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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색채를 더해가는, 미국 대중문화 센세이션의 신화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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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큐레이터'S PICK] <졸업>


영화 <졸업> 포스터. ⓒ 시네마 뉴원



EGOT라고 하면, 미국 대중문화계를 대표하는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 네 개를 지칭한다. 텔레비전의 에미상(Emmy), 청각 매체의 그래미상(Gramy), 영화의 오스카상(Oscars), 극예술의 토니상(Tony)까지. 이중 2~3개를 수상한 사람은 발에 차일 만큼 많지만, 4개 모두를 수상한 이른바 '그랜드슬래머'는 현재까지 15명뿐이라고 한다. 우리도 알 만한 사람을 뽑자면, 오드리 헵번, 우피 골드버그, 존 레전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상들의 특성상 배우나 작곡가가 많은데 딱 한 명만 정체성이 '감독'인 이가 있으니 '마이크 니콜스'이다. 특이하게, 1960년대에 에미상을 제외한 세 부분의 상을 석권하며 명성을 누렸던 그는 40여 년이 지난 2000년대에 이르러 에미상을 수상했다. 1931년에 태어나 2014년에 작고했고 2007년 <찰리 윌슨의 전쟁>이 마지막 연출이었다는 점을 보면, 인생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아 결실을 보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우린 마이크 니콜스라는 이름을 잘 알진 못한다. 그만큼 그가 작품으로만 자신의 대중문화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우린 그의 작품을 아주 잘 안다. 196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두 작품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라> <졸업>만으로 충분하겠지만, 2004년 <클로저>도 절대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지난 2월, 졸업의 계절에 <졸업>이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찾아왔다. 근래 수없이 많은 고전들이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오고 있는데, 걔중 단연 압권이랄 만하다. 


믿기 싫은 기이한 삼각 관계


우수한 성적과 모범적인 생활로 훌륭하게 대학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더스틴 호프만 분), 부모는 온갖 지인들을 불러모아 환영파티를 열어 벤자민의 앞날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부담스럽고 당혹스럽고 불안하기만 할 뿐, 이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피하고 싶다. 여기저기 붙잡여서 당황하던 찰나, 다행히 자리를 피했는데 로빈슨 부인과 맞딱뜨린다. 그녀의 가족과는 예전부터 잘 알고 친하게 지내온 사이. 


로빈슨 부인은 벤자민에서 집에 데려달라고 한다. 낌새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못할 건 없으니 로빈슨 부인을 집으로 데려다주는 벤자민, 하지만 로빈슨 부인은 노골적이다시피 벤자민을 유혹한다. 다행히(?) 로빈슨 부인 남편이 집에 돌아와 위기를 모면하는 벤자민, 하지만 머릿속에서 로빈슨 부인을 떨쳐내지 못하곤 결국 호텔로 불러내 육체적 관계를 맺기까지 한다. 그녀는 결혼생활의 싫증으로 그를 탐한 것이겠지만, 그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던 걸까?


밀회를 이어가던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 와중에 로빈슨 부인의 딸 일레인이 방학을 맞아 집에 온다. 사실, 벤자민 부모님과 로빈슨 부인 남편은 벤자민과 일레인이 좋은 관계로 발전하길 바랐다. 일레인을 본 이후 그녀에게 끌리기 시작한 벤자민, 하지만 로빈슨 부인이라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일레인은 벤자민과 로빈슨 부인의 관계를 알게 되고, 집을 떠나 학교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과연, 벤자민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로빈슨 부인인가, 일레인인가? 꼭 둘 중에 한 명이어야 하는가?


청춘의 방황, 미국의 일탈


영화 <졸업>은 족히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봐도 막장이랄 만한 삼각 관계를 정면으로 내세운다. 정극 기반의 코미디로,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웃음을 유발하는데 개그보다는 유머에 가깝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책임진 희대의 OST들은 영원히 청춘들의 심금을 흔들 만하다. 여러 모로 이 영화는 영화계 센세이션 따위를 뛰어넘은 대중문화 센세이션의 신화라 할 것이다. 영원히 계속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색채를 더해가는.


지극히 일차원적으로 들여다보자면, 하라는 대로만 정신없이 달려온 대학 졸업생 청춘의 방황을 보여준다. 하여, '청춘'이 주요 모토이다. 환영파티에서 어느 분이 '플라스틱!'이라고 외치며 그의 미래를 자본과 물질 세계의 훌륭한 부품으로 재단하듯 단정한 행동에, 반감이 아닌 당혹을 비추는 모습이 가련하기까지 하다. 부모는 벤자민이 자신의 뜻대로 계속 길을 가지 않을 뿐더러 뭐라도 하지 않는 날들이 길어지면서 불평이 쌓이는데, '졸업'이라는 말의 함의가 주는 가련함도 함께 쌓이는 듯하다. 끝과 동시에 시작해야 하는 인간의 삶이란. 


이차원, 삼차원을 건너띄고 사차원적으로 들여다보자면, 벤자민에 미국을 껴맞춰 볼 수 있겠다. 1960년 중반 미국이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만큼 전방위적으로 절대적 힘과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거인이자 괴물이었다. 대공황의 위기를 지나, 2차 대전과 한국 전쟁을 치르고, 베트남 전쟁과 냉전이 한창인 상황으로, 해야 할 게 많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깊숙이에선 허무의 기운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와중에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 건, 도피와 위안과 자극으로서의 일탈이다. 


전설로 회자되는 장면들


비록 일차원과 사차원적이지만 개인적인 차원과 국가적인 차원에서 들여다봐도 큰 위화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영화 <졸업>의 스펙트럼은 어마어마하다. 즉, 이 영화에 그 어떤 걸 들이대도 전부 흡수하고는 나름대로의 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전으로서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를 완벽히 갖췄다고 할 수 있는 바, 우리는 이 작품을 가지고 각자에 맞게 이리저리 가지고 놀 수 있다. 


이 영화는 전설로 회자되는 몇몇 장면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이 세 군데 정도 있다.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든 예상할 수 있을 테고, 심지어 본 적이 없던 이라도 연상할 수 있을 테다. 메인 포스터로도 볼 수 있는, 로빈슨 부인이 스타킹을 신는 장면. 그야말로 평범하고 탈 없고 재미도 없을 것 같은 중산층의 혁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미국의 중산층을 표현하려 해 왔지만 <아메리칸 뷰티> 정도를 제외하곤 필적할 만한 작품이 없다. 


다른 두 장면은 영화 막바지에 몰려 있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50년이 넘는 작품에 스포일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벤자민이 초대받지 못한 일레인의 결혼식에 쳐들어가 일레인을 목놓아 부른다. 이에 응답하는 일레인, 벤자민은 교회 십자가를 뽑아들어 하객들을 물리치고는(?) 함께 도망친다. 수없이 패러디되고 오마주되었을 교회 결혼식장 도주 장면은, 유쾌 상쾌 통쾌한 혁명적 일탈을 시원스럽게 보여 준다. 혼돈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한 '미국'이라는 나라를 선전하고 있다고까지 느낄 정도이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를 한순간에 뒤집는다. 


결혼식 도중 호기롭게 도망친 벤자민과 일레인, 함박웃음을 지으며 버스를 타고는 어딘가로 향한다. 하지만 곧바로 들이닥친 현실, 딱 들어 맞는 신조어가 하나 있다.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 '현타', 함박웃음에서 일순간 당혹과 허무와 걱정이 오묘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돌아선 그들을 보고 있기로서니 준비와 계획 없는 미래가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NG로 우연히 만들어진 걸로 유명한 이 장면 하나로, <졸업>은 이미 충분한 전설적 퍼포먼스를 한 차원 더 끌어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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