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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https://linktr.ee/singe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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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괴랄하지만 따뜻하고, 코믹발랄하지만 단단한 '인생'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2020.10.05
  • 완급 조절 하난 기가 막힌 태국산 복합장르영화 <신과 나: 100일간의 거래> 2020.04.20
  • 잔혹의 시대를 살아간 청춘을 위해 <말죽거리 잔혹사>(2) 2016.10.14
  • 언제 쯤이면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답이 나올 수 있을까 <음의 방정식> 2016.04.06
  • <호밀밭의 파수꾼> 위선과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픈 소년의 방황(6) 2014.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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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랄하지만 따뜻하고, 코믹발랄하지만 단단한 '인생'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넷플릭스 오리지널 2020. 10. 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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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보건교사 안은영>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 포스터. ⓒ넷플릭스



'장르문학'이 '순문학' 중심의 한국 문학계에서 자리를 잡은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아니, '웹소설'도 장르문학에 속한다고 한다면 대중적 인기와 시장 크기에서는 이미 순문학의 그것을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다만, 2015년 일명 신경숙 사태 이후로 한국 문학계가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해 그 일환으로 발빠르게 장르문학을 편입시키려 했다. 하여 역학 관계가 참으로 애매해졌다. 장르문학은 꾸준히 팬층을 확보하며 문학성도 높이고 있던 와중에, 순문학 주류의 문학계에서 받아 주겠다는 모양새를 펼쳤기 때문이다. 


지금의 판도를 보아선 장르문학이 순문학 위기의 한국 문학계를 떠받들고 있는 모양새이다. 정세랑 작가가 그 중심에 있다. 올해로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그는, 장르문학도 순문학도 아닌 것이 그 사이 어딘가 또는 그 밖 어딘가를 지향했다.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따뜻하고 따끔한 이야기를 전해 왔다. 2015년작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의 중기작에 속하는데, 출간 당시 폭발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하진 못했지만 '정세랑 월드'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장르문학의 '장르'가 비단 문학계에 한정되지 않게 되자 정세랑 작가의 작품들은 문학 밖에서 훨씬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경우도 이미 몇 년 전, 그러니까 책으로 출간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드라마 판권이 팔렸다. 원작자가 직접 각본에 참여했고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2020년 9월 말경에 공개되었다. 연출은 이경미 감독, 안은영 역에는 정유미 배우. 기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보건교사 안은영에겐 뭔가 특별한 게 보인다


용산구 목련고등학교, 보건교사로 재직하는 안은영에겐 이상한 것 혹은 특별한 게 보인다. '젤리', 영적인 뭔가를 부르는 말로 죽은 사람이 젤리로 나타나거나 산 사람의 욕망이나 집념이 젤리로 나타나기도 한다. 보기엔 귀엽기도 하지만, 그리 긍정적이진 않은 존재인 듯하다. 오승권이라는 학생이 해파리라고 불리는 성아라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이상해진 듯하다. 농구문어라고 불리는 농구부 주장이 그녀를 향해 미친 듯한 세레머니를 펼치고 있다. 온 학교에 오승권의 젤리들이 판친다. 


안은영은 그 원인을 찾아 나선다, 귀찮아 죽겠지만 말이다. 지하실에서 흘러 나오는 젤리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젤리 퇴치 무기인 비비탄총과 요술 야광봉을 가지고 젤리 퇴치에 나선다. 그런데, 지하실 관리를 맡고 있는 학교 재단 이사장 손자 홍인표 한문 교사에게 딱 걸린다. 남들 눈엔 보이지 않는 젤리를 퇴치하고자 비비탄총과 요술 야광봉을 가지고 열심히인 모습을 말이다. 


안은영과 홍인표는 학교 지하실에서 일을 겪고 나와선 믿기 힘든 큰일을 함께 겪는다. 젤리에게 잠식당한 학생들 수십 명이 죽을 수 있는 위기를 겪고, 안은영의 보고도 믿기 힘들고 볼 수 없으니 뭐라 말하기 힘든 모습을 보며, 함께하게 된다. 특히 홍인표는 안은영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무한대로 공급해 줄 수 있었기에 큰 힘이 된다. 그들은 과연 목련고등학교와 학생들을 지켜 낼 수 있을까?


괴랄하고 코믹발랄한 '인생'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은 원작의 입김이나 영향보다 연출과 각본을 겸한 이경미 감독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을 거라 생각되는 작품이다. 그는 2003년 단편으로 데뷔 후 20여 년간 단 두 편의 장편(2008년 <미쓰 홍당무>, 2016년 <비밀은 없다>)을 내놓았을 뿐이지만, 호불호 확실히 갈리는 '이경미 월드'를 구축했다. 관습을 파괴하고 예측하기 힘든 서사와 독특한 미장센 그리고 음악으로 중무장한 채. 


이번의 경우, 드라마는 처음 연출해 보거니와 2편 단편 연출을 제외하면 4년 여만에 큰 작업을 한 것이지만 한 치의 어설픔이 묻어나 있지 않았다. 적어도 이경미 월드에서는 말이다. 정세랑 작가도 정세랑 월드를 구축하고 있었던 만큼 이 작품은 '이경미 월드*정세랑 월드'라고 해도 무방할 텐데, 케미가 완벽에 가깝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 한테는 '이게 뭐하자는 거지...' 하겠지만, 누군가 한테는 '내 인생 드라마다!'라고 할 만하다. 괴랄하지만 따뜻하고, 코믹발랄하지만 단단하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CG의 향연이 괴랄의 결정체이다. 이 드라마의 핵심 중 하나인 젤리를 표현함에 있어 이경미 감독과 정세랑 작가가 가진 상상력을 총동원했을 게 분명하다. 정유미 배우가 적확하게 연기한 안은영이라는 캐릭터 그리고 병맛을 넘어선 마라맛의 학생들 캐릭터가 코믹발랄의 결정체이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일반적으로'는 예측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게 사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받아들여지는데, '아, 이것이야말로 이경미 월드구나' 하고 자신도 모르게 읊고 있는 걸 발견할 것이다. 


따뜻하고 단단한 내면도 지닌 채


이 작품이 주지했듯 '외면'만 돋보이는 건 아니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들이 휘몰아치니 감당하기 힘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외면 못지 않게 '내면'은 따뜻하고 단단하다. 두 주인공 안은영과 홍인표를 들여다보자. 한 명은 어릴 적부터 젤리라고 불리는 영적인 뭔가가 보였다고 한다. '귀신 보는 애'라고 찍혀 사람들이 피하고 무서워했다. 정작 그녀 자신은 한없이 소극적이고 또 칙칙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홍인표는 학교 재단 이사장 손자로 금수저이자 어릴 적 잘나가던 운동선수였는데 오토바이를 타다 다리를 다쳤다. 


안은영은 좋은 친구 덕분에 적극적이고 애니메이션 주인공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으로 변했지만, 홍인표는 친구도 없이 소극적이고 또 칙칙해졌다. 그렇지만 둘다 소수자이자 약자인 건 변함이 없다. 작품은 둘을 향해 연민의 시선을 던지는 게 아니라, 둘의 연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려는 의지 그리고 용기를 보여 준다. 안은영은 학교 내 또 다른 퇴마사(?) 교사에게 '불쌍한 인생' 운운하는 소리를 듣고, 홍인표는 거의 도움을 줄 수 없는 몸 때문에 하염없이 힘들어 하지만 말이다. 


안은영은 욕지거리를 내밷고 귀찮아 하면서도 학생들을 구하고자 히어로짓(?)을 이어가고, 홍인표 또한 학교를 구하고자 젤리가 다가오지 못하는 보호막으로 몸을 휘감은 채 안은영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와중에, 목련고등학교를 둘러싼 조직들의 관계자들이 여러 수수께끼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끝까지 풀리지 않은 것도 많은 바 시즌 2를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작품과 관련된 모두,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과 이경미 감독과 정세랑 작가와 정유미 배우와 남주혁 배우까지 이후의 행보를 기대해 본다. 이들 모두가 누구나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사랑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길 바란다. 누가 '누군가'에 속할지는 그들 각자의 몫이 클 테지만, <보건교사 안은영>이 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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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랄, 단단, 따뜻, 보건교사 안은영, 영적, 월드, 이경미, 장르문학, 정세랑, 정유미, 젤리, 코믹발랄,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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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급 조절 하난 기가 막힌 태국산 복합장르영화 <신과 나: 100일간의 거래>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20. 4. 2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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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영화 리뷰] <신과 나: 100일간의 거래>


영화 <신과 나: 100일간의 거래> 포스터.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와이드 릴리즈(주)



시체안치소에서 눈을 뜬 '나',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심정으로 밖으로 나와 헤맨다. 급기야 창밖으로 나와선 발을 헛디뎌 떨어진다. 어느 순간 공간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더니, 창문닦이가 한 명 다가오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을 수호자라고 소개하며, 내가 '민'이라는 남자 고등학생의 몸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 간호사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수호자는, 나에게 100일간의 시간이 있다며 그동안 민이 자살하게 이유와 민을 자살로 몰고 간 사람들을 밝혀내야 한다고 한다. 죽어서 환생조차 할 수 없게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곧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학교에도 다시 돌아간다. 학교에는 독감이 심하게 걸렸었다고 거짓말하기로 한다. 그런데, 가족들이 좀 이상하다. 엄마만 유일하게 친절하게 민을 챙기고 걱정하고 위한다. 반면, 아빠는 뭔 일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지만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건 확실하고, 형 '멘'은 말투나 행동이나 분위기를 비춰볼 때 민을 싫어하는 것 같다. 민의 자살 이유가 형일까?


학교에 가니 여자 선배 '파이'가 민의 공부를 도와준다. 그녀는 올림피아드반 수재인 듯, 민과는 단순히 튜터와 제자 사이 이상인 것 같다. 사귀는 사이까진 아닌 듯하지만 썸을 타는 사이 이상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친한 여자 사람 친구도 있다. 외톨이였던 것 같은 민의 많지 않은 친구들이다. 시간은 성실히 가는 와중에 나는 민의 몸에서 즐기고 있는데, 다시 수호자와의 거래를 생각해 낸다. 사물함을 들여다보고는 친구의 말을 듣고 중요한 단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노트북의 행방을 찾으려 한다. 근데, 민의 노트북을 멘이 가져간 게 아닌가? 노트북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대체 누구일까? 예상의 인물일까, 예상 밖 인물일까.


태국 공포영화 거장 팍품 웡품 감독의 역량


태국에서 건너온 판타지 로맨스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신과 나: 100일간의 거래>(이하, '신과 나')는, 그야말로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느껴 보기 힘든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언급했듯, 최소 4가지 장르에 발을 걸쳐 있는데 완급 조절이 수준급이다. 분위기 조여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다가도 어느새 풀어주다 못해 즐겁게까지 만드는 것이다. 


감독의 역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이가 2000년대 중반 태국영화 박스오피스 역대 기록을 갈아치웠던 <셔터> <샴>의 공동 감독 중 하나인 팍품 웡품이기 때문이다. 두 작품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과 함께 작품을 해 왔는데, <신과 나>를 통해 처음으로 단독 연출에 데뷔한 그다. 


그동안 계속해서 공포 장르에 천착해 온 팍품 웡품 감독은, 지난 2017년 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이름을 알린 바 있는 <배드 지니어스>의 네 주인공 중 한 명인 팻 역의 티라돈 수파펀핀요와 함께 판타지 미스터리 그리고 로맨스로까지 발을 넓혔다. 다만,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장르에서 오는 재미를 만끽할 수도 있고 다양한 장르를 억지로 보여 주려 하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겠다. 


복합장르영화에서 성장영화로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실로 다양한 장르가 복합된 복합장르영화가 아닌 성장영화다. 미스터리 스릴러로 시작해 판타지와 로맨스의 과정을 거쳐, 결국 성장으로 나아간 것이다. 몸도 마음도 복잡다단하게 한창 성장하는 시기의 주인공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세상의 다양한 맛들을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을 보여 준다. 특히 가정과 학교에서 말이다. 


그중 의외로 '사랑'의 빈도가 크다. 학교에서 민이 가장 가까이하고 또 계속 함께하고 싶어하는 파이, 가정에서 민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엄마.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외톨이였던 민의 곁을 지켜 주었던 그들인데, 그들의 배신이 민에게 크나큰 타격을 주는 것이다. 그들 나름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 민은 거기까지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고 깜냥도 되지 않았다. 


하여 이 영화에서 장르적 미덕을 찾는다면, 판타지도 미스터리도 스릴러도 아닌 로맨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감독이 가장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보이거니와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렇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건, 로맨스를 기반한 약간의 복합장르를 지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복합장르라서 영화 자체에 다가 가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까?'라는 기대감


만들어진 영화의 장르적 미덕이 로맨스라면, 아쉬움을 담아 '만약'의 미덕을 찾자면 영화 초반의 미스터리 스릴러적 요소들이다. 민을 죽음을 몰고 간 이유와 사람들을 밝히는 과정에서 하나씩 하나씩 조심스럽고 긴장감 어리게 단서들을 찾아 내는 모습 말이다. 차라리 완급 조절을 하지 말고 시종일관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하에 계속해서 단서들을 찾아 냈다면, 그러면서 러닝타임도 훨씬 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장르영화의 대국이라고 평해도 과함이 없는 태국에서 관객들 눈에 띄고 인기를 얻으려면 이 정도까진 해야 하는가 싶기도 한 영화였는데, 결론적으로 과히 나쁘진 않았다. 왠지 태국 영화가 기다려지는 지점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낼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있지 않을까. 이 영화가 비록 그 시발점이 되지 못할지라도 연결고리 정도로는 충분히 작용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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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복합장르, 사랑, 성장, 신과 나: 100일간의 거래, 자살, 태국영화, 팍품 웡품,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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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의 시대를 살아간 청춘을 위해 <말죽거리 잔혹사>

오래된 리뷰 2016. 10. 1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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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말죽거리 잔혹사>


검증이 안 된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유하 감독의 차기작은 어땠을까? 주연뿐만 아니라 조연도 대부분 신인을 벗어나지 못했다. 감독의 의도일까? ⓒ싸이더스



2004년 당시 데뷔 3년이 채 안 된 두 신세대 스타를 앞세운 영화가 개봉한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드라마 <천국의 계단>으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던 권상우, 여고 시절 KBS 도전 골든벨 출연 후 단번에 CF를 찍고 드라마 주연을 꿰차며 스타 반열에 오른 한가인이 그들이었다. 거기에 90년대 후반 패션모델로 데뷔한 후 연기자의 길을 꾸준히 걸으며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얼굴을 보인 이정진이 주연의 중심을 잡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파격적인 캐스팅이라 하겠다. 


조연의 면면도 비슷했다. 나름 잔뼈가 굵은 김인권을 제외하고는 이종혁, 박효준 등 경력은 물론 인지도에서도 거의 신인과 다름 없었다. 지금은 충무로 대세 배우 중 한 명인 조진웅은 이 영화에서 대사 한마디를 날리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감독의 의도였을까, 제작비 등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화려하기 그지 없는 현재의 영화 캐스팅 수준과 비교를 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경력을 떠나 인기나 연기 면에서 이 영화처럼 확실한 인지도 없는 이들이 대부분인 경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독립영화라면 모를까 엄연한 상업영화에서 말이다. 


곤혹스러울 정도의 연기가 아쉽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두 주연배우의 연기는,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영화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당시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싸이더스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오랜만에 충무로에 돌아와 괜찮은 흥행과 비평에 성공한 유하 감독은 차기작으로 학교, 추억, 폭력의 앙상블 영화를 기획한다. 거리 3부작의 시작이기도 한 <말죽거리 잔혹사>다. 유하 감독은 학창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는데, '남자'라면 누구나 꿈꿔봤음직한 그때 그 시절을 깔끔하게 보여준다. 


전남 보성에서 강남 말죽거리로 이사온 모범생 현수(권상우 분), 태권도장을 하는 아버지의 폭압적인 가르침 덕분에 공부도 곧잘하고 달리기나 농구도 곧잘하는 평범하지만 여러 모로 평균 이상의 학생이다. 그 덕분인지 학년 전체를 주름잡는 싸움꾼 우식(이정진 분)의 눈에 띄어 친구가 된다. 


그는 오지랍이 넓은 건지 태권도 정신에서 비롯된 정의감이 투철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나서지 말았으면 하는 데에 나서서 일을 자초하곤 한다. 그 와중에 천눈에 반한 은주(한가인 분)를 구해주려다가 일 아닌 일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녀를 향한 사랑은 현수뿐만 아니라 우식이에게도 있었다. 결국 사귀게 된 건 우식과 은주, 소심하기만 한 현수는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다.  


10년이 훌쩍 지난 작품이고, 신인들을 내세웠다지만, 아무리 봐도 형편 없는 연기는 웃음만 자아낼 뿐이다. 그 중심에는 현수와 은주, 즉 권상우와 한가인이 있다. 현수는 후반에서의 싸움 시작과 끝에서만 톤이 올라갈 뿐 시종일관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하고, 은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시 힘 없고 우울한 톤을 한 음으로 유지한다. 여기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의도된 연기인가?


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만큼 목소리에 있어서 당시의 느낌을 살리려 했을 지도 모른다. 당시 영화들을 보면 굉장히 연극톤이지 않은가. 그런 걸 의도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다른 이들의 연기는 너무 다르다. 지극히 현대적이다. 이 두 주연배우의 연기, 특히 연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발성이 터무니 없이 형편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에는 이 둘만 등장하는 장면이 꽤 있는데, 이상하게 그 장면에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눈과 귀를 둘 곳이 없다. 그들도 곤혹스러워하는 게 느껴질 정도다. 감독은 왜 그런 연기를 그 정도로 넘어갔을까. 의문이다. 


이런 식의 교육은 폭력 이상의 악질이다


교육이 아닌 교화를 하는 학교. 모든 학생이 똑같을 순 없는데, 똑같으라고 강요하는 학교. 지금도 여전할까? 그때는 참으로 잔혹했다. ⓒ싸이더스



영화는 현수의 성장 스토리로 읽힐 수 있다. 평범한 학생이 일진을 모조리 깨부수고 퇴학까지 당하는 처지가 되니까 말이다. 이게 도대체 왜 성장이냐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학교폭력을 미화하는 게 아니냐고 되받아칠 만하다. 하지만 당시 시대를 본다면, 당시 국가상을 들여다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학생들을 통제했는지 듣는다면, 현수의 그와 같은 행동을 성장으로 해석할 수 있음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때는 1978년,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 이후의 유신 시대 한복판이다. 학생들은 등교하면서 선도부에게 '충성'을 외치고, 학교에는 학생 교화를 이유로 군인이 상주했다. 학생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며,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인간이 되길 바랐다. 그렇지 않을 때엔 가차 없는 폭력이 날아왔다. 


그 폭력에는 육체적 폭력, 정신적 폭력, 성적 폭력, 언어 폭력, 인권 유린 폭력 등 모든 종류가 망라되어 있었다. 차라리 단순무식한 육체적 폭력이 가장 낮은 수위의 폭력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 나이 또래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음직한, 해보고 싶음직한 행동을, 학교에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력으로 교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엇나가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현수의 성장 스토리는 더 이상 성장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엇나감은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런 폭력을 당하는데 당연히 움츠려들며 더욱더 국가가, 학교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런 인간이 되어 갔다. 어떤 인간으로 되어 갔든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자발적인 선택도 아니었다는 게 중요하다. 


반면 현수는 최소한 자발적인 선택을 했다. 반항심과 함께 체력을 키워 가며 반발했다. 그렇다고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싸움에 휘말렸고 약간의 다툼을 했다. 그리고 성적이 떨어졌다. 학교는 그를 잡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악질'이라고 몰아세울 뿐이었다. 그가 퇴학을 당하는 대형 사건을 저지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학교의 책임이 아닌가. 최소한 '너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제스추어는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조건 '이거 악질이네. 안 되겠어. 혼 좀 나야겠다' 하고 끝나면 그게 무슨 교육인가. 


잔혹의 시대를 살아간 청춘을 위로하다


한 시대가 저무는 1978~9년. 그들이 헤쳐온 잔혹의 시대도 저무는가. 이 영화는 그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을 위로해준다. 하지만 그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을 듯하다. ⓒ싸이더스



영화는 이소룡으로 시작해 이소룡 대 성룡으로 끝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영화의 시작이 이소룡 영화를 좋아해 빠져들듯 보는 현수의 어린 시절이었고, 영화의 끝이 영화관에 이소룡 영화와 성룡 영화가 동시에 걸렸을 때 현수의 이소룡 옹호와 흉내, 그리고 친구 햄버거의 성룡 옹호와 흉내가 대결하는 장면이었다. 


성룡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게 영화 <취권>이었는데 1978년에 나와 우리나라에는 1979년에 들어 왔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이 되는 1978~9년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그때까지도 아직 이소룡의 인기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렇지만 곧 성룡의 전성 시대가 열리는 바,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떠오른다는 말이겠다. 


박정희 유신시대도 1979년에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그건 곧 현수와 친구들의 '말죽거리 잔혹사'도 비로소 끝났다는 게 아닐까. 한 시대가 저물고 새 시대가 열리는 건 시원섭섭하고 슬프고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건 그렇고 어떤 건 그렇지 않을 테다. 


이소룡의 시대가 저물고 성룡의 시대가 오는 건 그럴 테지만, 그들의 잔혹의 시대가 가는 건 조금은 다른 차원이다. 평생 다시 오지 않을, 사랑과 우정과 청춘의 학창 시절을 자기 손으로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보상해줄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들을 이해조차 하지 않을 이들이 대부분이 아닐까. 영화는 그런 시대를 살아간 모든 청춘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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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
    2017.02.12 13:37

    오랜만에 옛정취 나는
    말죽거리 잔혹사 봤어요.
    그런데 친구 영화봐도 그렇고
    진짜로 남자 학교들 쨩싸움, 패싸움, 서열, 위계질서가 그렇게 심했나요?
    전 여자라, 이게 영화라 그런지
    실지로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 BlogIcon singenv
      2017.02.12 13:39 신고

      흠, 전 남학교를 나왔는데, 실제로 말씀하신 식의 것들이 존재했었습니다. 물론 시대와 학교와 학급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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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쯤이면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답이 나올 수 있을까 <음의 방정식>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6. 4.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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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음의 방정식>


<음의 방정식> 표지 ⓒ문학동네


올해로 데뷔 30년 차를 맞은 일본 최고의 작가 중 한 명.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겸비한, 탁월한 스토리텔러. 사회 병폐의 핵심을 찌르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릴 줄 안다. 그를 대표하는 추리소설을 비롯해, 사회, 역사, 청소년, SF소설을 두루 섭렵했다. 남성 작가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면 여성 작가엔 그가 있다. 다름 아닌 미야베 미유키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미야베 미유키, 둘의 추리소설을 최소 1편 이상은 접해보았는데, 공통점이라 한다면 탁월한 가독성에 있다. 이는 곧 대중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무엇이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곧 작품성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작(多作) 작가라는 것. 엄청난 작품 수를 자랑하는 이들인데, 출간되었다 하면 거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럼에도 거품 논란 없이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작품성을 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둘 중에 굳이 고르라면 미야베 미유키를 고르겠다. 워낙 방대한 작품 세계를 자랑해 한 권의 분량이 많아서 그의 소설을 덜 접한 게 사실이지만, 상대적으로 작품 개개가 더 믿음이 간다. 더 공력을 들였다는 게 느껴지고, 생각할 요소들이 더 많다. 그리고 소설에서 작가의 생각과 시선이 느껴진다. 


다시 돌아온 미야베 미유키의 교내 미스터리 


<솔로몬의 위증>은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한 중학교에서 일어난 의문의 추락사를 바탕으로, 무너지는 학교라는 성역과 예민한 10대들의 심리를 담아냈다. 그렇게 현대사회의 속살을 집어내려 했다. 학교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곳이 아닌가. <솔로몬의 위증> 이후 20년, 당시 10대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후지노 료코가 변호사가 되어 다시 한 번 교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 


<음의 방정식>(문학동네)은 <솔로몬의 위증>에 이은 교내 미스터리 소설이다. 신흥 사학인 학교법인 세이카 학원이 배경이다. 이 학교는 A, B, C, D반으로 나뉘는데, 곧 등급 순이다. 이 등급은 고등부에 올라가서도 답습되고 대학 진학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건은 D반이 교내에서 '피난소 생활 체험캠프'를 열었던 토요일 밤에 일어난다.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피난소를 가정해 교실에서 침낭을 깔고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소등 후 밤 열한 시쯤 히노 선생이 D반 남학생 일곱 명이 모여 있는 3층 교실로 순찰을 왔을 때였다. 히노 선생은 과제를 하나 낸다.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다는 가정 하에 한 명을 희생 시켜야 하면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것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선택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아이들은 당황했지만 웃으며 지나쳤다. 하지만 리더 시모야마 요헤이가 도망쳐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이 밝혀졌다. 하지만 히노 선생은 일련의 사태를 모조리 부인한다. 선생과 학생 중 한 쪽은 거짓말을 한 것이리라. 얼마 후에는 아키요시 쇼타가 더는 못 참겠다는 메모를 남겨 놓고 수면유도제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삼키는 자살 소동도 있었다. 과연 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사회의 거울이자 바탕이 되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스승과 제자. 인생에서 한 명의 진정한 스승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꼭 학창 시절에 국한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기본 소양과 지식을 그때 배우기 때문에 인생의 스승 또한 그 시절에 만나기 쉽다. 그만큼 그때의 스승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반증하는데, 반대로 나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윽박 지르고 위협하고 지배하려 하고 억압하려는 스승이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그런 스승과의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제자에 대한 스승의 기억도 마찬가지겠지만, 스승은 한 명이고 제자는 다수이니 상대적으로 옅다. 


그렇게 볼 때 이 사건에서 거짓말을 한 이는 스승일 가능성이 크다. 정황 상으로도 한 명인 스승과 다수인 제자이니, 다수 간의 협의가 힘든 만큼 잘 맞추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자라는 입장에서 볼 때 제자를 골탕 먹이려는 행동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들은 스승의 위협과 억압을 막기 위해 스승을 골탕 먹이려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게 사건 자체보다 그 원인에 있다고 보았을 때, 진짜 나쁜 짓을 한 건 스승이 된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지점을 작가는 교묘히 잘 건드렸다. 


"음의 방정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선생과 학생, 가르치는 쪽과 배우는 쪽, 이끄는 쪽과 따르는 쪽, 억압하는 쪽과 억압받는 쪽의 조합부터 잘못되었고, 그러니 어떤 숫자를 넣어도 마이너스 답만 나온다." (본문 116쪽)


사회의 거울이자 바탕이 되는 학교. 그런 곳에서 교묘히 오가는 알력. 빙산의 일각과 같은 사건 뒤에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이고 고질적인 문제.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학교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오랜 세월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언제 쯤이면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 답이 나올 수 있을까. '음의 방정식'이 서글프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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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선생님, 음의 방정식, 추리소설, 폭력, 학교, 학생, 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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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위선과 거짓의 가면을 벗기고픈 소년의 방황

지나간 책 다시읽기 2014. 11. 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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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책 다시 읽기] <호밀밭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 ⓒ 문예출판사

고등학교 2학년이 끝나고 3학년이 되기 전 애매모호한 시간을 보냈을 무렵, 학교 도서관을 배회했다. 인생에 있어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명저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니, 꼭 그렇진 않았다. 그냥 원래 도서관을 좋아했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그렇게 한량같이 도서관을 휘젓고 있는데, 정말 우연하게 성장 소설 한 편을 발견했다. 제목은 <호밀밭의 파수꾼>. 무슨 이유였는지 지금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그 소설을 훔쳐왔다. 즉, 도서관 대출을 하지 않고 대출 코드 스티커를 떼어버린 채 그냥 가져와 버린 것이다. 이유없는 반항이었을까, 소설에 대한 알 수 없는 끌림때문이었을까. 홀든 콜필드처럼 모든 걸 증오하고 있어서 였을까.


"그래. 난 학교를 증오해. 정말 증오하고 있어. 그것뿐이 아냐. 모든 게 다 그래. 뉴욕에 사는 것도 싫어. 택시, 매디슨 가의 버스들, 뒷문으로 내려달라고 항상 고함치는 운전사들에다 런트 부부를 천사라고 부르는 엉터리에게 소개되어야 하고, 밖에 잠깐 나가려 해도 엘리베이터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하고, 항상 부룩스에 가서 바지를 맞추어 입는 자실들, 항상....."(호밀밭의 파수꾼, 195쪽, 문예출판사 판)


어찌 되었든 이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밀밭의 파수꾼>은 내 인생 최고의 소설로 자리매김 중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6세 소년인 홀든 콜필드가 네 과목에서 낙제하여 4번째 퇴학을 당한 후 겪는 2박 3일 동안의 일을 1인칭으로 풀어간 소설이다. 부유한 중산층의 자제인 소년은 왜 이리 세상에 불만이 많은 것일까.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모습일 뿐일까? 위에서 언급한 주인공의 말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속물적이고 허위에 가득 찬, 자신이 속한 중산층의 삶을 증오하고 있다.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고 말을 갖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생각은, 현대 사회가 가지는 비인간적인 면에 점점 지쳐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을까.


이 소설은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나 헤세의 <데미안>과는 확연히 다른 류의 성장소설이다. 그건 젊은이들만이 가지는 방황과 일탈, 호밀밭에 머물며 꼬마 아이들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걸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을 절묘히 파악한 덕분이겠다.


"어쨌거나 나는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조그만 어린애들이 어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항상 눈앞에 그려본단 말야. 몇천 명의 아이들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곤 나밖엔 아무도 없어. 나는 아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은 누구든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으면 얼른 가서 붙잡아주는 거지. 애들이란 달릴 때는 저희가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모르잖아? 그런 때 내가 어딘가에서 나타나 그 애를 붙잡아야 하는 거야.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이를테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거야.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것은 그것밖에 없어. 바보 같은 짓인 줄은 알고 있지만 말야."(호밀밭의 파수꾼, 256~257쪽, 문예출판사 판)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콜필드는 결국 집에 돌아갔고,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서부로 도피하고 싶다던 콜필드의 꿈은 미성숙한 인간이었던 청춘의 꿈으로 남게 된 것일까.


꿈을 꾸고 좌절하고 성장하고 포용하고 인정하고 성숙하는 인간. 콜필드가 가장 믿고 존경했던 선생님인 엔톨리니 선생님이 한 말을 통해 콜필드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통과의례를 지난 것이었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고귀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일에 비겁한 죽음을 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 277쪽, 문예출판사 판)


1952년에 소설이 출간되자 미국 사회는 엄청난 논쟁에 휩싸인다. 한 소년의 성장소설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가 말하는 말 하나하나가 당시 미국 중산층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고 사용하는 언어들도 직설적일 뿐만아니라 비속어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 변호사, 목사를 비난하는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논쟁이 계속될수록 판매는 급증하고, 윌리엄 포크너는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는 격찬을 보낸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1500만부 이상이 팔렸고, 세계 굴지의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소설'과 미국 여대생들이 뽑은 '금세기 100대 소설'에도 뽑혔다. 한편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는 2010년 타계했다. 이 소설이 세대를 거듭해 계속 읽히고 현대성을 갖는 이유는 아마도 지금 우리가 허위에 가득 찬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필자는 이 소설을 매년마다 한 번씩 읽는다. 혹자는 단순한 성장소설이라는 점을 들어 '피터팬 증후군'이라도 걸렸는지 알고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합당한 이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중학생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소설을 읽으며 일종의 소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을 처음 접했을 당시의 나와 대면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세대 간의 불통(不通)은 존재 자체에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해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서로를 알고 싶어하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으면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 <호밀밭의 파수꾼>을 좋아한 사람을 소개한다. '존 레논'을 암살한 자 '마크 채프먼'. 그는 존 레논을 암살한 혐의로 체포될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여러가지 추측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마크 채프먼이 정신이상자였다는 설이다. 마크 채프먼은 자신을 존 레논이라 생각하고 앞에 있는 존 레논이 가짜, 허위라고 생각해 그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평소 자신을 홀든 콜필드에게 집착했던 그는, 허위와 기만을 극도로 증오했던 홀든 콜필드처럼 행동한 것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부작용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81년 존 레논을 암살한 마크 채프먼은 종신형을 언도받고 지금도 교도소에 복무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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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여강여호
    2014.11.06 09:25 신고

    역시 진정한 독서가이십니다.
    좋아하는 책을 매년 한번씩 읽을 수 있는 열정.
    저는 그동안 너무 가벼운 독서를 했나 봅니다.

    • BlogIcon singenv
      2014.11.09 19:22 신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진정한 독서가라기보다는,
      <호밀밭의 파수꾼>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BlogIcon !sak@
    2014.11.06 23:49 신고

    저도 10녀전 군대가기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군대가기전 사춘기 시절보다 더 자아방황하던 시기였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 성장소설에 관심이 많아져서 다른 책들도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 다시 한번 읽어야겠습니다

    • BlogIcon singenv
      2014.11.09 19:23 신고

      언제 읽어도 재밌고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소설입니다.
      또 그때 그때 다른 느낌을 주는 참으로 신기한 소설이구요.

  • BlogIcon 모자장인
    2014.11.17 17:30 신고

    고등학생 때 받은 느낌과 대학생 때, 졸업하고 나서 느낌이 항상 다른 이상하면서도 뭉클한 소설인 거 같아요. 다른사람의 리뷰를 보니 또 새롭네요.

    • BlogIcon singenv
      2014.11.19 22:38 신고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니~
      왠지 동지(?)를 만난듯한 느낌입니다!
      평생 곁에 두고 읽을 만한 작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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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풍성하게 잘 자란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영화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4. 10. 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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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야간비행>



영화 <야간비행> 포스터 ⓒ엣나인필름



외롭고, 힘들고, 억울하고... 이런 감정들은 인간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이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는 없다. 다만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수 있는 이와 함께 헤쳐나가는 것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가 힘든 경우가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찾기 힘든 경우가 아닌, 어쩔 수 없는 경우 말이다. 이런 경우는 자신의 외로움과 힘듦과 억울함의 이유를 누구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을 때이다. 


내가 힘들다고 말할 때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또한 엄청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내가 힘든데  누구에게도 힘들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때는 살아가기조차 힘들다. 운전을 잘 못하는 이가 낮에 운전을 하면서 힘드니까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과, 운전을 잘 못하는 이가 밤에 운전을 하면서 누구도에게도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같을 수 있겠는가. 


절친했던 세 친구, 지금은?


영화 <야간비행>은 이런 상황을 다룬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이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외로움과 힘듦에 찌들어 서서히 죽어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사회의 파렴치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영화는 세 명의 친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용주(곽시양 분)는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1등급 모범생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알리기 힘든 비밀들이 있다. 미혼모인 엄마 밑에서 자랐고, 그는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여느 사람들과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그런 용주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두 명의 친구가 있다. 그 중에 기웅(이재준 분)은 고등학생이 된 지금 학내 폭력서클에서 우두머리를 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이 주로 괴롭히는 이가 중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던 또 한 명의 친구인 기택(최준하 분)이다. 용주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바로 기웅이다.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 이들의 사랑


이런 상황은 학창 생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중학교 때 친하게 놀던, 강하거나 잘 놀기는커녕 약한 축에 있던 친구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폭력서클에 가담해 중학교 때의 절친을 오히려 더욱 괴롭히는 상황. 암울했던 과거를 알고 있는 친구를 더욱 괴롭힘으로서 과거를 지우려고 하는 행동의 발로가 아닐까. 


극 중에서도 중학교 시절 기웅이 몇몇에 의해 집단으로 폭행을 당하고 울면서 가는 장면을 그의 절친 두 명이 보고 나서 이들의 사이가 벌어진 것으로 나온다. 이후 기택은 이유 없는 시달림을 받는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파국의 느낌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다. 흔히 있는 학교 폭력과 흔히 있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동성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을 뿐이다.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영화는 동성 간의 사랑을 아름다운 풍경과 색채를 이용해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다. 용주를 좋아하는 또 다른 친구인 준우. 그들이 함께 있는 곳은 주로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의 옥상인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보여지는 삭막한 서울의 야경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또한 용주가 기웅과 마음을 확인한 뒤 같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갈대습지공원의 모습은 가벼운 탄성을 부른다. 굳이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표현해야 하는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라고 할까. 이 영화를 보고 조금은 달라진 생각 또는 시각에 이 모습들이 한 몫 했다. 


풍성하게 잘 자란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


한편 기웅도 용주처럼 편모 슬하에서 자란 듯 보인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현재 수배 중. 회사 노조에 가담했다가 주동자로 과격한 행동을 해 경찰에 쫓기고 있는 신세이다. 용주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 외에 가족 간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진이라는 친구가 나오는데 반장으로 용주에 이어 2등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 친구는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져 기웅의 밑에서 폭력서클의 행동대장이자 2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에게는 공부도 싸움도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열등감 아닌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으로 학교의 선생님들이란 작자는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지껄이고 어떤 행동을 자행하는가? 학생이면 공부만 잘 하면 되고, 1~3등급 아래면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으며, 동성애자를 더럽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며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던 간에 무조건 좋은 대학만 가라고 한다. 



영화 <야간비행>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이 영화가 단순한 학원물 또는 퀴어 영화 그 이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사회 고발 영화가 아닌) 사회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어 봤을, 겪고 있는, 겪을 만한 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치 풍성하게 잘 자란 나무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기택은 우연히 용주와 기웅의 관계를 눈치챈다. 배신감을 느낀 기택은 이 사실과 함께 기웅의 가족 뒷얘기를 성진에게 고자질한다. 용주와 기웅 모두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성진은 이들을 한꺼번에 밟을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가파르게 빨라지며 파국으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과연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감독이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몇몇 장면들은 그들의 외로움, 힘듦, 억울함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것에 성공했다. 내가 그들의 상황이었다면 그야말로 세상에 혼자만 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인식 변화의 첫걸음을 '이해'라고 했을 때, 이 영화는 그 '이해'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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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야간비행, 퀴어 영화, 학교, 학교 폭력, 학원물
  • BlogIcon 노지
    2014.10.07 07:41 신고

    오늘도 좋은 후기 글 잘 읽어보고 갑니다.

    • BlogIcon singenv
      2014.10.07 18:54 신고

      제가 댓댓글 잘 달지도 않는데,
      이렇게 매번 찾아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ㅠ

  • BlogIcon 제철찾아삼만리
    2014.10.08 09:59 신고

    아..저도 이영화 봤어요..
    머리가 무거웠어요..짠하기도하구..잔인하게 슬프기도하고..
    본분이 있다고..하니 반가워서 들렀어요..
    잘 계시죠?

    • BlogIcon singenv
      2014.10.12 14:36 신고

      이 영화를 보셨다니 ㅠㅠ
      저는 잘 있어요~
      제철님도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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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태치먼트> 견뎌내기 어려운 우울함이 영혼을 잠식하는 그곳...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4. 5. 23.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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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디태치먼트>





미국에서 2011년에 개봉해 이미 3년이나 지난 작품이자 청소년들의 청소년들에 의한 청소년들을 위한 영화이지만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작품이지만, 시기에 상관없이 통용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청소년보다 어른들이 보아야 할 영화라고 생각된다. 영화는 <디태치먼트>. 우리나라 말로 '무심함' '거리를 둠'을 뜻한다. 


현실과 흡사한 영화 속 모습


헨리(애드리안 브로드 분)는 뉴욕 외곽에 위치한 한 학교의 대리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알고 보니 그 이유가 그 구역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는 학교 때문이었다. 그 학교는 소위 문제아들의 집합소였고, 그 문제아들의 상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그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어떤 학생이 선생님한테 협박을 하는데 흑인 갱단을 불러서 처참하게 강간 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상당수 선생님들이 버티지 못하고 학교를 떠나고, 남아 있는 선생님들의 상태는 가히 좋지 않았다. 헨리는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 이 영화의 시작 포인트는 학생들의 진저리 처지는 모습과 헨리의 대처법이다. 


헨리는 단 한 가지의 규칙을 말한다. "여기 있기 싫으면 오지마." 그리고 역시나 학생들은 헨리에게 험한 협박을 가하려 한다. 이에 헨리는 무심한듯 대처하며 이해한다고 조용하게 말한다. 카리스마 때문일까? 애정 때문일까? 아이들은 헨리에게 마음을 연듯 보인다. 





영화가 보여주는 초반 모습은 현실과 흡사하다. 현실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가 학생일 때를 생각해보면, 학생이 선생님에게 단순히 반항하는 행동을 넘어서서 욕설과 함께 협박까지 하는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 수업 시간에 모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 선생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거리를 두고 무심하게 학생들을 대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헨리도 그런 마음가짐인 것처럼 보인다. 


헨리가 보여주는 소통법


하지만 헨리에게는 인생을 관통하는 무시무시한 트라우마가 존재한다. 그 트라우마의 원인은 그의 할아버지인데, 기관에 맡겨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가끔 할아버지를 통제하지 못해 헨리를 불러서 처리하곤 하는데, 이에 헨리는 참지 못해 관리원에게 엄청난 욕설을 퍼붓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헨리는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훔치곤 한다. 자신의 모습이 창피하고 못났고 미안하고 처량하고 억울하기 때문일까? 


어느 날 버스 안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 소녀는 집 없이 떠돌며 몸을 팔아 연명하고 있었다. 소녀는 무작정 헨리에게 들이댄다. 그리고 다음에 또 한 번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 때,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잠자리와 먹을 거리를 제공한다. 그럴 때도 헨리는 역시나 무심한듯 조용하게 대처한다. 





헨리의 무심한듯 조용하게 대처하는 소통법은 무엇을 보여줄까? 그의 소통에는 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 접근하지 않는다. 위나 아래에서 바라보지 않고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그녀)가 누구인지 상관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은 굉장히 어렵다. 자신이 상처 받지 않을 강한 중심이 있어야 하고, 임기응변이 있어야 하며, 무심한듯 거리를 두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모순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교육, 소통, 삶에 대한 이야기


헨리는 같이 살게 된 소녀 에리카에게 에이즈 검사를 시키며 전에 없는 관심을 쏟고 에리카는 헨리에게 아침 저녁을 밥을 해주며 보답한다. 또한 이들은 함께 데이트도 즐기고 서로 선물도 챙겨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낸다. 헨리는 에리카에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털어 놓는다. 헨리는 7살 때 눈 앞에서 자살한 엄마를 발견한다. 그리고 엄마가 자살한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한편 헨리가 얼마간의 관심을 보였던 한 여학생 메디리스가 어느 날 헨리에게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은 텅 빈 교실에 있는 텅 빈 얼굴의 헨리 사진이었다. 이를 칭찬하는 헨리와 오열하며 자신을 붙잡아 주라는 메드리스. 하지만 헨리는 누구에게서나 거리를 두고 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받아줄 수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헨리는 에리카조차 보호 시설로 떠나보내게 된다. 과연 에리카와 메드리스는 어떻게 될까? 헨리는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지만, 비극으로 훨씬 더 치우쳐 있다. 거대한 비극에서 헨리가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그 자신조차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 말이다. 감독은 지루할 만큼 플래시 백을 자주 등장 시켜 그의 트라우마를 부각 시키는 것이다. 그래도 그를 그리워하고 좋아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다. 그 이후 나타나는 비극과 그에 대한 대처 또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영화는 교육에 대한 이야기이고,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며,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분명 그러한데, 마지막 장면의 스산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헨리는 텅 비고 어질러진 교실에서 홀로 

애드거 앨런 포우의 <어셔가의 몰락>의 일부분을 읊는다. 애수에 잠긴듯한 어셔가는 텅 빈 교실일 테고,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은 헨리의 무심한 마음일 테다. 어쩌다가 교실이 견뎌내기 어려운 우울함이 영혼을 잠식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일까...


마침내 저녁 어스름이 나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때

애수에 잠긴듯한 어셔가가 멀리서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한눈에 얼핏 보았을 뿐인데도

견뎌내기 어려운 우울함이 내 영혼을 잠식하는 듯 느껴졌다. 

나는 그 지역의 단순한 풍경을 둘러보았다. 

성벽과 하얗게 죽어버린 나무 등치와 저항할 수 없는 영혼의 짓누름을, 

거기에는 영혼을 침잠시키고 마음을 병들게 하는 구역질 나는 마음의 냉정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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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ingenv
교실, 디태치먼트, 무심, 반항, 비극, 삶, 소통, 이해, 청소년, 트라우마, 학교
  • 마지막싶새
    2014.06.1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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