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킹스 스피치>


역사상 유명하다고 하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진 몰랐다. '말더듬이' 왕의 진심을 다한 국민으로의 연설을. ⓒ(주)화앤담이엔티



허를 찔렸다. '말더듬이'라는 크게 특별할 것 없는 상태가 이리도 긴장감을 유발할 줄이야. 자신이 말더듬이라는 걸 알면서도,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지극히 중요한 연설을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하다니.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한가. '이게 뭐라고 이리도 떨리나'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짧지만 강렬한 시작 장면에서 느낀 감정들이다. 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친이자 전임 국왕 조지 6세의 실화를 스크린으로 옮겨 감동을 자아내고자 했는데, 제대로 성공시키며 감격을 주었다. 우린 그 감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말더듬이 왕 조지 6세의 진심을 다한 연설 하나만으로. 


조지 5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8세는 역사상 유명한 스캔들을 일으키며 하야하고 동생 조지 6세(콜린 퍼스 분)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생각지도 못한 왕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가 너무 부담스러운 조지 6세, 특히 라디오야말로 왕 노릇의 절대적 기반이 된 시대에 '말더듬이'로서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 너무 높다.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 분)로부터 치료를 받아오긴 했지만, 큰 진전이 없는 것 같기도 했거니와 기상천외한 치료 방법에 기가 질려 오다가다 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 조지 5세가 돌아가셨을 때나 형 에드워드 8세가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줬을 때 심리적 위기가 찾아와 관계가 틀어지지만, 로그에 대한 믿음으로 계속해서 찾아가는 조지 6세다. 


정말 잘 만든 웰메이드 일회용 영화


정말 잘 만든 영화다. 더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일회용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주)화앤담이엔티



흔히 무난하고 무탈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를 '웰메이드 영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가 그렇다. 참 잘 만든 영화란 생각이 든다. 드라마 요소가 적절히 배합된 실화를 바탕으로 꼼꼼히 손 본 듯한 스토리를 중심으로, 프로페셔널하고 충실하게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며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 영화에서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와 색채를 최대한 배제한 듯한 감독, 독특하다기보다 정형화된 안정감이 인상적인 장면 미장센까지, 모두가 영화만을 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 느낌이다. 


결과는 흥행과 비평 양면의 완벽한 대박. 단도직입적으로, 제8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사실상 여주가 없는 영화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예다.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4억 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제작비 대비 26배가 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엘리자베스 2세도 극찬을 보냈다고 하니, 누가 보아도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번이면 족할 그런 영화라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겠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보면서 이야기와 숨겨진 이면을 확대재생산하며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를 보는 행위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활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처럼 좋은 영화임에도 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굳이 찾아보라면, 실제와 영화 속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정도? 하지만 그건 결코 영화가 중심이 될 순 없겠다. 영화의 주요 모토인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원인과 치료 과정을 다시 들여다보는 건? 그것 또한 의미는 있겠지만 영화가 중심이 될 순 없겠다. 여러모로 <킹스 스피치>는 정말 잘 만든 일회용 영화다. 그렇다고 킬링타임용은 아니다. 


 돌리지 않고 정면만 바라본 선택


이 영화가 가장 잘 한 점이 바로 조지 6세와 라이오넬 로그다. 이 두 사람에 방점을 찍고 다른 곳을 보지 않았다. ⓒ(주)화앤담이엔티



이야기가 산으로 갈 만한 요소들이 도처에 깔렸다. '왕의 연설'이라는 하나의 극점을 향해 치달렸으니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눈을 돌렸다면 영화의 만듦새는 여지 없이 흐트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 유혹이 꽤 강했을 텐데, 그 요소들이 꽤 재밌기 때문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시대극이니만큼 조금만 건드려도 봇물처럼 뿜어져 나올 게 아닌가. 그것도 현존하는 영국 여왕의 직계 선대에 관한 이야기이니.


완전히 바뀐 세상에 대처하는 왕실의 모습, 에드워드 8세의 세기의 스캔들, 스탠리 볼드윈이나 네빌 체임벌린이나 윈스턴 처칠과 같은 역사적 인물,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황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산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영화는 꿋꿋이 한 길을 걸어간다. 조지 6세의 말더듬이 치료, 그리고 라이오넬 로그. 


시대상을 직접적으로 그려내지 않은 선택, 필자를 포함해 약간의 불만이라도 갖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너무 한 개인에 천착해 지극한 목적 지향이 된 게 아닌가. 그리하여 대작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음에도 소품의 면모를 띠게 된 게 아닌가. 


영화는 온몸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치밀하고 꼼꼼한 각본은 결코 그 부분들을 간과하지 않는다. 한 장면, 한 표정, 한 마디가 눈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와 닿아 꽂히는 것이다. 조주연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을 잘 살펴야 한다. 어느 영화인들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겠냐만, 이 영화는 그 강도가 조금 더 쎄다고 하겠다. 


영화 자체가 가진 압도적 힘


비록 일회용 영화라곤 하지만, 영화 자체가 가진 힘이 엄청나서 계속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재와 주제가 가진 힘. ⓒ(주)화앤담이엔티



<킹스 스피치>는 계속해서 다시 보며 의미 부여를 할 수 없는 대신, 영화 자체가 가진 힘 때문에 종종 다시 찾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가와 비슷하다고 할까. 이 영화로 지도자의 덕목을 엿볼 수도 있고, 믿음이란 무엇인지 짚어볼 수 있으며, 치료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즉, 이 영화가 채택한 소재와 주제가 갖는 힘이 엄청나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상황에 이 영화가 문득 떠오르는 이유다. 다름 아닌 '지도자의 덕목'이다. '조지 6세가 로그와 더불어 믿음과 끈기로 말더듬이 장애를 극복하는 휴먼 스토리'라는 큰 이야기 이면에 있는 여러 이야기들이 우리가 들여다봐야 할 것들이다. 그것들이 이 영화를 찾게 만든 이유일 테다. 


조지 6세, 그는 어렸을 때 강압적인 아버지로부터 '교정'을 당했다고 한다. 안짱다리를 교정하기 위해 부목을 착용했고 왼손잡이였던 그는 오른손잡이로 교정해야 했다. 또 유모의 방치로 위염을 앓기도 했다고. 그 때문에 말을 더듬었는지 선천적으로 말을 더듬었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왕이 되기에는 힘든 겉모양(?)을 띠고 있었다. 그럼에도 치열한 고민과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조금 더 국민에게 다가 갔던 것이다. 오히려 콤플렉스가 '왕'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위압감과 오만함을 털어내주었다. 


언어 치료사 로그의 존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학위도 없고 당연히 정식 언어 치료사라는 타이틀도 없는 로그를 실력 하나로 뽑아 가까이 하는 대범함을 지닌 조지 6세. 그는 지극히 자신의 진심을 자신의 목소리로 전달하기 위해 치료를 받았다. 로그는 그의 말더듬이를 치료하려고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심리를 들여다보며 '안'부터 치료하고자 했다. 말더듬 장애의 근원을 찾는 게 맞다고 본 것이다. 고로 여기서 부각되는 건 '목소리'겠지만, 중요한 건 '진심'이겠다. 목소리는 진심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조지 6세의 진심은 무엇일까. 


"왕은 국민을 대변하기 때문에 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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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최악의 하루>


현 남친과 전 남친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는, 진심을 전할 여력조차 마련되지 않은 '최악의 하루' ⓒCGV 아트하우스



"긴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좋아해요.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하는듯, 넋두리를 하는듯, 어쩌다가 홀로 남겨진 은희는 정체모를 말을 내뱉는다. 그녀에겐 그야말로 최악의 하루였다. 현 남친과 전 남친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되다니... 하루를 시작할 때는 괜찮았었는데. 우연히 길을 헤매는 일본인 소설가를 만나 아무 꺼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만 해도. 어쩌다가 그녀는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비단 그 하루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연인과 초면을 향한 연기, 생각과는 반대의 아이러니


연기 못하는 연기지망생 은희(한예리 분). 수업을 마치고 나와 우연히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이와세 료)를 만난다. 은희는 일본말을 못하고, 료헤이는 한국말을 못한다. 둘 다 어설픈 영어로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은희는 설명하기가 어려워 직접 함께 료헤이가 찾는 곳으로 간다. 시간이 남아 카페로 향한 그들. 물 흐르듯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보기에 풋풋하고 설레기까지 한 듯한 대화가 이어진다. 왠지 편해보인다. 


은희의 '최악의 하루'에서 유일하게 최악이지 않은 때가 바로 '처음 보는 모르는 사람' 료헤이를 만나는 때다. ⓒCGV 아트하우스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가 유일하게 하루 중 '최악'이지 않은 때가 바로 료헤이를 만나는 때이다. 말도 안 통하니 속마음을 제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니 내 본 모습을 마음대로 드러낼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와의 대화가 편할 수 있다. 연기 못하는 은희는 아이러니하게 일상 생활에선, 즉 사랑의 대상에겐 연기를 잘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 즉 처음 보는 사람에겐 연기를 잘 못하니 그 모습이 부담 없이 다가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연기를 하지 않은가. 


사람은 연기자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연기를 한다. 그건 주로 만나는 사람마다 달라진다. 처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건 연기보다 본능에 가깝다. 초면, 연인, 가족, 상사, 동료, 후배, 친구 등. 여기서 가장 마음 쓰이는, 즉 가장 많은 연기를 필요로 하는 이는 누굴까? 연인이 아닐까 싶다. 그에 비하면, 아니 사실 가장 마음이 덜 쓰이는 이는 처음 보는 사람일 것이다. 굳이 연기를 하면서까지 잘 보이거나 자신을 감추고 그에게 맞는 모습을 보이려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은희가 사랑하는 이를 대하는 태도


은희는 료헤이와의 대화 중에 온 남자친구 현오(권율 분)의 메시지를 받고 서촌에서 남산으로 향한다. 현오는 아침드라마 조연으로 활약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모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나타났다.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은희가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닌 게 오버하고 있는 걸로밖에 안 보인다. 아주 꼴 보기 싫다. 다만 그는 아주 잘 생겼기에, 그런 모습이 꼴 보기 싫다는 거지 본판은 아주 좋아라 한다. 은희를 밤 상대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현오, 언제나처럼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다 선글라스를 뺏어 도망가려는 은희를 향해 한마디 한다. "유경아!" 은희는 선글라스를 밟아 부셔버리고 산을 내려간다. 


현오와 있을 때면 은희는 장난꾸러기가 된다. 여느 커플처럼 그와 티격태격하며 귀엽게 지낸다. 아니, 그렇게 지내고 싶은데 현오는 그렇지 않다. 꼴에 티비에 나온다고 유세떠는 것 같다. 그리고 몇 마디 안 가 은희의 과거를 들춘다. 잠시 현오가 옆에 없을 때 유부남과 바람을 핀 은희, 사실 은희는 현오와 함께 있을 때면 너무 힘들다. 우울했다가 즐거웠다가, 왔다갔다 하는 게 눈에 보인다. 물론 현오는 관심이 없다. 그런데 현오도 현오 자신이 병신같다고 한탄한다. 이 커플, 답이 없다. 


은희는 현오가 너무 좋으면서 너무 싫다. 마음이 떠난 것 같은데,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한 끈만 존재하는 것 같은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그렇지 않나 보다. ⓒCGV 아트하우스



씩씩거리며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 서서 아래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남자 하나가 오는 게 아닌가. 다름 아닌 은희가 바람 핀 유부남 운철(이희준 분)이다. 아까 현오를 만나러 가는 도중 트위터에 올린 글을 보고 왔댄다. 대단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 은희와 운철은 커피 한 잔 하며 근황을 묻고 답한다. "진심이 어떻게 진실을 이겨요?"라며, 행복하지 않으려 헤어진 아내와 합한다는 운철. 은희는 어이가 없어서인지 슬퍼서인지 모를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 갈 길을 간다. 


운철과 있을 때면 은희는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우린 이루어질 수 없나 봐요. 우리 다신 만나지 마요. 또 만나면 나도 나를 주체할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 같은 대사를 읊을 것만 같다. 그건 운철도 마찬가지다. 말인지 방귄지 모를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60년대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대사를 읊는 게 아닌가. 그들은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다. 아니, 연기를 하는 게 맞다. 그럼으로써 좀 더 현실적인 나를 위로할 수 있다. 절대 할 수 없는 걸 그(그녀)를 만나며 할 수 있으니까. 


얄궃게도 거짓 위에서라야 전해지는 진심


이들 삼각 관계는 지구상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적어도 영화, 드라마, 소설 등에서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관계 설정 중 하나다. '리얼리티하다'라는 말을 붙이기도 민망하다. 그럼에도 현실적이긴 하니 그런 말을 붙일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왜 이렇게 연극적인지? 왜 이렇게 연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감독의 의도가 다분히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운철과 있을 때면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은희. 연기 연습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 또한 은희에게 있는 여러 '진심' 중 하나일 것이다. ⓒCGV 아트하우스



연기는 거짓말과 다름 없다. 내가 아닌 사람을, 내가 처하지 않은 상황을 연기하는 것과 "연기하고 있네"할 때의 그 연기도 모두 그렇다. 그건 엄연히 '진실'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진심'을 전하고자 한다. 진심을 전하고자, 소통다운 소통을 하고자, 진실을 숨기는 게 아닌가. 만약 진실을 전하게 되면 진심과 소통은 쓰레기가 될 뿐이다. 운철이 은희에게 말한 궤변이 생각난다. "진심이 어떻게 진실을 이겨요?" 아마 진실이 갖는 힘이 훨씬 셀 것이다. 하지만 진심이 이기길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연애를 하다 보면, 진실을 숨겨야 할 때가 수없이 생긴다. 얄궃게도 그래야만 진심이 전해진다. 진실을 숨긴 거짓 위에서라야 진심이 전해지는 것이다. <최악의 하루>에 나오는 모든 이들이 거짓 위에서 춤춘다. 거짓 위에서 진심을 전하고자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딱 한 커플만 빼고. 다름 아닌 은희와 료헤이다. 그들은 비록 소설가와 연기자라는 거짓 위에서 진심을 전하는 걸 가장 좋아하고 잘 하는 이들이지만, 그들 사이에는 거짓이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절대적으로 진심을 위한 거짓이 존재해야 하는 건가. 


감독의 의도도 훌륭하지만 그에 맞춤복인 듯한 배우들의 열연도 최고였다. 은희, 료헤이, 현오, 운철. 3명의 각기 다른 매력과 찌질함을 가지고 있는 남자들, 그리고 그에 맞춰 마치 다른 인격인 양 변하는 은희. 은희와 현오와 운철이 한데 만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인데, 심장이 쪼그라드는데 발가락도 쪼그라드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거다. 연기 속의 연기가 서로 출동하면서 일어나는, 난감함, 찌질함, 억울함, 코믹함, 시원함 등의 온갖 감정들의 폭발이다. 그 복잡미묘함을 투박한듯 보이게, 즉 아주 섬세하게 연기를 해냈다. 이런 영화라면, 보고 또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겠다. 파도 파도 또다른 의미를 받으면서, 지루하지 않은 코믹함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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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포즈 대작전(?)은 시작부터 꼬였다. 그렇게 중요한 행사였으면 사전 답사를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거기부터 이미 문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지도로 보니 지하철역에서 금방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먼 건 둘째치고 엄청난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헥헥 거리며 오르니 바로 옆에 보이는 건물... 숨 돌릴 틈도 주지 않다니 야속했다. 


더 큰 문제는 레스토랑의 분위기였다. 그래도 프로포즈를 많이 해봤다고 하니 아늑할 줄 알았는데, 여타 레스토랑과 별 반 다른 게 없었다. 아...아... 사전 답사... 그렇게 숨도 돌릴 틈 없이 2층으로 안내되어 종업원들의 지도(?)를 따랐다. 나름 비밀스럽게 하려고 한 것인데, 방이 몇 개 있더라. 프로포즈 방이 한두 개도 아닌 몇 개가 붙어 있더라. 


어영부영 시작된 프로포즈. 마지 못해 허락한 듯한 여자친구. 말을 들어보니 옆 방에서도 프로포즈가 진행 중인지 이 방과 똑같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더란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식은 상당히 괜찮았지만, 그 가격이면 여자친구 기분 상하지 않게 훨씬 기억에 남을 만한 프로포즈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여자친구는 소박하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그런 프로포즈를 원했다. 난 나 좋으라고 나 편하라고 그런 상업적인 이벤트에 홀라당 속아넘어간 것이었다...


최악이라면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평생에 한 번 있는 큰 이벤트이다 보니 얼굴을 붉힐 수 만은 없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여자친구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여자친구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거에 의의를 가지자고. 그래서 다음부터는 돈이 아닌, 진심으로 함께 하자고. 미안하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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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심각했다. 여자친구도 지금은 웃으며 그때의 본심을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절대 웃을 수 없었다. 그건 명백히 여자친구의 나에 대한 시험이었다. 며칠 밤을 새도 풀리지 않을 시험. 하지만 그 시험은 나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우리가 사귀기 전이다. 옥신각신. 일종의 밀당이라고 할까. 우리 사이는 겉으로는 태평해 보였지만, 안에서는 태풍이 불고 있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아마도 나의 사랑을 믿지 못하였나 보다. 그땐 내가 한없이 약했으니까. 역시 약한 지금보다도 훨씬 더. 


그녀는 처음에 장난 비슷하게 시작했다. 가끔씩 자기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면 그래도 자기를 사랑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진지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그 반응이 재미 있었는지, 아니면 그 반응에 실망했는지 점점 장난이 아닌 것 처럼 물어보는 거였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 저 남자예요. 어쩌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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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그녀가 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후이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에 혼란이 밀려왔다. 참으로 오랜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도 그녀는 줄기차게 물어 왔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셨냐고. 정말로 난감했다. 살면서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앞으로 그런 생각을 할 마음도 없는데 말이다. 결국 난 마음을 다 잡았다. 그녀의 말에 감동을 받았고 큰 도움이 되었다. 


"난 오빠가 뭐든 상관 없어요. 오빠 자체가 중요해요."


그러며 내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 없다는 게 아닌가. 심지어 내가 인간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였다. 그 말에 감동받지 않을 자 누구인가.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을 고민한 뒤 나도 그녀에게 같은 말을 했다. 


"너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 없어. 너 자체가 나에겐 중요해."


당시에는 그 말에 그녀가 크게 감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게는 그게 당연한 거였으니까. 그런데 얼마 전에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게 아닌가. 그때 그게 사실 일종의 실험이었다는 걸. 물론 오빠 자체가 중요하다는 건 당시와 지금의 변함 없는 진심이지만. 


덕분에 지금 어느 커플보다 공고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다. 웃지 못할, 그렇지만 웃음이 나오는 추억인데 중요한 걸 남겨 주었다. 그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사랑이 흩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으니까.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그녀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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