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더 킹>


지난 한 해 계속된 '시국영화', <더 킹>은 그 한 정점을 보여준다. 묵직하지만 가볍게, 직설적이지만 풍자적으로. 감독의 전작을 다 괜찮게 본 입장에서, 과연 이 영화는 어떨지? ⓒNEW



지난 2015년 11월 개봉한 <내부자들>부터 시작된 일명 '시국영화'. 사실 이 시국엔 어떤 영화가 나와도 맞물릴 수밖에 없다. 시국을 그린 영화든, 시국을 비판한 영화든, 시국을 위로해줄 영화든 말이다. 2017년에도 변함없이 이어나갈 예정인 듯하다. 아니, 그 강도는 그 어느 해보다 심해질 것이 분명하다. 


한재림 감독의 <더 킹>도 그중 하나로 보면 될 것인데, 가히 그 수위가 어느 영화보다 높다. 블랙 코미디로 무장한 직접적인 실명 거론과 패러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영화의 몇몇 장면은 '최순실 게이트'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려내고 있어, 한편으론 무섭기까지 했고 한편으론 영화를 너무 날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건 2017년 1월이지만 영화 촬영이 끝난 건 게이트가 터지기 한참 전일 터,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한재림 감독의 능력에 관심이 쏠린다. 


필모그래피를 들여다보니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뿐만 아니라 제작한 두 개의 영화 모두 본 게 아닌가. 그것도 상당히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말이다.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 감독은 이어서 <우아한 세계> <관상> <더 킹>을 연출했고, <연애의 온도> <특종: 량첸살인기>를 기획, 제작했다. 집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한 감독이 연출한 네 개의 영화 모두 그가 각본, 각색에 참여했다는 것.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 타기


영화는 '개천에서 용 난' 한 샐러리맨 검사의 권력 정점 라인으로의 험난하지만 할 만한 길을 보여준다. 그건 곧 한국 현대사의 추악한 일면. ⓒNEW



영화는 주인공 박태수(조인성 분)의 내레이션에 따라 진행된다. 초반엔 오로지 태수의 성장과 성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양아치로 살아갈 운명이었던 그는 집에 찾아와 아버지를 일방적으로 깔아뭉개는 '검사'의 힘을 보고 미친듯한 공부 신공으로 서울대 법대를 들어간다. 때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휘말린 태수는 군대에 끌려들어가고 제대를 하고선 단번에 사법고시를 패스해 검사가 된다. '샐러리맨 검사'의 시작이다. 


태수가 바랐던 검사는 권력의 정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검사다. 그가 검사가 되기로 결심한 때가, 막무가내로 힘을 휘두른 삼류 건달 아버지를 단번에 제압한 진짜 '힘'의 검사를 보고 나서이지 않은가. 태수는 곧 정의를 버리고 권력의 라인으로 향한다. 검사 권력의 핵심인 전략부의 양동철 검사(배성우 분)와 전략부장 한강식 검사(정우성 분) 라인이 그것이었다. 그들이야말로 한국을 주무르는 실세. 


한편 목포 최대 조폭 조직인 들개파의 2인자 최두일(류준열 분)은 어린 시절 박태수의 친구였다. 홀연히 나타난 그는 박태수가 처리하지 못하는 더러운 일을 대신 처리해주는 '개'가 된다. 대신 한강식이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는 태수는 두일의 뒤를 봐주고 두일은 곧 강남의 1인자가 된다. 검사와 조폭이라는 상극이 한통속으로 전락한다. 


그야말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 최대 '라인', 그렇지만 라인의 생태라는 게 정점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는 법, 정점이란 곧 대통령을 말하는데 그들 또한 대선이 있는 5년마다 라인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력이란 이길 것 같은 라인을 잘 고르는 능력과 비록 진 라인에 타도 어떻게든 살아남아 자리를 보존하는 능력이다. 언제까지 계속 라인을 잘 탈 수 있을까? 천하 권력을 누리는 자리를 계속 보존할 수 있을까?


'이게 나라냐'의 지경으로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리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자니, 이게 나라인지 의심스럽다. 나라를 몇몇의 개인들이 좌지우지 하다니. 물론 현실은 더 막장이지만, 이들 또한 그에 큰 역할을 했음이 자명하다. ⓒNEW



'이게 나라냐'라는 말이 지난 몇 달 동안 전국을 강타했는데, 결코 영화 유행어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울분의 토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의 도래. 지구에 혜성이 충돌하거나 지구에 빙하기가 도래하거나 고대부터 예견된 지구 멸망을 목도하는 것만큼 충격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민간인의 나라 사유화. 모르긴 몰라도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는 깊디 깊을 것이다. 


<더 킹>은 그런 작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그렇게 되기까지 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이끌어 온 이들을 그린다. 그러기 위해서 차용한 것이 '한국 현대사 일별'. 이 영화를 보면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대선'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를 볼 수 있다. 자칫 영화는 안 보이고 한국 현대사만 잘 보일 수 있었을 텐데, 감독의 의도가 그러한듯. 이를 알고 보면 재밌게 볼 수 있다.  


2014년 말에 개봉해 큰 사랑을 받았던 '국뽕' 영화 <국제시장>의 한국 현대사 연대기가 생각나게끔 하는 바, 하지만 <더 킹>은 국뽕과는 전혀 반대되는 면모를 보인다. '이게 나라냐'에 대해 참으로 영화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국까' 영화는 아닌듯, 영화를 이끌어 가는 건 사람이다. 


권력에 기생한 기회주의자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권력의 정점, '더 킹'이라 칭한다. 그들을 권력의 노예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을 폭주시키며 나라를 망칠 동안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일면 '더 킹'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기대를 웃도는 퀄리티, 차기작을 기다린다


영화는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심각하기 그지 없는 소재들에 묻히지 않고 감독의 본연 스타일을 밀고 나간다. 그게 괜찮게 어울리니, 상당히 좋았다. 차기작이 기대된다. ⓒNEW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전작들을 모두 접한 이상 한 감독에 대한 신뢰는 있었지만, 시국에 편승한 그렇고 그런 영화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내부자들>류의 수많은 영화들 중 하나일 거라고 지레짐작 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전혀 아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괜찮네' '참신한대?' '기대 이상이네' '참 영화답게 잘 만들었네'를 연발했다. 다 보고는 '재밌었어'를 합창했고. 


한 감독은 그동안 연출한 모든 영화에서 일관적으로 약간의 사회고발, 지극한 리얼리즘, 은근한 코미디, 영화로만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요소를 보여주었는데 <더 킹>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 현대사라는 무거운 소재를 화려한 블랙 코미디와 영화시각적 요소로 가지고 놀듯이 보여준 모습들에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몇몇 장면들, 한강식 라인의 승리 자축 파티 장면들에선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연상되었는데, 아무래도 오마주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희대의 사기극을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광란의 파티 장면을 차용해 쓰면서, 그들의 자축 파티 또한 사기극 못지 않은 희대의 범죄를 성공시키고 열어젖힌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한재림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영화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감독이 많지 않은데, 그런 감독의 영화는 그 자체로 힐링을 주는 법이다. 그야말로 영화로만 얻을 수 있는 힐링 말이다. <더 킹>도 힐링을 주었나? 단연코 힐링을 주었다. 하지만 씁쓸함은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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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서평] <조국과 민족>


<조국과 민족-상> 표지 ⓒ비아북



아직도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은 굳게 다짐합니다." 2007년에 수정되었다고 하는데, 여하튼 고등학교 때까지 아침 조례 시간이면 빠짐 없이 행하던 그 맹세. 군인이었을 땐 국기 게양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 무얼 하든 동작을 멈추고 그곳을 향해 몸을 돌려 엄숙한 자세로 경례를 하였다. 지금도 그 음악이 어디선가 들리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조국과 민족을 향한 몸에 봰 동작이자 감성이다. 


그땐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내가 충성을 다짐한 '조국과 민족'이 무엇인지. 깨우쳐서 알게 된 건 아니라서 '알았다'는 말이 정확한 수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알았다. '나라를 사랑해야 한다' 나아가 '(나는) 나라를 사랑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나라를 위해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도 당연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학생의 본분, 학생의 본분을 다하는 건, 나라를 위해 학생이 할 수 있는 최선. 


머리가 크니 조국과 민족이 국가를 위해 본분을 다하는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지켜주기는커녕 국민이 낸 혈세로 개인의 잇속을 챙기질 않나,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사업을 역사에 길이남을 만한 돈을 쓰며 밀어부치지 않나, 급기야 국민 몰래 나라를 통째로 넘기려들지 않나... 국가라는 게 무엇인지,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닌지.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되는 짓거리가 한심하고 어이없고 무섭기까지 하다. 그런 짓거리는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드러내 놓고 거행되었다. 


<조국과 민족-하> 표지 ⓒ비아북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짓거리의 가해자


만화 <조국과 민족>(비아북)은 국가라는 이름 하에 거행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짓거리를 색다른 시각으로 조명했다. 바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가 주인공이 되어, 서술된 이야기이다. 자칫 감화될까봐 알고 싶지 않았고, 차마 그 짓거리들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궁금한 건 사실. 왜 그들은 그러했을까, 어째서 그들은 그런 생각과 행동을 했을까.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때는 1987년. 안기부로 유추되는 정보기관에서 고문기술자로 명성을 떨치는 젊은 청년 박도훈, 그는 장실장의 인도 하에 조국과 민족의 영광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행하고 특이한 어린 시절을 장실장 덕분에 잘 보내왔다고 믿는 도훈은, 장실장이 멘토이자 롤모델이다. 도훈은 일본과 금괴 밀수를 추진하다가 고정간첩 '광명산'의 마약 밀수를 돕게 된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이중간첩 아닌 이중간첩이 된다. 하지만 장실장과 가깝게 지내는 이중고정간첩 '량강 1호'의 첩보로 광명산이 잡히게 되고 도훈은 위기에 처한다. 도훈의 앞날은?


도훈과 함께 일하는 김대한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굴지의 건설사 회장 자리에 오른 김판구의 아들이다. 그는 '빨갱이'를 잡아 족치며 여기까지 왔다는 자부심이 대단한대, 대한은 다름 아닌 그가 조총련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대단한 신념을 지닌 대한은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김판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한다. 그러는 한편, 장실장의 명령을 받아 홍콩에서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인 사건을 파헤친다. 그런데 그 사건을 간첩의 짓으로 둔갑시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이어진다. 대한은 어떤 선택을 할까? 


만화는 여러 실제 사건과 인물을 참조한 것 같다. '악의 축' 장실장은 장세동을, '고문기술자' 박도훈은 이근안을, 홍콩간첩조작사건은 '수지킴간첩조작사건'을 참조했다. 이밖에도 당시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기상천외하고 황당무계하고 무시무시한 조작 사건들을 다뤘다. 저자가 만든 이야기에 실제에서 빌린 인물과 사건을 곳곳에 배치하니 멋진 첩보물이 탄생했다. 기시감을 줄이고 생생함을 더했다. 


'보통 사람'의 조국과 민족을 위한 진심


작가는 만화를 통해서 말한다. 이 가해자들이 조국을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그러했다고 말이다. 말도 되지 않는 헛소리를 짓거리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게 이 작품의 노림수인 것 같다. 여기서 더욱 무서운 건 뭐냐고?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 특수하게 길러졌거나 훈련받은 게 아니다. 또한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 체계를 통해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생각했다는 것. 마약을 상시 복용해서 정신이 돌아버렸거나 애초에 이상이 있는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만화를 보며 그림체, 말투, 배경 등 모든 면에서 느낄 수 있다. 적어도 실무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끔찍한 일을 그저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서 영화 <박하사탕>을 보고 받은 충격을 다시 한 번 받았고, 그 눈쌀 지뿌려지고 가슴이 오므라들게 하는 잔인함은 영화 <남영동 1985>와 <변호인>을 생각나게 했다. 그들 모두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했다. '일했다고 믿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했다'고 하는 게 가해자의 진심이다. 


이쯤 되면 혼란이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방법이 잔인했을 뿐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을 했다는 그들, 그들도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거다. 더군다나 평범하다 못해 귀엽기까지(?)한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 이상 잔인하지도 끔찍하지도 않게 느껴질 때가 온다. 장난처럼 느껴지는 거다. 


작가는 왜 그런 그림체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그려냈을까. 아이히만으로 상징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일까. 홀로코스트가 광신도나 반사회적 성격장애자가 아닌 상부의 명령에 순응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말하는 개념이다. 유대인 말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여기에 <조국과 민족>의 주인공 가해자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진심이 얹혀 있다. 


'악의 평범성'과 차원을 달리하는, 계속되는 반인륜적인 짓


이슬람의 꾸란에서 최초로 시작되었다는 '고의적인 살인'과 '고의적이지 않은 살인'의 구분. 고의적인 살인에는 사형을 내렸고, 그렇지 않은 살인에는 벌금을 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든 지시에 충실히 따르든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인 짓거리는 고의일까 고의적이지 않은 걸까. 자기의 행위에 의하여 일정한 결과가 생길 것을 인식하면서 그 행위를 하는 짓임이 분명하기에 '고의'라고 하겠다.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행동이 나라에 충성하는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조국과 민족>이 내포하고 있는 바는,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시무시하다. '악의 평범성'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거기에는 상명하복에서 오는 복종과 갈등 없는 기술적 임무만이 존재해 틀이 깨지면 일순간에 무너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맹목적 사랑과 충성이 도사리고 있기에, 틀이 깨져도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아주 오래도록 암약하며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우리나라가 수십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고문도 예술'이라는 망언 중에 망언도 서슴지 않았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하나의 사례가 될 텐데, 그는 김근태 의원을 고문하고 납북어부 김성학 씨를 감금한 혐의로 지명수배된 후 10여 년의 도피생활 끝에 자수해 감옥살이를 하는 도중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2011년 말에 김근태 의원이 사망하고는 2012년 2월에 책을 펴냈는데, '그 당시에는 애국으로 한 일.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을 것이다'라며 사죄를 회피했다. 또한 '정치형태가 바뀌니 역적이 됐다. 멍에를 내가 지고 가고 있다'며 변명하기도 했다. 이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근안을 '시대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가져다 붙이기 쉬운 수식어다. 누구라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게 만드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국가의 명을 받는 사람임과 동시에 국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예측하고 행동하기도 하는 바 누군가에게는 국가 그 자체로 비치기도 할 것이다.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진심어린 마음에서 충성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쳤다고 해서, 그렇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짓을 용서해야 할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그땐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것이 애국의 길이었다고 말이다. 그에게도 그들에게도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분명 어떤 사연이 있을 거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애국'이지만 '나쁜 짓', 조국과 민족이라는 대의를 위해선 소수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당위 또는 자기 합리화. 그 시대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더 다양한 시각으로, 더 깊이 있게, 더 활발하게. <조국과 민족>은 이 세 층위를 고루 만족시킨 수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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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법부>



<사법부> 표지 ⓒ돌베개


2015년 말 경 대법원 소속 사법정책연구원이 일반국민 1,100명과 재판 당사자 300명을 상대로 한 '국민의 사법절차에 대한 이해도 및 재판에 관한 인식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법원을 어느 정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5점 척도 답변에 평균 3.04점을 줬다. 즉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60.8점인 것이다. 낙제점을 겨우 면한 정도 또는 낙제 수준의 점수다. '헌법의 수호자'이자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수호자'인 사법부가 왜, 어떻게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된 것일까.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고 하는 오늘날에도 사법권에 대한 독립을 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사법권의 독립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다. 사법권이 독립되지 않는다는 건 국민이 기댈 최후의 보루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도 그런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건, 민주주의가 발을 붙이기 힘들었던 과거의 시기엔 사법권의 독립은 거의 불가능했다는 걸 의미한다. 한국 현대사는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도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삼권은 국가 권력의 핵심이다. 이들 삼권을 분립하여 상호 견제와 균형을 유지시킴으로서 국가 권력의 집중과 남용을 막는 건 민주주의 국가를 이끌어가는 기본 원리다. 이중 사법권은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수호자이면서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국가권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법권은 항상 정치권력의 침해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사법권을 쉽게 장악하고 휘두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법권의 독립은 반드시 행해져야만 한다.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


한국 현대사에 거침없는 죽비를 내리쳐 왔던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의 <사법부>(돌베개)는 사법권 독립 투쟁으로 읽는 한국 현대사라 할 수 있겠다. 책의 태반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사법부에 대한 부당한 압력과 개입으로 채우고 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다는 악명 높은 권력의 최정점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가 뭔들 못했겠느냐마는, 그 중심에 사법권 장악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법부야말로 거꾸로 창을 겨누면 누구보다도 쉽게 헌법을 파괴할 수 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을 텐데, 그걸 장악한 자 또한 그와 같은 짓을 마음껏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서슬퍼런 와중에도 많은 이들이 사법권 독립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권리와 의무를 행사한 것이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그리도 어려웠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법복을 벗고 법조계를 떠났다. 한홍구 교수는 그들의 일 또한 속속들이 보여준다. 물론 반대되는 이들이 더욱 많았다. 권력에 승복해 행정부의 시녀와 같은 역할을 자임하는 데 앞장 선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들의 입장 또한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던 만큼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책은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쓴 만큼 어렵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저자의 말대로 '화끈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고 그나마 있는 자료들도 기대만큼 확실한 정보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보의 단순한 나열로 비추기 일쑤이다. 그래도 울분과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개개의 긴박함과 함께, 사이다 같이 속 시원하게 평을 해주는 한홍구 교수의 말 한마디가 책을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이다. 


1971년에 있었던 사법파동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사법부 스스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그해 6월과 7월, 대법원은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을 내리고 서울형사지법에서는 시국 사건에 대해 연이은 무죄판결을 내린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었고, 정부가 어떤 수를 쓰든 이에 대해 손을 쓴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해 검찰이 영장을 청구한다. 


1971년 7월 말 경, 서울지검 공안부는 서울형사지법의 판사와 참여서기 등 세 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한다. 판사들은 격앙했고 집단사표를 제출한다. 37명이었다. 나중에는 사표를 제출한 법관의 수가 100명을 넘었다. 사법파동의 양상이 점차 법원과 검찰의 대립으로 치닫자 수습에 나섰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결국 법관들은 가장 단호한 무기라고 생각했던 사표 제출을 철회하고 투쟁을 그쳤다. 사법파동의 허무한 결말은 오히려 사법부로 하여금 저항의지를 잃게 만들었다. 이후 중앙정보부원들은 판사실을 대놓고 들락거리게 되었고, 사법부의 독립성은 사실상 무너졌다. 그렇지 않아도 1972년 10월부터 유신시대가 시작될 것이었다. 


사법권 흔들기를 제지할 수 있는 건 사법부 그리고 국민 뿐


오늘날의 사법부는 어떤 모습인가. 민주화 이전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로부터 수많은 압제를 받으면서 그래도 지키려고 애쓴 사법부의 독립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의 길을 져버리지 않았는가. 외려 옛날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그 권력과 위치를 사법부가 꿰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국민들이 체감하는 지금의 사법부가 그렇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예전의 사법부가 국민이 아닌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건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내부의 요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지난 10여 년 간의 보수 정권 하에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판결을 많이 내린 모습이 눈에 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압력으로 독립성을 침해당하고 갈 길을 제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독립성이 침해당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 모습이야말로 사법부가 제일 가지 말아야 할 길이다. 


그러는 한편 이 나라를 움직이는 보수 세력의 사법부 때리기 또한 여전하다. 사법부가 보수 세력의 생각과 다른 독립적인 판단으로 판결을 내릴 경우, 그들 세력이 뿌리내려 있는 입법부, 행정부, 언론까지 총동원해 사법부를 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사법부로선 흔들리지 않고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를 제지할 수 있는 건 사법부 그리고 국민 뿐이다. 사법부는 언제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킨다는 의무와 명분 하에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며, 그들 자체적으로도 특권적 지위나 계급적 입장에서 멀어져야 한다. 국민은 사법부에 대한 관심과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살펴야 하겠다. '법'과 '정의'는 이와 잇몸처럼 한 몸 같은 관계이다. 정의가 구현되려면 법이 잘 지켜져야 하고, 법이 잘 지켜지기 위해선 사법부가 독립적인 판단으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야 하며, 그래야 세상은 살 만하다. 국민은 살 만한 세상에서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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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표지 ⓒ창비


2015년은 유난히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의 기념일이 많다. 광복 70년을 필두로, 한일협정 50주년, 을사조약 110주년, 한국전쟁 65주년 등. 그야말로 한국의 운명을 바꾼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 사건들에 대해,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모든 이들이 독도를 외치지만 독도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왜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지? 애증의 대상인 미국이 보여줬던 그 모습들의 이유는 무엇인지? IMF 사태가 터진 진짜 이유는? 우리는 이런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에 대해 주로 한쪽의 시선으로만 알고 있다. 다른 쪽의 시선으로 볼 생각은 하지 않을 뿐더러, 양쪽의 시선으로 볼 생각은 더더욱 없다. 


흑백논리적 사고가 워낙 강하게 뿌리내려져 있기 때문에, 양쪽의 시선은 중도나 중립이 아닌 '회색분자'의 꼬리표를 남길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인지 흔히 '선명성'을 외친다. 한쪽을 확실히 선택해야 하고, 그래야 뭘 할 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양쪽의 시선으로 한국 현대사를 봐야 한다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창비)의 저자는 양쪽의 시선으로 한국 현대사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정치화되고 신화화된 역사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며 한국 현대사는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라진다고 집고 있다. 책은 독도, 과거사 망언, 영토, 식민지 근대화론, 미국, 정전협정, 베트남전쟁, 경제성장, 5·16, 햇볕정책 등 한국 현대사 10가지 주요 이슈를 다룬다. 


이 중에 흥미가 동하는 사건이 몇 개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 베트남전쟁, 경제성장이다. 평소부터 관심이 있었던 사건도 있고,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어서 더 알고 싶게 된 사건도 있으며, 저자가 말했던 양쪽의 시선에 관한 사건도 있다. 특히 양쪽의 시선에 관한 사건에 흥미가 동하는데, 개인적으로 상대주의적인 관점에서 중도파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시선 자체에 관심이 간다. 


저자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행했던 수탈, 그리고 일본에 의해 개발된 면모 양쪽 측면을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며 전 세계 역사 속에 식민지 수탈과 개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둘은 하나만 오지 않고 필연적으로 같이 올 수밖에 없다는 것. 저자는 여기에서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끝나는지?


베트남전쟁에 관해 알아야 하는 것들


베트남전쟁은 전쟁 그 자체가 세계 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 예로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도 지는 바람에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금태환을 정지 시킨다. 이로 인해 달러가 가지고 있던 절대적인 지위를 잃게 되고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체제가 흔들린다. 


한편 베트남전쟁 도중에 우리나라는 미국의 요청에 의해 파병을 감행하게 되는데, 사실 이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국이 스스로 안보를 지키지 못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다른 나라를 돕기 위해 파병을 한다니? 그런데도 한국이 파병을 결정한 이유는 두 가지라고 한다. 한미동맹과 안보적 문제. 이중 안보적 문제를 보면, 한국군이 파병을 하는 대신 주한미군 감축을 없었던 일로 하는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 여력이 없어 주한미군을 감축하려 했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무슨 이유가 있던 간에 우리나라는 베트남전쟁 특수로 경제적 이익을 상당히 볼 수 있었다. 과거 한국전쟁 때 일본이 전쟁 특수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봤었는데, 우리나라는 이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으며 그에 대해 당연히 비난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베트남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경제,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경제성장 부분은 지금의 우리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십 년 전과 지금이 이어져 있다. 저자는 IMF 사태가 일어났던 이유도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잘못된 경제 위기 해결 때문이라고 말한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와 1980년대까지 계속 경제위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부터 수출을 증가시키기 위해 수출 기업에 혜택을 주는 방식의 정책을 행하다가, 베트남전쟁 특수로 수출이 급증하면서 본격적으로 수출에 중점을 두는 정책이 나타난다. 기업들이 차관을 들여오고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주게 되는 것이다. 결국 1969년 이 정책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조사해 보니 건전한 기업이 하나도 없었다. 기업이 열심히 하지 않아도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주니, 그야말로 남의 돈으로만 편안하게 사업을 했던 것이다. 이 경제위기를 박정희 정권은 사채 동결이라는 반자본주의적 조치를 통해 임시적으로 돌파한다.


1980년은 1961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 당시 왜 경제위기가 터졌는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때의 경제위기는 '구조조정'으로 돌파한다. 부실기업들을 상대적으로 건전한 기업들에 떠맡기며 대신 큰 혜택을 주는 방법이다. 이 때문에 본격적으로 재벌이 생기기 시작했다. 


재벌은 1997년의 경제위기로도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재벌이 커지면서 독과점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국내에서는 엄청난 이익을 보는 대신 상대적으로 세계 시장에서는 경쟁력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본격적으로 자유화가 시작되고 보호무역이 불가능하게 된다. 자연 세계와 상대하게 된 독과점 기업들에게 위기가 닥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특히 금융에 크나큰 타격을 입힌다. 


중립의 시선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들이 있다


책은 이처럼 일반적으로 모를 공산이 큰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해석하며 한국 현대사를 대할 때 흔히 갈리는 첨예한 대립을 최대한 지양하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그런 주장이 양쪽의 시선에서 모두 안 좋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중립을 자처하는 나의 시선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말이 있었다. 그게 비록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감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어쩔 수 없는 면이기도 하겠지만, 책의 10가지 이슈 중 '박정희'와 관련이 없는 게 별로 없었다. 적어도 저자가 보기엔 한국 현대사가 박정희라는 거대한 그림자로 덮여 씌어져 있다는 것인데 씁쓸했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박정희 신화를 제대로 보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지 않을지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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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소설 읽기] <깃발>



홍희담의 <깃발> ⓒ아시아


5월이 되면 설렌다. 근로자의날부터 시작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성년의날, 석가탄신일까지 유독 기념일이 많기도 하거니와, 1년 중 가장 결혼을 많이 한다는 달인 만큼 가장 완벽한 환경을 뽐내는 달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 포근해지게 하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푸른 5월을 피로 물들인 사건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때는 1980년 5월, 장소는 광주다. 19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며 18년 간의 긴 군부독재가 끝나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물론 12.12 쿠데타로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모양새였지만, 전국에서 휘몰아치는 민주화 시위를 저지할 순 없어 보였다. 민주화는 대세였다. 


서울의 봄은 짧았다. 아니 애초에 서울의 봄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신군부 세력은 12.12 쿠데타로 이미 계엄령을 선포하며 정국을 얼어붙게 하였다. 이에 1980년 5월 13일 전국 대학생 10만 여명이 서울역에 모여 계엄령 철폐를 주장했다. 5월 15일 절정에 이른 시위는 돌연 해산되고 만다. 신군부는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일시에 민주화 세력에 대한 탄압을 실시한다.


비상계엄군은 학생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교를 휴교 시키는 등의 조치도 취해졌는데, 광주에 위치한 전남대도 휴교령이 내려졌다. 전남대 학생들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에게 저지 당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다친다. 이에 학생들은 '계엄 철폐' '휴교령 철회' 등의 구호를 시작으로 광주 시내로 진출한다. 역시 계엄군에 의해 저지를 당하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부상을 당하고 연행을 당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피의 일요일' 


홍희담의 소설 <깃발>은 광주의 1980년 5월 18일 그때를 '피의 일요일'이라 명명한다. 공수특전단들은 머리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곤봉을 휘둘렀다. 군중들은 순식간에 피를 토하고 쓰려졌다. 일어서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차 없이 대검을 쑤셨다. 길바닥에는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야학을 다니는 순분은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며칠을 보낸다. 그 사이에도 광주의 중심대로에서는 계엄군과 '시민'들 간의 공방전은 계속되었고, 서로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위가 시작된 지 4일 째는 5월 21일, 계엄군은 무차별 집단 발포를 실시한다. 생각지 못한 발포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다. 시위의 불길이 사그라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강력한 무기 앞에 맨몸의 시위는 너무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시민군은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외려 그 무차별 폭력에 맞서기 위해서 근처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대치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비롯한 광주 시내를 장악한다. 


계엄군은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시민군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진다. "무기를 반납하는 건 배신과 같은 거라는" 강경파, "무기는 또 피를 흘리게 할 것이다"라는 온건파. 대립의 결과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고 계엄군에 맞설 준비를 한다. 그들은 이 끝이 어떻게 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절대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이어나가기 위해 물러서지 않았던 것일까?


하층민이야말로 역사의 주체이다


소설은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시선으로 그 열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사건의 일말만 그대로 보여주었다면 별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노동자와 지식인을 대표하는 이들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진 또 다른 대립을 보여주며, 5.18의 또 다른 면모를 환기 시킨다. 


이들의 대립은 앞서 말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인 전남대학교 출신 윤강일은 "어차피 지는 싸움이다. 훗날을 도모해야 해."라며 광주를 떠난다. 반면 손분, 형자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은 그 '어차피 지는 싸움'을 위해 끝까지 남아 싸운다. 그들은 다만 서로가 서로를 위할 뿐이었다. 


"도청에 끝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을 잘 기억해둬. 어떤 사람이 항쟁에 가담했고 투쟁했고 죽었는가를 꼭 기억해야 돼. 그러면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어떤 사람들이 역사를 쓰는지." (본문 중에서)


작가는 하층민들이야말로 역사를 쓰는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운동이 끝난 후에도 도망갔던 윤강일을 도와주는 순분 일행의 모습을 통해, 노동자들이야말로 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야말로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단순 '고발 소설'을 넘어 '노동 소설'로 까지 그 영향력을 넓혔다. 


사실 이 작품은 상당히 거친 면모가 있다. 문학적으로만 본다면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하기가 애매하다. 르포르타주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비롯한 5.18 관련 문학을 문학적으로 낮게 평가하기도 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데, 시간이 지나 그 사건이 퇴색하면 자연스레 관련 문학도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 사건이, 그 사람들이, 그 정신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 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시아 출판사에서 후원하는 '한국 대표 소설 읽기'의 일환입니다.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함께 앞으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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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한국 현대사의 민낯>



<한국 현대사의 민낯> ⓒ철수와영희



어릴 때부터 역사를 워낙 좋아해서 한때 역사학자라는 거창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장래의 직업을 상정해 놓고 있었던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람 이름, 사건, 날짜, 지도를 좋아했던 것 같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라고 하며 지나가면 마음 편하겠지만, 마냥 그것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나에게 역사란 단순히 유명한 사람들의 유명한 사건들 나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왜 그랬는지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마냥 그들이 행했던 무엇을 외우는 게 재미있었던 거다. 커서 어른이 되면 그들처럼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들의 삶과 그 사건이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처럼 재밌게 읽혔던 것 뿐일까? 알고 보면 사실 역사를 좋아한 게 아니었던 걸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도 유명한 사람들과 유명한 사건들을 좋아하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진짜 모습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진짜 모습을 알기가 참으로 힘들다. 이념적 갈등이 너무나 극렬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 역사 시간에 들었던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 민낯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역사에 무지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단적인 예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 되었다고 배웠다는 것. 이게 맞는 사실인가?


진실을 규명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독립운동가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김상웅과 출판평론가이자 북칼럼니스트인 장동석이 만나 진실을 규명하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작업을 하였는데, <한국 현대사의 민낯>이 그 책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여기저기서 한국 현대사의 진짜 모습을 많이 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은 책이 또 한 번 단계를 넘어서게 해주었다. 


책을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몇 단계나 넘는 경험을 했다. 나라를 세운 아버지라는 뜻의 '국부' 이승만을 두고 신채호 선생이 한 말 때문이다.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미국에 있던 이승만이 미국에 한국의 위임통치안을 제시했을 때, 이를 두고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이승만은 아직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이승만을 우리는 국부라고 칭하며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나. 정확히는 그렇게 부르도록 교육을 받은 것이고. 이승만의 파행은 비단 이것 뿐만이 아니다. 해방 전후, 전쟁 전후 한국의 비극 중 이승만과 연관된 게 부지기수이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가히 괴물 같았던 그는, 한국 초대 헌법 초안이었던 내각책임제조차 대통령제로 바꿔 자신의 권력욕을 산화 시키지 않고 발화 시켰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을 연달아 연출한다.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였던 반민특위를 해체 시켜 버렸고, 전쟁을 막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전쟁이 터지자 마자 남쪽으로 도망가며 한강 철교를 폭파 시켜 버린 것이다. 그 북쪽에 있던 사람들, 당시 한강 철교를 건너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그리고 남쪽으로 피신을 가서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위원을 잡아 들이기까지 하면서 다시 한 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헌법도 바꾸고, 선거도 불법으로 하는 건 기본이었다. 


인물들과 사건들이 곧 역사를 구성한다


이 책은 이렇듯 짧은 분량에서도 이승만에 대해 많이 다룬다. 그만큼 그의 재조명이 필요하고, 재조명을 할 시 한국 현대사의 민낯에서 가장 더러운 부분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여운형, 김구, 조봉암, 장준하 등을 다룬다. 이들은 하나 같이 비극적인 죽음의 주인공들인데, 개인적으로 여운형의 죽음이 제일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당시 국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신망을 받은 정치가로서, 살아서 그 뜻을 올바르게 펼쳤다면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뒷부분에는 이승만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다뤄야 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박정희가 다뤄지는데, 몰랐던 사실이 드러난다. 박정희가 행했던 쿠데타는 1번으로 1961년의 5·16만 알고 있는데, 사실 10 여 년 전인 1952년에 쿠데타 모의가 있었다고 한다. 6·25 전쟁이 한창인 당시, 이승만 정권을 타도할 목적으로 쿠데타를 모의 했는데 수뇌부의 동의를 얻지 못해 좌절되고 말았다. 


박정희 독재 정권 반대의 최선봉에 있었던 장준하 선생. 그의 의문스러운 죽음은, 이전의 여운형, 김구, 조봉암의 죽음과 궤를 같이하는 느낌이다. 배후를 알 수 없는 죽음, 배후는 알지만 미심쩍은 죽음, 이유도 있고 배후도 있고 미심쩍지도 않지만 안타깝기 그지 없는 죽음까지. 한국 현대사에서는 왜 이렇게 안타까운 죽음이 많은지, 왜 이렇게 세상을 바꿀 만한 이들의 석연찮은 죽음이 많은지. 


이들의 죽음, 그 진상만 제대로 밝혀져도 왜곡된 한국 현대사를 어느 정도 바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또는 이들의 삶이라도 제대로 서술 되어지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유명한 인물과 사건들이 곧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내가 역사를 보고 느끼는 방식이 그렇게 잘못된 건 아닐 테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현대사는 제대로 밝혀야 할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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