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안 본 눈 삽니다] <빅토리아 & 압둘>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포스터 ⓒ유니버셜픽처스



여러 가지 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는 절대 없는, 아니 어느 면에서는 수준급의 모양새를 보이는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는 참으로 애매하다. 하지만 그 영화가 그 모양새를 앞세워 사실을 보여주되 진실을 오도하려 할 때는 더 이상 애매하지 않다. 철저히 까발리고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모양새 좋은 영화야말로 영화의 본연, 즉 '보여주기'에 충실한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건 요즘 영화에서 어찌 보면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옳은 말도 아니다. 결국 알맹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스토리텔링 말이다. 


스토리텔링은 그저 이야기의 나열이 아니다. 거기엔 어떤 식으로든 메시지가 담겨져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메시지에 최소한의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메시지 또한 겉모양이 아닌 알맹이, 그 너머와 그 이면을 살펴야 한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그런 면에서 단언컨대 최악의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런 식의 모양새는 훌륭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과 메시지는 곤란하다, 아니 옳지 않다. 


판타지 로맨스에나 나올 법한 우정의 실화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1887년 인도의 아그라, 감옥에서 일하는 인도인 카림 압둘(알리 파잘 분)은 키가 가장 크다는 이유로 빅토리아 여왕 폐하(주디 덴치 분) 50년제에 맞춰 모후르(인도 금화)를 운송해 보내주는 임무를 맡는다. 그는 이를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며 길을 나선다. 한편 그와 함께 가게된 모하메드는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자들한테 줄 빌어먹을 선물 때문에 수천 마일을 가야 한다며 분개한다. 


모후르 수여식에서 빅토리아는 압둘의 잘생긴 외모에 반하고 급기야 곁에 두고자 한다. 그렇지 않아도 여왕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공공연히 드러낸 압둘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며 빅토리아의 환심을 더더욱 사게 된다. 압둘 덕분에 인도에 대해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고 인도에 지대한 관심을 쏟게 되는 빅토리아. 압둘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빅토리아의 개인 비서이자 스승이자 가족과 같은 급에 이른다. 


하지만 일개 식민지 인도인의 평민 따위가 왕실의 일족처럼 취급받는 걸 원하는 사람은커녕 그저 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 당연히 온갖 시샘과 협박과 음모가 이어진다. 전 세계 1/4를 차지하고 10억 명의 백성이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그저 수십억 명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식민지 백성 중 하나일 뿐인 카림 압둘은 과연 그 특별한 우정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을까?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자못 흥미로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아니, 판타지 로맨스에서나 다룰 법한 내용이지만 엄연히 실화이기에 어쩔 수 없는 궁금증이 인다고 하는 게 맞겠다. 빅토리아 여왕과 식민지 인도인 평민 카림 압둘은 어떤 연유로 모든 걸 뛰어넘는 우정을 나누게 되었는가?


이들의 특별한 우정,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압둘의 빅토리아를 향한 무한한 애정부터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애정의 사연과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출세에 눈 먼 평범한 청년인가. 차라리 그렇게 그려졌다면 최소한 이해는 되겠지만, 영화는 그를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빅토리아를 향한 인간적 애정이 한껏 묻어나오는 것이다. 


빅토리아의 압둘을 향한 총애는, 압둘이 잘 생겼다는 것, 그녀를 둘러싼 암투와 격식과 시샘 등 온갖 것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순수함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명목상의 통치자일 뿐 정작 가본 적 없는 인도에 대한 동경 등이 함축되어 있다. 압둘의 애정과는 달리 빅토리아의 애정엔 최소한의 이해는 가지만, 반면 이해하기 싫은 측면이 있다. 


다름 아닌 여기에, 이 영화가 내세우는 특별한 우정에 함정이 있다는 걸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빅토리아 여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인 19세기를 온전히 통치해온 자다. 그녀는 제국의 수장으로, 뼛속깊이 제국주의가 들어찬 인물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런 그녀를 마치 반제국주의자, 반인종차별주의자이자 수많은 파렴치한들에 둘러싸여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으로 그린다. 


한편 빅토리아 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유명하다. 유럽 대부분이 혁명으로 왕권제 자체가 사라지는 와중에 영국은 수상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에 정치권력 대부분을 내어주는 대신 상징성만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안에 대한 결정권은 행사했으며, 정치에서도 수상들을 통해 의견을 관철시켰다. 말하자면, 그녀는 명백한 제국의 수장이었고 고로 수많은 나라와 백성과 전통을 없애버린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영화 <빅토리아 & 압둘>은 균형감을 완전히 상실한 잡종에 불과하다. 


빅토리아 여왕, 대영제국의 치졸하고 무서운 술수


영화 <빅토리아 & 압둘> 한 장면 ⓒ유니버셜픽처스



영화는 말년의 빅토리아 여왕을 완벽하리만치 연기한 주디 덴치를 앞세워 19세기 영국 왕실을 역시 완벽하리만치 재현해냈다. 의상과 분장면에서 위화감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 겉모양과 겉치레를 앞세운 영국 왕실을 빅토리아 여왕이 셀프 디스(?)하며 자잘하게 균형을 맞추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압둘과 같이 오게된 모하메드가 죽으면서까지 영국의 추악한 면모를 가멸차게 비판하는 장면 또한 자잘한 균형 맞추기의 일환이다. 하지만 그 모습들이 애써 끼워맞추기 내지는 균형을 맞추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술수로 보이는 건 비단 나뿐 만이 아닐 것이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대영제국의 치졸하고 무서운 술수와 다름 없다. 


일제강점기, 문화통치시기가 그러했다. 겉으로는 전에 없이 조선인의 자유를 묵인했지만 실상 조선을 일본의 완전한 속국으로 만드려는 잔인한 술수였지 않은가. 그 기반엔 '당연함'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빅토리아가 영화 내내 '인도의 여제' 운운하는 것도, 모든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수많은 나라와 백성과 전통들이 사라지는 아픔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집합체이다. 


우리로서는 조금만 시선을 돌려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 천황과 천황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조선인 평민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영화가 천황을 반제국주의자이자 반인종차별주의자로 그리며, 천황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불만 등 때문에 매우 불쌍한 사람인 것처럼 그려내면 어떠하겠는가. 이건 명백한 진실 오도와 잘못된 망상이 아닌가. 더욱이 그것이 실화을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면...


이 영화 때문에 우정이 갖는 순수함과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있는 우정의 무한함이 퇴색되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물론 빅토리아와 압둘의 우정은 특별했다. 그 자체로 신분과 인종과 나이를 초월한 순수함과 무한함이 엿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너머까지 특히 빅토리아를 중심으로 나아갔고 무참히 찬물을 끼얹어버렸다. 영화의 만듦새 때문에 한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 만듦새가 진실을 오도하는 데 앞장섰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빅토리아 & 압둘> 안 본 눈을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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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예쁜 영화'의 정점에 서 있는 '웨스 앤더슨'의 정점이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다. ⓒ이십세기폭스사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는 예쁘다. 파스텔 톤과 원색의 환상적인 색감 조합과 완벽한 좌우대칭형 수평 구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예쁨을 선사한다. 그 앞에 '예술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인데, 그 정점에 있는 영화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아닌가 싶다. 


세계대전 분위기가 타오르고 있던 1927년, 알프스에 위치한 가상 국가 주브로브카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는 그 화려하기 그지 없는 외관답게 전쟁과는 무관한 듯한 느낌이다. 호텔의 모든 것에 관여하는 총지배인 구스타브, 그가 총애하는 신입 로비 보이 제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주요 고객이자 구스타브의 연인인 세계 최대 부호 마담 D.가 피살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구스타브와 제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떠난다. 마담 D.가 아낀 엄청난 그림을 가족이 아닌 구스타브에게 남긴다는 유언과 함께, 마담 D.의 엄청난 유산을 노리던 아들 드리트리에 의해 용의자로 몰린다. 구스타브와 제로는 살인 누명을 벗고 다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돌아가기 위해 모험 아닌 모험을 겪는다. 


앤더슨 터치, 앤더슨 스타일, 앤더슨 월드


단 8편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웨스 앤더슨. 그 옆에 붙는 수식어들이 다양하다. ⓒ이십세기폭스사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명실공히 2014년 최고의 작품으로, 당시 미국 아카데미와 전미비평가, 영국 골든글러브와 런던비평가, 베를린국제영화제 등 전 세계 주요 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와 함께 당시 주목을 받았던 영화들에는 <라라랜드> 데미언 차젤레 감독의 <위플래쉬>, <레버넌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 그리고 <보이후드> 등이 있었다.


웨스 앤더슨은 결코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는 아니다. 특별할 게 없는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내는 데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앤더슨 터치'라고 명명되어 있다. 그 손길의 특별함에는 '앤더슨 스타일'이라고 불리워지는 게 마땅한 그만의 미학(미장센)이 자리하고 있는데, 우린 이 영화를 통해 그 절정을 맛볼 수 있다. 


그는 단 8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했는데, 이제는 스타일뿐만 아니라 '세계'를 정립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예쁘다'를 연발하지 않을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화면이 전혀 역동적이지 않지만 우리의 눈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한 화면 안에 배치되어 있는 완벽한 구도의 물상들을 쫓아가기 바쁘다. 그러고선, 정물화처럼 보이는 화면 전체까지 훑어야 한다. 모든 화면들이 이러니 달리 도리가 있겠는가. 바쁘게 움직여야지. 


고급진 미장센을 추구하는 감독들은 많다. 화면에 들어가는 모든 물상들을 허투루 하지 않고 완벽하고 꼼꼼하게 배치하는데, <싱글맨>의 톰 포드 감독이나 <장화, 홍련>의 김지운 감독이 바로 생각난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경우, 배우조차 화면을 구성하는 여러 물상 중 하나로 보일 정도의 미장센을 보인다. 


그 화면 구성이 사실 현대적이거나 앞서 예를 든 대표적 미장센 감독들과는 다르게 세련되지도 않다. 예쁘다는 걸 빼면, 그 자체로 근현대 또는 근대적이라고까지 할까.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배경 또한 20세기 초중반이니만큼 더욱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화면 구성뿐만 아니라 화면 구도나 영화를 구성하는 여러 기법과 소품, 하다 못해 캐릭터 특성까지도 그러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고전주의자가 아닐까. 


완벽한 미학과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균형'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경우, 마냥 예쁘기만 하지 않다. 그밖에 이야기나 연기에도 공을 들여 균형을 맞추었다. ⓒ이십세기폭스사



아무리 완벽한 미학을 선보인다 하더라도, 오로지 그것뿐이라면 이와 같은 명성을 획득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가 연출한 모든 영화의 각본을 직접 쓴 걸로도 유명한대, 영화의 모든 것을 완벽히 정형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완벽한 지배인 구스타브의 모습과 흡사하다. 


스토리가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그와 함께 하는 배우들은 하나 같이 유명한 연기파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워낙 예쁘고 흐트러짐 없는 화면을 선보이기 때문일 텐데, 전작 <문라이즈 킹덤>에서도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아이들의 순수한 사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말도 안 되게 예쁜 화면들과 그에 맞는 특이한 캐릭터들이 압도해버려서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경우는 어떨까. 


이중도 아닌 삼중 이야기 구조를 굳이 택해 이야기 자체에 흥미를 북돋고는,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 버린다. 물론 그 사이에 계속해서 보여주는 호텔의 황홀한 외관은 한 번 보면 숨이 멋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그리고 여지 없이 '황금율'까지 생각나게 하는 대칭 구도의 화면들을 쉴 새 없이 쏟아붓는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그럼에도 빠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 진행 덕분에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도 죽지 않는다. 그 '균형'에 많은 공력을 쏟은 느낌을 주는 영화다. 


전혀 정반대의 스타일을 추구할 것 같지만,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정해진 틀에서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앤더스과 모든 것들이 자유로울 것 같은 홍상수가 비슷하다니,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라는 점과, 반드시라고 할 만큼 각본과 연출을 병행한다는 점과, 정반대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영화적 미학이 하나 같이 좋은 영화를 탄생시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완벽히 정해져 있는 미학과 아무것도 정해져 있는 않은 미학은 정반대이자 하나이다. 


이보다 '예쁜' 영화는 없다


'예쁘다'를 연발한다. 황홀할 지경이다. 그냥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더 말해 무엇하랴? ⓒ이십세기폭스사



웨스 앤더슨의 작품을 논할 땐 웨스 앤더슨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자칫 웨스 앤더슨만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그의 영화에서는 그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오는 최악의 단점은, 그의 차기작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예쁜 영화를 또 다른 형식으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지만, 어차피 비슷한 느낌일 게 뻔하지 않은가. 


(다분히 의도된 계산에 의한 것이겠지만) 다행인 건 그가 다작을 하는 감독이 아니라는 것. 그가 처음으로 장편을 내놓은 게 1996년, 마지막으로 내놓은 게 2014년, 그리고 지금이 2017년, 20년이 흐르는 동안 내놓은 작품이 8편이니 2~3년마다 한 편씩 내놓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음 작품은 2018년에 개봉 예정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정점을 찍은 만큼,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봄이 어떨까 싶다. 물론 '쇠뿔도 당길 때 빼라'는 속담이나 '한 우물만 파라'는 격언도 있고, 그래야 진정한 장인이 된다는 사실도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아름답고 예쁠수록 식상하고 진부하게 되기 쉽다. 


얼마전 <문라이트>를 말하며 '이보다 아름다운 영화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면들이 있으니, 누군 공감하고 누군 공감하지 않더라도 비교적 쉽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도 한 마디 하고 싶은데 '이보다 예쁜 영화는 없다'라고 하고 싶다. 그야말로 다른 무엇도 아닌 '시각적 예쁨'이다. 이 예쁨에는 절대적 면만 있을 뿐이다. 단언하건대, 가장 예쁜 영화다. 


이보다 예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웨스 앤더슨 자신뿐이다. 앞서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딱 한 가지 기대하는 게 있다면 이것뿐이다. 아니, 부탁한다. 이보다 더 예쁜 작품을 들고 와달라. 두 시간 동안 눈호강 좀 시켜주고 싶다. 그 전까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달래고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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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인간의 품격>



<인간의 품격> 표지 ⓒ부키


이 시대를 한 마디로 무어라 규정할 수 있을까. '과잉 시대'라고 하면 맞을까. 정보 과잉, 자극 과잉, 기록 과잉, 유혹 과잉, 피로 과잉, 공급 과잉, 서비스 과잉, 학력 과잉, 음식 과잉, 긍정 과잉... '과잉' 앞에 거의 모든 것을 붙일 수 있을 시대이다. 어마어마한 과잉 앞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이를 수용하고 선도하는 소수의 사람들 꽁무니를 따라가기 바쁠 뿐이다. 거기에서 능력이 갈리고 계급이 갈린다. 


또 하나의 과잉이 여기 있다. '자기 과잉'. 세상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그 어떤 것보다 자신이 중요하며 자신을 사랑한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고 자신에 대해서는 겸손이라는 걸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이 곧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최우선의 능력이며 잘 해내지 못한다면 도태 당한다고 느낀다. 실제로 도태 당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는 명구는 유명하다. 


'자기 과잉'은 얼핏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을 사랑하고 독려하고 단련하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자는 <대학>을 통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설파했다.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건 모든 일의 기본이다. 


하지만 현대의 자기 단련은 이와 동떨어져 보인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자아를 들여다보고 겸손과 절제를 중요시하며 내적 성숙을 목적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성취와 성공을 위해 타인의 인정과 외적인 찬사에만 목적이 있다. '나'를 두고, 시선과 목적이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게 되었다. 그것도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급격히. 그렇게 불균형이 생기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온다. 어떻게 해야 할까. 


도덕적 실재론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인간의 품격>(부키)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통을 되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도덕적 실재론' 전통 말이다. 한계와 도덕적 투쟁을 강조하는 실재론적 전통은, 긍정의 심리학이 꽃피면서 소셜 미디어의 자기 과시 풍조가 만연하면서 그리고 능력주의 시스템의 경쟁 스트레스로 인해 옆으로 밀려나고 말았으니 다시 원 상태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만연해 있는 풍조를 옆으로 밀어버리면 안 된다. 외적 야망과 내적 염원이, 외적 능력과 도덕적 본성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관통하는 두 개념을 랍비 조셉 솔로베이치크가 1965년에 쓴 <고독한 신앙인>에 나오는 두 본성이 아담 1과 아담 2을 빌려와 규정한다. 아담 1은 경제학의 논리다. 들어가는 게 있으면 나오는 게 있다. 노력을 하면 보상이 따르고, 연습을 하면 완벽해진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한다. 지금 우리 시대가 원하는 가장 완벽한 이상형일 것이다. 


반면 아담 2는 도덕적 논리다. 받으려면 줘야 한다. 성공은 가장 큰 실패, 즉 자만으로 이어진다. 실패는 가장 큰 성공, 즉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진다.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야 하고,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잃어야 한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시대가 원하는 이상형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가진 능력이 저게 다 라면,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 것이다. 


책은 시종 일관 이 두 본성을 비교 대조한다. 이 시대는 누가 보아도 아담 1의 시대인데, 저자는 그 한계를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그러니까 저자는 두 본성의 가치 판단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아담 1에 해당하는 본성의 과잉을 우려하고 아담 2에 해당하는 본성의 부활을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경제과 도덕의 균형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포인트다. '균형'.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도덕으로의 길을 강하게 제시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 길을 8명의 사람들을 통해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삶의 방식은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결함'을 정확히 알고, 자신의 죄악을 극복하기 위해 '내적'으로 투쟁했으며, '자존감'을 얻었다. 그들의 발자취가 도덕으로의 길의 훌륭한 모범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주지했듯이 '결함'이 있었던 것이다. 


결함이야말로 도덕으로의 길에 가장 필요한 덕목


저자는 바로 그 '결함'이야말로 도덕으로의 길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평생 노력을 기울여 결함을 초월했고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핏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해진 '알프레드 아들러' 박사의 '열등감 이론'이 생각나게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감이 있는데, 용기를 갖고 그 열등감을 극복한다면 더욱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함'과 '열등감', '구원'과 '건강한 삶'의 대구가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열등감과는 달리 결함이 없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시대의 자기 과잉은 자존감 하락의 소산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균형이 깨지면 과도한 움직임이 일게 되기 마련이다. 지금이 딱 그렇다. 과도한 변화, 움직임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이마누엘 칸트가 이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뒤틀린 목재에서 곧은 것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 뒤틀린 목재란 즉, 결함이다. 그 사실을 직시한 사람들은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인격 형성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 과정과 결과야말로 진정한 성공이라 생각했던 시대가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결함이 없다고 믿어 왔던, 또 그렇게 교육 받았던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시대착오적이고 도태된 이야기라고 비춰질 지 모르겠다. 도대체 그런 것들이 지금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냉정하게 봤을 때, 도덕이니 결함이니 인격이니 하는 것들이 이 시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 능력주의 시대에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만 말하고 있다가는 오래지 않아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되길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시대에 맞는 성공을 한 사람에나 도덕으로의 길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책을 통해 저자가 워낙 강력하게 도덕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그렇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균형'이 아닌가. 문제는 언제나 동일한 것 같다. 투표랑 비슷하다. '나 하나 안 해도 대세에 지장은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가능하다는 것. 그렇지 않고는 비록 잘못된 방향일지 모르지만 사회가 가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가는 게 쉽지 않다. 조금씩이나마 실천에 옮겨보자. '너무 큰' 나에서 '작은' 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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