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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대만의 처절한 청춘이 지금 우리에게 건네는 말

singenv 2024. 12. 30.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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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밀레니엄 맘보>

 

영화 <밀레니엄 맘보> 포스터. ⓒ에이유앤씨, 하이스트레인저

 

대만의 거장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2015년 <자객 섭은낭>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차기작을 준비 중이었으나 치매 진단을 받고 코로나-19까지 확진되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그리고 이안과 더불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대만 감독 나아가 아시아 감독으로 이름이 드높다.

1980년대 '성장기 4부작', 1990년대 '현대사 3부작', 2000년대 '현대 3부작', 그리고 2010년대가 <자객 섭은낭>이다. 이중 '현대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 <밀레니엄 맘보>가 특별한 건 비단 서기와의 인연이 시작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를 다루는 묵직하기 이를 데 없는 영화들을 선보이다가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를 건넸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1년에 내놓은 <밀레니엄 맘보>는 새천년의 흔들리고 불안하고 무력하고 권태로운 청춘의 면면을 보여준다. 일명 '타협 없는 작가주의'의 대명사인 그이기에 이 영화 역시 상당히 어렵고 느리며 마음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물론 그의 전작들에 비해선 쉽고 빠르고 단순하지만 말이다. 하여 인내심을 갖고 영화의 모든 순간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와 헤어지지 못하는 그녀

 

19살 비키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클럽에서 만난 하오하오와 동거 중이다. 하오하오는 하는 일 없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약을 하고, 게임을 하는 게 전부다. 돈을 빌리고 아버지의 롤렉스도 훔치는 등 돈을 융통해 보지만 금방 다 써 버린다. 비키는 돈을 벌기 위해 술집에서 호스티스 일을 시작한다. 하오하오의 의심과 질투가 한없이 늘어난다.

비키가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하오하오는 반기기는커녕 비키의 가방을 뒤지고 비키의 몸 구석구석을 냄새 맡는다. 비키는 제지해 보고 뿌리쳐 보고 대항해 봤지만 소용이 없어서 집을 나가 버리기도 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갈 곳이 없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조차 그녀가 왜 그곳으로 돌아가는지 모른다.

술집에서 알게 된 일본인을 따라 홋카이도 유바리로 여행을 떠난 비키,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그녀는 즐거워하지만 대만으로 돌아오면 똑같은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일을 하며 알게 된 야쿠자 중간 보스 잭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잭은 그녀를 성심성의껏 돕고자 하지만 그 또한 그만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비키는 갑작스레 일본으로 떠난 잭을 만나러 가는데…

 

흔들리고 불안하고 무력하고 권태로운 청춘

 

<밀레니엄 맘보>는 굉장히 미시적이다. 비키라는 19살 술집 호스티스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전부다. 더군다나 그녀의 이야기는 보편적이지도 않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고 남자친구와 동거 중인데 돈을 벌고자 술집 호스티스로 일하는 와중에 야쿠자 중간 보스와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 굉장히 거시적이기도 하다.  

비키의 19살 청춘이 21세기 새천년에 막 진입한 뭇 청춘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변화를 기대하고 새로운 걸 바라고 다시 시작하길 희망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이 여전히 흔들리도 불안하고 무력하고 권태롭다.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이야기가 보편적인 시대상의 필터를 통해 거시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로 나아가는 것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고유의 능력이 발휘된 것이리라.

그 말인즉슨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 25년 여가 흐른 지금, 그리고 대만과 한국이라는 공간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 이곳의 청춘에게도 비키의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비록 영화 자체는 비대중적, 아니 반대중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2003년에 개봉한 후 20여 년만에 재개봉하여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청춘

 

'청춘'을 떠올리면 그 찬란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그 무력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 또한 그와 같다. 정확히 반반이다. 영화도 그 지점을 파악했는지 비키가 10년 후에 10년 전을 회상하는 형식이다. 청춘이란 절대로 당사자가 당시를 오롯이 파악할 수 없다. 그때는 미래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직 시간이 흘러 그때를 돌아보며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허우 샤오시엔은 청춘을 향한 양가적 감정을 영화적으로 완벽히 표현한다. 그 유명한 비키의 터널 오프닝을 비롯해 비키가 나올 때는 현란한 테크노 음악과 감각적인 촬영을 선보이지만, 하오하오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테크노 음악과 정적인 롱테이크가 주를 이룬다. 비키는 청춘을 즐기고 싶으나 덫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하오하오 때문에 같이 무기력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다. 그 또한 청춘의 한 단면이다.

불온한 시대, 불안한 청춘에게 <밀레니엄 맘보>는 위로를 건네줄 수 있을까. 같잖은 위로는 오히려 돌이 될 뿐이다. 차라리 진짜 현실을 보여주는 게 위로 아닌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제격이라고 해도 될까. 보편적 현실의 특수한 지점이 아닌 그 자체로 다분히 개인적이고 특수하니까 말이다. 괜찮을 것 같다. 아니, 이 영화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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