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조선자본주의공화국>


<조선자본주의공화국> 표지 ⓒ비아북



북한 핵 위협, 일명 '북핵'으로 대표되는 북한의 끝없는 질주. 그를 둘러싸고 최소 한, 중, 일, 미, 러 5개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연일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다. 그럼에도 북한은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에. 대내외적으로 '우린 아직 건재하다' '우리에게 관심을 줘라' 하고 말하는 것 같다. 


북핵에 대한 관심은 일반인에게서만큼은 멀어져 간다. 수 년 전만 하더라도 북핵 실험에 마음을 졸였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 일쑤다. 그저 북한이 '또' 미사일 발사했네, '또' 핵실험을 감행했네 정도의 관심 정도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북한 자체에 대한 관심 또한 멀어져 간다. 그동안 우리에게 북한이라는 나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위협'과 동일어였으니 말이다. 


유일하게 북한에 대해 알게 되는 통로인 언론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실상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북핵만 보도할 뿐이다. 종종 기획보도로 실상을 알리고자 하지만, 이미 독자의 입장에서 안중에도 없어졌다. 우리는 북한의 실상, 북한의 일반 주민 생활을 알 도리가 없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 이후 북한의 실상


우리나라에서 북한은 오랫동안 가장 금기시된 단어이고 가장 알아선 안 되지만 한편으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이젠 아무려면 어떠냐는 식이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궁금하다. 군대에 있을 때도 북한 주민은 '적'이 아니라고 배웠다. 헌법상 한반도 전역이 대한민국 영토인 만큼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겠는가. <조선자본주의공화국>(비아북)의 출간이 반갑게 다가왔다. 


영국 출신의 두 수재 기자이자 특파원 제임스 피어슨과 다니엘 튜더가 전해주는 북한의 실상을 담았다. 최소한 내 기준으로 보아도 굉장히 희귀하고 독특하고 소중한 저작물인데,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사회'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수없이 접해 왔던 북한은 대부분 '정부'였고, 그 '사회'는 여지없이 굶주리고 헐벗고 무기력한 이들의 집합소였다.


이런 생각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것처럼 저자는 북한 사회가 굉장히 역동적이거니와 북한 주민도 우리만큼 일상적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북한도 한국처럼 '재벌과 대기업의 나라'가 되어 간다는 충격적인 말도 전한다. 1990년대 중반에 북한의 사회를 송두리째 바꾼 대기근 때문이라는 것. 최소 수십 만 명이 희생된 대참사 이후 북한 주민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송두리째 바뀐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족히 수백 만 명은 희생되었을 게 분명한 그 참사 이후 조선 백성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가게 되었다. 나라는 더이상 버팀목일 수 없었다. 대기근 이후 북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더이상 '공산주의체제'가 가지는 의무를 다하지 못했고, 주민들은 유사 자본주의체제의 시장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대기근 이후 변한 북한의 실상을 스캔하는 입문서로 더할 나위 없다 하겠다. 


우리를 흔드는 북한의 충격적 변화들


지금은 당연한 게 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말이 굉장히 이상하게 들렸었다. 그 말은 이제 북한에게도 통용되는 말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북한에서 돈이면 안 되는 게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마디로 '법 위에 돈이 있다'는 것이다. 명백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진입, 아니 거기에 허울상의 무너져가는 체제일지라도 '봉건주의제 왕조국가'의 이름을 붙여주어야 맞겠다. 


이 거대한 충격적 변화 속에 자잘한 충격적 변화들이 우리를 흔든다. 더이상 정부가 완벽한 통솔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자본주의를 장려하다 못해 직접 사업에 뛰어들어 시장경제체제로의 길을 닦는 건 충격에 들지도 못한다. 정부가 아닌 일개 개인이 사업을 한다든지, 외국 TV와 영화를 시청하고 컴퓨터와 휴대폰과 USB는 물론 초소형 SD카드와 태블릿까지 사용하며, BB크림을 바르고 스키니진을 입고 다니며 성형수술까지 감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움을 금치 못해 전혀 현실과 동떨어진 영화나 소설을 보는 느낌이다.


이보다 훨씬 많은 자잘한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일일이 다 열거하면 그 충격이 오히려 사그라들 것 같아 말을 아낀다. 충분히 충격일 줄 안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와 역학 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다. 2017년을 기해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이 취임했다. 내년이면 중국에서는 시진핑이 5년 중임제 국가주석에 새롭게 연임하게 될 것이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총재 선거가 있어 아베 신조의 교체가 유력시되고 있다. 


각국 지도자의 변화에 따라 북한에 대한 대응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결코 덮어두고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게 있겠다. 북한의 진짜 모습, 북한의 밑바닥부터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실상을 말이다. 이 책은 현 시점으로선 그에 대한 가장 완벽한(가장 최신은 아니지만) 정보를 전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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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오래된 리뷰] 우디 앨런 감독의 <블루 재스민>


<미드나잇 인 파리>와 더불어 우디 앨런 감독 경력 후반기 최대작이라 할 수 있는 <블루 재스민>이다. ⓒ인벤트디



개인 삶의 문제를 떠나 영화감독으로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업적을 쌓은 우디 앨런. 그 명성에 비해 그의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진 않았다. 우리나라에선 그 명성에 비해 흥행은커녕 개봉조차 하지 못했던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듯한데, 우연히 <미드나잇 인 파리>보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 우디 앨런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이후 얼마 전 재개봉한 2005년작 <매치 포인트>를 인상깊게 봤다. 용서받지 못할 상류층을 참으로 적나라하고 아슬아슬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50년 영화 감독 경력의 우디 앨런으로서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적당한 평을 받고 흥행했다. 그리고 2013년 <블루 재스민>이다. 


이 영화는 <매치 포인트>의 여러 요소를 이었다고 보이는데, 다분히 우디 앨런식의 풍자 코미디와 가학적이고 비비 꼬는 비판 시각이 합세해 좋은 결과를 냈다. 일사천리 막힘 없는 스토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 없이 보는 와중에, 우디 앨런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남김 없이 집어낼 수 있다. 상류층과 밑바닥 인생의 삶, 이 시대 자본주의의 몰락 과정과 결과,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얽히고설킴까지.


우디 앨런, 유럽에서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오다


<매치 포인트>,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 등으로 유럽 순회공연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우리 앨런의 첫 작품 <블루 재스민>이다. ⓒ인벤트디



남편 할(알렉 볼드윈 분)의 사업 덕분에 뉴욕 최상류층에서 살아가는 재스민(케이트 블란쳇 분), 그녀는 생각, 행동,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최상류층이다. 물론 그 기본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최상류층 일상은 하루아침에 무너진다. 다름 아닌 남편의 외도, 그리고 남편의 사업 몰락. 공교롭게도 남편의 외도와 사업 몰락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남편이 사기로 몰락했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빈털털이가 된 재스민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생 진저(샐리 호킨스 분)에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잠시 몸을 의탁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그녀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는 정반대, 너무나도 다른 삶이다. 아예 차원이 다른 삶일 테다. 그 와중에 진저와 동거를 시작하려는 남자친구 칠리(바비 카나베일 분)의 압박이 신경쓰이고, 진저와 칠리의 하찮기 그지 없는 생각, 행동, 외모에 진절머리를 치는 재스민이다. 


재스민은 계속해서 옛날 생각을 하며 혼잣말을 하기 일쑤다. 밑바닥 인생인 현재를 부정하고 최상류층이었던 과거를 생각하는 데 더더욱 몰두하는 것일 테다. 그러곤 현실로 돌아오면 머리가 아프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견딜 수 없다. 그런데 그 증상이 딱히 최근에 와서 생긴 것 같진 않다. 어쨋든 그녀는 약을 먹고 술을 마신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그녀가 바라는 것처럼 다시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 예전의 '제대로 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디 앨런은 그의 44번째 작품 <블루 재스민>으로, <매치 포인트>를 시작으로 유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그의 클래식을 제대로 선보였다. <미드나잇 인 파리>로 정점을 찍고 다시 돌아온 느낌으로, 돌아오자마자 또 다른 정점을 찍는다. 최소 2000년대 이후 그의 대표작은 이 두 작품이다. 


자본주의 위기에 맞물리는 상류층의 몰락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뉴욕 최상류층의 기막힌 몰락은, 역시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현대 자본주의의 몰락과 궤를 함께 한다. ⓒ인벤트디



우디 앨런이 작정하고 만든 듯한 <블루 재스민>, 주인공 역을 맡은 케이트 블란쳇 또한 제대로 작정한 듯하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을 메인 중 하나로 내세우며 영화를 돋보이게 했는데, 1970년대는 다이앤 키튼을, 1980~90년대는 미아 패로우를, 2000~10년대는 스칼렛 요한슨, 페넬로페 크루즈, 엠마 스톤을. 


반면 케이트 블란쳇은 이들처럼 그의 뮤즈라고까지 할 수 없지만, 영화 한 편을 책임지며 여지껏 여자에게 허락한 적이 거의 없는 가장 앞자리를 차지했다. 그녀는 우디 앨런이 표현하고자 했던 빙퉁그러진 상류층을, 말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몰락과 비극적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말하는 이 시대의 상류층이라면, 무지막지한 돈을 벌고 그에 맞는 엄청난 소비를 하며 역시 그에 맞는 부류와 어울리며 일정 정도의 기부를 통해 남을 돕는 행위를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이 상류층이라는 걸 알고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그런 삶이 모두 '사기'와 '거짓'으로 쌓아올린 것이라니. 이 시대 자본주의의 명백한 위기를 상징하는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 위기의 이면에 사기와 거짓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지금, 이는 그 확실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그와 동시에 이 시대 자본주의와 한 배를 타고 세상의 머리 위를  유유히 항해하는 상류층이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도 사기와 거짓이라는 점, 거시적으로 볼 땐 통쾌하게 다가오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서 느낀 건 결코 통쾌가 아니다. 씁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그것만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가 그렇게 좋은 영화라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이러면 어떠하리, 저러면 어떠하리'라는 진리


최상류층이었던 재스민의 삶, 그리고 밑바닥이었던 진저의 삶. 결국 모두의 삶은 맞다. ⓒ인벤트디



한 번 더 들여다봐야 할 부분은, '상류층' 재스민이 아닌 상류층 '재스민'이다. 그녀의 삶을 돌이켜보고 함께 따라가보면, 피해자인 것 같은 그녀가 결코 피해자인 것만은 아닌 게 드러난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행을 선택 '당한' 게 아니라 선택'한' 것이다. 상류층이라는 배를 내려온 게 아니라, 다른 상류층 배를 갈아타기 위해 환승을 준비 또는 대기하고자 한 거다. 피해자라 할 수 있겠는가. 


한편, 이 영화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은 진저의 삶이다. 흔히 말하는 밑바닥 인생 말이다. 그녀는 비록 없지만 전남편과 잘 지내던 시절 로또로 20만 불을 받고 모조리 재스민의 남편 할의 사업에 투자했다가 망하고 급기야 이혼을 한다. 다 큰 아이들도 있는 상황에서 역시 밑바닥 인생이라 할 만한 칠리와 사귀고 거기에 모자라 유부남인지도 모르는 어떤 남자와 사귀기도 한다. 


그녀 또한 재스민처럼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삶을 써가려 한다. 다만, 재스민과 달리 누구도 그녀더러 뭐라고 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 또는 자신에 관계된 사람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간다. 모든 면에서 품위 있는 재스민을 보는 시선과는 달리, 다른 누가 보기에는 그녀의 삶이 하등 하찮고 볼 것 없이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또한 그녀의 주체적인 삶이 누군가에게는 '가해자'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야말로 그녀를 향한 시선과 생각의 피해자가 아닌가. 


나의 눈에는 보인다. 진저와 재스민의 앞으로의 삶이. 흔히 규정내려지는 행복과 상류층은커녕 중산층의 삶과도 그리 깊은 인연이 있을 것 같진 않은 진저이지만 그녀에게 절대적 불행은 없을 것이다. 반면 어느모로나 상류층의 면면을 자랑하는 재스민은 복잡다단하고 불안하고 아슬아슬한 매일매일과 가끔 찾아오는 절대적 불행이 함께 할 것이다. 어느 삶을 '선택'할 것인가?


두 삶의 양태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거리 이상으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같은 미국이라는 진리만큼 삶에 있어서 절대적 동떨어짐과 차원을 달리함이 없다는 걸 왜 모를까. 모든 삶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그건 모든 나라를 포함한 이 세계와 이 세계를 지탱하는 많은 요소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시대 모든 삶을 규정하는 자본주의라고 다를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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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제리 맥과이어>


오랫동안 탑스타로 군림하는 톰 크루즈. 그에게 사실 가장 어울리는 옷은 로맨틱코미디가 아닐까? ⓒ피터팬픽처스



1981년 <끝없는 사랑>으로 데뷔하고선 이내 주연으로 올라서 80년대 후반에는 이미 자리를 공고히 한 배우 톰 크루즈. <미션 임파서블>을 위시한 단순 액션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 <레인 맨>이나 <7월 4일생>, <매그놀리아> 등 작품성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도 많이 찍었다. 모두 톰 크루즈에게 제격이어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더 잘 맞는 옷은 따로 있었다고 본다. 다름 아닌 로맨틱 코미디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제리 맥과이어>겠다. 그의 필모를 들여다보면, 진지한 역이 반 정도이고 유들유들한 역이 반 정도이다. 이 영화에서 그는 유들유들한 역을 제대로 선보이는 바, 직전에 찍었던 <미션 임파서블 1>이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이 영화는 톰과 함께 한 두 주연급 조연에게도 특별하다. 쿠바 구딩 주니어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와 미국 내 각종 남우조연상을 휩쓸었는데, 이후 2000년대엔 각종 영화로 최악의 남우주연상 후보에 단골로 올라갈 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르네 젤위거는 당시 무명 배우였는데, 이 영화로 단숨에 유망주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고 쿠바 구딩 주니어와는 반대로 2000년대 세계적인 여배우로 우뚝 섰다.

말랑말랑 로코와 감동적인 드라마

<제리 맥과이어>는 기본적으로 로코와 드라마와 합본이다.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인. ⓒ피터팬픽처스



능력과 외모, 성격까지 완벽에 가까운 스포츠 에이전트 제리 맥과이어(톰 크루즈 분), 누구보다 잘 나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담당하는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어떤 선수는 10대 소녀를 성추행하고, 어떤 선수는 프로잼 카드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린 아이의 사인을 거절했다. 결정적으로 어떤 선수는 몇 번이나 부상을 당했는데도 제리가 만류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제리에게 'FUCK YOU'를 날린 것이다. 제리는 스포츠 에이전트라는 처음으로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

선수들을 그저 '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지 하고 말이다. 그것이 맞다는 생각과 함께, 어느 날 그는 회사에 제출할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인간이다'라는 요지의 방대한 제안서를 작성한다. 회사에서 환대를 받는 제리, 하지만 곧 해고 통보를 받고 쫓겨나 1인 에이전트를 세운다. 그때 그를 따라온 유일한 동료는 경리과 도로시 보이드(르네 젤위거 분), 그리고 유일한 선수는 미식축구 로드 티드웰(쿠바 구딩 쥬니어 분). 

제대로 된 홀로서기를 위해선 우선 제대로 된 선수를 잡아야 하는 바, 제리는 그저 그런 무명 선수인 티드웰은 제쳐두고 NFL(미국 미식축구리그) 드래프트 1순위가 확실시 되는 커쉬맨을 잡기 위해 총력을 다한다. 이미 잡은 물고기 로드, 거의 잡은 물고기 커쉬맨. 제리는 행복하다. 하지만, 커쉬맨은 막판에 제리를 배신한다. 제리는 전에 없는 실의에 빠진다. 과연 그만을 보고 따라온 도로시와 로드의 운명은?

<제리 맥과이어>는 얼핏 <머니볼>처럼 지극히 직업적인 색채가 강하고 전문적인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말랑말랑하고 현실적인 로맨틱 코미디(제리와 도로시)와 감동적이고 진취적인 드라마(제리와 로드)의 합본이다. 영화는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현실적인 로코와 진취적인 드라마

하지만 속내는 마냥 말랑말랑하고 감동적이지만은 않다. 굉장히 현실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도 보인다. ⓒ피터팬픽처스



먼저 제리와 도로시의 로맨틱 코미디, 이들의 사랑은 말랑말랑하지만 굉장히 현실적이다. 제리에겐 잘 나가던 바로 얼마 전까지 약혼녀가 있었으며, 도로시는 아들 하나가 있는 이혼녀다. 이들이 이어지는 이유는 결코 '사랑'이 아닌 듯한대, 외로움을 극도로 잘 타는 성격의 제리가 자신이 힘들 때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 대해준 도로시에 '의리'를 지킨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회사를 나올 때 유일하게 따라왔다. 

그런 그들의 사랑이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돈보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울부짖다가 해고 당한 제리 입장에서 또다시 돈 때문에 대형 선수를 잃어버리고 찾은 안식처가 도로시일 텐데, 역설적으로 그 사랑이나 의리는 사람이 아닌 돈에 상처 받은 마음의 약일 것이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줄 수 있지만, 돈으로 받은 상처를 어찌 사람이 치유할 수 있겠는가. 

제리와 로드의 드라마는 어떨까. 역시 모든 걸 다 잃고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선수, 'SHOW ME THE MONEY'를 외쳐대는 그저 그런 무명의 선수 로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제리. 적어도 그와는 비즈니스 관계에 있기 때문에, 돈으로 받은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가능성은 있겠다. 그러기 위해선 로드이 유명해지고 그래서 고액의 연봉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그의 실력이 아닌 그의 인성. 

제리는 로드에게 더 좋은 실력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은 인성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이 지옥같은 경쟁의 장에서 실력이 아닌 인성을 요구하다니? 아무리 이미 출중한 실력을 갖고 있는 로드라고 해도 말이다. 그렇게 제리는 자신이 쓴 제안서가 맞다는 걸 로드를 통해 입증해낸다. 비단 에이전트와 선수 사이의 인간 관계뿐만 아니라,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보다 중요한 게 인간 관계라고 말이다. 

자본주의를 벗어나진 못했다

모든 건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진다. 사랑도, 인간 관계의 진전도, 성공한 이후에나 가능하다. ⓒ피터팬픽처스



로맨틱 코미디도 아닌 것이, 드라마도 아닌 것이, 직업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닌 것이, 영화는 직업인 제리를 중심으로 세 가지 주제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거기에 맞는 세 가지 주제는 돈, 사랑, 관계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주제와 소재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 '세계'는 자본주의다. 

돈이 모든 걸 지배하고, 돈이 사랑도 관계도 넘어서는 세계가 자본주의일진대, 이 영화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일침을 가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게 아니라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툭 건드리는 정도로 다가오는 건, 아마도 조금 불편한 결론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다. 돈과 관계와 사랑까지 완벽해지는 그때.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게 순서다. 내가 보기에, 돈이 가장 먼저였다. 그보다 앞서 가족의 진심어린 사랑이 있었지만 그게 경우에 따라 돈으로 환원될 수 있겠다. 그 다음이 관계였고, 마지막으로 사랑이었다. 모든 걸 완성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이 보인 것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이게 하는 '사랑'을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영화가 '자본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사랑이 아닌, 자본주의 안에서의 사랑. 물론, 이 영화가 20년 전 영화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라는 게 최절정기에 있었던 1990년대 중반에 이런 정도의 영화가 나왔다는 게 신기한 거다. 여러 면에서 유려한, 이미 1990년대를 대표하는 명작 중 하나가 된 <제리 맥과이어>. 언제라도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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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월>


소설 <세월> 표지 ⓒ아시아



2014년 4월 16일, 영원한 아픔으로 남을 참사가 발생한다.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탑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했다. 당년 11월에 결국 수색이 종료되었는데, 9명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3년 여가 지난 2017년 3월 22일 드디어 세월호가 인양되기 시작했고, 세월호 참사 3주기가 지난 4월 18일에는 미수습자 9명 수색이 시작되었다.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세월호 인양과 미수습자 수색은 나라가 바뀌고 있다는 청신호일까? 그 청신호에 맞춰, 아니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많은 관련 책들이 나왔고 나오고 있다. 사실 지난 3년 동안 줄기차게 나왔는데, 세월호의 그늘을 그린 이는 감히 없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맞춰 출간한 방현석 소설가의 <세월>은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당한 세월호 참사를 이야기 한다. 한국인 아빠와 베트남인 엄마, 그리고 여섯 살 남자 아이와 다섯 살 여자 아이. 엄마는 희생자, 아빠와 오빠는 미수습자... 다섯 살 아이만 혼자 살아 돌아왔다. 언론에서 소소하게 다뤄졌을 뿐, 많은 이들이 모를 이 이야기는 실화다. <세월>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월호 베트남'으로 검색하면 겨우 몇몇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 이 실화가, 이 소설로 그늘에서 빛으로 나올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엔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는 법이다. 나는 감히 이 실화가 그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의 그늘, 베트남 이주민 가족


소설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사는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 아니다. 이 세월호에서 희생된 엄마 린의 아버지 쩌우다. 쩌우는 베트남 까마우에서 어부로 살아간다. 딸 린이 나이 많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 한국에서 산다고 했을 때, 그는 마뜩잖아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에 대항해 항전을 벌였던 일가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딸의 행동과 결정은 자본주의 물결의 한 갈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는 한탄하고 한탄한다. 


그런 와중, 갑자기 딸 네가 제주도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농사 지으면서 아이들을 자연에서 키우고 싶다는 바람. 그런데 그 소식은 곧 여객선 침몰 소식으로 점철된다. 자본주의 물결의 한탄이 자본주의 침몰로 갈 길을 잃었다. 처음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가, '전원 구조'라는 소식에 안도하고, 곧 잘못된 발표고 사실 구조된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쩌우는 큰 딸과 함께 한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쩌우는 세상에서 가장 기막힌 축하를 받는다. 딸 린이 일주일 만에 건져 올려졌기에, 다른 미수습자 가족들에게 받은 축하였다. 그리고는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또는 못하는 것들을 간직한 채 하염 없이 기다릴 뿐이다. 탈출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딸이 거기서 죽어야 했는지, 사위와 외손자가 왜 아직도 그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지...


소설이 주목하는 건, 그리고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주목해야 하는 건, 베트남 이주민 가족이겠다. 쩌우는 세월호 참사에서 유일하게 생존자, 희생자, 미수습자 가족이다. 기뻐하면서, 비참한 부러움과 기막힌 축하를 받으며, 끔찍한 기다림까지 교차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다름 아닌 그들은 이주민. 똑같은 슬픔을 느끼고 똑같은 목숨일진대, 차별 받는다. 


세월호 참사, 그 다양한 이야기와 진실의 시작


단편에 가까운 중편, 이 짧은 소설에는 참으로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라는 당대 최대 비극이라는 층위 아래, '베트남 이주민'을 한국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 또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더 깊이 들어가 그럼에도 존재할 '차별', 한편으론 한국은 물론 베트남까지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까지. 


각 층위의 갯수와 깊이만큼 스토리의 얼개가 얇고, 그러다 보니 소설보다는 논픽션으로 읽힐 여지도 많지만, 던지는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가 워낙 많고 깊다 보니 크게 거슬리진 않는다. 오히려 목적에 충실한 글쓰기와 쉬운 문체, 군더더기 없는 전개에 빨리 읽힐 뿐이다. 그러곤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와 층위가 보인다. 


큰 사건엔 다양한 입장과 시각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명백한 한 쪽의 잘못과 한 쪽의 명예로움만으로 비춰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 전쟁이 아직까지도 계속 다양한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오는 게 그 예다. 세월호 참사는 이제 3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진실을 인양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이야기가 우리를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우린 그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진실을 마주할 필요가 있다. 


<세월>이 그 시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소설을 비롯해 일명 '베트남 3부작'을 내놓을 예정이라는데, 세월호 참사와는 또 다른 '한국과 베트남'의 다양한 이야기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우리가 결코 고개를 돌려선 안 되는 진실이겠다. 마음 졸이는 한편 작가의 행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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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singenv@naver.com Since 2013.4.16




[리뷰] <로스트 인 더스트>


더할 나위 없이 한적하게 시작되는 이 영화, 비록 단편적으로 흘러가지만 갈수록 헤어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 사이에는 작금의 자본주의가 내뿜는 악마의 향기가 뭉실뭉실.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태평하기 짝이 없는 동네, 고객이 거의 없는 은행, 느닷없이 복면을 뒤집어 쓴 두 사람이 총을 들이대며 들이닥친다. 그런데 그들 뭔가 어설프다. 반면 강도 습격을 당한 은행 직원은 태연하다. 돈은 금고에 있고 자신은 열쇠가 없다는 것. 조금 기다리니 상급자가 온다. 그들은 그를 가격해 쓰러뜨리고 돈을 훔쳐 달아난다. 강도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들이, 고객이 없으니 돈도 별로 없을 이 동네의 은행을 왜 털었을까? 이곳은 미국 텍사스의 어느 마을이다. 


한편, 신고 전화를 받고 온 텍사스 레인저스 둘.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주 관할 법 집행 조직인 그들은, 그러나 굉장히 태평해 보인다. 시시껄렁 농담이나 주고받고 은퇴를 일주일 앞둔 상사는 부하를 놀려먹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그런 그들이 고작 몇 천 달러를 훔친 은행 강도 같지도 않은 자들을 제대로 추격이나 할까? 하지만 상사는 베테랑다운 식견과 감이 예리하게 번뜩인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는 이들 4명의 2 vs 2 양상이 큰 틀을 이룬다. 이 느긋한 추격전, 그렇지만 장소는 텍사스다. 옛날 무법자가 판을 쳤던 그곳, 주민들은 모두 총을 차고 다니며 보안관이 필요하지 않은 듯 행동한다. 광활한 대지, 탁 트인 시야, 끝모를 도로로 점철된 텍사스를 보면서 느끼는 여유와 느긋함이 이들에게서도 느껴지는 이유가 그것일까. 이 두 강도의 어설픈 짓은 작은 파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될까.


영화가 이정도로 그쳤다면 일찍이 '2016년 최고의 영화'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여유와 느긋함이 누군가에게는 절망과 파멸의 나락 같이 느껴짐을 알게 될 때,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어설픈 두 강도라는 걸 알게 될 때, 헛헛함과 쓸쓸함이 들이닥치는 걸 절대 막을 수 없을 거다. 곧 텍사스의 황량함과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먹먹함이 더해져 거대한 파도를 형성한다. 영화에 엄지를 치켜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세상 위에 우뚝 서 있는 신, 아니 악마와 같은 '자본'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 황량하게 보일 수 있지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과 파멸의 나락 같이 느낄 수도.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두 강도가 왜 은행을 털었는지, 그 이유가 절실하다. 이 둘은 다름 아닌 피를 나눈 형제인데, 얼마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이 은행에 넘어가게 생겼다. 더군다나 이들은 빛더미에 앉아 있어 무슨 짓을 해도 농장이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은행 털기다. 가족도 딸린 동생 토비(크리스 파인 분)와는 달리 감방에도 갔다 온 형 태너(벤 포스터 분)이기에, 주로 그가 앞장 선다. 


자, 여기서 영화 곳곳에 보이는 팻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텍사스의 광활한 벌판을 가로지르는 도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다름 아닌 대출 안내판들이다. 빛이 있으면 담보 현금 대출을 신속하게 해준다는, 뭐 그런 것들. 아마 이 형제는 그 헤어나오지 못하는 수렁에 빠진 것 같다. '자본'이라는 거대 개미지옥에서, 세상 위에 우뚝 서 있는 신과 같은, 아니 악마와 같은 존재에게서 헤어나오려면 모든 걸 걸어도 모자르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텍사스 레인저스 둘. 헐렁한듯 집요하게, 가벼운듯 진중하게 강도 형제를 쫓는다. 그렇다. 이 영화는 아무래도 서부극인 게 확실하다. 서부개척시대가 아닌 21세기가 그 시간적 배경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 옛날의 낭만은 없다. 아니, 남아 있긴 하다. 누구나 총잡이이고, 보안관이 따로 필요 없으며,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한 광활한 대지는 여전하다. 그리고 여전히 백인이 지배하고 있다. 


대신 '은행'이라는 허울 좋은 '개자식'을 앞세운 자본이 들어왔다. 그 앞에 인디언이고 백인이고 다 무릎을 꿇었다. 은퇴를 일주일 앞둔 베테랑 마커스(제프 브리지스 분)에게 매일 '인디언'이라고 놀림 받는 알베르토가 영화를 관통하는 대사를 날린다. 두 형제의 피맺힌 강도짓 뒤에 숨겨진 치떨리게 더러운 자본(은행)의 모습보다, 알베르토의 덤덤하게 말하는 사묻힘 뒤에 숨겨진 자본의 모습이 더 악랄하다. 


"150년 전만 해도 우리 조상들 땅이었어요. 지금 보이는 모든 게, 어제 본 모든 게, 저들의 증조부들이 빼앗기 전까진. 이젠 후손 놈들이 착취하고 있죠. 이번엔 군대가 아니라 저 개자식들 손으로."


이 영화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백인'인 두 형제의 절규하는 사연보다, 알베르토로 대변되는 '인디언'의 담담한 사연이 더 와 닿게 장치를 해놓은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알베르토가 태너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이 구도는 뒤틀린다. 자신이야말로 이 자본주의 세상의 진정한 피해자라며 세상을 향해 갈긴 총에 누군가가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자가 다름 아닌 이 자본주의 세상의 '진정한' 피해자라니. 아이러니하다. 하기야,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니 그런 걸 확인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자본이 만들어낸 슬프고 외로운 괴물


자본이라는 악마와 그 악마가 만들어낸 피해자, 피해자는 곧 가해자가 되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든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피해자가 자본을 등에 엎은 가해자로 보일 뿐. 이 지옥엔 괴물이 살겠지. ⓒ메가박스(주) 플러스엠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이 두 형제다. 형보다 더 포악한 성질을 지닌 동생, 아버지를 죽여 가족을 지켜내고 이젠 돈을 빼앗고 사람을 죽여 동생을 지키려는 형,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러 떠나기 전에도 그들은 부러울 정도의 우정을 나눈다. 그 모습이 마치 마지막 전투에 나서는 전우 같다. 다신 못 볼 걸 알면서도 애써 슬픔을 감추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이는. 그들은 서부 사나이니까.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얼까. 푼돈을 털어서 뭘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건 다름 아닌 그들이 '빛더미'에 올라 앉은 돈의 액수가 생각 외로 '푼돈'이기 때문이다. 2만5천 달러 정도. 우리나라 돈으로 3000만원 정도 되겠다. 이 형제는 그 돈이 없어서 한 달에 5만 달러씩 석유가 나오게 될 어머니의 유산인 농장을 넘겨야 하는 것이고, 은행은 누구보다 빠르게 그 사실을 알고 살아생전 어머니께 접근해 대출을 받게 한 뒤 그걸 빌미로 농장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은행을 털어서 은행 빛을 갚고 농장을 되찾아 전염병처럼 퍼지는 가난의 끝없는 되물림을 자신의 대에서 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불보듯 뻔한 희생으로 말이다. 마커스와 대면하게 된 토비의 대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가난은 전염병 같죠.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지며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을 비참하게 해요. 하지만 내 자식들만큼은 안 됩니다."


이 묵직함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안타까움이 있다. 자본이 선사한 괴물일진대, 오로지 내 가족만 생각하는, 내 가족이 아닌 자는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철저한 원시가족주의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자본이 사라질리는 만무하지만, 시대는 역행하고 세상은 텍사스 들판보다 더 황량해질 것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무슨 짓을 저질러서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쯤되면 무섭고 두렵다.


우리의 훌륭한 보안관 마커스의 모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제 은퇴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 직접 찾아가 봤지만 기세등등 살벌하고 충성스러운 '집 지키는 개'가 된 그에게 쫓겨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분명 '정의'를 알고 또 외치고 있지만 자본이 만들어낸 외롭고 슬픈 괴물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따위 개나 줘버리지. 일단 살고 봐야지 않겠냐, 하고 외치는 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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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비참한 대학생활>


<비참한 대학 생활> 표지 ⓒ책세상



매주 토요일 촛불집회는 이제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그동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이들만 해도 수백만 명에 이르니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 하야 운동은 전국민이 바라는 일이다. 비단 대통령 하야뿐만이 아니다. 최순실 게이트 규명, 세월호 사건의 진상 밝히기, 사드 배치 반대, 백남기 농민 문제 해결 등 모든 현안들에서 반정부 비판의 목소리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게 대학생들이다. 지난 10월 26일,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입학 및 학사관리 특혜 의혹 등으로 시끄러웠던 이화여대에서 최초로 시국선언을 한 후 전국적으로 수십 여개의 대학교에서 연이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 그런 이들의 시국선언으로 봐야 하겠다.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시국에서 대학생은 여지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가운데에서 그야말로 시국을 이끌고 나아가며 '4.19 혁명'의 시작이 그랬고 '5.18 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그 유명한 '68 혁명'도 파리의 몇몇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내년이면 30주년이 되는 6.10 민주항쟁, 내후년이면 50주년이 되는 68 혁명, 지금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68 혁명의 신호탄이라 불리는 책의 통렬하고 강렬한 메시지


68 혁명은 잘 알려져 있지만 생소하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이라는 '시간적', 유럽이라는 '위치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군사 정권의 서슬퍼런 통치 아래에서 전 세계적으로 퍼진 혁명의 기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68 혁명의 신호탄이라 불리는 책이 출간 50주년을 기념해 출간되었다. 1966년 작 <비참한 대학 생활>(책세상)이다. 2016년 작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통렬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들어보자. 


68 혁명 이전에 프랑스에는 다양한 전위 집단 좌파주의자들이 존재했는데, 그 중 하나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다. 그들은 현재 자본주의 상품 물신성이 일상의 모든 영역을 스펙터클로 환원해 노동과 삶을 소외시킨다며, 소외의 극복을 위한 일상의 혁명을 추구했다. 이 조직과 스트라스부르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이 함께 제작하고 인쇄해 1966년 11월에 배포한 소책자가 <비참한 대학 생활>이다. 


책은 총 3장으로 이루어진, 채 70쪽이 되지 않는 소책자이다. 첫 장이 대학생에게 던지는 실질적인 메시지다. 프랑스에서 성직자와 경찰 다음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대학생이라며, 비참한 대학 생활을 철저하게 고발하며 비판하고 주장한다. 전후 호황이 낳은 소비 자본주의 하에서 대학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학생이 '연장된 미성년 시기'에 머물러 있고, 자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비판하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총체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자신만 힘들다고 칭얼댄다는 것. 


자본주의는 그런 대학생들을 '하급 관리자'가 되도록 만들며, 현재의 비참함을 상쇄시켜 줄 것 같은 미래를 보이지만 그것 역시 자본주의를 떠받드는 기둥 중 하나로 전락시키는 '비참함'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정녕 통렬한 비판인데, 그 어느 행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비참한 대학생의 소외에 대한 저항은 오직 사회 전체에 대한 저항으로만 가능하다고 일갈하고 있다. 


둘째 장은 조금 어려울 수도 조금 지루할 수도 조금 의미 없을 수도 있다. 당시 1960년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던 청년들의 저항 운동의 성과, 한계, 그리고 여전한 비판을 담았다. 프랑스의 '블루종 누아르', 네덜란드의 '프로보', 미국의 '자유 언론 운동', 소련과 동유럽, 영국, 일본에서의 운동을 언급하며 "청춘만이 처음으로 생존을 위한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내뱉으며, 일상적인 지겨움과 낡은 세계가 다양한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발산한 죽은 시간에 대항해 자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총체적 비판이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선 이론적 비판의 일관성을 갖추고 실천적 조직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고 일갈하고 있다. 


마지막 장은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낳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일상의 혁명'의 방법을 다루며 호소한다. 이 소책자가, 그리고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과 스트라스부르 총학생회가 말하고자 하는 진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역시 그 전제는 '세계의 총체적 전복을 위한 총체적인 비판'이다. 먼저 혁명운동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1871년 파리코뮌, 1917년 볼셰비키혁명, 그리고 관료주의적 노동조합과 전통적 좌파 정당, 트로츠키주의자, 아나키스트를 모두 비판한다.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비판이 아닌, 자본주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실질적 비판이라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러며 새로운 혁명운동의 주체로 노동자평의회와 그 목적으로 노동자 자주관리를 제시한다. 그들이 해야 하는 건 '상품 체계의 구체적인 초월'에 있다. 소책자의 마무리까지 날카로움과 자본주의가 낳은 소외, 그리고 총체적 비판의 깃발을 들고 있다. 다름 아닌 2년 후에 전 세계를 뒤흔들 혁명의 깃발이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삶을 바꾸자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에게는 하나이자 동일한 떼어놓을 수 없는 지침이며,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소멸, 궁핍함이 지배적인 현재 사회의 해체,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능한 자유의 통치에 도달할 때까지 함께할 지침이다. 급진적 비판과 소외된 현실이 부과한 모든 행동들과 가치들의 자유로운 재구성이 프롤레타리아의 최대 강령이고, 삶의 모든 순간과 사건들의 구성 속에서 해방된 창조성이 승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시', 모두에 의해 쓰인 시이며 혁명적 축제의 시작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일 뿐이다." (본문 중에서)


아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대학생


50년 전에도 대학생은 아이도 아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였나 보다. 그 옛날 대학생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가장 앞장서 시대를 움직인 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리도 통렬하게 비판받고 있었다니 말이다. 이 소책자를 본 대학생 치고 세상을 바꾸고자 전방위적인 비판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싶다. 한편, 50년이 지난 지금의 대학생도 그때와 다르지 않은 바 자신의 불투명한 앞날을 걱정하는 데 그치고 총체적인 비판과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생 때 세상에 대한 비판은커녕 내 자신의 불투명한 앞날을 걱정하면서 투덜대는 활동 비슷한 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열심히 수업 듣고 시험 공부 하고 친구랑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마시고 집에 와서 열심히 놀았다. 딱히 취업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취업 공부를 열심히 했었으면 그럼에도 취업하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다면 세상에 대한 비판 의식이 한층 강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 소책자가 비판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인데, 나는 그런 의식조차 없었으니 책이 비판하고자 하는 대학생 군(群) 축에도 끼지 못한다. 지금까지, 앞으로도 한으로 남아 있을 줄 안다. 


그런데 이 소책자가 대학생에게 던지는 과감하고 통렬한 비판이 끝모를 데 없다고 느껴진다. 적어도 지금 같은 시국에서는 말이다. 반드시 세상을 향한 총체적인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하급 관리자' 따위나 되어서 자본주의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될 거라는 말이 아닌가. 그게 과연 '잘못'인지, 그것이 청춘만이 할 수 있는, 해야 할 '직무'를 저버리는 것인지 의문이다. 이는 생각해볼 문제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다


소책자의 마지막 부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로지 '축제'일 뿐이다'가 던지는 메시지는 지금 한국의 시국에 통렬함 대신 희망을 던져준다. '축제', '놀이'와 같은 혁명을 우리가 시연해내고 있는 게 아닌가. 세계 만방에 떨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린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부디 이 혁명의 불꽃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한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번져, 50년 동안 더욱 가속화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일상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극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68 혁명 당시 시위가 3개월 동안 이어지자 염증을 느끼고 그 반발심리로 다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권에 득세하는 현상이 벌어진 걸 교훈삼아야 하겠다. 거기에 이 <비참한 대학 생활>이 던진 총체적 전복과 비판, 놀이와 축제의 메시지가 한 몫 했을 진데,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고수하면서 받아들일 걸 받아들여야 하겠다. 어쨌든 현 시국에, 대학생들은 이 책을 읽어야 하겠다. 여전히 우리 마음을 후벼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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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리뷰] <아메리칸 사이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21세기 엔터테인먼트


하얀 바탕으로 진한 빨간 색의 피가 흐른다. 하얀 바탕은 곧 접시가 되고 피는 곧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의 핏물이 된다. 그곳은 상류층이 즐비한 레스토랑이다. 종업원인지 셰프인지 손님들에게 요리를 내주며 코스를 설명한다. 상류층으로 보이는 손님들은 경청한다. 나만 그렇게 보이는가? 그들의 행세가 매우 지질해 보인다. 그들의 학력은 매우 높을 테고 매우 잘 살고 있으며 또 사회적 지위와 명망도 높을 테지만. 


세상에서 가장 지질한 상류층 인간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는 이처럼 메시지를 던지며 시작된다. 피와 핏물의 동질성, 상류층의 지질함. 그리고 그걸 보는 제3자의 시선까지.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크리스찬 베일 분) 또한 이 상류층의 일원이다. 그는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월스트리트 중심가 금융사 P&P의 부사장이다. 27세의 젊은이로, 학력도 높고 잘 생기고 돈도 많으며 무엇보다 자신을 잘 가꿀 줄 안다. 


패트릭은 여지 없이 초고층의 거의 꼭대기에서 근무하며, 순백색의 잘 가꿔진 집에서 산다. 그는 자신을 매우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내세우기 좋아하며, 그 이상으로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패트릭의 그런 일련의 특징들을 죽 보여준다. 


규칙적인 운동 후에 웬만한 여성보다 더 많은 스킨 케어 화장품으로 자신을 가꾼다. 그는 그런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러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 즉 아버지를 잘 둔 젊은 부사장들 모임에 참여해 그야말로 쓸 데 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축 낸다. 하지만 그들 자신에게는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하나라도 더 아는 채 하려는 것.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름 아닌 명함 자랑이다. 형압으로 팠다느니, 계란 껍질을 이용했다느니, 그 어느 것보다도 예쁜 색깔이라느니. 명함을 건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이번에 명함을 새로 장만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허세다. 그런데 패트릭 만이 각각의 명함 등급을 알아보고 혼자 손을 떨고 식은땀을 흘린다. 자신의 것보다 더 좋은 명함들을 보고서.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우월함의 증명, 세상에 대한 증오, 결국 살인까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증세(?)들을 겪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꿔서 내놓아 자랑하고 싶고 또 그 중에 제일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 그러면서 절대 지지 않고 싶고, 졌다는 걸 알고 내색하지 않으려는 의지. 일반적으로 같은 증세라도 해도 상류층이면 상류층다운 증세를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영화는 정반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류층답게 지질의 급도 높다고 해야 할까. 참 한심하다. 실제로도 그럴까.


패트릭은 같은 일원이지만 제3자적 시선을 드러낸다. 그들은 상류층이면서도 급 높은 지질함을 자랑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80년대의 유수 노래들이 많이 나오는데, 모두 패트릭이 신봉해 마지 않는 노래들이다. 패트릭은 수많은 노래들을 듣고 비평한다. 이것은 그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증거 중 하나이다. 


이 격렬한 증세들과 더불어 우월주의는 결국 살인으로까지 이어진다. 노숙자를 살인하면서 시작된 살인 행각은 여성들로 이어진다. 그러는 와중에 돈으로 산 여자들과 섹스 비디오를 찍기도 하는데, 여지 없이 나르시시즘의 모습을 보이고 자기 과욕이 극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걸 증명해 보이려는 수작이 아닌가 싶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한 장면. ⓒ21세기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중반 이후가 되면서 패트릭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에 초점을 맞춘다. 자신도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그걸 자각하지만 더 이상 손 쓸 도리가 없다. 같은 상류층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와 함께 자신보다 아래에 위치한 이들에 대한 증오, 즉 세상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어진 것이다. 그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바는 무엇일까,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겠다. 아메리칸 사이코, 즉 미국인 정신병자. 때는 80년대 냉정 막바지. 미국은 세계 패권을 거의 손에 넣었다고 볼 수 있겠다.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런 곳에서도 상류층인 이들이 누리는 호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돈, 명예, 명성, 특권 등. 거기에 영화는 약물과 여자를 추가한다. 문제는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느냐는 점이다. 여기서 교육이라 함은 '인성' 교육을 말한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곳에서 인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이 든다. 받지 않았을 거라 추측된다. 


그런 상태로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면 당연히 어떤 문제고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살인 행각은, 그것도 아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은 그렇게 생겨난 문제의 최악의 표출이라 할 수 있겠다. 인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드높고 드러내는 것만 익숙하다. 그러면서 같은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지질하지만 진지한 경쟁,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한 채 아래 부류의 이들과 행하는 자기 우월 표출 의식. 결국 경쟁과 우월 표출이 살인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트릭도 피해자일까. 이 시대가, 이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일까. 그의 행각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가 던지는 중요하지만 협소한 메시지는 더욱 중요해지고 더 확대되었다. 피해자도 많아졌고, 괴물도 많아졌으며,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도 많아졌다. 개인적으로 피해자이자 괴물인 이들은, 그것도 하류층이 아닌 상류층이 이들은 피해자임에도 가차 없이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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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느 날 이름도 성도 신이라는 그가 나타났다 <신신>


<신신> ⓒ휴머니스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들이 자본으로 수렴된다. 예를 들어 보자면 이렇다. 불과 30여년 전까지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상의 정점에 서 있는 것들, 1960년대 전 세계적인 반 사회적 열풍이었던 히피 문화, 그리고 언제나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전쟁과 테러까지. 이런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반 자본주의 문화라 할 수 있는 것까지 자본주의는 끌어안아서, 콘텐츠화 시킨다. 그리고 돈을 받고 판매한다. 무엇이든 돈이 된다고 생각하면 파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자. 쿠바 혁명의 상징이자, 반미·반자본주의의 상징인 체 게바라는 세상 무엇보다 브랜드 가치가 높은 '상품'이다. 걸프전 당시 3류 방송이었던 CNN은 전쟁을 여과없이 생중계로 방영해 단번에 세계적인 방송국으로 올라섰다. 이와 연장선상으로, 인류 역사상 주요 전투·전쟁들은 영화, 소설을 비롯한 문화 콘텐츠로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또한 작년에 개봉해서 국가적 신드롬을 낳았던 영화 <설국열차>, <변호인>은 계급혁명과 반국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런 현상을 극단적으로 끌어 올려 보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의 궁극점에 위치해 있는 '신(GOD)'까지 도달할 것이다. 과연 '신'까지 '상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답은 두말 않고 그렇다이다. 일례로,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만들어진 신>이나 멜 깁슨 감독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등은 신과 관련된 상품들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한편 엄청난 논란을 낳기도 하였다. 


자본주의는 '신'조차 상품으로 팔아먹는가?


마르크 앙투안 마티외의 그래픽 노블 <신신>(휴머니스트)은, 자본주의의 신에 대한 노골적인 소비성 시각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어느 날 갑자기 인간 세계에 출현한 '신'. 그는 성도 이름도 신이었다. 그리고 역시 신답게 전지전능하다. 이에 전 세계가 들썩인다. 정말 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즉, 신다운 능력을 보여주는 이 '신신'에 대한 관심이 폭발한다. 그런데 그에 대한 관심이 생각지도 못한 곳을 흘러간다. 진짜 신으로 설정된 순간 더 이상 신이 있다 없다의 논쟁은 필요가 없어지고,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며 동시에 신이라는 브랜드를 앞세워 수많은 콘텐츠와 상품들이 부지기수로 나오기에 이른다. 


논쟁은 신에 대한 재판으로까지 진행된다. 이 재판은 신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과연 신의 역할은 어디까지 일까? 신은 세계와 인간을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 세계에는 수많은 부정적인 것들이 판치고 있다. 왜 신은 이 세계를 구하지 않는 걸까? 왜 능력이 있으면서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 않는 걸까? 이 재판은 신의 역할, 그리고 신의 능력(과연 신은 전지전능한가?)까지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신을 이용해 상품을 만들고 있는 현상이다. 부조리와 부정적인 것들이 판치는 몹쓸 이 세상(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이 세상)에 출현한 신의 존재는 그 자체로 확고부동하고 완벽한 브랜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세계가 이를 놓칠 리는 만무하다. 출판, 전시회, 미디어, 테마파크까지. 심지어 재판조차도 신이라는 브랜드를 갖고 돈을 벌려는 일종의 쇼에 불과하다. 과연 이 거대한 쇼는 어떻게 끝을 맺을까? 


예상했겠지만, 쇼의 마지막은 가짜 신을 이용한 'I-신 이어폰'의 상품 프로모션이었다. 이 가짜 신이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상품 덕분이었던 것이다. 각계각층의 전문가들로부터 해당 지식을 바로바로 전해 들었던 '신신'은 모르는 게 없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진짜 신이 내려와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주려 했다면 인간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무엇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신'조차 상품으로 기획하여 팔아 먹는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책을 덮고 나면 어안이 벙벙하다. 


'신'의 출현에 미디어가 대응하는 법


하지만 이 거대한 쇼를 기획한 이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미디어(언론)'. 자본주의 사회는 단지 충실하게 소비했을 따름이다. 미디어는 신이 출현하자 기민하게 대처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인 것이다. 


"처음에는 '놀라운' 것으로 여겨진 신신의 증거들은 '몹시 놀라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완전 놀라운' 다음에는 '놀라 자빠질 만한'... 그리고 마침내 '신신'은 신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여기서 되짚어 봐야 할 사항이 출현한다. 미디어라고 하는 심지어 '신'까지도 조작할 수 있는 존재가 우리네 삶을 지배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살고 있는 것일까? 매일같이 접하게 되는 미디어가 작정하고 일을 벌인다면, 그것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는가?


미디어는 현실 속에서 국가 최고 기관인 대통령을 만들어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2088년과 2012년 대선 당시 SNS(쇼셜네트워크서비스)의 대표 주자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어렵지 않게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오바마가 미디어를 이용한 건지 미디어가 오바마를 이용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든 미디어가 오바마를 당선 시킨 것과 마찬가지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미 미디어는 '신'과 다름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옳고 그름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문제는 미디어가 가지는 힘이 폭주하게 될 때의 쏠림 현상인 것이다. 미디어라고 언제든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조작'을 통해 명백히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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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 ⓒ아트북스

19세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손꼽힐 정도의 전환점이 있었던 시기였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 발명은 인류의 일상 생활을 완전히 바꿔버리며 새로운 계급을 형성시켰고, 의식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은 자본주의가 횡행해 모든 걸 집어삼키며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는 가장 먼저 유럽을 강타하였는데, 프랑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가히 '불안한 시대' 그 자체였다. 프랑스의 제국주의 편승은 정해진 길이었던 것이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는 인상주의 운동이 일어나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유럽과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인상주의는 19세기 초반 감정과 상상력을 중시하던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사조인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아, 모든 전통적 회화기법을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세계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하였다. 그 유명한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세잔 등이 인상파에 속한다. 


한편 이 인상주의의 성격에 기대볼 요량으로 1880년 중반에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이 파리에 도착한다. 사실 전에도 파리에 온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화가'로서 오게된 것이다. 이들은 사실 본래 목사 지망생과 잘나가는 주식중개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불꽃이 그들로 하여금 화가로의 길을 가게 하였다. 


그런데 세계 최대의 도시 중 하나인 파리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참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들은 결국 파리를 벗어나 남프랑스의 아들로 향한다. 정확히 말해서, 반 고흐가 먼저 가서 터를 마련하였고 고갱을 초대한 것이다. 


지독한 자본주의에 의한 속물적 성격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림이 팔리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속물주의에 편협되어지고 있는 자신이 싫었다. 반 고흐의 경우, 화상인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생활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이를 타계하기 위한 방책으로 일종의 '예술공동체'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여기에 고갱이 합류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짧지만 강렬한 동거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예견되었던 반 고흐와 고갱의 파국


<반 고흐와 고갱의 유토피아>(아트북스)는 이 9주 간의 동거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향(유토피아)의 실체와 엇갈림과 실패와 파국을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반 고흐와 고갱의 관계는 "반 고흐와 고갱이 서로 다툰 끝에 반 고흐가 귀를 잘랐다." 정도의 한 줄로 알고 있었다. 또한 반 고흐의 경우는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을 통해, 고갱의 경우는 서머셋 몸의 소설 <달과 6펜스>를 통해 알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에게 정작 중요했던 아들 '노란 집'에서의 9주 간의 동거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인상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한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언뜻 봐서는 동일한 이상향을 그리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개성적인 방향'이라는 말이 말해주듯, 애초에 그들의 이상향은 같은 듯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방향을 같았다. 둘 다 파리의 지독한 자본주의에 실증과 분노를 느끼고 일종의 피신을 간 것이었다. 그 이후의 방향이 완전히 달랐을 뿐. 


반 고흐는 아를에서 예술공동체를 꿈꾸었다. 아무리 잘 나가도 가난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바꿔 보겠다는 의지였던 것이다. 온전히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이었다. 반면 고갱은 애초에 아를에 오게된 이유가 반 고흐가 아닌 그의 동생 테오때문이었다. 돈이 궁했던 그는 테오가 후원을 한다고 하는 결정적 이유로 아를에 오게된 것이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자본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자본주의를 잘 알고 행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아를은 또 다른 파리였을 뿐이었다. 반 고흐의 '원시'와는 달리 고갱에게 '원시'는 서양 세계와의 결별이었다. 파국은 시작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운명은 참으로 짓궂고 인간은 속절 없지만 예술은 위대하다


저자는 이 파국의 과정을 그들의 작품과 편지로 유추하고 기술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파국의 과정은 반 고흐와 고갱의 인생에서 그리고 미술역사에서 수많은 희극과 비극을 잉태한다. 반 고흐로서는 인생 최고의 명작들을 이 시기에 쏟아 냈고, 미술역사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신적 순간이었다. 반면, 반 고흐는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가 식어버리듯 얼마 안 있어 생을 마감했으며, 고갱은 서양 세계를 완전히 등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함께 하면 안 되는 그들이었지만, 함께 했기에 위대함을 잉태한 그들의 만남은 그 누구의 만남보다 극적이라 하겠다. 


책은 이처럼 인간과 예술과 세상을 유려하게 접목시켰다. 그렇게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파리. 그 파국의 소용돌이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함께 잘 살고자 하는 다분히 정치적이지만 지극히 순진한 생각을 가진 '바보' 반 고흐와 반 고흐와 어느 정도의 동류 의식이 있었지만 사실 반 고흐의 동생 테오의 후원을 기대하는 '속물' 고갱의 동상이몽. 운명은 참으로 짓궂고 인간은 속절 없지만 예술은 위대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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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세상물정의 사회학>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2007년 시작되어 지금은 최고의 미드(미국드라마)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평행이론'에는, 두 천재 물리학자가 나온다. 이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길 수 있을 만한 지능을 가졌지만 세상살이는 꽝이다. 자신들이 배운 이론의 창만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이 나온다. 평소에는 잘 열리던 문이 열리지 않을 때 그들은 과학적·수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지나가던 학생이 아주 쉽게 문을 열어젖힌다. 거기엔 어떠한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치 않았다. 단지 눈을 조금만 돌리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 사실은 너무 쉬워서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행동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세상과 제대로 조우할 수 없이 살아간다. 


그런데 은근히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다. 흔히 말하는 '세상물정 모르는', '머리에 피도 안 바른', '세상의 쓴 맛을 못 본' 사람들일 것이다. 아직 사회 생활을 접하지 않은 학생들, 사회 생활은 했지만 조직 생활은 안 해본 어른들, 위에서 언급한 이들과 비슷하게 평생 책만 파고 그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반면, 조직 생활은 안 해봤지만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먹고 살기 위해 안 해본 게 없는 사람들, 질곡의 역사를 헤쳐온 사람들도 있다. 


사회학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흔적


<세상물정의 사회학>(사계절)은 저자 노명우 교수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 쓴 서평에세이 형식의 문화비평서이다. 그래서인지 책은 대중서와 학술서를 오가는 느낌이다. 챕터의 형식 또한 그러하다. 무조건 읽기 쉬운 느낌의 에세이 형식으로 현재의 문화세태를 보여주는 식으로 글을 시작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대체적으로 고전 학술서를 인용한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서평도 겻들인다. 그리고나서 저자의 생각으로 챕터를 끝마치는 것이다. 


저자는 대중서 느낌의 글은 '세상으로써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 쓰고, 학술서 느낌의 글은 '세계로써의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 쓰고 있다. 그렇게 대중적인 소재를 가져와 학술적인 주제의식으로 글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고민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스스로 밝혔듯이, 이론에만 함몰되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사회학은 존재 이유가 없다는 것.


"언제나 사회학자는 세속의 존재였다. 단지 자신이 세속의 존재였음을 깨닫고 있지 못했을 뿐이다. 세속에선 특정 이론의 권위보다, 그 권위 있는 이론에 대한 해설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부각된다. 바로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 덩어리이다. 그 고민 덩어리는 어느 이론에 대한 해석과 해설보다 긴급하고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되어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세상물정 이야기들은 자그만치 25개의 챕터로 나누어 펼쳐진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명품, 언론, 종교, 성공, 섹스, 자살, 노동, 집 등. 이런 소재들을 그람시, 마르크스, 베버, 손택, 벤야민 등의 삶과 사상과 저서들로 푸는 방식이다. 자칫 이질적이고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이 책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이는 순전히 저자의 글 솜씨에 의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세상'(대중 혹은 세속)과 '세계'(학술 또는 이론)의 훌륭한 접목이 성공한 것이리라. 책에서는 이를 헤르메스(그리스 전령의 신)의 다리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학술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앞의 대중적인 글을 가져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드는 챕터도 눈에 띄었다. 반대로 대중적인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 학술적인 고전을 가져다 붙인 듯한 느낌이 드는 챕터도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그럼에도 책을 관통하고 있는 저자의 일관적인 생각들이 정말 속시원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거북하거나 실증나지 않는다. 저자는 주로 자본주의와 성장 지상 주의의 폐해, 기득권층의 교묘한 술수와 어긋난 욕망, 무지하게 흘러가는 문화세테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실명까지 들어 매몰차게 비판할 때는 희열까지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개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 사회에 대한 비판과 질책이 이어진다. 사회의 짐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현재의 세태를 두고 볼 수 없다는 고민의 흔적 또한 엿보인다.


세속을 위하여 썼지만, 세속으로 뛰어들지는 않는다


한편 비판을 하며 깊숙히 숨겨왔던 현실의 속살을 함께 끄집어내곤 하는 장면에서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현실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 중에는, 시궁창같은 현실에 맞대응하기 싫어서 피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 현실을 증오하며 격렬하게 부딪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하기도 하고 부딪히기도 하며 살아간다. 저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 즉 사상이나 신념을 딱히 갖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내놓은 것 같다. 일단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겉모습 뒤에는 이런 추악한 본질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그런 뒤 문제의식을 내비치는 것이다. 


"상식이 바람직함을 갖추면 양식이 된다. 하지만 상식은 양식보다 힘이 세다. 권력자들은 상식에 대한 대중들의 믿음을 이용해 정치를 하기에 상식적인 말을 늘 언급하지만, 상식에만 머물 뿐, 상식으로부터 양식으로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상식을 이용하는 세력과 상식을 교정하려는 세력이 싸움을 벌일 때, 보통 상식을 이용하는 편이 승리한다. 상식을 자극하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보수정당은 '서민'의 표를 얻고, 경제정의를 외치는 진보정당은 빈민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분문 중에서)


하지만 더 이상 들어가지는 않는다. 저자는 직접 시민들 사이로 뛰어든 보들레르를 비판한다. 직접 경험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겠다는 보들레르의 목적이 실패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지루하고 딱딱한 이론서를 쓸 생각도 없었지만,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가서 경험하고 고발하는 르포를 쓸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조금은 아쉬운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이론이나 학술적인 느낌이 더욱 많이 들고, 대중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들을 취합함에 있어서 완전히 나의 얘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선택한 소재나 문제의식이나 풀어가는 글이나 속시원한 비판 모두가 마음에 들었지만, 나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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