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리뷰] 멧 데이먼의 <리플리>


우연히 상류층의 일원으로 보여진 '톰' 그는 특출난 재능으로 빠르게 상류층의 일원이 된다. 그렇지만 그건 분명 거짓된 삶이었으니... 그는 어떻게 될까? ⓒ미라맥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어느 파티석상. 연주가 끝나자 선박 회사를 운영하는 부호 그린리프 부부가 다가와 톰 리플리에게 칭찬을 건넨다. 그러곤 그가 프리스턴 재킷을 입은 걸 보고 자신의 아들 이야기로 넘어간다. 톰은 '디키, 잘 있죠?'하며 아는 척 하고 그린리프 부부의 환심을 산다. 


톰은 피아니스트도 아니고 프리스턴을 졸업하지도 않았다. 그는 피아노 선율사이자 호텔 보이일 뿐이다. 다만, 그때는 친구를 대신해 돈을 받고 프리스턴 대학교를 나온 피아니스트인 척했던 것이다. 그린리프는 톰에게 1000달러를 보장하며 이탈리아로 가서 디키를 설득해 들어오게끔 한다. 톰은 디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혀 모르는 재즈를 공부하고는 이탈리아로 날아간다. 


상류층이 되고 싶은 '재능'의 거짓된 삶


톰이 동경해 마지 않는 상류층의 삶 그자체인 디키. 톰은 차원이 다른 그의 사고와 행동과 여유와 씀씀이를 따라할 수 있을까? ⓒ미라맥스



영화 <리플리>는 이런저런 부차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간다. 톰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를 단 몇 장면으로 보여주고는 곧바로 새로운 거짓된 삶이 나오는 것이다. 영화가 이야기하려는 건 톰의 거짓된 삶에 있다. 비천한 삶이 상류층의 삶으로 둔갑하면서 톰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졌다. 숨어서 동경해왔던, 언제든 준비가 된, 그러나 거짓되었다는, 그래서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삶.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면 일련의 일을 벌이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 톰은 상류층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이 있었다. 뭐든 금방 따라해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능 말이다. 물론 뿌리 깊은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과는 근본적으로 이질감이 느껴지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가 절대 가질 수 없는 게 있었다. 출신 성분이라고 해야 할까. 머나먼 윗세대부터 내려오는 뿌리 깊은 가문의 성분 말이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가문, 학력, 돈, 명예, 지위 등. 디키는 선박 부호를 아버지로 두었고 돈은 엄청나게 많으며 프리스턴 대학교 출신이었다. 여기에 상류층다운 여유와 씀씀이, 차원이 다른 스케일을 소유하고 있다. 톰이 이런 것들까지 따라할 수 있을까?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짓을 하고 끔찍한 현실을 버티는 톰.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미라맥스



톰(멧 데이먼 분)은 디키(주드 로 분), 디키의 연인 마지(기네스 팰트로 분)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디키와 마지가 톰을 잘 대해주고 톰은 그들을 동경하며 잘 따랐다. 무엇보다 톰에게는 평생 다시 없을 상류층의 삶을 맛보는 나날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치 자신이 진짜 상류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을 것이다. 


어느 날 상류층 친구 프레디가 찾아온다. 그는 디키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빌붙어 사는 게 좋냐고 톰을 놀려댄다. 톰은 적의에 불탔지만 이내 좌절하고 프레디는 그런 톰을 계속 놀려대고 디키는 톰을 조금 멀리하고 마지는 그런 톰을 위로한다. 그린리프 씨와의 계약 만료가 다가오고 디키와 톰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바다 한 가운데에서 디키는 톰에게 강력하게 전달한다. 따분하고 싫증났다고, 가난뱅이 빈대에 찰거머리라고, 계집애 같다고. 다툼 끝에 톰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영화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모든 게 시작되었을 때처럼 우연치 않게 디키로 오해받은 톰은 아예 디키 행세를 한다. 그렇게 그는 디키가 되어 '진짜' 상류층이 된다. 영화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몇 장면은 심장을 쫄깃하게 만든다. 톰이 누군가에겐 톰이고 누군가에겐 디키이기 때문인데, 그 누군가들이 전부 상류층으로 서로 잘 알고 있다. 톰이 원하는 건 뭘까. 


톰은 '초라한 현실보단 멋진 거짓이 낫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 왔고 멋진 거짓을 현실로 옮겼으며 끔찍하지만 멋진 현실을 버텨 왔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를 생각나게 하는 이 생각은, 그러나 결국 진짜 상류층, 그가 바라는 멋진 삶을 주진 못한 것 같다. 그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자 피해자일까. 흔히 있는 사이코패스이자 미친놈일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사회라면...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인정하는, 참으로 슬픈 풍토다. 영화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상류층만이 상류층을 이해할 수 있고, 말이 통한다고. 이같은 풍토를 바꿀 순 없을까? ⓒ미라맥스



"과거를 창고에 꼭꼭 숨겨 두고 자물쇠를 채우고픈... 그 안은 어둡고 더러워. 그 추잡함을 들키면..." 


누구나 거짓된 삶을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많은 거짓과 비밀을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산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싶지만, 그 더럽고 추잡한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다. 톰 리플리, 그는 우리 모두의 또 다른 모습이다.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고 어느 누구라도 될 수 있다. 미친놈이라기보단 괴물에 가깝지 않을까. 


때는 1950년대 미국, 위기와 전쟁을 지나 자본주의 최대 호황의 시대를 맞이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며 상류층의 삶의 양식이 정착되었다. 비천한 이가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하기 쉽지 않을 거다. 누가 그에게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상류층이라면 돈을 던질 수 있을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나온 '리플리 증후군'은 톰이 잘 보여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데, 참으로 애잔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만약 현실이 비참하지 않다면?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건 누군가와 차별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건데, 그런 차별이 없는 사회라면? 영화에서처럼 상류층만 상류층을 인정하는 풍토가 없다면? 리플리 증후군 따위는 없을 거다. 


자만심으로 풍만한 상류층과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하류층의 더럽고 슬픈 합작품. 누구나 그것에 노출되어 있고 빠지기 쉽다는 게 안타깝고 두려울 뿐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고 아마 지금도 그런 삶을 살고 있을 거다. 내가 의도했거나, 나도 모르게. 


사회를 바꿔가는 수밖에 없다. '나'라는 중심을 확고히 세우고 '나'를 사랑하고 '나'만의 길을 걸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겠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노력한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 자칫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에겐 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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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바쿠만>


영화 <바쿠만> 포스터 ⓒ디스테이션



남들보다 조금 늦게, 중학생 때부터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만화는 나쁜 거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만화를 멀리했다. 그 때문인지 처음 접한 만화책은 다분히 교육적이었다. 아직도 장면 장면 기억이 생생한 <미스터 초밥왕>. 주인공 쇼타의 피나는 노력이 골격을 이룬다. 나중에는 회사에서 교재로도 쓰였다고 들었다. 충분히 그럴 만하다.


지금도 만화를 끼고 산다. 교육적인 내용에서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킬링 타임용으로 선회한 다음, 소년 만화를 멀리하고 성인 만화를 즐기게 되었다. 여기서 성인 만화는 소년 대상이 아닌 성인 대상의 다소 어려운 만화를 말한다. 그 일환으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즐긴다. 웬만한 소설은 저리가라 할 정도의 수준이다. 


그 사이를 미묘하게 왔다갔다 하는 만화들도 있다. 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건 맞지만, 스타일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바타 타케시의 만화들인데, <고스트 바둑왕> <데스노트> 그리고 <바쿠만>까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세 작품 다 섭렵했는데, 확실히 진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일본 만화계의 실제를 보여주다


<바쿠만>이 영화로도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기가 많다는 것도 그렇지만, 이런 소재는 흔치 않다. 내부 사람이 아닌 이상 어디서도 들어보기 힘든 것이다. 다름 아닌 일본 만화계의 실제 말이다. 이 만화는 일본 만화에 대한 만화였기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너무 재미있게 접했을 게 분명하다. 


영화로 나오면서 부침이 있었을 것이다. 방대한 스토리와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축약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 어떤 만화보다 대사가 많고 촘촘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하는 오바타 타케시의 파트너 옿바 츠구미의 원작이라는 점이 만만치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부침을 딛고 나온 영화는 상당히 깔끔했다. 


영화 <바쿠만>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영화는 시원시원하게 전개된다. 원작을 보지 않아도 누구나 알 만한 쉬운 스토리라인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게만 진행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주인공인 고교생 만화가 콤비가 만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모습, 그 와중에 비춰지는 '소년 점프'로 대변되는 일본 만화계, 소년 만화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사랑과 우정과 노력과 승리의 순간들, 그리고 자신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성장까지. 기대 이상의 것들을 얻을 수 있다. 


뜻하지 않게 마음을 졸이고 탄성을 자아내는 장면들이 다수 보인다. 재미가 쏠쏠하다. 며칠 밤을 새워 작성한 콘티를 출판사에 직접 찾아가 검토 받는 장면이라든지, 매주 '독자투표'로 바뀌는 순위를 기다리는 장면이라는지,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라는지. 특히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특수 효과를 대폭 넣어 영화 만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펜질 몇 번에 컷이 완성되고, 그렇게 완성된 컷들이 작업실 전체를 떠 다니니는 장면이 황홀하게 전개된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황홀의 깊이가 더할 것이다. 


영화 <바쿠만>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우정, 노력, 승리', 실력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


'우정, 노력, 승리'는 소년 만화의 정수를 이룬다. 엄연한 소년 만화이 원작인 이 영화에도 역시 피나는 노력과 피튀기는 경쟁을 넘어서는 우정, 그리고 달콤하고 가슴 벅찬 승리가 존재한다. 닭살도 돋고, 이 삭막한 세상에 더 이상 통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소년 만화라면 절대로 추구해야 할 것들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리고 소년 만화를 만드는 사람들 또한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삭막한 세상이다. 앞으로도 더 삭막해질 것 같다. 그런 세상에서는 어떤 것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까.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으니, 내 한 몸이나 잘 건사하며 남이 안 되길 바라고 있어야 할까. 세상이 비열하니, 비열하게 살아가지 않는 게 바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까. 


영화 <바쿠만>의 한 장면 ⓒ디스테이션



비인간적인 경쟁이 삭막한 세상을 만든 주범 중에 하나다. 이 영화에서도 비인간적인 경쟁은 끊임없이 주인공을 괴롭힌다. 아무리 그들의 꿈이 만화가라도 해도 말이다. 그렇지만 결코 비열한 경쟁이 아니다. 온갖 술수가 판치는 경쟁이 아니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경쟁이다. 물론 잔인하다. 경쟁에서 뒤쳐지면 바로 나락이다. 최고의 인기작을 발표했어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하면 만화가를 계속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정, 노력, 승리'은 결코 이상적이고 코웃음나는 단어들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잔인하리만치 실력으로만 승부가 나는 경쟁이 있다. 실력이 있어야만 우정이 있고 노력을 할 수 있고 승리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제목인 <바쿠만>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쿠만>은 극 중 주인공의 삼촌이 그린 인기작의 제목인데, 독자 투표 2위까지 올라갔음에도 순식간에 꼴등으로 전락해 연재가 중단된 비운의 작품이다. 그는 연재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머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엄청난 경쟁과 철저한 마감으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 그리고 몸의 이상이 그 이유였다. 


<미스터 초밥왕>의 쇼타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오로지 노력만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는다. 지금 시대에는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인지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바쿠만>에는 실력을 쌓는 과정이 나오지 않는다. 최고의 자리로 오르는 과정이 나올 뿐이다. 그들은 고등학생이다. 그렇지만 학교 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오로지 '만화가'가 될 꿈만 꾸었다. 그리고 앞만 보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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