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더 무섭다”,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루프의 이름
[영화 리뷰] <8번 출구>

2023년 말경 일본의 한 인디 개발자가 게임 하나를 개발해 출시한다. 정체불명의 지하도에서 8번 출구를 찾아 빠져 나가는 게 목적인 단순한 게임으로 <8번 출구>라는 이름의 게임이었다. 생각 외로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 <8번 승강장>이라는 후속작도 출시했다. 인터페이스나 목적 등이 쉬워 수많은 아류작이 양산되기도 했다.
2025년에도 식지 않은, 오히려 더 인기를 끌고 있던 와중에 만화로도 소설로도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한국에 소설과 영화가 소개되었다. 영화는 <체인소맨: 레제 편>과 함께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바 이전에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성 편> <주술회전: 회옥, 옥절>과 함께 한국 영화계의 일본 영화 르네상스를 주도하고 있다.
<8번 출구>는 칸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고 시체스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파괴력 있는 흥행과 더불어 좋은 평가까지 받고 있다. 원작이 서사라고 할 것도 없는 짧고 단순한 게임이건만, 영화화하며 캐릭터성을 부각하고 시각적 요소와 청각적 요소까지 살려 풍부하게 만들었다. 자칫 답답할 수 있는 ‘한 장소’ 배경의 단점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하도 속의 인간 시험
‘헤매는 남자’는 출근하던 중 헤어지기로 한 여자친구로부터 충격적인 소식,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배회하던 중 어느 지하도에서 이상한 일에 직면한다. 무한 루프에 빠져 버린 것. 똑같은 지하도가 끝없이 반복된다.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도 다행히 규칙은 있었는데, 사소한 이상 현상 하나라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이상 현상을 발견하면 되돌아가야 하며 이상 현상이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라. 결정적으로 0번 출구에서 시작해 ‘8번 출구’까지 단 한 번의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었다. 과연 그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한편 무한 루프 지하도에는 NPC ‘걸어가는 남자’와 이상 현상의 일종인 ‘여고생’, 그리고 헤매는 남자처럼 미션을 수행 중인 ‘소년’이 나온다. 걸어가는 남자는 왜 NPC가 되었고 여고생의 정체는 무엇이며 소년은 과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이 무한 루프 지하도의 정체를 알려 하지 말라, 생각하지 말고 오직 탈출이다.
단순한 게임, 압도적인 체험으로 되살아나다
젊은 층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여전히 끌고 있는 원작 게임, 그리고 영화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 같다. 이 단순한 영화가 무엇이 그리도 끌리는가? 아주 사소한 걸로도 크게 성공하든 크게 실패하는 작금의 세태가 엿보인다. 0번 출구부터 8번 출구까지 실수 한 번 없이 헤쳐 나가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절실하게 무한 루프 지하도에서 빠져 나왔건만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의미의 무한 루프 현실이다. 아니 매순간 들이닥치는 일들은 무한 루프 지하도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 차라리 단순하고 명료한 지하도가 나아 보이기까지 한다. 어차피 현실에서도 모르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NPC와 다름없지 않은가.
영화 <8번 출구>가 잘 살린 부분이 거기에 있다. 현실에서의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똑같은 지하도가 계속 반복되는 무한 루프 세계로 도망쳤으나 빠져 나가고 싶었고 천신만고 끝에 빠져 나온 현실은 다시 지옥과 다름 아니다. 하여 무한 루프는 비단 지하도만이 아니라 현실과 지하도 세계를 총칭하는 것이다.
지하도의 끝, 다시 현실
이상 현상의 일종인 여고생이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여기서 나가려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현실로 나가봐야 더 힘들기만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그가 누구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세계, 마음 먹으면 NPC로 살아가며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슬픔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혹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당장 여기의 내가 너무나도 힘들거니와 참아내고 견뎌내기가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서 뭐라도 어디라도 좋으니 지금 당장 여기의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무한 루프 지하도면 어떠랴? 그런데 그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곳이다. 그래도 괜찮은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갖춰야 한다. 주저앉고 회피하고 포기하는 건 쉽다. 한순간 자기를 놔버리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려면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 지금 두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다름 아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8번 출구>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무서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