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책하다

블로그 이미지

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대중'에 해당되는 글 5건

제목 날짜
  • 고고히 홀로 세상을 비추는 별이 될, 영화 <조커> 2019.10.05
  • '쇼'로 양산된 싸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피해자... <안개 속 소녀> 2018.12.05
  • 히가시노 게이고는 왜 인기가 많을까? 2018.09.25
  • 최고의 실력, 그러나 부적격자 토냐 하딩을 위한 변명 <아이, 토냐> 2018.04.04
  • 최후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무너졌다?(2) 2013.06.26

고고히 홀로 세상을 비추는 별이 될, 영화 <조커>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9. 10. 5. 08:00



[영화 리뷰] <조커>


영화 <조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미국 코믹북 시장의 양대 산맥 DC와 마블, '마블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리가 1960년대 '판타스틱 4'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 전까진 DC가 앞섰다고 한다. 영화 판권 시장 역시 슈퍼맨과 배트맨을 앞세운 DC가 앞섰다가, 2008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시작한 마블이 완전히 앞서게 되었다. DC도 뒤늦게 유니버스를 창조했지만 역부족,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본래, 마블이 캐릭터를 앞세웠다면 DC는 스토리를 앞세웠다. 그런 기조는 영화로도 이어져, 역대 최고의 슈퍼히어로 영화로 DC의 <다크나이트>가 손꼽히게 된 것이리라. 감독의 역량이 크게 좌지우지하겠지만 제작사의 입김이 없을 리 없다. 와중에 DC에겐 절대적 무기가 있으니, 역대 최고의 슈퍼히어로 캐릭터 '조커'이다. 역설적이게도 조커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빌런이다. 신기하게도 조커 단독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었다. 


DC가 방도를 모색할 때 아무래도 마블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수많은 캐릭터를 앞세워 거대한 연결 세계를 창조한 마블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보려고 한 것 같다. 토드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 배우를 앞세운 영화 <조커>로 고고히 홀로 세상을 비추는 별을 탄생시킨 것이다. DC가 앞으로도 별처럼 홀로 빛나는 캐릭터 영화를 만들 것인지는 미지수이지만, 별개로 <조커>는 반영구적으로 빛날 게 분명한 명작이다.


의심과 논란의 여지 없는 '연기'


고담시에서 광대로 일하며 낡은 아파트에서 노모를 모시는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 코미디언을 꿈꾸는 그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 뇌 또는 신경 이상으로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웃음발작을 일으키고, 망상증세도 심각한 수준이다. 주기적으로 약을 타 먹고 상담도 받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약골의 외모로 지나가는 10대 아이들한테 무시받으며, 발작적인 웃음에는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을지언정 하나같이 뭐가 웃기냐며 의아해할 뿐이며 심지어 테러까지 일삼는다. 


영화 <조커>에서 의심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연기'다. 호아킨 피닉스의 아서 플렉과 조커, 그리고 아서 플렉이 조커로 거듭나게 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 로버트 드 니로의 머레이 프랭클린. 우선 로버트 드 니로는 35여 년 전 본인이 주연 루퍼트 펍킨 역을 맡은 영화 <코미디의 왕>을 연상시키는, 짧지만 굵은 연기를 선보인다. <조커>에서는 아서 플렉이 루퍼트 펍킨과 대칭된다.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웃기지 못하는 아서 플렉,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기회를 갖지 못하는 루퍼트 펍킨. 둘 다 망상증세가 심각하다. 


베니스와 칸을 접수했지만, 미국 아카데미에선 3번이나 고배를 마신 호아킨 피닉스의 신들린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조커>는 족하다. 많은 이들이 이전에도 이후에도 최고의 조커로 '히스 레저'를 떠올리겠지만, 만들어진 조커와 만들어지는 과정의 조커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즉,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와 자레드 레토의 조커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조커들은 광기와 혼란과 악의 개념 하에 있지만, 만들어지는 과정의 조커에겐 슬픔과 아픔과 공허까지 있다. 태반이 웃음발작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조커 하면 떠올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의 슬픈 기원을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하염없이 웃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하염없이 한숨짓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호아킨 피닉스가 영화 <조커>의 모든 것을 직조했다. 


흠잡을 데 없는 '연출'


10대들한테 밟히고 광고판까지 박살나고선 실의에 빠져 있는 아서에게 광대 동료가 총을 건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쏴버리라고. 집에서 혼자 폼을 잡으며 시늉하다가 쏘아 보니 당황스럽고 무서운 게 아닌가. 그런데 하필 총을 아동병원에 가지고 갈 게 뭐람. 그 일로 아서는 회사에서 잘린다. 여자 한 명을 희롱하는 술 취한 3명의 남자들과 지하철 한 칸에 같이 탄 아서, 웃음발작이 터지고 그들에게 밟힌다. 곧 총성이 울리고 3명이 죽는다. 아서가 저지른 살인이었다. 이후 토마스 웨인 시장 후보가 죽은 3명을 옹호하는 인터뷰를 하고 고담시는 폭풍전야에 빠진다. 


영화 <조커>의 연출을 맡은 이는 토드 필립스 감독이다. 그가 누구인가. <행오버> 시리즈로 할리우드 막장 코미디의 대표 자리를 꿰찬 이가 아닌가. 연출 필모를 3편을 다큐멘터리로 시작한 그는, 이후 2000~2010년대에 내놓은 9편을 모두 코미디로 채운다. 그야말로 코미디에 환장한 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런 그가 <조커>를 연출한다니?


DC의 후광으로 대대적인 관심과 어느 정도의 흥행은 보장받을 테지만, 작품성을 보장받을 수 있을 지는 의문스러웠다. 솔직히, 많은 이들이 DC에서 내놓은 <조커>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테다. 뚜껑을 열어보니, 개봉도 하기 전에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다. 코믹스 최초 3대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에 이은 최초의 황금사자상 수상까지, 예상치 못한 이변이자 예상했을 쾌거이다. 


영화는 흠잡을 데가 없다. 개인과 사회라는 씨줄과 날줄로 종횡으로 엮어 탄생 신화를 써내려갔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어구가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다. 미쳐 돌아가는 사회 때문에 괴물이 탄생했다는 일방향식 서사에, 조커 이전 아서 플렉이라는 지극한 개인적 서사를 얹혀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입체감을 얻었다. 


<조커>에 있는 것들


우발적인 살인 이후 표정과 행동이 바뀌는 아서, 대담해지고 일면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엄마 말마따나 항상 웃으며 살려고 했지만 오히려 웃음발작 때문에 행복한 적이 없었던 아서, 그에게 살인이라는 건 무례한 세상을 재탄생시키기 위한 가멸찬 외침이 되었고 당하고만 살았던 불행한 자신의 인생을 향한 위로도 되었다. 이후 그는 광대라는 가면 뒤가 아닌 그 자신 광대가 되어 진짜 웃음과 함께 한다. 


영화 <조커>의 전체적인 줄거리에 특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깨달음은 차라리 <다크 나이트>에게서 받았고, 뇌리에 영원히 남을 듯한 모습은 히스 레저의 조커에게 남아 있으며, 기 막히게 창조된 세상은 DC 아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들에 보다 확실하게 담겨 있다. 그렇다면 <조커>에는 무엇이 있는가. 


코미디의 대가가 재창조한 완벽한 코미디 세상 고담시, 미친 도시이자 코미디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자 미쳐 가고 비극인 줄 알았는데 개 같은 코미디 인생을 산 아서 플렉, 토마스 웨인을 위시한 기득권층을 적으로 둔 대중들과 조롱의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을 적으로 둔 아서 플렉의 조우. 개인, 대중, 사회가 맞물리는 지점을 '조커'라는 상징과 은유의 꼭짓점으로 모이게 하는 과정이 드러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진행된다. 고담시, 웨인 부자, 아캄 정신병원 등 영화 <배트맨> 시리즈과 조우하는 요소들도 모두 조커로 모이는 것이다. 영화 <조커>에는 조커가 있다. 


신경을 긁는 불쾌함과 세상을 바꿀 이의 탄생을 직시하게끔 만드는 웅장함이 일품인 음악과 화려하진 않지만 조커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에 최적의 워킹을 선보이는 카메라, 그리고 아서 플렉의 어두침침한 집 내부와 생각조차 나지 않는 색의 옷에서 조커를 상징하는 화려한 색감의 옷과 초록 머리 그리고 빨간 입술 등이 항상 뒤를 받친다. 이보다 더 조커와 조커를 둘러싼 세상을 표현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DC, 개인, 대중, 사회, 연기, 연출, 조커, 코미디, 토드 필립스, 호아킨 피닉스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쇼'로 양산된 싸움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피해자... <안개 속 소녀>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12. 5. 08:00



[리뷰] <안개 속 소녀>


영화 <안개 속 소녀> 포스터. ⓒ미디어 마그나



형사 보겔(토니 세르빌로 분)은 사고를 일으킨 채 하얀 셔츠에 피를 묻히고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경찰은 정신 감정을 위해 정신과 의사 플로렌스(장 르노 분)을 부른다. 보겔은 플로렌스에게 이곳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의 전말을 들려준다. 


외딴 산골 마을, 성탄절을 이틀 앞둔 새벽 한 소녀가 사라진다. 박수만 몇 번 쳐도 주민들이 나와서 쳐다볼 정도로 조용하고 또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알 정도로 밀접한 동네이기에 그 파장은 생각보다 크다. 


도시에서 수사를 하러온 형사 보겔은 이 사건이 그냥 묻혀버릴 게 뻔하다는 걸 알아채고는 소녀의 부모와 동네 경찰을 설득해 '쇼'를 시작한다. 그는 언론이 벌 떼 같이 몰려오게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방법을 잘 아는데, 얼마전 테러 사건에서 잘못 이용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한 만큼 신중하지만 간절하다. 


이 사건에서 피해자 소녀를 향한 관심은 보겔의 쇼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하찮은 의심만으로 악마이자 괴물로 전국민에게 찍히게 되는 용의자 교수 마티니(아레시오 보니 분)를 향한 관심으로 어느덧 바뀐다. 


기대 반 걱정 반, 고품격 스릴러 


기대 반 걱정 반,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영화 <안개 속 소녀>는 범죄학과 행동과학 전문가 출신으로 스릴러 소설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이탈리아 작가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영화 시나리오로 구상했다가 소설로 내놓았고 다시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 각본에 참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연출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부응하는 면이 반이고 걱정을 떨치지 못한 면이 반이었다. 영화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적자임을 천명하다시피 한 원작 작가이자 감독이기도 한 도나토 카리시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는 에코가 다양한 언어와 학문으로 평생을 천착했던 질문 "거짓은 누가 왜 만들어내고, 대중은 어떻게 거짓에 속는가"를 그만의 범류인 범죄학과 심리학적으로 치열하게 접근한다. 


한편 영화는 고품격 범죄 스릴러를 표방하며 안개 낀 산골 마을이라는 음울한 분위기와 잡으려는 자, 잡히지 않으려는 자 간의 치열한 두뇌싸움을 내보이려 한다. 더불어 이중 삼중으로 쳐놓은 복선과 그에 따른 반전 또한 내보이려 한다. 혹자는 문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긴다고 생각할 게 분명하지만, 종종 과해서 지루하고 비(非)영화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재밌다'


이 영화를 재밌게 보려면 영화 외적으로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안개 속 소녀>를 그나마 '재미있게' 보려면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어렵게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 내적이 아닌 영화 외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영화는 굉장히 훌륭한 사례로, 수단으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보겔이 자신의 영위를 위해 수단으로 이용하는 언론, 언론은 핫한 시청률을 위해 대중영합적인 소재를 부풀려 내보인다.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상은 피해자일 테지만, 이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용의자 또는 범인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의자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며 관심을 끌지 못하면 '작은' 사건에 머물고 말 것이다. 


모두(경찰, 언론, 피해자)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큰' 사건이 되어야 하기에, 용의자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용의자의 '악마화' 또는 '괴물화'가 시작된다. 감정을 자극하는 피해자의 사례를 내보이는 이유도 그 작업의 일환이다. 


결국 피해자는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안개 속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피해자가 주체가 되기는커녕 객체가 되지도 못한 채 설 자리도 없어진다. 그 사이 모두의 시선은 경찰과 용의자 간의 싸움으로, 용의자의 신상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진 후,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 채 끝난다. 이쯤 되면, 용의자는 용의자일 뿐 경찰과 언론이 진짜 범인이자 가해자가 아닐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많은 걸 담아낸 영화


많은 걸 담아내려 했지만, 그게 독이 되었을지 득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영화 <안개 속 소녀>의 한 장면. ⓒ미디어 마그나



위의 일례가 사건에서 관심이 쏠리지 않는 주요 주체의 치명적이고 슬픈 말로라면, 이제 말하고자 하는 건 사건에서 관심이 과도 하게 쏠리는 주요 주체의 논란적인 말로이다. 아직 범인으로 확정되기 이전의 용의자를 향한 과도한 관심, 그로 인해 순식간에 괴물이자 악마가 되어버리는 모습 말이다. 


우린 이런 경우를 현실에서든 영화에서든 종종 보아왔다. '알 권리'를 제1의 원칙이자 가장 중요한 신념으로 내세우면서 아무런 꺼리낌 없이 마녀사냥을 시전한다. 영화 <더 헌트>를 보면 더 없이 심도 깊게 또 조심스럽게 하지만 명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다 얇고 넓게 비춘다. 


사라진 피해자, 전국민의 관심을 받는 용의자, 사건을 주도하면서 영합하고 대결하는 경찰과 언론, 그리고 사건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들. <안개 속 소녀>는 참으로 많은 걸 내보인다. 


보다 훨씬 디테일하고 유려할 소설에서 메시지와 캐릭터를 최대한 살려 영화에 내보이려 한 것 같은데, 할리우드 문법에 익숙한 관객의 눈에 익숙하지 않은 유럽 영화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너무 늘어진다는 느낌이 종종 한없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행간과 자간의 늘어짐이라는 보기 불편한 느낌과 일종의 '여백의 미'라고 볼 수 있을 여유로운 느낌의 경계에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한 번 보면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 보면 적어도 영화의 전부를 받아들일 순 있다. 온전히 콘텐츠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적어도 영화를 두 번 이상 보고 소설까지 섭렵해야 하겠다. 더할 나위 없는 고품격 스릴러를 한껏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거짓, 경찰, 괴물, 대중, 스릴러, 악마, 안개 속 소녀, 언론, 용의자, 피해자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히가시노 게이고는 왜 인기가 많을까?

생각하다 2018. 9. 25. 13:43



20대 초반, 추리소설에 푹 빠져 지낸 적이 있다. 내 생애 유일하게 밤새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다 읽어버린 책도 다름 아닌 추리소설이다. 피터 러브시의 <가짜 경감 듀>, 그 유쾌하고 짜릿했던 순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을 때 종종 추리소설을 찾는다. 


세계 3대 추리소설이니 세계 10대 추리소설이니 따위의 것들을 거의 모두 섭렵했다. 개중엔 크게 추리의 시작과 과정과 끝을 중심으로 추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소설, 추리는 곁가지인 대신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이면과 세상의 필연적 부조리함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더 좋아하고 더 높게 치는 편이다. 


추리소설의 본래적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뭐니뭐니 해도 '추리'가 아닐까. 추리, 즉 사건과 트릭이 얼마나 치밀하고 철저하게 직조되어 있느냐, 독자들로 하여금 얼마나 감탄을 자아내게 할 수 있는가, 독자들의 예측 범위를 얼마나 벗어났는가 등이 중요할 것이다. 엘러리 퀸의 작품들을 보면 가히 그 환상적인 추리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추리소설 마니아들은 당연히 이들 소설을 더 높게 친다. 거기에서 어떤 문학적, 인문학적 요소를 끄집어내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저 충실하게 누구도 생각할 수 없으면서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추리를 내보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도 많다. 


동양 추리소설의 천국이자 최첨단, 일본


히가시노 게이고 ⓒ나무위키



추리소설에서 추리적 재미 아닌 의미를 찾아야 하겠느냐고 불평할 수 있겠지만, 나 같은 독자는 그래야 한다. 추리소설 입문을 늦게 한 독자일 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겠는데, 추리소설계에서 보면 수준이 낮은 독자일 수도 있고 오히려 수준이 높은 독자일 수도 있다. 결론은 추리소설계 전체의 수준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던 건 분명하다. 


동양에서 일본은 추리소설의 천국이자 최첨단이다. 아니, 현재는 전 세계에서조차 북유럽 정도 아니고선 대적할 곳이 없는 최고의 추리소설 나라이다. 그런 일본 추리소설계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한다. 신본격과 신사회파. 본격에서 시작된 일본 추리소설이 사회파를 지나 두 가지 흐름이 따로 또 같이 흐르게 된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 에도가와 란포로 대표되는 본격은 사건과 트릭을 중심으로 촘촘하고 철저하게 직조된 소설이고, 일본 추리소설의 거장이자 국민작가이기도 한 마츠모토 세이초로 대표되는 사회파는 인간을 중심으로 현실 사회와 밀접하게 연관된 이야기를 그려낸 소설이다. 이후 80~90년대에 사회파에 반하고 본격으로 돌아가자는 신본격과 사회파를 잇는 신사회파가 동시다발로 출현한다. 


그 즈음 출현한 수많은 추리소설가들, 그중에서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위치는 독보적인 듯하다. 특히 옆나라인 우리나라에서 그 위치는 추리소설계, 아니 문학계, 아니 출판계 전체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왠지 생각나는 그 이름 무라카미 하루키가 몇 년에 한 번씩 출현해 출판계 전체를 뒤집어버리려고 하는 것과 다르게 실상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과 다르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 년에도 몇 편씩 출간하면서도 적어도 흥행면에서 실망시키는 법이 한 번도 없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 ⓒ현대문학



히가시노 게이고를 시작할 때 가장 많이 접하는 소설은 단연 <용의자 X의 헌신>일 것이다. 일본 대중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상 중 최고봉인 나오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데뷔한 지 35년 정도가 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약 데뷔 20년 정도 시기의 작품으로 모든 면에서 완숙된 면모를 보인다. 


추리소설에 한창 빠져 있던 당시 막 출간되어 수없이 많은 추천을 듣고 읽기 시작했었는데, 자연스레 그의 다른 소설들을 접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기억에, 오프라인 아닌 온라인에서 주로 추천의 말들을 접했는데 대부분 여성이었던 것 같다. 이 소설이 겉은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실상 극강의 사랑 방식을 내보이기 때문이었기 때문인데, 언제 보아도 반할 만한 아름다고 슬픈 사랑의 모습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품으로 본격 미스터리 대상 소설부문을 수상했을 만큼, 일본 추리소설계 계파에서 신본격에 속해 있다고 볼 수 있는 소설가이다. 하지만 대표작 <용의자 X의 헌신>에서 보다시피 추리를 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추리 자체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선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국내에 출간된 지 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포진되어 있거니와 얼마전에는 100만 부를 돌파하기도 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취하고 있지만 실상 인간 본성의 따뜻함을 내보이는 게 주된 목표인 소설이다.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추리적 재미의 반석 위에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한껏 발휘한 '인간'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낸 소설이라면 독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 무겁거나 사회의미적이지도 너무 가볍거나 사건트릭 위주도 아닌 그 경계에서 자유자재로 줄타기를 하는 소설이 어디 흔한가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기


우리나라 추리소설계를 생각해보자. 뭘 알아야 생각도 해볼 텐데 알 수가 없으니 패스하자. 우리나라 문학계를 들여다보자. 여전히 본격문학이 우위에 있다. 대중문학 또는 장르문학은 무시하고 거들떠도 안 본다. 그 소설들의 역량이 떨어지던가 또는 건질 게 없던가 하는 건 차치하고서도 말이다. 들여다보지 않으니 역량을 높일 이유가 없던가, 역량이 떨어지니 들여다볼 필요가 없던가, 여튼 어떤 식으로 문제는 문제다. 


일본은 추리소설계뿐만 아니라 문학계 전체에서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을 따로 또 같이 챙겨왔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게 아닌가. 본격문학을 대표하는 상인 아쿠타가와상과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나오키 상의 동급 위상은 일본 문학계의 축복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기는 단편적으론 여성이 좋아할 만한 소재, 추리가 주는 내재적 재미와 추리 아닌 것들이 주는 외재적 의미의 자유자재 줄타기, 무엇보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훌륭한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 등이 있을 테다. 하지만 기실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 뒤에는 일본 문학계의 실력이 있다. 


본격과 대중을 가리지 않고 재미와 의미를 포용하는 자세 말이다. 분명 이는 오랜 시간 반목과 조율을 그 자체가 분열이나 혼란이 아닌 민주적 다양성의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하는 너른 자장 아래서 계속 반복해온 결과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소설가가 탄생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와중에 영리하게 이쪽 저쪽을 오가며 셀프포지셔닝을 하는 소설가 장강명이 있긴 하다. 기자 출신으로 어떻게 하면 사회에 목소리를 내며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 굴하지 않는 자신만의 신념을 지닌 채 다작의 기본으로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데뷔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그의 앞으로의 10년이 기대되는 점이다. 제2의 히가시노 게이고, 제2의 장강명이 나오길 기대한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대중, 본격, 용의자 X의 헌신, 인기, 일본문학, 추리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최고의 실력, 그러나 부적격자 토냐 하딩을 위한 변명 <아이, 토냐>

신작 열전/신작 영화 2018. 4. 4. 08:00



[리뷰] <아이, 토냐>


영화 <아이, 토냐> 포스터. ⓒ누리픽쳐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피겨스케이팅에 관심을 갖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토냐 하딩(마고 로비 분), 극악한 엄마(앨리슨 제니 분)의 폭력적인 관심과 가르침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반면, 그 때문인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성적과 함께 성격과 행동의 돌출적이고 폭력적인 끼를 숨기지 못했다. 


토냐는 우연히 만난 제프 길롤리(세바스찬 스탠 분)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한다. 하지만 그는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광인이었다. 지옥 같은 엄마와의 일상에서 빠져 나와서 정착한 곳이 또 다른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들한테서 사랑을 느꼈다. 문제는, 삶을 파괴할 게 분명한 그의 폭력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킬 정도의 출중한 실력은 대중의 사랑을 불러일으킨 반면, 클래식이 아닌 하드코어 음악을 틀고 점잖치 못한 의상을 입고서 무대에 오르는 이 선수를 심사위원들은 고깝게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였고, 1992년 알베르빌과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직전 일어난 '그 사건'은, 그녀로 하여금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타지 못하게 하였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부여했으며, 미국 피겨스케이팅계 추락의 빌미를 제공했다.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 <아이, 토냐>는 1990년대 미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 중 하나인 '낸시 캐리건 습격 사건'을 주요 키워드이지만 루즈한 톤으로 깐, '토냐 하딩'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거대한 사건에 가려진 토냐의 진짜 삶의 면면들 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토냐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의 여성'과, 또한 미국과 대중과 미디어의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80, 90년대 미국은 절제와 통제의 시대로 진입해 있었다. 신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집합체는 여러 곳에 손을 뻗었고, 스포츠 종목 중 유독 예술적이고 여성적인 피겨스케이팅은 실력만큼 중요한 아니, 그보다 중요한 외모와 이미지가 순위를 결정하고 대표를 선발했다. 가난해서 '제대로 된' 의상을 입을 수 없었고, 치명적인 환경에서 자라와 '고상할' 수 없었던 토냐 하딩은 부적격자였다. 


그녀의 실력은 미국을 대표하고도 남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미국(의 심사위원)이 원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전보다 훨씬 다양성과 개성이 추구되는 지금이라면 그녀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원석의 느낌도 충분히 강점이 되고도 남았겠지만, 그때는 더할 나위 없는 특급의 약점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그녀, 그대로의 여성으로 남아 있기 힘들었다. 만들어진 여성,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 보수적인 여성상이어야만 했다.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면서도 블랙 코미디 요소를 섞는 기발함을 발휘했다. 그때 그 시절의 느낌과 캐릭터를 최대한 그대로 가져와 토시 하나 바꾸지 않는 대사를 차용했지만 진지하지 않은 편집과 음악과 여러 영화적 기법을 통해 더 깊은 감정이입을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토냐 하딩의 삶의 면면에 환멸과 냉소를 던지기도 한다. 


반강제적인 통합과 편입에는 필히 반발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세계 패권 국가로서의 미국이라면 당연히 자기 입맛에 맞는 선수를 국가대표로 내보내려고 했을 터,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자랑하는 문제아 토냐는 골칫덩어리이자 고민덩어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문제 삼는 게 바로 그녀 삶의 면면들이다. 


그녀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다. 비극은 그녀의 모든 것인 피겨스케이팅에 거대한 명과 암을 선사한다. 명암은 미국에 고민을 던지고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그녀,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그녀, 그에 대한 고민을 또는 반론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조심스럽게나마 들어볼 수 있게 되었다.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도 빠르고 단편적으로 쓸고 지나가는 듯한 영화의 면면들은 그런 조심스러운 들여다보기의 흔적들이다. 


토냐 하딩이고 싶었던 토냐 하딩


영화 <아이, 토냐>의 한 장면. ⓒ누리픽쳐스



토냐 하딩이 더 이상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리고 그녀에게 '은반 위의 악녀'라는 낙인을 찍어버린, 그 사건은 엉망진창이다. 하필이면 그 사건의 주인공(피해자) 낸시 캐리건은 토냐의 강력한 라이벌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미국이 원하는 여성상에 거의 완벽히 부합하는, 그야말로 토냐와 정반대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하필이면 그 사건의 또 다른 주인공(가해자)인 괴한이 토냐의 남편과 토냐의 보디가드(라고 주장하는)와 연류되어 있던 게 아닌가. 미디어와 대중이 그런 스캔들과 가십거리를 가만히 놔둘리가 없다. 미디어로서는 그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만한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고, 대중으로선 그만큼 신나게 열광할 사건이 더이상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토냐 하딩과 낸시 캐리건은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던 미국 피겨스케이팅계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라이벌이 아닌가. 어떤 식으로든 최고의 유명인의 속절없는 추락은 하릴없는 대중, 별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 그런 대중에게 입맛 당기는 기삿거리를 찾는 미디어에게 가장 핫한 일이다. 


이 사건을 온전히 토냐 하딩의 불우한 비극의 삶의 연속적인 행태의 정점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미국과 미디어와 대중이 한통속이 되어 토냐 하딩을 지옥으로 이끌어 버렸다고 할 수도, 토냐 하딩의 전 남편과 보디가드가 그녀 모르게 꾸민 범죄의 결과로만 생각할 수도 없다. 진실은,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 어디에서도 정작 '토냐 하딩'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냐 하딩은 그저 토냐 하딩이었을 뿐이고, 토냐 하딩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피겨스케이팅을 타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바람을 이해하고 동조하고 도와준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조차도 말이다. 그녀는 '은반 위의 악녀'는커녕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고 이용당하고 조작당한 한 여자였다. 단순히 불쌍하다는 말로는 그녀를 설명할 수 없다. 차라리 악녀가 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낸시 캐리건, 대중, 미국, 미디어, 아이 토냐, 여성, 토냐 하딩, 피겨스케이팅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최후의 영화 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무너졌다?

신작 열전/신작 도서 2013. 6. 26. 07:28


[서평] <카이에 뒤 시네마>1997년 개봉한 <타이타닉>을 시작으로 전 세계 영화 흥행의 기준은 10억 달러가 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는 거의 매년마다 10억 달러 또는 그 언저리의 흥행을 올리는 영화들이 등장했다. 즉, 영화 한 편으로 1조 원 이상의 수익을 내는 '영화 1조 원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미국 할리우드에 한해서). 영화는 당당히 세계 유수 산업의 한 방면이 되었고, 자연스레 돈을 쏟아 부어서라도 관객들의 눈을 홀리는 재미있고 판타스틱한 영화들이 주류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는 2001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흥행의 기준이 관객 1,000만 명 동원이 되었다. 역시나 거의 매년마나 1,000만 명 흥행 돌풍의 영화들이 등장했다. 1000억원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흥행 기준을 바로 금액으로 환산하는 미국의 박스오피스 집계 방식과는 다르게, 우리나라는 관객을 집계하기 때문에 금액으로 환산된 추이는 '영화진흥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야 알 수 있다.) 혹자는 영화를 예술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모습에서 예술을 찾아보기란 너무 힘들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작품성의 좋고 나쁨을 떠나 흥행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영화는 애초에 투자를 받지 못해 만들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평할 거리가 없는 대중친화적인 영화들만 만들어진다. 영화의 '다양성'은 희미해지고 모두 획일화되어 간다. 더욱 자극적이고 볼거리가 풍부한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와 함께 성장해온 영화 잡지는 아이러니하게도 멸종의 위기에 봉착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 <스크린>이, 1989년에는 <로드쇼>가 창간된다. 이어 1995년에 <씨네 21>과 <프리미어> 등이 창간되고, 2000년과 2001년에 각각 <필름 2.0>과 <무비위크>가 창간된다. 그리고 오래는 10~30년 새에 모두 멸종했다. 

그 많던 영화 잡지는 몇 달 전 <무비위크>의 폐간으로, <씨네 21> 정도만 살아남았다.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영화의 완전한 상품화가 진행되다보니, 평론이나 비평은 온대간대 없이 할리우드 영화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가 갖는 고유의 예술성이나 미학, 그리고 작가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쪽으로만 쏠리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대중과 예술의 조화를 꾀하지 못했다. 이것이 결정적 패착이라 생각된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

<카이에 뒤 시네마> 표지 ⓒ 이앤비플러스



세계 최고의 영화 잡지라 칭해지는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사도 비슷한 맥락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51년 프랑스 '누벨바그'(뉴 웨이브-새로운 물결) 영화 운동을 이끈 평론가와 감독들이 뭉쳐 창간한 영화잡지이다. 이 잡지는 당시 영화계에 팽배했던 구시대적 유물을 전투적인 시각으로 매섭게 비판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황색 시대'(<카이에 뒤 시네마>의 표지 색깔이 황색이다. 즉, <카이에 뒤 시네마>의 시대이자 절정기라 할 수 있다.)의 황금기를 구사하며, '작가주의' 개념을 창안하며, 미적 취향에 심취한다.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자연스레 당시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던 미국 할리우드를 겨냥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가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았지만 미국으로 넘어갔고, <카이에 뒤 시네마>같은 영화 잡지가 프랑스에 생기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러며 할리우드의 아웃사이더들 몇몇을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알프레드 히치콕 등이 있다. 

1970년대는 '적색 시대'(마오쩌둥주의를 채택하는 등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표명한다.)라 칭한다. 1968년 세계를 강타한 68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급진적 선회였다. 오로지 미적인 시각에서 영화를 판단하는 성향에서 탈피해 정치적 색깔을 입는다. 비(非)할리우드적인 정치적・형식적 대안 영화의 발굴에 힘을 실었다. 일종의 과도기라고 할 수 있겠다. 특유의 전투적 비판과 작가주의 성향, 그리고 영화 자체의 격상을 위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80년대 들어서 위기에 봉착한다. '대중'과 '예술'의 조화를 중시하는 고유의 성향을 외면한 채, '대중'에게로 쏠리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이는 1981년 새로 부임한 편집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빠르게 변하는 영화 세계에 발을 맞추기 위해 변화를 시도하였다. 예술을 버리고 문화를 선택했다. 

마지막 보루, <카이에 뒤 시네마> 무너지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책 <카이에 뒤 시네마>(이앤비플러스)는 이런 일련의 역사를 훑고 있다. 이 잡지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이 잡지를 움직인 사람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말이다. 

저자는 전투적 비판이 상징인 이 영화 잡지를 전투적으로 비판한다.

특히 1980년대 이후 변해버린 <카이에 뒤 시네마>를 통렬히 비판한다. 이 영화잡지의 움직임을 '모더니스트 최후의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설명하면서, 1980년대 이후 이 프로젝트는 끝나버렸다고 말한다. 일종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만은 전투적 영화 비평에 기반을 둔, '대중'과 '예술'의 조화를 무너뜨리지 않았을 줄 믿었던 모양이다. 저자의 통렬한 비판은, 저자의 <카이에 뒤 시네마>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비례한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1988년 <르몽드>에 합병되면서 주류에 편승된다. 비록 비평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주류에 편승하는 비평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여전히 전투적 비평가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미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훌륭한 선례가 있기에(구시대의 주류 비평을 청산하기 위한 '뉴 웨이브' 운동을 전개), 다시 부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저자의 시각은 확고해 보인다. '문화'로써의 영화보다 '예술'로써의 영화를 선호하고, 이는 통렬하고 전투적인 비평 위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는 게 존재한다. 앞으로 영화는 산업으로써 소비의 형태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것이다. '예술 영화'의 존재가 꼭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영화에 '예술성'을 부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영화의 위상에 있어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역할은 실로 막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카이에 뒤 시네마>의 위상은, 판매부수나 그 유명함을 제외하고 과거에 비할 바가 아닐 정도로 축소되었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은 결국 획일화를 불러오고, 그 획일화는 분명 사회를 황폐화시킬 것이다. 현재 영화산업은 거의 획일화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치우치지 않는 조화의 모습이 필요한 때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가 추구했던 비평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과 '예술'의 소통이 그리워진다.


"오마이뉴스" 2013.06.25일자 기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에 공감하셨다면 아래 손가락 추천을 눌러주세요(로그인불필요)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Posted by singenv
대중, 영화, 예술, 작가주의, 책으로 책하다, 카이에 뒤 시네마
  • BlogIcon Genie
    2013.06.26 08:53

    카이에 뒤 시네마(Cahiers du Cinéma )하니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문구가
    ‘비평적 테러’이네요....

    대중과 소통하면서 질이 높고 돈도 벌 수 있는 영화가
    과연 가능할까 하는 명제를 제시해주는 듯 싶습니다....

    늘 좋은 글 잘 음미하고 갑니다........ 행복한 하루되세요.....

    • BlogIcon singenv
      2013.06.26 17:31 신고

      제가 '카이에 뒤 시네마'를 잘은 몰라서
      혹여 관련 사실에 대해 실수를 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이 시대 최고, 최후의 진정한 영화 잡지인 것만은 맞지만요^^
      행복한 하루되세요!

트랙백

※ 스팸 트랙백 차단중 ...{ ?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블로그 이미지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by singenv

공지사항

  • 댓글에 대한 공지
  • [책으로 책하다 도서 목록]
  • <오마이뉴스> 서평/리뷰 송고 방침
  • 모든 이미지는 인용 목적으로 사용..

    최근...

  • 포스트
  • 댓글
  • 트랙백
  • 개인 성장, 사회 변화와 함께 하는..
  • 밖은 초대형 허리케인 안은 초대형..
  • 심각한 문제의식을 인상적인 외형으..
  • 영국 팝스타 찰리 XCX가 제작한 여..
  • 평범한 노인 존 뎀얀유크 vs 잔혹한..
  • 더 보기
  • 이 작품이 사랑받지 않을 날이 오길..
    ㅇㅇ ㆍ 10.22
  • 이해하진 않더라도 또는 못하더라도..
    singenv ㆍ 10.01
  • 누구나 한번은 거쳐간 시간이지만..
    여강여호 ㆍ 10.01
  • 결국엔 보는 이들이 느끼는 나름의..
    여강여호 ㆍ 09.20
  • 위기는 항상 생기기 마련인데, 위기..
    singenv ㆍ 07.01

태그

  • 욕망
  • 재미
  • 행복
  • 아포리즘
  • 중국
  • 연기
  • 가해자
  • 사랑
  • 관계
  • 전쟁
  • 희망
  • 피해자
  • 넷플릭스
  • 역사
  • 영화
  • 미국
  • 죽음
  • 현실
  • 가족
  • 소설
  • 책
  • 여성
  • 삶
  • 폭력
  • 인간
  • 일본
  • 천재
  • 만화
  • 책으로 책하다
  • 성장

글 보관함


  • 2019/12
    (2)

  • 2019/11
    (13)

  • 2019/10
    (22)
«   2019/12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링크

카테고리

다양한 시선 (1250)N
신작 열전 (546)N
신작 도서 (296)
신작 영화 (250) N
넷플릭스 오리지널 (50)N
모모 큐레이터'S PICK (31)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오래된 리뷰 (184)
생각하다 (231)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그대 그리고 나 (17)
서양 음악 사조 (8)
인권 선언 문서 (4)
조선경국전 (5)
중국 영화사 개괄 (5)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카프카의 편지 (6)
팡세 다시읽기 (14)
명상록 다시읽기 (12)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감독과 배우 콤비 (10)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궁극의 리스트 (8)
제9의 예술, 만화 (14)
독립영화의 힘 (4)
생생 스포츠 (10)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첫 문장-아포리즘 (8)

카운터

Total
1,949,033
Today
16
Yesterday
198
방명록 : 관리자 : 글쓰기
singenv's Blog is powered by daumkakao
Skin info material T Mark3 by 뭐하라
favicon

책으로 책하다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 태그
  • 링크 추가
  • 방명록

관리자 메뉴

  • 관리자 모드
  • 글쓰기
  • 다양한 시선 (1250) N
    • 신작 열전 (546) N
      • 신작 도서 (296)
      • 신작 영화 (250) N
    • 넷플릭스 오리지널 (50) N
    • 모모 큐레이터'S PICK (31)
    • 지나간 책 다시읽기 (108)
      • 한국 대표 소설 읽기 (11)
    • 오래된 리뷰 (184)
    • 생각하다 (231)
      • 황창연 신부의 삶 껴안기 연재 (5)
      • 그대 그리고 나 (17)
      • 서양 음악 사조 (8)
      • 인권 선언 문서 (4)
      • 조선경국전 (5)
      • 중국 영화사 개괄 (5)
      • 출판계 살리기 프로젝트 (3)
      • 카프카의 편지 (6)
      • 팡세 다시읽기 (14)
      • 명상록 다시읽기 (12)
    • 보고 또보고 계속보기 (46)
      • 감독과 배우 콤비 (10)
      • 일기로 읽는 히스토리 (6)
      • 궁극의 리스트 (8)
    • 제9의 예술, 만화 (14)
    • 독립영화의 힘 (4)
    • 생생 스포츠 (10)
    • 내맘대로 신작 수다 (17)
    • 첫 문장-아포리즘 (8)

카테고리

PC화면 보기 티스토리 Daum

티스토리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