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열전/신작 영화

빛나는 타이페이, 텅 빈 청춘... 욕망의 도시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

singenv 2025. 11. 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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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마작>

 

영화 <마작> 포스터. ⓒ에이썸픽쳐스

 

지난 2007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대만의 거장 감독 에드워드 양, 그는 허우샤오시엔과 차이밍량 등과 함께 1980년대 ‘대만 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다. 1950년대 프랑스, 1970년대 미국과 홍콩, 1980년대 대만과 일본, 1990년대 한국 등이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에드워드 양은 파멸해 가는 대만 영화계에 환멸을 느껴 미국으로 갔다.

그러니 그의 1996년 작 <마작>은 대만 뉴웨이브, 대만 영화 제1의 전성기, 에드워드 양의 순수 대만 영화 최후의 빛이라고 할 만하다. 1990년대 대만은 산업 구조 전환, 수출 주도 성장, 첨단 산업 부상 등으로 경제 호황을 넘어 버블 경제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거품이 빠지고 침체를 겪는다. 대만의 영화계와 비슷한 추이를 보인 것이다.

와중에 <마작>이 적나라하게 그리는 건 바로 1990년대 대만의 수도 타이페이의 모습이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돈돈돈만 외치는 사람들, 내부인보다 외지인이 더 많은 것 같은 모습, 허세만 가득할 뿐 실속을 찾아볼 수 없는 10대들까지 다양한 인간군상이 별볼일 없는 일들로 부유하고 방황한다.

 

타이페이의 불빛은 왜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여기 네 명의 청년이 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남을 속여 등쳐 먹는 것이다. 부잣집 아들 홍어가 리더 격이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사기꾼으로, 유치원 체인점을 100개나 운영하다가 파산하고 가족을 버렸다. 홍어는 우연히 가족을 파멸시킨 여자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룬룬은 비록 소심하고 허약해 보이지만 유일하게 영어 통역이 가능하다.

한편 소부처는 얄팍하기 이를 데 없는 풍수 지식을 이용해 범인들을 속이고 등쳐 먹는 데 일등 공신으로 활약하고 있다. 홍콩의 경우 번듯하게 미용실에서 일하면서 잘생기기까지 한 얼굴로 여느 여자들을 꼬셔서는 역시 속이고 등쳐먹는 솜씨가 가히 일품이다. 홍어가 기획하고 소부처와 홍콩이 실행에 옮기며 룬룬은 따라 다니며 시키는 일을 하고 통역을 한다.

그들 앞에 프랑스 파리 출신으로 영국 런던에서 살다가 건너온 마르트가 보였다. 홍어는 한눈에 그녀의 쓰임새를 알아보고 가스라이팅을 시전한다. 이것저것 도와주며 자신이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반면 룬룬은 그녀에게 반해 인간적으로 도와주려 한다. 그런데 홍어의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은 한 무리가 홍어로 착각해 룬룬을 납치하고 마는데…

 

네온사인 아래의 공허, 1990년대 타이페이의 초상

 

홍어는 철학이랍시고 말하고 다닌다. 친구들한테도 주입하려 한다. “사람은 절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사람을 속이려면 감정을 버려라”라고 말이다. 사람을 속여서 등쳐먹고 이용하기 위한 최적의 마음가짐이라 할 만하다.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걸 홍어가 똑같이 읊조리고 다니는 것이다. 곧 당대 대만 타이페이의 세태와 다름없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있고 예쁘다. 배경도 분위기도 사람도. 그런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추하고 빈 껍데기 같다. 믿음과 신뢰라는 말 뒤에 가스라이팅해서 이용해 먹으려는 술수가 도시라고 있고, 인간관계라는 허울 속에 정작 인간은 없고 돈만 있을 뿐이며, 조금만 얕잡아 보여도 안 될 것 같은 살얼음판이 지뢰처럼 깔려 있다.

날개 단 듯 끝없이 치솟아 오르지만 정작 두 발 디딜 땅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 언젠가 반드시 땅으로 내려올 텐데 아무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가 바로 1990년대 대만이다. 30여 년만에 최초 국내 개봉하는 이 영화는 당대 대만 타이페이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멋지게 그렸다. 그 화려함에 현혹되어 그때 그곳으로 가보고 싶을 정도다.

 

네 명의 청춘, 마작판 위의 인간들

 

마작은 네 명이 겨루는 보드게임이다. 정작 영화에서 마작은 극후반부에 딱 한 번, 스쳐 지나가는 느낌으로 나올 뿐이다. 그렇다는 건 은유로 작용했다는 건데, 극 중 네 명의 청년들이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겠다. 그들은 한 집에서 사는 친구라지만 공동의 목적이란 게 남을 속이고 이용하고 등쳐먹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를 어떻게 생각할지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그들은 새파란 청춘이다. 어려도 많이 어리다. 어쩌다가 그리 되었는지 모르지만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빚었을 거라고 본다. 어딜 봐도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수단이나 도구쯤으로 보니 말이다. 정처없이 부유하는 청춘의 자회상이다. 고민이 동반되는 방황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결국 그들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슬퍼할 것이다. 매우 큰 폭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덕분에 땅에 두 발을 온전히 디뎌볼 것이다. 이제 두 발로 세상을 충분히 걸어보고 뛰어볼 수 있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청춘만이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청춘의 전유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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