음악 관련해서는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쉽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고 또 쉽게 풀어 쓸 능력도 있다. 


오죽했으면 예술로 까지 경제를 말할까?


하지만 읽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아쉬움, 그리고 안타까움이 있다. 아쉬움은 반복되는 경제의 순환 때문이다. 1930년대 대공황부터 시작해 2008년 세계금융위기까지 17개의 파트로 나뉘는 이 책은, 거의 완벽한 순환을 보인다. 무슨 말인고 하면, 경제의 폭락과 폭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미국과 영국이 번갈아 가면서 말이다. 


대공황의 폭락, 아메리칸 드림의 폭등, 같은 시기 영국의 폭락, 1970년대(베트남 전쟁, 오일 쇼크 등)의 폭락, 레이건과 대처 시대의 폭등,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폭락, 그리고 다시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 시대의 폭등, 이후도 계속되는 폭락과 폭등, 다시 폭락... 이 끝없이 이어지는 폭락과 폭등의 순환은 자연스레 시대를 해석하는 음악들의 지루함으로 이어진다. 즉, 음악은 다르지만 옛날에 했던 말을 다시금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안타까움은 예술로 까지 경제를 말해야 할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비롯된다. 현재 우리의 상황이 그야말로 '다시는 겪지 못할 것 같은 호황'을 뒤로 한 채 '다시는 겪기 싫은 불황'을 몸소 겪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다 '경제'에 목을 메고 '경제'가 중요해진 시기라는 것이다. 이런 시기에는 어떤 무엇을 가져다 놓든 전부 경제와 연관 시키게 되는 것일까. 책을 덮고 나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진하게 묻어 나오는 안타까움이 있다. 저자의 마지막 말이 그래서 더욱 쓸쓸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버팀목은 분명 희망과 꿈일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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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미술로 뒤집는 세계사>


<미술로 뒤집는 세계사> ⓒ르네상스

과거를 들여다보는 방법은 여러가지다. 그 중에서 제일 쉽고 정확한 건 '기록'이다. 후대를 위해 현재를 기록으로 남긴 이가 과연 얼마나 있겠냐마는, 덕분에 그땐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지 알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많은 사실을 일깨워주는 기록을 남긴 이는 아마도 동시대를 위해서 그러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함으로 자신을 반추해보는 계기로 삼았을 게다. 


기록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비단 글만 있는 게 아니다. 따져보니, 지금은 예술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것들이다. 문서를 비롯해, 미술품, 건축물, 조형물 등이 언뜻 생각난다. 큰 범위 안에서 보니 '미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최고의 수단이 아닌가? 


<미술로 뒤집는 세계사>(르네상스)가 세계사를 설명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굳이 미술 작품을 수단으로 한 게 이해 가는 바다. 이 책은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을 중심으로, 딱딱하거나 지루할 수 있는 세계 역사를 친구로 삼기 위해 또 더 생생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사건들과 연관된 미술 작품을 안내자로 삼았다. 아무래도 한 눈에 들어오는 미술품이 더 친근하다. 


목차를 보아하니 구석기와 신석기부터 68 혁명까지 그야말로 굵직한 사건들만 다루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저자가 머리말에서 말한 '10여 년 이상 교육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주입 받아온 내용'이 이 책에서도 계속되는구나 싶다. 분명 저자는 이 통념에 도전하며 다른 방향에서 다가간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읽어보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석기 사람들의 원시공동체에서 지금의 우리 삶을 돌아보고, 로마제국의 몰락에서 경제적 불균형 문제를 도출 시킨다. 또한 진시황의 중국 통일을 통해, 그 과정에서 평화가 아닌 백성의 고통을 보기도 한다. 21세기 최고의 화두인 '이슬람'은 어떤가? 저자는 미술품을 통해 이슬람에 덧씌워진 '폭력'과 '테러'의 이미지를 버리고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이 밖에도 저자는 나폴레옹을 통해 '제국주의'를, 사회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68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를 재고찰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저자의 세계사 읊기와 더불어 기존의 통념을 부수기 위한 노력이 눈부시다. 여기에 어김없이 그 역사적 사건들을 포착한 미술품들이 적재적소에 자리 잡고 있다. 


반면 명백한 문제점들이 눈에 띈다. 어떤 주장을 하고 논리를 펼치든지 미술품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한계가 분명하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더 많았을 테고 논리와 주장의 범위가 더 넓었을 텐데 말이다. 독자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했기에 감수해야 했을 부분이다. 내용적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한편 이 책에 나오는 120여 미술 작품 중 대다수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구석기와 신석기, 그리고 20세기 사건을 말할 때는 제외하고 말이다. 특히 4장 '로마제국은 왜 멸망했는가'에서는 10장의 작품이 나오는데, 그 중 7개의 작품이 1800년대 그려진 그림이다. 


다른 장에서도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유럽을 설명하는 그림들이 많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그런 그림들을 갖고 역사를 설명하는 것에 큰 믿음이 가지 않는다. 아무리 투철한 고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그림으로 옮겼다고 해도, 그림이다 보니 최소한 어느 정도의 왜곡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물들의 경우는 실제보다 잘 생기고 예쁘고 키도 크게 그리는 등,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의(비교적 현대의) 눈높이에 맞춰 그려졌을 것이 아닌가? 그런 그림들을 통해 역사를, 그것도 디테일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조금은 실망의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이 책의 진짜 콘셉트는 앞서 말한, 그리고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통념을 뒤집는 데 있다. 미술 작품은 그저 통념을 뒤집는 데 수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수단 자체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가? 비록 책 전체는 아닐지라도 몇몇 장에서 쉬 믿을 수 없는 그림을 통한 설명은 재고해볼 여지가 있을 듯싶다. 


책은 기획한 바대로 쉽고 재밌게 읽히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의 68 혁명에 관한 글은 굉장히 유용하게 읽었다. 어디에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이야기이자, 더군다나 '혁명'이 주제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알게 모르게 금기시되었던 게 사실 아닌가. 이 12장 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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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참 우뚝하고도 높도다. 

촉으로 통하는 길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도다…

그대에게 묻노니

서쪽 촉 땅에 갔다가 언제 돌아오는가?…

험난함이 이와 같거늘…

몸을 기울이고 서쪽을 바라보며 긴 한숨만 짓게 되네. 


<그리메 그린다> ⓒ다빈치북스

<그리메 그린다> 248페이지에 있는 당나라 이백의 <촉도난>이다. 이 시에서는 서촉으로 가는 길을 인생길과 비유하고 있는데, 조선화가의 신산한 삶과 닿아있다. 그 길은 계속 이어져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까지 이어진다. 


제목이 <그리메 그린다>이다. 그리메라 하면 무엇인가. 옛말로 그림자이다. 그림자는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는 실체가 없는 검은 분신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제목에 두가지 의미가 잡힌다. 


하나는 '그리메'로 대변되는 삶의 껍데기, 다른 하나는 '그림'으로 대변되는 삶의 본 모습. '그리메(그림자)를 그린다'로 삶의 껍데기만을 그린다라는 의미가 있겠고, '그리메(그림에) 그린다'로 삶의 본 모습을 그린다라는 의미가 있겠다. 결코 쉽지 않은 제목 풀이에 도상학적 재미가 솔솔 풍긴다. 


여기에 부제가 있다. 그림 같은 삶, 그림자 같은 그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 셋 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 게다. 거기에 조선 화가의 신산하고 우울한 삶과 그들이 그린 그림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어느덧 가을은 돌아올 것이다. 흔히들 가을을 탄다고 하는데, 그 말은 즉슨 감성적이 된다는 것이다. 감성은 우울과 이웃사촌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옛 생각을 하다보면 지금의 처량한 내 신세를 한탄하게 되기 일쑤이다. 조선화가들은 유명할지라도 대부분 중인 이하의 천한 신분에 갇혀 있었다. 귀족 출신의 화가들조차 역적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불우한 운명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오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며 살아갔다. 어찌 지금의 우리네 인생과 이리도 똑같은가. 


1부에서는 안견, 김홍도, 장승업이라는 조선 시대 3대화가를 소개하면서, 조선 회화사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그들의 그림과 삶을 조명했다. <몽유도원도>로 유명한 안견, 그의 후견인은 안평대군이다. 세종의 아들로 조선 초 최대의 서화 소장가였던 그는 세종시대 이후의 문예 부흥을 이끌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죽임을 당한다. 이후, 안견의 위치도 흔들리고 라이벌이었던 최경에게 모든 걸 빼앗긴다. 


유명인사 김홍도. 그의 말년은 너무나 신산했다. 정조의 후원으로 정점을 찍었던 그의 인생도 역시 정조의 죽음으로 내리막길로 치닫는다. 조선시대 최고·최대의 예술세계를 선보였던 그였지만 찾아오는 늦가을의 세찬 풍파를 감당하기엔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한국 현대 동양화의 뿌리이자 19세기말 난세의 조선화단을 풍성하게 살찌웠던 장승업.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으로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서 술은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세상에서의 유일한 친구였다. 당나라 백거이의 <술이나 마시며>를 읊조려 본다. 


먼지 자욱한 속세에 들어

힘들여 마음 쓸 일 어디 있으랴!

달팽이 뿔 위에서 서로 싸운들

얻어야 한 가닥 쇠털뿐인걸

잠시, 분노의 불길을 끄고

웃음 뒤 감춘 칼갈이도 그치고

차라리 이리와 술이나 마시며

평온히 누워 도도히 취하세.


2부에서는 조선시대 천재 화가 3인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천재적 능력으로 삶에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 갔다. 생소한 이름의 이정은 <홍길동전>의 허균과 막역지우였다. 이정은 다섯 살 때부터 붓을 놀렸고, 특히 부처를 옛 그림에 가깝게 그리는 천재였다. 하지만 30살의 짧은 인생을 살다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 그는 일필휘지의 대가였다. 술에 취해 붓을 한번 놀리면 놀랄 만한 대작이 나왔다. 하지만 편차가 심해 졸작도 더러 보인다. 당대에 그의 예술혼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던 만큼, 늘 불운을 껴안고 사는 운명적인 존재였다. 


애꾸눈 최북. 그의 위상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 그림보다 미친 듯한 행실이 더욱 주목을 받아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하였는데 이번을 계기로 그의 진정한 예술혼과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3부에서는 가혹한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운 불운한 인생을 살았던 이들의 삶을 그린다. 정도의 대가 윤두서. 여기에 김명국과 비교한 글이 있다. 


윤두서가 정도를 얻었다면 김명국은 변화를 얻었고, 윤두서가 왕도에 가깝다면 김명국은 백도에 가깝다. 윤두서가 더는 단련할 그 무엇이 없다면, 김명국은 아직도 추려낼 것이 남아 있다. 

(본문 중에서)


이경윤이라는 걸출한 화가 아버지를 둔 이징. 그는 서자였다. 서자라는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평생 불운한 삶을 살았다. 비록 인조의 총애를 받아 궁중화가로 물질적인 고민을 하지는 않았지만 예술적으로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여기 두 역적의 자손이 있다. 김시와 심사정. 김시는 김안로라는 희대의 권력가의 아들로, 아버지가 사사되자 그림으로만 한 평생을 살아간다. 역시 잘 나가는 명문가였던 심사정의 집안은 몇 번의 사고, 불화로 몰락하고 만다. 이들은 평생을 고개 숙인채, 자신들이 잘 할 수 있었던 그림만을 그리며 그림자처럼 살다갔다. 


4부에서는 자기식대로 뚜렷한 삶의 족적을 남긴 이들의 외침을 그린다. 김정희의 제자, 허련. 김홍도의 제자, 김득신. 이들은 대가의 제자들이다. 스승의 크고 긴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허련은 운림산방을 지어 남종문인화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고 김득신은 그만의 특출난 시각으로 풍속화를 그려내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일조하였다.


여기에서 김득신의 특출난 시각은 신윤복의 시각과 닿아 있는데, 신윤복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뛰어들듯 그림을 그려냈다면 김득신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한 장면처럼 그림을 그려내었다. 이런면에서 김득신의 풍속화는 김홍도를 뛰어넘으며, 혜원조차 순간을 다루는 미학에서 밀린다. 순찬 포착력에서 기민한 김득신식 스토리텔링 기법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표적 그림으로 김득신의 <파적도>, 신윤복의 <주사거배><미인도>가 있다.


난과 대나무를 잘 그렸던 임희지. 그는 '송석원시사'로 활약하며 풍류를 즐겼다. 저자가 씨 좋은 잡놈이라고 표현한 그는 피리도 잘 불고 재주와 호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해 예술의 진면목을 누구보다 잘 표출할 수 있었다 한다. 평생을 살며 진정한 대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정선. <인왕산제색도><금강전도>등 그는 말년까지 붓을 놓지 않고 명작을 그렸다. 


그림에 훌훌 세상을 버리고 세속을 벗어날 생각이 담겨 있으니, 이것은 그 가슴 속에 간직되어 있는 생각이 붓끝의 정신으로 발휘되어서 늙어서도 그 정신이 쇠하지 않게 된 것이다. (본문 중에서)


정선의 그림과 삶에 대한 평으로 가장 정확해 보인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림을 그린 사람의 운필을 떠올리며 그 붓이 움직이는 바로 앞자리에 가서 눈앞에 펼쳐진 작화 광경을 지켜보듯 여러 그림을 보았다. 그러다 보니 그림 속 화가들과 어느 정도는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림 뒤 그리메(그림자)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고, 술을 치고 있었다. 어느덧 '예술소풍'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네 짧은 인생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온다. 위대한 화가들의 삶에서 가을은 어떻게 찾아왔을까. 그들 삶에 찾아온 가을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을까. 우리들은 과연 평생 어떤 세상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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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 ⓒ길찾기


우리나라 만화계의 경우, 여타 문화 전반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귀엽고 미성숙한 모습의 그림체, 혼을 쏙 빼놓는 액션 위주의 스토리 등. 그래서인지 몰라도 만화를 생각하면,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림체는 예뻐야 하며 어린 친구들만 봐야 하는 것이라고 규정을 내버리곤 했다.


하지만 일본의 만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미국(및 유럽) 만화계는 일찍이 그 방향을 크게 틀었다. 이른바 '그래픽 노블'이라 불리는 장르가 출현했고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학과도 견줄 수 있는 스토리와 철학이 아닌 만화는 거의 퇴출되다시피 하였다. 그들에게 만화는 더이상 우리나라처럼 미풍양속을 해치고 어린 친구들에게나 읽히는 B급 내지 하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그림체에 액션 위주의 스토리를 추구해도, 그 안에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철학이 내재되어 있다. 굳이 철학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생각할 거리'가 있다. 이는 어린 친구들을 위한 교육용 만화와는 전혀 다르다.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를 시각적으로 더 잘 전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학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모든 상상력을 그림에 쏟아 붓다


그런 면에서 '만화로 보는 한국현대인권사'라는 부제가 달린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이미지프레임)는 일반적인 만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분히 교육적이고 정보전달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제나 소재가 결코 쉽게 다뤄질 수 없다는 면에서, 작가의(나아가 출판사의) 문제의식이 깊숙이 아로새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만화를 내놓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작가는 스토리에서의 상상력은 완전히 배제한 채, 그 모든 상상력을 그림에 쏟아 붓는다. 한국현대사에서, 겉으로는 가장 화려했지만 안으로는 가장 더럽고 추악하고 저질의 시대였던 1970년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대의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인지, 작가의 그림체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쌀을 찌푸리게 한다. 너무나 불편해서 피해버리고 싶지만, 반드시 인지해야 할 한국현대사의 한 단면을 정말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화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챕터마다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지울 수도 지워서도 안 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그려진다. 위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스토리라인에서 상상력을 배제한다. 그 대신 수많은 현대사 관련 책들을 인용해서 사건들의 디테일을 채웠고, 더불어 작가가 직접 당시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인터뷰까지 하였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의 한 장면. ⓒ길찾기


요즘 한창 네이트 웹툰에서 연재 중인 윤태호 작가의 <인천상륙작전>도 상당히 많은 책들을 참조하고 인용하고 있는데, 그 차이는 명확하다. <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가 몰랐던 혹은 눈 감고 지나치려 했던 정보의 정확한 전달과 문제 의식 고취를 최우위에 두고 있다면, <인천상륙작전>은 이를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게 조금은 눈에 띈다. 굳이 나누자면, 팩트와 팩션이라고 할까. 


불편하지만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 역사


이 만화는 분명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작가도 말했듯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용히 울부짖고 있는 피해자들을 그냥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만화를 본다고 해서, 그렇게 그런 사실을 안다고 해서, 당장 뭔가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과 행동 앞에 '앎'이 오는 것 아니겠는가. 먼저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면 누군가들은 말한다. 직접 그 시절에 살아보지도 않고 직접 그 상황에 맞딱뜨려 보지도 않고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투철한 정신과 박학한 이론으로 무장해도, 조용히 있어야만 하는 걸 알고 있느냔 말이다. 그건 어불성설이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미래로 전달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 그것이 조작되고 삭제된 현실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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