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 소설 읽기] <무진기행>


<무진기행> 표지 ⓒ민음사


주인공 윤회중은 서울의 복잡한 일을 피해 고향 '무진'을 찾는다. 배경 좋고 돈 많은 부인과 제약회사 사장인 장인, 그 회사에서 전무 승진을 위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귀찮고 복잡하고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피해서였다. 속물 근성이 판을 치는 속세를 떠나 잠시 머리를 식히러 왔다고 하면 맞을 것이다. 


무진은 윤회중이 나이가 든 뒤로 몇 차례 찾았던 곳이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쳐야 할 때나 새출발이 필요할 때였다. 그렇지만 무진이라고 하면, 윤회중은 어둡던 청년 시절이 생각나곤 했다.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지만 말이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


누구나의 고향이 다 그럴까.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나의 고향은 무진과 비슷하다. 30년 가까이 지낸 그곳은 높디높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무진의 안개처럼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왠지 긴장이 풀리고 느슨해지곤 했는데, 오히려 윤회중이 무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러운 옷차림과 누런 얼굴로 방에 처박혀 있곤 했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고 내 동생 또한 그러했다. 


김승옥의 대표작이자 1960년대의 대표작인 <무진기행>은 여러 형태로 읽힌다. 무진을 다녀오는 여행 소설, 짧은 여행임에도 성장을 경험하는 성장 소설, 전근대와 근대가 각축을 벌이는 역사 소설로 말이다. 이들은 얽히고설켜 맞물려 있다. 여행으로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을 느끼고 성장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윤회중은 끊임없이 서울과 무진의 대립되는 이미지를 상기한다. 서울의 도시, 햇빛, 현재, 근대가 무진의 시골, 안개, 과거, 전근대와 대립한다. 그 대립의 향연 안에서 그는 고민하고 갈등한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결국 그는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면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속세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을 깨닫은 것이다. 성장을 했다. 


주인공 윤회중의 과거, 현재, 그리고 지금


그가 무진에서 만나는 박, 조, 하인숙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또 다른 그다. 중학교 후배이자 모교 국어교사로 있는 박은 과거의 그다. 순수하고 진지하지만 가난하고 비현실적이다. '무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창이자 세무서장으로 있는 조는 그의 현재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출세지향적이다. '서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인숙은 조금 특별하다. 그녀는 서울에서 음대를 나와 박과 같은 중학교 교사로 있다. 성악을 공부해 졸업 연주회 때 '나비부인'의 <어떤 개인 날>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흔한 유행가 <목포의 눈물>이다. 그녀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양식의 노래였다. '서울'과 '무진' 사이 어딘가겠다. 그가 처한 지금의 상황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그 양식은 유행가가 내용으로 한느 청승맞음과는 다른, 좀 더 무자비한 청승맞음을 포함하고 있었고 <어떤 개인 날>의 그 절규보다도 훨씬 높은 옥타브의 절규를 포함하고 있었고, 그 양식에는 머리를 풀어헤친 광녀의 냉소가 스며 있었고 무엇보다도 시체가 썩어 가는 듯한 무진의 그 냄새가 스며 있었다." (본문 46쪽 중에서)


도망치더라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이 소설은 방황하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존재를 그렸다. 현실은 서울로 대변되는 것들이고 이상은 무진으로 대변되는 것들인데, 문제는 무진이 마냥 이상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대두로 근대가 출현해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받지만 자신을 돌아보며 근대, 즉 속세를 버리는 이도 있다. 윤회중은 버리지는 못하고 가끔 도망만 치는 겁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도망치는 무진은 그에게 어두운 과거를 상기시키고 우울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느 곳에도 적을 둘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이 소설은 반(反)근대를 내세운 것 같지 않다. 얼핏 봤을 땐 그렇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전근대와 근대의 대립에서 방황하는 이를 그리며 오히려 근대 쪽으로 더 기울어졌으면 기울어졌지 반근대는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근대 쪽으로 기울어지는 자신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래서 윤회중은 하인숙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꼈나 보다.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럼에도 그는 하인숙을 구출해줄 수도 구원해줄 수도 없다. 부끄러운 그곳으로 돌아가 혼란스럽지도 어둡지도 않은 일상을 즐겨야 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해도 돌아왔음직하다. 그러면서 또 그곳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반복과 후회와 성장. 이 루틴은 아마도 평생 계속되지 않을까. 그때마다 최소한 '부끄러움'은 느끼는, 그런 삶이길 바랄 뿐이다. 그것마저도 안 되면 내가 정말 싫어질 것 같다. 이 불안의 줄타기를 계속하는 게 가능할까?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때그때 잘 이겨내는 수밖에. 


<무진기행>(민음사)의 여러 단편 중 '무진기행' 한 편에 대한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한국 대표 소설 읽기'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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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포스터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여배우는 어디서든 특별한 존재이다. 특별하게 취급을 받는다. 자신도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이 그녀를 우러러본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특권을 가장 완벽하게 소화할 줄 안다. 남자 배우를 '남배우'라고 칭하지 않지만, 여자 배우는 '여배우'라고 칭하지 않는가? 


젊고 예쁜 여배우에게 주연은 당연한 거다. 그녀에게 조연을 맡긴다는 건 한 물 갔다는 증표이다. 한 물 갔다는 건 나이가 들어서 아름다움이 퇴색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 엄마, 시어머니, 할머니, 옆집 아줌마, 보모 등의 조연급으로 자주 얼굴을 비추는 중년 여배우 대부분이 소싯적에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단지 나이에 밀려서 미모에 밀려서 스포트라이트를 넘긴 것이다. 


사실 수많은 주연 여배우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은퇴의 길에 접어든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고 키우고 살림을 해야 하니 반강제적인 측면이 있다. 이런 측면만 있는 건 아니다. 젊음과 아름다움을 기본적 무기로 세상을 쥐락펴락 했던 이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만 비춰오던 스포트라이트가 다른 젊고 아름다운 이로 넘어가는 걸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말이다. 


특별한 존재,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특별한 존재인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다. 한때 세상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최고의 여배우, 젊음과 아름다움과 연기력까지 두루 갖춘 완벽한 여배우가 자신과의 격렬하고 치열하지만 조용하고 고요한 싸움 끝에 스포트라이트를 넘겨주게 되는 이야기다. 젊음과 늙음, 과거와 미래, 주연과 조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흘러가는 구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물처럼 거스를 수 없는 세계의 법칙에 순응하는 이야기이다. 그 순응의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진정 아름답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에서 동성의 상사 '헬레나'를 유혹하고 나서 그녀를 이용해 권력을 획득한 다음 무참히 차버림으로써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가는 '시그리드' 역으로 데뷔해 단숨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던 대배우 마리아 엔더스(줄리엣 비노쉬 분)는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과 함께 한 시상식에서 <말로야 스네이크>의 감독의 대리 수상을 하러 간다. 가는 도중 감독의 부고 소식을 받고 만다. 


그런 그녀에게 하필이면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를 제안해 오는 젊고 유능한 감독이 있다. 그 감독은 과거 '시그리드' 역을 했던 마리아에게 '헬레나' 역을 맡기려 한다. 마리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아닌가. 아무리 20년이 지나 자신이 나이가 상당히 먹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비참하거니와 조연급의 역을 맡길 수 있는가? 더욱이 자신은 평생 '시그리드'로 살아 왔다. 


하지만 감독의 '헬레나와 시그리드는 결국 같은 인물이에요.'라는 주장과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준 <말로야 스네이크>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점 등 때문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비서 발렌틴이 옆에서 계속 부추기지 않는가? 그렇게 그녀들은 스위스 실스마리아로 가서 대본 연습을 한다. 


대배우 '줄리엣 비노쉬', 영화에 완벽히 녹아들다


마리아 엔더스 역을 맡은 '줄리엣 비노쉬'는 실제로 세계 3대 영화제(칸, 베를린, 베니스)와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여배우이다. 거기에 흥행력 있는 작품까지 출연했던,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여배우 중의 한 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전에는 영화 <고질라>에 '조연' 급으로 출연하기도 할 정도로 그 명성에 걸맞지 않은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내력이 있는 여배우이니 만큼 이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완벽히 녹아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연기인지 실제인지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관찰과 이해에서 출발해 설명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현재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것이니 그 내공이 얼마나 하겠는가? 그렇지만 당사자야말로 현실과 연기에서 엄청난 혼선을 느꼈을 것이기에 연기 하는 내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영화의 2부는 거의 마리아와 비서 발렌틴의 대본 연습이 주를 이룬다. 집에서도 길을 가다가도 산을 타면서도 대본 연습을 하는 그들. 그런데 마리아는 현실과 연기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지, 발렌틴에게 그 고통들을 고스란히 내비친다. 일종의 히스테리라고 할까. 그 히스테리의 대부분은 평생을 '시그리드'로 살아온 자신이 '헬레나' 역을 맡게 되는 데에서 오는 괴리감, 상실감, 부러움, 질투심, 우월감 등의 복합적 감정의 발로이다. 


더욱이 리메이크작에서 '시그리드'를 맡게 될 여배우는 조앤(클레이 모레츠 분)이라는 가장 인기 많고 가장 핫하고 가장 문제가 많은 여배우란다. 그야말로 점입가경이다. 이런 질 떨어지는 아이와 한 배를 타야 하다니? 이런 하찮은 아이에게 밀려 늙고 추한 역을 맡아야 하다니? 이렇게 연기도 못하고 얼굴만 앞세우는 아이가 나에게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갈 거라니? 안 그래도 '헬레나' 역은 너무 힘들고 벅차기만 한데 말이다. 괜히 한다고 했나? 이제라도 무를 순 없을까? 이 연극을 해낼 수 있을까?


한편 비서 발렌틴은 모든 것을 다 이룬 대배우 마리아가 부러운 듯하다. 자신은 열정은 앞서지만 하찮고 가진 것 없고 실력은 모자라는 일개 비서일 뿐이다. 인생은 미완성이고 까칠한 여배우 아래에서 온갖 수발을 다 들어주고 있을 뿐이다. 답답하고 불안하다. 참을 수가 없다. 훨훨 날아가고 싶다. 나만의 길을 찾고 싶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 흘러 가듯 거스를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위대함


영화 제목인 <실스마리아의 구름>은 영화 속 연극 제목인 <말로야 스네이크>와 한 쌍을 이룬다. 뱀 형상의 구름이 실스마리아 호수를 뒤덮는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모든 걸 뒤덮어버리는 구름으로 인해 사라져버리는 산과 호수. 당연한 듯 찾아오는 구름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그 사라져버리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마리아는 무엇을 느꼈을까. 과거는 흘러 미래가 된다. 젊음은 늙음이 된다. 주연의 자리에 있는 이는, 조연의 자리로 옮겨간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추함이 되는가? 


끝없이 젊음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여배우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실상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이 자신 인생의 주연인 듯 울음 대신 웃음을, 두려움 대신 자신감 있는 모습을, 쓸쓸함 대신 화려하게 꾸민 모습을 내보이며 자신을 추스리고 있다. 하지만 내면은 울음과 두려움과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영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한 장면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마리아는 영화 말미에서 큰일을 해낸다. 자신에게 들어온 '시간을 초월하는' 젊은 역할을 마다하고 후배 조앤을 추천하는 것이다. 후배 조앤에게 현실적이지만 쓰디쓴 말을 듣고 난 직후였다. 그녀의 모습에서 늦은 나이에도 한 단계 성장하는 삶,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에 바통을 넘기는 '물 흘러 가듯 거스를 수 없는 것'에 순응하는 위대한 생각의 전환이자 회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참으로 아름답다. 실제 스위스 실스마리아의 황홀한 풍경을 한 점 한 점 잡아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환적 지역이 영화의 주제와 완벽히 맞아 떨어진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고민할 때, 나조차 나를 통제하지 못해 힘들어 할 때, 내려놓지 못해 괴로울 때면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그리고 스위스 실스마리아로 가서 힐링의 시간을 갖고 싶어질 것 같다. 그렇지만 깨닫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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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쿠쉬완트 싱의 <델리>


<델리> 표지 ⓒ 아시아

행정사회적인 의미인 도(都: 도읍)와 경제적인 의미인 시(市: 저자) 두 가지 의미가 합쳐져 탄생한 '도시'. 많은 소설가들이 도시를 이야기했다. 서울을 이야기한 정이현의 <달콤한 나의 도시>, 더블린을 이야기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파리를 이야기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파리와 런던을 이야기한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등. 


거기엔 도시에 대한 사랑, 증오, 애정, 질투 등 그야말로 애증의 모순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어느새 '삭막함'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도시를 어찌 멀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세련되고 매력적인 도시를 어찌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시에는 떨쳐내고 싶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듯하다. 


쿠쉬완트 싱의 <델리> 또한 작가의 델리에 대한 애증의 모순적인 감정이 강력하게 드러나 있다. 작가의 그 감정을 '바그마티'라고 하는 남녀추니를 통해 드러낸다. 남녀추니란 선천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소설 속에서 바그마티는 남녀 모두를 상대하는 창녀로 출현한다. 그녀(그)는 델리라는 도시, 델리의 험난한 역사, 그리고 델리의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했던 상황까지 커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소설로 읽는 충분한 재미


소설은 그런 바그마티에 대한 애증 그리고 델리에 대한 애증을 강하게 표출하는 지식인 화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그는 주업으로 역사 건축물을 안내해주곤 하는데, 그러며 자연스레 시제는 과거로 향한다. 그렇게 델리의 600년 과거와 현재를 단편적으로 오가며 서술되는 소설은 막힘없이 진행되는 가독성이 있다. 물론 거기엔 충분한 재미, 즉 소설로서 읽는 재미가 있다. 


여기서 재미란 여러 가지가 있겠다. 작가의 유머를 한층 가미시킨 재밌는 문장, 과거를 여행할 때마다 계속해서 시선이 바뀌어(황제, 왕자, 환관, 시인, 방랑자, 군인 등) 지루함이 없는 부분, 사랑, 열정, 섹스, 미움, 복수, 폭력 등이 난무하는 리얼리티와 판타지티의 공존,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에서 오는 신기함까지. 소설이 갖춰워야 할 모든 걸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동은 당연히 따라온다. 


하지만 재미만 있는 건 아니다. 대중성만 갖췄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25년 동안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그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게 해주는 소설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읽기 전에 읽는 동안 읽고 난 후 숨이 턱턱 막힐 수 있겠지만, 작가의 탁월한 능력이 그렇게 하게 놔두지 않는다. 독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보여주고 만지고 느끼게 해주며 결국 델리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들게끔 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재미의 한 부분인 '그들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과 작가가 25년 동안을 준비한 끝에 내놓은 소설이 보여주는 내공의 깊이가 한 라인에 서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델리의 600년 역사는 그 시선들이 계속 바뀜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참혹하다.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민초는 참상과 고된 삶을 이어가고 반역자들은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며 호의호식한다. 그뿐이랴? 그건 현재까지 이어진다. 


"인도 최초의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는 세포이 항쟁 이후 국왕은 폐위당해 버마로 쫓겨나고 왕족은 몰살당하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독립투사들은 대포에 맞아 갈가리 찢겨 죽거나 영국인들의 유흥거리로 전락한 교수형을 당했다. 반면에 영국인들의 개가 되어 첩자 노릇을 했던 간악한 귀족들은 대를 이어 누릴 부귀영화를 보장받았고, 돈에 눈멀어 영국군의 앞잡이가 되었던 무지한 자들은 상류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추악한 델리, 반면 아름답고 경이로운 과거의 델리


여전히 제3세계가 존재한다면, 그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는 인도의 수도 '델리'. 지금 델리는 어떻게 변했을까? 작가는 현재의 델리를 여지 없이 보여준다. 떠들썩하고 초라해 보이는 시장과 오두막집들, 정화되지 않은 오수에서 풍겨나는 악취에 구역질이 치밀 수 있는 비좁고 꼬불꼬불한 샛길, 어디에서나 가래와 시뻘건 베텔즙을 밷어내고 변의를 느끼면 아무 데서나 일을 보며 상스러운 욕지거리로 친밀감을 표시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사타구니를 긁적거리는 사람들까지. 


추악한 델리. 반면 작가가 보여주는 과거의 델리는 비록 갈가리 찢겼지만 아름답고 경이롭다. 작가는 이렇게 델리의 과거와 현재 또한 대비 시켜 보여준다. 소설 전체가 수많은 대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울은 어떨까? 델리와는 다를까? 답은 '똑같다.' 과거 '이촌향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서울로 올라와서 한평생 터전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서울을 마음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한 지 오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빈민과 소외 계층이 다수 존재하고 이들을 짓뭉개 버리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서울은 역사적으로도 찬란한 문화의 꽃임을 자청했고 실로 그러했지만, 꽃이 꽃이게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현재의 서울을 추악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아름답다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그리고 그런 서울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쿠쉬완트 싱은 델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다고 했는데, 과연 그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하다. 


델리 - 10점
쿠쉬완트 싱 지음, 황보석 옮김/도서출판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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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보는 관점은 각기 다르다.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과거와 현재는 연결되어 있어 과거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관점이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다.


이번에 다뤄볼 주제가 독일의 과거와 현재인데, 보는 시각에 따라 의견이 편애하게 갈라질 것이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건들에 대해서 말이다. 필자가 어느 한편에 서서 의견을 피력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인거 같고, 더구나 확고한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독일의 과거가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중에서도 분단과 통일과정에 관련해 한국이 가야할 길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20세기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계 제1차, 2차 대전. 그 주범인 독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고 덮으려 해도 덮어지지 않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과오이자 상처이다. 그로인해 오래전부터 독일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다고 한다. 그들의 조국이 과거에 저질렀던 일의 현재에서의 영향에 대해서 말이다.


이는 어느 한쪽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 또 다른 중요 사건인 분단과 통일.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감동적인 평화적 통일.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 모든 사건에 우리나라 또한 영향을 받았고 앞으로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하고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독일의 과거와 현재


독일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가 세워지고 무너졌다. 이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면인데, 지형적 특징이 다르기도 하고 지금도 그렇지만 유럽에는 무수한 인종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된 왕국을 건설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특히 독일은 국가가 통일되기까지의 기간이 매우 길었다. 불과 200여 년 전 19세기에 이르러 통일을 이루었고 독일제국을 세웠다. 이때부터 독일의 비극 아닌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전까지 독일은 통일을 이루지 못해, 유럽에서도 후진국이자 2류 국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통일 후의 급격한 발전과 군사력 증가로 인해 강대국 반열에 들어서고 전쟁을 시작하는데, 이후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약 100년간 유럽은 황폐해져 간 것이었다.


지금의 독일은 유럽은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선진국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파워만큼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과거 때문이지 아닌가 싶다.


이것이 독일의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전쟁 주범이면서도 일본이 느끼고 있는 '피해자 의식' 과는 다른 '가해자 의식' 말이다. 독일은 전쟁의 전범이라는 사실을 덮으려 하지 않고 그 사실을 인식하고 그 죗값을 치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예로, 2차 대전 이후에도 무수히 많은 전쟁이 치러졌었는데 독일은 의도적으로라도 참여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외국인이(특히 가난한 외국인) 자국에 들어와서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적극장려하고 있다.(물론 100%를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전쟁에 관한 영향이 독일과 타국가간에 관한 것이었다면 독일의 분단과 통일은 독일 내부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미국과 소련에 의해 양분되었기 때문에 내부가 아니라 외부와도 관련이 있다.)


전쟁에 패하고 난 후 독일은 공산주의 진형인 동독과 자본주의 진형인 서독으로 나뉘어졌다.(원인과 과정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양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약 50년 동안 나뉘어져 있던 독일은 1990년에 마침내 '평화적 통일'을 이룩한다. 하지만 문제는 통일 이후에 발생한다.



▲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통일 전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 연합뉴스



오랫동안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생활을 하였고 국가적으로 판이하게 대립되는 체제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국력 등으로 인해 수많은 마찰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동독과 서독 나름대로 이득보다는 손해를 훨씬 많이 본 것이다.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동서독 사람들 사이의 대립, 사실상의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에서 오는 동독 쪽의 상실감과 실망감, 그런 동독으로 인해 짊어질 것이 많아진 서독 쪽의 불만 등.

'오씨(Ossis)와 베씨(Wessis)'로 대표되는 서독 지역 사람들과 동독 지역 사람들 간의 대립. 서독사람들은 동독사람들을 오씨(게으른 동독인들)라고 놀리고 이에 동독사람들은 서독사람들에게 베씨(거만한 서독인들)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독일의 통일은 독일 사람들에게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독일의 통일 이후와 우리나라


여기에는 포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것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닌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적용된다. 현재의 우리나라는 분단 이후 극우주의와 반공사상으로 인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기는커녕 적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정권을 향한 '주적' 개념은 여전히 존재하고, 북한에서는 미사일과 핵실험이 여전히 빈번하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통일을 이룩할 수 없다. 평화적 통일을 했다는 독일에도 저렇게 많은 갈등이 남아있는데 말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반공사상을 갖고 있다. 필자도 어릴 때부터 군대에서까지 '우리의 적은 북한'이라는 식의 교육을 받아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다. 적과 어떻게 평화적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가.


비록 통일 이후의 독일에 많은 문제가 있지만 분명히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통일에 관해 그들 자신이 직접 관여를 해서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으며(우리나라의 경우 한반도 통일이 우리들의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외세에 휘둘리고 있다.) 상대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갖고 있었다.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남북한 경비병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 아시아뉴스통신



우리나라의 경우, 겉으로는 한민족이니 형제니 하고 말하고 있지만 여지없는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건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안들은 남한에서 주도적으로 생각하여할 것이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것들. 그건 단지 그들의 사상이고 성향일 뿐이라는 생각이 주도를 이루어야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시대착오적인 생각들을 타파하는 것이 한반도 통일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


독일이라는 나라. 그들의 역사적인 행적들. 그리고 현재의 독일. 그들의 과거가 결코 지워지지 않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에 목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하지 않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독일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들 내부에서 과거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으며 계속적으로 의견들을 절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는 통일조차 되지 않은 지금까지도 의견조차 내지 못하게 입을 막아버리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나라는 점차 다른 길로 가는 것 같다. 무력에 인한 통일은 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오직 평화적 통일이 있을 뿐인데 아직까지도 편 가르기 식의 논리가 팽배하다. 지난 5년의 정부 움직임을 보면 그런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하게 된다. '파멸의 길'을 말이다.


독일에서는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이 '실용주의'를 앞세워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벗어나서 실용주의 노선을 타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좀 더 열린 생각을 갖고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겠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조금 더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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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env

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