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취와 위선의 마을, 그레이스는 왜 무너졌는가
[영화 리뷰] <도그빌>

1930년대 미국 록키산맥의 '도그빌', 어른 아이 해서 20명 남짓 살아가는 작은 마을에 미모의 한 여자 그레이스가 숨어든다. 갱단에 쫓기는 그녀를 처음 발견한 톰은 마을로 데려온다. 그러곤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의 운명을 맡긴다. 톰의 설득으로 그녀에게 2주의 시간이 주어진다. 2주 동안 마을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그녀.
2주가 지난 후 주민 전체가 참여한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그레이스는 도그빌에 남게 되었다. 톰과 그레이스는 서로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러며 그녀는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자 일일이 찾아다니며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경찰이 마을에 들이닥친다. 급기야 현상금도 걸린다.
마을 사람들이 이방인 그레이스에게 보였던 건 처음에는 호의였으나 점차 변질되어 간다. 그녀를 보호하는 게 불법이라는 데서 오는 불안이었을까, 그녀가 너무 아름답지만 가질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시기였을까, 그녀가 착하고 일도 잘하는 데서 오는 질투였을까. 그 모든 게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였으리라. 결국 그레이스는 도그빌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는데…
연극 무대를 닮은 마을, 인간을 비추는 실험실
극 중 마을의 이름에서 따온 제목의 영화 <도그빌>은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필모 중기작이다. 어김없이 그의 염세주의적인 성향이 돋보이는 바 보통 사람의 추악한 본능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마치 연극을 보는 듯, 세트장으로 마련된 작은 마을 배경이 그 자체로 실험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겉보기에 지극히 평범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20명 남짓 서로 속속들이 알며 살아가다 보니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변화가 없으면 현재에 만족한 채, 아니 현재에 기생한 채 살아간다. 하여 평범 이하면 이하이지 이상이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방인이, 그것도 이름처럼 마치 선물 같은 존재가 마을로 왔다. 처음 맞닥뜨리는 변화의 소용돌이, 처음에는 멋 모르고 받아들였으나 곧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녀가 자초한, 그녀라는 사람 자체를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고 말이다. 갱단에게 쫓기고 있는 걸 숨겨 줬으니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사람들의 본능을 일깨운 건, 그녀 자체일 수도 있고 그녀로부터 촉발된 변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건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나약하다는 것. 단단하고 곧고 능력까지 있었다면 그녀한테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테다.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구원자이자 오만한 존재, 그레이스
그레이스를 들여다보자. 그녀의 행동거지를 살펴보면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마을에 들어온 순간부터 누가 무슨 짓을 하든 그녀는 거의 다 수용한다. 제아무리 처음에 본인이 앞장서서 뭐든 하겠다고 했다손 쳐도, 그녀에게 날아드는 온갖 말도 안 되는 일을 모두 다 받아준다. 급기야 지켜야 할 선을 찢어 버려도 말이다.
마치 고행을 하듯, 잘못된 일이라고만 일깨워줄 뿐 별 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수용의 범주를 넘어선다. 비윤리적, 비인간적인 짓거리를 일삼으니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한 명의 사람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의 온갖 부정의 오물이 모이는 하수구다. 그렇게밖에 말할 도리가 없을 만큼 추악하다.
그때부턴 도리어 그녀가 문제인 것 같다. 사람이 사람한테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마을 사람들도, 그레이스도. 그레이스는 마치 자신이 마을 사람들을 모든 걸 받아주는, 이른바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을 내가 희생하며 굽어 살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을 이른바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가?
영화가 보여주고 또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마을 사람들의 추악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나약함은 나이브하다. 반면 그레이스의 무대응과 만행동에서 나타나는 오만함은 충격적이다. 마을 사람들은 의도 없이 자연스레 변한 반면, 그레이스는 시종일관 의도가 다분했다.
누가 더 옳은가 그른가의 차원이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이를테면 마을 사람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추악한 행동을 벌이는 것과 그레이스가 마치 예수처럼 인간의 모든 죄를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 이면의 심연을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거기에 인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