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한국인과 영어>
<한국인과 영어> ⓒ인물과사상사
대한민국 역사상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세 나라를 뽑자면, 제일 가까운 나라들인 중국과 일본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나라는 공통적으로 우리나라를 통치한 적이 있다. 자연스레 그들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한자는 과거 수천 년 동안 우리나라 언어 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한편 현대 중국의 영향이 과거만큼 크지 않기에, 현대 중국어는 아직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고 있다. 물론 앞으로 거대해질 것이지만. 반면 일본어는 우리나라의 일본에 대한 뼛속 깊은 반감 때문에 직접적 통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그리 많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물론 저도 모르게 많은 단어들을 쓰고
있지만, 그마저도 비속어 취급을 당한다.
그렇다면 미국 언어인 영어의 경우는 어떠한가? 미국은 중국, 일본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거니와 역사도 형편 없이 짧아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초 미국과의 접촉은 19세기 후반 미국 이양선의 출몰,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은 남북전쟁을 겪은 후 내부 정비와 대륙 개척에 몰두하면서, 그 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실시하고 있던 때였다.
정작 우리나라가 영어와 최초로 접촉한 때는 17세기이고 그 대상은 네덜란드인이었다고 한다. 이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조선 본토 연안에 출현한 영국의 배는 '한국인과 영어'의 지독한 애증 관계의 시작이었다.
강준만 교수의 <한국인과 영어>(인물과사상사)는 제목 그대로 한국인과 영어의 이 지독한 관계가 어떻게, 왜 시작되어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최초의 접촉부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꼼꼼하게 다룬다. 때론 신기하고, 때론 어처구니 없고, 때론 씁쓸한 기록의 향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한숨이 나오기도 하거니와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체념의 기분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이 과열을 잠재울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자가 한국인과 영어의 역사를 쭉 살피면서 얻게 된 결론이 세 가지 있다. 첫째, 영어는 애초에 권력이었다는 것. 영어는 사교권 장악 수단이었으며, 일제의 패망 조짐이 보이면서 일종의 '복음의 소리'가 되었고, 이는 이후 전개될 '영어 패권주의'를 예고한 셈이라는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이미 영어로만 출세해 고위직에 오른 사람이 있고, 주요 언론사는 영문란을 설치했으며, 경성제국대학에 가기 위한 필수 과목으로 영어가 채택되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영어 학습의 최강자라 불린 어느 영어 학교는 <조선일보> 광고를 통해 영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시대의 영어 광고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한 내용이다.
"늙은이 젊은이나 영어를 모르면 지금 세상에는 암흑"(1931년 5월 23일)
"금일 이후 영어를 알지 못하는 분은 사회의 패잔자요"(1936년 8월 25일)
"영어 인풀레 시대가 도래한 오늘 근무의 여가에 시간을 쪼개 영어를 배워 생애의 희망을 실현하라"(1937년 9월 26일)
해방 이후 영어의 위상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사실상 일본 대신 미국의 지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급기야 맥아더가 발표한 포고령 1호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에 영어는 최대의 출세 무기이자 생존 무기가 되었다.
영어 권력은 한국 전쟁이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했을 때도 여전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준하 등은 모두 영어권 유학파 출신 내지 영어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이후 본격적인 수출 전쟁이 시작된 박정희 정권 하에서의 1970년대에서도 영어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모든 길은 수출로 통했고, 수출을 하기 위해서 영어가 필요했다.
저자의 두 번째 결론은 한국인에게 영어란 종교와 같다는 것이다. 영어가 종교와 비교된 배경에는 '세계화'가 있었다. 1993년 대통령 자문기구 21세기위원회는 국제화를 위해서는 국제사회에서 활동할 수 있는 능력과 소양을 갖춘 국제인의 양성이 최우선 필요하다면서 영어와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언급했다. 이때부터 거짓말처럼 영어 교육 붐이 불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된 토익 및 토플 폭풍, 조기 영어 유학 열풍 등. 영어만 잘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기업에 취직할 수 있으며, 좋은 배우자를 얻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영어로만 충분한 돈과 명예를 쟁취할 수 있었기에, '영어'라는 절대적인 힘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거기에 선(善)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하였다.
세 번째 결론은 영어가 공포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는 단순히 영어를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 영어를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영어를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박한 생존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혀 수술까지 하는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공포의 느낌을 받게 하는 데는 '공포 마케팅'이 크게 기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6살 아이를 둔 부모가 상담을 요청하자 학원은 늦었다고 하며 3, 4살 때부터 시작한 친구들을 들먹이는 것이다. 이런 조기 교육의 공포 마케팅이 먹히는 이유는, 훗날 그가 서게 될 '영어 계급사회'에서의 위치 때문이다. 토익 점수에 따라 평균 연봉이 차이 나고, 그에 따라 그의 인생이 상당 부분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편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도 한몫 한다. 특히 지금 시대는 인터넷이 대부분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면 영어 천지인 인터넷을 못하는 것도 같은 말이다.
"전문가들은 "영어에 대한 관심이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최근의 이상 열풍은 과거보다 훨씬 절박한 이유에서 비롯됐다"며 인터넷과 경제의 글로벌화를 지적했다.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는 정보의 80퍼센트 이상이 영어로 되어 있어 영어를 못하면 지식 정보 사회에 낙오자로 전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본문 중에서)
그런데 저자는 맺는말에서 갑자기 영어 문제는 입시 문제와 판박이라며 학벌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영어 광풍에 근본적인 개선 방안은 있을 수 없다며, 조금 너그러워지자는 주장을 배경으로 한다. 저자는 소위 SKY라 불리는 학벌의 최상위권 대학을 깨거나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서열 유동화'이다.
서열 유동화의 요지는 '다원적 경쟁 체제'이다. 사회 각계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3개 대학이 아닌 30개 대학에서 나오게끔 하자는 것이다. 엘리트 충원 학교가 수적으로 대등한 수십 개 대학으로 늘어나면 서열 유동성이 생겨나게 되고, 대입 전쟁의 열기를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분산 시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저자는 이렇게 해야 진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의 주장은 일면 굉장한 파격을 보여준다. 하지만 필자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다른 건 젖혀 두고서라도, 1대 99로 대변되는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의 싸움이 10대 90 혹은 그 이상으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단지 기득권층 안에서의 싸움 만을 심각하게 보고, 그 싸움을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것 같다.
엘리트의 저변이 확대되면 물론 내부 경쟁이 비교적 완화될 테고 그러면 그 싸움의 궁극에 있는 영어 광풍이 어느 정도 수그러들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적으로 비엘리트계층의 수는 줄어들 테고 그러면 그들이 갖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질 것이 아닌가?
필자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굳이 학벌주의의 대안을 제시할 이유가 없지만, 평소 생각했던 바는 '대학 평준화'이다. 어떤 의미에서의 평준화인가 하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대학에 철퇴를 가하고 제대로 된 대학 만을 남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 직업 학교와 전문 학교의 수를 늘려야 한다. 정말 대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대학을 가고, 일찍 전문 직업을 가지고 싶은 사람은 직업 학교 내지 전문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다. 영어 또한 직업에 필요로 하는 사람만 배우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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