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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문 자리, <미러 넘버 3>가 던지는 상실의 얼굴들

singenv 2025. 11. 2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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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미러 넘버 3>

 

영화 <미러 넘버 3> 포스터. ⓒM&M 인터내셔널

 

베를린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대학생 라우라는 남자친구, 그의 친구 커플과 함께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오픈카를 타고 가니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다. 애초에 내키지 않았던 라우라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고, 남자친구가 차를 태워 기차역으로 데려다주는데, 사고가 나고 만다. 그렇게 남자친구는 즉사하고 라우라는 기적적으로 별 탈 없이 살아난다.

사고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베티는 당연한 듯 라우라를 집으로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라우라도 당연한 듯 받아들인다. 일을 보고 귀가한 베티의 남편과 아들은 어딘지 불편해 보인다. 라우라에게 매너 없이 구는 것이다. 베티에게 한 소리 듣고 난 후 라우라에게 잘해 주는 그들. 라우라는 며칠 더 머물기로 한다.

그렇게 라우라와 베티의 가족은 마치 한가족인 것처럼 지낸다.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음악 듣고, 라우라가 밥도 차려주고 화단도 가꾸고 피아노도 치고 가족 일터인 정비소에도 들른다. 그러던 어느 날, 라우라는 베티의 아들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옐레나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머니가 라우라를 대체자로 집에 들여놓았다는 것.

‘미러 넘버 3’, 흔들리는 마음의 파문

영화 <미러 넘버 3>는 독일의 거장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신작이다. 2000년 장편 데뷔 후 꾸준히 작품을 내놓고 있는 그는 베를린 영화제를 제 집 앞마당 드나들 듯하는 한편 칸과 베니스에도 초청되고 있다. 모호하고 어렵기로 소문난 만큼 대중적 인기를 끌기 힘들 텐데, 우리나라에 꾸준히 소개되며 1만 명 이상의 관객수를 동원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20년 내놓은 <운디네>를 시작으로 2023년의 <어파이어>와 이 작품 <미러 넘버 3>까지  ‘원소 3부작’이라 명명한 시리즈를 선보였다. 각각 물, 불, 그리고 바람을 상징적으로 배치했다. 주지했듯 그의 작품들은 난해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 <미러 넘버 3>의 경우 그나마 평이한 편이다.

제목이 눈에 띈다.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거울 모음곡 M.43>의 3번째 곡 ‘바다 위의 작은 배’를 가리킨다. 하여 ‘미러 넘버 3’다. 극 중에서 라우라가 피아노로 연주하는데,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도 연주된 바 있다. 평온한 가운데 격한 요동의 변화로 치닫는다.

가장 조용한 순간에 드러나는 ‘모순의 얼굴’

영화에는 두 가지 상실의 모습이 보인다. 라우라는 내키지 않는 여행을 떠났다가 변을 당해 남자친구를 눈앞에서 잃었다. 그런데 별 감흥이 없다고 한다. 그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인생에서 큰 의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굳이 마음을 쏟을 필요가 없다고, 아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 받아들였을까.

한편 베티는 사랑해 마지 않은 다 큰 딸 옐레나를 허망하게 잃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베티로선 그 이유를 알 수 없거니와 이제 물어볼 수도 없으니 속이 곪아갈 뿐이다. 상실의 아픔과 슬픔을 곱절에 곱절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옐레나를 연상시키는 라우라와 우연히 조우한다.

교통사고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라우라를 극진히 보살피는 베티와 가족들이지만, 정작 라우라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 분명 함께 있지만 없는 느낌, 그녀를 옐레나의 대체자로 생각하지만 그녀는 결코 옐레나가 될 수 없다. 베티는 옐레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길 바랄 뿐이고 자신의 챙김과 돌봄을 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라우라’라는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삶을 통과하는 바람, 그리고 우리가 붙잡으려 하는 것들

상실을 대하는 모양은 제각각이다. 오랫동안 추모를 이어가기도 하고,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들기도 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기도 할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현실을 부정할 수도 있고 대체자를 물색할 수도 있을 테며 상실 자체를 늦추거나 없었을 일이 되게끔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베티의 경우 가장 안 좋은 형태를 띄고 있다. 아무리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고 다른 반려동물로 펫로스 증후군을 극복한다고 하지만 말이다. 베티는 라우라를 최소한 ‘대체자’로도 여기지 않았고 ‘대체품’ 정도로 여겼다. 어차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인연이니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과도하게 모호하거나 난해한 이야기도 아니고 평면적인 스토리 라인임에도 생각할수록 깊이를 더해간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삶을 영위해 가는 데 맞닥뜨리곤 하는 것들. 이를테면 바람 같은 것들. 왔다가 스쳐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나 천지를 진동시킬 수도 있는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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