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죽음으로 생명을 훔친 남자, 그리고 삶을 배운 괴물

singenv 2025. 11. 1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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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리뷰] <프랑켄슈타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프랑켄슈타인> 포스터.

 

1857년 최북단, 북극으로 향하는 덴마크 왕립 함선 호리손트호는 얼어붙은 강을 뚫고 지나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때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 가보니 빅터 프랑켄슈타인라는 남자가 쓰러져 있다. 그를 배로 데려오니 곧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를 거대한 무엇이 오더니 빅터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한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빅터의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어머니는 명문 귀족의 자제로 정략 결혼을 했다. 빅터는 엄한 아버지 대신 상냥한 어머니를 독차지하려 했는데, 어머니가 둘째 아들 윌리엄을 낳다가 죽고 만다. 빅터는 계시를 받고 아버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외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빅터는 런던을 거쳐 에든버러로 간다. 그곳에서 수십 년간 학계의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한다. 그는 ‘탄생은 신의 영역이지만 죽음은 도전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며 연구를 계속한다. 돈 많은 무기상의 후원을 받아 거대하고 막강하고 죽지 않는 피조물이 탄생한다. 한편 오랜만에 만난 윌리엄이 약혼자 엘리자베스와 함께 찾아온다.

일련의 일이 있은 후 그 피조물은 지성을 갖추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떠돈다. 사냥꾼의 총을 맞았지만 살아서 어느 집의 방앗간으로 숨어든다. 그는 장님 노인의 가족 일원이 되고 싶었고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가족들은 ‘숲의 정령님’이 한 일이라 한다. 보이지 않는 수호자. 그는 곧 말을 하기 시작한다.

노인은 그를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라 보고 함께 지내자고 한다.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그는 책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고, 또 노인 가족과 같이 살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그는 다시 떠도는 신세를 면치 못하는데, 답을 얻으려 빅터를 찾아간다.

 

신이 되고자 한 인간, 인간이 되고자 한 피조물

 

19세기의 천재 여성 작가 메리 셸리가 1818년 열아홉 살 나이에 탄생시킨 불멸의 고전 <프랑켄슈타인>은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다시 태어났고 변주되었으며 결정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걔 중에는 위대한 것도 있고 범작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도 있다. 멕시코가 낳은 세계적 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만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최상단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의 이야기, 빅터의 이야기, 피조물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장대한 서사시는 설령 원작을 접하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 완벽에 가깝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왜 ‘죽음’에 천착해 정복하려 했는가. 개인적으로는 그의 어머니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게 절대적이었으나, 온갖 곳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이가 죽어갔던 당대 상황이야말로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태어나는 건 내 의지가 아니지만, 즉 신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으나 죽음은 내 의지, 즉 인간이 정복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 그런데 죽음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져 태어난 피조물 또한 자기 의지가 아니었으며 빅터는 그토록 경멸한 신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어떻게 감당하고 또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

 

델 토로가 다시 되살린 고전의 비극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지 않는, 죽을 수도 없는, 죽이기만 할 수 있는 괴물을 만들었다. 하물며 그 피조물은 지성도 갖추지 못했으니 빅터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길 바랐다. 그리고 결국 피조물을 처단하기로 한다. 과연 죽지 않는 피조물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빅터는 생명을 탐구하다 죽음을 창조했고 인간을 만들려다 괴물을 창조했으며 결국 스스로 괴물이 되어갔다. 직접 만든 피조물을 스스로 파괴하려는 행위는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나지 못한 피조물이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리라. 삶과 죽음까지 자유 의지를 박탈하는 행위.

반면 피조물은 순수의 결정체, 극 중 빅터의 처제인 엘리자베스가 찾아마지 않는 대상이다. 어느 날 눈을 떴고 존재를 인지했으며 우여곡절 끝에 세상으로 나가 인간과 어울렸지만, 자신의 정체를 알고 혼자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살아가는 동안 죽음 아닌 오직 삶에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축복일까 저주일까.

 

델 토로가 찍은 ‘가장 인간적인 괴물극’

 

기예르모 델 토로의 필모를 훑어보면 인간 아닌 존재들을 깊이 있게 탐구한 흔적이 엿보인다. 얼굴이 찌뿌려지곤 하는데 그 존재 자체를 들여다보면 슬픔이 밀려온다. 결국 이 세계에서 인간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비록 인간보다 강하고 때론 죽지 않기도 하지만 배척당하고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다.

그럼 여기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평면적인 기준에서 괴물이야말로 '나쁜' 존재로 비춰지지만,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인간이야말로 '나쁜' 존재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 존재가 어느 무엇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도발을 한다든지,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말살하려 한다든지 말이다.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 대작이 아닐까 싶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절절하지만 절제되어 있으며, 파란만장하나 간결하고, 장대하고 기구하나 우리네가 살아가는 이야기. 이토록 수려한 작품을 수작이라고 부르지 않나. 그리고 앞으로 명작으로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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